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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21000자...길다. 


원래 그냥 대충 링이랑 상촉 가서 술빨고 온천 가고 하는 내용 짧게 쓸 생각이었는데, 쉐이 떡밥 집어넣고 내 뇌피셜 섞은 오리지널 설정 넣고 하다 보니까 드래곤버블 늘어나는 것처럼 쭈우우욱 비중이 늘어나드라. 


롤챔스 결승전도 못 보고 퇴고만 했어...너무 슬퍼....


각설하고, 뇌 비우고 보기 괜찮았던 다른 링 눈나 소설과는 다르게 이 글은 상당히 무거울 수 있음. 


향후 전개를 위해서 필수적인 내용이라 어쩔 수 없이 끼워넣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장진주 스토리를 주의 깊게 읽어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잘 안 가는 포인트가 있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게. 


바둑 묘사=분위기 만들려고 넣은 거니까 무시하면 됨. 


왕=쉐이 둘째. 별명 바둑꾼, 바둑에 미친놈. 쉐이가 자신을 쪼개 열두 남매를 만들었듯, 얘도 자기를 108개로 쪼갬. 제정신도 아니고, 상태도 영 안 좋음. 


링=섹스. 


이 세 가지만 기억하고 읽으면 됨. 더 이해 안 가는 부분 있으면 댓글에 달아줘. 정성껏 해설할게. 


그리고 또 한 가지. 결말에 대한 내용인데...처음에는 새드앤딩 확정이었거든.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어떻게 엔딩을 내야 좋을지 고민이 정말 많아. 혹시 명붕이들이 바라는 엔딩 있으면, 댓글에 적극적으로 적어 줘. 최대한 반영할게. 


잡설이 길었네.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써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불쌍한 글쟁이한테 많관부.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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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9일 16:00. 



그렇게 농사꾼 어르신들과 어울려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어르신들은 하룻밤 묵고 가 달라고 부탁하셨지만, 링과 상의 끝에 그건 다음 기회에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상촉까지는 좀 더 걸어가야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링이 상촉에서 내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많다고 했으니까. 



“잘 가시우, 총각. 덕분에 즐거웠수다. 이 근처 올 일 있으면 꼭 놀러 오고. 잔치라도 성대하게 열어 줄 테니. 아, 물론 링 처자도 같이.” 


“감사합니다, 양씨 어르신. 저도 정말 재밌었어요. 또 올게요. 건강하시구요.” 



나는 양씨 어르신의 굳은살 박힌 손을 꼭 맞잡았다. 


비록 한때였지만, 재미있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는 보리밭. 


활기찬 웃음소리와 노랫소리, 그리고 춤. 


시골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평화롭고 나긋나긋한 정취 덕에, 오랜만에 느긋한 기분을 만끽했다. 



“건강해야 해, 어르신. 다음에 오면 용린무 추는 법 가르쳐 줄 테니까, 나중에 손녀한테도 알려줘.” 


“정말 고맙네, 아가씨. 내 살아생전 그 춤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구먼.” 


“그런 말 마. 오래오래 살아야지.” 



링 역시도 그녀가 춤출 때 노래를 불러 주었던 할머니와 손을 마주잡고 작별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링은 시종일관 반말이었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묻어나오는 고운 마음씨 때문일까. 


그 누구도 이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뭐, 실제 나이로 따지면 우리 모두가 링에게 극존칭을 써야겠지만. 



“어르신, 그럼 저희 갈게요!” 


“그래, 길 조심하고!” 



그렇게 우리는 즐거웠던 한때를 마무리하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옆에서 링이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쭉 폈다. 



“아아, 후련한걸. 오랜만에 한 곡 신나게 춰서 그런가?”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새삼스럽긴 한데, 너 춤 정말 잘 추더라.” 


“훗, 별 거 아니야. 무릇 인간이란 또 하나의 세계이며, 가무(歌舞)는 만물에 대한 모방이자 소통의 방식이니. 나는 이 대지를 밟는 한 명의 소우주로서 세상과 마땅히 교류하기 위해 춤을 익혔을 뿐이지. 그래도 그대의 칭찬은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걸. 고마워.” 


“음, 넌 가무뿐만 아니라 음주에도 통달한 것 같지만 말이야.” 


“아하하, 그거야말로 내 자랑거리지.” 


깔깔 웃은 그녀가 문득 짓궃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이지, 그대여. 나는 도대체 언제 그대의 아내가 된 걸까?” 

“......” 


“하객도, 주례도, 그 순간을 노래로 남기는 이도 없었는데 말이야. 아니, 하다못해 청혼의 한 마디도 없었지, 아마? 천지가 난 뒤에야 생명이 싹틔웠듯, 세상 만사에는 지엄한 순리가 있을진대. 서순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생글생글 웃는 그녀를 보는 순간 뇌가 굳었다. 


어, 사실 그때는 그렇게 얘기해야 될 것 같아서 아내라고 말한 건데. 


여자친구라는 말은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기에 너무 얄팍하고.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풍류가 부족한데다. 


영혼의 단짝이란 말도 너무 사무적으로 들려서 그냥 아내라고 말했던 건데….


그걸 이런 식으로 놀려먹을 줄은. 


어떻게 말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식의 고백공격? 


아니지, 아니야. 


오히려 이럴 때는 뻔뻔하게 나가야 해. 



“...그럼, 아니야?” 

 

“응?” 


“네가 쓴 시 중에 이런 게 있었지. 날 제부터 둘이었던 새 한 마리가 꽃 위에 앉았구나. 머리가 갑절이며 꽁지깃 또한 두 배일진대, 마음만은 하나로다. 창공을 자유롭게 노님에도 서로 떨어지는 일 없으니, 이를 감히 부부라고 일컫노라.” 


“그, 그대여. 그걸 어떻게….” 


먹혔다. 


흑역사가 발굴되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내 시선을 피하는 링. 


…? 


잠깐, 뭔가 이상한데. 



