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우연히 박사의 '창고'를 발견한 루멘의 이야기








 로도스의 구내식당은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역시 회사 생활의 낙은 맛있는 점심과 동료들과의 수다 아니겠는가. 아침부터 고된 작전을 수행하느라 진이 빠진 오퍼레이터들, 오후에 있을 테스트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는 예비작전팀, 쉴새없이 몰아치는 업무에서 빠져나와 잠깐의 휴식시간을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이 삼삼오오 모여서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지만, 이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사원은 있는 법이다. 가령 입구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쏜즈는 오늘까지 끝마쳐야 할 실험에 대해 생각하느라 남과 대화할 겨를이 없었고, 중앙에 앉아 있는 머드락은 자신의 조그마한 돌 골렘에게 제 몫의 수프를 덜어주며 홀로 행복한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식당 가장 안쪽에서 홀로 쌀죽을 먹고 있는 아이린 역시 후자에 속했다. 잿빛 머리카락과 푹신한 깃털을 가진 이 어린 리베리는 오늘 식사를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룸메이트인 피아메타야 원래부터 점심시간마다 모이는 친구들이 있었고, 스펙터는 무기 수리를 위해 공학부에 가 있었으며, 스카디와 글래디아는 메뉴가 입맛에 안 맞는다며 함선 밖으로 나갔다. 결국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지만, 아이린은 홀로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 전달자에게 있어 헌터들은 함께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가해자 하나와 방관자 둘로 이루어진 정신사나운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비록 몸이 안 좋아 흰 죽밖에 못 먹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입만 열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황새치도 없고, 밥먹다 말고 갑자기 큰 소리로 웃거나 소리를 지르는 미친 상어도 없었으며, 멍하니 숟가락을 옮기다 꼭 음식 한두 개를 흘리는 얼빠진 범고래도 없었다. 더하여 이 제약회사의 셰프는 요리 솜씨가 굉장히 훌륭해서, 환자에게 내어주는 간단한 죽인데도 재판소의 일반적인 식사보다 맛있기까지 했다.




 '아니면 재판소 밥이 맛이 없는 편인가? 조르디가 끔찍해 하던데. 혼 씨도 군대 밥은 맛있을 수가 없다고 했고.'




 하지만 내 입맛에는 재판소 것도 맛있었는걸. 숟가락을 빼어문 채로, 아이린은 멍하니 생각한다. 미각세포가 조금 고장난 소녀는 이런저런 공상을 하며 조금씩 그릇을 비워나갔다. 씹을 것도 없는데 아프면 죽조차도 천천히 먹어야 하다니 무언가 불합리하다는, 10대다운 엉뚱한 생각을 하며 죽의 반절 정도를 먹었을 때, 전달자의 앞에 슬그머니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소녀가 고개를 들자 예상대로의 인물이 사락거리는 옷자락과 함께 서 있다. 방금까지 일을 하다 온 듯 의료부의 하얀 가운을 걸치고, 한 손에는 영양가 없어 보이는 크림빵을 든 채,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린 씨."


 "안녕, 조르디."


 "음,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앉아도 될까요?"


 "실례라고 하면 그대로 돌아가게?"




 그 말에 루멘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숙여 앞자리의 의자를 빼낸다. 청년의 무해한 미소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순식간에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며 투덜거렸다.




 "이제는 앉으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앉는구나."


 "매번 대답이 똑같으시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앉지 말라고 할 수도 있잖아?"


 "앉지 말라고 하셔도 앉을 건데요."


 "......"




 할 말을 잃은 아이린이 다시 묵묵히 죽을 먹는 사이, 조르디는 누가 봐도 매점에서 대충 사온 듯한 빵의 포장을 벗기고 있다. 이름만 크림빵이지 밀가루 9할과 쥐꼬리만큼의 크림으로 이루어진 싸구려 빵이다. 아마 스노우상트가 자주 먹던 물건 같은데, 어떻게 골라도 하필 저런 걸 골라오는지. 에기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빵의 끄트머리를 잡아 뜯는 사이, 아이린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남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식당 구석에서 혼자 그런 빵 먹고 있으면 좀 처량해 보이지 않아?"


 "왜, 왜요? 이거 맛있는데..."


 "그게 맛있다고? 아니, 맛이 문제가 아니라, 좀 제대로 된 걸 사먹든가. 누가 봐도 일하다 급히 식사 때우느라 아무거나 가져온 것 같잖아."


