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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여기서 좌회전하고..."

단말기를 한 번 보고, 거리의 풍경을 대조하며, 몇 걸음 걷는 것을 반복했다. 스와이어가 보낸 지도에 의지하며 지리를 전혀 모르는 장소를 걸으니, 묘한 두근거림과 불안감이 가슴속에 공존했다. 원래라면 저녁 시간에 호텔에서 만났을 터인데 갑자기 장소를 바꾸다니.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여기...인가?"

이윽고, 내 시야에 스와이어가 알려준 장소가 보였다. 정확히는, 그 장소의 지명이 적힌 붉은색 간판이, 투박한 조명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ㅡ'순백의 화산'.

간판에 적혀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패엔 '영업 종료'가 걸려 있었지만, 스와이어의 말로는 그냥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 

문을 열자 차임의 종소리와 함께 선풍기 바람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곧이어, 낯익은 남성의 목소리가 카운터에서 들려왔다.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건데, 오늘따라 가는 곳마다 지인이 있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업 종... 엇. 박사님!"

나보다 살짝 키가 큰, 마르면서도 건장한 체격을 가진 녹발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역시 로도스의 일원이다. 비교적 최근 로도스에 입사한 가드 오퍼레이터, 브라이오피타. 본명 에니스 베서. 로도스 내에서도 각종 아르바이트를 도맡으며 관련 일처리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청년이다. 

"안녕. 여기서도 아르바이트야?"
"아, 여기가 제 집이거든요. 시에스타에 도착한 김에 가족도 만날 겸 집안일도 돕는 중이에요."

그러고 보니, 고향이 시에스타라 했었지. 종종 사무실의 전구를 교환하러 오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보니,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스와이어가 부른 장소가 그의 본가라니.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은 처음이다.

"고생 많네.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된다?"
"하하. 걱정 마세요. 실론 선생님께도 들러서 진찰도 받았는걸요."

브라이오피타 역시 감염자다. 증상도 꽤 심한 편에 속해 로도스에 있을 때 코피를 흘리는 것도 부지기수일 정도였다. 다행히 점차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광석병인만큼 주의해야 할 건 필수다.

"친구라도 왔니, 에니스?"

카운터 너머로 있는, 주방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한 중년의 여성이 나왔다. 한 가닥으로 묶은 주황빛 머리. 이 식당의 이름이 써진 에이프런. 세월이 느껴지는 주름이 진하게 새겨졌지만, 그 주름 너머의 눈빛은 여전히 20대의 열정과 혈기로 가득한 것만 같았다. 나이와 저 특유의 기백을 보아하니, 아마 이 가게의 점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브라이오피타의...

"아, 엄마. 내가 신세 지고 있는 제약 회사의 임원 분이셔."
"아, 처음 뵙겠습니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라고 합니다. 휴가를 나온 거라서 명함은 따로 준비하지 못했네요."
"에니스가 신세 지고 있는 사람이구나. 헤일리라고 해요. 편지로 몇 번 들었어요. 아들이 폐를 끼치진 않나요?"
"아니요. 오히려 제가 아드님을 귀찮게 하는걸요. 언제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하. 재밌는 분이시네. 아무튼 잘 왔어요. 편히 있다 가요. 아. 에니스. 리브와 루트에게 슬슬 돌어와 달라고 말해줘. 저녁 슬슬 먹어야지."
"알았어. 음료수만 준비해 드리고 나갔다 올게."

헤일리 여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분을 뒤로 하고, 브라이오피타는 다시 시선을 내게 맞췄다.

"맞다. 박사님. 일행분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쭉 안쪽까지 들어가시면 됩니다."

리베리 청년의 한 손은 자연스레 가게의 내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갑자기 장소를 바꿔 나를 이곳으로 초청한 필라인 여성과 그녀의 악우인 용족 여성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까이 가니 첸이 안쪽으로 자리를 비켜주었고, 난 곧바로 그 빈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잘 도착했네. 새로 바뀐 시에스타의 풍경은 어때?"
"뭐... 이것저것 많이 바뀌었네요. 그래서 여기로 부른 이유는요?"
"모처럼 온 김에 맛집 하나 소개해 주려 했지. 여기 칵테일이랑 음식이 맛있거든."

