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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침묵으로 일관할 건가?"

푸른빛 흑발을 뒤로 넘기며, 첸은 눈앞에 있는 금발의 여성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진 친구였으나, 이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용문의 근위국장, 스와이어.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뭐라도 말하라고."

침묵은 곧 긍정이라는 건가. 스와이어의 태도에 첸은 눈살을 한층 더 찌푸렸다. 몇 년을 함께해온 전우이고, 티격태격해도 서로를 챙기는 악우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짐작한 행위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자기 친구가 그럴 리 없다는 초조함. 만약 사실이라면 어찌할지 생각하게 되는 불안감. 그 후에 밀려오는 배신감. 

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그 사람을 채간 주제에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것에 대한 분노.

"변명을 하던, 항의를 하던, 뭐든 지껄여보란 말이야! 이 *용문 욕설*아!! 베아트릭스 스와이어!!!"
"...닥쳐."

이것저것 섞인 감정의 노도를 밀어붙이자, 마침내 '틈새'가 벌어졌다. 

"그래. 첸 훼이지에. 네 말대로야." 

그러나 그 '틈새'를 필사적으로 보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스와이어는 옆에 있는 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충격으로 낡은 건물의 벽면 껍질이 벗겨지며,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네 말대로... 난 독단적이고, 이기적이고, 용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교활한 년이야. 하지만."

벽에 흔적을 남긴 왼손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틈새'에서 밀려 나오는, 극심한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뭘 아는데...?"

500일. 1년 4개월. 그 시간 동안 노력해서 마음속 저편에 묻어버린 모든 것이, '틈새'를 비집고 표면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와 그 사람이 가진 추억을, 내가 사랑했던 그때를, 네가 뭘 아냐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인재 욕심 따위가 아니야... 용문을 위한 것도 절대 아니야...! 그저,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던 거라고...!"

목소리가 흐려지고 울리기 시작했다.

"좋아했어... 진짜로 사랑했어...!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야...!!"

유지해왔던 이성도, 억눌렀던 감성도 섞여 곤죽이 되어버린 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과 추억을, 멋대로 모욕하지 말란 말이야!!!"

한 이동도시의 근위국장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랑을 꿈꿨던, 한 여성의 소리가 골목길을 울렸다.

"...말 한번 잘했네."

터져 나오는 격분을 쏟아부은 탓에, 숨을 살짝 헐떡이는 스와이어를 보며, 첸은 약간의 조소를 던졌다.

"진짜로 사랑했다고?"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며, 첸은 말했다.

"네가 진짜로 박사를 사랑했다면, 넌 그런 선택을 해선 안 됐어."

이윽고 스와이어의 앞에 섰다.

"네가 떠나고 박사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극심한 우울증에 걸려서 폐인이 될 뻔했어."
"...뭐...?"
"그 망할 켈시 선생이 몇 달간 박사의 심리 치료에만 집중할 정도로, 정신이 망가졌단 말이다."

한 걸음. 두 걸음. 스와이어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첸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스와이어에게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사...가...? 나... 때문에...?"
"그게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해?" 
"아... 아아아..."
"아니! 박사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과 약물 치료를 받고 있어. 충동적인 과음을 하거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속이 뒤집어져서 응급실에 끌려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란 말이다!"

벌어진 '틈새'. 새어나오는 충동. 부딪혀오는 감정.

"그런데, 진짜로 사랑했다고? 네가 한 짓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짓이라 생각해?!"
"아냐... 나... 난..."

이윽고 막다른 벽에 등이 다다르자, 스와이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 재앙보다도 무섭다는 소문이 돌던 전직 용문 고위경찰이 있어서? 

아니. 아니었다. 

금발의 필라인 여성을 몰아세우고 있던 건ㅡ

"난... 난... 그저... 박사를... 곤란하지 않게 하고... 싶어서..."

ㅡ500일간 계속 외면해왔던,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괴물이었다.

"박사가 힘들어할 테니까... 박사가 있는 로도스가, 위험해지니까... 그래서... 난... 난... 대체... 무슨..."

밀려오는 감정에 짓눌린 채, 스와이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이제야 좀 본심을 털어놓는 건가." 

풀썩 주저앉은 스와이어를 보며, 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참 손이 많이 간다고 투덜거리며, 스와이어가 깊게 눌러쓴 모자를 들춰냈다.

"...화장을 짙게 하고 왔군. 넌 예전부터 감정을 억누르려 할 때 화장을 짙게 하는 버릇이 있었지."

흐릿해진 한 쌍의 녹안. 촉촉해진 눈가. 그러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한 화장. 만약 진짜로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임을, 첸은 속으로 긍정했다.

