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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차별 채널에 오늘도 돌아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프리스티스가 날 죽인대도 난 링 눈나가 좋아. 


사실 그냥 아무 목적 없이 링 눈나가 좋아서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명붕이들이 좋아해 줘서 나도 너무너무 기쁘다. 


힘 닿는 대로 정말 열심히 쓸 테니까 앞으로도 링 눈나 많이많이 사랑해줘. 


오늘부터 아마 하루는 링 눈나 소설, 다음날은 야설 이런 식으로 업로드될 듯 함. 


기분 내키면 가끔 단편이나 슈 소설 올릴 수도 있고. 


천성이 변덕스러워서, 가끔 저 스케줄이 지켜지지 않아도 이해바랍. 


개추를 누르고 댓글을 써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아카콘 달아주는 명붕이들한테도 고맙지만, 댓글로 칭찬이나 이런저런 피드백 해 주는 명붕이들도 정말정말 좋아해. 


불쌍한 글쟁이에게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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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9일 11:00. 



보통 대륙 동부에서 염국으로 가는 정석적인 방법은 용문을 거치는 것이다. 


용문 자체가 번화한 도시인 덕에 교통편도 활발하거니와.


염국어에 능숙한 가이드들이나 여행에 도움이 되는 편의시설도 즐비하기에,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먼저 용문에 들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하루에 몇 대 다니지도 않는, 염국 상촉으로 직행하는 버스를 잡아 탔다. 


냉방도 제대로 안 되는 후덥지근한 버스 안에서, 승무원이 파는 맛없는 도시락을 사 나눠 먹고. 


24시간 동안 덜덜거리는 비포장도로의 감각을 온 몸으로 느꼈다. 


불편했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대여, 나 졸려.” 



어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 탓일까. 


링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응. 좀 자둬.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그대랑 같이 있는 시간을, 꿈 따위에 낭비하고 싶지 않은데…눈꺼풀이 너무 무…겁….” 



수마에 속절없이 밀리면서도, 사랑스럽게 투정을 부리는 링. 


이게 네가 바란 거고. 


그런 네가 내 옆에 있다면, 구린 버스가 아니라 지옥불에 떨어지더라도 난 행복하니까. 



“어깨, 빌려도 돼?” 


“네 거야.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어.” 


“응…좋아해.” 



활짝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 링.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오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문득 분신이 한껏 화를 내는 게 바지 아래에서 느껴졌지만, 나는 있는 힘껏 참았다. 


한 발 빼러 버스 화장실에 가면 링의 머리를 지탱해줄 곳이 없고.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위로하기엔 너무 민망하다.  


예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곁에서, 오퍼레이터 사가가 가르쳐 준 불경을 외며 참을 인을 되새기던 와중.  


느닷없이 버스가 멈추어 섰다. 


 

“응? 뭐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버스기사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좌석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놈의 엔진, 또 말썽이네. 오늘 안으로는 운행 못 하니까, 기다리든 알아서 걸어가든 하쇼!” 


“...뭐? 뭔 개소리야! 바로 내일 상촉에서 회의가 있는데!” 


“길가에서 퍼지면 다야? 버스 기사면 어떻게든 하라고!” 


“아, 왜 나한테 지랄들이야! 촌구석이라 수리공 불러도 하루는 꼬박 걸린다고!” 



아무래도 이 고물 버스가 맛탱이가 가버린 모양이다. 


돌발적인 상황에, 잔뜩 화가 난 승객들이 기사를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이고. 


기사 또한 지지 않고 욕설을 내뱉으며 드잡이질을 한다. 


때 아닌 소란에, 잠들었던 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보다, 이런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그녀의 단잠이 방해받았다는 게 더 속상했다. 



“하암, 그대여. 무슨 일이야?” 


“버스가 고장난 것 같아. 기다리든 걸어가든 하라는데.” 


“그건, 곤란하네.” 



링이 능청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곤란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젠 숫제 버스 기사의 멱살을 잡고 드잡이질을 해 대는 승객들 속에서, 나는 전술 단말기로 여기서 상촉까지의 거리를 검색해 보았다. 


어제 하루 동안 꼬박 열심히 달려온 덕일까. 


다행히 아예 걸어가지 못할 정도로 먼 길은 아니었다. 



“걸어가면 상촉까지 세 시간 정도 걸린대. 어떻게 할래?” 



그 말에, 그녀가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띄우고 내게 몸을 바짝 붙였다. 



“으음,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나?” 


