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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난 뒤. 



“어, 왔어? 앉아. 차라도 한 잔 줄게.” 


“...응, 고마워.” 



박사의 방에 들어선 로사는 순간 아연해졌다. 


그녀가 알던 박사의 사무실과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 들어올 때마다 담배 냄새에 숨이 막혔었는데, 이제는 웬 과일 냄새만 감도는 것도 그렇고. 


껄렁껄렁해서 살짝 기분 나쁘던 박사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얌전해진 것도 그렇고. 



“...박사, 무슨 일 있었어?” 


“응? 몰랐냐? 사리아랑 사귀는데?” 


“아.” 



그래서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뿐. 


어쩐지 기가 죽은 로사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그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오케이. 1103년 7월 11일 오전 9시. 환자, 나탈리아 안드레예브나 로스토바. 11차 상담 기록.” 



녹음기를 켜고, 이 만남의 목적을 정확히 상기시킨 박사는 이내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상담 전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고.” 


“...그, 사리아 씨는 왜 제이 씨를 끌고 간 거야?” 



그러고 보니 그랬지. 


조금 전, 식당에서 제이와 로사의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식사를 마친 로사를 박사가 에스코트함과 동시에, 사리아가 제이의 멱살을 잡고 복도 한구석으로 질질 끌고 간 것. 


뭐 이유야 여러 가지 있었지만,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는 박사였다. 



“...아니, 뭐. 난 모르겠다. 나중에 사리아한테 물어보든가.” 


“...그래.” 


“다른 건?” 


“없어.”
 

“그래, 그럼 시작하자.”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박사가, 조금 전과 아예 다른 진중한 눈빛으로 로사를 바라보았다. 



“좀 어때, 로사?” 


“...그냥, 그렇지 뭐.” 


“잠은 잘 잤고? 아까 보니까 밥은 잘 먹는 것 같던데.” 


“잘…자진 못했어.” 



그런 건 보면 안다. 


얼굴 아래 짙게 서린 다크서클이라거나, 다 일어난 피부가 말해 주거든. 


하지만 박사는 굳이 그런 걸 언급하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해했니?”  


“아니, 자해는 안 했고…악몽을 꿔서.” 


“그래. 그것만 해도 어디야. 좀 실례일지도 모르겠는데, 악몽의 내용을 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항상 꾸던 그거야, 박사.” 



매번 똑같은 질문에, 매번 똑같은 대답. 


문득 이 상담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허탈해진 로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학교에 서 있어. 문이 단단히 닫힌 학교에. 학교 밖에서는 무기를 든 리유니온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롱과 욕설을 쏟아내지.” 


“......” 


“식량은 부족하고, 물자도 떨어져 가. 그런 상황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질서를 유지하지. 아이들을 설득하고, 품위를 지키도록 그들을 고무시켜. 두렵고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고고하게 있는 게 귀족의 의무라고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응.”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야.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나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몇 번이고 반복하지.” 


“계속해.” 

“...질서 유지를 위해, 평민 아이들을 귀족들의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선택을.” 



말을 이어가는 로사의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공포. 후회. 절망. 자기혐오. 


조금 전 식당에서 제이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이윽고 학교가 화염에 휩싸이고, 내가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불타 사라져. 질서도, 귀족의 위신도, 스스로의 알량한 자존심도. 그 불꽃 속에서, 평민 아이들이 울부짖지. 나탈리아, 나탈리아. 너무 괴로워. 왜 그랬어. 우리도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응.” 


“나는 귀를 막아.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간 정말로 미칠 것 같아서. 하지만…아무리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귀를 힘껏 눌러도…그 아이들의 절규는 사라지지 않아. 그렇게 발버둥치고 괴로워하다 잠에서 깨지. 새벽에.”


“그래.” 


박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리유니온이 한창 체르노보그를 뒤엎을 당시. 


리유니온의 간부 중 하나, 메피스토가 한 학교를 점거하고 학생들에게 배틀로얄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현재 로도스에서 일하고 있는 오퍼레이터 굼이나 지마, 이스티나, 로사는 그 일의 피해자였고.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보내던 시선을 박사는 아직도 기억한다. 


