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모음: https://arca.live/b/arknights/103156508?p=1


언펙터 소설 모음: 


https://arca.live/b/arknights/104280691?p=1 (1화) 


https://arca.live/b/arknights/104280841?p=1 (2화) 


https://arca.live/b/arknights/104280905?p=1 (3화, 야설) 



누군가가 신청했던 글래디아 야설.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린 만큼 정말 공 많이 들였고, 내용에 변주도 좀 주고 하다 보니까 6화짜리 괴물이 튀어나왔네. 


근데 퀄리티가 받쳐줄지는 모르겠어. 


최근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한 글에 집중을 잘 못하고 있거든.


이를테면 티격태격하면서 같이 동인지 그리는 찐따 박사랑 시라던가. 


제이와 로사의 심야식당 이야기라던가, 구백이 키잡하는 총웨라던가, 머드락이랑 어린이날 이벤트 준비하는 박사라던가, PTSD 치유순애하는 퍼퓨머랑 불게이라던가.  


소재는 넘쳐나는데 쓸 시간이 없어서 고민이 많아.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썼으니까 예쁘게 봐 주면 고맙겠다. 


야는 6화에만 있으니까, 그런 걸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부탁해. 


그리고 예전에 썼던 언펙터 야설이랑 내용 이어지는 부분이 적잖이 있으니까, 스토리 이해를 원하는 사람들은 한 번 읽어 보는 걸 권장할게. 


소재 추천, 피드백, 댓글, 아카콘 모두모두 환영해.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


꿈을 꾸었다. 


고요한 바다에 잔물결이 일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드리웠다. 저 멀리에서 어렴풋이 천둥소리가 들려 오는 걸 보니, 한바탕 폭풍우라도 몰아칠 것 같았다. 


한창 낚시를 하다 말고, 급하게 회항 준비를 하는 뱃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린다. 


애처롭기까지 한 그들의 목소리에, 소드피쉬는 코웃음을 쳤다. 


바다는 잔인하며, 또한 변덕스럽다. 한없이 인자하게 만물을 품고, 정성스레 키워 온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다가도. 때로는 수면 위를 거니는 모든 것을 움켜쥐어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학살자로 변모한다. 


하지만 소드피쉬는 바다가 두렵지 않았다. 


바다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면, 린수들과 함께 바닷속으로 헤엄쳐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물이 푸른색을 잃고, 빛의 흔적이 소멸하는 심해. 에기르의 영광이 진가를 드러내는, 그 곳으로. 



“바다의 그르렁거림도, 에기르의 번영을 위협하지는 못하리라.” 



린수들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들어서자, 파란 불빛이 그녀의 눈을 간지럽혔다. 


튼튼한 용골과, 그 못지않게 단단한 유리 차단막. 그리고 그 내부에서 활기를 내뿜는 도시의 전경. 어쩐지 그리움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 소드피쉬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무수한 천재들이 모든 기술력을 끌어모아 해저에 창조한 기적, 에기르. 심해의 흑암을 비추는 등불이자, 울부짖는 파도를 능멸하는 과학의 산물. 


에기르인이라면 누구나 그 도시에 자긍심을 품곤 했고, 그것은 소드피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한때 길을 잃었던 자신에게 존재 의의를 준 곳. 


그 사랑스러운 에기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 일이 한 걸음 내딛기도 어려운 심해의 밑바닥에서, 오로지 번식과 진화만을 탐하는 시테러를 상대하는 일일지라도. 이 도시의 번영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도 상관없다고. 


소드피쉬는 진심으로 믿었다. 



“...아.” 



하지만 그 각오를 비웃듯이. 그녀의 눈 앞에서, 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깊은 바다를 호령할 듯하던 에기르의 불빛이, 한 순간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불안하게 깜빡이고. 심연에서 몸을 일으킨 바다의 첫 번째 자손이, 그저 고요히 그 광경을 바라본다. 


도시가 스스로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듯. 



“...안, 돼.” 



섬찟함에 몸서리치는 것도 잠시, 소드피쉬는 이내 죽음을 각오했다. 


그녀는 사냥꾼이다. 오로지 에기르의 적들을 찢어발기기 위한 존재란 말이다. 이런 위기에서 도시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이유 아니던가. 


이를 악물며, 그녀는 작살을 치켜들었다. 


