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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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심심해서 끼적여 본 단편소설. 


메인 스토리, 특히 6지랑 7지 스포일러 있으니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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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 후반 시점, 박사와 패트리어트가 제대로 대화를 해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한 소설임. 


난 리유니온 간부 중에 패트리어트가 제일 좋더라. 


미칠듯한 강함이나 노익장 간지도 있겠지만,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이 정말 마음에 들었음. 


누구보다 인자강이면서 속으로는 과거를 끊임없이 후회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어서 이입 많이 했고. 


서리별 죽을 때는 정말 마음 아픈 정도로 끝났는데, 패트리어트 죽을 때는 진짜 눈물 찔끔 흘렸어. 


이 소설은 그냥 과몰입한 명붕이가 노인장이 조금이나마 더 마음 편하게 가셨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리고 골골대는 노인을 다굴치는 무자비한 로도스에 대한 분노를 담아 쓴 글임.  


패트리어트랑 눈의 악마 소대가 전원 생존해서 로도스로 오는 if도 구상 중이야. 


아무튼 많관부. 


패트리어트까지는 게이 아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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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군.”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가. 

  

용문의 도로를 시뻘겋게 물들인 감염자의 피를, 전부 한데 모아 하수구로 쓸어 보낼 비가. 


 

“참으로, 얄궃다.” 



패트리어트는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피와 오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저 평등하게 적시고 닦아내, 이 땅에서 말끔하게 쓸어 버릴 뿐.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블라셴코, 엘빈, 막심. 너희는, 더, 가치 있는, 죽음을, 맞아야 했다.” 



이곳 용문에서 쓰러진 감염자들은. 


그의 휘하에서 싸우던 유격대원들은, 훌륭한 전사들이었다. 

 

동포들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전화에 몸을 던졌던. 


패트리어트의 오랜 군 생활 동안 본 그 어떤 용사들보다 더욱 빛나는 신념을 가진. 


리유니온의 동지였다. 


그들은 자신이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너희를, 기억하마.” 



하지만 세상은 그 자격을 부정했다. 


용문의 칼날은 그의 동지들을 무참히 도살했고. 


오랜 시간 감염자를 박대한 이 거리는, 그의 수하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죽어가도록 방치했으며. 


무정한 하늘은, 그들이 흘린 고귀한 피마저 치워 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념을 위해 스러져 간 감염자들의 핏값은. 


어느 누가 지불할 것이며. 


세상 어느 보물보다 막대한 가치를 지녔을 그 값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이제, 끝이겠지.” 



끼기긱. 


패트리어트의 거체가 천천히 솟아오르고. 


그의 갑옷 이음새가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냈다.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겠다.” 



승산은 없다. 


후방으로부터의 지원은 끊긴 지 오래되었으며. 


패트리어트의 노쇠한 몸은, 더 이상의 전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운명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그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불드록카스티, 그만둬라.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무의미, 하다고. 켈시, 경, 당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군.” 



충분하지 않으며. 


결코 무의미하지도 않다. 


자신의 투쟁을 부정하는 목소리에 힘겹게 답하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손으로 힘껏 창을 쥐고. 


몇 번이고 공격을 받아낸 탓에,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들어올린다. 


자신이 포기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간 감염자의 피를 누가 긍정하겠는가. 



“나는, 군인이며, 전사다, 전장에서, 태어나고, 전장에서, 죽을, 뿐.” 



그저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싸웠을 뿐인 그들의 투지를 누가 기억하겠으며. 


싸움이 없는 내일을 바랐던 그들의 소망을 어떤 이가 추모하겠는가. 



“다른 길은, 모른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 



저벅, 저벅. 


그가 묵직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아스팔트가 갈라지고. 


빗소리가 일그러지며. 


패트리어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적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내, 삶이, 곧, 운명에, 대한, 저항이며.” 



그 소리는 곧, 그가 잃은 것에 대한 후회이자. 



“내, 투쟁은 리유니온, 에게 , 바치는, 헌사이고.”



그가 사랑했으나 손에 넣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애끓는 통곡이었으며. 



“내, 최후는, 전사들을, 위한, 경의이다.” 



평생을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불드록카스티의 삶 그 자체였다. 


느리게,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을 꿰뚫기 위해 걸어오는 패트리어트를 보며. 


적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큿, 로즈몬티스!” 


“물러서, 켈시 선생님!” 



하얀 고양이가 급하게 아츠를 시동하고, 근처의 무너진 건물에서 커다란 콘크리트 조각이 떠오르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패트리어트를 향해 쇄도했다. 