"으음, 잘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급히 때워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저 20분 뒤에 또 회의 있어요, 방금까지 물품 정리하다 왔는데 너무하지 않아요, 라고, 멍청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는 루멘 탓에, 아이린은 아까보다 조금 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만다.




 "애초에 그 두 머저리는 어쩌고 왜 또 혼자 이러고 있어?"




 여기서 '두 머저리'란 당연히, 로도스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8할을 일으키고 다니는 검은 머리 에기르와 흰 머리 리베리를 말한다. 그중 한 명이 아까 식당 입구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낸 아이린은 더욱 의아해진 표정으로 조르디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를 바라보는 전달자에게, 루멘은 멋쩍게 볼을 긁으며 대답했다.




 "아... 의료부가 요새 바빠서 시간이 안 맞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리고?"


 "웬일로 혼자 계시길래, 아이린 씨랑 이렇게 단둘이 먹고 싶어서요. 평소에는 스펙터 씨랑 같이 있으시니까."




 말을 마치고 순진한 표정으로 활짝 웃는 남자와, 당황해서 잠시 얼어붙은 여자. 아이린의 귀끝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루멘의 뒤에 앉아있던, 건너편 테이블의 누군가가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그 옆의 예비 오퍼레이터가 어머, 하고 저도 모르게 속삭이는 소리도 들렸다.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조르디는 빵을 뜯으며 확인사살같은 한 마디를 더하고 만다.




 "물론 저희 둘 다 식사라고 하기에는 영 부실하게 먹고 있기는 하지만, 으음, 다음에는 좀 더 맛있는 걸로 같이 먹어요. 아픈 거 다 나으시면."


 "어, 어?"


 "아, 맞다, 다 나으시면 같이 함선 밖으로 나가볼래요? 엘리시움이 맛있는 가게 몇 군데를 알려줬어요. 제가 용문은 처음 와봐서, 혼자 가기에는, 조, 조금 무서운데,"


 "아니, 엘리시움이 알려준 거면 걔랑 가면 되잖아?"




 소녀는 남자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외출 권유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태클을 건다. 그에 루멘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약간 붉어진 얼굴로 손가락을 배배 꼬면서,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아이린 씨랑 둘이 가고 싶은 건데."




 하필 사람이 빠져나가기 시작해 적당히 한적해진 식당에, 거대한 폭탄을 풀어놓고야 말았다.


 아까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뒤쪽 테이블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한다. 몇 칸 떨어진 곳에서 띄엄띄엄 식사를 하던 이들도 슬쩍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다. 아이린은 죽그릇 안에 떨어트린 숟가락을 주울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 있다가, 앞에 앉은 에기르가 초조하게 제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재판소에 틀어박혀 살아온 탓에 이런 상황을 처음 겪어본 소녀는, 무언가 이상하고 간지러운 이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하여 대답을 했고,




 "어, 으응, 가, 같이 가자...?"


 "저, 정말요?"


 "그래 뭐, 같이 나가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말에 조르디는 특유의 천진난만하고 말간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방실방실 웃었다.


 그들의 대화를 도대체 몇 명이 듣고 있는지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서.












 로도스는 수백 명의 사원들이 24시간 동안 같은 함선에서 생활하는 환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이라면 핑크빛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식당에서의 당당한 데이트 신청 이후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아이린은 가는 곳에서마다 동료들에게 묘한 미소를 받았고, 스펙터는 루멘의 머리채를 잡았으며, 엘리시움과 쏜즈는 전 재판관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꽤나 요란한 계획이었던 탓에 두 이베리아인은 또다시 갑판에 매달리고 말았다. 그 소식에 조르디는 친구들을 도와주려 갑판으로 향했고, 밧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 주다가 켈시에게 딱 걸리고 말았으며, 그 결과 두 얼간이와 함께 찬바람을 맞으며 '난 저 사악한 재판관은 반대다!' 따위의 헛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있다.




 "아니, 너도 참 대단하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조용한 식당에서 그렇게 대놓고 고백을 해?"


 "아니,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근처에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근데 대체 왜 그게 고백으로 소문이 난 거예요?"


 "엥? 고백했던 거 아냐? 식당에서 끝내주는 이벤트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네? 저, 전 그냥 같이 나가서 밥 한 번 먹자고 한 게 끝인데요..."




