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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오래 걸렸지만, 일단 로사 제이 야설을 써 왔어. 


저번 작품 퀄리티가 아쉬웠던 만큼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써 왔는데,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이번 작품도 빌드업 분량이 폭주해서 3편으로 쪼개야 하는 건 덤이고. 


3편만 야설이니까, 그런 걸 바라는 명붕이들은 바로 3편으로 가시면 됨다. 


햐...시발, 힘들었다 진짜. 


다음은 계속 쓰고 싶었던 언펙터야.


오퍼레이터 추천, 피드백, 댓글, 아카콘 전부 환영해.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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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스윽. 


서늘한 소리와 함께 칼갈이봉에서 떨어진 중식도가 예리한 빛을 내고. 


보글보글, 가스버너 위에 올려진 뚝배기에서는 맛있는 향기와 함께 정겨운 소리가 들려온다. 


주방도구도 전부 깨끗이 씻어서 준비했고.   


이 정도면 개업 준비는 만전이다. 


불 꺼진 로도스 식당 한구석, 용문의 노점을 본따 만든 조그마한 포장마차 안에서. 


오퍼레이터 제이는 들뜬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제이야! 개업 축하한다!” 


“흠, 꽤나 그럴듯하군. 준비하느라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겠어. 개업 축하한다.” 



때마침 포장마차의 천을 젖히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첫 번째 고객들. 


아무렇게나 기른 회색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질끈 묶은 그의 상관.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 꼭 붙어 포장마차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와이번 여성, 사리아. 


제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들을 맞았다. 



“대장, 사리아 씨. 오셨습니까.” 


“어, 형이야. 이건 내가 만든 개업 선물.”  


“나도 따로 하나 준비해 봤다. 별 건 아니지만, 기뻐해 줬으면 좋겠군.”  



박사가 건넨, 대나무를 엮어 만든 호미 같은 물건.


그리고 사리아가 무뚝뚝하게 내민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 


후자의 정체는 어느 정도 유추가 된다. 


붙어 있는 라벨에 ‘수제 친환경 주방세제’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박사가 내민 물건의 정체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이게 뭡니까?” 


“아, 복조리라고 있어. 단국 물건인데, 불운은 거르고 행운을 불러들이는 효과가 있다더라. 얼마 전에 우연히 책에서 읽었는데, 재밌어 보여서 너한테 선물해줄 겸 한 번 만들어봤지.” 


“뭘 이런 것까지 준비해주십니까. 안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신세지고 있는데. 받기 죄송함다.” 



따지고 보면 이 포장마차를 열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박사 덕분이다. 


로도스가 많이 안정화되면서 숙련된 전투 인원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따라서 과거에 어쩔 수 없이 전장에 투입되던 오퍼레이터들이 노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런 그들을 안타깝게 본 박사는, 그들이 그들 나름의 능력을 살려 로도스에 새로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있었다. 


오퍼레이터 퍼퓨머에게는 함선 내부에 작은 온실을-그녀가 그 온실에서 정확히 뭘 재배하고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열 수 있게 허락하고. 


오퍼레이터 이스티나에게는 로도스 함내 도서관의 수석 사서 역할을 맡겼으며. 


오퍼레이터 제이에게는…. 


로도스 식당 한 구석에, 따뜻한 야식과 술을 파는 작은 포장마차를 열어 주었다.  


어디 그뿐일까, 켈시를 설득해 로도스의 식재료 구입 루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부터.


주방기구의 구입, 그리고 주류의 구비까지 사비를 털어 가며 도와주었다.  


웬만한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들 못지 않게 잘 싸우긴 하지만, 결국 제이의 본질은 요리사. 


아직까지는 회칼로 적들을 썰어재낄 때보다 중식도로 식재료를 다듬을 때 더 즐거움을 느끼는 그였기에, 박사의 이런 배려가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를 담은 제이의 머쓱한 미소에, 박사가 손사래를 쳤다. 



“에헤이, 넣어둬 넣어둬. 뭐 대단한 선물이라고. 저어기 가게 한구석에 걸어 두면 보기 괜찮을 거야. 잘 되길 빌게.” 


“마수걸이가 두 분이니까, 분명히 잘 될 검다.” 