“응. 뭐라 해도, 나는 전부 좋으니까. 여기서 그대와 꼭 붙어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그대와 함께 시골 길을 걸으면서 주변의 정취를 온 몸으로 느끼는 것도.” 


“그래. 그럼 걸어가자.” 



나는 즉답했다. 


그녀가 제시한 두 가지 옵션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더 좋았다. 


버스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그녀와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느끼며 시간을 쓰고 싶었다. 



“알았어. 내릴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손을 잡아 아비규환이 된 버스를 빠져나온다. 


버스 밖에서는 한 무리의 승객이 캐리어를 전부 꺼내 놓은 채 심각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이 많은 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챙겨 온 짐도 보따리 하나가 전부고. 



“그대여. 내 손, 놓지 말아줘?” 


“팔을 잘라낸대도 안 놔.” 



무엇보다, 내 손은 이미 링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꼭 붙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그저 자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노니는 들판에서, 황금빛으로 영근 보리가 흔들흔들 춤을 춘다. 



“보릿고개라는 말 알아, 링?” 


“어머, 처음 듣는데. 잠시 기다려, 내가 맞혀 볼게. 보리가 무성한 언덕을 일컫는 말이려나?” 


“유감스럽게도, 아냐.” 


“칫. 그럼 무슨 뜻인데?” 


“옛날, 이 땅의 모든 이들이 굶주리던 시절에…봄에 수확하는 첫 작물이 보리가 익기 전, 배고픔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를 부르던 말이었대.”


“서글프네. 굶주림은 항상 인간들의 가장 강대한 적이었지. 내 여동생이 농사에 뜻을 둔 것도, 그런 인간들을 구제하고자 함이었으려나?” 


“여동생 누구?” 


“있어, 슈라고, 나만 보면 떽떽거리는 아이. 조만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 아, 그 애 정말 예쁘니까 혹시나 보고 반하면 안 된다?” 


“너 말야, 나를 도대체 얼마나 못 믿는 거야.” 


“아하하, 농담이야.” 



느긋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정취 속에서, 우리는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풀어냈다. 


때때로는 농지거리로 서로를 눈물이 날 만큼 웃기고. 


서로의 심상 속에 깊이 박힌 기억들을 꺼내 자랑하기도 했으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은밀하게 속삭이다, 눈이 맞으면 들판에 숨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 흙투성이가 된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깔깔대면서 놀리기도 하고. 


거리낄 것도,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너른 하늘과 끝 간 데를 모르는 대지 사이에, 오직 우리 둘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 


두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그대여, 슬슬 배가 고파 오는걸.” 


“나도 그래. 어디 식당 없으려나.” 



그러고 보니까 슬슬 점심때긴 한데. 


주변을 두리번거려 봐도, 보이는 것은 평야뿐. 


아니, 식당이 있어도 문제다.


만일에 대비해 챙겨 온 비상금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비상금. 


당장의 배고픔을 채우자고 그 돈을 쓰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렇게 내가 고심에 빠져 있을 때, 링이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앗, 그대여. 저 사람들 좀 봐.”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잡초를 뽑는 농사꾼들. 


쨍한 햇빛이 그들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경외감을 담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링,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응? 나야 상관없는데.” 



링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손을 잠시 놓은 뒤, 둑방 길을 따라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저기,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못 보던 총각이로구만. 무슨 일이유?”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 온 늙수그레한 농사꾼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희가 상촉까지 가는 중인데, 배가 너무 고파서요.” 


“그래서 뭐? 우리 점심이라도 나누어 달라는 거요?” 


“대신 시키시는 만큼 일하겠습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흐음, 인상을 쓰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옆에 있는 농사꾼을 툭툭 쳤다. 



“오늘 새참 당번이 누구였지?” 


“감나무집 야오 엄마 아냐? 잘은 기억 안 나는데.” 


“그 양반은 손이 크니까 딱히 상관은 없겠구먼.” 



중얼거린 그는,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지. 배터지게 먹여 줄 테니, 열심히 일해주슈. 별 건 없고, 그냥 잡초만 좀 뽑아서 저기 둑방에 던져두면 되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양씨라고 부르슈. 아니면 할배라고 부르던가.” 



시골 인심 덕분일지, 아니면 온 몸에 흙칠을 한 우리 몰골을 불쌍하게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뭐 결과가 좋으면 됐지. 



“네, 양씨 어르신. 감사합니다. 링! 링, 잠깐만 이쪽으로 올래?” 

 

“응, 그대여. 무슨 일이야?” 


잰발로 뛰어온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의욕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그대와 함께 밭을 일구는 경험이라니, 신선한데. 의지가 끓어오르는걸?” 


