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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의 창문 너머로도 뜨겁게 느껴진 햇살이 내 머리를 친히 달궜다. 함선에서 내린 직후부터 느껴지는 열기. 몇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고, 적응도 안 된다.

해변 도시 시에스타. 이젠 이동 도시 '뉴 시에스타'. 이동도시가 됐더니 확실히 인프라 설계도 많이 바뀌었다. 현지인들이 일컫는 옛 시에스타, 통칭 '파파 시에스타' 시절엔 꽤나 정감 가는 마을의 향기가 느껴졌는데, 지금은 꽤나 화려한 도시의 풍경이다. 저 멀리 보이는 큰 규모의 워터 파크가 전에 말한 스와이어가 개장한 워터 파크겠지. 

"그나저나, 이제 뭐하지..."

이미 시에스타 지부 담당자인 메딕 오퍼레이터 실론에게 보고도 받았지만, 아직 해가 중천이다. 모처럼 온 휴양지인데 벌써 호텔에 들어가서 자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마땅히 놀러갈 만한 곳도, 같이 놀 사람도 없는 게 문제다. 거기에 스와이어가 첸이랑 나에게 만나자고 한 시간도 아직 2시간 후고.

"어? 박사님이신가요?"

일단 길거리라도 돌아볼까 하는 심정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뒤에서 중성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웬만해선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목소리였다는 문제지만. 

고개를 돌리니 액면상으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청년이 날 향해 반갑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돈된 뿔과 황토색 머리카락이 반짝이며, 그 아래로 혈기와 침착함이 공존하는 안광이 인상적인 외모. 몇 년 전에 비해 꽤 커진 체격에 맞춰 입은 깔끔한 정장과 한 손에 쥐고 있는 가방이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마운틴대쉬 로지스틱스 사장의 아들이자,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디펜더 오퍼레이터로서도 근무한 적이 있던 소년.

그리고, 지금 스와이어의 사업 파트너. 바이슨 피데스.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바이슨."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시에스타엔 무슨 일이세요?"

전혀 예상 못했다는 거 같은 저 반응. 설마 스와이어한테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던 건가? 그렇다는 건 첸이랑 나를 부른 게 단순한 휴양지 초대나 비지니스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겠군. 그것도 자기 사업 파트너에게 비밀로 하고 불렀다니.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다. 혹시 모르니 일단은 적당히 답해줘야겠다.

"로도스 각 지부의 반기별 보고를 받으러 왔어. 방금 다 받은지라 이제 뭘 할지 고민 중이었고."
"아하. 오신다고 연락이라도 해주시지. 그랬으면 환영회라도 준비했을 텐데요."
"됐어. 그럴 대접 받을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럴리가요. 박사님이라면 귀빈으로 맞이해야죠."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대기업의 자제들은 저런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말하는 게 종특인 건가? 들어서 기분 나쁠 건 없지만, 역시 저런 말은 익숙치 않다.

"사업은 잘 되가?"
"네! 다행히 순항 중이에요. 스와이어씨가 여러모로 도와준 덕이죠."
"..."

꿈틀. 

화제를 돌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그 답변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숨이 갑자기 턱 막히면서,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별 의미 없는, 동업자를 띄워주는 것일 뿐인 겉치레다. 그것에 반응할 필요도 없고, 뭐라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그럴텐데. 분명 그럴 것인데. 아무래도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응어리진 감정으로 뒤덮인 내 몸은, 이해해줄 수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네?"
"스와이어가 여러모로 도와줬다며. 어떻게?"
"어떻게라니... 음. 거침없다고 해야 되나. 예상외의 수단을 찾는데 정통하다 해야 되나... 가끔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지만, 아무튼 배울 게 많은 사람이긴 해요."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많이 좋은 거 같던데. 잡지 기사가 핫한 것도 현재 진행형이잖아?"

시에스타에서의 공동 사업 발표가 있는 이후로, 재계 뉴스 기사에서 바이슨과 스와이어의 스캔들이 종종 올라오는 걸 본 적이 있다. 둘이 산책하는 장면이나, 같이 식사하는 장면 등. 그걸 보고 마운틴 로지스틱스와 스와이어 가문의 정략 결혼 전략이라는 등 오만 가지 소리를 지껄이는 기사를 보고 위가 쓰려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 때문에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장면들이 꿈속에서 튀어나와, 눈을 감기가 싫어져 밤을 지새우는 일이 지금도 가끔 있을 정도니까.

"어휴. 그런 말씀 하지도 말아요. 그 스캔들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인데요. 스와이어씨가 사업 파트너로서는 괜찮을지 몰라도, 이성 관계로선 진짜 아니에요."
"글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괴로웠던 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날 떠난 그녀의 얼굴이었다. 날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즐거운 미소. 분명 내가 독점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모든 것이, 지금은 내 눈앞에 있는 청년에게 향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언젠가는 그 스캔들이 진짜가 될 수도 있잖아?"

