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모음은 요기: https://arca.live/b/arknights/103156508?target=all&keyword=%EC%86%8C%EC%84%A4+%EB%AA%A8%EC%9D%8C&p=1


1. 역대급으로 힘들게 준비한 상어 소설이야. 


2. 힘들었던 이유 1. 내가 언펙터 없찐임. 2. 언펙터의 키워드 중 하나인 '광기'가 잘못 다루다간 작품 병신되기 딱 좋은 소재라서. 3. 근데 좋아하는 캐릭터라 열심히 쓰고 싶어서 이것저것 뜯어보느라 오래걸림.  


3. 작품 준비 과정 세 콘 요약 


내가 이해한 언펙터: 




다른 명챈문학의 언펙터: 




결론: 




4.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써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불쌍한 글쟁이에게 많관부. 



------



어느 주말 아침. 



“움직이지 마세요, 사리아 씨. 귀가 떨어질지도 몰라요.” 



서걱, 서걱. 


날카로운 칼날이 토하는 서늘한 소리에, 사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윽.” 


“걱정 마세요, 별 일 없을 테니까요. 아아…그 눈빛, 정말 환상적인데요? 좀 더, 좀 더 보여주세요!” 



자신의 동요를 눈치챈 걸까, 상대가 귀엽다는 듯 활짝 웃고. 


사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굴욕적이다. 


원래라면 이런 상황 따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분하게도, 지금 앉아 있는 이 의자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힘차게 뻗은 뿔도, 강인한 눈빛도…아아, 사리아 씨…과연 박사님의 마음을 빼앗을 만하시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게 전부였으면 그나마 낫지. 


손가락 하나, 꼬리 한 마디 까딱할 수도 없다. 


더 최악인 건, 숫제 환희까지 느껴지는 핏빛 시선이 그런 사리아를 핥듯이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다못해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이라도 피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살짝만 웃어보시겠어요? 박사님이 곁에 있다 생각하시고요.” 



지금의 사리아가 할 수 있는 건, 히죽히죽 웃는 저 여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 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는 속으로 절규했다. 


박사. 


살려다오. 


내가 멍청한 짓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사진이나 한 장 찍고 말걸.


뭔 추억을 남기겠다고 이런 황당한 부탁을….



“좋아요, 아주 좋아요! 이 부분만 조금 더 다듬으면…됐어요!” 



혼이 빠진 사리아가 넋두리를 늘어놓던 그때. 


눈 앞의 상대가 활짝 미소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완벽해요! 사리아 씨,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조각이었다. 


날카롭게 뻗은 두 쌍의 뿔과, 연애를 시작한 이후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묵직하고 냉정한 눈빛까지. 


그야말로 사리아를 빼다 박은 머리 조각이었다. 


사실 3D 프린터로 뽑아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완성도에, 사리아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건, 대단하군. 눈썰미도, 손재주도 흠잡을 데가 없어. 걸작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야. 훌륭하다, 로렌티나.” 


“아하하, 뭘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에기르의 조각가 견습생이라면 누구든 이 정도는 하니까요.” 



그 감탄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며 손사래를 치는 여성, 로렌티나. 


에기르 어비셜 헌터 2대대 소속의 시테러 사냥꾼. 


로도스 최고참 가드이자 최흉의 광인, 스펙터. 


혹은, 박사와 붙여 놓으면 항상 로도스를 개판으로 만드는 문제아. 


그런 이명과는 달리 소탈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에, 사리아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자신의 얼굴을 조각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을 견디는 건 분명 고역이었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저도 마침 손이 근질근질했었는데, 잘 됐죠 뭐. 이런 상황을 육지 사람들은 윈-윈이라고 하던가요?” 


“그래. 아무튼, 정말 고맙다. 나중에 밥이라도 한 끼 사지.”    

 

“으음,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시간만 조금 더 주신다면 훨씬 근사한 걸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요. 레진을 이용한 방부 처리나, 도색 같은 건 관심 없으세요?” 


“괜찮다. 내가 로도스를 떠나기 전에 그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건 다음에 부탁하마.” 