"네 말대로,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너의 지인들도. 나도. 그리고 그 사람도. 네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으니까."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첸이 건네자, 스와이어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낚아챘다.

"박사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나? 박사와 상담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나? 아니. 말하지 않아도 답은 알겠군.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별하고도 500일이 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서로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역시 무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첸은 씁쓸함과 후련함이 담긴 신음소리를 내었다.

"베아트릭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10분 정도 지나,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것이 보이자, 첸은 눈앞의 친구를 일으켰다.

"...뭐가."
"박사에게, 모든 걸 털어버려라. 하나도 숨기지 말고."
"내가? 어떤 염치로..."
"그럼, 그대로 평생 살 거라는 건가?"

첸의 툭 쏘는 한 마디에, 스와이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첸은 할 말을 이었다.

"난 내 친구가. 내가 한때 마음을 품었던 남자가. 둘 다 고통스러워하며 관계를 끝내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순간, 두 여성의 주머니 속 단말기가 울려왔다.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자신의 말이 끊긴 것에 혀를 찼으나, 발신인을 보고 첸은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박사...?"

생각해 보니 식당에 놔두고 온 걸 뒤늦게 생각이 난 두 사람은 급히 문자를 보았다. 

"...뭐?!"

하지만, 문자의 내용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실랑이를 벌일 상황이 아니란 것도 직감했다.

상대의 눈빛을 교환하고 1초도 안 된 채, 두 사람은 급히 골목길에서 빠져나와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

시에스타는 본디 이동도시가 아닌 해변 도시였다. 그만큼 주민들에게 바다는 이웃과도 같이 친근한 존재다. 그런 그들의 가치관을 배려해, 이동 도시가 되었음에도 시에스타의 변두리는 인공 바다로 장식되어 있다. 들리는 바로는 이동 도시의 자체 순환 시스템으로 굴린다고 했던가.

"대체 얼마나 뛰어온거지..."

귀신에게 홀렸다는 표현이 조금 전의 상황이랑 어울릴지도 모른다. 정신이 멍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말그대로 미친 놈처럼 여기까지 달려왔으니까. 거리만으로도 '순백의 화산'으로부터 거의 1킬로미터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바다 한번 더럽게 깨끗하네."

목이 미치도록 말라온다. 숨이 가쁜 감각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다. 기도가 막히는 불쾌감은 덤이다. 작년부터 겪고 있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거 같아, 영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일까? 저 투명한 물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오를 것만 같았다.

"아야."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부딪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랑 체격이 비슷한 루포족 남성이 박스를 들고 있었다. 오른쪽 귀가 살짝 잘려있는 게, 어떤 사정이 있음을 시사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서로 사과를 마친 후, 남성이 마저 갈 길을 갔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들었던 오만 가지 생각과 충동이 팍 식어서, 산통이 깨진 기분이었다.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보니, 주머니 속에 있던 물품을 땅에 떨궈버린 게 아닌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주워보니, 방금 '순백의 화산'에서 받은 범인의 자료들이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아까 제대로 안 읽은 자료들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범죄 기록. 인적 사항. 그리고 몽타주. 

"그러고 보니, 분명 그 범인도 종족이 루포였...어라?"

루포족. 갈색 머리. 키 170 중후반. 절단된 오른쪽 귀. 몽타주 속의 남성이 어째 낯이 익다 싶었다. 멍청하게도 이 간단한 의문점을 가지고 고민을 한 10초는 한 거 같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전신을 메울 것만 같은 불쾌감이 덮쳐왔다. 목덜미를 벅벅 긁고 싶어지는 충동. 이리저리 비틀려는 열 마디 손가락의 광분. 입술을 꽉 깨물며 그 욕망을 억제했다.

"이런, 젠장..."

바보. 머저리. 멍청이. *카즈델 신체불구자*. 온갖 욕을 외치며 황급히 서류를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요즘 정신머리가 없더니 이런 실수를 해버렸다. 수뇌부라는 직위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니다. 진정하자.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즉시 알아차렸으면 무슨 짓을 당했을지도 모르니. 

아니. 아니야. 정신 차리자. 그건 그저 결과론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지금 내다 버린 1분 이상의 로스타임을 만회해야,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 생각에 다른 주머니에 있던 단말기를 황급히 들었지만, 곧바로 제동이 걸려 손을 멈췄다. 

"...지금 그걸 신경 쓸 때냐, 망할 자식."

하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 사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두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송이 완료됨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급히 옮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매우 이른 추격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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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클라이맥스(?)를 넘겼다. 두 번째 클라이맥스로 달려가보겠음. 아마 3~4화면 완결날 거 같음.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