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노래

북방을 떠도는 것 이야기로, 그 진위는 아무도 모른다. 북방을 떠도는 음유시인이 이 이야기 모음집에 엮어 넣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발의 오로리안과 부모님을 잃은 두 아이는 북방의 마을에서 만나 서로 감싸주고, 도와주며 깊은 정을 나눈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는 북방 오로리안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다.



1. 도로시 남매

도로시 남매는 북방의 마을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일찍이 돌아가셨기에 마을 사람들의 허드렛일을 돕고 먹을 것을 얻었다. 장로는 두 아이가 새로운 가정에 들어갔으면 했지만 누나 도로시는 단칼에 거절했다.


마을 입구에는 주춧돌 2개가 있다. 그것은 산에 있는 암석을 벽돌 모양으로 자른 후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이었다. 소나무가 그 양 끝을 이어, 주춧돌과 함께 외로운 문 하나를 이루고 있다.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소나무 가지에는 오색 빛깔의 비단이 묶여있어 찬 바람이 불면 펄럭펄럭 소리가 났다. 멀리서 온 여행객은 그 문을 보고 앞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춧돌에는 항상 마을 아이들이 기어 올라가곤 했다. 아이들은 발을 돌 틈새에 집어넣고, 손으로 비단을 묶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올라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길의 먼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추위로 주춧돌이 얼어붙었고 이로 인해 몇몇 아이들이 다치자, 마을 장로는 그 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어젯밤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문을 나서보니 무릎까지 쌓이진 않았다. 장로는 도로시와 크루즈를 불러서 삽을 주더니 다른 주민들과 함께 길의 눈을 치우라고 했다. 일부 주민들은 루미나틱스를 다룰 줄 알았고, 도로 위의 눈은 대부분 마을 숲에 던져졌다. 도로시도 루미나틱스를 다룰 줄 알지만, 눈을 치우는 데 적합하지는 않았다. 도로시와 동생 크루즈는 다른 주민들의 뒤를 따라가며 삽으로 천천히 돌길의 얼음 조각을 긁어냈다. 삽을 장로에게 돌려주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장로는 예전처럼 청어 통조림을 많이 가져왔다. 그리고는 집에 먹을 것이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더니 크루즈의 손에 젤리를 쥐여주었다. 크루즈가 젤리를 주머니에 넣자, 젤리가 주머니의 뚫린 구멍으로 떨어졌다. 크루즈는 부끄러워하며 주머니를 가렸고, 도로시는 동생을 대신해서 젤리를 주웠다. 그 후, 장로는 마을 남동쪽에 살고 있는 부인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들였으면 한다는구나. 너희는 어리고, 돌봐줄 어른도 없으니 그 사람들과 같이 가족이 되는 건 어떻겠니?"


도로시는 장로에게 대답하지 않고 동생의 주머니에 난 구멍을 잡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음부턴 옷이 찢어지면 내게 말해. 내가 꿰맬 수 없는 것도 아니잖아."


장로는 한숨을 내쉬고는 둘에게 손을 내저었다. 도로시 남매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선 손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2. 금발의 오로리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시 남매는 눈밭에 쓰러진 오로리안을 도와주었고, 그 오로리안은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한밤중 눈보라에 그 오로리안의 집은 무너져버렸고, 다시 한번 도로시 남매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하늘에서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은 이미 어두워졌고, 마을에는 드문드문 노란 등불이 켜져 있었다. 집에 멀지 않은 것을 보고 몇 걸음 달려 나가던 크루즈의 발밑에 뭔가가 걸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눈밭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동생의 외침을 들은 도로시는 급히 앞으로 달려갔다. 그 사람은 기침을 하더니 일어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도로시는 그 모습을 자세하게 훑어보았고, 그 사람이 낯선 오로리안이라는 것을 확신한 후, 동생을 불러 둘이서 함께 부축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길가에 때마침 장작이 쌓여 있는 초가집이 보였다. 남매는 오로리안을 처마 밑까지 부축했다. 오로리안은 감사 인사를 하고는 벽에 기대어 더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의 등불의 빛으로 도로시는 모자 속에서 몇 가닥 흘러내린 금발이 그녀의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낮선 오로리안을 도왔던 크지도 작지도 않았던 일은 도로시와 크루즈에게 금세 잊혀졌고 그다음 날 마을에 외지인이 마을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도로시 남매는 눈을 치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 옆의 낡고 오래된 집의 문과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굴뚝에서 흰 연기가 새파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루즈는 지붕에 생긴 큰 구멍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집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야?"