아니, 치켜들려고 했다. 



“...크윽.”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훨씬 더 깊은 곳의 수압도 너끈히 견뎌내던 육체인데. 마치 육신이 뇌의 통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마비된 그녀의 손에서, 작살이 떨어져. 깊고 깊은 해구 아래로 가라앉고. 그와 함께, 도시의 불빛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소드피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피가 마르는 듯한 심정으로 에기르가 고요함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관망하는 것 뿐. 



[글래-디아] 



그녀의 이름을 부른 퍼스트본이 조소하고. 


에기르의 광채가 완전히 빛을 잃는다. 


남은 것은, 태초에 심해를 지배했던 어둠 뿐. 



[에기르는 어디로 가니] 



그 흑암 속에서 들려오는 노랫가락에, 소드피쉬는 절규했다.  


닥쳐, 괴물. 


내 도시에서 더러운 손 떼라. 


손 대지 말란 말이다. 


에기르는 우리 모두의 이정표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하지만 말이 되지 못한 외침은 퍼스트본을 물러서게 하기는커녕, 기껏해야 기포 몇 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너는 어디로 가니] 



그리고, 퍼스트본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그녀가 보았던 그 어떤 어둠보다 더 짙고 차가운 심연이, 천천히 에기르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쿠르릉, 도시를 단단히 지탱해 왔던 용골이 무너지며. 


카챵, 오랜 시간 에기르를 보호하던 차단막이 속절없이 깨져나간다. 


퍼스트본의 만찬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듯, 해저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우는 해류가 몸을 일으켜, 소드피쉬의 몸을 거칠게 수면으로 밀어 올린다. 


저항하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에게 허락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도. 



[그래서는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단다] 



파도에 휩쓸린 봉제인형처럼 정신없이 흔들리며 부상하는 소드피쉬.  


희미한 비명 소리 수십 가닥이 모여, 그녀의 고막을 뒤흔들고. 해저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라오는 피거품이 그녀의 뺨을 두드린다. 


시각, 청각, 촉각. 


어째서인지 멀쩡히 기능하는 그녀의 감각에 잡히는 모든 요소가, 희롱하듯 소드피쉬를 지나치며 그녀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절망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해야 공허한 희망을 되뇌이는 것 뿐.  


나를 살려 둔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글래디아, 에기르 기술집정관이자 어비설 헌터즈 2대대 대장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에기르는 무너지지 않아. 


내가 다시 돌아올 때, 네놈은 에기르의 영광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는 낙관적인 미래를, 경전 읊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머리 위로.


일렁거리는 희미한 빛이 급격히 가까워지고. 



[일어나렴, 글래-디아]  



감미로운 퍼스트본의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헉!” 


글래디아의 의식이 각성했다. 

 

땀에 젖은 축축한 잠옷. 


소독용 알코올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불쾌한 공기.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중천에 뜬 태양. 


뇌리에서 선명히 맴도는 악몽의 잔향.  


육지의 점심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늦잠을 자 버렸지만, 지금 글래디아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아.” 

 


그녀가 이 땅에 내던져진 지 벌써 몇 달째. 


아직도 그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지느러미를 다친 한 마리 린수처럼, 물결에 떠밀려 이리저리 표류할 뿐. 


에기르는 어디로 가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꿈 속에서 퍼스트본이 던졌던 의문을 가만히 곱씹던 그녀는, 이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점심, 먹어야겠다.” 



그래,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건 품위와 교양을 두루 갖춘 에기르인들이 아니고.


그녀가 몸담는 싸움 또한 도시를 지키는 숭고한 전투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머리를 비우고 그냥 파도에 따라 헤엄치자. 


언젠가는, 반드시 에기르로 돌아가게 될 테니. 


그렇게 글래디아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서려 할 때. 



“...글래디아, 있나?”



노크 소리와 함께, 건조한 음성이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예,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켈시.” 


“너희 애가 사고쳐서, 사후처리를 부탁하려고 왔다.” 


“상어가요?” 


“그래. 우리 인원 스물세 명을 쥐어패서 피떡으로 만들었더군. 오늘은 박사도 같이 데려왔다. 니가 알아서 혼내라.” 


“...알겠습니다.” 


“그래.” 



문이 벌컥 열리고, 양 팔에 사람 한 명씩을 매단 검녹색 괴물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글래디아의 부하 로렌티나였고. 