세상에 대한 울분, 굶주림, 두려움.


그리고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으로 얼룩진 눈빛. 


어린아이가 가질 법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 꿈이 두렵니?”


“...두렵다기보다, 끔찍해.” 



다행히, 다른 아이들은 과거를 극복하고 열심히 현재를 살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로사만은 달랐다. 



“몇 번을 돌아가도 항상 최악의 선택을 내리는 내 모습이. 귀족의 품위라는 허식에 사로잡혀 현실을 못 보는 내 자신이.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고, 한심하게 귀를 막는 스스로가 너무 끔찍해.” 



그녀는 아직도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는 중이었다. 


지금이야 그나마 호전되었지만, 처음 로도스에 왔을 때의 그녀는 그야말로 극한까지 내몰린 상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흠칫하며 바들바들 떨고. 


무기가 될 만한 도구를 전부 빼앗아도, 기어이 방법을 찾아 자해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박사,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른 아이들처럼 과거를 받아들이고, 앞을 향할 수 있을까? 이런 나약한 나는, 정말…모르겠어.” 


“네 과거가…그렇구나.”   



그런 로사가, 박사는 더없이 어려웠다. 


아무리 정신병에 완치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정도가 심했다. 


이전 칸타빌레 같은 경우에는, 트라우마가 심한 만큼이나 현재를 살고 싶다는 갈망이 강했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었지. 


하지만 로사는 그녀 스스로가 치료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자신은 죄인이라는 자기혐오 속에 매몰되어. 


살고 싶다는 욕망조차 잃어버린 채, 그저 홀로, 고요히, 쓸쓸하게 스스로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박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하나만 묻자, 로사.” 


“...응.” 


“넌 왜 무기를 들었어? 네 스스로가 나약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끔찍하다고 말하면서, 왜 리유니온과 싸우겠다고 자원한 거야?” 


“그건…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로사. 


그런 그녀를 보며, 주머니 속의 전자담배로 향하는 손을 간신히 억누르는 박사였다. 



“알고 있어. 내가 아무리 괴로워하든, 죽은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아.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는…우리 같은 아이들이 더 생기지 않게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해서…” 


“...이건 그냥 내 생각이고, 방금 네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스친 단편적인 판단일 뿐인데 말야.”  

 


박사는 명쾌한 것을 좋아했다. 


시원시원하고 화통하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의 곁에 있을 때 가장 즐거웠다. 


그래, 이를테면 사리아 같은 사람. 


로사처럼 살짝만 건드려도 박살날 것처럼 덧없는 이는, 그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타입이었다. 


수없이 많은 여성들에게 돌림빵당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보다 로사 한 명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압도적으로 많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명의 의사이자 이 로도스의 지휘관이었다. 



“너, 이미 책임질 각오는 한 거 아니냐?”


“...모르겠어.”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로도스의 오퍼레이터이자 환자인 로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박사였다. 



“적어도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있잖아, 책임질 각오가 됐다는 건…그런 거거든? 아무리 고통스러운 멍에를 매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그 책임을 완수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 


“음…그러니까, 내가 바라본 네 상태는 이런 거지. 네 과거를 정확히 직면하고 있고. 책임질 준비도 됐고. 근데 그 책임을 완수한 뒤에 왜 살아야 할지를 아직 잘 모르겠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니까, 굳이 무리해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섵불리 긍정하지 않고, 무턱대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환자의 상태를 신중하게 관조한 후. 


말을 고르고 또 골라, 환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런 원칙에 따라 박사가 한 말에, 로사가 움찔했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한참 박사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럼, 박사는…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글쎄.” 


“...?” 


“넌 네가 뭘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상담사인가, 싶을 정도로 대책없는 역질문에 잠시 멍해진 로사.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천천히 그 질문을 곱씹어 보았다. 


나는, 뭘 해야 할까. 


그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답은 어이없을 정도로 금방 나왔다. 



“리유니온을…아니, 아이들을 괴롭히는 세력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아.” 


