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 애호 소설 모음


전편 링크: https://arca.live/b/arknights/102968459


링 눈나 애호하는 소설임미다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달아주시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니다 불쌍한 글쟁이에게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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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8일 06:00. 


다음 날. 


무려 10분이나 늦잠을 자버린 탓에 바이저를 쓸 틈도 없이 회의실로 뛰어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아미야와 켈시가 기겁을 했다. 



“바, 박사님! 얼굴이 왜….” 


“혈색도 없고, 다크서클도 평소보다 짙군. 거기다 여드름까지. 만성 피로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준이 아니야. 박사, 너 설마….” 



켈시의 눈빛에 한 줄기 의심이 깃들었다. 


이런,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아미야는 그렇다 치더라도 켈시에게 거짓말은 안 통하겠지.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술 먹고 만리장성 쌓다가 밤을 새다시피 했습니다, 라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별 수 없지, 방법은 하나뿐인가.  



“미안.중요한 일이 일주일치나 밀려서, 좀 무리했나 봐.”  



최대한 힘없이 웃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이럴 때는 99퍼센트의 진실에 1퍼센트의 왜곡을 곁들인 뒤, 잘 버무려 여론을 호도하는 게 최선이다. 


실제로 일은 딱 일주일치 밀려 있기도 하고. 


어제 밤 열한 시까지는 영혼을 불태워 열심히 일한 것도 사실이지. 


무엇보다 지금의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링과 관련된 일이니, 딱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건가. 박사, 너의 업무 강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켈시의 눈빛에 서려 있던 한 줄기 의심이 측은함으로 바뀌었고. 



“죄송해요, 박사님. 저는…제가 사장인데, 항상 박사님과 켈시 선생님께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아미야의 당나귀 귀가 힘없이 축 처졌다. 


좋아, 야무지게 속아 넘겼구만. 


동정심 유발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화제를 전환할 차례다. 



“아미야, 켈시. 난 괜찮아. 오늘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뭐. 그럼, 오늘 안건은 뭐야?” 


“...흠, 그런 건가. 알겠다. 이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아침은 일찍 온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우리 셋의 일과는 훨씬 빠르게 시작되지. 


일명 하루의 스타트를 끊는 로도스 수뇌부 회의. 



“오늘의 안건은 총 네 개다. 첫째, 빅토리아 힐록 카운티에서 일어난 감염 폭발 대처. 4년 전, 그곳에서 더블린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다량의 무기화된 오리지늄이 사용되었지. 빅토리아 당국에서도 최대한 대처하려 했지만, 대공작들 및 의료진들의 협조 미비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렇게 물 밑에서 확산되어 가던 감염세가, 어제 23시를 기하여 폭발했다는 소식이다.” 



대부분 켈시가, 그리고 가끔 내가 중요한 안건을 제시하고. 



“정식으로 협조 요청 공문이 온 거야?” 


“그래. 힐록 카운티 시장에게서 약품과 의료진을 파견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현지의 정확한 사정은?” 


“최악이다. 아직 정확한 감염자의 수조차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더군.” 


“그럼 일단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좋겠네. 우선 소량의 약품을 빅토리아 지부 쪽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현지 의료진과 협력해 사정 조사를 지시하자.” 


“남는 감염 억제제가 없을 텐데?”        

       

“지난 달에 용문이랑 계약 찐빠나서 꿍쳐둔 재고 좀 있잖아. 삼백 명에게 일주일 동안 처방할 분량은 있어.” 


“그런 건가. 아미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그 안건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을 말하면. 



“워낙 급박한 사안인 만큼, 일단 박사님 말씀대로 하죠. 하지만 저희 의료부 인원들을 함께 보내는 게 더 나아 보여요. 광석병에 관해서는 저희만한 전문가가 없으니까요. 이번 기회에 힐록 카운티에 작은 진료소를 차리는 것도 좋겠네요.” 



아미야가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을 참조해 대략적인 방침을 정한다. 