나머지 한 명은 박사였다. 


두 사람을 그대로 방 안으로 집어던진 괴물은 콧김을 뿜으며 그대로 사라졌다. 



“박사님, 박사님. 아이 이름은 뭘로 할까요?” 


“...지우라고.” 


“네? 박사님 정관을 깔끔하게 지워 달라고요?” 


“착상도 안 됐다매. 임테기 한 줄 떴다면서.” 


“푸헤헤헤헤! 박사님, 뭔가 잊어버리셨군요! 상어는 자궁이 두 개니까 임테기도 두 개, 각각 한 줄씩! 합쳐서 두 줄이랍니다!” 


“코이츠 임테기 줄이 2의 배수로 불어나는wwwwww” 



글래디아는 안중에도 없이, 사이좋게 미친 소리를 하는 박사와 로렌티나를 보며, 글래디아는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이 정신나간 대화를 잠깐 듣는 것만으로 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보였다. 


켈시, 미안합니다. 


아마 당신은 제가 이 두 사람을 훈육해서 정신 차리게 하기를 바랬겠죠. 


하지만 훈육이라는 건 말이 통하는 상대에게만 가능한 거예요. 


광기는 사람의 사고회로를 마비시키고, 통용되는 언어체계를 무용지물로 만들죠. 



“아니, 애초에 그만큼 쌌는데 임신이 안 됐다는 게 말이 돼요?”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내 정자에 하자가 있나? 아니면 니 자궁이 두 개라 정자도 두 배로 필요하거나.” 


“말씀 들으니까 갑자기 사정 5000번만큼 화나네요. 박사님 정자가 불임일 수도 있다니, 이렇게 아까운 일이. 당장 죽을 때까지 해서 확인해보죠.” 


“스펙터나 할 법한 소리인wwwwww” 


“쥬지 마려운wwwwww”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광기는 서로에게 공명하며 주변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주고받을 때마다, 듣고 있는 제 정신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켈시.


당신이 먼저 저희를 존중해 주셨으니, 명예로운 에기르인으로서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상어, 박사님. 조용히 좀 해 주시겠습니까.” 


“대장이 조용히 하세요! 박사님이 무정자증이면 에기르의 재건은 고사하고 박사님과 사리아 씨의 결혼생활이 파탄난다고요!” 



*에기르 욕설*때려치워. 


기껏 유지해 왔던 에기르의 품위를 면전에서 짓밟는 둘의 모습에, 꾹꾹 눌러담아 왔던 분노가 그대로 폭발한 글래디아였다. 


쾅. 


그녀가 음속으로 후려친 책상이 소닉붐과 함께 두 동강이 나고.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천박하게 떠들던 박사와 로렌티나가 움찔했다. 


겨우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글래디아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상어, 당신. 나가 있으세요. 당신이 육지 생물들에게 범한 무례의 죄질은 나중에 따져 묻겠습니다.” 


“...박사님 옆에 있고 싶은데.” 


“대장 명령입니다. 당장 인사부에 가서 진술서부터 제출하고, 징계 받으세요.” 


“아니, 글래디아 대장! 애초에 저한테 잘잘못을 따지는 게 맞아요? 전 그냥 박사님을 지켜 드렸을 뿐인데요.”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게 맞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글래디아의 알 바가 아니었다. 


하등한 육지 생물이 자신의 부하를 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성의 끈을 놓기 직전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눈앞에서 오가던 음담패설을 듣고 있느라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었으니까. 


서슬이 시퍼런 그녀의 기세에, 풀이 죽은 로렌티나가 터벅터벅 방문을 나서고. 


혼자가 된 박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이저 아래로 보이는 그의 눈빛에서 이성의 편린이 보였다. 


그 사실에 안도하는 글래디아였지만,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박사라는 사람은, 정신줄 놓고 돌아다닐 때가 아니라. 


냉정을 되찾았을 때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래디아.” 


“...말씀하시죠.” 


“네가 왜 화났는지는 대충 알겠거든? 근데 일단 좀 진정하고, 내 방 가서 이야기하자. 앉을 의자랑…차도 한 잔 대접할게.”


“......” 


“육지의 예절 정도는 지키게 해 주라.”   

 


그의 말에, 글래디아는 움찔했다. 