“좋아할 줄 알았어.” 


“그래, 나는 이런 여행을 기대했어. 잡초든 독초든 전부 뽑아내 줄게. 기대해.” 



그렇게 팔을 걷어붙인 링과 함께 뙤약볕 아래에서 밭일을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슬슬 허리가 아파와 몸을 일으키니, 저 너머에서 농사꾼 한 명이 황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어이, 양씨! 큰일 났어! 큰일!” 


“뭔데 호들갑이야? 산이라도 무너졌나?”    


“하오 엄마가, 하오 엄마가…새참 만들다 말고 갑자기 아들 보고 싶다고 상촉으로 날랐다고!” 


“...뭐?” 



순간, 밭 전체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럼 우리 점심은?”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농사일이 요구하는 칼로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괜히 옛사람들이 한 끼에 밥을 세네 공기씩 퍼먹은 게 아닌 것. 


그런 농사꾼들에게, 식사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중대사였다. 


나는 품 안에 잡초를 한아름 안고 있는 링과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 차롄가?” 


“그런 것 같은데?” 


“좋아, 솜씨를 보여주자고.” 



대충 링과 의견 일치를 본 나는, 충격에 빠져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양씨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저, 양씨 어르신.” 


“미, 미안하오 총각. 사실 지금 우리도 밥을 못 먹게 될 것 같은….” 


“그게 아니라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어르신들의 식사를 준비해도 괜찮을까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탓일까, 농사꾼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양씨 할아버지가 우리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할 수나 있겠소? 여기 일하고 있는 사람만 다 합해서 스무 명이우. 밥때까지 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20명분의 식사를 준비한다고?” 


“네. 못 믿으시겠지만, 저희가 요리는 좀 하거든요.” 



야근할 때마다 같이 야식을 만들고. 


히비스커스가 요리를 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주방에 죽치고 앉아 서로의 식사를 챙긴 우리다. 


실력으로 따지면 웬만한 새내기 쉐프 못지않을걸. 



“...미안해서 어쩌나, 이런 어려운 부탁까지 하게 돼서.” 

“아뇨아뇨, 신경쓰지 마세요. 저희도 좋아서 하는 건데요.” 


“그럼 부탁하오. 마음 편하게 먹고, 느긋하게 준비해 주시우. 어이, 박씨. 이 두 사람 좀 우리 집 주방으로 안내해 줘.”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양씨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젊은 농사꾼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몇 분 뒤,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허름한 초갓집 주방에 몸을 들였다. 


가스레인지도 오븐도 없이, 그저 작은 가스버너 하나와 가마솥, 그리고 냉장고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단촐한 주방. 


그나마 조미료는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거 다 써도 되는 거예요?” 

“예.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그래도 냉장고 안은 신선한 야채들로 가득했고, 천장에는 여러 가지 건어물들이 매달려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 주방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링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여, 오늘은 어떤 미식을 만들 생각이지?” 


“...부침개라고 알지? 몇 번 만들어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저번에 구워 줬던 그 단국식 납작한 밀가루반죽?” 


“응. 그거 만들 거야.” 



반죽을 불에 바삭하게 굽기만 하면 되기에 시간 소모도 적고. 


간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기에 특별히 간을 할 필요도 없으며. 


만드는 수고에 비해 맛도 확실히 보장된다. 


내가 농부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할 새참은 바로 부침개였다. 


내 아이디어를 풀어놓자, 링이 감탄했다. 



“명안인걸. 좋아, 그대의 뜻대로 하자. 나는 뭘 하면 돼?” 


“일단 반죽을 만들 거야. 냉장고에서 부추랑 양파 좀 넉넉하게 꺼내와 줄래? 천장에 있는 말린 오징어도 부탁해.” 


“쉽지. 조금만 기다려.” 



링이 냉장고를 터는 동안, 나는 가마솥 뚜껑을 열고 안에 밀가루와 물을 부었다. 


어차피 조리는 가스버너에서 할 거니까, 가마솥을 반죽용 그릇으로 써도 문제는 없다. 


애초에 20장 이상을 부쳐야 하는 만큼, 반죽을 담아둘 데가 가마솥 말고는 딱히 없기도 하고. 


농도가 잡힐 때까지 잘 저어 준 다음, 링이 가져온 야채와 오징어를 송송 썰어 투하. 


순식간에 요리 준비가 끝났다. 


가스버너를 켜고고, 식용유를 두른 팬을 달군 뒤 위에 반죽을 넉넉하게 올린다. 


