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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게 젖은 내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찌푸린 눈살 사이로 물방울이 스며드는 게 보여서, 무심코 혀를 찼다.

저녁 식사를 겸하는 미팅은 30분만에 끝났다. 말이 식사지, 두 여자 사이에서 차갑고 살벌한 기류가 흘러서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속이 쓰려서 히비스커스가 건넨 소화제가 시급한 심정이다. 

또 나가면 무슨 말싸움을 하고 있을까. 가게 물품을 던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몇 년 전까지도 의자를 집어 던지던 두 사람인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근심을 얼굴의 수분과 함께 수건으로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와 원래 있던 자리로 갔다.

"엥?"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 사람 다 자리를 이미 뜬 상태였다. 설마 할 이야기 끝났다고 먼저 가버린 건가?

"아저씨. 아저씨!"

기분이 팍 상하려는 찰나, 왼쪽 아래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이제 10대에 접어든 거 같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활기차게 뛰어놀았다는 증거인 건강한 탄 피부. 갈색 머리와 갈색 눈. 필라인 여자아이와 페로 남자아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브라이오피타가 몇 번 언급했던, 피가 안 이어진 동생들이다.

"아저씨. 아저씨가 에니스가 다니는 회사 사장님이야?"
"사장...은 아니고, 사장 바로 아래라 보면 되려나?"

일단은 나도 나름 수뇌부이기도 하고, 사장인 아미야가 작전 중엔 내 지휘하에 있다. 상황에 따라서 상하관계가 바뀌는 셈이다. 우리 사이에 직급을 나누는 게 사실상 의미 없는 게 함정이지만. 아,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디보자...분명 리브랑 루트였지? 브라이오... 에니스한테 자주 들었어."
"나도! 에니스가 착하고 재밌는 분이라고 했거든!"
"하하. 그래? 그래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니?"

나의 질문에 브라이오피타의 남동생, 루트가 손가락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

"방금 아저씨 친구들이 밖으로 나갔어. 할 말이 있다면서 머리 검은 누나가 금발 누나를 데려가던데?"
"할 말이...?"

퍽이나 할 말이 있는 걸로 끝내겠다. 한숨을 푹 쉬었다. 분명 근처 골목에서 또 치고받고 싸우고 있겠지. 그래도 놀러 왔다고 가게 주인분을 배려해 준 건가. 어찌 되었든 가서 말리는 게 좋겠지.

"알려줘서 고마워. 어머니 바쁘신 거 같은데 먼저 실례한다고 전해줄 수 있겠니?"
"응. 아저씨도 조심해!"

조심하라고? 나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거라고 생각한건가? 무심코 피식 웃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양손으로 쓰다듬어주고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가게를 나오니 하늘이 남색의 물감으로 물들여진 게 보였다. 거리에 은은한 발라드곡들이 들리기 시작했고, 낮에 그리 많았던 사람들도 휴식을 취하러 간 건지 수가 꽤 줄었다.

"어디 가서 쌈박질을 하고 있으려나..."

일단 인적이 드문 곳이겠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물리적으로 싸울 두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 카운터 계산을 안 했으니 멀리까지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제일 가능성 있는 건 주변에 있는 골목길이겠군.

간략한 추리를 끝마치고 걷기 시작하려는 그때, 익숙한 염국어가 내 귀를 스쳤다. 설마 가게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을 줄이야. 한숨을 푹 쉬며 방향을 틀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차갑고 신랄한 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일한 지도 몇 년째인데, 순간 등을 피게 만드는 저 위압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너, 대체 왜 박사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지?"

모퉁이 앞을 돌려는 순간, 입이고 몸이고 꽁꽁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철사가 발등이랑 혀에 꽂힌 것처럼. 마치 둘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싶은 것처럼. 

싸우는 거 그만하라고 말려야 하는데. 이성은 안절부절 걱정하고 있지만, 호기심이 덧칠된 본능은 날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벽에 몸을 밀착하게 만들었다.

"내가 몇 번을 말해. 박사의 지휘랑 전술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다행히 내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날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걸까? 모퉁이 너머에서 스와이어의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답해주마. 고작 전체 인원이 세 명이다. 그리고 셋 다 전장 여러 곳을 누린 베테랑이지. 그 누구도 다른 누구의 지휘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어."

범인을 심문하는 것처럼, 첸의 살벌한 반박이 들려왔다. 조금 전에도 품었던, 그 의문점이었다.

"더 쉽게 말해서, 넌 '의도적으로' 박사에게 접근했다는 거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땅이 꺼질 정도의 한숨이 골목길을 울렸다. 순간 발소리가 들려 흠칫했지만, 다행히도 이쪽을 향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골목길에서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거 같다.

