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분홍빛으로 만개한 벛꽃.

 

톡, 하고 손바닥에 내려앉는 벛꽃잎을 바라보며 여인은 생각했다.

 

이곳은 어디일까.

 

고개를 들어보면 평화롭고 따듯한 오후의 햇살이 느껴졌다. 푸른 잔디밭과 투박한 느낌의 벛꽃 나무 아래. 여인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동행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동행인에게 말을 건냈다.

 

“사람들은 ‘며칠 사이에 세상이 벛꽃으로 뒤덮였다-‘는 구절로 시간의 흐름에 감탄하는 시를 쓰죠. 이 벛꽃이 지면, 언제 또 국장님과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마음을 전부 내어준 사람은 가볍게 미소 짓고, 입을 열었다.

 

동시에 아름다운 공간에 작은 파문이 일며, 여인의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산산히 부숴졌다.

 

 

***

 

 

“타란, 이제 그만 포기해.”

 

“포기? 아니요. 우린 다시 되찾을겁니다. 갱단 녀석들이 러스트 스파크인 척 x랄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겼을거에요!”

 

어두운 방 안으로 중년의 여성과, 소년이 들어왔다. 서로에게 분노하고 있는 둘은, 방금 전까지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던 암살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 했다.

 

달빛밖에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둘은 말싸움을 이어나갔다.

 

“이미 러스트 스파크는 궤멸상태야. 쥴리앙도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병력으로는 살아남은 촌락 사람들을 지키기도 벅차.”

 

“그러니까 다시 힘을 키우기 위해서 이렇게 수색하고 있는 거잖아요!”

 

“국장을 찾으면 또 어떻게 하려고. 그가 가진 족쇄를 이용해도 우린 졌어. 그 사실을 받아들여.”

 

“갱단의 쓰레기들이 모두 족쇄를 사리사욕에 사용해서 그래요. 애초에 믿을만한 사람들에게만 족쇄를 줬으면 이렇게까지 잘못되지 않았을거라고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건, 이제 우린 전보다 믿을만한 전사가 더 부족해졌다는 거야. 새로운 전사들 모두에게 족쇄를 달아도, 쥴리앙이 있던 그 시절보다 러스트 스파크가 강해질 수 없어. 그리고…”

 

잠시 운을 뗀 중년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국장, 그 아이가 살아있긴 한거야?”

 

어둠 속에서 암살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우산을 움켜쥐었다. 오늘 그녀의 암살 표적에게서 ‘살아있다’고 확신에 찬 대답이 나오기를, 여인은 간절히 기도했다.

 

“…모르겠어요, 로브나. 하지만 족쇄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여인은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에 쳐박혔을 때처럼, 쓰린 절망을 느꼈다.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로브나라는 중년 여성은 붉은 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찾고자하는 대상의 생사도 모르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찾아도 러스트 스파크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잖아. 우린 네 고집에 더 이상 어울려주지 않을 거야.”

 

로브나는 뭐라고 대꾸하려는 소년을 훈육하듯 이야기했다.

 

“여기, 쥴리앙이 쓰던 서재에서 뭘 찾으려고 하던 우린 철수할거야. 고집 부리지 말고 너도 내려와. 지금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이길 힘이 아니라, 상처난 자신을 돌볼 시간이 필요해, 타란.”

 

“…먼저 가세요.”

 

소년, 타란은 외면하듯 로브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사춘기 아들을 포기하는 어머니처럼, 로브나 역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어휴. 이제 여기는 사람도 안 사는데 고집은 왜 이렇게 쌔서.”

 

암살자는 뛰어난 기감으로 로브나의 발걸음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쥴리앙의 방을 뒤지던 타란은 책상 위에 이질적으로 놓여있는 꽃 한송이를 발견했다.

 

타란이 부숴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꽃을 달빛에 비추자, 아름다운 보라빛을 내는 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제비꽃인가? 왜 이런 게 여기에…”

 

“화원은 암살 대상에게 최후를 통보할 때, 자신의 꽃을 남기지.”

 

그림자 속에 있던 암살자가 고운 목소리와 함께 달빛 아래로 나왔다. 타란은 곧바로 무기를 꺼내들어 상대를 겨누었다.

 

고풍스러운 보라빛 옷. 손에는 우산. 길게 내려온 흑발이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그녀의 짙은 살기가 타란의 생존 본능을 자극했다.

