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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 신청했던 뮤엘시스 순애 소설. 


2. 캐릭터 매력은 충분히 이해했는데 아무리 이미지트레이닝을 해도 안꼴려서 야설은 못 썼다. 미안하다. 


3. 론트레일 이벤트 스토리 스포 있음. 해당 스토리 관람 예정이고 스포를 싫어하는 명붕이들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길 바랄게. 


4. 댓글은 항상 하나하나 읽고 있음. 많이 부족한 내 글 사랑해줘서 항상 고맙다.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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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좋은 아침이에요, 뮤엘시스 



한때, 그 무엇보다 평화로운 풍경을 보았어. 


바람을 속살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밝은 햇빛이 드리우는 숲 속. 


내 동족이 모여 살던 그 곳에서, 나는 항상 느지막이 잠에서 깨곤 했지.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가면, 한창 요리를 만들던 어머니가 잔소리를 늘어놓으셨어. 


얘는 곧 학교 갈 나인데, 저렇게 아침잠이 많아서 큰일이라는 둥. 


그래도 나 닮아서 머리는 좋으니 다행이라는 둥. 


듣는 둥 마는 둥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 신문을 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살풋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셨지. 



“좋은 아침, 뮤엘시스. 잘 잤니?” 



별 볼 일 없는, 흔한 가족의 아침이지. 


하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어. 


잔걱정은 많지만 항상 다정하고 든든했던 엄마. 


인자하고 상냥했던 아빠. 


그리고 가족이나 다름없던 친구들 덕분에, 외로움을 느낄 틈조차 없었으니까. 


요새도 가끔 그때 꿈을 꾼다니까, 히히.  



“......” 



그리고 동족의 멸망을 보았지. 


어느 날부터 마을에 퍼지기 시작한 광석병과.


온 몸이 검은 결정에 뒤덮인 채,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내지르던 내 동포들을. 


더 이상 언어를 이루지 못하는 아우성을 끊임없이 토해내면서도, 오로지 나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치던 내 소중한 가족들을. 


시커먼 피를 토해내는 어머니를 부축한 채, 나를 컬럼비아의 어느 고아원에 맡기던 아버지의 손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해. 


너만은 살아야 한다는 그분의 절박한 목소리가, 아직까지 내 귓가에서 메아리치고 있는걸. 



“......” 



또한, 그 아픈 기억조차 무뎌지게 할 만큼 눈부신 꿈을 보았지. 


문명, 사회, 언어, 예술, 고통, 과학. 그리고 삶. 


그 모든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전인미답의 발걸음을 내딛은 한 사람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어. 


아, 크리스틴. 


처음 너와 만나고, 네가 구상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 눈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호기심을 마주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가족을 잃은 고통을 잊을 수 있었어. 



“......” 



하늘을 날고 싶다. 


그 어떤 파울비스트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높이높이 날아서. 


인류를 가로막는 하늘의 차단막조차 돌파하고. 


그 너머에 있을, 무한한 별의 바다를 보고 싶다. 


오리지늄에 오염되지 않았을, 깨끗한 가능성의 세계를. 


내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건, 그런 네 이야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오리지늄이 없는 세계로 너와 함께 가고 싶다는 꿈을. 



“......”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너는 끝내 나를 밀어냈지. 


크리스틴. 


네 곁에 있었던 오랜 세월 동안, 나는 항상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인간성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해 가는 너를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라인 랩에 남았지. 


하지만 네가 나를 그 우주선에서 상냥하게 밀쳐낸 그 순간. 


나는 깨달았어. 


처음부터 너는 선구자였다는 걸.  


그리고 남들이 가는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렇게 너는 네가 싹틔워준 내 꿈만을 가지고, 저 별깍지 너머로 나아갔지. 


나를 홀로 남겨둔 채. 



“...나는.” 



지금에 와서는 기쁨도 슬픔도, 남들의 배 이상으로 맛보았다고 자신할 수 있어. 


적어도 누군가를 붙들고 밤새 인생 이야기를 떠들 수 있을 만큼은 되겠지.


크리스틴도 사리아도 이 부분은 부정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아, 하하.” 



