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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돌아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1. 이 글의 식고문 묘사는 전부 필자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하였음을 밝힘. 


2. 저번에 3화 정도 슈를 주역으로 할 것 같다고 했었는데, 5화는 써야 될 듯 해. 미안하다. 애초에 엔딩 정도만 정해두고 플롯 없이 즉흥적으로 쓰는 글이라, 자꾸 왔다갔다하네. 


3. 슬슬 링 독타 야설을 한 편 더 쓰려고 시동 거는 중인데, 괜찮은 아이디어 있으면 기탄없이 이야기해줘. 


4. 작중에 등장하는 노래는 Can't Take my eyes off you. 정말 좋은 노래니까 한 번 들어보길 추천해. 


4.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써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불쌍한 글쟁이에게 많관부.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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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1일 12:10. 


염국 대황성. 



그렇게 돌아오는 길. 



“형부, 먼저 들어가 있어. 난 텃밭에서 채소 좀 뽑아서 갈게.” 


“도와줄까?” 


“아냐, 됐어. 이만하면 충분히 시간 뺏었으니까. 가서 언니랑 놀아줘. 아, 린수만 주방에 좀 갔다놔 주라. 고마워.” 


“응.” 



슈와 잠시 헤어진 나는, 손에 린수가 가득 든 바구니를 쥔 채 슈의 집 문을 열었다.


마당으로 들어가자, 왠지 언짢은 표정으로 마루에 앉아 있던 링이 꼬리를 흔들며 반겨 주었다. 



“그대여, 왔어?” 


“응. 고생 많았어, 링.” 


“아냐, 고생이랄 것 까지야. 귀여운 동생을 위한 일인데.” 



손사래를 치는 링. 


하지만 짐짓 밝은 말투와 달리, 여전히 얼굴에는 착잡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대충 린수를 주방에 가져다 놓고, 손을 씻은 뒤 그녀의 곁에 가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어?” 


“...별 거 아니었어. 아, 잠깐…그대는 이미 알지?” 


“뭘?” 


“악귀. 로도스에서는 데몬이라고 부르던가?” 



그녀가 태평하게 꺼낸 한 마디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데몬. 


당연히 알고 있다. 


사미의 북부 평원을 침식하는 이계의 재앙. 


인식하는 것만으로 존재를 얻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뜨리는 인류의 위협. 


그런데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설마. 



“여기…대황성에, 데몬이 있다는 거야?” 


“응. 그냥 있는 수준이 아니라, 떼로 우글거리던데.” 



전혀 뜻밖의 대답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곳 대황성이 어떤 곳인가. 


염국 최대의 곡창 지대이자, 쉐이의 파편 슈가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슈가 나한테 링이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말을 안 했던 건 그래서였구나. 


데몬은 사람의 인식을 먹고 불어나는 종족이니까. 


아니, 그보다 이런 곳에 데몬이 있다는 건….



“...잠깐. 그럼 슈는….” 



내 머릿속을 끔찍한 상상이 스치려던 찰나. 


링이 피식 웃으며 꼬리로 내 몸을 감싸,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 이제 향후 몇 달은 괜찮을 거야. 눈에 보이는 대로 싹 쓸어버렸거든.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그대여.”  


“...그래도.” 


“으음, 처제를 걱정하는 그대의 상냥함은 십분 이해해지만…그대의 아내로서는 조금 질투가 나는걸. 지금은 먼 전장의 승패를 논하는 게 아니라,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장수를 치하해야 할 때가 아니려나?” 



내 걱정을 지우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몸을 바짝 붙이는 링.


싱그러운 국화 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팔에 와 닿는 그녀의 체온이, 그리고 부드러운 살결이. 


느닷없는 이야기에 불안해하던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조금이나마 냉정을 되찾은 나는, 천천히 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네. 염국의 고사에 따르면, 대승을 거둔 장수에게는 황제가 비단에 쓴 개가(凱歌)와 황금 술잔을 내렸다던데. 맞아?” 


