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피폐물 채널

 

첫 사랑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 속의 울림, 빛나는 외모, 뛰어난 능력 등.


 


 내 첫사랑은, 너는 내게 구원의 형태로 나타났었다.


 


 날 둘러싸고 윽박지르던 아이들. 어쩔 줄 모르고 눈물을 터트리는 나. 그리고


 


 “야, 뭐 재밌는 거 하냐? 나도 껴줄래?”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아이들 틈새를 비집고 나와서 나와 아이들 사이를 가로막은 너. 술과 담배 냄새가 나는.


 


 


 


 어릴 적부터 나는 다른 애들에게 괴롭힘을 받기 일쑤였다. 집안은 좀 사는 편, 공부는 꽤나 잘 하는 편. 그리고 언제나 구석에 처박혀 책만 읽는 조용한 아이. 강압적인 집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들,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선생.


 


 모든 조건이 날 괴롭혔지만, 그 때 너만이 유일하게 나를 구원해주었다.


 


 “별로 재밌지도 않은 거 하네. 야, 다 꺼져. 귀찮으니까.”


 


 우리집과는 다른 환경이지만, 부모의 보호가 없는 것은 동일한 그 여자애라 느껴지던 너.


 


 “그리고 너도 문제다, 야. 주먹 한 번 휘두르는게 그리 어렵냐?”


 


 술담배에 절은 부모 때문에 옷에서 술담배 냄새가 나던 너.


 


 웃기게도, 그런 환경과 달리 ‘화련’이라는, 정말 화려한 이름을 가진 너.


 


 나는 그 때 빛을 보았다.


 


 


 


 “있잖아, 그 때, 도와준 거, 고마웠어...”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맙다고 자꾸 그래. 부담스럽게.”


 


 그 뒤부터였다. 내가 너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게.


 


 “있잖아, 저번에 보니까 너 숙제 안 했던데, 이거, 내가 써 왔으니까...”


 


 “됐어. 몸으로 때울거야. 맞는 건 익숙해.”


 


 “아니, 맞는 게 익숙하면 안 되는데...”


 


 그냥 좋았다. 날 구원해준 그 첫 순간부터, 언제나 너와 대화할 때는 마음 속에 무언가가 떨리는 느낌이었다.


 


 “있잖아, 넌 꿈이 뭐야? 미래에 뭐가 되고 싶다, 이런 거 있어?”


 


 “나? 난 배우. 화려한 그... 빨간 장판... 그 뭐라 그러지?”


 


 “레드카펫?”


 


 “응, 레드카펫을 밟고 카메라에 찍히고, 이런 거 하고 싶어. 내가 어떤 모습인지는 아무도 모른 채로, 내 연기에 모두 박수치고, 환호하는거.”


 


 시덥잖은 얘기도 하고, 꿈을 얘기하기도 했다. 지금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현재는 너무나도 시궁창이라서. 나는 부모의 압박에 짓눌렸고, 너는... 평소에 하는 것을 보면 나와 다르지 않을 성 싶었다.


 


 


 


 “있잖아, 우리...”


 


 “넌 가끔 보면, 말을 꼭 ‘있잖아’로 시작하더라?”


 


 “아, 그, 그래? 고칠까?”


 


 “됐어. 그냥 신기해서 그랬지.”


 


 시덥잖은 대화가 좋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좋았다.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그냥, 그 모든 게 좋았다.


 


 “어쨌든, 왜?”


 


 “아니, 저, 그, 그냥...”


 


 지금처럼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더 나가기가 무서웠다. 지금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더 앞으로 나아가면, 더 좋을 테지만, 나아갈 수 있을 지 몰라서.


 


 “풉. 뭔 말이 그래.”


 


 


 


 사실, 너도 날 의지했으리라 생각했다.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야, 최화련. 너 이게 무슨 냄새냐?”


 


 “엄마가 술 먹다가 제 옷에 흘렸어요.”


 


 이런 일이라던지


 


 “야, 화련! 어린 년이 벌써부터 담배냐?”


 


 “아니, 저 안 피웠어요! 아빠가 심부름 시키고 제 앞에서 피워서 냄새 밴 거에요!”


 


 이런 일이라던지


 


 “가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도망갈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 앞에서 울면서, 반팔 티셔츠로 가려지지 않는 멍을 억지로 소매 부분을 끌어당겨 가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리 느꼈다.


 


 


 


 “꿈... 연습해볼래?”


 


“응?”


 


“아니, 내가... 그, 봉사활동 다니는 데에서...”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애들한테, 동화 읽어주구... 그런 거 있는데...”


 


 가기 싫다고 부모님에게 투정부리던 그런 곳에


 


 “너, 연기 연습도 하고 싶다고 하구... 그러니까, 같이...”


 


 그저, 둘이 있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제안을 건넸고


 


 “응? 뭐, 네 얘기면 괜찮겠지, 뭐.”


