세종이라는 시명이 주는 한국어적인 이미지를 살려 동명을 비롯한 시내 지형지물들의 이름으로 순우리말을 채용하자는, 과거 최민호 전 행복청장(현 세종시장)의 기획으로 하여금 세종시의 동명에는 순우리말 단어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나는 순우리말을 지명으로 채용한 것 자체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명으로 채용된 단어의 의미를 따져보았을 때는 '지명다운 지명', '깊이 있는 지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고운, 아름, 새롬, 보람, 다솜, 이런 단어들은 비록 그 뜻이 좋을지라도 뜻이 너무 추상적이고 단순하여 지명으로 쓰기에는 깊이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순우리말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지명들은 동명보다는 아파트 단지에 붙는 마을명(XX마을)에 더 많이 채용되었다. 예를 들면 도램마을은 지형이 코뚜레를 닮았다고 하여 뚜레 마을 -> 도램말이라고 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이는 비교적 구체적인 의미가 있으며, 옛날부터 구전된 이름으로 역사성도 가지고 있다.


지명답지 못하게 느껴지는 지명 중에서도 가장 문제인 것을 꼽자면 바로 '해밀동'이다.

'해밀'이라는 단어는 정체가 불분명한 단어이다. '해밀'은 당초에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라고 알려진 단어이다. 하지만 '해밀'이라는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돼있지 않으며, 국립국어원에서는 '해밀'이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쓰여온 바가 없는 근원 불명의 단어라는 답변을 내놓은 바가 있다.

이러한 소위 '가짜 순우리말'이 한둘이 아닌 것으로 볼 때, 과거 순우리말 열풍이 불던 시기에 누군가가 창작하여 유포한 단어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사용하여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행복청이라는 정부기관에서 순우리말을 사용하겠다고 결정을 했으니, 순우리말을 가장 잘 아는 정부기관인 국립국어원에 도움을 구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구전 지명이 아닌 행정상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행정지명에 이 단어가 쓰여버렸고, 동명을 바꿀 계획이 없는 이상, 세종시의 지명으로서 '해밀'의 의미를 새로 부여할 필요가 있다.

당초에는 세간에 알려진 뜻풀이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대로 '해밀'이란 단어를 차용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용법 그대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다른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해밀을 '해'와 '밀'로 분석해보자. '해'가 천체의 일종으로 하늘에 떠서 보이는 그것을 말함은 확실하다. '밀'은 명사 '밀'이나 동사 '밀다'와 연관지을 수 있는데, 명사 '밀'이 날이 개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동사 '밀다'는 '해'와 결합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뜻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날이 개는 것을 뜻하려면 '해가 비구름을 밀어내다'라고 풀이하면 된다.

그러나 '해밀'을 '해가 비구름을 밀어내다'라는 뜻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다소 어색한데, 여러 가지 통사적 문제들을 차치하고도, '비구름'이라는 객체를 끼워야 완벽한 해석이 되기도 히고, 대체 왜 해밀동이라는 동네를 '해가 비구름을 밀어내는 것'과 연관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세종시의 동명 대부분이 지명과 실제 지역의 연관성이 없는 걸 생각하면 그냥 여기까지 하고 넘어가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해밀'에 대한 더 좋은 풀이를 제안한다. 바로 산을 끼고 있는 해밀동의 지형과 연관짓는 것이다.

원수산은 세종시 동 지역에서 중심 되는 산이다. 해밀동은 원수산의 북측 기슭에 자리한다. 대한민국은 북반구에 있으므로, 산의 남측이 양지가 되고 북측이 음지가 된다. 즉 해밀동-원수산-해 순으로 배열된다. 이를 해밀동에서 본다면, '해가 산 뒤에 서서 산을 밀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해가 대낮에 남쪽에서 뜨기 때문에, 대낮에 해가 뜬 것을 본다면 산 위로 해가 뜬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고 '산 위로 해가 내밀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해밀'의 새로운 의미로 '해가 산을 밀다'나 '해가 산 위로 내밀다'를 삼으면, '해밀'의 의미가 더 직관적으로 변하면서도, 산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지형 특성까지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비구름'과 비슷하게 '산'이라는 객체가 단어 속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지만, 애초에 지명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 산은 굳이 명시되지 않아도 비교적 자연스럽다.



정리하자면

'해밀'의 새로운 의미는

1. '해가 비구름을 밀어내다'

2. '해가 산 뒤에서 산을 밀다'

3. '해가 산 뒤에서 위로 내밀다'

정도로 제안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