“정확해. 두 번인가 직접 받아 봤는데, 별 감흥은 없더라.” 


“응. 부끄럽지만, 나도 비슷한 의례로 너를 칭찬해 주고 싶은데…어떡하지, 지금의 나한테는 노래를 적을 붓도 , 너에게 줄 술도 없어.” 



내 말에, 링이 까르르 웃었다. 



“마음이란 참 신기하구나. 문무백관의 절을 받으며, 염국에서 가장 존귀하다 자칭하는 자의 앞에 설 때도 고요했고. 일천 근의 황금을 녹여 칠한 잔을 건네받은 순간에도, 서릿발을 견디는 소나무와 같이 흔들림 없었던 것이. 이제 와서 그대의 말 한 마디에 이렇게 들뜨다니.” 


“진심의 차이라고 생각해. 황제가 너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나만큼 너한테 감사하지는 않았을 거야.” 


“진심의 차이? 이건 또 흥미로운 화두인걸. 그대여,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들려주겠어?” 


“응. 황제는 네가 가져다 준 승리만 바라봤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서 견딜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이런 거야. 


너의 미소. 


너의 목소리. 


재치와 여유로 항상 반짝이는 네 눈빛이, 네 따스한 체온도.


하다못해 바람결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까지도.  


가슴 벅찰 만큼 아름다운 네가, 나 같은 사람의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서. 


감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감정이 느닷없이 복받친 탓일까. 


설명에는 두서가 없었고, 원래도 서툴렀던 염국어가 더 어설퍼졌지만….



“...응. 정말, 그대는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천 년의 꿈결처럼 아름다운 시상이었잖아.” 


“그렇게까지?”  


“그렇다니까. 고마워, 그대여. 그냥 그대에게 칭찬받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대는 내 손에 이 세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보물을 안겨 주었구나.”  



그런 사소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그저 그 말에 꼭꼭 눌러담은 마음만큼은, 흘러넘칠 정도로 잘 전해졌다는 듯. 


너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귀를 쫑긋거리며 활짝 웃어 주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대가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내려가고자 한다면, 그대를 위한 붓은 항상 곁에 있다는 거. 기억해 둬?” 



살랑. 


뒤이어, 부드러운 그녀의 꼬리 털이 장난스럽게 내 뺨을 스치고. 



“그건 다음에 부탁할게. 지금은 벼루도 먹물도, 비단도 없으니까.” 


“아쉽네. 그럼 그대여, 나를 위한 개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작고 사랑스러운 동작에 괜히 흥이 올라, 허벅지를 툭 쳤다. 



“음, 그럼 누워 볼래? 별 건 없지만, 노래라도 한 곡 불러 줄게.” 


“정말?” 


“응.”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내 허벅지에 머리를 누이는 링.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 주며, 어느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컬럼비아의 어느 밴드가 불렀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를. 



[당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네요,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염국어로 즉석에서 바꿔서 부르려고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관객이 링이라서 그런가, 긴장해서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무엇보다 개사에는 소양이 없다 보니 박자나 음정이 자꾸만 빗나갔다. 


그녀가 숨죽여 키득대고 있는 걸까, 허벅지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당신을 쓰다듬는 건 마치 천국 같아요, 당신을 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머쓱한 웃음이 자꾸만 비질비질 새어나오는 바람에 목소리가 조금 삑났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노래 실력 자체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비설 헌터들한테 너는 그걸 노래라고 부르냐고 욕먹으면서 단련한 가창력이다. 



[마침내 사랑이 찾아왔네요, 제가 살아 있음을 신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설령 링이 컬럼비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네요,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시, 시, 가, 부. 


그 모든 것에 정통한 그녀라면. 


내가 한 소절 한 소절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 능히 읽어내리라 믿으면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당신 곁에서 이 밤을 따뜻하게 덥혀 드리고 싶어요.] 



어느새 조용히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링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작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노래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제가 진심이라는 걸 믿어 주셨으면 해요.] 



흐르는 바람이, 박자를 맞추듯 처마 끝의 풍경을 흔들고. 