이 회의에서 정해진 방침이, 엘리트 오퍼레이터들과 각 부서의 수장들에 의해 구체화되고. 


실무자들의 노하우가 더해져 로도스 아일랜드가 나아갈 길이 되는 것이다. 


내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봐도 되고. 


하지만 딱히 부담은 없다. 


누가 그랬잖은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는 즐겁고 냉정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두 사람과 즐겁게 토론을 하다 보니 금방 회의가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걸로 마지막 안건이로군.” 



그런데 켈시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앞선 안건들을 소개할 때는 가면을 쓴 듯한 무표정이었는데. 


확연히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서 고뇌하는 듯한, 그러나 어딘가 후련하기도 한 듯한 기색이 엿보인다.   



“뭔데 그래?” 


“염국 측에서 온 소환장이다.” 


“소환장? 우리한테?” 



전혀 뜻밖의 말에, 즐기면서 가자는 마인드가 싹 가시고 황당함이 뇌리를 가득 채운다.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 


아무리 염국이 테라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라지만, 남의 나라에 적을 둔 회사에 소환장을 보낸다고? 



“이유는? 아니, 누구를 소환했는데?” 


“박사, 너다.” 


“나를?” 


“그래. 현재 로도스 아일랜드에 체재하고 있는 염국 출신 오퍼레이터들….” 



아니, 아니지. 


조용히 중얼거리며, 켈시는 안경을 벗고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오퍼레이터 니엔, 시, 링, 총웨. 최근 로도스에 합류한 쉐이 오퍼레이터들에 대해 청문회를 열고자 한다는군. 거기에 중요 참고인으로서 너를 세우려고 하는 것 같다.” 


“...뭐?” 



의자 팔걸이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건 뭐, 전쟁하자는 건가.


우리가 체르노보그를 우르수스 눈 앞에서 공중분해시켜 버렸을 때도 소환장은 안 왔어. 


아무리 염국이 쉐이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오만하잖아.  


아미야와 켈시도 마찬가지의 생각인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박사, 이 안건은 전적으로 너에게 일임하지. 아미야, 괜찮겠나?”  


“...네.” 



아미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동작에서, 그녀가 지금 느끼는 충격과 무력함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순간 부아가 치밀고, 있는 연줄 없는 연줄 전부 동원해 염국을 한바탕 뒤흔들고 싶다는 충동이 들꿇었지만…. 


무모한 짓에도 정도가 있지. 


심호흡을 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연다. 



“선택권이 없네. 갈게.”   


“미안하다, 박사.” 



작게 입술을 깨무는 켈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켈시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 


로도스 아일랜드는 붙잡고 있는 동아줄이 많을 뿐, 현재 테라를 주름잡는 강대국들과 비할 바는 못 된다. 


놈들 중 하나가 이런 폭거를 저지른다면, 일단 숙이고 들어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 


뭐, 링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허허 웃으며 염국 군부를 단신으로 뒤집어엎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상상을 하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러고 보니, 링은 지금쯤 일어났으려나. 


빨리 돌아가서 같이 아침 먹고 싶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기가 싫어졌다.  



“아니야.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무리짓자. 나는…생각 좀 해 볼게.” 



약간은 성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켈시가 붙잡았다. 



“아니. 안건은 아직 하나 남았다.” 


“응? 분명히 방금 게 마지막이라고….” 

 

“음. 이건 공식적인 사안은 아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사. 휴가를 다녀오지 않겠나?” 


“...잉?” 



나는 미미하게 미소짓는 켈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염국이 고지한 청문회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약 2주 뒤다. 오늘 이후부터 청문회 일시까지의 시간을, 네게 휴가로 주도록 하지.” 


“켈시, 제정신이야?” 


“물론 제정신이다. 아미야는 물론이고, 다른 로도스의 원로들이나 엘리트 오퍼레이터들도 만장일치로 동의한 사안이지. 항상 고생하는 네게 주는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하도록.” 


“원래는 기분 좋게 박사님을 보내 드리고 싶었는데…이런 일이 겹칠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박사님.” 



