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모음은 요기: https://arca.live/b/arknights/104384381?p=1


어쩌다 보니 흥이 올라서 하는 연참. 


1. 이번 편도 슈 위주인데, 으...미안해. 내가 쉐이 애들 중에 링 다음으로 슈를 좋아하긴 하는데, 이렇게까지 분량이 늘어질 줄은 몰랐어. 고참 작가들이 늘상 하는, 캐릭터가 작가 맘대로 안 가고 지 멋대로 뛰논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더라고. 역량 부족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그래도 다음 화부터는 떡밥도 천천히 풀면서 전개할 예정이고. 일단 정말 열심히 썼으니까 예쁘게 봐 줬으면 좋겠다.  


2. 진짜 미안하다...야설도 써야 되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가. 월요일 저녁까지는 어떻게든 마무리지으려고 하는데, 이게...하, 모르겠다. 아무튼 최대한 열심히 쓰고 있다는 말밖에 못 하겠네. 


3. 미안할 게 많아서 미안해. 또 고봉밥이야. 


4.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달아 주면 29포인트가 공짜로 생김미다. 소재 추천, 피드백, 칭찬, 아카콘 전부 환영해. 불쌍한 글쟁이에게 많관부.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



그 시각. 



“죽겠다….”  

 

“으으으….” 



나와 링은 슈네 집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숨도 잘 안 쉬어지고. 


그나마 씩씩대며 한 호흡을 뱉으면, 음식 냄새가 확 올라와 속이 안 좋아진다. 


그래도 나는 양반이지, 나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은 링은 아예 버블 형태로 변해 내 가슴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끔씩 몸을 바르르 떠는 걸 제외하면 움직임이 아예 없는 게, 심각하게 걱정될 정도였다.  


좌락은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세 번쯤 게워내더니 그대로 앓아누웠고. 


그런 우리를 보며, 슈가 피식 웃었다. 



“형부랑 언니, 쉬고 있어. 난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밭 좀 둘러보고 오려고.” 



그녀의 말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링 버블을 머리 위에 얹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같이 가.” 


“응? 아냐, 쉬어.” 


“대황성 구경도 하고 싶고. 할 얘기도 좀 있어서 그래.” 



이곳에 있다는 데몬에 대해서 상의도 해야 하는데다, 처제가 사는 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싶은 것도 사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산책이라도 해서 소화를 시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속을 다 게워낼 것 같아서였다.  



“별 재미는 없을 텐데. 시골이라.” 


“괜찮아. 나도 그렇고, 링도 시골 좋아해.” 


“그래? 그렇다면야. 같이 가 주면 나도 안 심심하고 좋지.” 



그렇게 우리는 집을 나섰다. 


논이 지천에 깔린 시골길 위에서.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하던 속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듯했다. 



“으으으…그대여, 너무 흔들려서 어지러워….” 


“미안해. 머리 위가 좀 불편하면, 안아 줄까? 어깨 위도 괜찮긴 한데.” 


“다 똑같잖아….” 



내 머리 위에서 칭얼거리는 링 버블도 조금 전보다는 안색이 훨씬 괜찮아졌고. 



“언니, 어리광이 늘었네. 형부 앞이라 그런 거야?” 



그런 우리를 보며, 명랑하게 웃는 슈. 



“말 시키지 마…나 이 사람 머리 위에서 토하기 진짜 싫단 말야….”


“토해도 돼. 오히려 좋은데.”  


“푸하하하하, 형부 취향 참 특이하네.”  



그렇게 셋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무로 된 둑방길을 한참 동안 걸었다. 


저 멀리서 산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허리를 숙인 채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농촌의 정취.



“그래서, 형부. 하고 싶은 얘기는 뭔데?” 



그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 잠시 잊고 있었던 화제를 상기시키는 슈.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링한테 들었어. 여기 대황성에 데몬이 있다고.” 


“뭐야, 알고 있었어? 괜히 숨겼네.” 



나름 고민하고 꺼낸 말인데, 그런 내가 한심해질 만큼 슈의 대답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맞아. 이곳 대황성은 애초에 데몬…그러니까 악귀에 오염된 토지였어. 사실 지금도 오염돼 있고.” 



그녀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전, 나는 데몬에 오염된 땅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직접 보았다. 


사미 북부의, 끝없는 빙원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비. 


뿌리도 줄기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꽃과, 시커멓게 물든 채 물결치는 지평선. 