도로시는 크루즈의 옷깃을 잡고 오래된 집에서 끌고 나갔다.


밤에도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쳤다. 남매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숲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문밖에서 굉음이 들려오더니 이어서 우당탕 쿵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크루즈는 꿈속에서 오들오들 떨었고 도로시는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 고개를 들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문밖은 점차 조용해졌고, 창틈으로 나지막한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도로시는 눈을 비비고는 또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어렴풋이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시가 다시 잠에서 깬 것은 누군가 집의 나무문을 똑똑하고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다시 잠에서 깼다. 그녀는 동생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이부자리를 들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등유등을 밝힌 도로시는 창문가로 올라간 후 틈새를 약간 열어 문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문밖에는 곱슬머리가 찬바람에 엉망이 된 채로 얇은 담요를 두르고 웅크린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시는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문을 열지 않고 등불을 든 채로 머리를 차가운 공기에 들이밀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금발의 오로리안은 오래된 집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이 부서져서 말이야.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을까?"


도로시는 한참을 망설이며 어둠 속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장로님을 찾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오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를 꽉 쥐고 몸을 돌려 떠날 준비를 하는 순간 도로시는 그 오로리안이 맨발인 것을 알아차렸다. 발자국이 눈밭에 하나하나 찍히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이를 악물고 망설이다가 결국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떠나는 오로리안을 불렀다. "저기... 됐으니까 일단 들어와!"



3. 집이 무너진 후

장로의 도움으로 낯선 금발의 오로리안 마사는 도로시 남매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점차 가까워졌다.


도로시는 오로리안의 이름이 마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사는 담요를 두른 채 벽난로 옆에서 하룻밤을 잤다. 날이 밝자 도로시와 크루즈는 집을 나섰다. 오래된 집은 반쪽만 남아있었다. 지붕은 통째로 젖혀져 있었고, 기둥은 곧 쓰러질 것만 같았으며, 벽돌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마사는 폐허 속을 뒤졌다. 먼저 벽돌 속에서 장화를 꺼내어 속에 들어간 눈과 나무 부스러기를 쏟아부었다. 신발을 신은 그녀는 끊어진 나무 기둥을 치우고 그 안에서 검은색 천으로 싸인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먹을래? 초콜릿이야." 마사가 배낭 안에서 은종이에 쌓인 사탕을 꺼냈다. 크루즈가 손을 내밀려고 하자 도로시가 막아섰다. 마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초콜릿을 가방에 넣은 뒤 진공 포장된 빵을 따로 꺼내어 눈과 함께 입에 밀어 넣고는 빠르게 씹어 삼켰다.


마사는 폐허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무너진 집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약속하듯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집을 수리할게."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생을 끌고 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로는 마사에게 당분간 도로시 집에 머물다가 집이 다 고쳐지면 집을 옮길 것을 권유했다. 도로시는 내키진 않았지만 장로가 큼지막한 삭힌 상어고기를 줘서 거절할 수 없었다.


마사는 장로 집에서 말을 빌려 매일 숲에서 돌과 목재를 가지고 와 무너진 옛집 뒤에 쌓았다. 대낮에는 마사를 거의 볼 수 없었다. 마사는 점심과 저녁에만 주방이나 벽난로 곁에 나타나 밥을 짓거나 잠을 잤다.


처음에 마사는 도로시 남매와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난로 근처에서 책상다리를 한 채 멍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빵을 뜯어 먹었고, 이따금 구운 고기와 생선 스튜를 곁들였다. 도로시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마사가 신선한 토끼 고기를 먼저 나눠줬을 수도 있고, 크루즈가 마사와 함께 난로 곁에서 책상다리를 하고는 젤리와 초콜릿을 함께 나눴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결국 세 사람은 한 테이블에 앉아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4. 무료 소금

마사는 음식 만들기에 열을 올렸고, 심지어 이 때문에 소금을 얻을 방법까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마사의 방법을 들은 도로시는 직접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는 더는 마을 옆에 있는 숲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요리를 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썼다. 마사는 차가운 청어 통조림과 상어고기를 그 상태로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로시 남매의 식탁에는 야채 수프, 부야베스, 꼬치구이와 으깬 감자가 올라왔다. 도로시는 마사가 요리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그건 마사가 전혀 손님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루즈는 도로시의 서투른 요리보다 마사가 만든 음식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래서 도로시는 마사를 따라다니며 최대한 세탁과 허드렛일을 도와주었고, 마사가 요리할 때 사용하는 재료와 순서를 몰래 기록했다.


