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언더타이즈 노래에 팍 꽃혀서 나가는 길에 짧게 찌끄려보는 단편.

미즈키록라를 재미있게 즐긴 명붕이들이라면 대부분 알겠지만, 망가진 죽간이라는 소장품이 있음. 소환물의 배치 수 소모를 없애주는 개사기 소장품이지.

그리고 링의 2정 일러 코트 안쪽을 보면 죽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알 수 있음. 즉, 이 소장품은 링의 물건으로 추정됨.

이 글은, 그렇다면 링이 이베리아에 와 모종의 이유로 시테러들과 맞서다 끝내 패배한 건 아닐까 하는 상상력에서 발로한 if작품임.

너무 링만 가지고 우려먹는 것 같아서 명붕이들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당장 떠오르는 영감이 링 관련된 것들밖에 없어서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앞으로 더 매력있는 캐릭터들로, 나도 명붕이들도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소설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

잡설이 길었네. 항상 부족한 내 글 재밌게 읽어줘서 고맙고,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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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불고, 바다가 몸을 일으켰다.

파도를 향해 용맹히 돌격했던 기사의 창은 꺾였으며.

미즈키는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는 오퍼레이터 스카디를 잃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바다는 우리의 예상보다 아득히 잔인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한순간에 앗아갔음에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걸까.


"크, 윽...박사, 도망...쳐...."


탐욕스러운 물보라는 이베리아가 자랑하던 데스트레자를 꺾어 짓부수었고.


"박...사님, 죄송...부디 이베리아를...세계를...."


질서와 진리를 밝혀 비추던 재판소의 등불을 꺼트렸으며.


"어비셜 헌터즈,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설령 우리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 괴물이 박사를 손에 넣게 해서는 안 된다!"


파도 사냥을 업으로 삼은 가장 강인한 사냥꾼들마저 집어삼킬 듯 사납게 일렁거렸다.


"쏜즈...아이린...글래디아, 울피안, 로렌티나...."


내 동료들, 내 소중한 친구들.

그들의 이름을 되뇌이는 내 목소리가 처량하리만치 떨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어떤 책략을 짜내야, 어떤 세력을 끌어들이고 얼마나 광대한 판을 짜야 저 바다를 상대로 이길 수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리 와, 박사.]


과묵하고 엉뚱하면서도,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든든했던.

항상 내 곁에 다가와, 자신의 아름다운 은발 머리를 말없이 자랑하던 소중한 내 친구를.


[우리의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자.]


그리고 이제는 세계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본능만이 남은.

그 본능에 따라 파도의 만가를 부르며,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가라앉혀 가는.

그런 괴물이 되어버린 너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스카디...."


쿠르릉, 콰앙!

빗줄기 사이를 가르며 번개가 내리쳤다.

그 찰나의 섬광에, 수면을 가득 메운 채 넘실거리는 리바이어던의 검푸른 비늘이 비쳤다.

그 섬뜩한 모습이 절망에 잠겨 가던 내 정신을 급격히 부상시킨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저것은 바다 따위가 아니며, 괴물처럼 하찮은 것 또한 아니다.

지금, 스카디의 옷을 입고 스카디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저것은 이미 하나의 신이다.

소름 끼치리만큼 아름답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두려워하지 마. 금방 끝날 테니까.]


그녀가 나를 부른다.

저 깊은 해구 아래로, 빛이 들지 않는 심연 한가운데로.

먹구름과 암흑뿐인 세계에서, 너의 존재만이 유일한 광원으로서 명멸하고.

이 바다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다시 하나가 되자며 손짓한다.


"박사? 지금 무슨...!"


점차 의식이 혼탁해지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바다를 향한다.

저항은 의미없다.

계략도, 수싸움도, 전부 하잘것없다.

그녀가 부른다면, 나는 그저 달려갈 뿐.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아래로, 저 아래로 가라앉을 뿐이다.

만물이 바다를 통해 잉태되었으니.

사필귀정, 마땅히 바다로 돌아가리라.

순식간에 내 몸이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서고.