“응.” 


“그때 죽은 아이들의 부모님께도…일일이 찾아가서 사과드리고 싶어.” 


“그리고? 또 있어?” 


“...학교에, 다시 한 번 가서…아이들에게 꽃을 바칠래.” 



로사의 답변에 박사가 씩 웃었다.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편해질까?”     


“적어도…조금이나마 개운해질 것 같아.” 


“그래. 훌륭하네.” 


“그런가…?” 


“요는 속죄하고 싶다는 거잖아.” 



어느새 텅 빈 그녀의 찻잔을 채워 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박사. 



“속죄라는 건 일종의 의식이야. 죄를 저질러 놓고 속죄한다고 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바뀌는 건 아니잖니.” 


“...그렇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거든. 누가 뭐라고 하든, 마음 깊이 뉘우치는 거.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 제가 정말 바뀌었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하고.” 


“......” 


“그렇다고 단순히 보여주기식은 아니야. 과정이라고 봐도 돼. 괴로운 과거를 직면하고 완전히 인정하거나, 혹은 떠나보내는 과정. 네가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정하고 싶은 것 같아.” 


“응. 그럴 준비가 된 것 만 해도 충분히 훌륭해.”  



박사도 로사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알량한 말 몇 마디가, 그녀의 묵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란 요원하다는 것을. 


기껏해야 너덜거리는 반창고를 다시 붙여 주는 것 정도에 불과하려나. 



“각오도 됐고. 속죄하고 싶은 의지도 만전이지. 그럼 남은 건…그걸 전부 끝낸 다음, 네가 어떻게 살아갈 거냐 이건데.” 


“...그건, 정말로 모르겠어.” 


“글쎄. 미안하다. 나도 그건 잘 모르겠네.”  



하지만 지난 열 차례에 걸쳐, 박사는 자꾸만 떨어지려는 반창고를 몇 번이고 다시 붙였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상처는 적어도 피가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는 아물었다. 


나머지는 전적으로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 곁의 사람들에게 달렸다. 


이를테면….



“...제이랑 하루를 보내면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제이, 씨랑?” 


“엉. 너 제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자, 잠깐만. 박사, 너무 갑작스럽….” 


“말 나온 김에 좀 물어보자. 제이의 어디가 그렇게 좋냐? 그러고 보니까, 너 제이랑 말 트고 나서 부쩍 상태가 좋아졌었지?” 



녹음기를 끈 박사가 짓궃게 웃었다. 


조금 전의 피폐한 모습은 어디 가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그의 시선을 피하는 로사. 



“...그, 그…이것도 상담이야?” 


“그렇긴 한데, 나만 알고 있을게. 어떤 부분이 너한테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네 담당의로서.” 



담당의는 무슨. 


그냥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면서. 


한참을 갈팡질팡하던 로사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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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세 달 전. 



“...헉!” 



한밤중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로사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눈을 뜬 것은. 


째깍, 째깍. 


새벽 4시 29분을 가리키는 시계.


땀에 흠뻑 젖은 잠옷과 이불, 숨막힐 듯한 어둠에 싸인 방. 



“...아, 아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또 그 악몽이다.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메아리치고, 리유니온의 조롱 섞인 천박한 웃음소리가 그 절규를 덮어씌우듯 들려왔다. 


우리는 너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너는 따뜻한 잠자리에 누워 편안하게 잠을 청하냐고.  


마음이 그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내뻗어진 손이 저절로 스스로를 해칠 도구를 찾는다.


아니, 없어. 


편지칼도, 펜도, 하다못해 종이 한 조각조차도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제물로 바쳐 귓가의 이 목소리를 가라앉혀야 하지? 



“...으, 아아….” 



그 질문에 대답할 길이 없어, 그녀는 어두컴컴한 복도로 뛰쳐나왔다. 


이대로는 안 돼. 


이런 삶을 이어나가는 건 고통에 불과하고. 


내가 불구덩이로 떠민 아이들에 대한 모욕일 뿐이야.


그래, 죽자. 