뭐, 그래도 이런 급한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네요. 외근 간다고 하셨나요?” 


“그래. 앞으로 일주일 동안, 라테라노에. 다른 오퍼레이터 몇몇과 함께 말이야.”  



일주일 전, 라테라노 교황청에서 로도스 아일랜드에 인력 파견을 요청했다. 


‘디저트 기계의 폭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 안정화’라는, 뭔 웃기지도 않는 명목으로. 


하지만 힘이 깡패라고, 기껏해야 기업에 불과한 로도스 아일랜드가 라테라노의 공식적인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박사는 고심 끝에,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에 ‘보안 파견’이라는 허울 좋은 딱지를 붙이고…. 


사리아를 주축으로 한 로도스 아일랜드의 고참 오퍼레이터들을 다수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변수가 있어도, 사리아라면 능히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로렌티나가 안쓰럽다는 듯 웃었다. 



“힘드시겠네요. 박사님도, 사리아 씨도.” 


“그래서 너한테 내 조각을 부탁한 거다. 내가 곁에 없어도, 그걸 보면서 박사가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덜 수 있게.” 



문제는 그 ‘고참 오퍼레이터’들의 면면이 죄다 박사와 친한 사람들이었던 탓에, 박사는 졸지에 친구를 빼앗긴 처지가 되었다는 것. 


현 로도스 본함의 위치와 라테라노의 거리 차이는 상당하기에, 전화를 하거나 메신저를 주고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파견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한 시간 뒤부터 일주일 동안 박사는 혼밥충이 된다. 


그런 박사를 위해 고심하던 사리아는, 결국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어 박사에게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 그런 거였군요. 그럼 사리아 씨께도 박사님의 얼굴 조각을 하나 드리는 편이 좋을까요? 예전에 만들어 둔 게 몇 개 있는데요.”


“음, 고맙지만 사양하지. 난 견딜 만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박사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강한 분이시잖아요.” 


“아니. 그 녀석은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어서, 이런 일이 있으면 남몰래 힘들어한단 말이다.”  


“...흐응, 박사님께…여린 구석이라고요.” 



그 말에, 로렌티나의 얼굴에 잠시 묘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전혀 뜻밖의 말을 들어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기뻐 보이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굳이 비유하자면….


좋아하는 사람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에 살풋 웃는 소녀 같다고 해야 할까. 



“사리아 씨, 있잖아요. 혹시 안 계신 동안 제가 박사님께….” 


“음?”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돌아와 손을 흔드는 로렌티나였지만…. 



“아니에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박사님께 안부 전해 주시고요.” 


“로렌티나.” 



사리아가 누군가. 


괴팍하기로는 전 테라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박사의 곁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눈치를 단련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로도스의 안주인이다. 


짧은 순간이었다고는 하나, 로렌티나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사리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너, 혹시 박사를 좋아하나?” 


“...네?” 


“네가 들은 게 맞다.” 



예전부터 미약하게나마 느끼고는 있었다. 


박사와 이야기할 때면 묘하게 텐션이 올라가는 부분이라던가. 


기분이 안 좋다며 다른 이들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을 때도 박사가 직접 부탁하면 기꺼이 전장으로 나선다던가. 


비록 친하지는 않지만, 로렌티나와도 나름 로도스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표정으로. 


사리아는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은 것이었다.   


뜬금없기 그지없는 추궁에, 로렌티나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에요.” 

“거짓말 해 봐야 소용 없다. 그를 연모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내가 한두 번 보는 줄 아나. 여성, 어린아이, 심지어 남자도 있었지.” 


“......”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박사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기묘한 얼굴을 한다는 거. 표정이 말이다, 헤실헤실 풀어진다고.” 


“...아하하.” 


“방금 로렌티나 너처럼.” 



하지만 사리아는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든 싹 무시하고, 묵직하게 그녀를 추궁할 뿐이었다. 


어떻게 둘러대도 물러설 것 같지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로렌티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싸우면 못 이길 것도 없겠지만….


굳이 싸워야 할까. 


박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상대로. 


반쯤 자포자기한 로렌티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내실 건가요?” 