나를 환영하듯, 상냥한 잔물결들이 절벽을 간지럽힌다.

지금 갈게, 이샤-믈라.

그렇게 내 발이 대지에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는 순간.


"저런. 자포자기하기는 아직 일러, 그대여."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누군가의 손이, 내 팔을 잡아챘다.

꿈에서 깨어나듯, 수면 아래로 떨어지던 의식이 각성하고.

나를 구해 준 사람의 얼굴이 망막에 또렷이 맺혔다.

하늘을 닮은 파란 머리카락, 세월이 선사한 지혜가 담긴 보랏빛 눈동자.


"링? 네가 왜 여기...."


쉐이의 셋째, 링이 그곳에 서 있었다.
 
평소의 여유가 사라진.

그러나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바다를 응시하며, 링은 나를 절벽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

"...없지."

"그래, 현명한 선택이야. 지금 당장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후퇴하도록 해."


후퇴라.

나도 진작에 후퇴를 고려하긴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평선 너머에서 일렁거리는 저것의 모습을 본 그 순간부터.

하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덤벼들어도 저것의 발을 잠시 묶는 것조차 버거운데, 어떻게 후퇴를 하란 말인가.

그런 내 의문에, 링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는 내게 맡겨."

"링...?"

"뭐, 무조건 이기겠다 장담은 못 하지만...적어도   시간벌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무리다.

링이 아무리 신적 존재라고는 하나, 결국 열둘로 쪼개진 파편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완전체 쉐이가 와도 될까말까하는 마당에, 그녀 혼자 저것에게 맞선다는 건 자살행위다.

결국 또 소중한 동료 한 명을 잃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서 다 함께-

그렇게 피를 토하듯 외치는 마음의 소리를, 나는 간신히 억눌렀다.


"...미안해, 링."


전략가라면 감정보다는 이성을 우선해야만 한다.

패색이 짙은 상황이라면 더욱이.

냉정하게 봤을 때, 그녀를 버림패로 내던지는 것 이외의 방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죄책감을 담은 내 사과에, 링이 맑게 미소지었다.


"뭘. 지금껏 그대에게 얻어먹은 술이 얼만데. 이럴 때라도 기합 넣고 일해야지."

"부탁할게."

"아,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 내 생명이 끊어지기 전까지 너희들을 보호해 줄 거야."


그녀가 건넨 건 한 권의 죽간이었다.

죽간의 정체를 물을 틈도 없이 그것을 품 안에 쑤셔 넣은 나는, 곧바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오퍼레이터들을 향해 외쳤다.


"총원, 후퇴! 후방에 있는 지원부대와 합류해, 최대한 빨리 이베리아를 벗어난다! 부상자를 부축해!"

"라져!"

"응,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는 링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링,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을게."


친우로서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 얄팍한 위선에, 링이 용맹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오퍼레이터 링. 신으로서 구름 위에서 태어나 산봉우리를 거닐며 살아가다, 대지의 인간들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함이니. 이 생애에 한 점 후회조차 없노라."

"......"

"죽간이 부러지고 술병이 메말라도, 친우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함이니라."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눈이 멀 듯한 빛이 폭발한다.

저 거친 바다조차 주춤하게 할 만큼 절대적인 광휘가.


"그대여,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 내 동생들, 잘 부탁해."


잠시나마 물러난 파도 앞에서.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애틋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링?"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가와 새가 쪼는 듯한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행동에, 내가 주변 상황조차 잠시 잊고 멍해진 사이.

한 수 접었던 바다가, 조금 전 이상의 분노를 품고 날뛰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잘도, 잘도, 잘도, 잘도, 잘도잘도잘도잘도잘도잘도내앞에서나의 박사를]

"그래, 그거야. 나를 봐라."


짧게 읊조린 링은,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쳤다.


"이제 가, 그대여. 빨리. 돌아보지 말고, 이 저주받은 바다를 떠나. 그리고...모두를 구해줘."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꾹 누르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쓰러진 쏜즈와 아이린을 서둘러 부축하고, 어비셜 헌터즈를 수습해 후퇴하는 길.