해치를 열고 갑판으로 올라가, 뛰어내리자. 


고통스러우면 어때. 나 때문에 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그 아이들만큼 괴롭겠어? 


그런 생각에 하염없이 복도를 헤매던 와중. 


문득 식당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발견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거기 누구 계십니까? 대장이에요?” 


“......” 


“늘 고생 많으심다. 들어오십쇼. 어묵탕을 한 번 만들어봤는데, 어떤지 맛이라도 봐 주셨으면 좋겠슴다. 대장 해산물 좋아하시잖아요. 괜찮다고 하시면, 다음주쯤에 메뉴에 올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빛과 함께 흘러나온, 따뜻한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발이 움직인 건. 


순간의 변덕.


아니, 변덕이라고 칭하기도 부끄러운 본능에 불과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당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우르수스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심까?” 

 

“...아, 저…실례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요.” 



다정한 음성과는 정반대로, 무감정하기 그지없는 눈빛. 


그리고 몸 곳곳에 가득한 흉터를 발견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죽을 거면 혼자 조용히 갈 것이지, 이게 무슨 민폐일까. 


최대한 예의를 차려 사과한 로사가 천천히 식당을 나가려던 그때. 



“저,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초면에 죄송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슴까.” 


“...네?” 


“그…이 어묵탕, 너무 오랜만에 만들어 봐서요. 간이 맞는지 안 맞는지 잘 모르겠어서 말임다. 한 입 맛봐주셨으면 함다.” 


“아….” 



입맛도 없고,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다. 


로사가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려던 그때, 청년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부담 안 갖고 거절하셔도 됨다! 뭘 먹기는 이른 시간이고, 여성분들은 그런 거에 민감하다는 것도 잘 아니까요. 실례했슴다.” 


“...아니에요.” 



어째서였을까.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투른 그 배려에.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은.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기쁘게 시식해 드릴게요.” 


“저, 정말임까? 감사합니다! 거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금방 가져오겠슴다.”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승낙에, 한없이 기쁘다는 듯 맑게 웃는 청년의 얼굴이 가슴 깊이 새겨졌던 것은. 


홀린 듯 자리에 앉는 그녀 앞에, 작은 접시에 담긴 국물 요리가 놓여졌다. 



“숟가락은 여기 있슴다. 드시고 싶으신 만큼 드신 다음, 가감없이 소감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상태로, 그가 쥐어 주는 숟가락을 받아 들고. 


국물 한 숟가락을 떠 목구멍으로 흘려 넣은 순간.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고. 



“...!” 



딸그락,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어, 그렇게 맛없으셨슴까.”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죄송합니다. 숟가락 하나만 더 가져다 주시겠어요?” 


“정말임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무를 베이스로 끓인, 비리지 않은 농후한 생선의 맛. 

 

간이 슴슴해 밥반찬으로 먹기는 좀 아쉬웠지만, 이것만 먹기에는 딱 좋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위장이 자기주장을 하는 것을 느끼며, 제이가 가져다 준 숟가락으로 정신없이 어묵탕을 퍼 넣는 그녀. 


그런 로사를 보며, 청년이 밝게 웃었다. 



“그렇게 배고프셨던 검까.”  


“...! 아뇨, 그런 건….” 



그 미소에 정신이 번쩍 들고, 잊고 있었던 수치심이 각성한다. 


나탈리아, 어쩜 이런 추태를 보이니. 


처음 보는 남성분 앞에서 잘 먹겠다는 인사도 없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질 않나. 


멋대로 숟가락을 떨구질 않나. 


도대체 어디까지 비참해질 생각이야.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는 그녀 앞에서, 청년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 저는 제이라고 함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탈, 아니 로사예요.”


“그렇슴까. 로사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떻게, 입맛에는 좀 맞으시는지 모르겠슴다.”  


“맛있어요. 이런 요리는 처음 먹어 보는데…정말 맛있네요.”  