마사의 음식에 대한 야망은 단순히 배불리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국자를 쥐고 맛을 본 후 말했다. "소금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소금?" 도로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눈 알갱이 같은 조미료가 생각났다. "그건 구하기 힘들어."


그 말을 들은 마사는 생각나는 것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날, 도로시가 장로의 허드렛일을 돕고 돌아왔을 때 크루즈가 소매를 잡아당겨 주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구석에 있는 작은 마대 자루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소금이야!"


도로시는 쭈그리고 앉아 검지로 새하얀 알갱이를 찍어서 입에 넣었다. 짠맛이 입안에 퍼졌다.


"어디서 난 거야?"


"마사, 마사가 가지고 왔어!" 크루즈는 도로시 뒤에 멧돼지 다리를 들고 주방으로 향하고 있는 마사를 가리켰다.


도로시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소금... 엄청 비싸지 않아?"


마사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말했다. "사 온 게 아니야."


"그럼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마사는 웃으며 말했다. "근처에 있는 함수호에서 가지고 왔어"


도로시 남매의 추궁 끝에 마사는 소금을 얻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마사가 얼마 전에 사냥감을 따라가다가 함수호를 찾았다고 한다. 물을 퍼고 호수를 얼린 후에 얼지 않은 간수를 집으로 가지고 왔고, 그 간수를 난롯불에 끓여 소금을 분리한 다음 여러 번 걸러서 먹을 수 있는 소금을 얻었다고 했다... 도로시와 크루즈는 이야기에 푹 빠졌다. 마사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려고 할 때도 끊임없이 물었다.


"마사는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도로시는 마사가 소금을 돼지고기 위에 바르는 것을 배웠다.


"아는 건 어렵지 않아." 마사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5. 돌아오지 않는 가족

마사는 도로시 남매를 위해 저녁을 만들었고, 동생 크루즈와 이야기를 하다가 도로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도로시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하루였다. 장로는 도로시에게 눈을 치우는 일 외에, 마을의 양을 숲으로 몰고 가서 풀을 먹이는 새로운 일을 찾아주었다. 마사는 새로운 목재와 돌을 운반한 후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창문에 엎드린 크루즈는 머리를 내밀어 오래된 집에 새로 놓인 얼음 뼈대를 살펴보았다. 그리곤 결국 큰 소리로 부엌에 있는 마사에게 물었다. "마사, 이제 이사 갈 거야?"


"아직 한, 두 주는 더 걸릴걸?" 마사는 껍질 벗긴 당근을 하나씩 솥에 넣었다.


부엌으로 달려간 크루즈는 마사 옆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앉아있다가 말했다. "마사가 가는 거 싫어"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한마디를 또 보탰다. "누나한테는 말하지 마."


"왜 말하면 안 되는데?" 마사는 국자로 솥을 두어 번 휘저었다.


"누나는 어른한테 기대면 안 된다고 그랬어... 결국 우릴 버리고 간다고..."


소리 없이 국을 젓다가 국자가 간혹 솥에 부딪혀 쨍하는 소리가 났다.


"어른은 항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항상 그렇듯이 그건 우리를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누나가 그랬어요." 크루즈는 시선을 숙였고, 난롯불에 빰이 뜨거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마사는 우릴 버리지 않을 거잖아..."


"너흰..." 마사는 끝내 질문하지 못한 채 삼켜버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도로시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지?"