“음, 아니. 마음을 품는 건 죄가 아니니까.” 


 

그런데 사리아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러면요?” 



흠칫한 로렌티나의 반문에, 시계를 흘낏 본 사리아가 의자를 끌어 와 털썩 앉았다. 



“아직 출발까지 세 시간 정도 남았으니, 먼저 이야기를 듣지. 왜 박사에게 반했는지, 그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등등.”  


“...들려드린 다음에는요.” 

“내 나름대로 판단을 해 보겠다. 너를 박사의 곁에 둘지, 아니면 격리할 건지.” 



고압적이기 그지없는 선언에, 로렌티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잖아요, 사리아 씨. 


박사님과 저 사이의 문제 아닌가요. 


아무리 사리아 씨라도 그건 너무 심해요. 


애초에 로도스에 온 것도 제가 먼저였는데. 


억울함이 짜증으로, 짜증이 분노로 바뀌고. 


느닷없이 치밀기 시작한 감정의 격류에, 그간 잠잠했던 광증이 살짝 고개를 내밀며.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사리아 씨가 판단하기에 제가 박사님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으면…저를 다른 데로 보내실 건가요? 니어 씨처럼?” 



미쳐 날뛰려는 심리 상태를 겨우 조절하며 내뱉은 로렌티나의 한 마디에, 사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화낼 필요 없다, 로렌티나. 난 어디까지나 판단을 내릴 뿐, 결국 최종적인 결정은 박사의 몫이니까.”  


“네?” 


“마가렛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분명 그녀를 박사의 곁에서 격리하려 했었다. 하지만 박사는 그녀를 용서했지. 그녀가 카시미어로 파견을 간 건, 어디까지나 마가렛 자신의 선택이었어.” 


“......” 


“내 말이 터무니없이 오만하게 들린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나. 지금까지 로도스의 몇몇 여성 오퍼레이터들에 의해 박사가 어떤 꼴을 당해 왔는지.” 


“...그건, 그렇지만요.” 


“나는 그저 그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그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 미안하지만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 로렌티나.”   



이게 정실의 여유라는 건가. 


이전의 그녀 같았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먹을 날렸을 텐데. 


차분한 미소와 함께 차근차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사리아의 모습이 어쩐지 초연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여유가 전염된 걸까. 


폭풍우 앞의 바다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던 로렌티나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로렌티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알겠어요. 제가 사리아 씨였어도 그랬겠네요.” 


“고맙다, 로렌티나.” 


“그래도 처음부터 그렇게 설명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미안하군. 나도 사람이라, 내 남자를 좋아한다는 여자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긴 힘들어서 말이다. 성급했다.” 



사리아의 덤덤한 인정에, 로렌티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솔직하고, 담담하며,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갖추었다. 


박사님, 당신은 이래서 사리아 씨에게 반한 건가요. 


문득 떠오르는 그런 의문에 실없이 웃으며, 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해해요.” 

“자, 그럼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저와 박사님의 항해기를 전부 늘어놓자면 오늘 하루를 꼬박 써도 부족할 텐데요?” 


“흠, 요약해서 부탁하마.”  


“노력은 해 볼게요. 그럼, 사리아 씨. ‘광기’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나요?” 



—---



그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을 거예요. 


박사님께서 막 깨어나시고, 로도스가 리유니온의 위협 앞에 허덕이던 시절이었죠. 


네, 그래요. 


사리아 씨가 로도스에 입사하기 전. 


그리고…제가 아직 ‘스펙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였어요. 



‘스펙터…그 ‘망령’들은 모두 절 이렇게 불러요. 그 의사가 말하길, 로도스에 힘을 빌려주면 치료를 도와주겠다고 하는데….할게요. 당신을 위해 제 힘을 쓰겠습니다.’ 



제가 처음 로도스에 찾아왔을 때, 박사님은 말 그대로 말라죽어가던 중이셨어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과중한 책임감 때문에요. 


그리고 저를 처음 본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망령? 의사? 씨발 뭔 개소리야?’ 


‘...헤에.’