우아한 수사도, 귀족다운 예법도 없는 원초적인 말.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서툴기 그지없는 감상에도, 제이는 기쁘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그저 그 말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그러시다니 다행임다. 옛날에는 하루에 수십 그릇씩 만들었던 요리인데…참, 몇 달 안 만들었다고 손이 무뎌졌지 뭡니까. 맛없으면 어쩌나 걱정 정말 많이 했슴다. 아, 더 드립니까?” 

 

“...네.” 



그렇게 로사가 계속해서 묵묵히 어묵탕을 먹어치우는 동안. 


제이는 그녀의 곁에서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식재료의 질이 어떻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주방 환경은 어떻고 하는. 


지금의 그녀 입장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이의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어진 것은. 



“...제이 씨.” 


“그래서 제가 저번에 호시 누님이랑…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제이의 표정이,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었겠지. 



“뭐 하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놀라지 마세요.” 


“노력은 해보겠슴다.” 


“저, 죽으려고 했어요. 방금 전까지. 아니, 지금도 죽고 싶어요.” 



터무니없이 무거운 얘기를 해 버렸다. 


아니, 어쩌면 허세처럼 들릴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제이는 로사의 사정 따위 전혀 몰랐으니까. 


비웃어도 좋고, 진지하게 뜯어말려도 딱히 상관은 없다. 


어차피 그를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전부 털어놓고 싶었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에 매달려, 횡설수설 마음을 고백하는 로사. 


 

“저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어요. 아무 죄도 없는, 제 친구들이. 더 이상 저 같은 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로사 씨.” 


“방금도 그 아이들이 꿈에 나왔어요. 저를 책잡고, 힐난하고, 원망했죠. 그 목소리를 견디면서 살아가기가 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죽으러 가는 길이었답니다. 신기하죠?” 



뭘 바라고 생전 처음 보는 남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삶이 괴롭다. 


그렇다면 등을 떠밀어 줬으면 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도 죽기가 무섭다. 


그럼, 덮어놓고 뜯어말려 줬으면 하는 걸까? 


그러기에는 인생이 너무 고통스러워. 


결국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건데, 나탈리아.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매일 새벽 눈을 뜰 때마다 깨달아요. 아, 나는 살아있구나. 그리고 곧바로 생각하죠. 왜 살아있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손목을 바라보면, 온통 할퀴고 쥐어뜯은 상처로 가득하죠.” 


“......” 


“이런 제가 혐오스럽고, 속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워요. 저, 제이 씨. 말씀해 주세요.” 


“......”


“이런 제가, 한심한가요?” 



그래, 한심하다고 말해줘. 


아냐. 그런 너라도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해줘. 


속에서 끓어오르는 자기모순에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로사는 제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은 이제 도저히 풀 수 없는 이 문제에 해답을 내려 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제이의 대답은….



“얍.” 


“아팟!”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로사의 이마에 딱밤을 날린 제이와,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붙잡고 아파하는 로사. 


그런 그녀를 보며, 제이가 중얼거렸다. 



“죄송함다, 로사 씨. 저를 키워 주신 분이 제가 힘들어하면 항상 이렇게 하셨거든요.” 


“읏…!” 


“로사 씨가 하신 말씀은, 제가 한참 전부터 줄곧 고민해 왔던 주제였슴다. 왜 살아야 할까. 저도 잘 몰랐거든요. 그냥 태어난 김에 사는 느낌이었슴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 앞에 걸터앉아,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내는 제이.



“그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동씨 아저씨…아, 저를 키워 주신 분임다. 그분께서는 제 이마에 딱밤을 날리시곤 일을 시키셨죠. 제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게 말임다.” 


“...아.” 

“처음에는 불만스러웠슴다. 저 늙다리가, 할 말이 없으니까 폭력을 휘두르네.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런데, 그런데 말임다.” 

“네?” 

“일을 하다 보니, 점점 그런 생각이 흐려졌슴다. 당장 눈 앞의 손님이 요리를 내오라고 아우성치는데, 내가 왜 살아야 하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틈이 어딨슴까.” 


“확실히….” 


“그리고 계속 그렇게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피부에 와 닿는 게 있었슴다. 아, 손님이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면 즐겁구나.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는 모르지만, 더 많은 손님이 내 음식을 즐겨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임다.” 