거기다 죄송한 기색을 가득 담아 애써 웃는 아미야까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한창 헤쳐 나가는 와중에, 갑자기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 것처럼 갑작스레 기분이 고양된다. 


들떠 가는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아미야는 멋지게 화룡점정을 찍어 주었다. 



“물론 회사 법인카드는 자유롭게 쓰셔도 돼요. 아, 함께 가고 싶은 분이 있으시다면 그 분도 데려가셔도 되고요.”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미야, 켈시! 고마워!” 



나는 그대로 회의실 문을 박찼다.  


그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



그 시각, 링은 총웨의 방에 있었다. 


그녀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박사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옆에 박사가 없길래,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가. 


때마침 아침 운동을 끝내고 숙소로 복귀하던 총웨와 딱 마주쳤고.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덜미를 잡혀 그대로 질질 끌려온 게 전부다.  


한참을 말없이 링을 바라보던 총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링, 솔직히 말해 다오.” 


“뭘?” 


“어젯밤, 박사와 뭘 했지?” 


“꼭두새벽부터 사람을 불러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링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방 안에 모인 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그런 그녀에게 쏟아졌다. 


다 안다는 듯 히죽히죽 웃는 니엔. 


아연한 표정으로 링의 시선을 피하는 시. 


그리고 언짢은 기색을 숨길 생각도 안 하는 총웨까지. 


그 광경에, 얼마 전 박사와 함께 봤던 단국 드라마의 한 장면이 링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부잣집 아가씨가 집사와의 금단의 사랑을 들켜 가족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때,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박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저 주인공, 왜 저렇게 비굴한 거야?’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반성하는 거 아냐?’ 


‘뭘 반성하는데? 집사를 사랑한 거?’ 


‘...음.’ 


‘사랑이 잘못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애초에 시작을 안 하면 돼. 하지만 이미 시작해 버린 관계라면, 끝까지 당당해야지. 이미 관계를 맺어 놓고, 문제가 되니까 그걸 잘못으로 치부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글쎄, 그대여. 


사실 그 말에는 동의가 잘 안 돼.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강과 같아서, 제방의 형태에 따라 흐름을 바꾸는 법이잖아. 


주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뜻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모래알 속의 진주처럼 드물어. 


뭐, 개인적인 단상을 읊자면 그렇지만….


그래도 그대에게 비굴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링이 덤덤하게 입을 열려던 찰나. 



“언니, 혹시 박사랑 했어?” 



쉐이 가문의 정신나간 아홉째, 니엔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 당돌함에 링은 자기도 모르게 잠시 얼어붙었고. 


그 찰나의 침묵이 곧 이 자리의 모두에게 하는 대답이 되었다. 



“푸하하하! 했네, 했어! 시야, 믿어지냐? 우리 맏언니 드디어 아다 뗐다!” 


“시끄러워…!” 


“천지신명이시여, 원시천존이시여….” 



폭소하며 옆 자리에 앉은 시를 마구 흔드는 니엔. 


그런 니엔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시.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도호를 외는 총웨까지. 


지금의 이 혼란을 낳은 게 니엔의 발광인지, 아니면 자신의 침묵인지 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 썰 좀 풀어봐. 박사 물건, 봐줄 만 하지? 저번에 우연히 봤는데, 어우. 바지 아래에서도 *용문 음담패설* 하고 *염국 음담패설* 하더라고. *상촉 음담패설* 아니야? 기분 좋았어?”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당장 저 못난 여동생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거다. 


스스로를 욕하는 건 참아도 박사를 더럽히는 건 참지 못하게 되어 버린 링이었다. 



“훗.” 



차갑게 웃으며 몸을 일으킨 링이 어느 새 손 안에 생겨난 술병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엑.”  



그리고 그대로 니엔의 뚝배기를 깼다. 


깡! 


청명한 소리와 함께 니엔이 웃는 얼굴 그대로 뒤로 고꾸라지고. 