그게 내가 아는 데몬 출몰지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곳 대황성은 너무 다르지 않은가. 


다시금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유유자적한 시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선선한 바람, 밭에서 무르익어가는 작물과 갓 논에 심긴 파릇파릇한 벼들. 


이런 풍요로운 땅이, 데몬에 오염된 땅이라고? 



“응, 뭐. 내가 여기 처음 정착했을 때는 그런 모습이었지.”


“...그럼, 지금 이 풍경은….” 



그녀는 대답 없이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둑방 길이 끝나고, 조금 전 언뜻 보았던 산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풀숲 사이에서 야트막한 샛길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수고스럽겠지만 형부를 잠시 부탁할게.” 


“당연하지.”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남기고 풀숲 사이로 들어가는 슈.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본모습으로 돌아온 링이 내 곁에 섰다. 


도대체 뭐야. 



“가자, 그대여. 슈가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나 봐.” 


“...응.” 



싱긋 웃는 링과 함께, 여전히 어리벙벙한 상태로 산을 오르길 몇 분. 


아련하게 울리는 멧비둘기 소리와, 풀벌레의 노래 속에서. 


우거진 나뭇가지와 거미줄을 헤치며, 어렵사리 등반을 하고 있자니….


언젠가부터,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아직 한낮일진대, 기묘할 정도로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고.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워지며. 


시야에 들어오는 나무둥치 곳곳에서, 거뭇거뭇한 그을음이 보인다. 


찌릿, 찌릿, 찍. 


더욱 날카로워진 풀벌레의 울음소리는 덤이었다. 


그 울음소리가 묘하게 신경쓰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잠, 깐.” 



온 몸에 소름이 내달리고. 


등골이 차갑게 식는다. 


거기 있었던 건, 곤충. 


테라의 곤충학자들이 메뚜기라고 명명한 생물이었다. 


아니, 분명 그래야 했을 텐데…. 



“이건, 도대체….” 



활짝 펼쳐진 채 위협적으로 파닥거리는 여덟 겹의 날개. 


검붉게 일렁거리는 네 쌍의 겹눈. 


놈이 내려앉은 나뭇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린다. 


온 몸이 시커멓게 물든 괴물 메뚜기가, 턱을 딱딱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런 생물은 테라 어디에서도 본 적 없다. 


아마 그 어떤 생물학자도 보지 못했겠지. 


하지만 놈과 눈을 마주친 순간, 한 가지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놈이 저 턱으로 나를 찢어발기리라는 것. 


그 사실을 자각한 내가 마른침을 삼키려던 찰나. 



“이상하다, 분명히 아까 전부 청소했는데.” 



고개를 갸웃한 링이 순식간에 도약하더니, 지팡이로 놈을 후려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한 줄기 연기로 화해 사라지는 놈.


단 일 초만에 간단히 위협을 제거한 링이 살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여, 괜찮아?” 


“...링, 저건 도대체.” 


“아, 저게 악귀, 아니 데몬이야. 이 근처에서는 저런 벌레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모양이더라고.” 



…그렇구나. 


데몬이라는 건, 인간의 인식을 바탕으로 형태를 얻고 증식하는 생물이니까. 


인간이 그들을 두려워할수록 더더욱 강해지기에, 인간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공포의 형태를 빌려 현계한다. 


대황성의 거주민들 대부분이 농부니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충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거겠지. 



“...고마워, 링. 덕분에 살았어.” 


“아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 그보다, 걸을 수 있겠어?” 

 

“응. 계속 가자.”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데몬들이 계속 튀어나왔지만, 링이 가볍게 처치한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산이 완만해지고, 눈 앞에 야트막한 공터가 나타났다.  


곳곳에 시커먼 나무뿌리가 튀어나와 있고, 자갈과 푸슬푸슬한 흙만이 가득한 불모지. 


그 공터 한복판에 쭈그려 앉아 있던 슈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왔어, 형부? 고생 많았어.” 


“...슈, 여긴 도대체.” 


“음, 새로운 밭을 만들려고 점찍어 둔 지역이야. 지금은 좀 좁긴 해도, 금방 개간할 수 있을 거야. 근사하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말투가, 더없이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왜. 


하필 여기다가? 



“...땅도 영 안 좋고, 데몬도 있는데? 여기다 밭을 만들겠다고?” 


