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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돌아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어째 요즘엔 쓰기만 하면 고봉밥이 되는 것 같은데...이젠 나도 몰라. 


오늘 점심에 회서리 스토리 읽고 눈 돌아가서 슈 단편 쓸까 하다가, 괜히 업로드 주기 망가질까 봐 그냥 썻음. 


후회는 안 해. 


진짜 역대급으로 재밌게 작업했거든. 


내가 즐겁게 쓴 만큼, 명붕이들도 내 글 읽고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야. 


개추를 누르고 댓글을 써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불쌍한 글쟁이에게 많관부.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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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1일 04:00. 


염국 대황성, 어느 헛간 안. 



죽기 싫다. 


아니, 차라리 누가 좀 죽여줘. 


논에 심기는 것보단 그게 나으니까. 


오늘 몇 번째 떠올리는 건지도 모를 바램을 되새기며, 좌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슈 씨.” 


“......” 



그 사죄에 대한 답은 작두가 했다. 


썩둑, 섬뜩한 소리와 헛간을 울림과 함께 건초 한 뭉텅이가 반으로 잘려나가고. 


작두의 손잡이를 쥔 소녀가 지그시 좌락을 노려보았다. 


차갑기 그지없는 그 시선에,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좌락이 움찔했다. 



“부,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님과 링 씨에게 슈 씨의 초대를 전달했는, 아니 전달하려고 했는데….” 



바로 어제, 좌락은 사세대의 연락을 받고 염국 상촉에 다녀왔다. 


뜻하지 않게 염국을 방문한 쉐이의 파편 링. 


그리고 그녀와 동행한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즉시 떠날 채비를 하는 좌락에게, 그의 관리자인 눈 앞의 소녀.


쉐이의 여섯째, 농사꾼 슈는 한 가지를 부탁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그 두 사람을 이곳 대황성으로 정중하게 초대해 달라고. 



“막상 두 분의 얼굴을 보니 사세대 지촉인으로서의 책임감이…아, 아니 염국 시민으로서의 의무가….” 



그리고 쉐이의 파편을 보자마자 사세대 뽕에 머리가 돌아간 좌락은 그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오늘 아침, 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링 씨가 너무 고압적으로 나오셔서….” 


“......” 



이 꼬라지가 났다. 


숭덩, 다시금 작두가 시퍼런 빛을 뿜었다. 


한 마디만 더 되잖은 변명을 지껄이면 땅에 심는 게 아니라 이 건초 더미처럼 반으로 잘라 버리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잘못했습니다, 슈 씨. 슈 씨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폭주했습니다. 용서해주십쇼.” 



결국 좌락에게 남은 선택지는 고개를 한껏 조아리는 것밖에 없었다.   


고개를 땅에 처박고 바들바들 떠는 좌락. 


한심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말없이 건초만 썰던 슈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좌락, 고개 들어.” 


“네…?” 


“고개 들라구. 나, 화 안 났어.”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내 부탁 잊어먹고 멋대로 행동하는 게 한두 번이니.” 



실망의 빛으로 가득한 슈의 감청색 눈동자를 마주보는 게 힘겨워, 좌락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게 화난 거 아닌가요, 속으로 소심한 반박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너한테 지금 이러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그럼요?” 



긴 한숨과 함께 작두를 내려놓은 그녀는, 천천히 좌락을 향해 다가왔다. 



“너, 저번에는 니엔한테 철없는 장난꾸러기니 뭐니 하면서 도발했었다면서?” 


“...그건.”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하필이면, 하필이면…링 언니를 건드리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너?”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은 슈가 좌락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슈, 슈 씨! 아파요, 진짜-” 


“이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아. 평소에 술이나 먹고 태평하게 싸돌아다니기만 하니까 링 언니가 만만해 보였니?” 


“악! 볼 찢어져요! 제발!” 


“넌 링 언니를 몰라. 그 사람이 정말 아끼는 무언가를 건드렸을 때, 유유자적하기만 하던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모른다고.”  



슈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그 자리에서 천 갈래로 찢길 수도 있었어. 혹은 깨어나지 못할 영원한 악몽 속에 빠져, 끝없이 구천을 떠돌게 됐을지도 모르지. 운이 좋다면 죽도록 두들겨맞는 정도로 끝났을지도. 그 박사라는 사람이 적절하게 개입해 줘서 다행이지.” 