“누가 썼는지, 참 명문이야. 그렇지? 창공을 자유롭게 노님에도 서로 떨어지는 일 없으니, 이를 감히 부부라고 일컫노라.” 


“그, 그만해 그대여. 나 너무 부끄럽….” 


“어떻게 생각해? 너 나한테서 떨어질 거야? 평생 나랑 붙어 있을 거 아냐?” 


“...으, 그건 그렇지만.” 


“그럼 부부잖아.” 



귀까지 빨갛게 물든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링. 


그런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위화감이 든다. 


아니, 분명히 링이 할 법한 행동이긴 한데. 


링이 저 시를 쓴 건 분명히 얼마 안 됐을 때다. 


이 기묘한 불쾌함은 도대체 뭘까. 


일단 티를 내지 않고, 장단을 맞춘다. 



“왜, 저번에는 네가 쓴 시 아무한테나 보여줘도 안 부끄럽다면서.” 


“화, 확실히…하지만 그 시는 내가 수천 년 전 아무것도 몰랐을 때 쓴 시인데…그대와 만나고, 남녀 간의 정을 이해하고 나서 그대의 입으로 그 시를 다시 들으니까 왠지 어린 시절의 과오를 돌아본 느낌이 들어서. 아니, 하필 그 시를 읊은 게 그대라서 그런 걸지도.” 


“그래서, 확실히 말해 줘. 우리 부부야? 아니야?”  


“으…맞아, 부부 맞으니까 이제 그만해. 그대가 이겼어.” 

 


괜히 놀려먹으려고 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링. 


속이 터진다는 듯 보따리에서 술병을 꺼내 연신 들이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짐짓 키득키득 웃었다. 


뭐 ,일단 슬슬 달래 줄 타이밍이겠지. 



“그래, 승자에게는 보상이 있어야겠지?” 


“......” 


“손 주라. 너랑 손 잡고 싶어.” 


“...싫어.”  


“아, 왜.” 


“그대처럼 못된 사람이랑은 손 안 잡을 거야.” 



시선을 홱 돌리면서 손을 등 뒤로 감추는 그녀.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구만. 


진짜 링이랑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다신 안 놀릴게. 그러니까 이번만 용서해 주라.” 


“...진짜지.” 


“진짜야.” 


“...이번만이야, 믿을게.” 



못 이기는 척 내 손가락에 깍지를 끼는 그녀. 


이번만, 믿는다고? 


…그러세요. 


이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좀 알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시험 삼아, 그녀에게 물었다. 



“상촉에 도착하면 뭐부터 할까?” 


“음, 글쎄. 삼산십칠봉이라고 알아? 상촉에 있는 세 개의 산과 열일곱 봉우리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야. 그 중에 수주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술집이나 극장 같은 데가 모여 있는 곳이거든. 나도 자주 가는 곳인데, 우선 거기부터 가 보자.” 



그리고 그 답변으로, 내 안의 추측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 하찮은 놀이에 계속 어울려 줄 이유도 없지. 


내 발걸음이 그대로 멈추고. 


링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여? 왜 그래?” 


“훌륭한 연기인걸. 하마터면 속아넘어갈 뻔 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래도 어설픈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띄네. 내 앞에서 링을 흉내낼 거라면 좀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어야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리석기도 하지, 지금까지 이런 얄팍한 수에 넘어가고 있었다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네. 그럼 알려줄게. 네가 뭘 실수했는지.” 


“...어디 아픈 거야?” 

“첫째, 내가 읊은 시는 링이 나와 첫날밤을 보낸 다음 즉석에서 쓴 시야.” 



그 시는 나와 링이 지칠 때까지 서로를 갈구한 뒤. 


잠자리에 들기 전, 꼬리를 붓삼아 내 몸에 직접 써내려간 시다. 


이건 그대에게 직접 새기고 싶은 시라면서. 


천 년 전이라고? 


꽤나 괜찮은 임기응변이었지만, 내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내가 아무리 링을 좋아해도, 그녀가 천 년 전에 쓴 시를 찾아서 읽지는 못해. 


그럴 시간에 눈 앞의 링에게 집중하는 걸 선택하고 말지. 



“두 번째, 링은 상촉의 산세를 삼산십팔봉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내게 그 이야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사실, 링은 가끔 내게 상촉 이야기를 했다. 


그곳에는 세 개의 산과 열여덟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삼십 년 전 천재지변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봉우리의 존재를 아직도 기억하기에, 세간에서 삼산십칠봉이라고 불리는 그 산세를. 


자신은 여전히 삼산십팔봉이라고 부르노라고. 



“그리고 링이 가장 좋아하는 봉우리는 수주봉이 아니다.” 


“...알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데는 촬강봉이지.” 



그녀는 항상 활기로 들꿇는 수주봉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팔봉 중 가장 한적하고 험해, 찾는 사람이 잘 없는 촬강봉을 좋아하지. 


하지만 이번 답변은 좀 많이 아쉬운걸. 



“어설픈 연기 집어치워. 그녀는 여전히 그 봉우리를 취강봉이라고 부른단 말이다.” 



흘러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그 소중함만큼은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링이기에. 


그녀는 종종 사물을 옛사람들의 방식으로 부르곤 한다. 


삼산십칠봉 중 하나, 촬강봉 또한 마찬가지다. 


십칠봉이 아직 십팔봉이던 시절, 상촉 시민들은 촬강봉을 취강봉이라 일컬었고. 


링은 아직도 과거의 이름으로 그 봉우리를 불렀다. 


내가 무심코 촬강봉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취강봉이라고 교정해 주기도 했지. 



“......” 


“그리고 마지막. 링은 내게 묻지 않고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아.”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 나와 같은 인간은 한순간에 스러져 갈 미물에 불과할 텐데도. 


링은 항상 나를 존중해 주려고 애썼다. 


분명히 마음대로 나를 끌고 다니고자 하는 욕심 또한 있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묻고, 내가 거부하는 건 절대 하지 않는 상냥한 사람.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링이다. 