 


 우습게도, 쉽게 너는 넘어왔다.


 


 


 


 “그래서, 마녀는 물어봤어요. 그래... 대신 조건이 있다...”


 


  내 생각보다 더 성공이었다. 사실, 성공이라 하기에도 좀 애매하지만


 


 “너의 목소리를 내놓아라... 그러면, 네게 다리를 주마...”


 


 너는 의외로, 아이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기에, 사실 내가 원했던, 나와의 친분을 쌓는 것은 더 멀어진 게 컸다.


 


 


 


 “그... 재밌어?”


 


 “재밌어! 고마워! 너 덕분에, 나도 이런저런거 경험해봤어!”


 


 내 흑심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너와 친해지기 위해서였다고는 도저히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다행이다. 나 혼자서 다니기는 좀 외로웠거든.”


 


 그런 말로, 다음에도 너와 같이 가고 싶다고 얘기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이런 나날이 지속되길 빌었다.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다른 애들은 네게 관심이 없었고, 학교 선생님들은 나보고 공부에나 집중하라고 하셨다.


 


 순종하는 아이였던 나는 그 말에 따라 공부했다. 미래를 위해서, 내 성공을 위해서.


 


 커서 어른이 되면, 네게 꼭 내 마음을 전해야지. 성공한 사람이 되면, 네게 꼭 은혜를 갚아야지. 커서, 성공해서, 지금과 달라진 내가 되어서. 지금은 능력이 되지 않으니까.


 


 너를 기억조차 하는 지 의심스러운 내 또래들 사이에서, 나는 오롯이 너를 기다렸다. 


 


 


 


 1년이 지났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다.


 


 나는 너를 기다렸고, 너는 다시 돌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닌 채로.


 


 


 


 고등학교에서 처음에 널 다시 발견했을 땐, 네가 아닌 줄 알았다. 염색한 머리, 목덜미에 보이는 문신, 피어싱이 되어있는 귀, 갈라진 혀 끝. 어린 시절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명찰이 아니었다면 너라는 생각조차 못 했을 모습이었고, 명찰을 보고 나서도 너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으니.


 


 네 목소리를 듣지 못 했다면 너라고 믿지 못 했겠지.


 


 너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자애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남자애들은 네게 천박한 농담을 건네고 있었고, 너는 거기에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네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날 알아보지 못할까 무서웠다. 내가 아는 너와 너무 달라서, 혹시나, 정말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생각이 아니라 부정이었긴 했지만. 네가 아니길, 내가 기억하는 네가 지금 보이는 너와 다른 사람이길 빌었다. 더 최악인 것이 내게 닥쳐올 것도 모른 채로, 나는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고,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너를 필사적으로 찾기 위해 헛된 노력을 거듭하고 또 거듭했다.


 


 


 


 네게 도는 소문은 더 최악이었다. 매춘을 한다는 소문, 매춘해서 얻은 돈으로 술과 담배를 산다는 소문. 불량스러운 남자애들 사이에서 그렇게 살아나가고 있다는 소문.


 


 소문이 사실인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된 그 날, 나는 집에 와서 한참 울었다. 너는 한참 늙은 아저씨에게 돈을 받고 눈웃음을 보내고 있었고, 근처 모텔로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네가 협박받아 그런 것이라 믿었다. 나는 네가 네 의지로 그런 게 아니라 믿었다. 나는,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 믿었다. 너를 비웃던 다른 친구를, 너와 같이 다니던 남자가 두들겨 팬 뒤, 네가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웃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내가 은혜를 갚아야 할 너는 이 세상에 없어졌다고,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나와 가끔 얼굴을 마주칠 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가는 너를 보면서, 내 모습이 어릴 적과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그럼에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 너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너를 찾았다. 내가 보이는 네 모습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를 찾았다. 너의 과거를 찾았다. 너와 비슷한 다른 사람을 찾았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 힘든 현실에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너를 찾았다.


 


 너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너도 너 같지 않았다.


 


 


 


 현실을 믿지 못한 상태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아는 네가 아직 남아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너를 찾는 것을 그만두었고, 네 대체라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어릴 적 고통 받는 나를 구해준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모든 것을 적어도 네 대체에게 해주려 생각했다.


 


 대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나는 다시 너를 찾아야 했다. 네가 없었다면, 어릴 적 내 기억은 추억이 아닌 무채색 덩어리였을 테니까.


 


 마지막 용기를 짜 내야 했다. 어릴 때부터 단 한 순간도 용기가 있었던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용기를 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너와 남자애들이 뭉쳐있는 곳에, 나는 벌벌 떨면서 네게 다가갔다.


 


 “... 시간 좀 내 줄래?”


 


 “숏은 20만 원, 하룻밤은 30만원.”