“...하지만, 저희 염국은 이미 쉐이에 대한 대비 태세를.” 



새빨개진 뺨을 매만지면서도, 여전히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좌락. 


그런 그를 보며, 슈는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두야. 


이 어린애는 진짜 말의 행간이라는 걸 아예 이해 못 하는구나. 


이러니까 예체능으로 빠졌지. 



“...너, 링 언니의 진심을 본 적 있어?” 


“없긴 한데요.” 


“그래, 이 테라 전체를 뒤져 봐도 없을걸. 그걸 본 사람은 이미 저 옥문의 사막 깊숙한 곳에 처박혔거나, 전부 늙어죽었으니까.” 


“...아.” 


“잘 상상이 안 되니?” 


“솔직히, 예.” 


“좋아. 상상하지 마.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링 언니는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다, 하고.”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하고 덧붙이는 슈. 


솔직히 그녀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좌락이었지만, 더 이상 그녀의 말에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슈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 아해를 어찌할꼬. 


중2병이랑 국뽕이 합쳐져서 갱생도 안 되는 웬 괴물이 튀어나왔네. 


뭘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 


옆 나라 단국의 고사처럼, 동굴에 가둬두고 마늘이랑 쑥만 먹이면 되려나. 


끙끙 앓는 슈 앞에서, 좌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슈 씨. 그럼, 저 다시 상촉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가서 뭐 하게.” 


“링 씨와 박사님께 정중히 사과드리고, 다시 슈 씨의 초대를 전달하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슈는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그 두 사람, 이미 떠났을지도 모르는데?” 


“아마 며칠은 상촉에 머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링 씨는 상촉을 정말 좋아하시니까요.” 


“하긴. 근데 너는 안 피곤하겠어? 바로 어제 갔다 왔잖아.”


“전 괜찮습니다. 발이 빠른 게 제 유일한 장점이니까요. 제 실수에 대한 책임은 지고 싶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사람 됐나? 


처음 대황성에 도착했을 때의 좌락이었다면, 어디 한낱 늙어빠진 왕도마뱀의 파편 따위가 대 염국의 관리에게 훈계질이냐며 펄펄 뛰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적어도 말하면 듣기는 하는데다, 책임지겠다고 자청하기까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부드러워진 슈였다.



“...그래, 다녀오렴. 아, 아침은 먹고 가.” 


“넵.” 


“그리고 네 말만으로는 안 믿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짧게 편지라도 써서 줄게.”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응. 가서 좀 쉬고 있어. 아침 준비되면 부를 테니까.” 



그제야 해방된 좌락은 저려 오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켰다. 


그래도 용서받아서 다행이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며 비틀비틀 헛간을 나서려던 그때. 


문득 그의 머리를 어떤 의문이 스쳤다. 


좌락은 건초를 쇠스랑으로 찍어 수레에 옮겨 담는 슈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저, 슈 씨?” 


“응? 왜? 소죽 끓이는 거 도와주게?”


“그건 아니고요,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뭔데.” 


“굳이 박사님이랑 링 씨를 초대하시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내가 말 안 했었니?” 


“네.” 



이런, 좌락을 뭐라 할 때가 아니었구나. 


남한테 부탁을 하면서 그런 기초적인 것도 설명을 안 해줬다니. 


왠지 머쓱해진 슈는 쇠스랑을 수레 위에 걸쳐 놓고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냥 오랜만에 언니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리고 또…아, 그렇지.”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활짝 웃었다. 



“형부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



좌락은 당황했다. 


평소의 그녀 같았으면 감히 언니를 채간 놈팽이를 탈탈 털어 보고, 변변찮은 사람이면 당장 땅에 심어 버리겠다는 말을 했을 텐데.  


지금 슈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저 생각치도 못한 가족의 경사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듯한 그 미소가, 너무나도 눈부셔서. 


좌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슈 씨, 소죽 만드는 거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아냐. 가서 쉬어. 또 먼 걸음 해야 하잖아.” 


“아닙니다. 슈 씨는 이거 하고 아침식사 준비까지 하셔야 되잖아요. 조금이라도 힘 보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좌락이 다 컸네. 곧 장가가도 되겠어.” 



