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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기어나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이벤트 '바벨' 및 14지 스토리에 대한 약간의 스포가 있으니 감안해 주길 바랄게.


1. 천장쳐서 언펙터 뽑고, 해산물들 모듈 달아주고, 오랜만에 링 1인클도 좀 해 보고, 사미 12승천 도장작도 하고 하다 보니까 연재 주기가 개박살이 났네...죄송합니노. 이제부터 다시 성실연재함. 


2. 이번 이야기는 링과 박사의 과거 이야기임. 작중 시점의 '박사'는 카즈델 내전에 참전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이며, '신인류'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으면서 아직 전쟁기계로 타락하지 않은 상태야.   


3. 링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유자적하고 자유로운 링이랑 좀 차이가 있어. 링 오퍼레이터 레코드나 상세 기록에 보면, 군에서 복무하기 전의 링은 지금의 링이랑 딴판이었다고 하거든.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군 복무 중이었던 링이 어떤 고뇌를 안고 있었고, 꿈에서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그 고뇌를 어떻게 해결했으며, 결국 박사에게 어떤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풀어 봤어. 


4. 약간의 외전 느낌이지만, 본편을 읽고 오지 않았으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거 참고 바랄게. 


5. 늘 읽어 주는 명붕이들 정말 고맙다. 소재 추천 피드백 댓글 개추 아카콘 전부 환영하니까, 내 글 읽고 드는 생각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줘.  


잡설이 길었네.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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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천년기, ????년 봄. 


??월 ??일, ??:??. 



눈을 뜨니, 낯선 사막에 누워 있었다. 


굴러다니는 회전초와, 바람이 쓸고 갈 때마다 푸스스 몸을 일으키는 모래. 


사막이면 옥문이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보이는 거라곤 모래와 별밖에 없는 곳이니까.  



“...여긴.”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무언가 달랐다. 


옥문의 사막은 황량했지만, 속에 활기를 숨기고 있었다. 


서역으로 가는 상인들의 발자국. 


강자를 찾아 세상을 유랑하는 무림인들의 땀방울. 


약재로 쓸 전갈을 잡으려 돌아다니는 약사들의 콧노래. 


군세를 이끌고 행군할 때마다, 굴러다니는 모래알 하나하나에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일 정도로.   


옥문의 사막은 길이었으며, 기회였고,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이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없이 넓고, 한없이 황량할 뿐. 



“...뭐 어때.” 



아무려면 어떤가. 


발 닿는 데까지 걸어다니다 널브러져 잠든 거든. 


그러다 이름 모를 이의 꿈 속에서 눈을 뜬 거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결국 꿈은 꿈, 눈을 뜨면 깨어나기 마련이니. 


술이나 더 마셔야지. 


그런 마음에 털썩 주저앉아 손가락을 튕기자, 손 안에 나무 호리병이 나타났다. 


잔도 필요없고, 상은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격식 차리고 싶은 기분도 아니야. 



“...크.” 



호리병을 입에 대고 들이키자, 달콤한 액체가 입 안을 감돌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처음에는 얼굴이 화끈해지고, 식도가 불이 난 듯 뜨거워지더니, 배가 따끈하게 덥혀졌다. 


이 맛은…좋아, 옥문의 열도자구나. 


좀 독하긴 하지만, 이 또한 나름의 풍류가 있지. 


결국 옥문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는 술이니까. 


오히려 이 외로운 사막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에는 더없이 적절하려나. 


똑, 술을 사막에 붓고 남은 것을 다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음, 맛있어. 


시를 한 수 쓰고 싶은데, 어디다가 쓰면 좋지? 


또 뭘로 쓰면 좋을까, 여기는 붓도 벼루도 없는데. 


설령 문방사우가 갖춰져 있다 쳐도, 모래 위에 쓰는 글씨만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꼬? 


어떤 명필이 한 획 한 획 심혈을 다해 그려내더라도, 대지의 변덕 한 번에 스러져버리고 말 거 아냐. 


으음, 그렇지만 무언가 써내고 싶은데. 



“...고민이 있는 표정이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다 쉬어버린 남성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묘한 행색의 남자가 거지꼴로 서 있었다. 


얼굴을 다 가리는 복면 비슷한 것에, 검은 코트와 제복.  


누구지. 


행색으로 보아 염국 쪽 사람은 아니고, 내 지인은 더더욱 아닌데. 


역시 꿈은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이 사람이 이 쓸쓸한 꿈의 주인일까. 


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어쨌든 눈 앞에는 술잔이 있으니까. 


혹시나 이 사람이 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상념을 지우고, 씩 웃으며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맞아. 시를 쓰고 싶은데, 여기는 붓도 벼루도 종이도 없어서 고민 중이었어.” 


“사막에다 쓰면 되지.” 



음? 


남자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조금 놀랐다. 



“아니,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보통 인간들은 이런 이야기 하면 미친년인가 하고 말던데. 


그런 내 의문에,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별로. 애초에 이 세상에 안 이상한 게 얼마나 된다고.” 


“...어머.” 


“그 이상한 것들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을. 구태여 이상하다고 여길 것도, 이상하다고 놀랄 것도 없지.” 


“아하하, 너도 이상한 사람이네.” 



뭐야, 그냥 희한한 복장의 걸인인 줄 알았더니. 


오랜만에 만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잖아. 


이런 상대라면 사막의 밤을 함께 지새울 만 하지. 



“마침 적적했는데, 잘 됐네. 좀 앉아 봐. 이야기나 하자.” 



그런 마음으로 내 옆의 땅을 탁탁 치자, 남자가 능청스레 되물었다. 