곧바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근원지는 매우 기분이 불편한 듯 팔짱을 끼고 있었던 용족 여성이었다. 마치 내 생각을 대변하듯, 첸은 스와이어에게 내가 말하려 했던 걸 전했다.

"이제 슬슬 용건을 말하시지. 스 아가씨. 우릴 부른 게 단순한 식사 초대는 아닐 텐데?"

비록 나와 그녀의 관계가 끊어졌다 해도, 로도스엔 여전히 스와이어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오퍼레이터들은 많다. 조수로서 일했던 스노우상트라거나, 어느 순간 친구로서 지내고 있는 에이야퍄들라, 그 외에도 기타 등등. 붙임성 좋은 게 그녀의 장점이다. 그런 그녀의 부탁이면 기꺼이 들어줄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하필 나와 첸 두 사람이다. 특히 우리 셋은 리유니온 침공 당시 현장에서 같이 싸운 사이이고, 그와 동시에 정치적인 입장으로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현 용문 국장. 전 용문 국장의 조카이자 전 용문 총경. 그리고 그 둘과 협력 관계였고 우호 관계인 제약 회사의 임원. 

이 셋으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조금 전까지 싱긋 웃고 있던 표정은 사라진 채, 스와이어는 진지한 얼굴로 나와 첸을 응시해 왔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용문 경찰로서의' 베아트릭스 스와이어의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말이야. 두 사람에게 부탁할 게 있거든."

핸드백에서 단말기를 꺼내 검지를 몇 번 움직이더니, 스와이어는 우리 둘에게 단말기를 들이밀었다. 그 화면 너머에는, 테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동물의 사진이 있었다.

"이건... 버든비스트?"
"맞아. 그것도 꽤 특이한 종류의 버든비스트지."

스와이어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슬라이드 하자, 이번엔 흰색 가루가 담긴 투명한 봉지의 사진이 보였다.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이 두 사진을 연달아 보는 것만으로,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대략 알 거 같았다.

"...설마, 마약성 물질을 분비하는 버든비스트?"
"역시 박사야. 바로 알아차리네."

단말기를 회수하여 다시 핸드백에 집어넣고, 스와이어는 자신이 쓰고 있는 모자를 고쳐 썼다. 실내인데도 저 챙이 넓은 모자를 벗지 않아, 그녀의 눈가가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이 버든비스트는 염국에서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종이야. 환각 및 마취 성분이 있는 체액을 체내에서 분비하지." 
"..."
"그리고 이걸 악용해서, 이 버든비스트의 마약성 물질을 추출해 밀수출하는 범죄자가 용문에 있었어. 마약 밀매업 쪽 중에서도 나름 네임드였고."
"흠. '있었다'라는 건, 이미 용문에서 도주했다는 거군."
"부끄럽지만, 말 그대로야. 그래서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추적했지."
"...그리고, 굳이 여기서 이걸 이야기하신다는 건, 그 범죄자가 시에스타에 있다는 거군요."

대답 대신에, 스와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첸은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미간을 짚었다. 옆에서 브라이오피타가 음료수 세 잔을 조용히 건네주고 갔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 했는지 두 사람은 테이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와이어 국장. 설마, 그 범죄자를 체포해서 용문에 이송하려는 건가?"
"맞아. 그 범죄자가 용문에서 벌인 짓이 상당히 어마어마하거든."
"시에스타가 지금 컬럼비아의 속령에 속하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컬럼비아는 예로부터 속지주의였어. 범죄자를 마음대로 용문으로 끌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속지주의. 쉽게 말해서 내국인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해당 국가의 규정을 따라야 하는 관할권의 입장이다. 비록 용문 출신의 범죄자라 하더라도,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컬럼비아 속령인 시에스타. 용문 경찰인 스와이어가 국외인 이곳에서 경찰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시에스타와 컬럼비아 측에선 부정적인 반응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두 사람들을 부른 거 아니겠어?"