분노한 바다의 아우성과, 이를 맞받아치는 링의 호기로운 외침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죽인다죽인다가라앉히고침몰시켜서형태도남지않게분질러주마나의박사나의가장소중한동포를더럽힌죄그몸으로갚아라]

"오냐.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보거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네년의 더러운 파도는 단 한 치의 땅도 침탈하지 못할지니."


나도 모르게 미약한 희망을 품게 만드는 그녀의 당찬 목소리에.

나는 돌아보지 말라던 링의 부탁을 잊고, 무심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강산도, 그 위에서 살아가는 억조창생도, 그들이 꾸는 덧없고 아름다운 꿈도. 무엇 하나 넘기지 않는다!"


그리고 내 눈이 향한 곳에는.

빛이 있었다.

거칠게 땅을 내려친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다시 한 번 광채가 피어나고.

그 빛을 따라 현실이 찢어지며.

존재할 리 없는 꿈의 파편이 현세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오너라, '시엔징'! 어디 걸판지게 한 번 놀아 보자꾸나!"


경쾌하게 외친 그녀의 춤추듯 하는 손짓에 따라, 미약한 반짝임에 불과했던 파편들이 점차 덩치를 불리고.

사위를 집어삼킨 어둠을 물리치며 형태를 갖춘 끝에.

링을 꼭 닮은 푸른 비늘의 거대한 용들이 되어, 그녀의 곁을 지킨다.

이에 맞서듯, 바다에서 리바이어던이 고개를 쳐들었다.

찰나의 순간.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난 이 전장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괴수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가서 찢어라, 시엔징!"


링의 호령을 신호탄 삼아,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를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녀의 용 중 한 마리가 리바이어던의 거체를 들이받아 암초에 처박자, 바다가 요동쳤고.

리바이어던이 그 용을 거대한 아가리로 물고 바다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자, 나머지 용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놈의 비늘을 갈라찢었다.

언뜻 길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시테러는 결코 혼자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죽이고뜯고해체하고포식하고진화한다]

[동족이되어바다로돌아가자꾸나모든것이시작된근원지로]


리바이어던의 괴성이 귀를 찢을 듯 울려퍼지자마자, 바다에서 무수한 시테러들이 불개미 떼마냥 기어올라와 링의 용을 붙들고, 올라타 물어뜯기 시작했다.

산 채로 해체되어 가는 용의 구슬픈 단말마에, 소름이 끼쳤다.


"그대여, 어서! 가!"


지팡이를 우아하게 휘둘러 곧바로 새로운 용을 꺼낸 그녀였지만, 그녀도 알고 있을 터.

결국에 생명인 이상, 링의 힘은 유한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인 바다의 권능은 무한하다.

승산 없는 싸움을 이어나가는 그녀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최대한 빨리 장소를 이탈하는 것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간헐적으로 시테러들이 덮쳐 왔지만, 그 때마다 품 속에 넣어 뒀던 링의 죽간이 빛을 발했다.

우리는 그저  그녀의 은혜에 기대어, 안전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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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우리는 무사히 이베리아 국경을 벗어나, 테라 각국에 시테러의 폭주 사실을 전달했다.

서로 싸우기 바쁘던 테라의 나라들은 인류 존폐의 기로 앞에서 극적으로 일치단결했고, 현재는 공동전선을 펴는 중이다.

부상을 입은 우리 오퍼레이터들도 큰 후유증 없이 회복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인류는 다시 답을 찾아낼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럴까, 링."


불 꺼진 방 안에서, 나는 그녀가 건넨 죽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인류가 이렇게까지 대비책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네 덕분인데.


"과연, 우리는 네 희생을 딛고 내일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내 말을 비웃듯, 손 안의 죽간이 쩍 하고 갈라졌다.

실이 풀어지고, 단단히 묶여 있던 대나무 조각들이 풀려나 바닥을 구른다.

이게 무슨 의미일지, 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저, 망연히 망가져 버린 죽간들을 보며 너를 떠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