크루즈도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컴컴해지며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눈발이 날리며 창문을 툭툭 건드리고, 찬 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크루즈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누...누난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6. 눈보라

도로시는 마사의 말대로 함수호를 찾았지만, 눈보라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밖에서 눈보라를 피하려던 도중 불행히도 굶주린 늑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광풍에 발이 묶인 채, 도로시는 벌벌 떨며 눈 속을 걸었지만,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앞길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도로시는 오늘의 모든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양을 마을로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서, 난롯가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졸았어야 했어. 중간쯤 왔을 때 길이 생각보다 멀다는 걸 알아채고 최대한 빨리 되돌아가야 했어. 아무리 호수를 찾았어도 호수가 얼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 봤어야 했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데다가 더욱 최악인 것은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로시는 주변을 둘러보며 최악의 경우 눈 덮인 야외에서 잠을 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눈보라를 피할 수 있는 틈을 찾아 바위 더미를 탐색했다. 다행히도 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바위 2개가 조금 낮은 동굴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 쪼그리고 앉으니 딱이었다. 뒤통수를 바위벽에 튀어나온 곳에 기댄 채, 도로시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크루즈가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놀라서 울고 있는 거 아냐? 아니면 눈보라를 뚫고 장로님한테 가서 날 찾아달라고 이야기했을까? 이런 나쁜 날씨에 내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장로님이 사람을 보낼까? 마사는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초조해할까? 아니면 난롯가에 앉아서 그저 멍하니 있을까?'


도로시는 크루즈의 눈빛을 알아차렸다. 동생은 마사가 단순히 집에 묵는 손님이 아닌 가족으로 남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들은 마사가 어디서 왔는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마사의 과거는 텅 빈 종이 같았고, 그녀는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도로시는 마사가 난로 앞에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마사는 머리를 숙이고 금발을 늘어뜨린 채 평온해하기도, 피곤해하기도, 지겨워하기도 했다. 마사는 식탁 앞에서만 웃었다. 그건 과거를 잊어버려야만 나올 수 있는 가벼운 즐거움이었다. 도로시는 이런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좋은 '가족'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비밀 때문에 떠날 것이다. 잃어버리는 건 이미 충분했다.


다행히 마사의 집은 곧 수리가 끝날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보라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도로시는 쪼그리고 앉아서 저린 다리를 문지르며 동굴 속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어둠 속의 길을 구분하려고 애를 썼다. 갑자기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그녀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초록색 빛이 천천히 도로시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약해지는 바람 속에서 도로시는 그것들의 숨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다른 생물일리가 없었다. 늑대였다.



7. 양날의 비수

도로시가 루미나틱스로 늑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위기일발의 순간, 누군가 물어뜯으려는 늑대를 얼려 도로시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퍽!"


또 한 마리 늑대가 도로시 앞의 흩날리는 눈보라에 부딪혔다. 도로시는 자신이 루미나틱스로 얼마나 많은 늑대 무리의 공격을 막아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우연히 자신이 공기를 응결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벽돌 크기로 수십초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후 응결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점차 길어졌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문짝 하나의 크기만큼의 공기를 2분간 응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밤에는 컨디션이 좋았을 때만큼 힘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물어뜯으려는 늑대는 점차 더 가까워졌고 마사는 그것들의 침 냄새까지 맡을 수 있는 지경이었다. 갑자기 다리가 걸려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늑대 한 마리가 바짓가랑이를 물고 엎드린 채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도로시는 비명을 지르곤 얼린 공기 벽으로 늑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늑대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며 도로시의 바짓가랑이를 반쯤 찢어버렸다. 한쪽만 신경 쓰고 있을 때 기회를 노리는 더 많은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퍽!" 이가 떨리고 식은땀이 이마에서 떨어졌다.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이대론 안 돼. 공포가 도로시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고, 공기 벽을 응결하는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이대론 안 돼' 귓가에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넌 저것들을 막을 수 없어. 밤은 아직도 길어. 넌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거야.'


찬바람이 도로시의 드러난 종아리를 베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공포를 의식한 순간, 절망은 홍수와 같이 물밀 듯이 쏟아져 왔다.


공기는 눈보라 속으로 흩어져 다시는 응결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의 초록색 눈동자가 매섭게 반짝였다.


다음 늑대가 덤벼들자 도로시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빠지직빠지직하며 얼음 어는 소리가 들렸다. 한기가 얼굴을 스치고 무엇인가 한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팔을 내리자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달려드는 늑대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반쯤 공중에서 멈춰있었다. 그다음 순간 푸른 빛이 번쩍이자 늑대의 머리가 공중을 돌아 눈밭에 굴러갔다. 늑대의 몸에서는 피도 나지 않았다. 전부 얼어버린 것이었다. 도로시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늑대의 몸이 날아갔다. 온 사람은 방향을 돌려 도로시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후드를 벗자 곱슬거리는 금발이 도로시의 빰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양손에 쥐어진 양날 비수는 이 어두운 밤 속에서도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로시는 자신의 얼굴에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8. 북방의 새해

북방의 새해가 되었다. 마사와 도로시 남매는 함께 새해를 보냈다. 마을 모임에서 온정은 소리 없이 커지고 있었다.