“음, 형부. 내 권능이 뭔지 모르는구나.” 



뭘 먼저 물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힐 정도로 무수한 의문들이 내 뇌리를 어지럽히고. 


이미 뭔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슈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한번 봐.”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산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곡옥. 


쌀알을 본따 만든 옥 장식들이었다. 



“마른 뼈에서 새싹이 자라고.” 



무어라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춤추듯 하는 동작으로 곡옥을 땅에 뿌리기 시작했다. 



“황폐했던 땅은, 다시금 비옥함을 알지니.” 



그리고, 기적이 펼쳐졌다. 


똑. 


말라 가는 연못에 찾아온 빗방울처럼. 


곡옥이 고요히 땅을 두드림과 함께, 불모의 땅에 생명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녹색 광채가 부드러이 기지개를 켜며 대지를 쓰다듬고. 


쓸쓸히 말라붙어 있던 흙이 생기를 얻는다. 


촉촉하게 반짝이는 대지 위에서, 새싹들이 조금씩 고개를 디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때의 불모지는 이윽고 뽕나무의 밭이 되리라.”  



그녀가 노래하듯 중얼거릴 때마다, 텁텁하기 그지없던 공기가 조금씩 맑아지고. 


시커멓게 물들어 있던 나무들이 푸르름을 되찾으며. 


어둠 속에서 찌르르, 울부짖던 데몬의 소리가 점점 잦아들어 간다. 


모든 것이 괴이에 침식된 이 흑암 속에서, 홀로 춤추는 슈의 존재만이 광명이었으며. 


그녀의 손짓에 따라, 죽었던 생명이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그녀의 춤사위가 끝났을 때. 


산 속의 불모지였던 공터는, 당장 파종해도 좋을 만큼 윤택한 옥토가 되어 있었다. 



“...이게, 슈의 권능….” 



이게, 쉐이의 대리인 슈가 베헤모스로서 부여받은 힘. 


황폐화된 땅을 되살리고, 새 생명을 움틔우는 능력. 


딱 한 번 본 게 다라 뭐라고 규명할 수는 없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풍요’정도가 되지 않을까. 


링의 권능에 비견될 만큼 신비로운 그녀의 힘에, 내가 잠시 넋을 잃은 사이. 



“...윽.” 



창백해진 슈가 힘없이 비틀거리고. 



“...괜찮니, 슈? 너무 무리한 거 아냐?” 



재빨리 달려간 링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링 언니. 고마워.” 



링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친 슈는, 이내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잘 봤어, 형부?” 


“......” 


이를 말일까. 


현실에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환상적인 풍경을 보았다. 


두 시간 전의 내가 이 모습을 봤다면, 가슴이 뭉클해진 끝에 눈물을 줄줄 흘렸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슈, 너.” 



그 모습에 솔직하게 감동하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으니까.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계속 이런 식으로 땅을 정화해 온 거야?” 



슈가 정착하기 전까지 줄곧 데몬에 오염되어 있었다는 대황성의 대지. 


그리고 그 말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현재의 대황성. 


방금 슈가 보여준, 황폐한 대지를 살려내는 기적. 


이 세 가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형부는 정말, 눈치가 빠르네.” 


“왜?” 



굉장히 많은 의미를 함축한 내 질문에, 슈가 엷게 웃었다. 



“왜냐니. 그럼 형부는 왜 언니를 사랑했어?” 



그리고 그 역질문은, 내가 품은 모든 궁금증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되어 주었다.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확률이 높은데도, 왜 링을 사랑했느냐.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을 정도로 상대가 사랑스러웠기에 그랬던 거 아니냐. 


나도 마찬가지다. 


이 대지를 사랑하고. 


그 대지 위를 거니는 인간들을, 자신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로 사랑해서. 


자신의 수명과 권능을 깎아 먹는 일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입이 탔다. 


미련한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고. 


그 이상으로 안타까웠다. 



“슈, 넌…그 정도로 인간들을 사랑하는 거야?” 


“맞아.”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은 전부 잔걱정에 불과하다는 듯, 슈가 시원하게 미소지었다. 



“형부, 한 톨의 쌀을 만들기 위해 이곳의 농부들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알아?” 


“......” 

“겨우내 얼어붙은 논이 생기를 되찾으면, 온실에서 키우던 모종을 가져와 판에 끼워. 그리고 일일이 허리를 숙여 가며 땅에 심지.” 