‘아, 됐고. 니가 새로 온 가드냐? 치료 해 줄 거고, 월급이나 숙식, 사대보험도 다 챙겨줄 테니까 일만 좀 잘 해라. 우리 예비작전팀 애들 갈려나가는 꼴 더는 못 보겠다.’ 



사리아 씨도 처음 오셨을 때 박사님께 비슷한 취급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에헤헤, 네. 


저한테는 좀 더 심하게 말씀하신 감도 있네요. 


하지만 전 이해해요. 


그때의 박사님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몰려 계셨으니까요. 


 딱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지도 않고요. 


정확히 말하면….



‘우후후, 아하하…네, 당신의 지시대로.’ 


‘...?’ 



그 폭언을 어디에 담아 둬야 할지 그때의 저도 몰랐거든요. 


사리아 씨, 제가 왜 ‘광기’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냐고 여쭤본 줄 아세요? 


그게 저와 박사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라서 그래요.  



‘아아, 박사님…들리시나요? 저 바다의 목소리가…저를, 저희를 부르고 있어요….’ 


‘...헤. 그러고 보니까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파도 소리가 정말 듣기 좋네.’ 


‘그, 그 파도 소리가 당신에게도...! 그래요, 그 부분은 이어져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답니다. 자르고, 끊고, 짓부수어서, 그저 끊임없이, 끊임없이 흘러가게끔…! 아아, 박사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기뻐서 미칠 것 같네요.’ 


‘하나만 정정하고 대답해 줄게. 넌 미치도록 기쁜 게 아니라 이미 미쳤어. 그리고 대답은…몰라, 씨발. 나도 미친놈인갑지.’ 



누구보다 오래 광기에 잠식되에 있었던 제 소견을 말씀드리면…광기라는 건 깨진 거울이에요. 


아무리 가까이 피사체를 들이대도, 상이 선명하게 맺히지 않는.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더라도, 미쳐 있던 그때의 제 머리는 그 정보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면, 박사님이 언젠가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었죠. 



‘스펙터, 밥 먹었냐?’ 



먼저 제 청각이 그 질문을 받아들여요. 


그리고 뇌로 전달하죠.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분석하고 의미를 알아낸 뒤, 적절한 대답을 하겠죠. 


하지만 저는 달랐어요. 


그나마 제 이성이 온전할 때를 기준으로, 그 질문이 제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설명드릴게요. 


‘스펙터’라는 단어에서, 박사님이 저를 부르고 계신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밥 먹었냐’가 문제가 되는 거죠. 


밥이라는 건 뭐지? 


생명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한 영양분 섭취 행위일까? 


그도 아니면, 내가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인가? 


아니, 애초에 박사님께서는 지금 욕구의 해소 여부를 묻고 계시는 건가? 


이런 식으로 사고회로가 마구 꼬이고 뒤틀리는 게 몇십 차례 반복돼요. 


뭔가 결론이 나올 것 같으면, 머릿속에서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그렇게 저는 저 자신과의 끝없는 문답을 이어나가는 거죠. 


그러고 나면 원래 있던 질문은 완전히 없어지고, 전혀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네, 깨진 거울이 제멋대로 일그러진 상을 띄우는 것처럼요.  



‘...우후후, 박사님.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저는 지금 더없이 충만하니까요.’ 


‘...하아, 그래. 아직 안 먹었구나. 같이 먹으러 가자.’ 



사리아 씨라면 바로 눈치채셨을 거예요. 


대충 의미는 통할지 몰라도, 제대로 된 ‘대화’라고 보기에는 굉장한 어폐가 있죠. 


음, 환청이나 환각이요? 


뭐, 그것도 심각하긴 했지만…방금 말씀드린 것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었어요. 


그 장애 때문에, 그때의 저는 사물의 본질을 아예 파악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는데, 말 다했죠 뭐. 


모든 것이 흐릿한 안개 속이었고, 낮이든 밤이든 항상 미궁을 해메는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그런 광기가 저를 심하게 짓누르는 날이면, 발작하듯 무기를 손에 쥐고 감각에 잡히는 모든 것을 박살내기도 했답니다. 