위험천만했던 눈 내리던 밤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도로시는 자신이 어떻게 마사에게 업혀 돌아왔는지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발밑에 모여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늑대들,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장로, 펑펑 울던 크루즈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도로시는 손에 있는 얼음등을 잘 조각해 복도에 놓는 것만 생각했다.


곧 새해가 다가온다.


마사의 집은 수리가 끝났다. 하지만 장로가 그 집을 손님을 만나고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족히 한 통은 되어 보이는 삭힌 상어고기를 지불했다.


도로시는 일찍이 마사에게 그 양날 비수의 출처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마사가 금속 손잡이 위에 있는 스위치를 돌리자 양 끝의 비수는 손잡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도로시에게 건네며 앞으로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이제 비수는 도로시의 것이 되었다. 도로시는 마사의 뜻이 무엇인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비수를 거두었다는 것은 과거의 걱정은 이제 뒤로 넘기겠다는 뜻이리라.


마사는 말했다. 자신은 과거를 내려놓았고, 영원히 자신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얼음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마을 중앙 공터에는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장로는 종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다양한 음식을 들고나왔다. 치즈, 벌꿀 빵, 소시지구이, 고기 스튜, 과일 파이, 아이스 스노우 와인... 뽀송뽀송한 흰 로브를 입은 도로시와 크루즈는 꼬치구이를 들고 주머니에는 젤리를 가득 채운 채 싱글벙글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사는 벌써 모닥불 옆에 서 있었고, 장로는 소매에 손을 넣은 채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로시 남매가 나오자 마사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마을 사람들은 연이어서 모닥불과 장로 곁에 모여 지난 일 년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음식을 나눠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젊은 아가씨가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 청량한 목소리를 따라 함께 오래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아가씨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장자리에 털을 두른 치맛자락이 빙빙 돌고, 독특한 루미나틱스로 만든 불꽃이 주위를 날아다녔다.


도로시는 마사 옆에 앉아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불빛은 마지 멀리서 반짝이는 별빛 같았다.


노랫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도로시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마사가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 사람들 대부분 도로시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마치 나지막한 소리로 기도하는 것 같았다.


도로시가 눈을 뜨자 마사는 웃고 있었다. 마치 새해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마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시선은 모닥불의 밝지 않은 곳을 향해 있었다.


도로시는 마사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텅 빈 고요한 암흑만 보일 뿐이었다.



9. 낯선 손님

마을에 또 낯선 사람이 왔다. 마사의 이상한 행동을 본 도로시는 그 오로리안이 마사 때문에 온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도로시는 계속해서 추궁했지만, 마사는 끝끝내 진실 알려주기를 거부했다.


마을에 새로운 손님이 왔다. 도로시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 장작을 옮기다가 깨달았다. 검은 머리의 낯선 오로리안이 장로의 집에서 나와 수리한 옛집으로 들어갔다. 도로시가 나갈 때 마사는 평소와 다르게 난롯가에 앉아서 크루즈의 옷을 기워주고 있었다. 평소의 이맘때라면 사냥하러 갔을 시간이었다. 도로시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난롯가 옆은 비어있었다. 크루즈에게 마사가 어디 갔냐고 묻자 옆에 있는 옛집을 가리켰다.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은 마사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다고 도로시는 확신했다.


점심을 차려놓은 후, 도로시는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도로시는 마사의 저항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처음에 마사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하지만 도로시의 거듭되는 추궁에 작은 소리로 그가 자신의 '친구'임을 인정했다.


도로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로시는 상대방의 정체와 목적, 그리고 도로시에게 줄 영향을 알고 싶었다.


"그냥 친구야." 마사는 일방적으로 도로시의 질문을 끝내버렸다.


실망한 도로시는 더 이상 질문하기를 포기했다.


세 사람은 문밖에서 경고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마사가 먼저 듣고 식탁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멀리 바라보니 마을 중앙 공터에는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사람은 큰소리로 욕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어떤 사람은 귓속말을 했다. 도로시도 인기척을 느끼고 마사를 따라 나와 두리번거렸다.