“내가 아는 링이었다면, 삼산십팔봉의 모든 것을 내게 이야기해 준 다음, 내게 칼자루를 넘겨줬겠지. 자기가 개인적으로 가고 싶은 데는 어디라고 살짝 덧붙이면서. 그런데 너는?” 


“...네 의사를 묻지도 않고 수주봉으로 가자고 해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건가.” 


“잘 아네.”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는 놈을, 주먹을 꽉 쥐고 노려본다.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행복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감히 링을 흉내내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른다. 


그 증오를 담아,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넌 링이 아니야. 누구냐, 넌.”  



누구기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녀가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거며. 


무얼 위해서 나와 그녀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거냐. 


상대가 피식 웃었다. 



“...설마 속여넘길 수조차 없을 줄이야. 내가 졌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 


“의외로군. 아무래도 너는 내 여동생을 정말로 사랑하는 모양이야. 나름 나도 내 형제들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놈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비틀리고. 



“네 모습이 꽤나 유쾌해서, 원래라면 이대로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는데…그럴 수조차 없겠군. 실망스러워.” 



느닷없이 떨어진 돌에, 수면에 비친 풍경이 지워지듯. 


놈이 덮어쓰고 있던 링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인정하지. 첫 대국은 내 패배다, 박사.” 



그와 함께,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시골 길의 풍경이 일변했다. 


햇빛이 사라지고, 사방을 검푸른 안개가 두르며.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흐릿하게 바래고, 검은 먹으로 물들어 간다. 


그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나는 지그시 노려보았다. 



“분명히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이름이 없나? 아니면 대기에도 부끄러운 이름이라 입을 닥치고 있는 건가?” 


“흐음, 의외인걸. 여동생들에게 들은 너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을 텐데.” 


“상대 나름이지. 링인 척 하면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민 놈한테 예의 차리고 싶진 않아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 



기분 나쁘게 킬킬 웃는 놈. 


그건 온 몸이 시커멓게 칠해진 그림자였다. 



“그럼 바라는 대로 내 소개를 하지. 반갑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쉐이의 둘째, 왕이다.” 



왕. 


병법을 관장하는 쉐이의 둘째. 


분명히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니엔이 항상 말하던 바둑에 미친 광인. 


시가 이따금씩 상기시켜 주던, 정신줄을 놓아 버린 둘째 오빠. 


그리고 링이 딱 한 번 이야기했던. 



“...그래, 네가 바둑꾼이구나.” 


“동생들에게 들었나? 아니면 형님에게? 개인적으로 그 별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간 쉐이 자매들에게 들어온 바에 따르면, 눈 앞의 상대는 쉐이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위험분자. 


그림자 속에 숨어 염국을 위협하는, 최흉의 쉐이다. 


굳이 자극해서 좋을 건 없지. 


당장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니, 일단 질문을 던져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자. 


나는 놈에게 다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링을 어쨌지?” 


“이거 놀랍군. 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부터 걱정하는 거냐?” 


“당연한 거 아냐?” 


“...흠,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안심해도 좋다. 소중한 여동생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치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일단 안심이다. 


링의 신변에 이상이 없다면, 그 다음은 내 명줄을 걱정할 차례겠지.



“내게 바라는 게 뭐야?” 


“반대로 묻겠다.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느냐?” 



글쎄. 


그렇게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애초에 상대는 수천 년을 우습게 볼 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쉐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인맥도 지식도, 놈은 이미 손에 쥐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흠, 한 판 어울려 줄 수는 있지. 바둑은 잘 못 두지만.” 


“...하하, 딴 재주는 없어도 두뇌 하나는 명석한 놈이라더니. 그 말대로군. 이제 질문은 그만하도록 하지. 한 번 덤벼봐라.” 



키득키득 웃은 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나와 놈 사이에 옥으로 깎아 만든 듯한 바둑판이 나타나고. 


내 손 앞에는 밥 공기처럼 생긴 통이 툭 떨어졌다. 


뚜껑을 열어 보니, 마노로 깎은 듯한 백돌이 한가득. 



“미리 말하겠는데, 나 바둑은 정말 못해. 총웨랑 심심풀이 삼아 몇 판 둬 본 게 다야.” 


“상관없다. 접바둑을 두면 되니까.” 



접바둑. 


실력 차가 많이 나는 기사들끼리 바둑을 둘 때, 언더독 입장인 사람에게 먼저 두 수를 둘 수 있게 허락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링을 흉내내서 나를 속이려고 하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런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나를 끌고 온 미친놈이 이런 관용을 베푼다고?  


나는 놈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초보에 대한 배려냐, 아니면 내가 네 위장을 간파한 것에 대한 보상이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걸까. 


그림자가 살짝 흔들렸다. 



“...흠, 후자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럼 접바둑은 됐어. 대신 다른 보상을 받고 싶은데.” 

“뭐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왕.”


“...호기심이 많은 건 인간들의 종족 특성인가? 뭐, 좋다. 세 개. 세 개까지 질문을 허락하지. 그 세 물음에 한해서, 정직하게 대답할 것을 맹세한다. 다만, 대국을 진행하면서 듣도록 하겠다.” 



세 개면 양호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이 자신의 그림자의 일부를 뜯어내 바둑돌 형태로 만들더니. 


딱, 그대로 판 위에 내리쳤다. 


왼쪽 위, 귀 화점. 


총웨도 자주 두던 흔한 수다. 


나는 통 안의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운을 뗐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보통 인간들은 여기가 어딘지 묻던데, 너는 다르군.” 


“어쩐지 링이 보여준 꿈과 비슷해서.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점 정도는 유추가 가능하더라고. 그렇다면 위치를 물어 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 



탁, 머리로 끊임없이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수를 둔다. 


오른쪽 아래 귀 화점. 



“...흠, 그래.” 


“그래서, 대답은?” 


“혹시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 나는 내 몸을 108개로 쪼갰다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링을 만나기 직전, 니엔에게 들은 바가 있다. 


