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비경

이 책은 아인족의 고향이었던 비경 동굴이 초기에 어떻게 부흥했는지, 그 후 암귀의 침입을 받아 어떻게 점령된 것인지를 기록한 일부 역사 자료이다. 이 책을 통해서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참극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으며, 오늘날 대륙 세력의 구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 고향

아인족은 운명적으로 역사상 가장 큰 인공 동굴을 발견했다. 천성적으로 순진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위해서, 또 자신들만의 「새로운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산을 깎고 바다를 개척하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더 전, 떠돌아다니던 아인족은 아스트라 대륙에서 이 동굴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단순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겼지, 미래에 아인족의 번영을 재현할 위대한 부락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동굴의 탐색이 이어지면서 아인족은 이곳에서 대량의 옛 문명의 설비와 기술의 잔재를 찾게 되었다. 여러 곳의 흔적으로 보아 옛 문명의 인류는 이 거대한 동굴에서 일종의 특수 실험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였다. 또한 동굴 안에서 사는 아인족이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아인족보다 더 건강한 신체와 더 강한 루미나에 대한 민감도를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묘한 것은 이러한 변화는 아인족에게만 있었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오로리안과 아이테르에게는 그저 이곳이 독특한 생태계와 봄 같은 사계절을 가진 쾌적한 거주지라고 느껴질 뿐이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아인족은 동굴을 하늘이 내려주신 낙원, 즉 약속의 땅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들은 이 거대한 동굴 도시에 비경이란 이름을 붙였다. 10세대 이상을 거친 노력으로, 낡은 고대 시설만이 존재했던 동굴은 크게 번영하여 아인족의 집결지, 정치의 중심지이자, 정신적 고향으로 거듭났다. 아인족은 이곳에서 과학 연구, 공업과 농업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지난날의 영광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수백 년 후 암귀가 닥쳐오기 전까지...


2. 암귀

천 년도 더 전, 아인족은 비경 동굴을 발견했다. 그 후 수백 년간, 무수한 아인족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었다. 비경은 아인족에게 최고라는 단어의 대명사이며, 모든 아인족이 천 년간 일구어낸 고향이었다. 그러나 암귀의 습격으로 아인족은 비경 동굴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환기 시스템은 거의 멈췄고, 조명 시스템도 파괴되었다. 동굴 속 화약 연기는 쉽사리 걷히질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짙은 피비린내를 덮을 순 없었다. 저 빌어먹을 괴물들은 연기와 어둠 속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아무런 힘도 없는 평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저놈들은 우리의 동료를 하나씩 쫓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여버렸다. 그야말로 인간성 따윈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광기 어린 짐승 그 자체였다. 누군가는 이에 저항하여 몇몇 암귀의 손에서 어린아이를 구출해냈지만, 그 두 사람은 도망칠 새도 없이 뒤에서 몰려오는 무수한 암귀 속에 파묻혀버렸다. 전선에서 방어하던 병사들과는 이미 몇 시간 전에 연락이 끊겼으니... 아무래도 절망적인 상황인 것 같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저 지하 루트를 통해서 탈출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우리의 아이들이 이곳을 탈출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건물 파편에 짓눌려 울부짖는 동료와, 그들의 영민하던 눈동자는 빛을 잃고 이어서 쓰레기처럼 쌓여 작은 산을 이루던 장면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번영하던 낙원은... 모든 것이 집어 삼켜져 울음과 화염이 가득한 지옥으로 변했다. 여기를 지옥으로 만든 악마들... 이 모든 죄의 대가를... 암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일루미나 탐색대가 비경 깊은 곳을 탐색하던 도중 찾은 한 노트.


3. 종말

비경 동굴은 모든 아인족의 현재이자 정신적인 고향이었다. 그렇기에 암귀가 침입했을 당시 비경 동굴에 남아있던 아인족만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것이 아니었다. 밖에서 유랑하던 모든 아인족이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암귀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 고향에 대한 집념이 아인족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다.