사람 하나는 고사하고, 빅토리아의 증기 기사조차 짓뭉갤 정도로 흉악한 위력의 일격. 



“......” 


하지만 패트리어트는 버텼다. 


콰지직. 


파열음과 함께, 부스스 먼지가 일고. 


두 쪽이 난 콘크리트 조각 너머로, 상처 하나 없이 나타난 패트리어트가 진군을 재개한다. 


카챵! 


마천루 어딘가에서 저격이 날아왔지만, 방패를 들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젠장! 아예 안 먹혀!” 


“잠깐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벌어라!” 



아츠. 


무너진 건물의 파편.


각종 투척 무기와 냉병기의 세례들. 


하나하나가 필살의 위력을 담은 살수들이, 오직 패트리어트만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패트리어트는 버텼다. 



“......” 



물러서지 않고, 담담하게 앞을 향한다. 


그를 노리는 적을 전부 짓부수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전원, 퇴각하라!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 다음 대책을 강구한다!”


“하지만 켈시 선생님, 여기서 물러서면 체르노보그가…!” 

“큭,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그리고, 그의 손은 마침내 운명의 연약한 목줄기를 잡아채기 직전까지 갔다. 


그 짧은 순간, 패트리어트는 환희했다. 


감염자들의 피에 대한 응보를.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반격을. 


조금이나마, 내지를 수 있겠구나. 


하지만. 



“...비켜, 켈시.” 


“켈시 선생님, 피하세요! 여긴 저희가…!” 


언제나처럼, 그가 가장 바라던 것은 끝내 그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강해져, 억수처럼 대지를 때리기 시작한 빗줄기 속. 


두 사람이 패트리어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희, 는.” 



패트리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한 명은 로도스 아일랜드의 리더이자, 카우투스 캐스터. 


아미야라고 했었지.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만하자, 불드록카스티.” 



품에 무언가를 안아 든 채. 


우묵한 회색 눈동자를 빛내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전술지휘관. 


박사라는 이름이었던가. 


빗소리를 뚫고 고막에 와 닿는 그의 가냘픈 목소리에, 패트리어트는 코웃음을 쳤다. 



“우습, 군. 그만, 하자고?” 


“그래. 리유니온은 끝났어. 이제 남은 건 탈룰라와 당신뿐이야. 더 싸워 봤자, 고통만 길어진다고.” 


“하, 나약한, 놈.”  



켈시와 마찬가지로, 그를 회유하고자 함이겠지. 


고통을 담보로 그를 위협하면서. 


어리다. 


그리고 너무나도 멍청하다. 


언제부터, 우르수스의 유격대가 고통을 두려워했지? 

비웃음을 담아, 패트리어트가 창을 내지르고. 


콰앙! 


수류탄이 터지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대지가 진동했다. 



“음.” 



하지만 그의 창은 박사의 가냘픈 명줄을 꿰뚫지 못했다. 


그의 창과 박사 사이를. 


방패를 단단히 치켜든, 와이번 여자가 빈틈없이 틀어막았기 때문.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윽, 아프군. 팔이 다 저릿저릿해.” 


“...고마워, 사리아야. 덕분에 살았어.” 


“너를 지키는 건 내 책임이다. 감사는 필요 없어. 하지만…너희의 정예화 프로세스가 없었더라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르겠군.” 


“더 버틸 수 있어? 


“의료 지원만 있다면.” 


“응.”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눈 박사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패트리어트를 올려다본다. 



“내가 나약하다고?” 


“그래.” 


“왜 그렇게 생각했어, 불드록카스티?” 


“네놈들에겐, 내, 딸의 죽음이 묻어 있다. 이 땅에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운명도 있다.” 


“알아.” 


“하지만, 너희는, 이미 그녀의 운명을, 부순 주제에, 이제 와서, 나를 구하고 싶어하는군.” 



그 알량한 위선이 소름 끼치리만큼 역겹고. 


이미 손을 피로 더럽힌 주제에 더 이상의 죄책감을 짊어지길 두려워하는 그 나약함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그런 의미를 담은 패트리어트의 조소에도, 박사의 눈빛에는 그 어떤 동요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야. 우리는, 옐레나를 잃었어. 당신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그만 멈춰 줘.” 


“우리, 라고? 멈추, 라고?” 



패트리어트는 쉰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내가, 왜, 멈춰야, 하지?” 


“...이 싸움은 처음부터 잘못돼 있었으니까.” 


“헛, 소리!” 



박사의 말을 끊은 패트리어트가 다시금 거칠게 창을 찍어내리고. 


와이번 디펜더의 방패가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 삐걱인다. 