글루텐이 익어 가는 맛있는 냄새가 순식간에 우리의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대여, 나 참기가 힘든데. 한 조각만 먹어봐도 돼?” 


“미안해, 링. 조금만 기다려줘.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거든.” 



군침을 삼키는 링을, 나는 간신히 만류했다. 


아직 요리의 완성까지는 한 걸음 남았다. 



“링, 부침개의 한쪽 면이 다 익으면 좀 뒤집어줄래?” 


“오믈렛 뒤집는 것처럼 하면 되는 걸까?” 


“대충 비슷해. 어려울 것 같으면 뒤집개를 써도 좋고.” 



부침개의 핵심은 뒤집는 타이밍. 


언제, 어떻게 뒤집느냐에 따라 익은 정도와 바삭바삭함이 결정된다. 


그 중요한 임무를 링에게 맡기고, 나는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내 와 부침개에 곁들일 냉국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대여, 다 구웠어. 다음 반죽 올려줘.” 


“오케이.” 



우리 두 사람은 완벽한 호흡으로 순식간에 20인분의 부침개를 완성했다. 


부침개에 곁들일 간장, 평소 농사꾼 분들이 반주로 드신다는 술에, 목이 막히지 않게 해 줄 오이냉국까지. 


쟁반 위에 산처럼 쌓인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훌륭했어, 그대여.” 


“뭘. 보조가 완벽했던 덕분이지.” 



자, 요리가 끝났으면 이제 손님에게 내어드려야지. 


나와 링은 요리를 나누어 들고 아직까지 열심히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향했다. 


멀리서부터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보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던 그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뭐여. 진짜로 그 시간 안에 20인분의 음식을 만들었다고?” 



경악하는 양씨 할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씩 웃어 보였다. 



“식기 전에 드세요. 맛있을 거예요.” 


“그, 그럼 고맙게 먹겠수. 이봐들! 빨리 이리로 오더라고! 이 총각이 우리 새참을 만들어 줬어!” 



양씨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굶주린 농사꾼들이 데몬에 잠식된 껍데기들마냥 뛰어오기 시작했다.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 링이 내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 링, 왜?” 


“그, 그대여. 사실 나도 이제 못 참겠….” 


“.....” 



나는 말없이 젓가락으로 마지막에 부친 부침개를 한 조각 뜯어 간장에 찍은 뒤, 링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으음!” 



아기 새처럼 음식을 오물거리던 링의 눈에서 별빛이 폭발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 적당히 기름지면서 끝면은 바삭하고, 부추와 양파의 풍미가 그대로 느껴져! 그리고 오징어의 쫄깃함까지…! 그대여, 그대는 천재야!” 


“...뭘 그렇게까지. 많이 먹어.” 



눈을 감고 홍조를 띄운 채, 한쪽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부침개를 음미하는 링. 


평소에는 유유자적하게 흔들거리던 그녀의 꼬리가, 파닥파닥 춤을 추고 있었다. 


별로 대단한 음식을 만든 것도 아닌데 격하게 기뻐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괜히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었다. 


다른 농사꾼 분들도 입에 맞으시는지, 흙만 대충 털어낸 손으로 부침개를 찢어 열심히 드시고 계셨다. 



“그대도 빨리 먹어. 없어지겠다.” 


“난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난 그 말이 헛소리인 줄 알았거든. 


근데 진짜였을 줄은 몰랐지. 


내가 만든 음식을 네가 행복하게 먹어 주고, 맛있다고 칭찬해 주는 것만으로 마음이 채워져 가. 


참 신기하지, 위장은 여전히 텅 빈 상태인데. 



“밥상에서 시상을 떠올리는 그대의 모습도 정말 좋아하지만, 이 훌륭한 음식에 집중하지 않는 건 실례야. 자, 내가 먹여 줄게.”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문과적인 감성에, 정말 시라도 한 편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와중. 


링이 짗궂은 표정으로 내 입에 부침개를 쑤셔넣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턱을 움직이니, 향긋한 채소의 맛과 고소한 글루텐의 질감이 입 안 가득히 퍼졌다. 


맛있긴 하네. 



“...음, 맛있네.” 


“그렇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링이 꽃이 피듯 활짝 웃었다. 



“좋아, 흥이 오르는데. 거기 어르신들, 이 술도 좀 자셔 봐. 옥문에서 담근 소홍주인데, 웬만한 탁주보다는 훨씬 맛있을 거야.” 



자리에 털썩 앉은 그녀가 보따리에서 호리박을 꺼내 호탕하게 내려놓았다. 