3초쯤 지났을까. 발소리가 멈추고, 첸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헤어져 놓고서, 뻔뻔하게 돌아와서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어? "

그리고 그 말에, 심장이 뚝 끊기고 땅에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그 주제가 다시 수면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로도스와 협업하는 거랑, 내 개인사는 별개지. 난 엄연히 비즈니스를 위해 온 거야. 사적인 감정은 넣지 않았어."
"퍽이나 그러시겠지. 위대하신 용문 근위국장 스 아가씨."

엄연히 비즈니스? 사적인 감정이 안 들어갔다고?

ㅡ대체 어딜 봐서? 

전혀 설득력이 없는 발언에 헛웃음마저 나올 뻔했다. 조금 전 첸이 한 말을 잊기라도 한건가? 마침 첸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서 대리만족 비슷한 걸 해서 망정이었지, 내 앞에서 했으면 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넌 하나도 안 변하는구나."
"뭐?"
"이타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독선적이고, 계산적이고, 이기적. 그게 네 본성이라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가 마음을 다 정리했다고, 박사도 다 정리했다고 멋대로 정하고 접근했을 너의 얄팍한 생각이 웃기다는 거다."

첸이 거칠게 던진 말에 그럴 리 없다고, 무심코 내뱉을 뻔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들켜선 안 된다는 이유도 있어서겠지만, 마음속에 싹트고 있던 의심 역시 성장 촉진제를 주입한 식물처럼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해서였다.

"네가 떠나고 나서 박사가 어땠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나?" 
"...그건..."
"모르겠지. 아니. 넌 알려 하지도 않았겠지. 넌 그저, '이렇게 해야 서로 손해 보지 않고 끝난다'고 생각해서 결별을 통보한 거잖아."

순간, 그때의 일이 떠올라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남겨질 정도로.

[이쯤에서 끝내자. 우리의 관계.]
[잘 있어. 박사.]

아무 사정 설명 없이 내던진, 두 마디의 결별 선언. 

"난 네가 떠나버린 이후의 박사를 봐왔어. 그 녀석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리고 그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넌 모를 거다."

기도에 이물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내 심장을 꽉 쥐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벽에 분명 몸을 기대고 있음에도 허공에 멍하니 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결별 선언을 한 것도 일종의 계산이었나? 로도스의 운영에 막심한 타격이라도 주고 싶은 거였어?"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는 용문의 딸이야. 박사. 행동 하나하나가 용문을 향한 이득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지.]

내 의심이 만든 환청인지, 진짜로 첸이 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켈시가 나에게 던진 언변이랑 겹치며 내 귀를 스쳤다.

"아니면, 네가 그토록 찾던 박사의 '용문을 위한 이용 가치'가 사라지기라도 한 건가?"

[과연 순수한 본심이라 생각해? 그런 교활한 여자가 너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것이.]

ㅡ그만.

"그렇다면, 애초에 박사와 교제도 전부 계획대로인 거였나? 용문의 이득을 위해서. 그리고 너의 계획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타입의 사람은 언제나 행동과 언변에 진심을 숨겨놓지. 특히 뒤쪽 싸움이 많은 재벌가의 사람이라면 말이야.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도 예외는 아니야.]

ㅡ제발 그만해. 

"정말로 그걸 목적으로 박사를 몇 년간 속여온 거라면, 난 너를 진심으로 경멸할 거다. 베아트릭스 스와이어."

[혹은 로도스를 독과점하여 용문 산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뇌부와 스와이어 가문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박사 너와의 관계를 구실로 말이야.]

더 이상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난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양발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마치 중력이 변한 것처럼, 거리에 발을 딛으니 가속이 붙었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지를 박차고 있는 힘껏 뛰었다.

뇌리를 스치는 기억으로부터 피하고 싶어서.

그녀가 대답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아서.

이 상황 전체를, 부정하고 싶어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미치광이처럼, 밤의 길거리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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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되서 드디어 글 써오는 휴가중인 뱃사람 명붕이. 드디어 비비아나 눈나 이벤트다. 시간 ㄹㅇ 핵빠르네.


왜 늦었냐면 건강검진 받느라 늦음. 하선한 이유가 건강 문제였거든... 검사 결과 나왔는데 지방간에 식도염에 위염에 췌장염까지 있드라고... 약 처방 받고 쉬는 중이다.


그래도 연재는 해야지. 슬슬 클라이맥스 부분 가고 있다. 다음 화 기대해주면 고맙겠음.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