키득키득 웃는 슈를 보며, 좌락은 머쓱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박사님이랑 링 씨는 지금쯤 뭐 하고 계실까요.” 


“글쎄. 내가 아는 링 언니라면…취강봉에서 술판이나 벌이고 있겠지 뭐. 새벽부터 말이야.” 



—---



그러고 있었다. 


사실 새벽부터도 아니고 밤새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냥 술인 상태였다. 



“그대여, 취했어?” 


“내가 취했냐고? 나는 아직 하늘이 열리며 달이 밝고, 바다가 달리며 얼음이 흩어지는 걸 보지 못했어. 세상의 인간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는데…음, 또 뭐였더라. 까먹었어.” 


“그러네. 사실 나도 기억 못 해. 꿈 속에서 떠올린 심상은, 결국 눈을 뜨면 흩어지게 마련인걸.” 



새벽 5시쯤 됐으려나, 밤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물들까 말까 고민하는 시각. 


옷을 대충 걸친 나는 실없이 낄낄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리고. 



“취했으나 그대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은 아니고, 취하지 않았으나 오가는 술 한 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은 아니니. 그대여, 부디 안심하시게.” 


“푸하하, 그대의 주정은 들을 때마다 새로운걸. 만약 취객들을 대상으로 한 시 대회가 열린다면, 그대는 틀림없이 장원일 거야.” 



마찬가지로 거의 반라의 상태인 링이 키득거리며 말을 받았다. 



“흠, 그것도 그러네. 로도스로 돌아가면 한 번 열어 볼까. 시 창작 대회, 참가 요건은 만취 상태일 것.” 


“재미있겠는걸. 나도 참가해 볼까?” 


“넌 취하질 않잖아. 빠꾸야, 빠꾸.” 


“나도 술기운 정도는 느껴, 그대여. 그저 그 술기운에 떠밀려 스스로를 잃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을 갖추었을 뿐이지.” 


“자제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그대를 품에 안고 달까지 날아간다거나.” 


“아하하. 뭐야, 쩨쩨하게. 이왕 갈 거면 좀 더 멀리 가보자.” 


“그대는 정말 욕심이 많구나. 그럼 저 별하늘 너머, 불타는 태양의 시선을 지나, 악귀들이 도사린 차가운 별들을 넘어…그 누구도 밟은 적 없는 행성까지 가 볼까?”  



술도 시원한 새벽 공기도, 더없이 맛있어서 즐거워. 


인적 하나 없는 봉우리 위의 정자에서 보내는 밤은 정말이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을 벅차게 하고. 


무엇보다 별 거 아닌 농담에 활짝 웃으면서 기뻐하는 네가, 곁에 있다는 게.


그 어떤 미주보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걸.



“응. 그것도 재밌겠네. 쉐이고 광석병이고, 아무것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행성에서. 함께 정착해서 사는 거지.” 


“술이 없는 건 좀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겠네. 취기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정도로, 그대가 날 즐겁게 해 줄 테니까.” 


“열심히 할게. 아…그래도 술이 없으면 흥이 덜할 테니까, 그럴 때를 대비해서 술 빚는 법은 몇 개 외워뒀어. 네가 좋아하는 걸로.” 


“...그 사실보다 그대의 마음씨가 더 기쁜걸.”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미소짓는 링. 


얼굴에 예쁘게 핀 홍조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진심을 증명하는 듯 했다. 


아, 정말 좋아해. 


그런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나는 그녀에게 살짝 키스했다. 


쪽.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운 링이 살며시 내 귓가에 속삭인다. 



“...읏, 또 하고 싶어진 거야?”


“응. 사실 아니. 지금은 이대로가 좋아.” 



술판을 벌이고, 흉중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나누며 깔깔 웃다가 눈이 맞으면 한바탕 사랑을 나누기를 계속 반복했다. 


이 밤이 다 가도록.


마음 같아서는 너를 몇 번이고 더 안아주고 싶지만, 내 나약한 몸이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


미안해, 링. 


약해빠진 남자라서. 



“으응, 나도 그래. 이런 유쾌한 정취는 흔하지 않으니까. 그대와 몸을 섞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그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걸.” 



하지만 그런 내 쓸데없는 자학을 부드럽게 불식시키듯, 링이 살며시 내게 몸을 기댔다.