 

여인이 완전히 달빛 아래로 나오고나서야 타란은 그녀의 미모에 감춰져있던 짙은 감정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공허한 눈. 뺨에는 닦기를 포기해서 남은 눈물 자국. 입술에는 몇번이고 스스로 물어뜯은 상처로 가득했다.

 

타란은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화원이라면 암살조직이지? 쥴리앙에게 꽃을 전달한건가? 너희가 쥴리앙을 죽였어?”

 

“그 꽃은 네 것이야, 꼬마야.”

 

타란이 무기를 쥔 손에서 땀이 새어나왔다.

 

“집행 위원회에서 보냈나? 러스트 스파크가 다시 일어날 수 없게 싹을 잘라버리라고?”

 

“난 이제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 이건 오롯이 나의 복수야.”

 

“복수? 무엇에 대한?”

 

“고마운 사람. 내 삶의 동행인이자,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소중한 사람.”

 

여인이 한걸음 다가가자, 우산이 바닥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그녀를 따라왔다. 타란은 끝이 날카롭고 무거운 쇠로 된 우산이 곧 그녀의 무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을 잔인하게 이용하고,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생사도 알 수 없게 만든 자들을 향한 복수.”

 

암살자가 수감자라는 사실까지 이해한 타란은, 곧 그녀가 누구의 복수를 하는지 이해했다.

 

“MBCC 국장의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나에게?”

 

그는 분노했다.

 

“웃기지마! 난 그를 구하러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어. 국장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에 그를 의식 불명에 빠뜨린 건 수행관이야! 당신이 공격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집행위원회라고!”

 

“이미 국장님을 공격했던 수행관들은 모두 내 꽃을 받았어.”

 

그게 무슨말이냐고 반문하려던 타란은, 그 짧은 순간에 여인의 형상을 놓쳤다. 다음 순간 그의 허벅지에는 암살자의 우산이 박혀있었다.

 

타란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여인은 그의 입을 틀어막아 밤의 침묵을 유지시켰다.

 

“그런데 그들이 죽기 전 하나같이 살려달라면서 내게 한 말이 있어. 최후에 국장이 혼수상태에 빠지게 만든건 자신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하나같이 그들이 누구 때문이라고 했을 것 같아?”

 

이제는 수감자가 되어버린 타란은 변이의 힘을 끌어내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암살자의 손을 쳐냈다.

 

“그자들의 말을 믿어?! 그들이야말로 국장을 죽이려고한 자들이야!”

 

“이 방에서 무엇을 찾으러 왔지?”

 

갑자기 바뀐 주제에 타란이 따라가지 못하자 여인은 그의 앞에 공책을 한 권 던졌다. 절로 펼쳐진 공책에는 빼곡하게 무엇인가가 필기되어 있었다.

 

“멋대로 도둑질한 ‘족쇄’를 통해서 국장님의 위치를 역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했어?”

 

타란은 대답하지 않고 암살자가 던진 공책을 품 속으로 넣었다. 여인은 개의치않고 말을 이었다. 무언의 긍정과도 같았다.

 

“거기에 국장님을 멋대로 이용한 ‘의식’에 대해서 써져 있더군. 족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상당한 분량으로 써져 있었고. 이 책이 여기 있다는 건, 너와 러스트 스파크의 리더인 쥴리앙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겠지.”

 

타란은 침묵을 지켰다.

 

“족쇄에 대해서 너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지? 변이에 능통한 지하도 아니고, 족쇄를 연구했던 낙원도 아니야. 그저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 모인 너희가, 국장님 자신도 모르는 족쇄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가지고 있냔말이야!”

 

여인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을 들으며, 타란은 과거에 쥴리앙이 자신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 누가 한 짓이지?

 

- 수행관이요.

 

- 누가 한 짓이냐니까?

 

- 수행관이요.

 

그의 입에서 자백과도 같은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내 뒤를 캔 당신이 눈치 챌 정도라면… 쥴리앙도 눈치를 챘던걸까?”

 

그래서 내게 실망하고 우릴 떠난걸까,

 

그렇게 말을 이으려던 타란은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에 비명을 토해냈다. 여인은 타란의 허벅지에 박혀있던 우산을 비틀어 그가 자신의 질문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누구와 거래를 했지? 누가 국장님을 배신하면, 네게 족쇄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어?”

 

신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바람새는 소리를 몇번 낸 타란은 힘겹게 대답했다.

 

“거래 같은 게 아니야.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았어. 그리고 난, 국장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뭐?”