“맨입으로?”  


“그럴 리가. 여기, 좋은 술 한잔 대접할게.” 


“그러시다면야 기꺼이.” 



뭐야, 이런 미인이 이야기하자고 권하면 그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나보다 술이 더 좋다는 거야, 뭐야. 


문득 그렇게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을 참으며 호리병을 내밀자,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병나발을 불었다. 


한참을 들이킨 그는 입가를 닦으며 시원한 감탄을 토했다. 



“크, 좋다.” 


“좀 독한 술인데, 어때?” 


“오히려 이 정도가 딱 좋아. 목넘김도 확실하고. 달달하고 쌉쌀한 게, 속이 따뜻해지는걸. 북방의 유목민족이 혼비스트와 함께 추운 밤을 지샐 때 마시는 술이려나?” 


“비슷한데, 좀 틀렸어.” 


“잠깐, 말하지 말아 봐. 내가 한 번 맞춰 볼게.” 



벌써 술기운이 오르기라도 한 걸까. 


머리를 싸매는 남성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거,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네. 


술자리라면 발이 닳을 만큼 많이 가 봤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유쾌한 자리는 처음인걸. 



“어머, 그럴래? 도전하는 용기가 가상하니, 단서를 하나 주지. 들어 봐, 이 술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기분이 들뜨고, 흥이 오른다. 


그 때문이었을까. 


입에서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온 건. 


술 한 병에 모래 한 움큼을 털어내고. 


별빛을 벗 삼아 두 번째 잔을 채우네. 


벽돌집 왕 씨네 첫째는 사막이 데려갔고. 


만둣집 양 처사네 셋째는 악귀가 잡아갔으며. 


점 치는 장 선생네 여섯째는 눈 먼 칼날에 갔으니. 


천지가 망망한데, 함께 잔 기울일 벗조차 없음은 어쩐 일인고. 


짧은 생, 전부 끝났거늘 이제 와서 답을 구하겠는가. 


베갯머리에 검을 품고, 세 번째 잔을 기울이노라. 



“어때?” 



놀랐다. 


익숙해진 곡조를 흥얼거리는 내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옥문에 온 이후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노래는 정서를 담는 그릇이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경사가 있을 때도, 조사가 있을 때도. 


색색깔의 감정을 담아, 노래는 항상 울려퍼진다. 


그렇기에 나는 노래할 수 없었다. 


옥문에서 내가 품었던 감정은, 정서라고 부르기도 저어되는 검고 끈적한 번뇌가 전부였기 때문. 


그런데 오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 곡을 뽑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인정하지, 그때 나는 아무리 생각하도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없어 동요하고 있었다. 


일부러 더 호들갑스럽게 질문을 던졌던 건, 그 동요를 감추기 위해서였을지도. 



“알 것 같아? 아니면 영 모르겠어? 표정이 안 보이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 


“...너, 허술한 구석이 있구나? 아니면 취한 거야?” 


“음?” 



하지만 그런 얄팍한 속셈조차 간파했다는 듯, 남자는 피식 웃었다.  



“단서랍시고 답을 다 알려주면 어떡해. 재미없게.” 


“어? 내가 그랬어?”    


“응. 악귀가 잡아갔고, 칼날에 갔다는 구절만으로도 대충 감은 잡았어. 그리고 베갯머리에 칼을 품는다는 부분에서 확실히 알았지.” 


“...헤, 총명하구나. 풀이를 부탁해도 될까?” 


“그럼 한 잔 더 줘.” 


“거기다 영악하기까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이 사람아.” 



이런, 못 당하겠네. 


우리 둘째오빠가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젠 그냥 즐거운 걸 넘어서 어딘가 그리운 느낌까지 드는걸. 


그런 생각에 실없이 웃으며, 술병을 건넸다. 



“그럼 값도 치렀겠다, 어디 네 추리를 들어 보실까?” 


“음, 간단해. ‘악귀’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꽤 흔하게 노래에 쓰이지. 추상적인 의미로도, 좀 더 분명한 의미로도. 전자의 경우, 주로 동요 같은 데 쓰여. 예를 들면, 근처 산에 사나운 트리케라비스트가 살고 있을 경우. 아이들에게 그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저 산에 올라가면 악귀가 잡아간다’는 식으로 가사를 꾸며내지.” 


“흐응.” 


“하지만 이 노래는 동요가 아니잖아, 그렇지?”  


“맞아.” 


“그렇다면 후자라고 보는 게 맞아. 앞뒤 가사에 있는 ‘사막’과 ‘칼날’이 구체적인 위협인데, 중간에 혼자 ‘추상적인’ 악귀가 튀어나오는 건 좀 이상하잖아. 즉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을 ‘악귀’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게 아니라, ‘악귀’라는 이름을 가진 실질적인 적을 지칭하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칼. 칼에 맞아 죽는 사람은 흔하지만, 보통 살인을 노래에 끼워 넣지는 않지. 그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 별로 흥이 나는 주제도 아니고. 하지만 이 노래에는 ‘칼’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명예로운 살인’, 그러니까 결투가 일상화된 지방이거나, 아니면 전쟁이 빈번한 지역이거나.” 


“호오, 그래서 그대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몰랐다. 


그냥 빈객처럼 보이던 이 남자가, 노랫가락 한 소절만으로 내가 몸담은 옥문의 모습을 이렇게 세밀하게 그려낼 줄도. 


청산유수처럼 흐르는 말에 홀려, 어느새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 바뀐 것도. 


그저 신이 나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기에도 정신이 없었는걸. 