당연히 박사님께도 여러 번 민폐를 끼쳤죠. 



‘...이젠 팀킬까지 하네.’ 


‘아아, 심해의 주인이시여. 이 전장의 영혼들을 마땅히 안식의 대지로 인도하소서….’ 


‘씨발, 됐다. 내가 병신이지. 스펙터, 너 입원 허가 났으니까 바로 집중치료실 들어가.’  


‘......’ 


‘지금까지 가드 오퍼레이터로서 충분히 잘 해줬으니까, 이제 가서 치료받으라고. 켈시한테 약물치료 받고, 좀 나아지면 나한테 상담받으러 와.’ 



하지만 박사님은 그런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네? 박사님은 상냥하시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구요? 


좀 달라요, 사리아 씨. 


정신병 환자를 돌보는 건 ‘상냥함’만으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니에요.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니, 육체적인 스트레스도 엄청나고. 


소통이 안 되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막대하죠. 


물질적 대가 같은 강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하루도 견뎌내기 힘든 일이랍니다.



‘스펙터, 오늘 기분은 좀 어떠냐?’ 


‘......’


‘너 또 약 안 먹었더라. 제발 날 봐서라도 좀 챙겨먹어주라.’ 


‘...여, 여긴 어디죠? 왜 절 묶어 둔 거예요? 제발, 이건 제가 아니에요!’ 


‘...씨발, 또 지랄하네.’ 



하지만 박사님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셨어요. 


몇 달 동안이나요. 


욕설을 끊임없이 쏟아내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제 상태를 살피고, 상담을 시도하고,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시면서 저를 이해하려 노력하셨어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요. 


합리성이 결여된 행위를 의식적으로 반복한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광기예요. 


네, 저는 감히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박사님도. 


그때는 미쳐 있었다고요. 


음, 목이 타네요. 


죄송한데, 혹시 차 한 잔만 타 와 주실 수 있나요?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 뒤로 얼마나 지났을 때였을까요. 



‘...야, 안 된다고! 켈시 선생님이 저 환자 처방전에 손대지 말라고 하셨잖아!’ 


‘내 알 바야? 나 졸업논문 쓰려면 임상실험 결과가 필요하다니까. 오리지늄이 척수까지 침투한 피험체라니, 이런 피험체는 진짜 귀하다고.’ 


‘씨발, 연구윤리 위반은 둘째치고 켈시 선생님이랑 박사님이 아시면….’


‘뭐, 어쩌라고. 어차피 여기 인턴도 곧 때려치울 건데. 극소량 투약해서 경과만 잠깐 볼 거야.’ 



웬 철없는 아이들이 제게 못된 장난을 쳤었죠. 


잠시 로도스에서 일하던 의료계 인턴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켈시 선생님과 박사님 이외에는 손댈 수 없었던 제 약에 뭔가 다른 약물을 섞어 넣었어요. 


효과는 직빵이었죠. 



‘...으,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 뭐야. 왜 저래. 이사벨, 너 분명 극소량만 투약한다고…!’ 


‘극소량만 투여했는데, 그랬는데…! 씨발, 일단 도망쳐!’ 



그 약물이 제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순간, 너무나도 평온한 기분이 들었어요. 


시야가 푸르게 암전하고. 


주변의 소리가 전부 고요하게 죽어가는 와중. 


작은 파도 소리가 들렸죠. 



‘우후후…아하하…아하하하하하하….’



두근, 두근. 


미약한 맥동 속에 섞인, 졸졸 흐르는 물결의 소리가. 


그 소리가 저한테 말을 걸고 있었어요.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 작은 감옥 안에서 나를 해방시켜 달라고. 


그래서 그렇게 했죠. 


손에 잡히는 걸 집어들고, 물결이 아우성치는 곳을 갈라찢었어요. 


닥치는 대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씨, 씨발! 이사벨!’ 


‘꺄아아아악! 팔, 내 팔이…!’ 


 

나중에 듣기로는, 그때가 로도스 최악의 유혈사태였대요. 


그럴 만 하죠. 


