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았던 응석받이 영애 후순이가 있어.

그런 후순이에게는 소꿉친구 후붕이가 있었는데 주로 후순이가 선을 넘지는 않도록 중간에서 잘 조율하며 최적의 결과를 내는 집사 같은 존재였지.

다행히 후순이가 높은 귀족집 영애로 태어나 학문이나 교양, 예절과 같은 부분에서는 극히 평균 혹은 그 이상의 지적 수준이 있어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어.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무조건 자기 잣대로만 다 하려는 성향 탓에 감성과 감정에 대한 지적 능력은 심히 떨어지는 수준이었지.

선천적으로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었다고 해도 옳을지 몰라.

그래서 응석받이로 자란 후순이니만큼 그녀의 유모도 메이드도 가정교사도 그녀의 고집을 쉽게 꺾지 못하지만, 바로 이런 후순이가 유일무이하게 신뢰하며 인격적인 존중을 보이는 대상이 후붕이인 거임.

물론 그렇다고 후붕이가 후순이의 뜻을 꺾을 수는 없어. 후순이가 금목걸이가 갖고 싶다고 하면 그건 꼭 가져야만 해.

후붕이의 역할은 이제 이 금목걸이를 후순이에게 갖다 바치되, 그 과정을 늘이고 비틀어서 최대한 탈 없이 가져올 수 있도록 후순이를 설득하는 거야.

쉽게 말해 '나 지금 당장 저거 갖고 싶어!' 에서 '저거 갖고 싶어!'는 후붕이에게도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지만, '지금 당장'까지는 후붕이가 어떻게든 변형시킬 수 있는 거지.

당연히 후붕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마저도 손댈수 없는 거고, 사실상 후순이에게 감정과 감성의 미덕을 가르쳐 줄 유일한 희망이 후붕이인 것이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 후순이는 후붕이와의 사이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감정에 둔하고 무지한 후순이는 이게 뭔지도 잘 몰라.

그냥 후붕이랑 있으면 기분 좋은 감정이 든다는 것만 아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후붕이랑만 있으려고 한 거지.

아마 평소 같으면 후순영애 짬밥만 수 년을 먹은 후붕이가 눈치를 채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친절하게 가르쳐 줬을거야.

그런데 때가 안 좋았어.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젊은 남성들은 징집을 당해 군에 모집되어야 했거든.

거기다 후붕이의 고향 마을은 최전선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더더욱 후붕이의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지.

결국 후붕이는 제대로 된 인사도 약조도 하지 못한 채 후순이를 두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쟁터를 향해 떠났어.

당연히 자신한테 행복함을 안겨주는 후붕이가 사라지자 후순이는 분노가 치밀어올랐고, 당장 후붕이 가져오라고 매일같이 땡깡을 부리며 화를 냈어.

그리고 이 분노는 감히 자신을 버린 후붕이에게도 향했고, 후순이는 자신의 고삐를 쥘 수 있도록 허락한 유일무이한 사나이를 향해 들리지도 않을 독설과 발악을 퍼부었지.

아까도 말했듯 후순이가 제법 높은 작위의 귀족인지라 후붕이 하나쯤 빼 오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후붕이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났다는 거였어.

어차피 후붕이의 힘만으로는 피할 수 없던 징집인 것은 사실이지만 후붕이 스스로도 고향을 지킬 의지가 있었던 탓에 순순히, 아니 어쩌면 군대에서 원한 것 보다도 훨씬 더 다급히 전장을 향해 떠난 것이지.

그래서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국방의 의무는 손쉽게 꺾을 수 있었던 귀족가의 권력은 후붕이 개인의 애향심은 꺾지 못했고, 그래서 제법 길다면 긴 시간인 2개월 만에야 후순이는 후붕이를 볼 수 있었어.

다만 슬프게도, 후붕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어.

사실 후붕이는 거의 입대와 동시에 다시 후순이 곁으로 돌아올 뻔했지만, 자기 고향 사람들이 전부 안전한 곳으로 잘 대피했는지를 직접 제 눈과 귀로 확인하고자 했던 후붕이의 의지를 군대의 그 어떤 장교도 꺾지 못해 결국 군에 남았어. 사실상 자진입대지.

당연히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후순이가 아니었기에, 해당 장교들은 매일매일을 후순이의 원격 압박으로 고통받아야 했지.

그 와중에 후붕이는 열심히 그리고 잘 싸워서 훈장까지 받고 있었고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교전 중 후붕이의 한쪽 다리가 적군의 대포알에 깔려서 떨어져나가 버렸어.

그 날도 후순이의 협박 편지에 기가 빨리던 장군은 이에 옳다구나 싶어 헐레벌떡 명예 제대장을 준비해서 후붕이를 후순이에게로 돌려보냈어.

사실 후붕이가 은근 에이스여서 후순이만 아니었어도 제대로 간호도 받고 장교들한테도 이쁨받았을 텐데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지.

결국 제대로 처치하지 않은 치명상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후순이 품까지 오던 도중 세상을 하직하게 된 거야.

분명히 후붕이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데 후순이는 전혀 기분이 좋아지지가 않아.

오히려 두 눈에서 피가 흐르도록 눈물만 흘러.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고 목에서는 꺽꺽대는 소리만 나면서 계속 울기만 하는 거야.

한참을 우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나.

바로 후붕이가 떠나자 자신이 그에게 퍼부었던 분노의 독설들이었지.

물론 후붕이는 그걸 듣지도 못했지만, 어째선지 그 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면서 바로 옆에서 소리치듯 커지기 시작하는 거야.

귓가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가슴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칼로 찌르는 듯 아파 와.

그런데 이게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는 후순이는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죽은 후붕이의 얼굴만 보고 있는 거야.

살아있었다면 그 감정이 후회와 죄책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을, 유일한 사람의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