“그대에게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사랑하지만, 개인적으로 염국어를 하는 그대의 목소리를 가장 좋아해.” 


“그래? 염국어는 아직 어설픈데.” 



이래저래 염국과 엮일 일이 많아진 탓에 속성으로 익혀 두긴 했지만, 그래도 모자란 부분이 많다. 


그럭저럭 회화는 되긴 하는데, 원어민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일까. 


그래도 링이랑 다니면서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다. 



“맞아. 유창함을 비교하자면, 소학교에 갓 입학한 염국 어린아이 정도려나?” 


“...링, 너 인마.” 


“아하하, 농담이야. 딱히 그대의 미숙함을 힐난하려는 게 아냐. 그런 사소한 티끌을 물고 늘어질 시간에, 그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도 바쁜 나니까.” 



배를 잡고 한바탕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 더 열심히 연습할게.” 


“으응,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그대의 염국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거든.” 


“어떤 건데?” 


“…억양이 말이지, 굉장히 신중해.” 


“신중하다고?” 


“응.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한 조각 한 조각을 발음할 때마다 고심의 흔적이 느껴지거든. 입을 떼기 전, 그 짧은 한순간에 시간을 거슬러 그 단어의 유래를 고찰하고. 그대의 말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정말 깊이 고민한 흔적이.” 


“...그런가?” 


“그렇다니까. 들을 때마다 항상 마음에 와 닿아. 아, 이 사람은 정말 상냥한 사람이구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게. 그래서 좋아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응? 내 염국어?” 


“아니, 그거 말고. 네 말투. 진짜 평생 듣고 싶을 정도야.”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내 좋은 부분을 찾아내 주고. 


스스로 단점이라 여겼던 곳까지 장점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부드러운 말투도. 


그 말투에서 알알이 배어나오는 나를 향한 감정도, 말로 다 표현 못 할 만큼 좋아해. 


그런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자, 링의 얼굴에 수줍음이 번졌다. 



“이런, 곤란한걸.”


“뭐가?”  


“나는 이미 그대를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그대와 말을 겹칠 때마다 내 안의 그대가 자꾸만 커져 가. 이대로 가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저런. 몰랐구나, 링.” 


“뭘?” 


“우리, 이미 이상해.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 어느 연인이 둘이서 여행을 한답시고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대충 만든 낚싯대로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고. 


아무도 안 오는 산봉우리까지 기어올라와 회를 떠 먹고는, 술판을 벌이면서 밤을 샌단 말인가. 


만약 우리의 일상이 알려진다면, 염국이고 로도스고 다 뒤집어지겠지.


가령 염국에서는 ‘충격! 옥문의 수호자였던 쉐이의 둘째, 상촉 산봉우리에서 술로 목욕을 하던 중 발견되다. 옆에 있던 박사(가명),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발언…’ 뭐 이런 기사가 날 거고. 


로도스에서는 회사 망신 다 시켰다며 나를 잡아죽이겠다고 아우성을 칠 터다.   



“하지만 사랑하시죠?” 



그래서 그게 뭐,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능청스레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리는 링. 


나도 마주 웃으며 잔을 치켜올렸다. 



“한 잔 해. 사랑하신다잖아.” 


“건배. 염국의 황색언론을 위하여.”   



술을 한 입에 털어 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린다. 


별 거 아닌 농담인데, 뭐가 그렇게 재밌었던 건지. 


아니, 딱히 궁금해할 필요도 없겠지.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그냥 곁에 서로가 있다는 사실이 터무니없을 만큼 행복해서 한바탕 폭소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거다. 


아, 링. 


나는 도대체 전생에 어떤 위업을 이루었길래 그런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걸까. 


무슨 행운을 타고났길래, 지금 여기서 너와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거고. 


또 앞으로 무엇을 바치면, 너와의 시간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슬슬,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구나.” 


“응. 술도 다 떨어졌어.”   

 

“...아쉽네. 이 통쾌한 순간이 끝나 버린다는 게. 해를 향해 날아가, 오늘 하루만 떠오르지 말아달라 사정하고 싶은 기분인걸.” 


“그러면 태양이 서글퍼할 거야. 그러니까 낮에는 낮 나름대로 즐겁게 보내자, 링.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올 밤을 기다리는 거야.” 


“응. 그러네. 그대의 말대로야.” 