“뭐, 둘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난 둘 다라고 봐.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이래.” 


“듣고 있어.” 


“결투와 전쟁이 일상화된 지역이면서…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악귀’라는 적과 싸우는 곳. 생각나는 후보지는 몇 군데 있지만, 가장 유력한 건 염국의 옥문이겠네.” 


“...그대, 혹시 옥문 사람이야?” 


“아닌데. 염국 지리는 책으로만 익혔어. 그건 그렇고, 정답이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중간에 어색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남자가 만약 염국 사람이었다면, 좀 더 정밀한 과정을 통해 결론을 도출했겠지. 


하지만 복색도 말하는 것도 다른 나라 사람인 듯 하니까. 


외국인의 즉흥적인 추리치고는 충분히 훌륭하다. 


내 휘하의 문사들과 겨루어도 결코 밀리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좋아. 아직 녹슬지는 않았구만. 맞혔으니까 한 잔 더 줘.” 



그리고 신상필벌은 군문의 기본. 


능력을 입증했으니, 그에 따른 상을 요청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며, 손가락을 튕겼다. 


점점 비어 가던 병이 다시금 채워지고. 



“자. 이건 도매만양이라고, 염국 남방에서 마시는 술이야. 그대라면 이 술에 얽힌 이야기도 알아낼 수 있으려나?”  


“어우, 달다. 흠, 그래도 이건 좀 쉬운데.” 



또 다시 비었다. 


없어진 술은, 그대의 이야기가 되어 차디찬 사막의 밤을 수놓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후련해져 입꼬리가 올라간다. 


왜 이럴까. 


수천 년을 살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그네와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은 몇 번 없었는데.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눈 앞의 이 남자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술친구였다는 거.   


그 사실에 들떠서, 나도 모르게 계속 남자에게 술을 먹였다.  


열도자, 도매만양, 호송노주, 생향주, 해성영신. 


그렇게 염국의 이름난 술들을 전부 한 병씩 맛보고, 그 유래를 대부분 정확하게 읊은 뒤. 


남자는 그대로 사막 위로 엎어졌다. 



“...어우, 꿈에서도 취할 수가 있구나.” 


“음? 취했어?” 


“모르겠어. 알딸딸하네. 분위기에 취한 걸 수도 있고.” 



누구랑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거든. 


얼굴을 모래에 묻은 채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나와 비슷한 번뇌가 느껴졌던 탓일까. 


괜스레 쓴웃음이 나왔다. 



“후자겠지. 꿈 속의 술은 맛있지만, 사람을 취하게 만들지는 못해.” 


“글쎄. 꿈은 원래 비현실적인 거 아니야?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때때로는 저승 문턱처럼 오싹하고.”


“그렇지.” 


“내가 ‘마음 놓고 취할’수 있는 정취를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꿈에서 취해도 이상할 건 없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이건 또 재미있는 화두인걸. 


천 년의 꿈을 꿔 왔지만, 이런 방식으로 꿈에 대해 고찰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신경쓰였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야?” 


“갑자기?”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해? 나이는? 가족은 있어?” 



가슴 속에 샘이라도 품은 것처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끝도 없이 꺼내 드는 이 남자. 


느닷없는 질문 세례에, 고개를 든 그가 뒤통수를 긁으며 답했다. 



“...음, 카즈델이라고 있어. 일은…전략가. 나이는 나도 모르겠네. 가족은 없어.”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카즈델은 어디에 있는 나라고. 


가족은 처음부터 없었던 걸까, 아니면 불운한 사고로 잃은 걸까. 


의문이 들꿇었지만, 그런 것보다 더 유쾌한 화제는 얼마든지 있는걸.   



“헤, 전략가라. 나랑 여러모로 닮았네.”  


“너도 전략가야?” 


“비슷해. 객장이라고 해야 할까. 사정이 좀 있어서.” 


“그렇구나. 어쩐지 고민이 많아 보이더라니.” 


“응? 티 났어?” 


“내 얼굴 한 번 봐봐, 너도 바로 눈치챌걸.”   



그렇게 말하며, 그는 복면을 벗었다. 


달빛 아래 환히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런 의미였구나. 이해했어.” 


“그치?”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카락. 


수면부족으로 거뭇거뭇해지다 못해 퀭하기까지 한 눈두덩. 


바싹 말라붙은 입술까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시체로 착각할 법한 외모였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잿빛 눈동자. 


너무도 많은 것을 우겨넣으려다 산산조각난 항아리처럼, 텅 빈 눈이었다. 



“...내 피부가 안 좋다는 걸 그런 식으로 돌려까다니. 제법 용감하구나.” 


“너 인마….” 


“아하하, 장난이야.”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괴로워져서, 나도 모르게 하잘것없는 장난을 쳐 버렸다. 


피식 웃는 그를 따라 입꼬리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대가 본 나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구나. 


조금 전까지 잊어버리고 있던 고민거리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달처럼 고개를 내밀고. 


한없이 유쾌하기만 했던 마음이, 어느 전차에 묶여 있던 매듭처럼 복잡하게 꼬여 간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눈을 깜빡였다. 



“한번 털어놔봐.” 


“응? 뭘?” 


“네 고민. 술도 얻어먹었겠다, 상담해 줄게.” 


“...그대가, 나한테? 상담을?” 


“응.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 더 말하기 쉬운 고민도 있는 법이잖아.” 



이건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쉐이의 파편이다. 


내 스스로를 정의한 것도. 


시와 술을 벗삼아 세상을 향유하기로 결정한 것도. 


옥문의 군문에 들어, 사람들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도. 