어딘가에서 농민들의 쾌활한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오, 아름다운 당신. 저를 실망시키지 말아 줄래요? 겨우 찾아낸, 소중한 당신인걸요.] 



그녀도 신이 난 걸까, 내 노래에 근사한 화음을 얹는 예쁜 목소리와.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천천히 잦아드는 매미의 우짖음. 



[그냥,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우리가 한때 몸담았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느긋한 시골의 정취 속에서. 


내 노래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한참 동안 그 여운에 젖어 서로를 만끽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링이, 아련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는구나.”  


“듣기 괜찮았어?” 


“그 어떤 명창의 미성보다 아름다웠어. 가사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대가 그 곡조에 어떤 감정을 실어 보냈는지는 아주 잘 전해졌으니까.”


“다행이다. 너라면 알아 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 말에, 기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링. 


내 모습을 가득 담은 네 눈동자가 재치와 장난기로 반짝이고. 



“이런, 작은 일 하나를 해치운 걸로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아 버렸는걸. 그대의 노래는 소인에게는 과분하니, 삼가 바라옵건대 작은 보은이나마 하게 해 주십사 간청하나이다.” 


“보은?” 


“마음을 받았으니, 마음으로 돌려드리는 게 인지상정. 시로 써 내는 것도, 춤으로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말을 끊고, 갑작스럽게 키스하는 링. 


쪽. 


짧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살결의 감촉이 내 입술을 두드림과 함께. 



“그대에게 배웠는걸. 어떤 마음은 에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몸과 언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편이 더 잘 전해진다는 거.” 


“...링.” 


 

얼굴에 홍조가 예쁘게 핀 링이,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우아하게 굴곡진 그녀의 몸이, 내게 꼭 달라붙는다. 


그녀 특유의 국화꽃 향기가,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만큼 진해지며. 


그녀의 다정한 눈매가, 오똑한 콧날이, 백옥처럼 고운 피부가. 


코앞에서 나를 유혹한다. 


노래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하나, 당신의 노래에 비견될 만한 것이 없어. 


아쉬우나마 당신에게 구름 너머를 보여주고. 


비가 되어 강산을 넘나드는 듯한 쾌락을 선사하고자 하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아하.” 


“맞지?” 


“하나를 가르친 적도 없는데 열을 아는구나.” 



저항할 생각일랑 진작에 버리고, 그 유혹에 홀랑 넘어간 내가 그녀를 마주 끌어안으려던 찰나. 


내 시야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잡혔다. 


마당 한 구석에 숨은 두 사람의 그림자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좌락. 


그리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히죽거리는 슈였다. 



“...링, 잠깐만. 저기 좀 볼래?” 


“응? 왜?” 



팍 식은 내가 그 쪽으로 턱짓하자, 내게 고정되어 있던 링의 시선이 그 쪽으로 돌아가고. 


들켰다는 걸 직감한 걸까. 


슈와 좌락이 알아서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아, 들켰네. 형부는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문제야. 한창 좋은 구경 하고 있었는데.” 


“슈야, 아무리 네가 내 처제라도 그건 좀.”  


“두, 두 분…도대체 남의 집 대청마루에서 무슨 짓을….” 


“난 계속해도 상관없는데, 그대여?” 


“어머, 그럼 계속할래? 우린 그냥 티 안 나게 구경만 할게.” 



옆집 아들의 연애를 직관한 동네 아줌마처럼 실실 웃는 슈. 


그리고 여느 사춘기 어린애마냥 외설적인 장면을 보고 극도로 당황한 좌락과. 


오히려 내 목을 더 세게 끌어안는 링. 


순식간에 떠들썩해진 마당에, 괜히 머쓱해져 손사래를 쳤다. 



“아냐, 됐어. 실례했다.” 


“...칫, 재미없게. 그럼 바로 점심 준비할 테니까, 좀만 기다려.” 



할 말을 잃은 좌락을 질질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슈. 