정신없이 니엔과 링의 눈치를 살피던 시가 그림 속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그제야 평온이 내려앉았다. 


꼴꼴꼴, 술을 그대로 들이킨 링은 입을 닦으며 총웨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빠. 우리 어디까지 했었지?” 


“링, 어찌 그런 짓을 했느냐.” 



창백해진 얼굴로 되묻는 총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링은 그의 목소리에서 몇 가지 감정을 읽어냈다. 


아주 희미한 기쁨과 당황,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 



“오빠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어.”  



훠궈 솥 안의 재료들처럼 복잡하게 뒤섞인 그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기에, 링은 짐짓 밝게 대답했다. 



“인간과 쉐이의 사랑은, 항상 한 쪽이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는 걸로 끝난다고 했지?” 


“...그걸 아는 녀석이.”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이 총웨에게는 가 닿지 못한 듯, 총웨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링. 인간을 동경하는 것도, 인간들 속에 섞여 사는 것도 우리의 권리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지. 하지만 사랑만은 다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과 쉐이에게는, 그런 공통점으로도 차마 덮을 수 없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했다. 



“살아가는 시간이 다르지 않으냐.” 



인간은 과거에서 태어나, 현재에 발을 딛고 미래에 도달해 잠드는 존재. 


그들의 삶은 이 절차를 밟는 하나의 과정이며, 극소수를 제외하면 예외는 없다.   


하지만 쉐이는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언제 탄생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영겁을 떠돌다 순식간에 구름처럼 흩어질 운명. 


그들의 삶에 순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인연을 엮고, 추억 위에 또 추억을 겹쳐 성을 쌓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 앞에 풍화되어 한 줄기 모래로 화할 뿐. 


그렇게 부질없는 발버둥을 반복하다, 머지않아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존재가 쉐이다. 



“이제 와서 우리의 처지를 비관하고자 함은 아니다. 링 너를 힐난하고자 함도 아니고. 그저, 그저….” 



그런 쉐이인 링이. 


한낱 인간에 불과한 박사에게 다가가, 그의 마음에 특별한 의미로 자리잡고. 


마침내는 그의 일부가 되었을 때. 


그리고 언젠가 운명에 의해 그에게서 떨어졌을 때. 


혹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박사가 순리에 따라 대지로 돌아갔을 때. 



“박사의 친우로서, 그리고 너의 오라비로서…너무도 안타깝구나.”  

           


자신의 가장 소중한 한 부분을 잃어버린 박사가.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링이. 


광활하고 차가운 이 땅 위에서 삶의 의미를 영원히 상실한 망령이 되어, 끝없이 과거만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굳이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총웨에게는 선명히 보였다. 



“링, 부탁하마. 지금이라도 멈추거라. 그 편이, 너와 박사를 위한 일이다.” 


“...오빠, 그건.” 


“어찌 촛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고자 하느냐.”  



그의 중저음에 섞인 나직한 떨림이, 링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자신은 친구가 상처입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며. 


자신의 형제자매가,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한 대가로 고통받는 모습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그 감정은 아플 정도로 링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물론 가슴 한 구석에서 자신은 불나방이 아니며, 박사는 더더욱 촛불 따위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링은 한숨을 내쉬며 총웨에게 다가갔다. 



“이 순간이 천 년일 수 있을까?” 


“...링.”    


“하지만 찰나일지라도 상관은 없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어젯밤, 박사가 내게 했던 말이야.” 



뜬구름을 잡으려는 듯, 언뜻 듣기에는 아무 의미 없는 말.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총웨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콰당, 그가 격하게 몸을 일으킨 탓에 넘어진 의자가 바닥에 거칠게 나뒹굴었다.  



“링, 설마…박사는.” 


“그래. 맞아. 박사는 이미 각오하고 있어. 나 이상으로.” 



총웨는 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인이며, 방랑자이자, 몽상가인 그의 첫째 여동생. 