황금빛으로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옷깃을 여미며 아쉽게 미소짓는 너와의 시간을. 


링, 그저께 내가 이야기했었지.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만 각자 생각해 보고 그 다음에 결정하자고. 


예정되어 있는 이별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순리를 거스르더라도 함께 발버둥칠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미 답을 정한 것 같아.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음, 그럼 아침 먹으러 갈까? 어제 얘기했던 선술집 아직 기억하고 있어? 거기 아저씨가 딱 아침까지 영업하는데, 조식 한정으로 어탕을 팔거든. 해장에는 그만이야.” 



그런 내 마음속을 읽은 걸까, 짐짓 밝게 이야기하는 너. 


솔직히 말하면 정말 안타까워서 미칠 것 같지만…네 배려를 무시할 수는 없지. 


그래서 웃었다. 



“좋지.” 


“그럼 결정이네. 가자.” 



손을 한 번 휙 내저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들을 없애 버린 그녀는, 이내 난간 위에 한쪽 발을 걸쳤다.



“...링, 뭐 해?” 


“응? 내려가야지.” 


“근데 왜 난간 위에서 그러고 있어.” 


“아아, 난 또 뭔가 했네.” 



장난스럽게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링. 



“그대여, 나 믿어?” 


“믿지.” 


“그럼 딱 한 순간만, 나를 위해 공포를 참아 줄 수 있을까?”


“평생도 참을 수 있어.” 



그 대답에, 그녀가 환하게 웃고. 



“응, 잘 말해줬어. 그 대가로, 잠이 확 깰 만큼 멋진 경치를 보여줄게.” 


“켁!”


그대로 내 손을 꼭 잡은 채 난간 너머로 몸을 날린다. 


순간 기묘한 부유감이 온 몸을 감싸고. 


등골이 오싹함과 함께, 칼날처럼 거센 바람이 온 몸을 후려친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모르겠는데. 


모르면 생각을 해, 이 멍청한 놈아. 


음, 그래. 


몸에 느껴지는 중력의 영향과 가속도를 고려해 보면….


떨어지고 있다. 


약 해발 1300미터에서.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굳어 있던 뇌가 겨우겨우 계산을 마친 순간.


내 입에서 한심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갸아아아아아아악!” 



링아, 나도 너랑 죽음까지 함께하고 싶긴 한데 말야!

 

그렇다고 지금 죽어서 사이좋게 망령이 되고 싶은 건 아니거든?
 

동반자살은 안 된다고, 동반자살은!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나를 보며, 링이 소리 높여 웃었다. 



“오너라, ‘시엔징’! 이이에게 우리의 시선을 잠시 빌려주자꾸나!” 


 

어느새 꺼내 든 걸까.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터 오는 동에 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이 폭발하며. 


이전 왕과 대치할 때 보았던 것처럼, 휘둘러진 지팡이의 끝을 따라 현실이 부드럽게 찢어진다. 



“‘술잔을 받쳐 올릴 테니, 등을 내어다오!’” 



먹물이 백지 위에 튀듯, 그녀가 찢어 놓은 경계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갓 캔 호박의 조각처럼 금빛으로 반짝이던 그 파편들이, 이내 모이고 뭉쳐 들어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작은 조각들은 비늘이 되고. 


큰 조각은 늘씬한 몸체를 이루며. 


길쭉하고 얇은 것은, 시원하게 뻗은 수염이 되어 허공에 물결쳤다.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마리의 용이었다. 


시엔징.


링이 가끔 전장에서 꺼내 쓰던 소환수. 



“오랜만이지, 박사? 시엔징한테 인사해!”


“안녕, 시엔징! 오늘도 잘생겼네! 미안한데, 좀 살려줄래?” 



이제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청량한 링의 목소리를 따라 아무렇게나 주워섬기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시엔징이 콧방귀를 뀌더니, 이 쪽으로 등을 돌렸다. 



“그대여, 내 손 놓지 마!” 



그리고 링은 그런 시엔징의 갈기를 솜씨 좋게 잡아채더니, 날랜 몸놀림으로 등에 올라타고는.


여전히 그녀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인 나를 끌어올려 뒤에 앉혔다. 