이건 고도의 돌려까기였다. 


사람을 방에 불러다 놓고, 차를 내오기는커녕 의자조차 내어주지 않는 그녀에 대한. 


그녀가 그렇게 벌레 보듯 하는 육지 사람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데. 


고상하고 품격 있는 에기르인의 예의범절은 어디다가 팔아먹었느냐는. 



“...실례했습니다.” 


“아냐. 네가 뭔 잘못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할래?” 


“일단 앉으시죠. 차라면…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상대의 뜻대로 장소를 바꾼다는 건, 그대로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 늦은 듯 했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템포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침착하세요, 글래디아. 


당신이 동요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요.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리며 주전자에 물을 끓인 그녀는, 티백 두 개를 푼 종이컵을 양 손에 들고 박사에게로 돌아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박사님.” 


“잘 마실게, 글래디아.” 



호록, 유순하게 차를 홀짝거리는 박사. 


조금 전의 천박함은 온데간데없는 그의 모습에, 글래디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대면해도 속을 읽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글래디아가 고심하던 찰나, 잔을 내려놓은 박사가 깍지를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짐작하셨겠지만, 로렌티나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박사와 로렌티나가 성적인 관계를 맺었음은 이미 확실한 바. 


글래디아가 보기에, 이미 사리아라는 여인이 존재함에도 로렌티나를 안은 박사도. 


그가 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박사를 유혹한 로렌티나도. 


모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글래디아의 분노는 박사 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었다. 



“왜 그녀를 안으셨습니까?” 



로렌티나는 글래디아에게 있어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시테러의 피로 끈적하게 흐르는 바다 깊은 곳에서, 오직 서로의 등만을 의지하여 무기를 휘두르던 동료였고. 


그녀의 대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중한 부하였으며.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동포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박사가 범했다. 


만약 그녀에게 에기르의 품위를 기억해야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면, 진작에 박사를 피떡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터. 


채 숨기지 못한 감정이 알알이 배어나는 의문에, 박사가 피식 웃었다.  



“합의했으니까.” 


“...예?” 


“사리아가 허락했어. 로렌티나도 원했고, 나는 받아들였지. 관련된 삼 자의 합의 아래 이루어진 관계였어.” 



너무나도 뻔뻔한 그 대답에, 반파된 책상 아래에서 글래디아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모두가 입으로는 오케이를 외쳤으니까, 당당하게 불장난을 해도 괜찮다는 건가? 


천박하기는 하지만, 이런 짓까지 벌일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한 번 합의 하에 관계를 맺었으면, 그걸로 끝입니까? 당신은 로렌티나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육지와는 달리, 에기르의 성관계는 굉장히 많은 것을 의미한다.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선언이자.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나와 둘이었던 존재가, 비로소 몸과 마음 양면으로 합일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 성관계였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아무 효력도 없는 구두 합의만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부하를. 


분노가 치밀고, 그 이상으로 강한 실망감이 마음 한 구석을 적셨다. 


가일층 격렬해지는 글래디아의 감정을 눈치챈 걸까. 


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뭐라고요?” 


“글래디아, 로렌티나는 나한테 엄청 소중한 친구야.” 


“......” 


“사리아가 나를 긍정하게 해 주는 사람이라면, 상어는 나를 온전히 나로서 있게 해 주는 사람이야. 책임이고 입장이고 따질 것 없이, 그냥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애라고. 그런 좋은 애를 내가 원나잇 상대로 취급한다니. 말도 안 되지.”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당신에게는 이미 사리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합의했어. 어젯밤의 일은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앞으로는 친구로 지내기로.” 


“그게 먹고 버리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끝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글래디아가 거칠게 몸을 일으키고. 


의자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궤변이다. 


결국에는 얄팍한 헛소리이며, 허울 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둘 모두가 원했으니 그냥 추억 한 번 만든 셈 치고, 앞으로는 친구처럼 지낼 거라고? 


이미 선을 넘어 버린 주제에, 그런 꿈 같은 이야기가 진짜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것도 남녀 사이에서? 



“순진한 척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멍청하신 겁니까? 그 애에게 이미 여지를 줘 놓고, 다시 친구로 돌아간다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맞아. 멍청한 생각이지.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건 그냥 내 희망사항이고, 로렌티나가 진심으로 뭘 바라는지는 나도 잘 몰라.” 