“......” 


“그리고 매일같이 논에 들러 벼를 보살펴. 잡초를 뽑고, 벌레를 막기 위해 약을 치거나 파울비스트를 데려오지. 혹여나 들짐승에 짓밟히면 어쩌나, 병이라도 들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면서 지켜보는 거야. 날이 덥든 춥든, 비가 오든 우박이 떨어지든.” 


“......” 


“그렇게 반 년을 기다려, 탈곡을 하지. 낱알을 털어, 겨를 벗겨내고, 쭉정이를 걸러내. 그리고 나서야, 농부들은 비로소 한 줌의 쌀을 손에 쥐어. 왜 그런 짓을 할까?” 


“...슈.”  



후련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슈.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밥을 먹었으면 해서. 자기가 고생하면 아내가, 친구와 가족들이 한 끼라도 배곯지 않고 따뜻한 밥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정말 덧없지 않아? 고작 그런 이유로, 반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고된 노동을 한다니.” 


“......”


“그런 그들의 노력에, 나는 반한 거야.” 



인간은 유한을 살아가는 존재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알 수 없으면서, 그 짧은 시간 안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조금이라도 오래 지켜주고자 아득바득 노력한다. 


그 행복도, 자신의 삶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걸 알면서. 



“대지는 변해 가. 오리지늄으로 인한 재앙이 내리기도 하고, 데몬이 깃들어 오염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땅이 어떻게 되든, 이곳의 농부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젊은이도 노인도, 새벽같이 일어나 쟁기를 지고 밭으로 나섰지. 살기 위해서, 또 살리기 위해서.” 


“......” 


“그런 그들의 필사적인 열정이 눈부셨고, 그만큼 안타까웠어. 안 그래도 짧은 삶,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고 고통만 받다가 가는 건 너무 불쌍하잖아. 설령 내가 희생하더라도, 그들의 피와 땀에 약간이나마 보답을 해 주고 싶었어.” 



뭐,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래 해먹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라며 장난스럽게 웃는 슈. 


여전히 혈색이 돌아오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슈야, 이 바보같이 착한 처제야. 


분명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네가 털어놓는 이야기에 이렇게 마음이 답답해지는 건 도대체 왜일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인간에게 헌신한 초월자에 대한 경의일까. 


그도 아니면. 


나를 가족이라고 불러 준 네가, 좀 괄괄하긴 해도 순수하고 착한 사람인 네가. 


보답받지 못할 희생을 영겁의 세월 동안 반복해왔다는 것을 알아버린 데서 오는 안타까움일까.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네, 형부. 잔소리 할 거면 해, 난 기쁘게 들을 수 있으니까.”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해. 


나는 너를 탓할 수 없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냐고 욕할 수도 없고. 



“...정말 고생했어, 슈. 염국의 대표자도 대황성 사람도 아닌 나지만…고마워.”  


“응?” 



뜻밖의 감사에 당황한 걸까, 슈가 움찔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난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슈. 


왜냐면, 나도 링도. 


네 말마따나, 너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 의미 없어 보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우며, 그 끝에 기다리는 게 보답이 아닌 절망뿐일지라도. 


그저 상대를 사랑하기에 꿋꿋이 나아간다는 점에서, 우리와 너는 닮았어. 


하지만 너는 이미 그런 나를 이해해 줬지. 


여기서 내가 감정에 북받쳐 너를 혼내거나 잔소리를 한다면, 그건 그런 네 마음에 대한 모욕이 될 거고.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더 이상 네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해. 이것도 진심이야.” 


“......” 


“그러니까, 나나 링이 도울 수 있게 해줘. 링은 물론이고, 나도 이 쪽으로는 경험이 좀 있으니까.” 



로도스가 데몬 사냥의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지만, 나름의 노하우 정도는 있다. 


티폰이나 발라크빈처럼 이쪽에 특화된 인원들도 다수 있고. 


농업에 재능이 있는 오퍼레이터들도 많으니까. 


로도스 기업 차원에서 대황성과 연계해 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거다. 


분명,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법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그냥, 네 몸이 최대한 덜 상하는 선에서 했으면 하는 거야. 너는 내 처제니까.” 


“...고마워, 형부.”   



그런 마음을 담아 한 말에, 어쩐지 얼굴이 조금 빨개진 슈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 대황성을 이동도시로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 프로젝트가 끝나기만 하면…더 이상 대황성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겠지. 그럼 난 자유인이 될 거야.”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럼 그때는 뭐 할 거야?”