“불안하면 시엔징의 갈기를 잡아도 돼. 내 허리를 안으면 더 좋고. 부유감을 더 느끼고 싶다면 떨어져도 상관없어. 언제든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하하, 미안해. 그래도 미리 말해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진짜 심정지 올 뻔 했지만, 뭐…어때. 


링이 재밌었다면 그걸로 됐지.


언질을 아예 안 준 것도 아니고. 


내 동의도 받았으니까.


내가 쫄보인 게 문제인 거다. 



“잠은 다 달아났어. 술도 다 깼고. 해장할 필요 없겠는데.” 



구시렁거리며 링의 허리를 꼭 끌어안자, 링이 키득거리며 내 품에 몸을 바싹 붙였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포근한 향기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려던 찰나. 



“그럼, 이제 약속했던 대단한 광경을 보여 줄 차례겠네. 가자, 시엔징!”   



링의 지시에 따라, 시엔징이 천천히 하늘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저 아래에서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상촉의 도시에서 멀어지고. 


방금 전까지 우리가 추억을 쌓고 있었던 산봉우리를 넘어서. 


구름을 뛰어넘고, 바람을 거슬러 위로. 더 위로. 



“추울 거야. 여기, 내 외투 입어.” 


“아냐, 괜찮아.” 


“그대여, 그대는 내 몸을 너무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어. 어제도 말했지만, 나 쉐이의 파편이라니까?” 



슬슬 살을 에일 듯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살짝 몸을 돌린 링이 내게 자신의 외투를 걸쳐 주었다. 


그녀의 체온으로 덥혀진 옷이 벌벌 떨리는 내 몸에 와 닿자마자, 신기하게 떨림이 멎었다.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찰나.



“앗, 그대여. 저기 봐.” 


“...아.” 



그리고 나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기운차게 내뻗어진 링의 손끝. 


그 끝과 맞닿은 곳에, 태양이 있었다.


어두운 밤도 이제는 밝아 올 때라고 고하는 듯. 


하늘을 가득 메우던 별을 꺼트리고, 희게 반짝이던 달의 빛을 퇴색시키며. 


그저 압도적인 광휘로 이 세상을 깨워 가는 낮의 화신. 



“...아.” 



땅에서 지켜보는 일출도 나름의 맛이 있지.


하지만 구름도 산봉우리도 빌딩도, 그 무엇 하나 방해하지 않는 이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태양의 모습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동이 있었다. 


새벽을 지우고, 어둠을 몰아내며. 


내 마음 속에서 약간의 희망을 싹틔울 정도로. 


그리고, 간신히 고개를 쳐든 그 희망에 물을 주듯. 


붉게 타오르는 해를 등지고, 그녀가 나를 향해 웃었다. 



“어때, 그대여? 공포를 감수할 가치가 있었지?”   


“...링.” 


“어머,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표정이 미묘하네.” 



그렇게 물어도 난 몰라.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난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이해했어. 


지금까지 맺어 온 수많은 인연들 중, 이런 풍경을 내게 보여 줄 수 있는 건 링 너뿐이라는 거. 


그리고 이런 광경을 공유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도 너뿐이라는 거. 


 

“아냐, 링. 정말…너무 예뻐.” 


“...무리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억지를 부린 거니까.” 


“무리하는 게 아니야. 진심이야.” 



그리고 이젠 정말로 내겐 너뿐이라는 거. 



“그렇다면…어딘가 다른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는 걸까?” 


“...응. 그냥, 또 너랑 같이 이렇게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아하, 그런 거였구나. 


중얼거리며, 너는 싱긋 웃었다. 



“그럼, 또 오자.” 


“...응.”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고, 마음껏 노래하고 춤추고,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고 다시 하늘 위로 올라와, 함께 일출을 바라보자.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네.” 


“내게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건 그대야.” 



그런 너의 미소가, 감히 바라보기조차 힘들 만큼 눈부셔. 


분명 네 등 뒤에 있는 태양 때문만은 아니겠지. 



“...나는 욕심쟁이야.” 


“아니, 틀려. 우리 둘 다 욕심쟁이인 거야, 그대여.” 


“...그러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둘 모두 사람인걸. 원죄를 안고 태어나, 오욕칠정을 불사르며 살아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인정하자. 응?” 


“......” 


“그리고 마음껏 욕심을 부리자. 현재의 서로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탐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손 안에 넣을 때까지 달려나가자. 그대가 곁에 있다면…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으니까.” 