그 말에 해맑게 웃는 박사. 

   

생면부지였던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 이유가 뭔지, 제이는 몰랐다. 


그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건지도 가늠이 잘 안 됐고. 


그저 그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다면. 



“저번에 동태찌개인가, 그거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었죠.” 


“오? 설마?” 


“예. 설명해주셨던 거 토대로, 최대한 비슷하게 준비해봤슴다.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제이가 박사에게 할 수 있는 보은은, 최선을 다해 맛있는 요리를 내놓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이미 생선은 끓이고 있으니까요.” 


“내장은? 내장도 있어?” 



생일날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마냥 반짝거리는 박사의 눈빛 앞에, 제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 내장에 독이 없고 기름기가 많으면서, 배 채울 만큼 알주머니가 나오는 생선…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슴다.” 


“씨바, 이궈궈든! 바로 진행시켜!”


“생선을 넣어 만든 탕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신나하는 거지?” 


“너가 안 먹어봐서 그래, 사리아야. 진짜 동태찌개만의 그 시원하고 얼큰한 맛이 있다니까?” 


“...흠, 네가 하는 말이니 한 번 믿어보지.” 


“그래그래, 후회 안 할 거야. 아, 제이야. 담배 펴도 될까? 전자담배인데.” 



글쎄, 명목상 여기는 로도스 함내고 식당 안이니만큼 연초를 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전자담배는 냄새도 금방 빠지고, 딱히 문제는 없겠지. 



“피십쇼. 어차피 오늘은 대장 말고 다른 손님 받을 생각 없으니까요.” 



그 말에, 바로 주머니에서 작은 전자담배 기기를 꺼내 드는 박사. 


그 모습을 보며, 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 원래 연초 피시지 않으셨슴까?” 



타당한 의문에, 박사가 피식 웃으며 옆에 있는 사리아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에 사리아랑 같이 바꿨거든.” 


“아….” 



몇 주 전, 박사와 사리아는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세상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제이였지만, 그녀가 어떤 피튀기는 난투극을 거쳐 박사의 옆자리를 ‘쟁취’했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는 로도스 안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인한 여성이니만큼, 박사가 잡혀 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텍사스에 버금가는 애연가인 박사가 느닷없이 연초를 포기했다면,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리아의 입김이….



“내가 바꾸자고 했는데, 사리아가 별 말 안하고 따라와 주더라고.” 


“지극히 현명한 결정이었다. 너의 건강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너와 내가 아이를 가진다고 가정했을 때 연초를 피는 건 좋지 않지.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이는 좀 이른 거 아닌가 싶다, 사리아야. 우리 아직 결혼식도 안 했어.” 


“시간문제 아닌가? 어차피 난 너 아니면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는데. 라인 랩 동료들에게 상담했더니, 혼수 준비는 맡기라더군.” 


“프러포즈부터 좀 제대로 하게 해 주라.” 



오렌지 향이 나는 연기를 내뿜으며 키득키득 웃는 박사.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바짝 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뜬 어조로 풀어내는 사리아.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모습에, 제이는 얼이 빠졌다. 



“...저, 대장. 결혼이요?” 


“엉? 응. 아직은 나랑 사리아랑 가끔 얘기만 하는 정도인데, 조만간 진지하게 할까 고민 중이야.” 


“...두 분 사귀신 지 아직 몇 주도 안 된 거 아님까.” 


“그런 건 관계없다. 어차피 박사와 내가 함께한 시간은 훨씬 기니까. 이미 웬만한 연인들보다 서로에 대해 잘 안다는 이야기다.” 



사무적이고 냉정한 사리아. 


껄렁껄렁하고 경박한 박사.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달달함을 기대한 사람은 적었다.


제이 또한 그랬고. 


실제로 제이의 눈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풋풋한 연인이라기보다는 이미 볼 장 다 본 노년 부부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분위기가 어쨌든 두 사람은 틀림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재미있는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두 사람 모두 외향적인 성격은 아닐 텐데. 


신기할 정도로 즐거워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옆구리가 시려 오는 건 왜일까. 


아니, 손님들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겠지. 



“그러심까. 방해 안 할 테니, 천천히 식사하시면서 말씀 나누십쇼.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해주시구요.” 