“글쎄. 언니처럼 한바탕 여행이라도 다닐까 싶네.” 


“음, 그럼 여행이 끝나고 나면…로도스로 올래?” 



즉흥적인 제안에, 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부네 회사에...? 내가?” 


“응. 나나 링, 니엔, 시, 총웨도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힘 닿는 데까지 지원해 줄게. 무엇보다 너처럼 착하고 요리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아할 테니까.”  


“...그래도 돼?” 


“당연하지. 언제든 환영이야.” 



단지 내 처제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쉐이로서 권능도 확실하고. 


로도스 주방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조리에 능숙한데다. 


이렇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선하고, 유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모셔 가야지. 


그런 의미를 담아, 나는 씩 웃었다. 



“그럼, 약속한 거다?” 



내 말에, 슈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상태가 안 좋아진 그녀의 모습에, 더럭 겁이 났다. 


혹시 권능을 남용한 부작용이라도 온 걸까. 


내가 링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고개를 번쩍 치켜든 슈가 새된 목소리로 링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어떡하지, 언니?” 


“...왜?” 


“나 형부가 진심으로 좋아질 것 같아!” 



…?


뜬금없이 플래시뱅이 눈 앞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내가 멍하니 슈를 지켜보는 사이. 


나처럼 걱정을 머금고 있던 링의 얼굴이 한겨울 호수처럼 차가워졌다. 


폭탄을 떨군 슈 본인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도 이해를 못 하는 듯 했고. 


뭔데, 이거. 


갑자기 분위기 왜 이러는데. 


내가 플러팅이라도 한 건가? 


딱히 그런 거 한 적 없잖아. 


근데 넌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슈야. 


완전히 푸르름을 되찾은 숲 속,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스미는 공터에서. 


우리 세 사람은 할 말을 잃은 채 한참 서로를 쳐다보았다. 


봄이었다. 



—---



두 시간 뒤. 


나와 링은 슈의 집 손님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정말, 그대는…베히모스를 홀리는 권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없는뎁쇼.” 


“슈가 그런 소리 하는 거, 정말 처음 봤다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결국 그 상황을 어찌어찌 무마하긴 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갑자기 슈가 거기서 그런 소리를 한 건지. 


난 그냥 사람이라면 당연히 표해야 할 경의를 털어놓았던 것 뿐인데. 


그런 내 볼을, 링이 장난스레 꼬집었다. 



“...혹시나 나랑 슈를 양 손의 꽃다발처럼 들고 다니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면…절대 안 되니까. 알겠지?”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굳이 뺨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나한텐 링뿐이다. 


슈한테도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러고 나니까 슈의 얼굴이 두 배로 빨개져서 줄행랑을 놓는 사소한 찐빠가 있긴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그런 마음을 담아 말하자, 링이 살풋 웃었다. 



“훗, 맞아. 정답이야.” 


“근데 링, 집착이 좀 늘었다?” 


“어머, 집착해도 된다고 말한 건 그대였는데.” 



그랬었나. 


뭐, 딱히 상관없어. 


답지 않게 질투하는 링도 정말 귀여워서 좋아해.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자, 곧바로 내 손에 앵겨붙는 링. 


고양이처럼 고로롱거리며 행복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뜬금없이 아까 점심에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데몬을 케이크를 먹듯 갈아버리는 그녀가, 단순히 데몬 몇 마리 있다고 그런 표정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근데, 링. 아까 점심에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던 거야?” 


“응?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니, 그때 말고. 그 왜, 나 낚시 갔다 왔을 때 있잖아.” 


“아, 그때?” 



내 손에 얼굴을 비비다 말고 고개를 든 링이 피식 웃었다. 



“별 거 아냐. 그냥 사소한 속임수를 하나 눈치챘을 뿐.” 


“속임수?” 


“응. 뭐, 별 건 아니고. 나중에 이야기해줘도 될까?” 


“네가 그러고 싶다면 상관은 없는데.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급한 일, 있지. 아주아주 급한 일. 홍수를 앞두고 제방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뭐길래 그러지.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링이 부드럽게 밀어 침대로 넘어뜨렸다. 


홍조가 예쁘게 핀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내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댄 그녀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아까 점심때 분명히 말했었지? 계속해도 상관없지만, 그대를 위해서 잠시 참겠다고.” 