라인 랩의 원로이자 창설 멤버? 

  

생태과 주임이자 유전공학의 천재? 

 

컬럼비아의 유일무이한 엘프? 


그런 허울 좋은 타이틀은, 지금의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외로, 워….” 



나는 그저, 친구에게 버려진 낙오자일 뿐이야. 


라인 랩에서도 가장 고립된 생태과의 무력한 주임이고. 


어느 세계에 가더라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외로운 단독종이지. 


크리스틴. 


너는 이런 내 처지를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걸까. 


이런 세상에 남겨지는 것보다 너와 함께 광활한 뭇별의 세계에서 단 둘이 죽어가는 편이 낫다는 내 생각을, 눈치채고 있긴 했던 걸까. 


너는 내게서 뭘 봤기에 나를 뒤로하고 혼자 가 버린 거야. 


모르겠어. 


나는, 너 같은 천재가 아니니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도 힘에 벅찬, 바보 엘프인걸. 



“...흑.” 



아, 이젠 고민할 시간도 없겠구나. 


내 몸을 구성하던 물이, 점점 응집력을 잃고 흩어져 가.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물도 흘릴 수 없어. 


괜찮아, 무섭지는 않아. 


그저 좀 오래 잠들 뿐이니까. 


그냥. 


외롭지 않았으면 했는데. 


다른 동족들처럼, 그저 무력하게 사라질 뿐인 운명일지라도. 


적어도 곁에 나를 이해해 주는 누군가 있어 주었으면 했는데. 


결국 내가 원했던 것들은, 끝까지 단 하나도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물탱크 안에서 눈을 감았어. 



“좋은 아침이에요, 뮤엘시스.”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아직 잠들기는 이르다고 부드럽게 일깨우는 듯한 음성이. 


꿈인가 싶어 조심스레 눈을 뜨자, 바이저 아래에서 어수룩하게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보였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 


“한참 찾았는데, 역시 여기 있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생태과부터 둘러볼걸 그랬어요.” 


“박사, 당신…!” 



꿈이라고 믿고 싶었어. 


그도 그럴 게, 나는 당신을 줄곧 마음 속에 품었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두 번 다시 당신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한 번, 당신을 배신하고 크리스틴을 택했었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여기에 서 있구나. 


뽀글뽀글, 당황한 내 입에서 무수한 물거품들이 솟아올라 물탱크를 뒤덮고. 


그 거품들만큼이나 많은 의문들이,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어. 


아무리 걸러내도 말이 깔끔하게 정리되지를 않아서, 한 마디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지. 


논리도 합리성도 체계도 전부 생략된, 원초적인 한 마디만을. 



“...왜?” 


“뭐가요?” 


“왜, 여기 있어?” 



그 의문에, 당신은 천진한 미소로 답했지. 



“배고파서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뮤엘시스. 우주선에서 밤 샜더니 위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아.” 



그 미소를 본 순간, 나는 또 한 번 깨달았어. 


이건 꿈이 아니구나. 


내 눈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 줬던 진짜 박사고.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결국 내게 남겨진 선택지는, 힘없이 웃으며 당신에게 사과하는 것 밖에 없었지. 



“...미안해, 배신해서.” 


“아니에요. 전 신경 안 써요.”  



그리고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는 당신에게.


한때 벗이었던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조언을 해 줄 뿐이었어. 


그게 당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크리스틴, 스텔라리아, ‘아크 1호’...전부 끝났어. 곧 이 일에 엮인 세력들이 몰려들겠지. 여기 있으면 당신도 귀찮아질 거야. 그러기 전에 트리마운츠를 떠나는 게 좋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요, 뮤엘시스.” 


“......” 



하지만 당신은, 친구 사이에 그런 예의는 필요 없다고 말하듯이 고개를 저었지. 



“같이 가기 싫다면, 이유라도 들려줘요.” 



그 말을 하는 당신의 눈빛에서, 나는 결의를 보았어. 


자신이 납득하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를. 


그래서였을까. 



“...이야기가 좀 길어질 텐데, 최대한 요약해서 말할게.” 


“길어도 괜찮아요. 전 기다릴 테니까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당신에게 내 과거를 털어놓았던 것은. 


