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지와 12지의 주요 서사는 크로우와 코히 사이의 이념의 갈등,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관점의 차이임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글과 역사를 가르치고, 악의로부터 보호받으며 미래를 일구어 나가기를 바라는 크로우




하지만 코히는 그것을 거부함. 정확히 말하자면 어른들이 만들어주는 미래를 거부한다고 할 수 있을듯


하지만 코히의 입장은 '어른들의 도움 없이도 우리는 잘 성장할 수 있어'는 아님






신디케이트의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음


물건을 훔치고, 들키면 코히를 부르고, 코히가 해결해주고.


집도, 부모도 없는 부랑아들을 만든 것은 어른이지만 코히 스스로도 부랑아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또다시 부랑아들을 만드는 어른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음


코히는 이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를 택함


논리는 간단함,,,


지금의 부랑아들을 만든 것은 어른들이니 어른들이 참견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는 거.




그렇다고 코히가 마냥 일차원적인 캐릭터는 절대로 아님. 그저 신디케이트라는 곳에서 희망을 부르짖는 것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인지 알기 때문임


어두운 밤에 저 멀찍이 밝은 빛이 보여서, 곧 아침이 오기를 기대했는데 위태롭게 휘청이다 곧 사그라들었다면 어떤 느낌일까?


국장, 크로우, 러스트 스파크, 로마네스크, 군단...


신디케이트의 밤을 밝혀주는 횃불들은 있지만 그 빛이 닿지 못하는 대다수의 장소엔 어둠만이 있을 뿐임. 아마 코히의 수감자 능력을 그림자로 설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음



때문에 코히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변화와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임



크로우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지.


근데 코히의 이러한 태도가 어리기 때문에, 성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함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성장해나간다는. 인류라는 종으로서 당연한 미래를 빼앗긴 고아니까.


이미 어른들로 인해 최악의 방향으로 변화해버린 미래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변화라는 키워드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코히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함.


크로우, 국장, 러스트 스파크, 돈, 그리고 신디케이트의 모든 사람들. 신디케이트의 밤길을 비추는 횃불들이 하나하나 늘어나고



영원할 것 같던 신디케이트의 어두운 밤이 레이븐이 마일즈에게 말해줬던, 눈부신 신성의 야경처럼 밝아지며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됐기 때문임





그리고 이런 사건들을 거치며 변한 것은 코히뿐만이 아님




크로우 역시 도시의 수많은 어둠을 보아온 인물로서 알게모르게 많이 엇나가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어린 제자가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서는 것을 보고도 방관할 만큼.




때문에 크로우의 찬미시. '미래를 위해'가 미완성 시임은 이 불완전한 두 인물들이 많은 일들을 겪으며 변화해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난 해석했음


그런 면에서 절망하고 타협한 약자들에서 희망을 갖고 나은 미래를 쟁취하려 하는 약자들로 변하는 신디케이트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바로 크로우와 코히가 아닐까 함.




희망을 갖고 변화해 나가는 미래.

크로우의 시가 나온 12-6 스테이지의 이름이 찬미시인 이유는 희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임,,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둘의 서사가 마음에 들었던 점이 있다면, '국장의 영향으로 감동받은 이들이 개심하였다'라는 뻔한 영웅 서사시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라


고민하고, 충돌하고, 좌절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나며 스스로 일구어냈다는 점에 있었음


철인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민중들을 조명하는 러스트 스파크 챕터에 가장 어울리는 서사가 아닐까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