차츰차츰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깨달은 도로시의 안색이 변했다.


암귀였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근처에 암귀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10. 수색대

장로는 수색대를 꾸렸고 도로시는 몰래 참여하려다가 마사에게 저지당했다. 발버둥을 치던 도로시는 그만 뼈아픈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장로는 마을의 모든 성인 남자를 모아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수색대를 만들고, 마을 근처의 암귀가 활동한 흔적을 조사하도록 했다.


수색대가 마을을 나갈 때 아이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주춧돌에 올라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도로시는 사람들 틈에 섞여 옷 안에 숨겨둔 양날 비수를 꼭 쥐었다. 장로는 자신이 수색대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색대는 연이어서 출발했고, 사람들도 점차 흩어졌다.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도로시는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 팀을 따라잡는 시간을 계산하며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떠났다.


그 순간, 누군가 도로시의 팔을 잡았다.


"도로시, 뭘 하려는 거야?" 마사의 목소리였다.


도로시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벗어나려고 했다. "이거 놔!"


마사는 도로시의 옷 아래쪽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렸고, 손을 뻗어 단번에 양날 비수를 가져갔다. "수색대를 따라 암귀를 찾을 작정이야?"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도로시는 비수를 빼앗으려 했지만 마사는 가볍게 피했다. "돌려줘!"


"나랑 돌아가자." 마사가 부드럽게 달랬다. "돌아가면 돌려줄 테니까. 응?"


도로시가 이를 악 물자 '찌익'하는 소리와 함께 소매가 찢어졌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마사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도망치려는 순간 마사가 허리를 잡고 다시 잡아당겼다.


"암귀가 무슨 장난감인 줄 알아?!"


도로시는 당황했다. 마사는 도로시가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해도 혼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심코 마사의 표정을 보니 분노로 떨고 있었다. 전에 없던 낯선 표정이었다.


"날 가르치려 하지 마." 도로시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표정도 냉랭하게 변했다. "네가 뭐라고 나한테 그러는데?"


허리를 꽉 잡았던 손이 풀렸다. 도로시는 마사를 뿌리치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도로시, 동생도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갈 셈이냐?"


장로의 성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도로시는 괴로워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11. 탈영병

장로로부터 도로시 남매가 어떻게 부모님을 여의게 됐는지 듣게 된 마사는 북방을 떠날 결심을 했다. 도로시 남매 곁에 있으면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사가 문을 열자 집안은 고요한 물처럼 잠잠했다. 도로시 남매의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고 했지만 손만 허공에 든 채 두드리지 못했다.


"5년 전, 마을이 암귀의 습격을 받았지. 도로시와 크루즈의 아버지는 수색대에 들어갔고, 그 수색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네. 그 후에 두 사람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종적을 쫓았지만, 도중에 암귀를 만나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지." 장로의 말이 마사의 귓가에 여전히 울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엄하게 굴지 말게. 사람마다 잊을 수 없는 과거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


주저하던 마사는 끝내 방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말없이 돌아서서 문밖을 바라보았다.


"마사."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기로 결심했나?"


"가자." 마사의 대답은 나지막한 한숨 소리 같았다.


갑자기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사의 옷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크루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사, 들어오면 안 돼?"


방안에는 도로시가 묵묵히 침대에 앉아있었다. 마사가 들어가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이제 갈 거야?"


마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물었다. "나 때문이야?"


"...오늘 일은 미안해." 도로시의 입술이 떨렸다. "내가 너무 무모했어. 그런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니야" 마사는 웅크리고 앉아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도로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해."


"왜?"


"난... 탈영병이거든." 마사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난 일루미나 연방에서 왔어."


도로시는 '일루미나 연방'에서 왔다는 의미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탈영병'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난... 암귀들과 싸울 수가 없었어. 전우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고, 난 암귀와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북방까지 도망쳐 왔던 거야." 마사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옛 동료가 찾아왔어.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아도 돼." 도로시가 다급하게 말했다. "전우들한테는 내가 말해줄게. 여기 있는 게 즐겁다고 하면 그 사람들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장로님한테 부탁하면 도와줄 거야...."


"우릴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응?"


"도로시." 마사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었어... 정말 미안해."