베헤모스 쉐이에게는 자신을 여러 파편으로 쪼개는 능력이 있었는데, 왕은 그 능력을 응용하여 자신을 여러 파편으로 나누었다고 했던가. 


바둑판 위에 떨어진 왕의 두 번째 수를 신중하게 쳐다보며, 적당히 대답한다. 


오른쪽 아래 화점 옆의 소목. 



“들어 봤지. 그리고 108개의 물건에 네 의식을 깃들였다고 했었나?” 


“잘 알고 있군. 나는 내가 빙의된 물건을 매개로 인간의 정신에 접근할 수 있고, 때때로는 그 인간의 정신에 빙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컨대, 나는 지금 너한테 빙의됐다는 건가? 여기는 내 무의식 속이고?” 


“정확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왕의 답변을 뇌리에 새기며, 다음 수를 진행한다. 


아직 왕이 차지하지 않은 왼쪽 위의 화점. 


이로써 위쪽 귀퉁이의 화점은 전부 먹혔다. 


이게 총웨가 양화점포석이라고 불렀던 그건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내게 빙의한 거지?” 


“그건 두 번째 질문인가?” 


“그래.”  


“링이 가지고 있던 소고, 기억하나?” 



소고라면….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 링이 보따리를 꾸릴 때 봤던 그거? 



“...거기에 네가 깃들어 있었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자신의 소지품에 빙의된 누군가의 영혼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링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내 의문에, 왕이 킬킬 웃었다. 



“숨기느라 애먹었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했다는 소리다. 


심각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억지 주장이지만…섵불리 확신하기에는 정보의 격차가 너무 크다. 


쉐이의 능력을 인간이 재단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왕이 정직하게 대답하겠다고 했으니, 일단 그 말을 신뢰하는 수밖에.  



“...그때, 그러니까 우리가 여행을 오기 전부터 빙의해 있었다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다. 내가 네 몸을 빼앗은 시점은 정확히…그래, 네가 그 시골에서 링의 춤사위를 본 직후. 그때부터였지.” 


“그건 다행이군.”   


“뭐?” 


“난 또 너보고 내 아내라고 한 줄 알았지 뭐야.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 


딱. 


약간 짜증이 난 듯, 왕이 바둑돌을 내리쳤다. 


오른쪽 아래 화점에서 왼쪽으로 두 칸 떨어진 곳. 


굳힘이다. 


그 쪽에서 확실하게 집을 완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마지막 질문이나 하지.” 


“왜 하필 내게 빙의했지?” 



가장 중요하고, 또 상황을 대강이나마 파악했을 때 뇌리를 가장 먼저 스쳤던 질문. 


그 물음에, 그 어떤 질문을 해도 청산유수처럼 대답하던 왕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가 어렵게 내 놓은 한 마디는 참으로 한심했다. 



“그 질문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네가 들을 수 있는 답은 하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한 답변이기도 했다. 


왕의 수를 맞받으며, 곧바로 놈의 숨통을 조인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네 궁극적인 목표와 가장 관계있는 이유를 들려줘.” 


“......” 



뭐, 평생 혼자 살 것 같던 여동생에게 갑자기 사랑이 찾아왔다니까 궁금해서 와 봤을 수도 있지. 


이미 니엔이 그런 식으로 한 번 나를 엿먹였으니까. 


아니면 로도스 아일랜드에 모이는 쉐이들을 경계해서, 그 목적을 알아내고자 내게 빙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시한 이유를 들으려고 이 질문을 던진 게 아냐. 


왕이 한숨을 쉬었다. 



“...버겁군. 염국의 태부를 상대할 때도 이렇게 성가시지는 않았는데.” 


“대답이나 해.” 


“내가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해 봐. 내가 판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치고, 그럼 네 체면만 깎아먹는 거니까. 쉐이가 하찮은 인간 하나 닥치게 하지 못해서 거짓말로 속여넘긴다고? 니엔이 들으면 배를 잡고 웃겠네.” 


“...하아.” 



한참의 침묵 후. 


왕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판 위에 바둑돌을 올려놓았다. 



“니엔의 계획, 들었나?” 


“목표는 들었어. 너희가 쉐이로 합체되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다고.” 


“나도 대충 비슷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위해 박사 너를 이용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왜? 방해되면 죽이려고?” 


“아니. 링이 아끼는 사람을 건드렸다가 귀찮은 꼴 보긴 싫다.” 



그래서, 계획이 뭔지는 끝까지 안 알려주는군. 


아쉬운 대로 왕의 수를 받아치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서, 직접 보니까 어때?” 


“...못써먹겠다는 게 내 판단이다. 활용도는 둘째치고, 순순히 내 뜻대로 움직여 줄 것 같지가 않아.”   


“왜 이용하려고만 해? 협력할 수도 있잖아.” 


“...흠.” 


“나는 기사에 가까운 사람이지. 하지만 목적이 일치하는 상황이라면, 잠시 장기말 노릇을 해 줄 수는 있어.” 



링을 보내 줄 마음의 준비는 항상 되어 있다. 


하지만 저번에 니엔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다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결국 너도 나도, 링을 살리고 싶은 거잖아.” 



그녀와 좀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내 진심을 담은 말에, 왕의 그림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가 이 대국을 이긴다면 한 번 생각해 보지, 박사.” 


“열심히 해야겠네. 사실 별 생각은 없었는데.” 


    

그 선언 이후, 대화는 단절되었다. 


나도 왕도, 손을 움직여 바둑판 위를 흝고. 


머리로 다음 수를 바쁘게 계산하며, 서로의 흉중을 읽고자 심리전을 이어갈 뿐. 


물론 나는 왕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기에, 그런 측면에서는 약간 불리했다.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링이 무사하다는 사실. 


그리고 내 안전도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더없이 마음이 편해지고. 


도무지 읽을 수 없었던 왕의 수가 조금씩 읽히기 시작했으니까. 