전부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어떤 결단을 내릴 때 누군가의 조언을 구한 적조차 손에 꼽건만, 그런 내게 상담이라. 


뜻밖의 제안에 내가 얼어붙은 사이,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싫음 말고. 술이나 더 먹지 뭐.” 


“...전략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상담사였던 거야?” 



하지만 긴장이 풀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내가 상담 잘 한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응?” 


“나는 그냥 네 이야기를 들어 줄 뿐이야. 그리고 내 경험에 비추어서 몇 마디 조언을 해 줄 뿐이고. 사실 상담이랄 것도 못 돼.”  



푸훗.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그랬구나. 


처음부터 그런 거였어. 


거리낌없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시로 풀어내듯,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면 되는 거였는데. 


난 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고민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농담 아닌데.” 


“알아, 알아. 미안해. 그냥 심각하게 고민했던 내 자신이 우스워서.” 


“뭐, 그럴 수 있지. 그럼 어떻게 할래?” 


“응, 상담해 줘. 좀 무거운 내용인데, 괜찮지?” 


“알고 말 꺼낸 거야. 준비 됐으니까 편하게 말해. 술도 한 잔 더 주면 좋고.” 



그래, 그냥 가볍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제야 좀 속이 후련해진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술병을 건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옥문에서 큰 전투가 있었어.” 



줄곧 내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처럼 매달려 있던, 괴롭고도 사랑스러운 심상을. 



“상대는…아까 그대도 말했던 ‘악귀’. 우리 측 병력은 염국 정예군 수천. 그들 모두가 용사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중과부적이었어. 상대의 전력이 미지수였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의 등 뒤에는 지킬 것이 있었거든. 무언가를 수호하는 싸움에서 때로 병사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그것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 그 힘은 공포로 치환되니까. ” 



병사들의 가족들은 살기 위해 성에 숨었다. 


병사들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전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전투 하루 전, 저 멀리에서 구름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놈들을 본 순간…나는 눈치챘어. 저 놈들에게는 아무리 높고 견고한 성벽도, 단단한 요새도 소용없으리란 걸.” 


“응.” 


“그래서 나는 성을 버렸어.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병사들과 함께 근처 풀숲에 매복했지. 성에는 놈들을 유인하기 위해 불을 올리고 북을 칠 사람 몇 명만 남겼고.” 


“기습하려고 했구나. 좋은데.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기 몇 시간 전, 나는 병사들 앞에서 짧은 연설을 했어. 나는 선봉에서 너희들을 이끌 것이며, 적이 모두 쓰러지기 전까지 그 자리를 고수할 것이라고. 아마 너희가 내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만약 너희가 살아서 나를 다시 본다면, 나는 활짝 웃으면서 너희에게 술을 권할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강남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들쳐 업고 저승 너머로 날아가, 너희의 넋에 잔을 바치겠노라고.”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병사들이 지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거친 얼굴. 


조용한 웅성거림 속에 섞여 들리던 낯선 사투리. 


고향을 떠올리는 아련한 눈빛까지, 전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전투가 있었지.” 



그날 밤, 싸움이 끝난 뒤 그들의 반응까지도. 


일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삶을 울부짖었으며. 


일부는 환희 가득한 얼굴로 내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 대다수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잠들었다. 


내 등 뒤에서. 



“...그랬구나.” 


“내 손으로 그들의 눈을 감겼어. 관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가 직접 그들의 제를 지냈지. 전략가를 자처하는 그대라면,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목이 탔다. 


그가 시의적절하게 건넨 술병을 받아 털어 넣었지만, 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아마….


삼천세계의 모든 술을 들이키더라도 이 갈증은 가라앉지 않을 터. 



“난 있잖아, 그대여. 초탈하고자 했어. 흘러가는 세월과, 스러지는 생명. 그 모든 것에. 그럴 만큼 오래 살기도 했고.” 


“응.”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더라. 아무리 밤새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려도, 다음 날 아침이면…어김없이 떠오르는 떠나간 사람들의 모습이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어.”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기에 잊고자 했다. 


그러나 차마 잊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아팠다. 


내게는 그저 한 계절에 불과한 시간 동안, 무수히 피고 져 버렸던 생명의 이름. 


그 이름 하나하나가 이미 내 심장 깊은 곳에 박혀 버린 탓에,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뽑아낼 수 없었다. 



“전장에 서고, 무수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면 좀 덤덤해질까 했어. 그래서 옥문에 왔지. 하지만 나아지기는 커녕….” 


“더 심해졌다?” 



그래, 심해졌다. 


금군 병사 정호석, 방철, 서문평, 장만비, 공소오. 


군관 서산, 진영효, 안삼, 윤평휘, 주영, 민진. 


녹무관 장도석, 영일, 강재무, 진태호. 


문사 성칠, 자서문, 윤명, 홍서위. 


이름이 없었기에, 내가 손수 이름을 지어 준 이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 깃발 아래 들어와, 충의를 다해 싸운 이들. 


근 백 년 간 지켜본 수천의 죽음이 내 안에 새로이 아로새겨졌고. 


내가 기억하는 망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나를 괴롭히는 추억들 또한 더욱이 늘어날 뿐. 



“처음에는 울면서 밤을 샜어.”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보낸 밤이 며칠이며. 



“눈물이 마른 다음에는 술을 찾았지.” 



어떻게든 무감각해지고자 들이킨 술이 몇 동이인지,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천하의 술이 다 떨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그들에게 내준 채 살고 있으니까.”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무의미해져 가는 가운데, 오직 고통만이 선명하다. 



“......” 