 

“’의식’을 치루는 건 러스트 스파크의 승리와 국장의 안전, 두가지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획이었어. 우린 국장의 상징성과 힘이 필요했지만, 그는 더 이상 족쇄를 이용해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 그런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제약?”

 

국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온 암살자도 잘 모르는 족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번에는 그녀가 침묵을 지켰다.

 

“’의식’을 통해 국장이 가진 힘을 최대한 이용하고, 동시에 갱단의 쓰레기까지 자신의 힘을 위해 국장을 지키도록 만들었어. 이게 우리로써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최선? 국장님의 의견을 묵살하고 공격해서 혼수상태로 만들어놓고 최선이라고?”

 

“난 국장을 공격한 적이 없어. …국장이 혼수상태에 빠지는 걸 방관했을 뿐이지.”

 

암살자는 자신의 ‘사부님’의 말을 떠올렸다.

 

- 가만히 있는 너를 누가 칼로 찔렀어. 그런데 넌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어둠 속을 헤메는 것 외엔 할 수 있는게 없지. 이런 건 복수가 아니야. 고통스러워하면서 떠밀려가는거지.

 

- 운명이 널 다치게했으면, 어떤 녀석이 한 짓인지부터 알아내야 해.

 

복수를 향한 마지막 한 걸음이 그녀의 눈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누구지?”

 

“….”

 

“국장님을 혼수 상태로 만든 사람. 너에게 족쇄와 의식에 대해서 알려주고 국장님을 배신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지?”

 

“난 국장을 배신한 적 없어. 만약 그 사람이 말해준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국장과 난 거기서 살아돌아올 수 없었을거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나 말해!”

 

타란의 허벅지에서 우산을 뽑아낸 암살자는 그의 목에 우산 끝을 겨눴다.

 

“…마찬가지로 난 나를 도와준 그 사람을 배신할 생각도 없어.”

 

“그래?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꼬마가 고문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기대되네.”

 

순간 여인의 몸에서 붉은색 빛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붉은 빛 주위는 마시다 토해낸 것처럼 질퍽한 오염으로 뒤덮혀있었다. 변이였다. 보랏빛 옷 위로 오염이 퍼져나갈수록 여인은 고통스러워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타란은 암살자의 감정이 격해져서 변이가 폭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눈 앞에 여인이 감당하고 있는 오염이 너무 짙어서 쉽게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인은 타란과의 대화를 뒤로한채, 오염으로 뒤덮힌 붉은 빛을 직접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붉은 빛은 그녀의 손에 닿자 사라졌고, 그녀는 모든 감정이 슬픔으로 변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타란은 붉은 빛이 족쇄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국장이 사라지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족쇄는 수감자가 폭주해도 변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변이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지친듯 이야기했다.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음에 따라 변이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래, 네게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배신하지마. 강요하지도 않을게.”

 

여인은 우산을 들었다.

 

“그냥 죽어. 오늘 내가 하려고 한 일은 그거였으니까.”

 

타란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의 우산이 움직였다.

 

쾅, 하고 방의 입구쪽에서부터 날아온 푸른 레이저가, 암살자가 펼친 우산에 맞고 흩어졌다.

 

“우산을 펼치면, 방어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구나. 다행이다. 혹시나 너를 저지하려고 한 공격에 큰 부상이라도 입을까봐 걱정했어.”

 

문 앞에는 검은 코트를 걸친 여자와, 그 여자의 주변에 떠있는 흑석영이 반짝거렸다.

 

“A급 수감자, 진. 그 아이를 죽이는 건 국장을 위한 복수라고 할 수 없어. 국장도 그걸 원하진 않을거야.”

 

보라빛 옷을 입은 암살자, 진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샬롬. 우리의 화원을 짓밟아놓고 혼자서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대단한 자신감이네.”

 

“당신은 이제 MBCC사람이고 화원에서 손 뗀거 아니었어? 게다가 화원의 회원들은 대부분 다 도망쳤어. 사부님은 알고 있을텐데. 사부님이랑은 아직 만나지 못 했나보구나. 그렇지?”

 

진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가장 관심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국장님을 배신한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을 왜 국장님이 원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해?”

 

“한 번의 실수를 목숨으로 갚기에는 아직 어리고, 바른 어른이 되기에는 너무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온 아이니까.”