잡생각을 털어 버리려 애쓰며, 제이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뚝배기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정갈하게 차곡차곡 쌓인 생선의 내장과 살, 두부.


그리고 쑥갓과 무를 비롯한 각종 채소가 잘 어우러진 찌개. 


거기에 내장을 찍어 먹을 소스와 공깃밥, 술까지.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위장을 자극하는 그 비주얼에 박사와 사리아가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와아….” 


“약소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드셔주십쇼.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진짜 고맙다, 제이야. 잘 먹을게.” 


“잘 먹겠다, 제이.” 



양 손바닥을 맞부딪힌 박사는 그대로 탱글탱글한 곤이를 한 점 집어 소스에 찍더니, 사리아의 앞접시에 놓았다. 



“이게 곤이라는 거거든, 사리아야? 한 번 먹어 봐. 절대 후회 안 할 거야.” 


“...마치 뇌처럼 생겼군.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에이, 그러지 말고. 나 믿고, 딱 한 번만 먹어 봐. 맛없으면 오늘 네가 해 달라는 플레이 다 해 줄게.” 


“...그렇다면야.” 



한숨을 푹 내쉰 사리아는, 눈을 꼭 감고 젓가락으로 곤이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제이는 내심 떨리는 마음으로,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사리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도 생선 내장을 다뤄 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적잖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사리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환희로 불타고 있었다. 



“정말, 정말 믿을 수 없지만…맛있군.” 


“그치? 야, 내가 뭐랬냐?” 


“이 쫄깃함. 꼭꼭 씹으면 배어나오는 크리미함이랑 짭짤함. 고급스러움은 없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 부위만의 매력인가. 훌륭하다.” 


“말할 시간에 먹어. 식으면 맛없어.” 


“국물도 굉장하군. 분명히 처음 경험하는 맛인데, 전혀 거부감이 없어. 칼칼하면서 지나치게 혀를 자극하지 않고, 속을 뜨뜻하게 뎁혀 주는…박사, 너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요리를 먹어 본 거지?” 


“염국 상촉에 있는 단국 요릿집. 그때 한 입 먹어보고 나도 반했잖아.”  



덤덤한 목소리로 격찬을 늘어놓으며 동태찌개를 흡입하는 사리아. 


그리고 그에 질세라 바쁘게 젓가락을 놀리는 박사.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제이는 뿌듯하게 웃었다. 


전장에 나가는 것도 좋지만, 역시 그는 이렇게 소소하게 손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보람찼다. 


그 손님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상관과 그의 연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공깃밥 한 그릇 더!” 


“예이.” 


“술도 더 부탁하지, 아니 다 부탁한다.” 


“분부대로.”  

 


그렇게 박사와 사리아가 공깃밥을 일곱 그릇이나 해치우고. 


금방이라도 넘칠 듯 끓어오르던 뚝배기를 텅 비우며. 


염국에서 가져온 탁주를 네 병 가까이 끝장낸 뒤. 



“...어흐, 썅. 취한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박사가 테이블에 엎어졌다. 


뚝배기를 닦으며, 제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보임다. 슬슬 들어가서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냐, 아냐. 내가 오늘 유일한 손님이라며. 그럼 씨발, 우리 제이 매출 제대로 올려주고 가야 안 되겠냐.” 


“내일 속 뒤집어지심다. 마음은 감사하긴 한데, 무리하지 마십쇼.” 


“미안하다. 술을 좋아하는 주제에 빨리 취하는 녀석이라…내가 계산하마. 얼마나 나왔지?” 



새빨개진 얼굴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그리고 그런 그를 황급히 챙기는 사리아. 


중년 부부 바이브를 뿜어내는 두 사람을 보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셔도 됨다. 제가 어떻게 두 분한테 돈을 받습니까.” 


“아니.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대접받은 이상, 그냥 나가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옳소!” 


“넌 좀 닥치는 게 어떤가. 술 냄새 난다.” 


“이년이 편들어줘도 염병이네? 싸우자는 거냐 지금?” 


“좋다. 덤벼라. 난 걸려온 승부는 피하지 않는다.”  