 


 


 


 낄낄거리는 다른 남자애들의 웃음 사이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네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용기를 내자, 놀랍도록 쉽게 너와 대화 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사실, 제일 걱정인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는지였다.


 


 “오랜만이네. 옛 정 생각해서, 공짜로 해 줄까?”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버렸다. 무슨 심정인 지는 모르겠다. 네가 날 기억해줘서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너무나도 변해버린 너에게 충격을 받아서 그래서였을까.


 


 


 


“옛날부터 널 좋아했었어. 네가 날 구해줬던, 그 때 그 순간부터.”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 알아.”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말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자와 여자. 단 둘이서. 술의 힘을 빌려서, 너무 늦게, 이제서야 간신히 할 수 있던 말들.


 


 “... 그래서... 지금...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너에게 이 자리를 권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지금 네 유혹을 거절하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의 말에, 너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뒤,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소. 그 미소. 나를 향해오는 너의 미소. 이 미소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꿈에서도 나오던, 너를 보지 못 한 동안 계속 꿈꿔왔던 너의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너는 그런 미소를 지었다.


 


 “은근 순정파네, 너. 생긴 건 전혀 아닌데.”


 


 너의 웃음에 나는 또 다시 어쩔 줄 모르게 되어서,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손에 든 소주잔만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늘 그랬다. 네가 나를 붙잡고 울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미소를 지을 때도 그랬고, 내가 너를 위로한답시고 나의 집안과 미래를 얘기할 때 너의 웃음도 그랬다. 너의 행복에, 나는 늘 어쩔 줄 몰랐다.


 


 ... 어릴 때는 그랬었다.


 


 “음... 그래. 너랑은, 아닌 것 같아. 지금, 너랑은 안 할래.”


 


 방에 가득한 빈 술병. 넘쳐 흐르는 공허한 분위기. 후회할 것을 느끼면서도 행동하는 나와 너.


 


 나는 그렇게, 너와 단 둘이 있던 유일한 밤을, 오로지 술 만으로 날려버렸다. 아니, 날렸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너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뻤으니까.


 


 


 


 사실 나름 기대했다. 네가 그 순간부터라도 다시 마음을 고쳐잡고, 다시 나와 함께 하지 않을까. 다시, 나와, 어릴 때처럼 같이 다니지 않을까. 다시, 그 패거리에서 나와서 나와 같이... 다시... 나와...


 


 


 


 그리고 내 꿈은 다음 날 부터 박살났다.


 


 “아 걔? 줘도 못 먹는 애는 내 쪽에서 사양인데?”


 


 다른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로 웃던 너. 나를 힐끔거리며 웃는 남자들.


 


 나는 너와 네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중학교 때, 네가 실종되었던 그 때 내가 너를 더 찾았어야 했을까.


 


 고등학교 때 엇나가던 너를 내가 꼭 잡아줘야 했을까.


 


 시간을 돌려서 너를 붙잡아주고 싶었지만, 너를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로, 너를 등진 채 집으로 뛰쳐들어왔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어릴 때부터 널 좋아한 게 그렇게 잘못 된 일이었을까. 너에게 구원받은 내 인생이 지금 네게 그렇게 하찮게 보여서 그럴까. 애초에 네게 구원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메스꺼운 속에 다시 술을 부어 넣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네게 버림받고, 네게 비웃음당한 오늘 일을 기억하기 싫어서. 어릴 때부터 가져왔던 내 순정이 짓밟힌 것을 믿기 싫어서.


 


 


 


 내게 남은 마지막 도피처는, 내가 어릴 적 늘 너에게 얘기했었던 해외였다. 언젠가, 우리 집안에서 널 반대한다면 내가 널 데리고 꼭 외국으로 도망가겠다고. 네가 한국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해진다면, 내가 널 데리고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고.


 


 너를 위해서 나는 열심히 공부했었고, 해외 유학의 길은 늘 열려 있었다. 너와 같이 있기 위해서 나는 해외 유학보다 한국에서의 공부를 택하려 했지만, 너와 같이 도피하기 위해서 언제나 다른 길을 열어두었고, 너에게서 도망가기 위해서 나는 다시 해외로 눈을 돌렸다.


 


 모든 게 아이러니했다.


 


 나는 너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너에게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나는 너에게 비웃음거리였고, 어젯 밤 일은 정말 꿈처럼 지워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도피처가 필요했다.


 준비는 순조로웠다. 나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고, 출국 전 날까지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술을 먹고, 토하고, 울고, 다시 술을 먹는 일의 반복. 부모님은 나를 걱정하셨지만, 현실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외국으로 도망가기 전에는, 술기운으로 현실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어서.


 


 꿈 속에서도 나는 너를 보았다. 제정신일 때는 나를 비웃던 네가 떠올랐고, 꿈 속에서는 미소짓던 너를 보았다. 내 모든 시선이 너를 향했고, 나는 억지로 술로, 외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외국으로 갈 수 없었다. 기상 악화로 인한 결항 때문에.