또 다시 둘만 남은 우리였지만, 이미 분위기는 망한 뒤였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건 없겠지만, 굳이 싶었다. 


나랑 링만의 시간을 다른 사람이랑 공유하기 싫은 것도 있고. 



“...그래서, 그대는 어떤 선택을 하려나?” 



그런 마음에서, 나는 내 목을 두른 링의 팔을 최대한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실망이 드러났지만….



“...나머지는, 이따가 밤에 하자. 어때?”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이미 멘트를 준비했다. 


조심스레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자, 조금 처졌던 링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시 피어났다. 



“앗, 그런 거라면…좋아, 그대를 위해서 참을게.”  


“고마워. 그럼 들어갈까?” 


“응.”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



그렇게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우리는 주방에서 분주히 돌아다니는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거실에 앉아 있었다. 



“언니랑 형부, 참 사이 좋네. 좀 부러워.” 


“그럼 너도 좋은 사람을 찾지 그러니, 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링이 헤실거리며 나한테 달라붙고. 



“글쎄, 지금은 딱히 생각 없어. 갑자기 형부 같은 남자가 굴러들어오면 한 번쯤 생각은 해보겠지만.” 



바쁘게 칼질을 하던 슈가 이상한 소리를 하며. 



“......” 



그런 그녀를 돕던 좌락이 갑작스레 침울해지는 등. 


소란스럽다기보단, 활기에 가득 찬 대화가 오고 갔다. 


그 탓에 슈에게 데몬 이야기를 할 틈이 보이질 않았다. 


로도스 아일랜드가 데몬 사냥의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미 쪽과 교류하며 쌓은 데이터도 있고.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뭐,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려나. 



“근데, 신기하네.” 


“뭐가?” 


“언니가 이렇게 오랫동안 술 안 마시고 멀쩡한 거 처음 봤어. 형부, 언니한테 무슨 약이라도 쓴 거야?” 


“아니. 딱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약은커녕 같이 퍼마셨는데요. 



“그래? 흠, 아무튼 내가 딱히 갱생시킬 필요도 없었겠네. 언니의 문제 100개 중 99개는 술에서 비롯됐으니까.” 


“그런 것 같긴 해.” 


“그대여?” 


“그렇지? 역시 형부랑은 말이 통한다니까. 아, 형부. 혹시 그 이야기 들었어? 예전에 총웨 오빠랑 언니가 옥문에서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신 다음, 성벽 위에서 물구나무선 채로….” 


“크흠, 크흐흠!”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지금도 옥문의 군사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물구나무선 채로 성벽에서 경주를 하시다가, 순찰을 도는 병사들을 만날 때마다 그 병사들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계속 달리셨다죠? 더 많은 병사를 들고 있는 쪽이 이기는 내기를 하셨다고요.”  


“크흐흐흠!” 


“...링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니?” 


“아하하, 언니가 언짢아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걸. 형부가 와서 그런가, 되게 시끌벅적하고 재밌네.” 



재잘재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슈.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 근엄하게 헛기침을 하는 링과. 


중간에서 눈치 없이 추임새를 넣는 좌락. 


왜지. 


별거 아닌, 여느 가정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일 텐데. 


어쩐지 진짜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괜스레 즐거웠다. 

 

지금까지 내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기껏해야 아미야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딱히 그런 걸 기대한 적도 없고. 


그런데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그냥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들뜨다니.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사랑해 준 링에게. 


그리고 아무런 스스럼 없이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 슈에게. 



“좋아, 좌락. 슬슬 상 차리렴.” 


“네, 슈 씨.” 



그때, 좌락이 손 안에 커다란 쟁반을 들고 이 쪽으로 다가왔다. 


매콤하고 알싸한 양념의 냄새, 그리고 고소한 린수 특유의 향이 후각을 자극하며. 


오늘 함께 잡은 린수로 만든 요리일까.  


꼴깍, 침이 넘어가고. 


정신이 없었던 탓에 잊고 있었던 배고픔이, 강하게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와아.” 


“슈, 요리 솜씨가 더 좋아졌구나.” 