“긴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마워. 내 고민은 이거야, 그대여.”   



그대 또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기에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마 내 문제를 해결할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대보다 세 자릿수를 넘는 해 동안 삶을 더 경험했을 내가, 그대에게 이 문제의 답을 구하는 건 부끄러운 일일 거야. 


그에 대한 답을 궁구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야.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건, 그저 한 순간의 봄꿈 같은 이해일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상실에 덤덤해질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떠나간 것들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이 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담아 던진 질문에. 


그대는 씁쓸하게 웃었더랬지. 



“...너, 되게 상냥한 사람이구나. 또 엄청 강하고.” 


“응?” 


“반대로 내가 묻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안 미치고 버틴 거야?”  


“......” 



뜻밖의 되물음에 내가 잠시 멍해진 사이.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보통 너 같은 상황이면, 지휘관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해. 내 졸개들은 죽을 만 해서 죽었다. 그러려고 입대한 놈들이다. 장기말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기사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하고.” 


“...하지만 난 그러기 싫은걸. 그럴 수도 없고.” 


“그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야.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지.” 



자연스레 내 손에서 텅 빈 술병을 가져간 그는, 그걸 입에 털어넣었다. 


내가 그랬듯. 


어차피 해갈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마시는 시늉만 하고, 병 뚜껑을 닫는다. 



“곁에서 사람이 죽는 건 끔찍한 일이야. 그 죽음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면 더더욱. 그 사람의 평소 말투, 자주 하던 버릇, 죽기 직전의 표정. 그런 것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손발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거든.” 


“알아.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그걸 몇백 번 동안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않고 버텨낸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못 봤어.” 


“누군데?” 


“테레시아라고 있어. 걔도 너처럼 엄청 착한 사람인데, 자기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지 않고 직시하는 강한 녀석이야.”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버티는 거야?” 


“버틴다…그래, 버틴다는 표현이 딱 맞네. 그 애는 미래를 봐.” 

 


미래를 본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좀 풀어서 말하면, 미래의 가능성을 믿는 거지. 언젠가 도래할 평화. 아침에 일어날 때 머리맡의 칼이 잘 있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없는 미래를.” 


“그건…대단한 신념이네.” 


“응. 그 미래에 방향을 고정한 채, 떨리는 손으로 차곡차곡 시체를 쌓는 거야. 목표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말만 들어도 알겠어. 


테레시아라는 사람, 정말 강인한 사람이구나. 


하지만 그대여, 그 방법은 나한테는 무리야.


다른 길이 있다면 부디 알려 줬으면 해. 



“...나는 그 사람처럼 할 수 없어. 길이길이 남겨야 할 법한 강한 신념도 없고. 내가 아는 방법은 현재를 즐기는 것 뿐인걸.” 


“알아.” 


“...그럼, 정말 내게는 불가능한 걸까? 나는 이대로 영원히 고통받는 수밖에 없을까?”  



이미 그 빛을 지켜본 그대라면, 또 다른 길도 알고 있을 터. 


제발, 내게 이 추억에서 해방될 방법을 알려 달라고. 


스스로 답을 찾아내겠다는 결의는 전부 내다 버리고, 애타는 목소리로 답을 구하는 내게. 


그대는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음, 그러면…뭐냐. 너, 아까 시 쓰고 싶다고 그랬지?” 


“...응.” 


“그럼 네 꼬리 잠깐 빌려줘 봐. 엄한 짓 안 할 테니까 안심하고.” 



…꼬리?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요구일까. 


긴 삶 동안, 내 몸을 원하는 무뢰한들은 많이 봤지만….


이런 유형은 처음인데. 


꼬리를 등 뒤로 감추며 눈을 가늘게 뜨는 내게,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 참, 설명하는데 필요하다니까 그러네.” 


“...진짜지?” 


“진짜니까 좀 믿어라....” 



그렇게 짜증낼 것까지는 없잖아….


살짝 기가 죽은 나는, 마지못해 꼬리를 슬쩍 내밀었다. 



“흣!” 



그리고 그의 거친 손이 내 꼬리 끝자락을 냅다 움켜쥐었다. 


까슬까슬한 피부의 감촉에, 온 몸의 털이 뻣뻣하게 서고. 


등골을 타고 기묘한 찌릿함이 내달린다. 



“...어, 예민한 데였어? 미안하다.” 


“아, 아냐. 실례했어.” 


“그럼 지금 생각나는 문자 하나만 말해 봐. 염국어든 사미어든 표의 문자면 아무거나 좋으니까.” 

 

“으…망, 잊을 망(忘).” 


“오케이.” 



내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사이, 그는 내 꼬리를 모래 위에다 슥슥 그어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꼬리 끝에 서늘한 모래를 흝는 감각이 전해져 오고. 


마음 심(心) 위에 망할 망(亡). 


좀 서툴기는 하지만, 보기에 썩 괜찮은 문자 하나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어때? 모래 위에 글을 써 봤어.” 



내 꼬리를 놓은 그가 나를 돌아보며 던진 물음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어떠냐니. 


그냥 모래 위에 쓴 잊을 망 자인데. 


몇 초 안 있어 바람에 지워져 모습을 감출.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내게, 그가 앓는소리와 함께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방금 저 모래 위에 글을 쓴 사람은 누구야?” 


“...그대.” 


“그럼, 그 글을 쓴 꼬리는 누구 거지?” 


“나.”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봐. 내가 운명이고, 네 꼬리가 곧 너. 그리고 저 모래 위에 쓴 글자는 네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그대가 곧 운명. 


꼬리가 나고. 


이 잊을 망 자가 내가 만난 사람들…. 