장로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동굴에 들어간 마지막 아인족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말은 장로라고 하지만 그들도 젊은 아인족 무리에 불과하다. 연장자는 암귀가 침입했을 때 일찌감치 전사했으니까. 일족의 구원 요청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예전의 그 커다란 동굴이 암석이 뒤덮여 폐허가 된 모습과 산처럼 쌓여있는 일족의 시체, 그 종말과도 같은 광경을 본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장로들이 적절한 시기에 우리를 위로해주었다. 뭐, 그들은 우리보다 작아 보이긴 하지만... 암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죽은 아인족 한 명당 암귀 100마리를 묻어버려야 해. 모든 아인족이 일족의 비참한 죽음을 잊지 못하지만, 동굴도 잃고 고향도 잃은 아인족에게 대체 남은 건 뭘까? 대륙에 또 다른 거주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비경의 일족들처럼, 전사가 죽으면 민간인이 싸우고, 성인이 죽으면 아이들이 싸웠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이제 비경 동굴에 남은 일족들이 희생되었으니 이젠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 차례겠지. 그렇다면 적의 피로 우리의 수의로 삼고, 암귀의 시체를 우리의 무덤으로 삼겠어!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을 지키자. ——어떤 아인족과 오로리안 혼혈 후손의 일기


4. 잃어버리다

아인족의 멸망에 당황한 오로리안, 일루미나 연방은 용감한 탐색대를 파견해 암귀가 활개 치는 비경 동굴에서 아인족 멸망의 원인을 조사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비경 동굴은 이미 매우 위험한 곳이 되어 의지가 매우 강한 일루미나 병사도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말라버린 저 해골, 저 용감했던 일루미나 병사가 죽기 직전까지도 무기를 놓지 않았다는 생각에 당시 나는 이번 탐색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아인족이 멸망한 지도 벌써 백여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암귀는 이미 비경 동굴의 주인이 되었고 우리 같은 「이방인」조차도 아인족의 고향이었던 곳을 「비경」 혹은 「대비경」으로 바꿔부르게 되었다. 아인족을 멸망시킨 후 암귀는 비경에 사는 것이 만족스러운지 다른 도시를 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그놈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처음에는 일루미나 탐색대 모두 대단한 멤버로 이루어졌었고 모두 일루미나 연방의 안전을 위하여 진심으로 비경 안의 암귀들을 쓸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곧 현실이 모든 오로리안을 일깨워주었다. 수많은 탐색 대원들이 암귀에게 죽거나 비경에서 실종되었다. 심지어 탐색대 전체가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반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일루미나의 수장은 「진실 규명」이라는 그 몇 글자를 위해서 억지로 탐색대를 만들고 계속해서 비경을 탐색하도록 강행했다. 진실 규명이라는 글자 뒤로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고, 많은 가족의 슬픔을 낳았다. 마침내 탈영병이 나타났고, 우리는 그중 하나였다. 우리는 죽은 동료들을 버리고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 비경에서 벗어났다. 분명히 일루미나 연방의 외부 공개 기록에는 「실종」이라고 되어있고, 내부 기록에는 「탈영」이라고 되어 있겠지. 우리 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어떤 처벌이라도 받았을까? 알수가 없다. 우린 영원히 일루미나 연방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이 넓은 사막에서 여생을 보낼 수밖에. 가끔 고향과 가족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생존의 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우린 살아있으니 이 넓은 사막을 돌아다닐 수 있다. 때로는 포기하는 것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의 아인족처럼 고향을 그리워했다면 우리에게 남은 결말은 단 두 가지였을 것이다. 비경을 탐색하다가 암귀에게 죽거나, 명령을 어기고 귀환하여 군법대로 처벌을 받거나. 아무튼 둘 다 죽는 건 마찬가지다. 최근에 일루미나 연방에서 비경을 탐사한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포기를 한 것 같다. 게다가 다른 도시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아무래도 대륙에서 비경은 이미 잃어버린 땅이니 암묵적으로 암귀의 점거를 용인한 것이겠지. 이 모든 것은 이제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경, 일루미나, 아인족, 암귀, 모두 안녕. ——익명을 요구한 레디젤 렌치 초대 멤버의 말을 정리하여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