“오케이, 씨바거. 결혼빵이다. 이기는 쪽이 신랑, 지는 쪽이 신부 하는 걸로.” 


“그렇다면 더더욱 물러설 수 없겠군.” 



술기운이 오른 탓일까.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투닥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 


유치하기까지 한 그 모습이 어딘가 즐거워 보여서, 제이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사실 박사와 사리아에게,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남들에게 비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걸지도. 


그저 곁에 있는 서로를 신경쓰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주변의 시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그렇기에 더욱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드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옆구리가 다시금 시려 오는 제이였다.  



“...저, 사리아 씨. 그럼 돈 말고 다른 걸로 받아도 되겠슴까.” 



그 탓이었을까. 


제이는 조금 충동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음?” 



박사에게 헤드락을 걸던 사리아와, 탭을 치며 켁켁거리던 박사가 동시에 제이 쪽을 돌아보았고.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셨으면 함다.” 


“말해라.” 


“...그, 연애하면…많이 행복한지 궁금합니다.” 



전혀 뜻밖의 질문에, 순간 박사와 사리아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니가 대답할래, 사리아야?” 


“그러지. 취한 너한테 떠넘기면 또 무슨 이상한 개소리를 할지 모르니.” 


“아까부터 말하는 꼬라지 봐라.” 


“한 번만 더 말대답하면 중성화 약물을 주사한 뒤 드레스를 입혀 결혼식에 세우겠다.” 


“......” 



박사를 침묵시킨 사리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 연애가 하고 싶은 거냐?” 


“...잘 모르겠슴다. 그냥…두 분의 모습을 보니 괜히 부럽고, 되게 즐거워 보여서 말임다. 저도 연애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해서요.” 


“흠. 글쎄. 연애상담이라면 이 얼간이가 나보다 낫긴 하지만…이것만큼은 얘기해 줄 수 있겠군.” 



박사를 대충 등에 업고 제이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는 그녀. 



“오히려 연애를 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내 일뿐만 아니라 상대의 귀찮은 일까지 일정 부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지.” 


“그럼 두 분은….” 


“아, 나랑 박사는 이미 그런 거에 익숙해졌으니까. 좀 다르다.” 


“......” 


“연애를 해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말이다, 제이. 이 사람의 불행을 나누어 들어도 괜찮겠다 싶은 사람을 만나라. 그럼 틀림없이 행복할 수 있을 거다. 넌 썩 괜찮은 녀석이니, 언젠가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네 다음 나 만나기 전 연애 경험 0회.” 


“...이 새끼가 진짜.” 

 


깐족거리는 박사를 황급히 쥐어패기 시작하는 사리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제이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미 있는데 말임다, 사리아 씨.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문제임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



다음날 새벽. 


포장마차를 정리하고 짧은 쪽잠을 잔 제이는, 여느 때처럼 식당으로 향했다. 


텅 빈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불을 켠 뒤. 


조리도구를 정리하고, 그날 아침 메뉴에 맞는 재료들을 미리 손질하는 것. 


로도스 아일랜드에 온 뒤, 제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일이다. 


그렇게 10분 정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 로도스 아일랜드의 주방장 굼이 출근한다. 



“제이 오빠, 좋은 아침이야! 오늘도 부지런하네.” 


“굼 씨. 좋은 아침임다. 오늘 아침 메뉴가 분명히…에그 인 헬이랑 하얀 빵, 양송이 수프였죠?” 


“맞아! 샐러드랑 용문식 고기볶음, 두부탕에 쌀밥도 준비해야 해!” 


“예. 빵 반죽은 해뒀구요, 고기도 양념에 재웠슴다. 야채도 씻어 두긴 했는데, 아직 썰지를 못해서요. 좀 도와주시겠슴까.” 


“고생했어! 샐러드랑 두부탕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오빠는 계란부터 까 줘! 본격적인 조리는 마터호른 씨 오면 시작하자!” 



굼, 제이, 마터호른.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로도스의 주방은 주로 이 세 사람에 의해 운영된다. 


단 세 명이서 주방을 지휘해 물경 수백을 헤아리는 인원의 식사를 전부 챙기면서, 맛도 양도 충족한다. 


그만큼 세 사람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반증이었다. 