“내가, 왜, 멈춰야 하냐고, 물었다! 누가 감히, 내가 정한 전장의 의미를,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크윽, 박사!” 


“씨발, 켈시! 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의료 지원 해, 빨리!” 



뒤늦게 지원이 붙었지만, 로도스 아일랜드는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었다. 


가열차게 사리아를 두들기는 패트리어트의 창도. 


그 무슨 말로도 멈춰세울 수 없는 패트리어트의 전진도. 



“나는 정직한 사람이니까,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나? 운명에게 있어, 나는 약자니까, 참고 따라야 하나?” 


“아니야, 불드록카스티.” 


“아니면, 나는 강자니까,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고! 제발, 말 좀 들어!” 


“어디, 말, 해 봐라,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크으으윽!”
 


콰앙!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내질러진 패트리어트의 창이 마침내 사리아를 후려쳐 날려버리고. 


3미터에 육박하는 그의 거체가, 코 앞에서 박사를 내려다본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녹슨 쇳물의 냄새. 


피와, 비명, 공포의 냄새가 박사의 뇌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선과, 악은,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패로, 결정된다. 예외는 없다.” 


“......” 


“그러니, 리유니온은,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꺾이지 않았다면, 패배가 아니다. 너희에게도, 용문에게도, 운명에게도 패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승리할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을 치켜드는 패트리어트. 


그리고 여전히 품에 무언가를 안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박사. 


아미야가 아츠를 쏘며 뭐라고 외쳤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그때, 그의 입에서 메마른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당신은, 당신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건, 유언인가.” 


“말해, 불드록카스티! 도대체 왜 그렇게 이분법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거냐고!” 



죽음의 공포에 넋이 나간 걸까. 


박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빗줄기를 이지러뜨리며, 찬 바람이 불었다. 


그 탓에, 박사의 품에 있던 무언가를 싸고 있던 천 조각이 조금 젖혀졌다. 


그리고 그 순간. 


불드록카스티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옐레나, 딸아.” 



박사의 품 안에 있던 건, 프로스트노바. 


아니, 패트리어트의 딸. 


평화로운 웃음을 띄운 상태로 눈을 감은, 옐레나였다. 


패트리어트가 굳은 사이, 박사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래, 당신은 병신같이 정직한 사람이지. 운명 앞에서는 나랑 비슷한 수준의 약자고. 혼자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야. 그런데, 단지 그뿐이야?” 


“......” 


“옐레나가 숨을 거두기 전, 그녀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 당신 이야기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었다고. 당신이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그리고 얼마나 후회를 많이 하는지 이미 다 들었단 말야.” 


“...네, 놈.” 


“꺾이지 않으면 패배가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승자가 아니겠네? 이미 패배한 거야? 무수히 많은 것을 잃었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포기했으니까?” 


“......” 

“아니잖아! 당신은 패배자 따위가 아냐! 옐레나에게 최고의 아버지였고, 당신네 유격대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대장이었잖아! 사람이 항상 승자와 패자, 두 부류로 나뉘는 건 아니라고!” 



침묵에 싸인 전장에, 박사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만이 왕왕 울려퍼졌다. 


어느새 창을 내린 패트리어트는, 묵묵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사람을 분류하는 법 따위, 이 테라에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 많아! 또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많고.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길도 여러 갈래 있었다는 거, 잘 알 거 아냐!” 


“...무르, 군. 너무도, 연약한 사상이다.”  


“연약하면 어때, 썅! 당신의 등 뒤에 숨은 감염자들이 품은 사상은 뭐, 전부 강하고 패기 넘쳤어? 그냥 감염자가 핍박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게 전부 아니었어?” 


“......” 


“씨발, 너희 진짜 존나 너무한 거 알아? 너희는 왜 내게 이해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거지? 내가 너희의 아픔에 공감하고, 너희에게 손을 내뻗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 왜 너희 스스로 결론을 정하고, 그 결론에 매몰돼서 주변을 못 보는 건데?” 


“......” 


“...알려줘, 불드록카스티. 왜 나는 항상 너희 감염자들의 죽음만을 짊어져야 하지? 기술이 있고, 구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는데. 도대체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 



비가, 내렸다. 


그 비 속에서, 박사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옐레나의 시신을 꼭 끌어안은 채로. 


흐느낌은 울음이 되고. 


울음은 곧 통곡으로 바뀌었다. 



“...구하고 싶었어. 옐레나가, 살아 줬으면 했어.”


“옐레, 나.” 

“이 애의 마지막 말이 뭐였는 줄 알아?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어. 우리와 함께 감염자를 위해 싸우고 싶다고 했다고.” 