딱, 딱. 


끝 없는 어둠 속, 바둑돌이 판 위에 수놓아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내게 거짓말을 했군.” 



그렇게 100수를 조금 넘어간 시점일까. 


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

“바둑을 못 둔다고 하지 않았나?” 


“못 두는 거 맞는데. 내 특기는 체스야.” 


“......” 


 

왕의 그림자가 찌그러졌다. 


어딘지 시무룩해 보이는 모습에, ‘니가 개못하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티배깅을 하기엔 아직 대국도 백중세고. 


무엇보다 미친놈 상대로 도발해서 좋을 게 없지.



“...박사,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나?” 


“글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한 수 물러 주겠다.” 



왕의 대마는 아직 미생(未生).


반면 내 대마는 이미 완성되어 판 왼쪽 위 귀퉁이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섵불리 승리를 확신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한 수 정도로 내 입을 열기엔 부족하지.



“두 수.” 


“...뭐?” 


“두 수 물러 줘.” 


“...진절머리나다 못해 짜증이 나려고 하는군.” 


“꼬우면 말든가.” 


“...끄응.” 



왕이 바둑판 위로 손을 한번 휘젓자, 그가 최근에 두었던 돌 두 개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확실히 이 정도면 그가 많이 양보한 거겠지. 



“네 목표는 뭐냐? 로도스 아일랜드에 모인 내 형제자매들, 그들로 뭘 하려고 하고 있지?” 



뭐, 그가 한 질문이 그만큼의 가지가 있는지는 아주 다른 문제지만. 



“니엔은 가끔 같이 놀아줬음 좋겠어. 좀 쫓아내고 싶을 때도 있긴 한데, 애가 확실히 유쾌해서 재밌거든. 총웨랑은 형제처럼 잘 지내고 싶어. 시는…밖에 좀 나왔으면 좋겠다.” 


“...?” 

“뭐. 더 거창한 대답을 바랬어?” 



마구 일렁거리는 왕의 그림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동요하는 그를 보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쉐이 남매들. 


분명히 강대한 존재들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그냥 전장에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오퍼레이터들 중 하나일 뿐이다. 


딱히 그들을 가지고 뭘 하려는 대단한 계획 같은 건 없어. 


링을 제외하면. 



“뭐, 링은 좀 달라.”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그 애는 쉐이의 파편 중에서도 가장 강하니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취강봉 꼭대기의 정자에서, 둘이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네.” 


“...?” 


“둘이서 마음 가는 대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언젠가는 조용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 애는 둘, 아니다. 셋 정도. 나를 닮은 아들 하나, 링을 닮은 딸 하나, 그리고 우리 둘을 모두 닮은 막내까지.”


“...네놈, 지금 무슨 소리를.” 


“나는 농사를 짓거나 술을 빚고, 링은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자식들 키우면서 오순도순 살다가, 애들이 크면 떠나보내는 거지.” 


“......” 

“그리고 둘이서 같이 늙어가다가…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술 한 잔을 나누고…조용히 이별하는 거야. 꽃이 예쁘게 피는 봄에. 그게 내가 링과 함께 이루고 싶은 목표야.” 


“...장난하는 건가.”     



수를 두는 왕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경련의 원인은 틀림없이 분노겠지. 



“그녀는 게으른 성정 탓에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을 뿐, 한 번 움직인다면 세상을 요동치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 내 계획도, 그녀가 거들어 준다면 성공률이 상당히 올라간단 말이다.” 


“뭐, 그럴지도.”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를 곁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나에 대한. 



“네가 진작에 그녀를 이용했다면, 내 형제자매들을 구할 준비를 훨씬 빨리 할 수 있었을 터. 그런데 네놈은, 네놈은….” 


“글쎄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왕의 외침에, 사방을 둘러썬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워, 확실히 미친놈이긴 하네. 


이런 식으로 급발진을 한다고? 


사납게 파도치는 놈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키들키들 웃었다. 



“좀 진정하지그래. 그러다 판 엎겠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쓸모없는 장기말 주제에.” 


“음…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그거야 당연하지. 링 생각이야. 빨리 니 못생긴 면상을 치우고 진짜 링이랑 만나고 싶어.”  


“나를 우롱하는 거냐!” 



우롱? 


아니다. 


이건 내 순수한 진심이야. 


그녀와 만나기 전에 똑같은 질문을 받았더라면, 아마 그녀의 힘을 광석병을 없애는 데 쓰고 싶다-하고 대답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이루고 싶었던 목표도, 등 뒤에 얹힌 책임도 링을 위해서라면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존재가 내 안에서 커진 지금.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나는 네놈이 링에게 있어 방아쇠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유자적하게 세상 일에서 벗어나 있던 그녀도, 네놈이 강하게 동기부여를 한다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네게 접근한 거다.” 


“호오, 그러셔?” 

“그런데 내 생각이 아예 틀렸었군. 네놈은 방아쇠가 아니라 족쇄야. 링을 현실에서 더더욱 멀리 떨어트려, 너희 둘만의 공간에 묶어 놓는.”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링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본 적이 없어서.”  


“이제 됐다. 네놈의 말을 듣고, 협상이라는 걸 해 볼까 진지하게 고려했던 내가 어리석었어. 네놈을 인질로 잡고 협박해 링을 움직이겠다.” 



이래서 미친놈이라는 건가. 


본인의 계획을 제대로 이야기해 준 적도 없으면서.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 대답을 단 한 번 한 것 만으로, 분노에 미쳐 날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놈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다. 그럼 이쯤에서 본인의 생각을 한 번 들어볼까?”


“뭐?”



흠칫하는 왕을 무시하고, 위쪽을 바라보며 외친다.



“듣고 있지, 링? 이제 들어와도 돼.”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은 인간이 평소에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태어나면서부터 내장된 본능들이 매장된 영역.  


우리가 평소에 꾸는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그리고 링의 능력은 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아주 깊은 관련이 있지. 