 


 다른 날의 비행기 표는 온통 매진이었다.


 


 


 


 취기 때문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너를 찾아 헤메었다. 어릴 적 너와 같이 놀던 놀이터, 네가 나를 구해줬던 초등학교, 같이 봉사활동을 갔던 고아원.


 


 거기서 다시 널 볼 줄은 몰랐다. 고아원 앞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너를. 편지봉투 하나를 쥔 채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 지 모르겠다. 나는 벌벌 떨었고, 경찰과 119를 불렀고, 너의 자살이 판명되었고, 경찰은 내 손에 편지봉투를 쥐어주었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적힌.


 


 


 


 벌벌 떨면서 나는 편지를 폈다.


 


 


 


 ‘나를 버린 엄마에게.


 엄마. 내가 중학교 때 나를 버린 엄마. 엄마가 도망간 그 날, 아빠는 나를 강간했어. 술에 취한 채로, 나를 때리는 아빠 앞에서 나는 무력했어. 그게 너무 억울했어. 집에 갇힌 채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 하는 채로,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게 너무 싫었어. 그 날, 결심했어. 모두에게 기억되겠다고.


 엄마. 기억나? 내가 배우가 되고 싶어했다는거? 어릴 때 좋은 친구를 만나서, 그 꿈을 잠깐이나마 꿨었거든. 그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어.


 아빠 때문에 나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게 너무 억울해서, 아빠가 만취한 채로 뻗은 날 나는 아빠를 칼로 찔렀어. 그리고 결심했어. 절대로,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겠다고.


 돈이 없었어. 나는 몸을 팔았어. 나쁜 남자들은 콘돔을 쓰지 않겠다고 했고, 나는 그에 기꺼이 응했어. 나 혼자 지옥에 떨어지기 싫었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나처럼 힘들게 만들고 싶었어.


 매춘을 하고, 그 사람들의 연락처를 저장했어. 내가 죽는 날, 모든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보내기 위해서. 당신도 나처럼 고통받다 죽을 거라고. 한참 더 나중에 꼭 그러려고 했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어.


 단 한 사람. 좋게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났어. 어릴 때 친구. 하지만, 난 멈출 수 없었어. 그래서 그 친구를 떨쳐냈어. 그 친구만큼은 나를 잊어주길 바라서. 그리고, 앞으로 그 친구 인생에 내가 나타나면 안 되어서.


 그래서 오늘 죽기로 했어. 이제 나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나는 잊혀지지 않겠지. 엄마도, 내 편지를 읽고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엄마도 날 버린 나쁜 사람이니까.‘


 


 


 


 두서없는 내용의 편지를 읽은 뒤, 나는 편지봉투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여자가 받았고, 나는 너의 어머니가 맞는지 확인한 후, 너의 죽음을 알렸다.


 


 


 


 네 장례식장엔 네 엄마가 있었다. 슬픈 기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부조금을 걷고 있었고, 나는 내 용돈을 모조리 넣은 통장을 주었다. 네 엄마는 내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울지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 한 채로 멍하니 나는 장례식장을 나서려 했다. 그리고, 남자 수십명이 화가 잔뜩 난 채로 씩씩대며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우지끈 거리는 소리와, 남자들의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들렸다. 부숴지는 화환들, 더러운 창년이라고 욕하는 소리, 자기 남편과 굴러먹은 년을 보러 왔다는 여자, 혼돈이 가득찬 그 곳을 등지고 걸어가면서도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 지 모르겠다. 뉴스엔 네 장례식을 방송하고 있었다. 조문객들의 행패가 낱낱히 방송되고 있었고, 인터넷에서는 너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남자들의 욕설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술을 마실 생각도, 무언가를 할 생각도 하지 못 하고 멍하니 TV를 보다가, 까무룩 잠들기를 반복했다.


 


 


 


 “네, 어릴 때부터 꿈이었죠. 이렇게 레드카펫 위에 서는 거요. 배우로서 영광이죠.”


 


 그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멍하니,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문득, 어제 TV를 켜 둔 채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TV에서, 한 여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좋은 작품을 주신 감독님과, 같이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감사하죠. 아, 절 믿어 준 가족들도요. 엄마, 아빠, 사랑해!”


 


 그 순간,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 하다가, 그 순간이 되서야, 그제서야 나는 울 수 있었다. 그제서야 널 떠나보낸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 한 길을 걸어간 다른 사람을 보고 나서야, 네 절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현실이 가슴에 박혔다. 내가 너를 가슴에 품었지만, 너는 나를 떠났다는 현실이.


 


 첫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첫 사랑은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





p.s. 옛날에 다른 데 공모전에 썼던 거, 탈락한 김에 걍 여기에도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