종이컵을 구겨 박살난 책상 위에 던진 박사가 팔짱을 꼈다. 


 

“그래도 네 말대로 여지를 준 건 나니까. 그녀가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책임져야지.” 


“...책임?” 


“응. 늦게나마 딱 잘라 거절하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든.” 


“다른 방법이라고 하시면.” 


“일부다처제 국가들 있잖아. 사르곤이나, 니네 에기르도 그렇다매.” 


“...그런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그래, 헛소리지.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난 부족한 사람이라, 한 사람한테 모든 걸 바치기도 힘에 부친다는 거. 그래도 어떡해.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난 아무도 상처 주기 싫은데. 수습할 수 있는 데까지 수습해야지.”  



글래디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영 속을 읽기 힘든 남자지만, 말의 진위 여부 정도는 희미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  



“...환멸이 나는군요.” 



그랬기에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로렌티나를 방패로 삼지도, 잘못했다며 추하게 빌지도 않는.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육지 생물 답지 않은, 올곧은 태도. 


덤덤하기 그지없는 그 태도가 오늘따라 더할 나위 없이 역겨웠다. 



“미안하다, 욕심쟁이라.” 


“사리아와 상어, 둘 모두 그런 당신에게 실망했으면 좋겠네요. 일을 저질러 놓고 뒤늦게 수습하려 드는 당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당신의 곁을 떠났으면 좋겠어요.” 



자기도 모르게 저주를 뱉어 버린 것은, 그런 역겨움의 발로였을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글래디아가 숨을 삼키고. 


박사가 차갑게 웃었다. 



“사실 있잖아, 글래디아. 나도 저기압인 날에는 가끔 생각해. 사리아도 로렌티나도, 나 같은 사람 버리고 더 좋은 남자 만났으면 좋을 텐데 하고.” 


“...읏.” 


“근데 그건 그냥 내 쓰잘데기없는 생각이고. 제 3자인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아니면 내 기분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이거야?” 


“......” 


“휴…됐어. 할 말 다 했으면 간다. 피차 이성적인 대화는 더 이상 힘들 것 같네.”  



고개를 푹 숙인 글래디아를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박사. 


사실 글래디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에기르인이다. 


육지의 그 어떤 국가보다 월등하고, 우아하며, 고상한 나라의 일원이란 말이다. 


그런 에기르인으로서 육지 생물인 박사를 하등하다 생각했다면, 애초에 분노해서는 안 됐을 터. 


말을 듣지 않는 짐승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인간은 없잖은가. 


채찍을 들 뿐이지. 


그런데 자신은 왜 채찍을 드는 대신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걸까. 


모순이다. 


그 치명적인 모순의 끝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감정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두 번째 문제. 


만약 그녀가 진심으로 박사를 다른 육지 사람보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고 갈게.” 



그런 글래디아의 고뇌를 꿰뚫어본 듯, 문고리를 잡은 박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박사의 목소리에, 글래디아 안에서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뭡니까?” 


“너, 도대체 나한테 뭘 기대하고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거냐?”  


“...저는.” 


“사죄냐? 반성이야? 저급한 육지놈 답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설설 기길 바랬어? 아니면 좀 다른 거야?” 



하지만 희망이 꺾이는 속도는 피어날 때만큼이나 빨랐다. 


그녀의 모순을 정확히 짚어내는 박사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 자신조차 박사에게 뭘 바라고 이렇게까지 화를 낸 건지 몰랐으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냐. 깨달으면 좀 알려줘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녀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쓴웃음을 지은 박사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문틈이 완전히 닫히고. 


방 안에는 글래디아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차마 찻잔을 치울 생각도, 엉망이 된 책상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박사의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글래디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박사의 물음이 도돌이표 걸린 악보처럼 되풀이되고 있었다. 


자신은 박사에게 뭘 바랬던 걸까. 


도대체 어떤 거창한 기대를 내걸었기에, 자신답지 않게 분노를 쏟아낸 거고. 


어떤 반응을 보고 싶었기에, 그의 빈자리가 이다지도 마음을 조여 오는 걸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아.” 



착잡하기 그지없는 심정으로,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답답했다. 


분명히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녀에게 박사는 그냥 평범하고 저열한 육지 생물 중 하나였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