만약 내가 갇혀 있는 이 공간이 일종의 무의식이고. 


지금 왕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 무의식의 작용으로 인한 일종의 꿈이라면. 



“응, 그대여.” 


이 공간에도, 링의 능력으로. 


충분히 침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발을 제치듯, 사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절대적인 광휘가 과격할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인다. 


그 빛 가운데서, 링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좀 더 일찍 와도 됐는데.” 


“그럴까 했는데, 그대가 우리 둘째오빠랑 생각보다 재밌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부를 때까지 지켜만 보고 있었어.” 


“바깥 상황은 어때?” 


“음,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그대가 쓰러지더니, 딱 둘째오빠나 할 법한 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후려쳐서 기절시켰지. 그대의 몸은 양씨 어르신네 안방에 누워 있어. 큰 일은 없었으니까 안심해도 돼.”  


“고마워, 믿고 있었어.”  


“고맙긴. 내가 미안하지. 못난 오빠가 그대에게 민폐를 끼쳤는데.”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난생 처음 보는 험한 표정으로 왕을 노려보는 링. 



“민폐랄 것도 없어. 나도 나름 재밌었으니까. 너랑 보내야 하는 시간을 뺏긴 건 유감이지만. 아무튼, 다 듣고 있었던 거지?” 


“응.”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내가 쉐이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너를 움직여야 할까?” 


“그대가 그걸 원한다면 난 그렇게 하겠지.” 


“그럼, 네가 진짜로 바라는 건?” 



링은 한숨을 푹 내쉬고 침묵을 지키는 왕을 바라보았다. 



“글쎄. 적어도 둘째오빠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긴 싫은걸.” 


“흐음, 왜?” 


“왜냐면….”



그때, 왕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마라, 링.” 

“어머. 내가 나타났을 땐 인사 한 마디 없더니, 이제야 입을 여는 거야?” 


“놈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 마디만 더 한다면, 그대로 저 남자를 찢어죽이겠다.” 



아무리 108개로 찢어졌어도 쉐이의 파편이라는 걸까. 


이젠 사람의 모습조차 잃어버리고, 용을 닮은 그림자의 형상을 취한 왕에게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뿜어졌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온 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 



“할 수 있으면 해 봐.” 


하지만 링은 대담하게 웃으며 내 앞을 막아서고는,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잘 들어, 그대여. 왕 오빠는…자신으로 쉐이를 ‘대체’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링과 함께 지내며 쉐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쌓은 상태이기에 이해라도 할 수 있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터무니없는 계획. 



“...하, 진심이야?” 


“진심이고말고.” 


“가능은 해?” 


“니엔의 얼토당토않은 계획보다는 가능성이 높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대체’만’ 가능할 뿐, 저 못난 오빠는 그 순간 정신줄을 아예 놔버리겠지만.” 



쉐이의 파편은 각자 세상을 떠돌며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서로 다른 인간들과 만나며, 그들의 행동 양식을 모방함으로서 각자의 자아를 자각하고 확장해 나간다. 


기본적으로 모든 파편은 수명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만큼, 무수한 세월을 견디며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쌓은 그들의 자아를 크기로 따진다면….


평범한 인간 수만 명을 합친 것만큼이나 크겠지. 


그 자아를 전부 흡수해, 자신의 양분으로 삼을 수 있기에 쉐이는 베헤모스이며. 


베헤모스가 신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놈이구나. 너, 이래서 나한테 니 계획이 뭔지 말 안 하려고 한 거지?” 



눈 앞의 파편, 왕은 그렇기에 자신을 108개로 쪼갰다. 


흩어진 그의 조각들은 전 테라를 떠돌며 그것을 눈에 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자신의 자아를 확립시켜 나가겠지. 


다른 쉐이의 파편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쉐이의 파편들이 하나로 돌아갈 때가 왔을 때. 


그 108개의 조각 또한 그 일부로서 쉐이에게 환원될 것이다. 



“쉐이를 네 자아로 집어삼켜서 지배하려고?” 



신이라 불리는 쉐이이기에, 열두 개의 파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흡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108개라면 어떨까. 


아마 원래 존재했던 열두 개의 파편들을 전부 흡수하기도 전에. 


원래 왕이었던 조각들을 전부 받아들이기에도 버거워하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의 계획은 이 불완전한 가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거잖아. 쉐이가 그 자아들을 흡수 못 하면, 당연히 너도 못 버틸 거고. 몇 초도 안 돼서 바로 자아를 잃어버리겠지. 그럼 결국 남는 건 미쳐버린 베헤모스 한 마리인데?”  


“...적어도 내 형제자매들은 무사하겠지.” 


“그럼 그 베헤모스를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은.” 


“......”  



한숨이 나온다.  


정신나간 놈이 짠 미친 계획이라는 건 둘째치고, 성공해도 주변에 끼칠 민폐의 스케일이 너무 거대하다. 



“애초에 너, 인간들은 안중에도 없지?” 


“...그렇다면?” 



놈의 뻔뻔한 대답에 화가 치밀었지만, 링이 내 입을 막았다. 



“더 상대해 줄 필요 없어, 그대여. 둘째 오빠의 조각들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지만, 이 조각은 유독 더 불안정한걸.”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했지, 동생아?” 


“사실 몇 달 전에 오빠의 가장 오래된 조각을 만났거든.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겼다고 살짝 말했는데, 솔직하게 축하해주더라. 드디어 네가 현세에 마음 붙일 곳이 생겼구나, 오라비는 기쁘다. 라면서. 몇천 년 만에 오빠다운 소리를 하길래 뭘 잘못 먹었나 했지. 뭐 여전히 음침하고 기분나쁘긴 했지만, 적어도 그게 내가 아는 왕 오빠의 모습이었어.” 


“거짓말이다. 내 조각이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어.” 


“어떻게 그렇게 단언해? 이젠 오빠도 오빠 자신이 누군지 모르잖아.” 



링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정곡이었다. 