몹시 서툰 말투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자신의 삶 이야기를 풀어놓는 제이. 



“그 즐거움에 기대서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어느새 제 가게가 생겨 있더군요. 호시 누님과 만나서 로도스에 들어오게 됐구요. 대장, 아니 박사님 같은 분 밑에서 일할 기회도 생겼죠. 지금은 딱히 이유를 생각하지 않아도 삶이 즐겁슴다.” 


“......” 



그의 목소리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언변도, 이목을 쏠리게 만드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그저 한없이 순박하고. 


한없이 진솔할 뿐. 



“로사 씨는 한심하지 않슴다. 사람이라면, 과거에 후회되는 일이 있는 건 당연함다. 살아야 될 이유를 고민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함다.” 


“...하지만.” 


“죽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슴다. 그런 결심이 굳건하다면, 때때로 함부로 말리는 게 실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함다.” 


“...그렇다면.” 


“하지만 방금 안면을 튼 로사 씨의 지인으로서는, 그러지 말아달라 부탁드리고 싶슴다. 로사 씨가 살아갈 가치는 얼마든지 있슴다. 그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임다. 하루라도 좋슴다. 일주일이면 더 좋고요. 여기서 멈추지 말아주십쇼.” 


“......” 



이젠 이야기라기보다는 호소에 가까운 그의 절박한 목소리에. 


두 번 다시 볕 들 날이 없을 줄 알았던 마음에 서광이 비치고. 



“앞으로 새벽에 악몽을 꾸고, 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식당으로 와 주십쇼. 저는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요. 별 건 없지만, 이야기 들어 드리는 거랑…아, 또 따뜻한 국물 요리도 대접해 드릴 수 있슴다.”  



진심으로 그녀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한 순박한 미소에. 


로도스에 온 이래 처음으로, 아. 


나도 조금은 더 살아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서. 



“...제이 씨.” 


“이야기가 길었네요. 죄송함다. 별로 재미도 없는 흰소리를 들려드려서.” 


“아니에요. 정말…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일깨워 준 당신의 모습이, 어느 누구보다도 내 마음 속에 깊이 박혀서. 



“어묵탕, 잘 먹었어요. 다음주에 메뉴에 내놓는다고 하셨죠?”


“...아, 네.”

 

“기대할게요.” 



나도 모르게, 죽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일주일 뒤, 또 당신의 어묵탕을 이 자리에서 맛본 다음. 


불안한 얼굴로 어떠냐고 물어보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진 건. 


비단 내 우유부단함 때문은 아닐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가는 길 조심하시고요.”


“네. 고생하세요. 제이 씨.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언제든 또 들러 주십쇼.” 



그렇게 내 빈자리를 정리하며 손을 흔드는 당신이,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되어 주었으면 하고. 


그 순간부터 바라기 시작한 탓이겠지. 



—---



이야기를 다 들은 박사가 묘한 눈빛으로 턱을 매만졌다. 



“...이야, 제이 이놈 이거…그 상황이었으면 나도 반했겠는데?”


“...?” 


“아냐,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얘기 들려줘서 고맙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자.”  


“이렇게 빨리 끝내도 돼?” 



그 말에, 서류철에 대충 몇 자를 적어 넣은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다 했잖아.”


“그렇긴 한데.” 


“네 상태도 대충 다 체크했고.”


“그것도 그렇지만.” 

“그럼 뭐, 더 할 거 있나. 보드게임이라도 할래?” 


“...그건 좀.” 


“싫으면 빨리 나가. 가서 제이랑 놀아. 나 바쁘다. 아마 훈련실에 있을 거야.” 



휙휙 손을 내젓는 박사의 모습을 보며, 로사는 살짝 웃었다. 



“...고마워, 박사.”  


“고마우면 결혼식 청첩장이나 빨리 보내.” 



박사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로사. 


그리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는 박사였다. 



“어우, 기빨려. 어제 사리아랑 네 번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사리아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설마 아직도 제이를 잡아 족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