나는 각본가였고. 


그녀는 관람석에 앉은 관객이었다. 


원래라면 무대의 주연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는 운명. 


그저 이 극이 끝나면 서로의 존재를 잊은 채, 각자의 섭리로 돌아가야 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무대 위에 올라와 버렸고. 


배역을 벗어나는 우를 범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종막 뿐이겠지. 



“...응. 그러네. 네 말이 맞아, 링.” 



딱히 상관없다. 


대사도 숙지하지 못했고, 우리를 지켜보는 청중들의 시선에 손발이 떨려 오더라도. 


무대를 밟은 이상, 커튼이 내려올 때까지 춤출 뿐이야. 


최선을 다해서,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여행 끝날 때까지 생각해 보기로 했었는데. 하루 만에 결론이 날 줄이야.” 



내 말에, 그녀가 활짝 미소짓더니. 


내 품 안에 몸을 꼭 붙이고는, 고개를 젖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노래하듯. 


또, 시를 읊듯. 



“말했잖아. 우리는 욕심쟁이라니까. 이 여행이 끝나기를 기다릴 참을성조차 없는.”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두 팔로 링을 한껏 끌어안고. 


그녀와 함께, 기지개를 켜는 태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까지고. 



—---



몇 시간 뒤. 



“왕씨 아저씨, 손님 두 명!”


“예이, 어서옵쇼…어, 링 아가씨?” 



땅으로 내려온 우리는 곧바로 링이 말했던 선술집을 찾아갔다. 


허름하다 못해 군데군데 이끼가 낀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자, 희끗희끗한 수염의 엘라피아 사장님이 이쪽을 보고 반색을 했다. 



“그간 격조했수다. 여전히 아름다우시오.” 


“히히, 별 말씀을. 아저씨야말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요새 아내분이랑은 좀 어때?” 


“...말도 마시오. 이깟 선술집 팔아 버리고 요양원 들어가자고 난리도 아니외다.” 


“저런, 안 되지. 아저씨만큼 손 매운 요리사가 상촉에 얼마나 된다고. 이거, 아내분 갖다 드려. 예전에 옥문에서 받은 금 귀걸이인데, 아마 뇌물 정도는 될 거야.” 


“...이런 귀한 건, 못 받소. 너무 과하우.” 


“넣어둬, 넣어둬. 오늘 식사 값이랑, 다음 삼 개월치 외상값이니까.”  



사장님과 정답게 안부 인사를 나누는 링과 함께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취객들은 전부 귀가할 시간이라 그런가. 


카운터석밖에 없는 선술집 내부는 한산했다. 



“그래, 오늘은 뭘로?” 


“어탕 두 그릇 줘. 만두 많이 넣어서. 아, 그대여. 고수 좋아해?”


“없어서 못 먹지.” 


“응, 그럼 고수도 팍팍 올려줘.” 


“주문 받았수다.” 



링이 주문한 지 오 분이나 되었을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어탕 두 그릇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 


맑은 국물 위에, 생선을 넣어 빚은 만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와.”



없던 식욕도 샘솟게 하는 광경에, 내가 감탄사를 내뱉자 사장님이 픽 웃었다. 



“좋은 반응이구려, 형씨.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옛날 음식 싫어하던데.” 


“...전 정말 좋아해요. 오히려 이런 맛있는 음식을 옛것이라고 덮어놓고 싫어하는 쪽을 혐오하죠.” 


“허허, 말 참 예쁘게 하는구먼. 그러니 링 아가씨랑 같이 다니는 건가?” 



너털웃음을 지은 사장님이 문득 얼굴에 의문을 띄었다. 



“그러고 보니 별일이로구먼. 링 아가씨가 누군가를 데리고 여기 오다니. 그것도 남자를. 혹시 실례지만…형씨, 링 아가씨 애인이오?” 



내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하려던 찰나.



“아니? 남편인데?” 



링이 짓궃은 웃음과 함께 끼어들었고. 



“켁, 링, 잠깐만.” 


“오? 링 아가씨, 못 본 새 결혼하셨었소? 축하드리오. 그래도 조금은 섭섭하구려, 청첩장 한 장은 보내 주지 그러셨소.” 