다시 할 말을 잃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왕.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국은 끝났어, 왕.” 


“...자리에 앉아라, 박사. 아직 내 수가 남아 있다.” 


“바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네가 짜려는 판에 대한 이야기지.” 



폭풍우 속의 파도처럼 마구 일렁이는 놈. 


나는 링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왕을 돌아보며 일갈했다. 



“네가 움직일 수 없는 존재를 말 삼아 판 위에 올린 순간부터, 넌 패배한 거야.”


“......” 


“링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아. 나도 그런 방법은 싫고. 네가 어떤 감언이설로 우리를 설득하려 하든,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야.” 


“웃기지 마라!” 



그 말에, 왕이 발악하듯 외쳤다. 


놈의 그림자가 빗발치는 화살처럼 우리의 주위를 감싸고. 


그 중 한 줄기가 내 뺨을 스쳐 작은 상흔을 만들었다. 


따끔한 고통과 함께, 피가 흘러내린다. 


확실히 감정 기복이 심하네. 



“그런 방법은 싫다고? 배부른 소리도 정도껏 해라, 박사! 그럼 네놈은 링을 잃어도 좋다는 거냐? 네가 내게 털어놓았던 진심, 그 바램들이 한낱 망상이 되어 버려도 좋다는 거냔 말이다!” 


싫다. 


평생을 곁에 있어도 더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질 만큼 사랑스러운 링이.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는 그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니. 


그런 건, 죽기보다 더 싫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몇백 번이고 그렇게 할 것을.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에 규칙이 있듯이, 이 세상에도 섭리라는 게 있어. 모든 섭리에는 의미가 있지.” 



생명은 태어나, 만물을 품으며 성장하고. 


다른 존재를 만나 사랑을 하며. 


언젠가는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이 언제냐의 차이일 뿐, 인간이든 쉐이든 결국 이 섭리 앞에서는 평등하다. 



“그 잘난 섭리가 네 마음보다 중요하다는 거냐!” 


“아니. 그래서 난 링을 사랑했어. 그래서 링은 나를 사랑했고. 원래라면 서로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을,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섭리를 무시하고 함께 있는 것을 택했지.” 



전장에서 타인을 지휘하며 누구보다 많은 탄생과 죽음을 봐 온 나도. 


오랜 세월을 살며 이 세상에 이치에 통달한 그녀도. 


그 섭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서로에게 반했다. 


그만큼 서로가 사랑스러웠기에. 



“하지만 섭리는 절대적이야.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어. 끝날 땐 끝나.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그 때가 찾아오겠지. 그리고 링과 나는 이미 선택을 내렸어. 결과를 알면서도 섭리를 무시한 대가를 언젠가는 치르기로.”


“...!” 


“그리고 그 대가가 가혹한 만큼, 지금 이 순간을 후회 없이 행복하게 보내기로.” 



부끄럽지만, 내가 링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건 생각 안 한다. 


그것은 상대가 만 년을 훌쩍 넘게 살아온 쉐이의 파편이라서가 아니야. 


그 어떤 인간도 상대를 백 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해.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하지 마. 네 계획? 우리가 막을 수는 없겠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힘으로는 네 파편을 전부 찾아낼 수도 없을 거고, 염국의 힘을 빌리더라도 안 될 테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내 숨이 다하기까지는 절대로 놓지 않을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서.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거야. 



“나도 링도, 네 더러운 판에는 흥미 없어. 지금은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둬.” 


“말 잘했어, 그대여.”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링이 싱긋 웃는다. 



“-----!” 


마침내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왕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포효하며 미쳐 날뛰고. 



“흠, 오빠. 그만큼 말했으면 좀 가. 귀여운 여동생이 모처럼 남편이랑 여행 왔는데, 이게 무슨 민폐야.”  



그 추하디 추한 몸부림을, 링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광채가 지워 간다. 


이윽고, 사방에 존재감을 드리우던 왕의 그림자가 완전히 소멸하고. 


그제야 내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한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어머, 그대여. 일어났구나. 기분은 좀 어때?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옆에는 네가 있었다.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네가. 


그것만으로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어, 살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 완벽해.”  


“응, 다행이다. 둘째 오빠한테 빙의되고 나서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았거든.” 


“난 멀쩡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그래도 어디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해 줘야 해? 내가 손을 쓰든, 의원을 부르든 할 테니까. 알겠지?” 


“응.” 



아아, 그래. 


이게 진짜 링이지. 


왕 이 녀석아, 링을 흉내낼 거면 이 상냥한 마음씨부터 좀 배우란 말이야. 



“그것보다, 그대여. 저것 좀 봐.” 


  

쭉 내뻗어진 링의 팔을 따라,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와아…” 



천궁(天宮). 


모든 뭇별들이 몸을 뉘이는 하늘의 궁전이 거기에 있었다. 


달빛이 없는 밤, 오직 별들만이 천공을 빛내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 마음껏 반짝인다. 


그 장관에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링이 살풋 웃었다. 



“내가 일부러 마당에 있는 평상에다 그대를 옮겨 놨거든.” 


“응?” 


“그대가 깨어나자마자 처음으로 보는 게 내 얼굴이고.” 



장난스럽게 자신을 가리킨 링은, 이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두 번째로 보는 게 저 아름다운 별하늘이었으면 해서.” 


“...최고야, 링.” 


“응, 별말씀을. 그래도 조금 아쉬운걸. 취강봉에서는 정말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는데. 오늘은 그대와 그 별을 보면서 잠들고 싶었단 말이야.” 



못내 씁쓸하다는 표정을 짓는 링.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평상에 드러누웠다. 



“충분히 아름다워.” 


“으응, 그래도. 계속 욕심이 나는 걸 어떡해. 그대에게는 항상 최고만 보여 주고 싶다는 그런 욕심.” 



내 품 안으로 파고들며 칭얼거리듯 어리광을 부리는 링. 


그에 대한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저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 


네가 말하는 대로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예쁘지. 