"난 너희 곁에 있을 수 없어... 미안해..."


도로시는 이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매번 그렇게 도망치는 거야?"


방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마사는 더는 자신을 변호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녀는 탈영병이라는 신분으로 자신을 꾸미는 데 익숙했고, 그 치졸한 연기는 모든 사람이 그녀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만드는 본질이었다.


"가." 도로시는 낙담한 듯했다. 몸을 움츠리는 모습은 마치 마사를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마사는 일어나서 벽 구석에 서 있는 크루즈를 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크루즈는 그 손길을 피해버렸다. 마사는 쓴웃음을 짓고는 잠시 서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말고, 몸조심해."


말을 마친 마사는 방문을 나섰고, 양날 비수를 거실의 테이블 위에 놓고 밖으로 향했다.



12. 송별

마사는 마을을 떠나려고 했으나, 도로시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도로시는 마사에게 그녀의 과거를 개의치 않지만, 떠나겠다는 그녀의 결정을 바꿀 마음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북방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출발하려던 때는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 마사와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은 마을을 나와 주춧돌을 지나쳤다. 소나무 가지에서 눈이 녹으며 떨어져 도로는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는 안 할 건가?"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마사는 후드를 쓰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을 피했다.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발각되지 않는 건 간단해."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의 표정은 복잡했다. "추적자의 인내심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도망치기만 하면 돼. 일루미나에서 단 한 명의 탈주병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을 리가 없으니까."


마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날 놓아줘도 되는데?"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은 침묵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 그런 생활은 의미가 없다는 걸 말이야." 마사는 먼 곳에서 눈이 녹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말했다. "난 살고 싶어서 일루미나를 떠난 게 아니야. 난 그저... 무기가 되어 끝도 없이 싸워야 하는 것에 질렸을 뿐이야."


"그럼 왜 나와 같이 돌아가는 걸 선택한 거지?"


"그건..." 먀사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했다. "내가 탈영병이라는 걸... 용서할 수 없어서야."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네."


"그런가?" 마사가 쓰게 웃었다. "한참을 도망쳤는데, 결국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갑자기 검은 머리의 오로리안이 멈춰 섰다. "이 모퉁이를 돌면 다시는 이 마을을 볼 수 없을 거야."


마사는 입꼬리를 잡아당겨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마사는 서 있는 곳에서 뒤돌아보았고, 아직 마을 초입의 주춧돌이 보였다.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비단은 눈을 가득 머금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더 안쪽을 바라보자 마을의 어두컴컴한 지붕이 보였다. 시간이 아직 일러서 모든 굴뚝이 고요했다.


눈을 돌리려 한 순간, 그녀는 마을 입구 주춧돌 위에 머리가 하나 튀어나와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마사는 그게 크루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사는 입을 벌렸다. 찬바람에 금발이 휘날렸고, 뺨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시선이 닿는 곳에 하얀 로브를 입은 여자아이가 쏜살같이 달려와 마사에게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도로시?"


"이거 받아." 도로시가 숨을 헐떡이며 손바닥을 펼쳤다. 손에 있는 건 양날 비수였다. "난 필요 없어."


"네가 가지고 가. 이것도 피할 이유는 없잖아. 그걸로 사과하고 싶은 거라면 안 받을래. 별일 아니니까. 난 전혀 신경 안 써." 도로시는 양날 비수를 마사의 손에 쥐여주고는 고집스러운 눈빛과 함께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네가 언제 돌아올지뿐이야."


말을 마친 도로시는 활짝 웃었다. "반드시 돌아올 거잖아. 그렇지?"


마사는 목이 메었고, 양날 비수를 쥔 손이 떨렸다. 마사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야." 도로시는 까치발로 가볍게 뒤로 물러나 손을 흔들었다. "그럼, 마사, 잘 갔다 와."


말을 마친 도로시는 마을로 달려갔고, 크루즈는 주춧돌에서 내려와 누나의 손을 잡았다. 두 아이들은 마을에 들어갔고 담벼락이 아이들의 그림자를 가렸다.


마을의 굴뚝에서 드디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소나무 가지 위의 비단도 흔들렸다. 눈 녹는 소리는 숲에서 들판으로, 도로에서 마을로 울려 퍼졌다.


누구나 알고 있다. 얼음이 녹고 나면, 주춧돌 위에 올라가 먼 곳을 내다보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