 거꾸로 매달린 채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는 루멘에게, 쏜즈가 눈을 흘기며 혀를 찬다.




 "뭐, 늘 그렇듯이 소문이 좀 과장되긴 한 모양인데, 솔직히 그렇게 수상쩍게 굴어 놓고 그런 말을 하면 다들, 아, 얘가 드디어 고백을 하려나보다, 하지 않겠냐."


 "수, 수상쩍어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수상쩍지! 졸졸 따라다녔잖아! 네가! 그 재판관을! 좋아한다는 티를 그렇게 팍팍 내고 다니더니 이제는 단둘이 놀러 나가자고 말하기까지? 그 소심하던 의료부의 루멘 씨가? 야, 솔직히 내가 여자한테 외출하자고 하면 그냥 활발한 애가 같이 놀 사람 찾는 거지만, 너나 쏜즈같이 말수 적은 애가 그러면 그냥 고백이나 다름 없다고!"




 지나치게 흥분해 파닥거리는 엘리시움을, 쏜즈가 세게 걷어차 진정시킨다. 루멘은 익숙한 단말마와 함께 축 늘어진 리베리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더듬더듬 변명을 했다.




 "아니, 그게... 박사님께 여쭤봤더니 같이 밥을 먹는다든지 하는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 보라고 하셔서..."


 "그걸 왜 박사한테 물어봐? 네 옆에 끝내주는 연애상담사가 둘이나 있는데!"


 "네 덕에 깨진 커플이 몇인데 당당하게도 말하는군."


 "이럴 땐 좀 조용히 해줄 수 없을까, 브라더?"




 시끄럽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곁에 매달린 리베리를 한 번 더 걷어차고서, 쏜즈는 약간 무거운 목소리로 조르디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 그 재판관 좋아하는 건 맞냐?"


 "네?"


 "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걔 무서워했잖아. 안 마주치려고 피해다니고."




 어, 듣고 보니 그렇네? 팔을 늘어뜨린 엘리시움이 힘없이 중얼거리는 동안 의료부의 오퍼레이터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고 있다. 침묵을 지키는 루멘을 향해 쏜즈는 더욱 눈을 가늘게 뜨며 의문을 던졌다.




"친해진 후에도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던데, 왜 최근 몇 주 사이에 갑자기 걔한테 푹 빠진 것처럼 구냐고.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좀 이상한데 말이지."




 그 말에 조르디는 슬쩍 시선을 피하는가 싶더니, 곧 언제나와 같은 순진한 얼굴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일이 있었어요. 한 달쯤 전에."


 "한 달 전에? 무슨 일?"


 "으음, 그게, 아이린 씨랑 둘이서 있었던 일이라 여,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 아 그럴 일이 있었... 아 말해 드리고 싶기는 한데에... 아니 그게에..."




 눈동자가 흔들리던 것도 잠시, 루멘은 어느새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말끝을 흐리며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어대고 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쏜즈는 그 꼴을 보더니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엘리시움 역시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토하는 시늉을 한다. 그딴 걸 왜 물어봐서 이런 걸 보게 만드냐는 눈총, 나라고 이 정도일 줄 알았겠냐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둘 사이에서 짧게 오간다. 꽃밭에 머리를 푹 담가 놓은 친구의 모습에 두 이베리아인은 못볼 꼴을 보았다는 듯 홱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르디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쑥스러운 듯이 헛기침을 하고 있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이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죄가 가벼운데다가 몸도 약한지라, 루멘은 두 사람보다 훨씬 일찍 풀려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캄캄한 복도를 홀로 걸어가며 조르디는 회상한다. 한 달 전. 쏜즈와 엘리시움에게 말한 그 한 달 전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그들이 예상할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그날도 그는 이렇게 조명 없는 복도를 홀로 헤매이고 있었다.


 아이린과 함께 오랜만에 함선에 복귀한 날이었다. 낮에는 간단한 작전이 있었고, 피곤에 잠긴 아이린을 대신해 박사에게 서류를 전하러 가던 길.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소녀를 혼자 두기 싫었던 마음에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오려고 엘리시움에게 들었던 지름길로 향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함선은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해서, 문 몇 개를 지나고 모퉁이 몇 개를 돌고 나니 어느새 모르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계단을 나온 순간 펼쳐진 캄캄한 복도. 발 옆에서 깜빡이던 '4층'이라는 표시를, 남자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채 기억하고 있다.