당시 로도스에는 저와 정면으로 맞서서 제압해 줄 어비셜 헌터즈 동료들도, 쉐이 분들이나…네, 사리아 씨도 안 계셨으니까요. 


천만다행으로 사망자는 없었지만, 부상자만 두 자리 수를 넘어갔었다네요. 


하다못해 켈시 선생님이 나서셨다면 피해가 덜했으려나요. 


하지만 그때 제 눈 앞에 나타난 건….



‘...니들, 저 애한테 뭔 짓 했냐?’


‘바, 박사님….’ 


‘뭐 했냐고. 똑같은 질문 세 번 하게 하지 마라.’ 



박사님이셨어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민. 


정말 신기하죠. 


그때까지 제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던 파도 소리가, 박사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조금 잠잠해지기 시작했거든요.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뭐.’ 


‘...죄, 죄송합니다! 저는 분명 말렸는데…이사벨 이 자식이 멋대로 CLB를…!’


‘CLB? 그거 향정신성약품이잖아. 분명히 켈시가 스펙터한테는 처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보고는 했냐?’ 


‘아, 아닙니다…그게 아니라….’


‘그럼 뭐. 로도스 의료부의 수장한테 말도 안 하고 금지된 약을 환자한테 처방했다, 그런 거냐? 인턴 찌끄레기 두 마리가?’ 


‘...죄송합니다.’


‘됐다, 그냥 사라져. 가서 켈시한테 단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경위 보고해. 발뺌하거나 튈 생각은 꿈에도 마라. 평생 컬럼비아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런 제 앞에서, 박사님은 제게 장난을 친 아이들을 쫓아내셨어요. 


평소에는 한 문장 내뱉을 때마다 욕을 세 개씩 섞어넣던 분이. 


진짜로 화가 나니까 욕을 아예 안 하시더라고요. 



‘...너는 누구니.’ 



그렇게 유혈이 낭자한 복도 한 가운데 홀로 주저앉으신 박사님은, 담배를 피워 물며 저를 바라보셨어요.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흘러가니.’ 


‘......’ 


‘뭐가 들리고, 뭐가 보이니.’ 



무모한 짓이었죠. 


제가 손 하나만 까딱해도 연약한 박사님의 육체는 형체도 안 남고 박살났을 테니까요. 


나중에 여쭤 보니까, 박사님도 두려우셨대요. 


한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초점이 안 맞는 눈빛으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미친년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고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그때 제 눈에 비친 박사님의 모습은, 자신의 목숨조차 달관한 현자 같았어요. 



‘난 아직도 아무것도 몰라, 상어야. 널 이해해보려고 나름대로는 정말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우후후, 오늘 밤은 폭풍우가 치겠어요.’ 


‘이미 치고 있어. 그물을 걷어야겠네.’


‘해류는 울며 방향을 바꾸고, 강인한 뱃사람들은 처절하게 노래하네.’


‘너는 우는 파도일까, 아니면 사공일까.’ 


‘파도가 있어야 할 곳은 바다뿐이에요. 박사님, 박사님. 안식을 바라지 않으시나요?’ 


‘안식이야말로 환상이지, 상어야.’ 



매캐한 담배 연기, 피와 오물의 냄새, 비명소리의 잔향. 


그리고 그 어떤 악취보다 더 강하게 제 귓가를 파고드는 박사님의 목소리. 


아, 사리아 씨. 


저와 박사님의 문답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렇죠, 난해하기 짝이 없죠. 


지금 돌아봐도 저희가 뭔 헛소리를 했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걸요.


하지만 어째서였을까요.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이는 박사님의 그 목소리가. 


이리저리 비틀리고 찢어진 제 사고 회로를 거치는 순간. 


광증에 빠진 이후 들은 그 어떤 말보다 명료하게 의미를 가졌어요. 


그야말로 한 줄기 빛을 본 느낌이었죠. 


   

‘기도를 올리고 싶어요. 만물의 주인께, 당신의 해방을 기원하면서요.’ 


‘해방은 기도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냐.’ 


‘당신을 자유롭게 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래, 이제야 좀 알겠네. 이어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거지.’ 