스와이어의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겠다는 듯, 첸은 혀를 차며 *용문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용문 경찰인 스와이어가 '직접' 잡으면 국제적인 이슈가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제 3의 중립 세력이 해당 범죄자를 잡고, '우연히 그가 용문 출신의 범죄자임을 알아차려서' 그대로 용문에 넘기게 된다면, 해당 사건에 관련된 책임 소재가 두루뭉술해져서 다른 국가 측에서 크게 뭐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대로 못 움직이는 스와이어를 대신할 '인형'이 되라는 것이었다. 중립 세력인 로도스 아일랜드 출신인 나뿐만이 아니라, 이미 용문을 떠난지 3년이 되어서 관련 자격증이 정지되고 소속 역시 바뀐 첸까지.

"같지도 않군."

뒤늦게 브라이오피타가 건네온 음료수의 존재를 깨닫고, 첸은 있는 힘껏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의도적이라는 게 느껴지도록 쾅 소리가 나게 잔을 바닥에 놓았다.

"용병을 고용하면 될 것을 굳이 제약 회사의 사람을 따로 불러서 이런 걸 시키다니. 취향 한 번 참 고약하다 생각하지 않아?"
"믿을만한 사람이 너희들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제 3의 중립 세력 소속에, 기습 및 체포에 능통한 소수 정예가 필요한 거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꽤 날이 선 말투. 물론 첸이 원래부터 다소 차가운 어조와 태도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사나운 건 용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럴 거면, 왜 박사를 부른 거지?"

2초 정도의 차가운 적막이 우리를 감쌌다. 첸이 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스와이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모자의 챙을 눌러쓰며 고개를 잠시 숙였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솔직히 말하자면, 첸의 의사에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난 어디까지나 전장 지휘가 역할이지, 전투에 관련된 건 문외한이다. 메딕 오퍼레이터한테도 팔씨름으로 지는 나인데 싸움이 되기나 하겠는가? 하물며 이 일도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스와이어나 첸 정도의 인재면 무난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를 부른 것일까? 그런 의문점이 머릿속에서 싹피기 시작할 때, 스와이어는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박사의 지혜가, 필요해서야."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전달하는, 두루뭉술한 답변. 그걸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ㅡ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에요?

그렇게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간신히 잠재웠던 심장 속의 열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는 이물감. 타오를 것 같은 통증. 축축해지는 것 같은 전신. 다시금 상기되는 기억과 악몽. 일련의 감각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시야를 스쳤다.

"...일단 알았다."

감정의 점화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 찬물을 끼얹듯이 첸은 옆에서 내 답변을 대신했다. 마치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이, 잠시 곁눈질한 첸의 붉은 눈동자엔 그런 날카로운 질타가 담겨 있었다. 그로 인해 다시금 기분이 팍 식으면서, 무안해진 걸 감추기 위해 급히 음료수를 들이켰다.

"그 범죄자의 몽타주와 정보는 가지고 있겠지?"
"...물론. 지금 메일로 각자에게 보낼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추려는 것처럼, 스와이어의 어조가 다시 평상시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아직 목소리가 미묘하게 끝이 떨리고 있다는 걸, 지금 본인은 알고 있을까.

불편하고 어색한 미팅은 한동안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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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람 명붕이... 무사히 하선하고 휴가 나왔다. 사실 몸상태가 안 좋아서 내린 거긴 함 ㅎㅎ... 얼추 1달 정도 쉴 거 같으니, 그동안 완결까지 쭉 달려볼게.


슬슬 시리어스가 극에 달할 스와이어편 후일담. 스와이어가 독타를 어째서 떠난건지, 그리고 어째서 다시 돌아왔는지. 최대한 애정을 꾹꾹 눌러담아 써와보겠음. 스와이어를 좋아하는, 그리고 스와이어를 한때 좋아했던 명붕이들도 많이 기대해주면 고맙겠음.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