 복도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빈 상자가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아도는 곳을 창고로 쓰고 있던 걸까. 조명 하나 없이 어두운데도 창 너머로 달이 밝아서 썩 꺼림칙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저 멀리 복도 끝에 있는 문에서 빛이 새어나오기에 막연히, 아, 저 문으로 가면 다른 복도가 나오겠거니 생각하며, 어렵지 않게 발 디딜 곳을 찾아 나아갔었다. 발에 채이는 상자를 슬쩍 밀어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챙겨 온 서류가 구겨지지 않게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으면서.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순간 발을 헛디뎌 옆에 있던 문에 부딪혔을 때, 그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불도 켜지 않은 복도, 명패도 없는 문. 이런 후미진 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을 때 루멘은 당황하여 벌떡 일어났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건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맞았으므로.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듯한, 억눌린 신음 소리가.


 에기르는 허겁지겁 주머니 안에서 비상용 키를 꺼내었다. 의료부의 주요 대원들에게만 지급되는 마스터키였다. 혹시라도 잠긴 방 안에서 응급상황이 벌어지는 경우 직접 문을 열고 구조할 수 있도록 하는 키다. 그는 짧은 노크를 한 뒤 또 한차례 신음이 들려오자 다급히 문을 열었고, 안쪽의 광경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문은 안쪽으로 밀어서 여는 평범한 여닫이문이었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파충류의 비늘이 달린 꼬리, 그 다음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살구색. 양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바들바들 떨리는 꼬리만으로 다리 사이를 가리고, 재갈을 물어뜯으며 앙앙대며 우는 여자가 보였다. 반들거리는 비늘 아래로는 두꺼운 플라스틱 막대가 바닥까지 연결되어 질척한 액체로 덮여 있다. 두 팔이 머리 위로 묶인 피디아의 새하얀 배가 무언가의 모양을 따라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다. 칼단발로 잘린 갈색 머리와 말랑한 허벅지를 강조하듯 묶인 끈, 저와 같은 뾰족한 귀. 충격으로 기능을 멈춘 머리가 무의식 아래에서 여자의 이름을 찾아낸다. 디펜더. 서류로만 만나본 사르곤 출신의 디펜더다. 어디선가 셔터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제 비부를 가린 꼬리를 천천히 내리더니, 제 앞에 놓인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쭉 빼어 과시하듯 내밀고 흔든다. 다리를 더 벌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 음란한 물을 질질 흘리면서, 딜도를 더 깊은 곳까지 머금느라 결합부에서 즈푹, 하는 소리가 샜다.


 숨을 멈춘 채 돌아간 눈동자에 새로운 인영이 비친다. 짙은 청록색이 묻어나는 깃털과 탁한 잿빛의 머리카락, 아까 전의 그 사람보다 훨씬 더 긴 검은 꼬리. 입사하자마자 행적이 묘연하던 어느 캐스터다. 그녀는 쿨쩍이는 소리를 내며 앞뒤로 움직이는 기계에 스스로 허리를 붙이며 기쁜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끈적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새까만 안대 아래 길게 찢어진 입은 혓바닥을 쭉 내민 채 헐떡인다. 옷에 장식처럼 달고 다니던 형광색의 호스가 천박하게 튀어나온 채 흔들리는 가슴을 위아래로 조이며 강조하고 있다. 빠른 박자로 박아대는데도 그 잠깐 빠져나가는 것이 아쉽다는 듯 꽉 조여물고 있어, 기계가 빠져나올 때마다 앝은 내벽이 달라붙은 채 딸려나오고 있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던 여자는 어느 순간 뒤로 목을 젖히며 크게 경련한다. 오오옥, 호곡, 억눌린 비명소리. 상체가 들린 탓에 드러난 허벅지와 그 위에 수놓아진 선명한 채찍 자국. 반대펀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토실토실한 엉덩이 위에도 같은 자국이 줄을 지어 있을 것이다.