동족의 죽음. 


크리스틴.


그리고 내 동족을 찾기 위해 사미로 떠났던 여정까지. 


홀로 걸어온 그 먼 길을 돌아보며, 나는 당신에게 내 외로움을 이야기했어. 


당신은 추임새 하나 없이 묵묵히 그 긴 이야기를 들었지. 


끝까지 나와 시선을 맞춘 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품이 되어 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 뿐이야.” 


“......” 


“나에게 그것들은 오리지늄 분진이 거의 없는 맑은 공기만큼이나 소중했는데. 그 덕분에, 내가…외롭지 않았는데.” 



알고 있었어. 


그때의 내가 질문을 던지는 입장이 아닌, 당신에게 답을 주어야 하는 위치였다는 것쯤은. 


그런데, 그때 당신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그 속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이해심을 발견한 순간.   


어떤 동질감의 발로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하고 애타는 감정을 본 순간. 


나는 그만 내 입장을 잊어버리고, 당신에게 해답을 갈구했지. 



“박사, 말해 줘. 만약 내가 태어날 때부터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면, 이 운명에 대한 발견과 반향이 결국 내 기댈 곳을 빼앗아간다면….” 


“......” 


“결국, 나는 영원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걸까.”  



그리고 당신은 대답을 주었어. 



“...저, 사실 있죠. 동포를 배웅하고 왔어요.” 


“동포…? 박사, 당신에게 동포가 있었어?”


“있더라구요.” 


“헤에, 그 사람은 당신과 닮았으려나. 당신과 같은 세상을 보고, 당신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은?” 


“모르겠어요. 사실…그는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길게 이야기도 못 했거든요.” 



힘없는 웃음과 함께. 


내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거울 속에서 수 없이 봤던 미소였어. 


그 미소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실험 성과보다 더욱 내 가슴을 들뜨게 하고. 


또 어떤 랭크우드 멜로 영화보다 아프게 내 가슴을 조여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지. 



“...당신도, 고독을 느끼는구나.”  


“가끔요.” 



당신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벽에 있는 스위치 중 하나를 눌렀어. 


내가 들어 있는 물탱크를 여는 스위치였지. 


기계음과 함께 유리 벽이 내려가고, 나를 품어 주던 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출렁거렸지만….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츠를 써, 그 물들을 붙잡았지. 


나가고 싶지 않았어.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는 세상으로. 


동족들과 크리스틴이 없는 내일을, 더 살아갈 용기가 없었던 거야. 


그냥 내 집이었던 이 생태관에서, 당신이 지켜봐 주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저 납득 못 했는데요.” 


“그거랑은 관계없어, 박사. 이제 떠나. 이 생태원은 곧 완전히 폐쇄될 거야. 다른 세력들에 의해서. 그럼 당신이….”  


“딱히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지. 


출렁, 당신이 내가 있는 물 속으로 몸을 담그고. 


물이 크게 뒤흔들렸지. 


도대체 왜야, 박사. 


나는 죽는 게 아니야, 그냥 좀 오래 잠들 뿐이야. 


들어오지 마. 


그러다 당신이 죽는단 말야. 


마음이 당황에 절여져 아우성을 지르는 와중에도, 내 머리는 당신이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아츠를 시동했지. 


그런 나를 보며, 당신이 입을 열었어.  



“크리스틴은 말했죠, ‘굿 나잇, 테라’. 떠난 그녀가 기억하는 테라는, 영원히 밤일 거예요.” 


“...박, 사.” 


“하지만 남겨진 저희는 어떤가요, 뮤엘시스. 저희에게도 이 세상은 외로운 밤일까요.” 



그래, 밤이야. 


지금까지 내 곁에 있던 모두가 떠나갔으니, 앞으로도 그렇겠지. 


이 이상 홀로 길을 걷기에, 나는 너무 지쳤어. 


그러니까 부탁할게, 박사. 


나를 내버려 둬. 


그런 고집스러운 외침이, 물 속에서 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었지. 



“전 아니길 바래요, 저희 둘 다에게요. 설령 당신이 그런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그러진 않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기포가 흩어지고, 내뻗어진 손의 온도가 내 주변의 물을 따스하게 데워 가.  