알고 있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이미 종언을 고했다. 그저 비즈니스 관계든, 거꾸로 내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되었든. 그녀가 새로운 인연을 가지는 것에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록 마음 속 심연의 불꽃은 더욱 일렁인다. '왜?' 라는 단어 한 글자는 그 불꽃에 기름을 들이부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눈앞에 있는 청년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잘 해봐. 느긋하게 마음먹으면 다른 사람이 낚아챈다고? 어딘가의 누군가처럼."
"...박사님."

일촉즉발할 불꽃의 열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눈앞의 포르테 청년은 다소 진중해진 어조로 나를 응시해 왔다.

"역시 스와이어씨가 아직 신경 쓰이시는 거죠?"

순간적으로, 명치를 주먹으로 한 대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답하려고 해도, 기도 사이에 무언가가 막혀 옅은 탄식만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런 나의 침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바이슨은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
"스와이어씨는, 박사님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 뭐...?"

잘못 들었나 싶어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누가, 누구를 잊은 적이 없다고? 

"틈만 나면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요."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어떤 걸 했는데? 정확히 뭐를?" 
"음... 보통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박사님을 언급한다...고 해야 하나요. 문제가 있을 경우엔 '박사라면 이렇게 할 거다'라거나, 뭔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면 '예전에 박사랑...'이라며 운을 띄우거나... 그 외에도 대화할 때 최소 절반은 박사님 이야기였어요."

놀랍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입이 벌어진 채 닫히지를 않는다. 이래선 물속에서 뻐끔거리는 금붕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뭐라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기초적인 것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표백되어 갔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이랑 다른 방향으로 마음속의 불꽃이 점화되는 게 느껴졌다. 퍼즐 조각이 나열되며 정지되었던 뇌내 프로세스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알게 됐는지. 그리고, 조금 전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매 순간이 다시금 생각나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호텔에 가서 배게를 향해 수십 번이고 주먹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 내가 잠시 좀 머리가 어떻게 됐나보다. 다 큰 아저씨가 한참 어린애한테 뭐하는 짓인지."

눈앞의 청년은 아무 죄가 없다. 그저 과거에 얽매이고 있는 한심한 놈이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 태도로 대했으면 기분이 나빴을 법한데, 바이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만약 두 분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다면, 서로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의외로 대부분의 오해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거든요."
"바이슨... 성장했구나. 여러모로."

펭귄 로지스틱스에 있던 시절 때부터 봐온 거지만, 저런 포용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기에 사업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거겠지. 지난 몇 년 간, 그가 얼마나 변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설파했던 게 나였는데, 오히려 지금은 나만 과거에 맴돌고 있을 뿐이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무안함을 감추려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눈앞에 있는 작은 사장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이제 앞으로 남은 건 키뿐이네."
"윽... 아픈 건 찌르지 말아주세요."

키라는 말에 반응하는 뾰로통한 표정. 그래도 아직은 소년 때의 감성이 남아있구나, 라고 생각할 때 바이슨의 와이셔츠 속 주머니에서 단말기의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겠다는 듯, 그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다음 스케줄이 있는지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해. 오늘 고마웠어."
"전 딱히 한 게 없는걸요. 그럼 부디 시에스타를 즐기고 가주세요. 가능하면 두 분이서요!"

마지막에 하는 말에 뭐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려고 했을 땐 이미 포르테 청년은 저 멀리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살짝 머쓱해진 나머지 머리를 긁적이며, 수평선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양을 잠시 응시했다.

"서로 진솔하게, 이야기라..."

사무실에서 그녀와 재회했을 때. 왜 날 떠났느냐. 무엇이 문제였느냐. 생각 해보니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공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아니. 어쩌면, 그걸 물어보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했던 게 아니었을까?

발걸음을 옮기며 잠시 사색에 잠기려 할 찰나에, 주머니 속에서 알람이 들려왔다. 단말기로부터 메세지가 수신됐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발신인은 다름 아닌ㅡ

"...이걸 받아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ㅡ스와이어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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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람 명붕이 6주만에 제대로 된 글쓴다... 뭔 일이 있었냐면 회사에서 다른 배에 결원 생겨서 날 그쪽으로 파견보내서 새 장소 적응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음. 근데 곧 또 하선한다는 게 유머네. 한동안 꼴리지 않냐 시리즈 위주로만 적다가 다시 신뢰도 300 시리즈로 돌아옴.


이번 화는 아무래도 스와이어가 애정캐였던 명붕이들에게 있어 많이 의미 있는 화라 생각함.

갑자기 독타에겐 쌀쌀맞아지고 이벤트 스토리에선 바이슨이랑 사업 파트너가 되는 내용이라던가... 여러모로 팬 입장에선 '스와이어를 바이슨에게 ntr당한 느낌'이었을 거거든. 일단 나부터 그랬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주된 내용으로 이번 화를 작성했음. 바이슨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실연당하고 아직 정신 못 차리는 독타의 찌질해보이면서도 현실에도 있을 법한 그런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 집중함.


곧 하선이라 이제부터 주기적으로 올려볼게. 가능한 한 5월 이내로 끝내고 별눈나편 진행해야지.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