 힘이 풀린 남자의 손이 문고리에서 툭, 떨어진다. 조금 더 시선을 옮기면 커다란 금빛 뿔을 가진 카프리니가 검은 수영복을 입은 채 기둥에 묶여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에 툭 튀어나온, 위로 휜 굵은 막대기를 아랫입으로 깊이 삼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수영복은 곳곳이 악질적으로 오려져 있어 본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배꼽 아래를 훤히 드러낸 캐스터가 어깨를 흠칫 떨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과, 반들반들하게 젖어 천장의 빛을 반사하는 검은 천. 발 아래 고인 수상한 물자국과 아슬하게 바닥을 짚고 선 까치발, 위로 올라가면 종아리를 타고 흐르는 맑은 액체와 그 물을 뱉어내며 움찔대는 균열. 발갛게 부어 침을 질질 흘리는 아랫입은 지금 먹고 있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입구를 빠끔댄다. 위태로운 발끝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순간 여자의 구멍은 주인을 배반하며 기쁘게 제 본분을 다할 것이다.


 루멘의 의지에 반해 스르륵 열려가는 문과, 그 덕에 조금씩 넓어지는 에기르의 시야. 기사의 갑주는 신발만 남겨진 채 알몸으로 손을 꽉 맞잡고 있는 백발과 적발의 카시미어인,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옥색 끈으로 다리를 고정당한 빅토리아의 음유시인, 젖소 무늬가 그려진 머리띠를 쓰고 착유기를 단 채 스스로 '생산성'을 높이려 음탕하게 허리를 돌리는 디펜더, 얼마 전까지 쉬는 시간마다 잡담을 나누었던, 코드네임이 서로 닮은 의료부의 동료 둘. 어느샌가 함선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들이 끈적하고 뜨거운 공기 속에서 기쁨에 차 울부짖고 있었다. 음란하고 노골적인 물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메아리치고, 열을 견디다 못해 붉어진 살결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뒤틀리고 오르내린다. 그리고 방 곳곳에 흩뿌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니 알고 싶지 않은 하얀 액체. 어떤 것은 옛 동료의 머리카락 위에서 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고, 어떤 것은 말랑한 입술 사이에 말라붙어 있으며, 어떤 것은 그저 바닥에 평범하게 고여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밀스러운 틈새를 비집고 앞뒤로 울컥이며 새어나와 누군가의 다리와 꼬리를 타고 뚝뚝 떨어진다.


 조르디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여자와 남자, 성인과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눈가리개를 쓰고 재갈을 문 채, 무기질한 플라스틱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쳐올리는 것을 따라 교성을 내뱉는 이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광경.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발에 텅 빈 상자가 채여 쓰러졌다. 루멘은 멍한 머리로 시선을 돌려 제가 쓰러트린 상자를 바라본다. 방 안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빛이 기울어진 상자의 바닥면을 비춘다. 제품을 소개하는 듯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문 너머의 누군가가 쓰고 있던 입마개와 가죽끈의 사진이다.


 제가 걸어온 복도의 절반을 메우고 있던 상자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욱, 우욱...!"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조르디는 허리를 숙여 있는 힘껏 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다. 문을 닫아야 하는데 손끝이 떨려서 팔을 들 수가 없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음란한 신음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에기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한 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지만, 한때 그와 친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해줘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를? 꺼내 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막막함과 역겨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른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조르디는 갈피를 못 잡고 헐떡인다. 그러던 중 남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이 로도스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믿고 따르는 그 사람이다. 박사. 박사라면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도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박사에게 알리면 분명 범인을 찾고 저들을 구해줄 것이다.




 "아, 그렇지, 박사님께, 알려, 야..."




 그리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깨닫는다.


 로도스에서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한 사람뿐이다.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툭,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알리긴 뭘 알립니까."




 산산히 부서진 루멘의 정신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 기척도 없이 나타난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루멘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고서 조용히 하라고 윽박을 질렀다. 겁에 질린 에기르는 입을 막은 손을 풀어내려 안간힘을 쓰다가, 창문 너머의 달빛으로 습격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힘을 풀었다. 조르디의 입을 막은 루포는 남자가 호흡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어느 정도 진정한 후에야 팔을 풀어 주었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들키면 귀찮아지니까."