“아, 식은 아직 안 올렸어. 그래도 시간문제니까 상관없는 거 아닐까?” 


“...음. 사실혼 관계라는 거요? 난 늙어서 잘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게들 많이 한다고 들었소. 아무튼 정말 잘 됐구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나는 그제야 음식을 입에 댈 수 있었다. 


외관은 허름했지만, 확실히 이곳은 링이 추천할 만한 맛집이었다. 



“후아, 맛있다. 따뜻하고. 만두도 탱글탱글해.” 


“그치? 내가 뭐랬어?” 


“응. 믿고 있었어. 그나저나, 다 먹고 어디 갈까?” 


“음…글쎄. 쉐이의 유골이 있는 강제성도 좋고. 하루쯤 더 할애해서 상촉을 더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그런 거라면 수주봉 쪽으로 한 번 가 보시는 건 어떠시오? 그 쪽에 온천이 개업했다고 들었는데.” 


“...좋은데?” 


“혼욕이에요?” 


“...형씨, 젊은 사람답게 혈기왕성하구려. 아주 보기 좋소.” 


“...혼욕, 좋네. 응, 좋아. 헤헤, 으헤헤헤.” 


“링 아가씨는 나잇값 좀 하시오.” 



그렇게 사장님까지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던 그때. 


쿠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뒤이어 누군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헉, 헉, 박사, 님, 링, 씨, 여기, 계셨군요, 두 분을, 찾느라고, 제가, 얼마나….”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깔딱대며, 비틀비틀 이쪽으로 걸어오는 청년. 


전혀 뜻밖의 인물을, 나는 토끼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좌락? 왜 또 왔어?” 



그건 온 몸이 땀범벅이 된 좌락.


분명히 어제 할 이야기는 다 매조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뭘 위해서 돌아온 거지.


우리가 여깄는 건 어떻게 안 거고. 



“그, 저, 우선, 어제는, 죄송했, 습니다, 제가, 크나큰, 무례를….”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일단 물부터 한 잔 마시고 말할래?”   



의문은 많았지만, 죽기 직전인 사람처럼 헐떡대는 좌락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물컵에 물을 따라 건네자, 곧바로 원샷을 때린 좌락은 이내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사세대 지촉인이자, 삼공 좌선료의 아들 좌락. 이 자리를 빌어, 어제 있었던 무례에 대해 사죄드리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염국을 지켜 주신 영웅 링 씨와, 염국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 주신 박사님께…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그건 됐다니까. 설마 사과하려고 돌아온 거야?”



그런 거면, 이 녀석은 진짜 바보다. 


어제 분명히 깔끔하게 끝냈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고, 이 녀석은 우리한테 술을 조공했고.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다시 뛰어와서 또 사과를 하는 건 뭐야. 


하지만 뜻밖에도, 좌락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려고 온 거긴 하지만,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뭔데?”


“두 분께 전해드려야 할 편지가 있어서요.” 


“...편지? 우리한테?” 



좌락이 품 속에서 꺼낸 땀에 젖은 편지를 천천히 펼치자, 단정한 필기체로 쓰여진 글자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언니, 지금 염국이라고 들었어. 시간 있으면 한 번 놀러와.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어.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당신도 함께 와 주면 정말 고맙겠어. 숙식은 이쪽에서 책임질게. 슈.’ 



잉, 이게 뭐지. 


초대장인가. 



“뭔데? 나도 볼래.”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링이 얼굴을 내밀어 편지 내용을 대강 흝어보았다.


그리고. 



“...링, 왜 그래?”



딸그락,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젓가락이 바닥을 굴렀다. 



“...괜찮아? 어디 아파?” 


“......” 


단언컨대, 나는 그때만큼 경직된 그녀의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이베리아 근해에서 해사를 마주쳤을 때도, 동요 하나 없이 위풍당당하게 맞서 싸우던 그녀니까. 


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녀의 보기 드문 감정 표현에, 더럭 겁이 난 내가 링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려던 찰나. 


아직도 숨을 고르던 좌락이 입을 열었다. 



“박사님, 링 씨. 슈 씨가 두 분을 대황성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자 하십니다. 강제는 아닙니다만, 슈 씨는 진심으로 두 분을 만나고 싶어하시니…아무쪼록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링이 거품을 물었다. 


봄이었다. 



쉐이 합체까지, D-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