그 사실이 한없이 기뻐서 전율하는 저를 내버려둔 채. 


박사님은 제 뒤에 널브러져 아우성치는, 절단되어 피를 뿜는 이들을 힐끗 보고. 


눈앞의 저를 보시더니. 


이내 히죽 웃으시더라구요. 



‘드디어 네가 뭘 바라는지 이해했어.’ 



그리고 그 꿈 같은 문답에 빠져, 파도의 목소리를 잊은 제게 다가와. 


제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드시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그으셨어요. 



‘...윽, 씨발.’ 



살점이 떨어지고, 새하얀 뼈가 드러날 만큼 깊게요. 


촤악, 새빨간 피가 사방으로 튀고. 


끈적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제 얼굴에 점점이 묻어났어요. 


…화내지 말아 주세요, 사리아 씨. 


제가 박사님을 상처 입혔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미쳐 있었다는 말로 변명하고 싶지도 않아요.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이왕 시작한 이야기니, 끝까지 들어 주셨으면 해요. 



‘아아, 저를 이렇게 미치도록 기쁘게 해 주시다니…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요?’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몸 안에 갇힌 파도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그 파도를 자의로 ‘해방’하는 박사님의 모습을 본 순간. 


저는 환희했어요. 


마침내, 마침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겉잡을 수 없이 몸이 떨리고, 눈물이 차올랐죠. 


그저 한없이 유쾌하고, 한없이 기분이 고양돼서 금방이라도 폭소가 터져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어요. 


그런 저를 보며, 박사님은 힘없이 웃으셨어요. 


점점 새하얗게 빛이 바래는 손목을 꽉 움켜쥔 채로. 



‘...아직도 폭풍우가 치고 있니?’ 


‘......’ 


‘그럼 너는 누구야?’ 


‘......’ 


‘아니, 너는 누구였어?’ 



애석하게도,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어요. 


저를 이해해 주는 박사님의 목소리 그 자체에 홀려, 그 의미를 헤아리기조차 힘겨웠던 것도 있고. 


박사님에게서 풀려나, 붉게 울컥울컥 솟아오르며 자유를 찬미하는 파도에 매혹되었던 걸 수도 있겠지만….


저도 몰랐거든요. 


거울은 여전히 산산조각난 상태였으니까요. 



‘...스펙터, 상어, 심해의 사도. 그게 전부 너일 수도 있고, 네가 아닐 수도 있지.’


‘......’


‘그래도 있잖아, 상어야. 난 네가 누군지 알려고 정말 많이 노력해왔거든. 현재의 너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너도.’ 


‘...해류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하신가요?’ 


‘궁금해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 너에 대한 건, 너 자신이 가장 잘 알 테니까. 제 3자인 내가 알려고 해 봐야 한계가 있겠지.’


‘......’ 


‘그래도 이거 하난 알겠더라.’ 



분명 고통스러우셨겠죠. 


하지만 그때, 박사님은 밝게 웃고 계셨어요. 


그 고통조차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처럼요. 


그리고. 



‘여긴 네가 있기에는 너무 얕아, 로렌티나. 돌아가자, 깊은 바다로.’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뒤이어 내밀어진 박사님의 한 마디가, 제 안의 부서진 거울을 일깨웠어요. 

 

뭐, 당연히 그 한 마디로 드라마틱하게 제 정신이 돌아오거나 하지는 않았죠. 


그건 천 년간 잠들어 있던 공주님이 왕자님의 키스 한 번으로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이니까요. 


하지만, 박사님이 제 이름을 불러 주신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나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었던 거울의 한 조각. 


그 조각이 어디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답니다. 


그건 정말이지, 신선하기 그지없는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박사님은 제 동요를 놓치지 않으셨죠. 



‘지금이야, 아스카론!’


‘...그래.’   



박사님의 침착한 부름에.


순간, 섬뜩하리만치 나직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응답하고. 


내려다본 발 밑의 그림자가 폭발하듯 덩치를 불리며. 


차갑기 그지없는 손길이, 그대로 제 의식을 끊어냈어요.


저는 그렇게 형편없이 기절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