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써서 난잡한 부분이 많아요ㅠㅠ)



또 꿔버렸다. 그 꿈을.


"우웁"


가슴에서 올라오는 격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침대를 박찼다. 갑작스런 반응이었던 탓인지 구역감마저 치솟더니 일순간에 식도를 뒤흔들어버렸다. 내뱉으려는 토사를 막아보려 재빨리 손으로 입가를 짓눌렀지만, 이미 마디 사이사이로 희멀건 용액이 스며나와 바닥 위에 자국을 새기고 있었다. 자국은 태평하게 바닥에 눌러앉곤, 그 희디 흰 대지를 자신의 흰색빛으로 삼켜가며 영역을 넓히는 모습이 여실히도 보였다. 


흰색이 흰색에게 잠식당한다니. 모순적이다.


그런 생각을 해버리자 실없이 웃음을 지으려던 걸 찡하고 밀려오는 두통이 제지해버렸다. 결국 눈가를 찌그리며 침대로 돌아와 힘없이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뇌리에서 발끝까지 맴도는 통증을 일어선 상태로 버티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하아"


열이 돋힌 눈물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두통이 사라질 때까지 입으로, 손바닥으로 새어나오는 용액이 바닥을 더럽히는 꼴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 눈물이 아픔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슬픔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밤빛은 그저 이 덧없는 아이테르의 모습을 슬며시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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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와 만나며 17년의 침묵이 깨진 후로 콜로서스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정적만이 감돌던 시설들은 하나하나 불빛을 밝히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날개를 펼친 스카이워커 호가 딛는 곳마다 동공에 비쳐진 것은 새로움뿐이었다.

일루미나. 레디첼 렌치. 백야성. 움브라톤. 북방.

그 새로움에서 인연을 맺고, 추억을 빚으며, 이들을 가족으로 맞이했다.


결국 지금에 다다라선,


'조종사~밥 가져왔는데 같이 먹지 않을래?'

'아이테르. 혹시 나와 함께 수련 할 의향은 없나'

'조종사, 저기 풍경 좀 봐봐. 엄청 멋지지 않아?'


폐부를 괴롭히는 먼지에서 가족의 향기가 흐르는 곳으로, 허허한 곁엔 뜨거운 살결이 물들어졌다.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그 부산스러움은, 상처뿐인 지난 세월을 털어내며 행복으로 함께할 줄 알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하던가.


'너만큼은...꼭 살아남으렴...'

'...마지막...아이...테르...'


세월의 장막 한 편에 묻어놓은 17년 전의 기억이, 언젠가부터 꿈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나를 업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누군가가 달려가던 꿈.

그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던 거라곤 흐릿한 시야에 내비친 뒷편으로 붉은 불길과 파란 불길이 무서운 속도를 보이며 쫓아오고 있음을.

그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듯한 누군가는 얼마 안 가 달음질을 멈춰 나를 바라봤다.


'...꼭. 다시 돌아오마...'


그 말을 마치자마자 품에 안던 나를 절벽 아래로 던졌다. 이윽고 변해지는 시야를 흰색과 검은색이 가득 메워가다-


꿈은 끝났다.


처음엔 악몽이라 생각하였다. 망상 속 편린이 우연히 나타났을 뿐 앞으론 나타나지 않을것 같았지만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마치 무언가를 알리려는 듯 똑같은 장면이 꿈으로 나타났다.


상담을 해보려 했으나 꿈 속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끙끙 앓아봤자 17년을 역겹게 붙어있던 어둠과 지낸 내가 처음 겪어보는 이 일을 해결은 커녕 이해조차 할 리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의문은 고통으로 변하더니, 꿈을 맞이할때면 방금 같은 신음 섞인 구역질을 흘리며 정신을 조각조각 찢어버리게 되었다.


"...물 마시고 싶다"


한참이 흘러서야 두통을 쫓아내자, 이번엔 토사와 함께 뒤따라 온 갈증이 목을 적시고 싶다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결국 숨 돌릴 틈도 얻지 못한 채 걸터앉던 자리를 박차 지저분해진 손을 털어내며 방문을 밀어냈다.


방과 방, 시설과 시설, 층계와 층계를 가로질러야 보이는 부엌에 도착하자마자 물병을 집어들어 입으로 욱여넣었다. 공동이 사용하기에 부엌은 콜로서스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하필 자신의 방이 제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불만스럽기 그지없던 점이지만 지금은 그게 아닌 이것에 집중할 때다.


꿀꺽- 꿀꺽-


한 됫박은 마셨을까. 텁텁했던 입안을 생기로 불어주고 나서야 비로소 본능에 빼앗겼던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급하게 들이부었던 물로 마지못해 머금었던 숨을 단번에 뿜어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완전한 어둠.


비록 지금은 혼자가 아닌 많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콜로서스지만, 부엌의 불빛 너머에서 홀로 남겨진 나를 몰아붙인 어둠은 17년 동안 보아왔던 그 어둠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고독에서 헤어 나오려 발버둥 치던 나를 더욱 옥죄었던 어둠. 바이스와 만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그 괴기하리만큼 짙은 어둠. 이젠 그 사슬에서 해방된 줄 알았건만 오늘따라 목이 탔던 것도, 여태까지 그 악몽으로 나를 괴롭힌 것도 전부 이것때문이었던건가.


잠시나마 평온해졌던 정신에 다시 사슬이 감겨오는 듯 했다.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그 흑막에 힘없이 몸을 맡기려고 할 때.



어둠뿐이어야 했던 공간에서 저멀리의 빛을 마주쳤다.