“...아하.” 



그러니까 제방 말고 만리장성을 쌓고 싶다는 거구나.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아니, 오히려 내 쪽에서 먼저 얘기하려고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그녀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아하고. 


요 며칠 새 몇십 번도 넘게 관계를 맺은 만큼. 


이제는 그녀의 향기만 살짝 맡아도 분신이 제멋대로 성을 낼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의 체중이, 부드러운 살결이, 따스한 체온이 내 온 몸을 내리누르고 있는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럼 내가 위에서 해도 돼?” 


“으응, 그것도 좋지만…오늘은 내가 움직이고 싶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묻자, 교태를 부리는 링. 


그러시다면야, 뭐. 


내 몸 위에서 허둥지둥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가는 링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 링. 


나는 네 거니까. 


슈가 이 대황성 사람들에게 해 줬듯, 나 또한 너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고. 


이 땅이 슈에게 준 것처럼, 네 감정에는 항상 진심으로 응해 줄 테니까. 


그런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나는 조심스레 내 바지를 벗기는 그녀의 손길을 음미할 뿐이었다. 



—---



BONUS. 좌락. 



링과 박사가 한창 서로를 탐하던 그때. 


문 틈새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 


과식으로 앓아누웠다가 겨우 회복한 좌락이었다. 


화장실 가는 길에 문득 문 틈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소리를 들었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왔다가. 


전혀 뜻밖의 광경을 마주한. 



“......” 



얼굴이 화끈해지고, 머리가 빙빙 돌며. 


천지신명이시여, 이게 도대체 무슨. 


그런 말이 입 안에서 몇 번이고 맴돌다가 사라지고. 


하반신이 아플 정도로 묵직해져, 바지를 압박한다. 



“앙, 그대, 여, 너무, 격렬, 해앳…!” 



평소의 유유자적하고 강인한 풍모는 내다 버린 채, 그저 달뜬 표정으로 박사의 사랑을 갈구하는 링. 



“나, 또, 또오, 갈 것, 같-” 


“뭐야, 먼저 유혹했으면서. 안 돼, 참아. 같이 가.” 



그리고 그런 그녀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박사.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더없이 음란하게 울려퍼지고. 


달큰하면서 뜨거운 살 냄새가 문틈 너머로 새어나와 코를 간지럽힌다. 



‘좌락,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다른 부부의 관계를 엿보다니…이거 추행죄라고.’



속에서 문득 양심의 소리가 들렸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풍경에 매료된 좌락은 그 소리를 음소거 해 버렸다. 


아무리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는 출세를 한 그였지만, 결국 십대 후반의 청소년. 


한창 이런 종류의 자극에 민감할 나이였다. 



“하앙, 앙, 흐응, 그, 대여-” 



혀를 빼문 링의 입에서 은빛 침이 똑 떨어지고. 


그런 그녀의 몸을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은 박사가,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인다. 


두 사람의 표정은 하나같이 열락에 젖어 녹아내린 상태였다. 



“...으.” 



그리고 그 천박하면서 매혹적인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좌락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앞서 말했듯, 그는 남자다. 


그리고 십대다. 


성욕이 왕성하며, 그 성욕을 해소하는 방법에도 정통한 종족이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좌락의 오른손은 당장 화장실로 뛰어가 나를 이용하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그의 눈이 이 자리에서 저 모습을 한 장면이라도 더 지켜봐야 한다고 아우성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좌락의 등 뒤에서. 



“좌락?” 



귀신이 나타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해맑은 슈였다. 



“...힉.” 


“뭐 하니? 몸은 좀 괜찮아?” 


“...일단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진짜 죄송합니다, 슈 씨. 진짜로 죄송해요. 제가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한순간에 형부 내외의 관계를 훔쳐본 몹쓸 놈이 되어 버린 좌락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돋은 좌락은 열심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애초에 그런 변명 따윈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음? 뭐야, 너 혼자만 좋은 구경 하고 있었어? 치사하게.” 


“...네?” 


“같이 봐, 같이.” 


“...?”


“이야, 언니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 


“으헤헤, 형부 몸은 또 왜 저렇게 좋은 거야.” 



자연스럽게 좌락의 얼굴 아래에 고개를 디밀고 히죽거리며 관음하는 슈. 


그런 그녀의 모습에, 좌락은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천지신명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