“......” 


“그런데, 나는…아무것도 못 해 줬단 말야. 그냥, 점점 식어 가는 이 애의 손을 잡아 주는 것 밖에는….” 



따지려고 했다.


네놈이 내 딸의 뭘 아느냐고. 


하지만 적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 놓아 통곡하는 박사를 보니, 그런 반문이 싹 들어갔다. 


그의 눈물은 단순히 약해빠진 사내의 한심한 오열이 아니었다. 


이곳 용문에서 스러져 간 리유니온을 위한 진심 어린 애곡이자. 


이 땅에서 고통받는 모든 감염자들에게 바치는 추도사였다. 


그때.


패트리어트의 발목을, 박사가 떨리는 두 손으로 잡았다. 


 

“...부탁이야, 불드록카스티.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 당신에게 삶을 되찾아 주지는 못 해도, 시간은 벌어줄 수 있어. 옐레나를 추억하고, 삶을 되돌아보고, 여한을 풀기에는 충분한 시간. 그러니까, 제발. 이렇게 빌게.” 


“......” 


“나한테, 당신과 옐레나의 삶에 경의를 표하게 해 줘.” 



박사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패트리어트는 허허롭게 웃었다. 



“거절, 한다.” 


“불드록카스티…!”

“너에겐, 네 의지를 관철할, 힘이 없다.” 



눈 앞의 이 남자는, 약했다. 


패트리어트가 평생을 바쳐 온 전장에서 약함은 곧 패배를 의미했으며. 


패배는 자신의 이상과 함께 악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했다. 


즉, 패트리어트에게 이 남자는 악이었다. 


부숴 없애 버려야 할. 


창을 쓸 필요조차 없이, 살짝 즈려밟기만 해도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질. 


그러나, 그럼에도. 


눈물로 호소하는 박사의 음성에는, 그의 말마따나 승패 따위로 재단할 수 없는 상냥함이 있었다.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을, 강한 의지가. 


그렇다면 패트리어트에게 있어 그는 나름의 승자이기도 했으며. 


승자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의미했다.  



“하지만, 네 제안만은, 기억하마.” 



하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패트리어트의 아들. 


우르수스의 감염자 탄압을 반대하며, 황제를 위해 일하던 자신을 비난하던.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아깝게 생을 마감한 불쌍한 아이. 


그로베지일.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아이의 목소리가. 


눈 앞의 박사의 음성과 겹쳐 들리는 것은. 


분명 그 아이와 박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안 돼, 잠깐!”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강해져라. 운명을 부수고, 이 땅의 모든, 감염자들에게, 네 뜻이 가 닿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우물쭈물하다가 이 빛을 꺼트릴 수는 없는 법. 


패트리어트는 박사를 자신에게서 떼어내, 뒤쪽에서 멍하니 지켜보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들을 향해 던졌다. 



“윽, 받았다! 괜찮다, 박사! 이제 안심해!” 


“잘 했다, 사리아! 즉시 박사를 데리고 전장을 이탈해라! 여긴 내가 지휘한다!”


“좋아, 감정은 충분히 흡수했어! 켈시 선생님, 아츠가 준비됐어요!”   


“불드록카스티-!” 


빗소리 속에서, 박사의 목소리가 긴 울림이 되어 흩어지고. 


어느새 전열을 재정비한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들이 다시금 패트리어트를 포위한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패트리어트는 오늘 여기서 죽고. 


리유니온은 무너지리라. 


백 년을 훌쩍 넘는 그의 삶의 끝은, 어쩌면 치욕스러운 패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웬디고이자, 군인이며, 감염자이다.” 



그 운명에조차 당당히 맞서겠다는 듯, 패트리어트는 창을 치켜들었다. 


그는 유격대이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웬디고의 마지막 후예로서 전장에서 뼈를 묻을 것이며. 


끝까지 감염자의 방패가 되어, 소임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와라, 로도스 아일랜드.” 



이 전장에서, 그는 희망을 보았다. 

  

패트리어트 자신의 죽음을, 개죽음이 아닌. 


감염자에게 있어, 밝은 미래를 싹틔울 초석으로 만들 희망을. 


그렇다면. 


패트리어트는 더더욱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 



“너희를, 시험하겠노라.”
 


조금 전처럼, 패트리어트를 향해 날아오는 십자포화.


무엇보다, 소나기에 섞여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검은 아츠. 


확실히 그의 숨통을 끊겠다며 미쳐 날뛰는 운명에 맞서 포효하며, 불드록카스티는 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의 포효는.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비바람에 묻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