아. 


잠시, 설마…. 


 

“좀 알겠어?” 


“아니, 잠깐…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혹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듯 깨달음이 내달리고. 


눈 앞의 글자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를 향한다. 


이 남자가 내게 전하고자 하는 이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들었던 것. 


너무 많이 귀에 담았기에, 오히려 듣고 흘려 버렸던 것이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내게, 남자가 웃어 보였다. 



“나는 너처럼 오래 살지도 않았고, 너처럼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어. 하지만 삶과 죽음이라면 질릴 만큼 봤거든. 그냥 평화롭게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그 말과 함께, 남자가 손으로 잊을 망 자를 쓸어 없애 버렸다. 


순리에 따라, 바람이 이 문자를 쓸어 없애기까지 기다리기도 싫다는 듯. 



“이런 식으로, 불합리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도 수도 없이 많았지. 개중에는 나 하나 살리겠다고 안 죽어도 될 목숨을 내버린 분들도 계시고. 그럴 때마다 당황스럽고,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 

 

“...아.” 


“그럴 때마다 울면서 생각했어. 왜 이렇게 되어야 하지. 왜 나는 이다지도 무력할까. 몇 번이나 더 살아남아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 이야기를 할 때, 남자의 표정은 초연했다. 


이미 오래 전 극복해 버린 아픈 과거를 담담하게 회상하듯. 


그가 입으로 털어놓는 말보다, 그런 그의 표정이 더욱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내가 그렇게 질질 짜고만 있으면 나 살리겠다고 희생한 분들은 뭐가 되지?”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분들 위해서라도 살긴 살아야겠는데.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 분들 무덤 돌면서 순례라도 해? 아니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알량한 자기만족인데.” 


“......” 


“그럼 뭐, 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 그것도 좋겠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선택지고. 사람 한 명 살리겠다고 몸 무작정 내던지려고 보니까, 이미 내 발 아래 깔린 주검들이 너무 많아졌더라고.”    


“......” 


“그래서 정했지. 그 분들과의 좋은 기억을 끝까지 가져가기로. 그리고 그 분들이 하고자 했던 것들을 대신 이루기로.” 



목숨을 빚졌다. 


그렇기에 꿈을 대신 가슴에 품고. 


책임을 대신 짊어지며. 


떠나간 이들의 몫까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게 그대가 내린 결정일까. 



“그분들 생각하면 아직도 힘들어. 그분들의 유언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피 냄새가 코 끝에서 아련하게 풍겨와. 그래도 버텨야지 뭐, 어떡해. 나는 홀몸이 아닌데.” 


“......” 



테레시아라는 사람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 결단은 충분히 초인적인 선택이다. 


꿈도 없고, 대신 짊어질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는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대는 그런 내 생각을, 조금은 투박하게 부정했다. 



“너도 똑같아.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응?” 


“방금 내가 네 꼬리를 잡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지. 


그런 충격적인 경험은 살면서 몇 번 못 해 봤는걸. 



“그럼 사각거리며 흩어지는 모래의 감촉은? 한 획 한 획 그어나갈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전부, 기억해.” 


“바로 그거야. 모래 위에 쓴 글자는 사라지더라도, 그 글자를 쓸 때의 정서만큼은 네 안에 여전히 남아 있어.” 


“......” 


“그럼, 너는 그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까먹으면 그만이야? 어차피 모래에 날려 흩어질 감각이니까? 아니면 허망해해야 해? 큰 맘 먹고 꼬리까지 빌려 주면서 쓴 글인데, 그냥 없어져 버린 게 아쉬워서?” 


“아니.” 



아니, 아니다. 


그런 방식이어서는 안 돼. 


그건 잊혀진 이를 추억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야. 



“그대가 내 꼬리를 잡았을 때의 감각. 글을 써내려갈 때의 모래의 감촉…전부 추억이었어.” 


“그래.” 


“즐거웠어. 신선했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거야.”  

  

  

당연히 사람과 모래 위에 쓴 글자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가치도, 남기는 족적도 전자가 압도적으로 높으니까. 


하지만, 그의 비유는 소름 끼치리만치 적절했다. 


사람도 모래 위에 쓴 글씨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의미는 남는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일 뿐. 



“...즐거운 추억만 가지고. 슬픈 기억은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채.” 



내게 그 의미는 허망함이었으며, 또한 비할 바 없는 슬픔이었다. 


눈물과 술잔만이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지. 


그냥 아직 인간에 대해 너무나도 몰랐던 거다. 


천 년 넘게 그들의 곁에서 지냈는데도. 


충격에 빠진 내게, 그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난 네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건 단언할 수 있어. 그들 중에 자신들의 존재가 네 안에서 슬픔으로 기억되길 바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을 거야.” 


“......” 


“딸려 온 책임도 없고, 대신 짊어져야 할 꿈도 없지. 그럼 네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의 그 물음에 줄곧 내 머릿속을 들쑤시던 전장의 풍경이 흐릿해지며. 


대신 내게 충성을 맹세하던 병사들의 용맹한 얼굴이. 


원수님 덕분에 살았다며, 내게 고개를 조아리던 살아남은 이들의 눈물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고 시회를 열었던 때의 순간들이. 


비통함에 억눌려 있던 반짝이는 추억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린다. 



“...행복한 추억으로 남기는 거.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우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거.” 



그들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내 전우였고, 부하였으며, 함께 술잔을 기울인 벗이었다. 


전우는 서로를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관계다. 


부하는 상관을 존경하고, 항상 곁에서 보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벗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추억 위에 추억을 덧씌우는 존재다. 