 페넌스는 조용히 속삭이고서 짜증이 난, 아니, 조금은 겁을 먹은 표정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루멘 역시 평소와 달리 까칠한 시라쿠사인을 따라 어두침침한 복도를 벗어난다. 그는 끔찍한 악몽 속에 갇힌 기분으로 멍하니 라비니아의 뒤를 좇는다. 조금이라도 조명이 어두운 곳에 들어설 때마다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떠는 남자를, 페넌스가 가끔씩 뒤를 돌아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여자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조르디의 숙소였다. 방 안에서는 언제나와 같이 시끌벅적한 엘리시움과 쏜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루멘은 그 익숙한 목소리에도 긴장을 놓지 못하며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문고리에 손을 걸지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무는 에기르에게 루포가 조용히 속삭였다.




 "잊어버리세요. 그 서류는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얽혀 봐야 좋을 게 없어요. 길을 잃었다가 박사의 개인 공간에 우연히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 곧장 나와버렸다. 그렇게만 기억하십시오."


 "아... 허억..."


 "몸이 안 좋아 일찍 퇴근하셨다고 말해두겠습니다, 오퍼레이터 루멘."




 페넌스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루멘은 어깨를 둥글게 만 채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하지만 페넌스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스스로 버텨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라비니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가 세 발자국 정도를 걸어갔을 때, 조르디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 에, 에이야 씨가, 의료부에 오셨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있었어요, 그 방에, 허니베리 씨와 멀베리 씨가. 분명 에이야 씨가 오기 전만 해도, 우욱, 저와 같이, 일하고, 있었는데, 허억..."




 충격으로 굳어버린 폐를 억지로 쥐어짜면서, 미친 듯이 떨리는 손을 꽉 말아쥐고, 루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을 뱉는다.




 "어쩌면 저도 곧... 분명히 봤어요, 그 방에 남자분도, 어린아이도 있었던 걸, 페넌스 씨, 저, 저는..."


 "진정하세요, 루멘 씨."




 결국 페넌스는 그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와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당신은 안전할 겁니다. 좀 더 뛰어난 오퍼레이터가 들어오고 출전율이 내려가더라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웬만하면 살아남아요.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내일도 이 상태로 출근할 겁니까?"


 "아... 그, 그래도,"


 "솔직히 당신보다는 그 재판관부터 걱정해야 할 겁니다. 카시미어 쪽 소식이 심상치 않던데, 훈련소는 그리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파견 작전에서도 잠시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에기르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어제까지 함께 재판소에서 서류를 보던 앳된 얼굴이 남자의 머릿속을 스친다. 그도 그녀도 오랜만에 로도스에 돌아온 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는 것은, 함선에 꽤 오랫동안,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당신은 '아직' 확실히 안전하다고 말해줄 수 있어요. 웬만하면 그녀와 함께 있으세요. 박사님은 그런 걸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어떤 방향으로든 흥미를 끌 수 있다면 그 방에 들어가는 것도 피할 수 있더군요."


 "죄송, 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레온은 지금 그의 방에서 잘 쉬고 있어요. 그 끔찍한 방이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제는 아실 테죠. 씁쓸한 중얼거림과 함께 라비니아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조르디에게서 빼앗아 든 서류를 가방 속에 밀어넣고 박사의 집무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무거운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시라쿠사의 판사와, 텅 빈 복도에 우두커니 홀로 남겨진 이베리아의 서기관. 에기르는 루포가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가만히 서 있다가, 소등시간이 지나 비상등이 켜진 후에야 숙소의 문을 열었다.


 밝게 인사하는 엘리시움과 안경을 찾는 쏜즈를 뒤로 한 채 힘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오늘따라 차갑기만 한 침대 속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계속 무언가를 생각한다. 비질과 스테인리스, 위스퍼레인, 실론. 그는 전날까지 사무실에서 스쳐지나간, 아직 그 방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을 떠올린다.


 채 가시지 않은 충격 속에서 새벽까지 그들의 이름을 되새기고 나서야 조르디는 간신히 페넌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태연히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란파로의 에기르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세상은 무엇 하나 바뀐 것 없이 돌아간다. 식당은 여느 때와 같이 시끄럽고 의료부는 여느 때와 같이 늦은 점심을 급히 먹는다. 다만 잿빛 머리칼의 당찬 리베리가, 에기르의 눈에 평소보다 조금 더 잘 들어올 뿐.


 함께 식당까지 온 실론과 퓨어스트림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남자는 살짝 빠른 걸음으로 홀로 앉아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놀라 저를 쳐다보는 눈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맑게 빛난다. 그 회백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니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멘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냐고.