“오오, 소홍주…! 젊었을 적, 황실에 갔을 때 딱 한 잔 마셔 본 그 귀한 술을…!” 


“처자, 술을 좀 아는구만! 좋아!” 



순식간에 어르신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는 링. 


얼굴에 술기운이 불콰하게 오른 늙은 농사꾼들이, 분위기에 취해 옛 이야기들을 저마다 늘어놓고. 


어느 새 무리의 중심에 앉은 링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때, 어느 할머니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처자, 용린무라고 아는가? 내가 시집 오기 전에 살던 마을에서 축제 때마다 췄던 춤인데, 그 마을이 수몰되어 없어졌다네. 그 춤을 다시 보고 싶어 방방곡곡을 돌아다녀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더군.” 


“응? 어르신, 각총 마을 출신이야? 용린무라면 당연히 알고 있지. 그 춤을 배우려고 내가 그 마을 무당한테 비싼 술을 얼마나 갖다 바쳤는데.” 



거 분위기도 좋은데 오랜만에 한 곡 춰 볼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링은 머리를 질끈 묶었다. 



“좋아, 어르신. 노래해줘. 그렇게 용린무를 보고 싶어했다면, 어떤 노래가 어울리는지도 잘 알고 있지?” 


“알다마다. 부탁하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할머니가 고운 노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하늘이 춤추고, 먹구름이 비를 떨구네. 


강산이 불변하거늘, 그대의 변덕은 어인 일인가. 


그저 한 잔 술에 의지해 폭풍을 피하노라. 



“잘한다, 우리 마누라!” 



할머니의 남편인 듯한 어르신이 흥겹게 외치고. 


왁자한 폭소가 터졌다. 


끊임없는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의 틈바구니에서, 링은 우아하게 춤추었다. 


때로는 바람 앞에 흔들거리는 버들개지처럼 우아하게 팔을 내뻗고. 


때로는 천공을 유린하는 용의 몸짓을 표현하듯 힘있게 발을 내딛는다. 



“신나는 춤인데, 너무 처지잖아? 어르신, 좀 더 신나게 불러 줘!” 



천지가 망망한데, 어찌 신명을 원망하겠는가.  


두 번 돌아오지 아니할 삶, 속세의 한 줄기 꿈을 길잡이 삼아 그대를 좇노라. 


그대여, 원하노니 내게서 그 비늘을 거두어 주오. 


그대를 따르기에 내 삶은 너무도 단촐하니. 


한껏 흥이 오른 링의 독촉에, 할머니의 목소리에도 힘이 담기고. 


링의 춤사위 또한 더 격렬해진다. 


발걸음 하나하나, 손짓 하나하나에 옛 정취가 깃들고. 


익살스럽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피어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마터면 나도 아까 어르신처럼 ‘잘한다, 우리 마누라!’ 하고 소리칠 뻔했다.  



“총각, 잘 먹었수. 덕분에 오늘 한 끼도 정말 만족스러웠수다.” 



그때 양씨 할아버지가 술잔을 들고 내 곁에 앉았다. 



“뭘요. 저희가 감사하죠. 주방도 내어주시고, 식사도 함께 하게 해주셨는데요.” 


“아니우. 오히려 우리가 돈을 내야 될 판인데, 감사는 뭔 놈의 감사.” 



너털웃음을 지은 할아버지가 시선을 링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저 처자는 총각의 여자친구유? 참하구려. 우리 집 할멈도 사십 년 전에는 저 처자 못지않았는데 참….” 



음, 이런 질문은 또 처음 받아보는데. 


그것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말 들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내가 잠시 갈팡질팡하던 그 순간, 링과 눈이 맞았다.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한껏 휘어진 예쁜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부탁이니, 나를 두고 망설이지 말아달라고. 


만약 그렇게 해 준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무엇이라도 되어 줄 수 있다고. 



“하하, 아하하하!” 


“총각?” 



너무 바보 같은 고민을 한 나 자신이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런 거였어. 


우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랬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랑보다 변덕스럽고 자유로운. 


서로의 평생을 걸고 시작한,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운 관계. 


그 관계를 뭐라고 정의하든, 그 사실에 딱히 의미는 없고. 


그렇다면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이야기하면 될 것을. 



“링 말씀이시죠?” 


“이름은 링이라고 하는구먼. 그렇소.” 


“제 아내예요!” 



고민을 후련히 털어낸 내 시원한 대답에, 양씨 할아버지가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링이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잊으려고 기를 써도 평생 내 머릿속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쉐이 합체까지, D-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