 

샬롬은 떨리는 진의 우산 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진. 너의 분노가 국장의 신념의 선을 넘지 않길 바라. 그 아이는 지금껏 당신이 죽여왔던 족쇄를 악용한 갱단들과는 달라. 지금은 잔혹한 시대야.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지. 난 그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객관적인 답을 주도록 설계된 사람이야. 그 아이를 죽이는 건 국장이 원하지 않는 바일거야. 내 말을 믿어.”

 

한참의 망설임 끝에, 진의 우산 끝은 바닥으로 내려갔다.

 

타란은 암살자의 눈치를 보며 샬롬 쪽으로 절뚝이며 걸어갔다. 허벅지에서부터 피를 흘리는 아이를 보며 진은 분노를 되삼켰다. 샬롬의 말이 맞을 것이다. 국장님은 타란이 배신의 대가로 벌을 받기를 원할지언정, 그의 인생이 다시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결말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타란은 샬롬 앞에 도달하자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미안해, 누나.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아니. 최근 벌어진 많은 암살사건의 범인을 쫓아온거야. 아래 층에 나를 따라 온 HUSH 부대가 있을거야. 걱정말고 내려가서 치료 받아.”

 

“아, 응.”

 

그리고 그 짧은 대화로 진의 머리 속에서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낙원의 고위급 인사인 샬롬. 그녀가 러스트 스파크의 아이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타란이 누구에게 ‘의식’에 대한 정보를 받았는지. 결국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을 통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는지. 타란조차 장기말로 써먹어 모든 사건을 계획한 진짜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샬롬, 네가 그랬어?”

 

분노. 억제할 수 없는 양의 분노가 진의 몸을 휘감았다. 벌써 그녀의 몸에서 변이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타란이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태연하게 침묵을 유지하던 샬롬은 무엇에 대해 물어보는지 되묻지 않았다.

 

“맞아, 다 내가 한거야.”

 

흑석영이 경고하듯 샬롬만 알아들을 수 있게 웅웅거렸다.

 

[주의해, 청부업자. 표기를 위해 수감자를 자극하는 건 좋지만, 눈 앞의 수감자의 변이 수준이 심상치않아. 벌써 A급의 위험도를 웃돌고 있어. 넌 코쿠리코에게 입은 치명상에서 회복된지 얼마 되지 않았어. 이번에는 몸이 치명상을 견딜 수 없을거야.]

 

‘상대가 강한 분노에 변이를 내어줄수록, 내가 표식을 남기기 더 쉬워져.’

 

“블랙링도 그렇고, 폭동도 그렇고, 국장을 이용한 것도 그렇고. 다 내가 계획한 일이야.”

 

진은 자신의 내부의 변이가 분노를 삼키고 감당하기 어려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쫓던 최후가 이곳에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 진. 무의미한 살인과 국장을 찾기 위한 탈옥생활을 멈추고 MBCC로 돌아가. 낙원은 국장을 폐기하기로 결정했어.”

 

“폐기…? 국장님을…?”

 

“그래. 자세한 걸 이야기해줄 순 없지만, 국장은 낙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야. 그 쓰임이 다했으니 폐기해야지.”

 

“누구맘대로?네놈들따위가국장님의생사여탈권을쥔것처럼이야기해?”

 

진을 뒤덮은 변이는 이미 그녀의 발 아래까지 퍼져 방을 점거해나갈 기세였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와 대비되는 빛의 촉수가 샬롬을 애워싸며 진을 향해 다가갔다. 촉수는 진에게 떨어져나온 분노를 삼키며 빠르게 그녀의 주위를 점거했다.

 

“그러고보니, 진. 너는 10년 넘게 잠식되어서 변이가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들었어. 국장과 함께 있을 때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고 보고되었던데, 그래서 국장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지겠지.”

 

[청부업자 즉시 표기를 진행해. 위험성이 S급에 도달했어!]

 

“너를 위해서, 상부에 빨리 ‘다음 국장’을 만들어 줄 것을 건의해볼게.”

 

진은 생각했다.

 

국장님이 주었던 믿음. 자신이 그를 지킬 것이라는 오만. 그를 지키고자 했던 책임. 그를 향한 애정.

 

미쳐버리면 광인. 변이에 삼켜지면 괴변체. 상실. 슬픔. 절망. 좌절. 분노. 결국 모든 것이 끝나도 그가 없기에 다시 돌아 상실.

 

그렇다면 변이에게 모든 이성을 내어주더라도 분노하고,

더 이상 그를 그리워할 수 없을 만큼의 상실을 감내하리라.

 

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고.

 

샬롬의 빛의 촉수가 여인을 휘감았다.