그리고 내가 봐 온 인간들 중. 


자신이 죽은 후, 전우나 부하, 벗에게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대상으로 기억되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남겨진 이들이 자신을 떠올릴 때 웃길 바라며 삶을 마감했었다. 


아아, 나는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가. 


내 마음의 아집에 눈이 가리워져, 정작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정답이야.” 



그런 나를 보며, 그가 밝게 웃었다. 


그의 그 표정이 말하는 듯 했다. 


괜찮다고. 


죽음은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며, 너도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직 이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살아 있는 우리이기에.  


흘러간 이들을 아픈 기억이 아니라 추억으로서 마음 한 켠에 남겨둘 의무가 있다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그 사실을 깨우친 순간, 마음에 봄바람이 불고.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이제야 표정이 좀 밝아졌네.” 


“......” 


“좀 웃고 다녀. 노래도 잘 부르고, 성격도 유쾌하고, 얼굴도 예쁜데. 잘 웃고 다니기까지 하면 진짜 보는 사람이 행복해지겠다.”  



생각치도 못한 칭찬에, 가슴이 소심하게 콩닥거린다. 


사실, 말하고 싶었다. 


전부 그대 덕분이라고.


오랜만에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가슴에 얽힌 짐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시원하게 미소지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찰나의 꿈에서 그대와 마주치지 못했더라면, 결코 이루어내지 못했을 깨달음이라고. 


하지만 왜인지, 자꾸만 존재감을 과시하는 심장 박동이 그런 말을 방해했다. 


 

“...나 잘 웃어.” 



결국 나온 거라곤 한심하기 그지없는 반박이 전부. 


그 말에, 그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아무튼 마음은 좀 편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응. 고마워, 그대여.” 


“보자, 나는 슬슬 가야겠다. 동이 터 오는 모양이네.” 



그때, 그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를 보니, 정말로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조금 선선해진 마음에, 한 줄기 아쉬움이 스치고.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말을 꺼내 그대를 만류했다. 



“...가게?” 


“응.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슬슬 일어나야 돼. 너도 그렇지 않아?” 


“...그렇긴 한데.”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좀 더 이야기하고 싶고, 그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는데. 


그대를 그냥 하룻밤의 귀빈으로만 기억하기에는, 그대라는 존재가 너무 매혹적인 걸 어떡해. 


그런 마음에, 붙잡을까 고민했지만….



“...저기, 그대여. 괜찮다면 그대가 머무는 곳을 알려주지 않겠어?” 



이내 포기했다. 


조금 연장해 봤자, 어차피 이곳은 꿈 속. 


그리고 내 귀착점은 현실에 있는 바. 


귀빈을 다시 찾으려면 그곳에서 찾아야겠지. 


그런 생각에 조심스럽게 내민 말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나, 세 달 뒤면 복무가 끝나. 그래서 그때 한 번 찾아가려고.” 


“너 내 이름도 모르잖아. 나도 네 이름 모르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지. 


처음에는 피차 꿈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 정도로 남겨 두고 끝낼 생각이어서, 일부러 안 알려줬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그대를 놓고 싶지 않아. 


현실의 그대와 만나고, 그대와 더 친밀해지고 싶어. 



“...링. 난 링이라고 부르면 돼. 그대는?” 


“야, 통성명이 늦어도 너무 늦은 거 아니냐?” 



장난스럽게 투덜거린 그는, 이내 복면을 주워 들고 밝게 웃었다. 



“박사.” 


“박식한 선비…그대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고오맙다. 어…내가 사는 데는…이동도시 카즈델에서 바벨의 박사를 찾으면 돼.” 


“이동도시 카즈델, 바벨의 박사…꼭 찾아갈게.”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오면 술 한 잔 하자.” 


“...응, 약속이야.” 


“그래. 그럼 나중에 봐, 링.” 

 


가볍게 손을 흔든 그가, 이내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가볍게 걸어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나는 언제까지고 지켜볼 뿐이었다. 


가슴 앞에 손을 꼭 모아 쥔 채. 


새로이 가슴에 새겨진 그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덧칠하면서. 


 

“...박사, 또 봐.” 



그대여. 


참 이상한 일이야. 


나는 수천 년을 살아왔는데도, 아직까지 사람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정말 많아. 


무지는 시행착오고, 시행착오는 곧 절망을 낳지. 


나는 너무 오랫동안 절망하고 있었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에도, 그대에게 매달려 조언을 구했던 건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대는 그런 내게 나름대로의 답을 주었어. 

 

그 답이 내게도 그대로 적용될지. 


아니면 내 나름의 고심과 시도를 더 거쳐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 눈을 틔워 준 것에 대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고 있어. 


그런 그대에게 어떤 보은을 하면 좋을까. 


황제에게 하사받은 금과 은을 전부 그대의 발 앞에 내려놓고, 고개를 조아리면 될까. 


그도 아니면, 부족한 몸이나마 책사로서 평생 그대를 보좌하면 될까. 


그래도 그대의 은혜를 전부 갚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걸. 


봐, 아직도 이렇게 모르는 게 많잖아. 


당장 그대를 떠올리기만 해도 시작되는 수줍은 두근거림이. 


볼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온기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어.  


하지만, 그대여. 


두 가지만은, 확실하게 약속할게. 


나는 망자들을 기리는 내 나름의 방법을 찾을 거야. 


그 다음, 최선을 다해 이 감정의 정체를 알아낼게. 


그리고 그대를 다시 만나는 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할 거야.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으며. 


내 마음이, 그대를 이렇게 생각하노라고. 