구름 위에서 수천 년을 함께하고, 구름 아래에서 또 수천 년을 떠돌며 본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총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분명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을 거야. 하지만 술 한 잔으로 천 년을 지새우고, 지난 밤을 돌아보니 순간이라 했던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든, 결국 지나고 나면 찰나의 기억에 불과한 것을.”  



링은 살풋 웃었다. 



“만약 나의 순간에 박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박사가 꾸는 천 년의 꿈에 내가 함께할 수 있다면…우리는 분명 행복할 거야.” 


“하지만, 링.” 


“그래, 알아. 오빠 말대로, 인간과 쉐이의 시간은 다르지. 하지만 세상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인간이야.” 



서로 살아가는 시간이 다를지언정.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감정을 가슴에 품는다. 


설령 그 시간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천천히, 조금씩 서로 맞춰 나가면 돼. 우리라면, 적어도 사소한 차이 한두 개 정도는 눈감아줄 만큼….” 



서로를 생각하니까. 


어쩐지 낯간지러워 마지막 말을 삼키고 숨을 내쉰 링은, 멍하니 서 있는 총웨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 고마워, 큰오빠. 하지만 우리는 괜찮아.” 


“...하지만 로도스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지 않으냐. 박사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혹여나 박사가 그들에게 눈을 돌리기라도 하면….” 



링은 실없이 웃었다. 


나 참. 


큰오빠답지 않게 유치한 소리를 다 하네. 



“옆에 내가 있는데?” 


“......” 


“대화 즐거웠어, 오빠.” 



링은 술병을 둘러메고 몸을 돌렸다.   


이 짧은 담화를 통해 총웨가 자신을 이해했든 하지 못했든, 링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당당했으니까. 


제 3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말든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다. 


상대가 총웨든, 그녀의 다른 형제자매든, 아니면 염국의 진룡 황제든 상관없다. 


그 누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 그녀의 섵부른 결정을 헐뜯고, 잔혹한 짓이라 깎아내릴지라도, 그녀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다. 


쉐이의 셋째, 링은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를 사랑하노라고. 



“....응원하마, 링. 힘내거라.”  



등 뒤에서 들려온 자그마한 목소리에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선다. 

 

박사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 창 밖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해를 보았다. 


곤히 잠든 세상에 빛을 뿌리는 것조차 실례일까 두려워, 구름 깔린 수평선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수줍게 고개를 디미는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시상이 떠올랐다. 


그 시상을,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소동을 박사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박사는 뭐라고 할까. 


니엔의 음담패설을 들으면 박장대소를 할지도 모르겠네, 은근히 그런 농담을 좋아하니까. 


큰오빠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해 주면 뭐라고 반응하려나. 


부끄러워하려나, 아니면 감동해 주려나? 


어느 쪽이든 좋아. 


지금 당장 그대가 보고 싶어. 


그 마음이 강해질수록, 점점 동이 터 오는 복도를 달려가는 링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링!” 



마침 복도 저편에서 박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굶주린 아다크리스에게 쫓기는 것 마냥 헐레벌떡 뜀걸음을 하는, 그녀의 연인. 


링은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박사. 좋은 아침이야.” 


“응, 좋은 아침.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들어봐, 방금 켈시랑 아미야가 나한테 휴가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링의 손을 꼭 잡고 열심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박사. 


이런, 아무래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건 조금 미뤄야 할 것 같네. 


아무려면 어때, 그런 사소한 것 쯤. 


눈 앞에 그대가 있는데. 



“진정해, 그대여. 지금 급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는 도망치지 않아. 둘이서 아침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내가 뭐라도 만들어 줄게.” 


“같이 하자. 나도 요리 잘해.” 


“후훗, 그래.” 



링은 미소를 지으며 박사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총웨 오빠, 오빠가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아. 


우리가 맞이하게 될 귀착점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고. 


하지만 벌써부터 결말을 생각하기에는 눈 앞의 기, 승, 전이 너무 아름다워. 


쉐이의 시간이든, 인간의 삶이든 전부 알 바 아니잖아. 


적어도 우리가 함께인 이 순간만큼은.  


쉐이 합체까지, D-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