“어두운 밤도, 언젠가는 밝아 오기 마련이니까요.” 


“...그 말을 믿기에, 난 너무 오래 고독했는걸.” 


“고독은 때때로 힘이 된다고 누군가 말했죠.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 온 것도, 그 고독 덕분이었다고 전 생각해요. 외롭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 당신을 지탱해온 거예요.” 


“......” 


“하지만 고독은 강력한 원동력인 동시에 무거운 짐이잖아요. 이제 그만 그 짐을 내려놔요, 뮤엘시스. 그래도 괜찮아요.” 



버림받고 남겨져 절망하던 내 마음에, 당신의 말이 한 줄기 서광처럼 비추고. 


당신이 내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었지. 



“전 당신의 아침이 되어 주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이 제 아침이었으면 좋겠어요.” 


“...박, 사.” 


“같이 로도스로 가요. 전,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빛을 보았어. 


결코 꺼지지 않을 찬란한 빛을. 


메마르고 갈라진 나무 껍질을 촉촉히 적시듯, 내 마음에 스며드는 그 광채가. 


오래 쌓인 먼지처럼 짙게 내려앉은 외로움을 지워내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망설임을 부드럽게 흩어 갔어. 


그러고 나니, 비로소 알겠더라. 


크리스틴이 날 왜 홀로 남겨두고 갔는지. 


그녀는 믿었던 거야. 


설령 종족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며, 나아갈 길이 다르더라도. 


이 세상에 영원히 혼자인 사람 따위는 없으며. 


나조차도,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리라는 걸.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고마워, 박사.” 



출렁, 나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던 물이 터져나갔지. 


흠뻑 젖은 당신을 바라보는 내 눈시울이, 조금씩 뜨거워지고. 



“천만에요.” 



미처 내 아츠가 막아 주지 못한 탓에 삼킨 물을 뱉어내면서도, 환하게 웃는 당신의 미소가 너무도 찬란하게 보였어. 


마치 불을 바라보는 불나방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니까. 


그래, 당신은 불이었어. 



“그래서, 대답은요?” 


“응…갈게. 로도스로 갈게. 당신과 함께.” 


“고마워요.” 




아냐,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아. 


당신은 불 따위가 아냐. 


그 때의 당신은, 내게 있어 태양이었어. 


새벽의 어슴푸레함을 지우고, 별 하나 떠오르지 않은 밤을 물리치며 나를 맞이하러 나온. 


드디어 아침이 왔으니,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상냥하게 위로하는, 낮의 전령. 


그런 당신의 광휘에 홀린 나는, 한심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당신의 손을 잡았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 안 나.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때,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어 준 덕분에. 


나는 크리스틴이 바라던 대로 미래를 향해 걸어나갈 수 있게 됐다는 거. 


그것뿐이겠지. 



—---



그리고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어. 


박사의 손을 잡고 로도스로 온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지. 


컬럼비아와의 외교 문제나, 로도스 내부에서의 내 입지도 그렇고. 


하지만 박사와 켈시 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전부 극복했고, 지금은 동분서주 활약하는 중이야. 


뱅가드 오퍼레이터로서도, 그리고 박사의 비서로서도. 


지금도 밤새 박사의 곁에서 밀린 서류업무를 처리하다, 잠깐 바람 쐬러 갑판으로 나온 길이거든. 


이젠 내가 없으면 이 회사 안 돌아갈지도 모르겠는데. 


헤헤, 농담이야. 


하지만 박사는 내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하는걸. 



“뮤엘시스, 여기 있었네요. 한참 찾았잖아요.” 


“...아, 박사!” 



저거 봐, 자리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찾으러 나왔잖아. 



“미안미안, 잠깐 잠 좀 깨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오래 기다렸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보고 싶어서.” 


“...에헤헤, 박사는 밀당하는 법 좀 배워야겠다. 너무 당기기만 하니까 가끔 쑥스러워.” 


“몰라요, 그런 거. 알고 싶지도 않고요.”  



키득거린 박사는 이내 내 곁에 서서, 난간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기 시작했어. 