“에이, 아직 우리 열둘째에 비하면 멀었지.”  



그때,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음식을 옮기는 좌락의 낯빛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거기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까지. 


이런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으면 기대해야 되는 거 아닌가? 


반응이 왜 저러지? 



“좌락, 이것도 가져가!”


“네.” 


“밥도 퍼 놨으니까, 좀 옮겨 놓고!”


“...네.” 



그 이유를,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비린내 따위는 전혀 없이, 달콤한 향을 풍기는 혼비스트 고기 조림.


투명한 피 덕분에 꽉 찬 속이 다 비쳐 보이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새우 만두. 


보기만 해도 상큼해지는 채소볶음과, 자신이 곧 겉바속촉의 정석이라 주장하는 듯한 두부 튀김. 


황제의 점심 상을 차려 주겠다는 슈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돈 주고도 못 먹을 것 같은 근사한 요리였다. 


그런데. 


주방에서 요리가 끊임없이 나오는 게 아닌가. 


처음에 하나였던 요리가, 둘이 되고. 


이내 넷, 여덟, 열여섯, 물경 스물을 넘어섰는데도 자가증식을 멈추질 않는다. 



“...그, 대여.” 


“너도 느꼈구나.” 


“아니,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밥 또한 어마무시했다. 


이미 공기를 한참이나 이탈해, 상촉의 산봉우리만큼이나 높이 쌓인 고봉밥. 


그 압도적인 광경에, 링이 새파래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위기를 직감한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남겨도 되는 거지?”

“...아니.” 


“......” 

“...원래라면, 그냥 도망갔다가 슈 화 풀릴 때쯤 돌아오면 되는데…그대여, 어떡할래?”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눈 앞에 차려진 화려한 한 상을 바라보았다. 


이건 단순한 밥상이 아니다. 


나에 대한 감사와 환영을 담아 정성껏 차린, 슈의 마음이다. 


다 먹을 수 있을지 두렵긴 하지만….


그 마음을 내버리고 도망친다는 선택지 따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링에게 그 결의를 털어놓기도 전에, 쟁반 가득히 쌓인 찐 마를 든 슈가 내 앞 자리에 앉았다. 



“응, 다 됐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 


“...진짜 고마워, 슈.” 


“별 거 아냐, 형부.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걸.” 


“에헤이, 사양할 거 없어. 팍팍 먹어, 팍팍!” 



내 등짝을 팡팡 후려치며 활짝 웃는 슈. 


그 손길보다, 눈 앞의 꽉 찬 식탁이 더 무섭다. 


이건 니엔의 그것과는 좀 다른 종류의 식고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전술지휘관이다. 


한 번 정한 길에서 물러서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잘, 먹겠습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먼저 두부 튀김을 집어든다. 


이럴 때야말로, 평소에 갈고 닦은 전략전술적 능력이 빛을 발할 때겠지. 


먼저, 고기나 생선처럼 느끼하거나 포만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종류를 해치운다. 


배가 어느 정도 차면, 위에 부담이 덜 가는 채소를 위주로 상대하고. 


마지막으로 찐 마와 국물요리를 처리하는 걸로 한다. 


좌락과 링에게 작전 개요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슈.” 



그래도 두 사람 모두 나름 전술에 밝으니, 굳이 말하지 않에도 소임을 다해 주리라 믿는다. 


그런 신뢰를 담아, 두부를 소스에 찍어 입으로 가져간 순간.



“...와?” 


“형부? 왜 그래?” 


“이, 이 맛은.” 


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떨굴 뻔 했다. 


그 정도로, 이 두부 튀김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한 입 깨무는 순간, 바삭한 식감만을 남기고 연약하게 부서지는 튀김옷. 


그리고 뒤이어 펼쳐지는 고소함의 향연. 


폭신하고, 부드러우며, 상냥하게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감칠맛 나는 두부. 


그 맛이 물린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캐치해, 원래의 튀김에는 없었을 단짠단짠을 보완하는 소스까지. 