“...제이 씨, 굼 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실버애쉬 님과 늦게까지 대화하느라, 좀 늦잠을 자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다른 식사당번 오퍼레이터들과 함께 마터호른이 도착하면, 본격적인 아침 식사 조리가 시작된다. 

 

세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언뜻 보면 촉박하기 그지없었으나, 늘 그렇듯 그들에게 실수란 없었다. 



“오빠! 수프 다 됐어! 좀 퍼서 내놔 줘!” 


“알겠슴다. 그럼 계란 안 타게 좀 봐주십쇼.” 


“맡겨둬!” 


“고기도 슬슬 다 됐는데…일단 잠깐 덮어놓겠습니다. 식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렇게 바쁜 새벽이 지나가고, 식당의 오퍼레이터들이 모여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 


로도스 식당이 열리는 시간이 된다. 


제이는 국자와 집게를 잡고 배식대 앞에 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제이 씨. 오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좋은 아침임다, 샤이닝 씨. 별 거 아님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남들과 식사 시간이 겹치는 것을 싫어하는 오퍼레이터들부터 시작해. 



“유넥티스 씨, 오늘도 제조소 오전 근무 들어가심까.” 


“...썅, 아무리 1저지 디펜더라도 그렇지…나도 전투인력인데…작전에는 안 데려가 주고 제조소 숙소 뺑뺑이만 몇 번째인지….” 


“...식사 맛있게 하십쇼.” 



일찍 근무에 들어가야 하는 오퍼레이터들. 



“...제이, 나 졸려.” 


“호시 누님, 어제 훈련소 야간 당직이셨죠? 고생 많으셨슴다. 식사 맛있게 하시고, 푹 주무십쇼.” 


“응, 고맙다…하아암.” 



그리고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자러 가는 오퍼레이터들이 차례로 그의 앞을 지나갔다. 


이 다음부터가 본격적인 조식 시간이다.  


한산하던 식당이 사람들로 꽉 미어차고. 


졸음기를 얼굴에 가득 담은 오퍼레이터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왁자지껄한 담소와 함께 식사를 즐긴다. 



“오늘도 고마워, 제이 씨.” 


“아임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제이는 이 아침의 활기가 정말 좋았다. 


누군가는 느긋하게 음식을 접시 한가득 퍼담는가 하면. 


누군가는 빵 한 조각에 대충 잼을 발라 입에 물고 황급히 뛰어간다. 


어떤 이는 오퍼레이터들 속에 섞여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한편, 다른 사람은 조용한 창가에 앉아 홀로 음식을 음미한다. 


사람이 많은 만큼, 아침을 맞이하는 방식도 즐기는 방법도 저마다 다 달랐다. 


그런 다채로움은, 그가 평생을 바쳤던 용문의 아침 풍경과 어쩐지 닮아 있었다. 


그렇게 배식 시간이 끝난 뒤. 


어느새 텅 비어버린 배식대 위에 턱을 괴고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저기, 제이 씨….?” 



소복히 쌓인 눈처럼,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새하얀 소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동그란 귀를 쫑긋거리며, 접시를 품 안에 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우르수스족 여자아이. 


스나이퍼 오퍼레이터, 로사였다. 


제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로사 씨. 좋은 아침임다. 식사하러 오신 겁니까?” 


“...네. 그런데 식사 시간은 이미 끝났으려나요?” 



끝나긴 했다. 


아직 식사를 하고 있는 오퍼레이터들이 남아 있었지만, 공식적인 배식 시간은 이미 10분 전에 종료되었다.  


저 구석에서 함께 밥을 먹는 박사와 사리아를 보며, 제이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렇긴 함다.” 


“아….” 



그녀의 얼굴에 언뜻 스친 실망의 기색을, 제이는 놓치지 않았다. 


좀처럼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는 그녀인데. 


무슨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마음을 스쳤지만, 제이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 로사에게 말을 붙였다. 



“호, 혹시 시간 되심까.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뭐라도 만들어 오겠슴다.” 


“...정말요? 괜히 폐 끼치는 건 아닌지….” 