검푸른 수평선이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고. 


밤이 끝났다고 예고하듯, 하늘의 별자리들이 서쪽으로 넘어가지. 


예전에는 이 시간이 참 싫었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는 게. 


또 24시간 동안 깨어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는 게, 몸서리쳐질 만큼 두려웠거든. 


하지만 이제는, 하루 중에 이 시간이 가장 좋아. 


당신이 내 고독을 해소해 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당신의 아침이 되어, 당신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다는 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고 행복해. 


그런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당신이 씩 웃어. 



“...그러고 보니까 오늘이 며칠이었죠?” 


“응? 11월 3일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까 사일런스랑 이프리트가 오늘 저녁때쯤 로도스 놀러온대. 트리마운츠 사람들이랑 같이.” 


“그런가요? 뭐, 켈시가 알아서 하겠죠.” 


“그리고 오후에는 광석병 감염 폭발 억제 이론 관련 소회의 있으니까 잊으면 안 돼. 피곤할 텐데, 낮에라도 잠깐 자 두고.”   


“음, 글쎄요. 굳이 제가 참석해야 하나요? 광석병 이론은 다 까먹었는데. 저 그냥 땡땡이치고 뮤엘시스랑 놀래요.” 



형언할 수 없이 매력적인 당신이지만, 가끔 불성실한 데가 있다니까. 


그런 당신을 툭 치며, 나는 깔깔 웃어. 



“그럼 둘이서 영화나 보러 갈까?” 


“그것도 좋네요. 최근 랭크우드에서 개봉한 로맨스 신작 아시죠? 그게 평이 그렇게 좋다고 해서, 이미 표도 구해 놨어요.” 


“...엥? 진짜?” 


“그리고 저녁에는…음, 이 근처에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더라구요. 빅토리아 왕실 요리사 출신 쉐프가 경영하는 식당이라던가. 거기서 같이 밥 먹어요.” 


“...갑자기 왜 그래, 박사. 무섭게.” 


“당신이야말로 반응이 왜 그래요. 설마 오늘 무슨 날인지 까먹었어요?” 



그리고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 이건 단점이 아니라 매력인가?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당신은 이마를 탁 치며 한탄했어.   



“...아, 이런. 진짜. 뮤엘시스. 정신 좀 챙겨요.” 


“...나 뭐 잘못했어?” 


“진짜 화가 나려고 하네요. 왜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안 되겠다, 원래 저녁에 주려고 했는데.” 



이게 저번에 잡지에서 봤던 가스라이팅인가 뭔가 하는 걸까. 


나 잘못한 거 없는데. 


진짜로 열이 뻗친 듯한 당신의 태도에 괜히 기가 죽은 나를 앞에 두고, 당신은 열심히 주머니를 뒤지더니….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어. 



“자요. 받아요.” 


“이게 뭔데?” 


“열어 보면 알아요.” 



의아해하면서도 그 상자를 연 나는, 정말 깜짝 놀랐어. 


왜, 드라마나 영화 보면 여자들이 놀라서 호들갑스럽게 입 가리는 리액션 하잖아.  


난 그게 과장인 줄 알았거든. 


근데 그 상자 속 내용물을 보니, 나도 모르는 새 내 손이 입 가까이 가 있더라고. 


심장이 마구 뛰고, 쌀쌀한 바람 속에서도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지. 


그건 반지였어. 


순은으로 만들어진 테 가운데에, 반짝이는 아쿠아마린이 박힌. 


말을 잃은 나를 보며, 당신이 웃었어. 



“클로저한테 웃돈 얹어주고 구했어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요.” 


“...박, 사…이거, 설마.” 


“네, 뭐. 이제서야 생각났나 보네요.” 



그리고 당신의 등 뒤에서 동이 터 오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붉게, 그리고는 금빛으로, 조금 지나니까 새하얗게. 


그저 당신의 미소처럼 눈부시게 타오르는 태양이, 내 눈을 부시게 하고. 


당신의 한 마디 말이, 내 귀를 멀게 할 정도로 달콤하게 울려 퍼졌지.  



“생일 축하해요, 뮤엘시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었구나.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이걸 이렇게 챙겨 주다니, 기뻐. 