이건 맛있다는 말로 수식하기는 부족하다. 


하지만 달리 대체할 말을 찾기에는 내 어휘력이 너무나도 빈약했다. 



“너무, 맛있어. 태어나서 먹어 본 그 어떤 음식보다.” 


“반응 좋고.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면 만든 사람도 보람이 있지. 모자라면 언제든 말해줘, 형부. 금방 만들 수 있으니까.” 



그때, 테이블 아래에서 내 무릎을 꽉 잡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좌락이었다. 



“뭐야, 왜?”


‘소리 내지 마십시오.’ 



눈빛에 두려움을 가득 담은 그가, 나를 향해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음미하지 마십시오. 그냥 최대한 입에 우겨넣으시란 말입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과연. 


경험자의 조언인가. 


고맙게 새겨들을게, 좌락. 


하지만 이 요리는 그런 식으로 소비되기에는 너무 훌륭해. 


한 입 베어물 때마다 입 안에서 결대로 찢어지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혼비스트 고기도. 


린수 특유의 기름짐과, 향신료의 매콤하고 산뜻함을 두루 갖춘 생선 요리도. 


뭐 하나 언급하지 않는 게 실례일 정도로 맛있단 말이야. 


그렇게 슈의 기막힌 음식 솜씨에 취해, 무아지경으로 밥 공기를 반쯤 비웠을 때. 



“...응?” 


“왜 그래, 형부? 필요한 거 있어?”



나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분명히, 체르노보그 석관에서 깨어난 이래 가장 많은 음식을 먹어치웠는데. 


왜 눈 앞의 요리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걸까. 



“...어, 혹시 마실 거 좀 있니?”


“아, 그런 거였어? 진작에 말하지. 잠깐 기다려. 생강 콜라 갖다줄게.” 



누가 그랬었지.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 이미 위기에 빠진 거라고. 


그 말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참 조언이라는 것을, 이 순간 나는 실감했다. 



“으으으….” 



내 동지들도 비슷한 걸 느낀 걸까. 


나를 두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새파래진 얼굴로 입 안 가득히 음식을 우물거리는 링.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음미하지 말라고.” 



그리고 어찌어찌 밥 공기를 다 비우고 숨을 헐떡거리는 좌락. 


그때, 놈이 입을 열었다. 



“전, 여기까집니다, 박사님. 더는…못 먹습니다.” 



뜻밖의 폭탄 선언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식탁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던 건, 나와 링, 그리고 좌락. 


이 세 명이 온 몸을 불살라 영혼의 한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명이라도 빠지는 순간, 균형은 그대로 무너진다. 


너 정도 되는 녀석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배신하는 거냐, 좌락.”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몫은 다 해치, 웠으니, 전 이만….” 



 내 눈빛을 외면하고, 밥공기를 든 채 비칠비칠 몸을 일으키는 좌락. 


놈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때.


천천히 거실을 떠나던 놈이, 양 손에 음료수 병과 컵을 든 슈와 마주쳤다. 



“어머, 좌락. 오늘따라 잘 먹네.” 


“...네, 슈 씨 음식이 맛있어서요. 죄송한데, 혹시 먼저 올라가서 쉬어도….” 


“그래그래, 한 공기로는 부족하지? 오늘 열심히 해 줬기도 하고, 한창 클 때니까 많이 먹어야지. 밥그릇 이리 줘. 금방 퍼다 줄게, 가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정의는 살아 있었다.   


슈는 해맑은 얼굴로 좌락의 바램을 철저하게 짓밟아 부수었고. 


하얗게 질린 좌락은 차마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망연히 제 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미소가 싹 사라진 녀석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여, 나, 나…더 이상은….” 


“...미안해, 링. 조금만 더 해 보자.” 



희망이 없기로는 링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그녀의 손을,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꼭 붙잡았다. 


그렇게 좌락의 밥공기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리필되었고. 


본격적인 식고문이 시작되었다. 



“...끄윽.” 