나는 감겨오던 의식을 들쳐업고 막연하게 어둠을 뚫으며 빛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던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목을 축이겠다는 본능에 이끌리는 것처럼, 살아남고 싶다는 무의식 어딘가의 본능인지 모를 욕망이 장막을 찢어발기고 빛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빛의 광원을 새어내던 문을 벌컥 열자마자 보인 것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백금색 천으로 만든 옷. 그리고 반쪽짜리 날개.


두 손을 쥐고 고개를 숙여 고요한 공간과 일체화 한 듯 묵연히 기도를 하던 그 소녀는,


안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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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이변들이 만들어낸 복잡한 심경은 그녀의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바깥의 적막과는 사뭇 다른 고요한 분위기에 매료된 건지 몽롱해진 정신으로 혼란스러워 할 때 즈음 인기척을 알아챈 안젤이 입을 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아. 그. 저기. 기, 길을 잃어서"

"콜로서스 주인이 콜로서스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나요?"


처음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횡설수설한 모습을 재밌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이내 표정을 풀며 쿡쿡하고 웃음을 지었다.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해. 그럼 난 다시 돌아갈"

"저기"

"응?"

"같이...기도하실 생각 없나요?"


그 말을 듣자 뒤를 돌아 들어왔던 문 너머를 바라봤다. 새어 나온 영역을 제외하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창백한 어둠이 보였다.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그녀의 공간을 쳐다봤다. 그녀뿐인 곳임에도 처음부터 존재한 것처럼, 익숙한 것처럼 방을 가득 채운 정겨운 감동이 온 몸을 어루만지며 한 발짝, 한 발짝 그녀를 향해 발을 옮겨주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내 옆은 반쪽짜리 천사가 나긋한 눈빛으로 인사해주었다.


"어서오세요. 저의 공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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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미나 탐사팀이 콜로서스에서 숨죽여 살던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안젤을 처음으로 만났다. 함께 첫만남을 이뤘던 바이스는 소란이 끝날때까지 다양한 감정을 내게 내보여줬고, 도브는 거의 잠만 자고 있었지만 적어도 무언가 표정의 변화를 보기는 했다. 하지만 안젤은 달랐다. 소란에서 탈출할 때도, 콜로서스를 기동할 때도, 그 이후로 수없이 많은 경험을 했을 때도 그녀는 웃거나 슬픈 기색 하나 비친 적이 없었다. 마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무감동한 표정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듣자 하니, 기도를 위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장소를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별 생각없이 창고 복도의 맨 끝 방을 빌려줬다. 아무도 오지 않아 낮에도 적적한 기운이 감돌고, 벽 한 쪽에 설치된 창문으로 정경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게 매력이었다.


안젤은 여전히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고, 시간이 지나며 그런 기억도 흐릿해지다 다시 그녀와 이곳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분명 달랐다. 살랑살랑 흔드는 날개는 비록 쌍을 잃었지만 자애로움이 담긴 미소만큼은 쭉 잃지 않으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상상으로만 존재할 법한 아름다운 성녀의 모습에 나는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이야. 네가 웃음짓는 모습을 본 건"

"딱히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단지 남들에 비해 감정을 드러내지 못할 뿐"

"왜 그렇게 됐는지 혹시 알려줄 수 있을까?"


그러자 미소를 품어왔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순간 무심코 꺼내었던 것인가 뒤늦게 후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비록 전 어려보이지만 17년 전 암귀와의 전쟁을 경험해봤어요”

“정말?”


스카이워커 호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났을 즈음, 이클립스라는 암귀세력이 내 종족인 아이테르의 거주지였던 헤븐즈 밸리를 침략했다.

그 뒤로는…어째서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저희 가족은 그 전쟁에 휘말려서 결국 저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 충격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흐릿해지더니 지금은 평소에 보신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우울한 기색으로 대답을 해나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자신도 침울해지는 기운이 옮겨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 기억이 떠올라지면서 절 괴롭힐때마다, 외로움이 느껴질 때마다 기도를 하면 신기하리만큼 잃어버렸던 감정이 잠시뿐이지만 되돌아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녀와 달리 나는 스카이워커에서 지내온 기억말곤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과거는 어땠는지, 부모님은 누구인지. 그 어떤 것도 남아있는 추억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 자신과 연관지어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나도, 부모님이 없어.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래서 스카이워커를 부모님으로 따르고, 어둠 속에서 발버둥만 쳤어. 그렇게 17년을 지내오다가…너희들을 만나면서 그 지옥같은 굴레를 탈출한 줄 알았는데. 며칠 전부터 계속 꿈으로 누군가가 나를 안고 도망치고…그 뒤엔 불길이. 계속. 계속…”


이러면 안되는데, 이상하게 말을 하면 할 수록,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매를 훔쳐 닦아내어도 자꾸만 쏟아졌다.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건 오직 ‘너무 힘들었어’. 그 뿐이었다.


안젤은 끝까지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돌아보니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조종사씨만 괜찮다면, 잠시나마 엄마 역할을 해드릴 수도 있다구요?”


나는 말없이 몸을 기울여 허벅지 위에 머리를 얹었다.

작고 아담하지만, 그 무엇보다 포근하고 따듯한 살결.


모순적이다.


안젤은 여전히 허벅지에 누운 채 울먹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가냘픈 손임에도 쓰다듬어질 수록 그 편안함에 눈은 스스르 감겨왔다.


너무 모순적이지만, 그 여느때에도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을 느끼며 나는 오랜만에 악몽을 마주하지 않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달은, 그 덧없는 아이테르와 반쪽짜리 천사를 슬며시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