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위로 치솟고 가슴이 이렇게 콩닥콩닥 뛰는걸. 


하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것도 있긴 하네. 


내가 당신에게 이 반지와 함께 받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야. 



“...음, 뭐. 그리고 또 있어요.” 


“뭔데?” 


“...그, 저…뭐냐. 아, 이거 되게 쑥스럽네. 뭐지. 연습할 때는 잘 됐는데.” 



그런 나와 마찬가지로, 뭔가 2퍼센트 아쉬운 듯한 당신이 한참 동안 횡설수설했어. 


그렇게 그런 당신을 지켜본 지 몇 분.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당신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지. 



“...좋아해요, 뮤엘시스. 사귀어주세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이, 그저 동료가 아니라 내 동반자가 되는 날을 줄곧 꿈꿔 왔지.  


상상도 정말 많이 했는데. 


그때가 되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내 기분은 어떨까. 


지금, 내 기분은 정확히 내가 상상한 대로야. 


과거의 외로움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행복하기 그지없어. 


나를 좋아한다는 당신의 목소리만이 귓가에서 맴돌고, 심장박동을 통제할 수가 없어. 


금방이라도 내 몸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만큼 기뻐. 


그런데 당신의 반응은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른걸. 


늘 여유롭던 당신의 얼굴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가득해.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마음을 꺼내 놓은 부작용일까, 아니면 설마…내가 거절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런 흔치 않은 당신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어. 


아, 정말. 왜 그래, 당신.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런데도 구태여 말로 한 번 더 마음을 표현해 주었으면 하는 내 사소한 욕심까지도, 정말 잘 알고 있는 당신이잖아.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도 알고 있어야 되는 거 야냐? 


아, 아니면 당신도 내가 직접 말해줬으면 하는 건가? 


그럼 기꺼이 해 드려야지.



“응. 좋아. 나, 박사랑 사귈래.” 

“...정말요?” 


“진심이야. 나, 당신이 정말 좋은걸.”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뮤엘시스.”   



반응 좋고. 


당신이 어찌나 활짝 웃는지, 금방이라도 광대로 하늘을 날 것 같아. 


당신의 고백도 정말 기쁘지만, 오랜만에 당신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해. 


뭐,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야.



“그, 박사. 근데 고백 멘트 하나만 수정해서 다시 해 주면 안 돼?” 


“뭔데요?” 


“원래 이런 거 할 때는 수미상관이 중요하거든. 알지?” 


“...아하.” 



하지만 피드백이 빠른 것도 당신의 장점이지. 


헛기침을 한 당신이, 나를 향해 조심스레 웃어. 


라인 랩 생태과에서 만났던 그때처럼. 


당신이 나를 끝 없는 외로움 너머에서 찾아내 준 그 순간처럼. 



“앞으로도 쭉, 제가 당신의 아침이 되고 싶어요.” 



거기다 상황에 맞는 어레인지까지, 정말 완벽해. 


대답 대신, 나는 당신의 품으로 파고들었어. 


온 몸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오고. 


내 등에,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아. 


한없는 행복감과 함께, 나는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지. 



“...나도 그래, 박사. 정말 좋아해.” 



나는 혼자였어.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친해질 수 있었지만, 나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지. 


어떤 파티에 가도 쓸쓸했고, 아무리 끈끈한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마음 속 한 구석이 허전했어.


하지만 그런 내 눈 앞에, 당신이 나타났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를 이해한다 외치는 당신이. 


그런 당신이 있었기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고독을 잊을 수 있었던 거야. 


저기, 박사. 


그때 내 앞에 나타나 줘서, 정말 고마워. 


내 손을 잡아 줘서,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내 외로운 밤을 따뜻하게 깨워 주고, 내게 내일이 희망찰 수 있음을 가르쳐 줘서. 


정말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당신에게 그만큼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내가 보답을 할 차례겠지. 


그러니까 부탁할게, 당신. 


내가 당신 곁에서, 당신의 아침을 밝히게 해 줘. 


가능하다면, 평생. 


그런 내 마음에 대답하듯, 당신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어. 



“좋은 아침이에요, 뮤엘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