“형부, 젓가락이 느려졌어. 이것도 좀 먹어 봐. 아까 잡은 금린어 기억하지? 그걸 살만 발라내서 식초랑 양념에 절인 거야.” 


“아, 아냐…슈, 내가 먹을….” 


“아, 그리고 이것도. 얼마 전에 읍내에서 사 온 치즈에다 삶은 고구마를 섞어서 만든 그라탕이야. 시험작이니까, 먹어보고 감상을 말해 줘.”   


“......” 


“이건 우리 논 도랑에서 잡은 민물새우로 담근 장인데, 좀 짜긴 해도 식욕 회복하는 데는 그만이야. 대황성 전통 요리니까, 한 번 잡솨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숟가락 위에 음식이 계속해서 쌓이고. 


한 입 한 입 음식을 우겨넣을 때마다, 입은 환호성을 지르는데 위장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분명히 처음에는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던 뇌가. 


슈의 음식을 맛보자마자 아, 슈는 다 생각이 있구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먹어 뒀으면 하는 상냥한 배려구나, 하고 납득하다가도. 


아직도 반절이나 남아 있는 음식으로 시선이 가는 순간, 다시 영혼이 절규를 내지르는 무한의 순환. 



‘야, 좌락아…누구 부를 사람 없냐?’


‘없습니다…그리고 불러 봤자 소용 없어요, 사람 수가 늘어날수록 음식도 더 늘어납니다.’


‘큭…괜찮아, 링?’


‘으으으으으으…토할 것 같아….’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진 이 시련을. 


우리 셋은 손을 꼭 마주잡고 견딜 뿐이었다. 

 

입술 모양만으로 대화를 나누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꺾이려는 서로를 위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조금씩이나마 힘겹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하, 다, 먹었다….”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모여. 


영웅의 위대한 여정을 이루듯이. 


우리의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도 마침내 결실을 이루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던 식탁이, 텅텅 비고. 


바닥을 보인 국물이나, 양념에 들어간 향신채 조금을 제외한 모든 식재료를 말끔하게 해치웠다. 



“...와, 세 사람 진짜 잘 먹는다. 뿌듯한걸?” 



짝짝짝, 우리의 위업을 칭송하듯 슈가 박수를 치고. 


우리 셋은 시선으로 서로를 치하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하고. 


한 번 배신을 시도하긴 했지만, 최연소 사세대 지촉인답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좌락은 물론이고. 


오로지 나에 대한 의리 하나로 이 악전고투를 버텨낸 링 또한,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마 향후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 두 사람과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으리라. 


그래, 기회가 된다면 좌락도 로도스에 오라고 꼬셔야겠다. 


이 녀석, 젊은 꼰대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됨됨이가 괜찮네. 


그때.  



“음, 그럼 후식 가져올게! 과일이랑, 떡이랑…아, 케이크도 조금 있어!” 



훈훈한 분위기를, 슈의 한 마디가 무참하게 박살냈다. 



“...뭐?”


“그리고 매실청이랑…어제 만들어 뒀던 꿀과자도 있었지, 참. 조금만 기다려!” 



맑게 몸을 일으키는 슈. 


그녀가 등을 돌리자마자.



“하하, 하….” 


좌락이 열반에 든 부처 같은 해탈한 얼굴로 인자하게 웃었고. 



“미안, 해…그대여….” 


“링, 안 돼….” 



링이 졸도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하늘이시여. 


참하고 우아하고 예쁜 아내를 내려 주신 것에는 더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발랄하며 똑부러진 처제를 내려 주신 것까지도 좋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저 처제는 왜 저렇게 음식을 못 먹여서 안달이랍니까. 


삼대 독자 손주를 홀로 키우는 할머니도 저렇게는 안 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찌 되도 좋으니, 링만은 살려주십쇼. 



“기다렸지!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나 좀 하자!”



하지만 늘 그렇듯, 


하늘은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망연히. 


슈의 손에 들린 쟁반에서, 탑처럼 쌓인 채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후식을 쳐다볼 뿐이었다. 



쉐이 합체까지, D-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