 

그리고 당신은,




족쇄를 사용한다



진의 모든 오염을 양분 삼아 자라나려는 듯 그녀의 몸 곳곳에서 붉은 빛이 터져나왔고,

 

그녀에게서 피어난 핏빛 가시는 제 꽃을 지키듯, 빛의 촉수를 밀어냈다.

 

진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가는 따듯한 족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보고 있었다. 떨리는 여인의 손끝이 족쇄에 닿자, 붉은 가시는 그 형상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족쇄 너머의 사람의 온기를 전했다.

 

진은 모든 상황을 뒤로하고 창문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족쇄가 이끄는 인도에 따라, 어둠 속에서 추격자를 따돌리며, 여인은 미친듯이 달렸다. 몇 번이고 발걸음을 재촉했고, 그녀에게 이성은 족쇄 너머로 느껴지는 사람과 만나는 일 외에 더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운 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여인은 아무리 오랜 시간을 달려도 기약 없는 기다림보다 짧게 느껴지는 질주를 이어갔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태어날 시간만큼의 흐른 후에, 여인은 당신과 다시 만났다.

 

“국장님…이세요?”

 

나무로 둘러쌓인 숲 속. 달빛이 유일한 조명인 숲의 공터 가운데에 당신이 서 있었다.

 

당신은 몸을 돌려 나무 아래에서 멈춰버린 진을 바라보았다. 윤기나던 흑발은 흐트러졌고, 우산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달빛 아래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암살자는 평정심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어? 위험할 정도의 분노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족쇄를 써버렸네.”

 

“정말로, 국장님, 이신거에요?”

 

더 다가가면 또다시 깨어질 꿈일까봐, 진은 당신을 눈 앞에 두고 더 다가오지 못 했다.

 

터벅. 터벅.

 

진이 소리만으로도 그리운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그녀는 당신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다녀왔어.”

 

“왜,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저는, 저는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무사하다고 연락이라도, 한 번 해주셨다면…!”

 

당신의 품 속에서 무너지듯 오열하는 진을,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안아주었다. 슬픔과 눈물. 원망과 분노. 그리움과 집착. 쏟아지는 모든 그녀의 감정들은, 결국 애정의 작은 편린일 뿐임을 당신은 알았다.

 

쌓인 감정을 쏟아내고 진정한 후에야 진은 당신의 품속에서 고개만 들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수척해지셨어요. 살도 빠지고…”

 

“그 말을 네가 하는 거야? 거울이 있다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진은 그 말에 작게 미소지었다. 당신이 사라졌던 그 모든 날동안, 단 한번도 피어나지 않았던 꽃이었다. 당신은 흐트러진 그녀의 머릿결을 정돈해주며 말을 꺼냈다.

 

“진, 이번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어.”

 

족쇄 너머로 곧장 그녀에게 두려움의 감정이 전해져왔다.

 

“제게 환멸하셨나요? 실망…하셨어요?”

 

당신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위해서 세상을 향해 화를 내주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당신은 그녀의 앞머리를 마저 정돈해주며 덧붙혔다.

 

“그래도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앞으로 네가 갈고 닦아온 칼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해줬으면 좋겠어.”

 

“암살자 칼은, 손잡이가 없는 비수와도 같아요. 국장님의 적을 공격하기는 쉬워도, 지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당신은 진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샬롬의 공격을 막다 들고 있던 우산에 쓸려서 난 상처였지만, 당신은 이게 마치 칼날을 잡고 휘두르는 사람의 상처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앗, 제가 해도….”

 

“가만히 있어.”

 

수감자로서 당신보다 몇 배는 강한 진이었지만, 마치 아이가 부모의 손에 이끌리듯 당신에게 손을 내어주었다.

 

당신은 진의 상처 부위에 손수건을 묶어주고 말했다.

 

“내가 네 손잡이가 되어 줄게.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칼날만 쥐고 휘두루며 방황하지마.”

 

“네. 그렇게 할게요. 저를 국장님이 뜻하는 대로 휘두르세요. 대신,  칼자루가 칼날을 두고 떠나는 건 용서하지 않을거에요.”

 

“그래. 나도 노력할게.”

 

진은 녹아내리듯 당신의 품 속으로 들어가 안겼다. 그녀는 다시는 놓치지 않을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전했다.

 

“달이 예뻐요.”

 

“나도.”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당신을 얼굴을 붉히는 진을 더 강하게 마주 안아주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