“민폐 아님다. 다른 분들이 늦게 오셔도 이렇게 해 드리니까요. 저기 앉아서, 커피라도 드시고 계십쇼. 금방 해 오겠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터호른이라면 모를까, 제이는 늦게 오는 오퍼레이터에게도 간단한 샌드위치 정도는 해 주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굼 씨, 소시지랑 베이크드빈즈 남은 거 좀 써도 됨까?” 


“응? 배고파? 써도 되긴 해.” 


“감사합니다. 오트밀도 좀 가져가겠슴다.” 



굼에게 양해를 구하고, 남는 식재료를 후다닥 꺼내 서둘러 조리한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르수스식 아침 식사 한 상을 차려낸 제이는, 그걸 접시에 옮겨 담고 로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와아.” 


“별 건 없지만, 식사 맛있게 하십쇼.” 


“대단해요, 제이 씨.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훌륭한 식사를….” 



오트밀, 계란후라이, 구운 소시지, 베이크드빈즈에 빵 몇 조각. 


빈말로도 훌륭하다 하긴 힘든, 평민들의 아침상. 


하지만 눈을 반짝이는 로사의 모습을 보니, 그런 겸손의 말이 쏙 들어가는 제이였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저…잠시만요.” 

“더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심까?”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말동무라도 해 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로사를 보며, 제이는 조금씩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뭐, 그 정도야 상관없겠지. 


설거지는 원래 다른 오퍼레이터들 몫이고, 점심식사 준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열심히 음식을 오물거리는 로사 앞에서, 제이는 천천히 의자를 빼 앉았다. 



“...별로 재미는 없는 놈이지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슴다.” 


“감사해요. 저…옆에 누군가 없으면 밥이 잘 안 들어가서.”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왜 혼자 오셨습니까? 항상 지마 씨나 이스티나 씨랑 같이 다니셨던 것 같은데.” 


제이의 의문에, 로사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외근 나갔어요. 그래서….” 


“그러셨군요. 심심하실 것 같슴다.” 


“심심하다기보다는, 좀 쓸쓸해서요. 그냥….” 



반쯤 비워진 접시 앞에서, 한없이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 


그런 그녀의 얼굴에, 제이의 가슴 한구석이 지그시 아려왔다. 


뭐지, 공감 같은 건 잘 못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좀 주제넘은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네?” 


“식사 시간 때만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제가 옆에 있어 드리겠슴다. 이스티나 씨처럼 박식하지도 않고, 지마 씨처럼 기운차지도 않지만요. 최소한 이야기는 들어 드릴 수 있슴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용기에 힘입어, 감당 못 할 제안을 질러버린 제이. 


그런 그를, 로사가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이 씨….” 



경악일까, 혐오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감정일까.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의 정체를 단번에 읽어낼 정도로 제이는 눈치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사과했다. 



“아. 죄, 죄송함다. 기분 나쁘셨다면….” 


“제이 씨는…정말 상냥하시네요. 감사해요.”  


 

하지만 로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이의 기우를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뜻밖이었다. 



“네?”


“사실 오늘 할 일이 별로 없거든요. 오전에 박사와 상담이 잡혀 있는 걸 빼면요. 그래서…저, 하루 종일 뭘 하면서 보내야 하나, 계속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셨군요.” 


“...이왕 말씀해 주신 김에, 식당에 계속 있어도 괜찮을까요? 식사 준비도 좀 도와드리고, 제이 씨랑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로사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우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출처 모를 기대감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 뿐.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제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이구나. 


다행이다, 이 사람이 나를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어쩐지 멋쩍어진 제이는 뒤통수를 긁으며 피식 웃었다. 



“저는 환영임다. 주방 일은 안 도와주셔도 괜찮으니, 언제든 편할 때 오십쇼.” 


“...감사해요. 정말.” 

“그보다, 음식 식습니다. 따뜻할 때 드십쇼.” 


“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접시 위로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음식을 퍼넣는 로사. 


그때.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제이의 시선이 누군가와 맞았다. 



“...제이, 너 이 도둑놈 새끼.” 



식당 한 구석에서 정줄을 놓고 졸고 있던 박사와. 



“...하, 이러려고 어제 연애 이야기를 물어본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그의 입에 음식을 끊임없이 쑤셔넣던 사리아였다. 


희번득거리는 두 사람의 눈빛에, 제이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