 "안녕하세요, 아이린 씨."


 "응, 안녕, 조르디."


"실례가 안 된다면 앞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응?"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리베리는 젓가락을 문 채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네가 앉고 싶으면 앉는 거지, 라는 짧은 허락과 함께 그녀는 맞은편에 놓아 둔 등불을 치워 준다. 조그마한 손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조르디는 오전에 확인하고 온 서류의 내용을 떠올린다. 아이린의 최근 출전 현황에 관한 서류였다.


 그는 등대 꼭대기에서 부모가 남긴 노트를 해독하던 그날, 제 뒤에서 시테러를 베어 넘기던 재판관을 기억한다. 재판소에 굴러들어온 애물단지같은 에기르를 무심하게 챙겨주던 전달자를 기억한다. 어느 고요한 새벽에 저가 만들고 싶은 이베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던 리베리를 기억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티아고의 무덤 앞에서 저와 함께 꽃을 바쳐 주던 소녀를 기억한다.


 그렇기에 조르디는 아이린에게 그 방의 풍경이 덧씌워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이 여자를 그런 곳에 보낼 수는 없다, 절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리베리는 쓰게 웃는 에기르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그는 몸이 안 좋은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서 자연스럽게 주제를 넘긴다. 식당을 한 차례 훑어보면 박사는 그들과 두어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켈시와 식사를 하고 있다.


 루멘은 아이린을 보며 싱긋 웃는다. 장갑 아래로 식은땀이 배어나와 손이 차갑게 식어간다. 소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멀쩡히 근무를 선 게 신기할 정도로, 박사는 아이린을 꽤 오랫동안 눈감아 주고 있었다.


 그는 전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털어내려 애쓰며 전달자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조금 긴장한 듯 귀끝이 붉어진 에기르를 지나가던 라비니아가 흘긋 쳐다보았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새카만 유리에 가려진 박사의 시선이 함께 들러붙고 있다.


 에기르의 황금색 눈동자는 라비니아와 함께 걷는 비질을 슥 훑고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루멘은 애써 그들을 무시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이후 한 달. 그에게는 지나치리만큼 길었던 한 달 동안, 그는 무던히 애를 쓰며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의 리베리에게 다가갔다.





 "아이린 씨,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이시면 저랑 같이,"


 "아이린 씨, 혹시 안 바쁘시면 여기 이것 좀,"


 "아이린 씨, 박사님께서 심해 탐사를 가신다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래도 아는 얼굴이 하나는 있어야,"


 "아이린 씨, 시간 되시면 같이,"


 "아이린 씨, 아이린 씨..."





 그렇게 돌연 아이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한 남자에 대해 온 로도스가 알게 될 때쯤,


 루멘과 함께 소문의 당사자가 된 검은 깃털의 리베리는, 밤하늘을 물들이는 용문의 불꽃놀이 아래에서,


 저를 향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에기르를 바라보면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끝이나 흐트러진 호흡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초조한 듯 뜯고 있는 엄지 손톱 아래,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불안에 떠는 눈동자, 잔뜩 겁에 질려 뻣뻣하게 굳은 어깨며 잘근잘근 씹었던 듯 멍이 든 아랫입술 같은 것만을, 그가 애써 숨기려 했던 것만을 세심하게 발견해 내며 생각한다.




 이 녀석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박사가 보고 있을 때만 내게 달라붙고, 박사가 사라지자마자 미안하다는 듯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면서 멀어지는 주제에,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듯이 구는 주제에,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렇게 곧 죽어버릴 것처럼 창백한 낯빛으로.




 "...내가 너한테 받고 싶었던 고백이 이런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


 "그래도 네가 좋은 걸 보면 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그렇지?"




 하지만 이미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은 자존심을 따질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버린지라, 아이린은 약간의 서운함과 함께 찝찝함이 가득 담긴 승낙을 루멘에게 돌려주었다. 에기르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작은 소녀를 품 안에 꽉 끌어안는다. 놀란 아이린이 당황하여 숨이 막힌 소리를 내지만, 조르디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을 뿐이다. 깃털을 곤두세웠던 리베리는 잠시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곧 뺨을 붉게 물들이며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팔 안에 갇힌 리베리의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되뇌인다.


 지켜야 한다고. 그 방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아이린도, 그 자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