무엇보다 옆에 네가 있어. 


나는 그것만으로 더없이 행복해.  


그런 마음을 담아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대여, 뭐 하나 고백해도 돼?” 



링이 문득 내 품에서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맑고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에 일말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그걸 알기에,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가 첫날밤을 보낼 때, 그녀가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두 개도 상관없어. 아니,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아.” 


“...사실 아까 그대의 바램을 들었을 때, 그리고 둘째오빠의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흔들렸었어. 미안해.” 



바램이라면….


아, 뭐 링이랑 아기 낳고 싶고 그거 말하는 건가. 



“왕 오빠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거절하는 그대가 정말 자랑스러웠고, 내 손을 잡고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고 싶다고 선언하는 그대의 모습도 눈부셨어. 저 하늘의 별빛을 삼천 배쯤 확대한 것 같았지.” 


“아하하, 그건 좀 과장인데.” 


“하지만…있잖아, 그대여. 그대라는 사람을 알면 알아갈수록, 그대와 보낸 시간이 내 속에 쌓여갈수록…점점 그런 마음이 커져만 가.” 



떨리는 눈빛으로. 


그리고 그 눈빛만큼이나 흔들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번뇌를 고백하는 링.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그대와 공유하고 싶다고. 그대의 소망대로 있잖아. 결혼식을 올리고, 우리 둘을 닮은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그렇게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둘이서 동시에 숨을 거두는 거. 꽃 피는 봄에, 술잔을 나누듯이. 그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나….” 



늘 청산유수였던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듬거리고. 


나에 대한 감정과 벅찬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에 작은 이슬이 고인다. 


사랑스럽다는 말 이외의 단어로 수식하는 게 실례일 듯한 그녀를, 나는 그저 꼭 끌어안았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그대와 그런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면…왕 오빠의 계획대로 되어도 상관 없다고,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가서. 정작 옆에 서 있는 그대는, 나보다 훨씬 적게 산 그대는 덤덤하게 섭리를 이야기하는데…그대에게 부끄러우면서도, 이런 나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괜찮아, 링. 당연한 거야. 나도 항상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네 말대로, 만에 하나. 


그런 미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어, 링. 


우리는 평생 행복할 거야. 


그야 사람이니까 다툴 수도 있고, 가끔은 서로에게 실망도 하겠지. 


하지만 서로를 잃을 것을 각오하고 만난 우리는, 분명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그 누구보다 서로의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에. 



“하지만, 링. 만약에 정말 왕의 계획대로 돼서…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그 끝에 우리가 살아남는다면…난 네게 떳떳할 수 없을 것 같아.” 



이것도 그냥 내 욕심이야. 


네 방식대로 이 세상을 오랜 세월 동안 지켜 왔고. 


지금도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네게, 항상 깨끗한 사람이고자 하는 욕심. 


네 곁에 서서 온 천하를 유랑하고, 네 상냥함에 기대 밤을 지새우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지. 


한심하다고 비웃어도 돼, 너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그래서 나는 도저히 왕의 계획에는 찬성할 수 없어. 미안해”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대여. 내가 어리광 피우고 있다는 건 잘 아니까.” 


“그래도, 우리 둘 다 같은 마음이라면….” 



링을 감싸안던 팔을 풀고, 내 시선을 그녀의 시선에 맞춘다. 


어느새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예쁜 눈동자. 


아, 부탁이야. 


울지 말아줘, 링. 



“방법을 찾아보자. 둘이서.”


“......”


“해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는 존재해. 쉐이 문제도 그런 종류지. 하지만 자기만의 가설을 내놓고, 그 가설을 시뮬레이션 해 보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어. 니엔도 그렇고, 왕도 그렇고. 후자는 좀 많이 비뚤어지긴 했지만.” 


“...그대여.”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만의 답을 찾아보는 거야. 설령 그게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할지라도. 힘 닿는 데까지,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발악해 보자.” 


“가능할까?” 



울지 말라고 했더니, 이제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 나를 보는구나.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너의 여린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요동친다. 


이대로 너를 끌어안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밤을 지새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이제는 대책 없는 현재의 행복이 아닌.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갈구하기 시작한 너를 보며, 그저 싱긋 웃는다. 



“뭐, 정 안 되면 니엔한테 가서 빌어보지 뭐. 위대하신 영화의 신이시여, 이 못난 연인들을 좀 구해주소서-하고.” 


“...아하하, 그게 뭐야.” 



그리고 이제야 좀 풀어지기 시작하는 너의 표정. 


다행이야. 



“이번 여행이 끝날 때까지만, 둘이서 각자 생각해 보자. 어떤 길을 택하는 게 우리에게 최선일지. 그리고 나서 이야기해 보는 거야. 그렇게 함께 방향성을 정하고, 후회 없이 그 길을 쭉 나아가는 걸로. 어때?” 


“좋아. 깔끔해.” 


“그럼 결정 났네. 이리 와, 정수리 냄새 좀 맡게.” 


“뭐…? 푸핫, 정말이지…그대는 변태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나도 사실 좀 무서웠단 말야. 왕이랑 대치하면서. 어리광 좀 부리게 해 주라.” 


“...이것도 그대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려나? 그렇다면 별 수 없지만.” 


“뭣.” 



말로는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면서도, 다시금 내 품 안에 몸을 꼭 붙이는 너. 


있잖아, 링. 


나도, 처음에는 우리의 미래가 절망뿐일 거라 생각했어. 


그 예측을 잊기 위해, 더욱더 우리의 현재에 집중하려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같은 문제를 마주하면서, 각자 다 다른 답을 내놓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듣고 있으니, 그러기 싫어도 점점 희망을 떠올리게 돼. 


해를 향해서만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하지만 내 생각이 어떻게 변하든, 링. 


네가 곁에 있어 준다면. 


그리고 네가 나를 좋아해 준다면.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뭐니뭐니해도, 너는 항상 변함없이 사랑스러우니까. 



쉐이 합체까지, D-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