—---


BONUS. 링과 박사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흐트러진 이불, 부드럽게 깜빡이는 전등. 


그리고 창문을 넘어와 전등 빛과 부드럽게 섞이는 노을.  

 


“...으음.” 



가볍게 상반신을 일으켜 눈꺼풀을 비비니, 흐릿하던 상이 깔끔해지고.


비로소 내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며. 


방금 전의 그 풍경은 꿈이었구나. 



“...아쉬워.”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묵은 고민이 풀리는 순간의 여운을, 인생에 몇 없는 귀인을 우연히 발견한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한 채 눈을 떠 버리다니. 


그러나. 


그런 마음을 털어 버리려, 술잔을 찾아 내뻗은 손에. 


따뜻하고 말캉한 그대의 볼이 잡힌 순간. 



“...으응, 링….” 



그런 잡념은 그야말로 봄의 햇살이 쌓인 눈을 녹이듯 사라져 버렸다. 


잠꼬대로 나를 찾으며, 몸을 뒤척이는 그대. 


그 모습에 괜히 장난기가 일어,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그대에게 고개를 숙인다. 



“...흐음, 어디 보자. 그때는 조금 더 말랐었던 것 같은데.” 



양 손으로 그대의 뺨을 눌러 보기도 하고. 



“아니, 조금 더 염세적인 인상이었나?” 



눈두덩을 콕콕 찌르며, 그 시절 그대의 모습을 재현해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스레 매만져도, 지금의 그대는 그대일 뿐. 


바벨의 박사를 자칭했던 그때의 그대와는 달라. 


내가 막 그 사실을 납득한 찰나. 

 


“...흐아아암.” 



그대가 긴 하품과 함께 눈을 떴지. 



“앗, 일어났어?” 


“응…좋은 아침, 아니 저녁이구나.” 


“후후. 사람이 눈을 뜨는 시간을 아침이라 하고, 집으로 돌아가 지친 몸을 누이는 시간을 저녁이라 하지.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시간은 저녁이자 아침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근데 링, 나 아까부터 얼굴이 계속 간질거리는데…병원 가 보는 게 나으려나.” 


“...미안해.” 


“뭐가?” 


“...사실, 잠든 그대의 얼굴에서 옛 친구의 모습이 엿보여서. 나도 모르게 쓰다듬다가….”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대. 



“옛 친구 누구?” 


“그대 자신.” 


“...음. 그렇구나.” 



그 말에, 그대의 얼굴에 난색이 어리고. 



“궁금해? 조금 들려줄까?” 


“아냐. 사양할게.” 


“그래? 아쉽네. 그 통쾌함을 그대와 나누고 싶었는데.” 


“글쎄. 그때의 나는 그냥 네 추억으로만 남겨 줘.” 



뒤이은 너무도 그대다운 답변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내게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알려준 그대가,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렸구나.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걸. 



“그대가 그걸 원한다면야.” 


“고마워. 난 지금 내가 좋거든.” 


“응. 나도 그래.” 



속삭이며 그대의 품에 얼굴을 묻자, 따스한 온기가 뺨을 통해 전해져 오고.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대의 손길이 느껴져. 


있지, 박사. 


난 그때의 그대가 좋았어. 


염세적이면서도 유쾌하고, 답을 구했던 내게 스스럼없이 해결책을 건넸던 그대가. 


그래서 망각에 몸을 맡기고, 세월에 모든 것을 떠내려보낸 그대와 재회했을 때 조금 실망했었지.



“...그대여.” 


“응?” 



하지만 이제는 알아. 


카즈델의 박사라고 불리던 그대도, 내 부군을 자칭하는 지금의 그대도. 


전부 내가 사랑하는 박사라는 걸. 


둘 모두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어느 하나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그대여. 


그대가 그때의 박사가 아니더라도. 


미처 그대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이 마음을, 지금이라도 이야기하게 해 줘.  



“사랑해. 링은, 그대를 사랑해.” 



말을 고르고 고르다 간신히 털어놓은 수줍은 고백. 


그 말을 들은 그대는, 말없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대여?” 


“고마워. 나도 사랑해, 링. 그래도 그렇게 서글픈 표정 지으면서 말하지 말아줘.” 


“...응.” 


“옛날의 나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네게 아픈 기억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저런, 나도 모르게 회한을 얼굴에 담고 있었던 걸까.  


뭐, 이젠 아무래도 좋아. 


귓가를 부드러이 쓰다듬는 그대의 말에, 그 한 줌 회한마저 전부 날아가 버렸으니까.


응, 조금 안심했어. 


역시 아무리 바람에 깎여나가고 초목과 빗물에 뒤덮여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구나. 


기억을 잃고, 나와 함께한 추억을 떨어트리고, 스스로가 누군지조차 잊어버렸어도. 


그대는 여전히 내가 마음에 품었던 그 사람이구나.


염국어가 조금 서툴러진 것만 빼면. 


나는 입꼬리를 조금 올리며 그대와 눈을 맞추었다. 



“...그대여.” 


“응?” 



나 혼자만의 선문답은 이제 됐어. 


변함없는 그대의 한 마디가, 나를 납득시켰으니까. 


마음이 가벼워지고, 흉중에 품은 고민들이 깨끗이 쓸려나가 후련해지네. 


그렇다면 남은 건, 천지를 가득 채워 넘칠 듯 찰랑거리는 술잔뿐이겠지.   


옛날에는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대를 더 느끼고 싶어.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한번 더, 할래?” 


“...아이고.” 



그런 욕심을 담아 꺼낸 말에, 그대가 곤란하다는 듯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