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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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틀시티 챈에 또 돌아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2일 1회 연재 패턴 되찾으려고 발악하는 중인데, 쉽지 않네. 가뜩이나 나쁜 머리로 두뇌싸움 묘사 하려니까 진짜 대가리 터질 것 같다. 


2. 이번 편에 떡밥 많음/회서리 강스포 있음. 전개 자체가 회서리 스토리에 링과 박사가 끼어들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느낌으로 전개되는 중이라. 개인적으로 2차 창작에 오리지널 캐릭터 집어넣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서, 웬만하면 원작 등장인물들만으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네. 스포일러 싫어하는 명붕이들은 주의해줘.  


3. 나는...사실 명붕이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카콘이나 소재추천도 좋지만, 피드백이랑 댓글이 더 좋아...명부이들이 말해주는 감상이나 칭찬이 작가의 행복지수 관리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되거든. 추하게 구걸 좀 하겠습니노. 댓글 달아조. 많이 달아조. 


4. 모자란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다오...더 좋은 작품 쓰려고 항상 노력할게. 다음 글은 상어 단편/머드락 야설둘 중 하나일덧. 


5. 명부이들 모두모두 고맙고 사랑해. 


그럼 오늘 소설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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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분 뒤. 


공기 중에 습한 기운이 떠돌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꾸무룩했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코에 텁텁한 물기가 느껴졌다.


등산하기에는 최악의 날씨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온천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술병 몇 개와 목욕 용품을 품에 안은 채 열심히 뒷산을 올랐고. 


그 노력에 대한 보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수풀 사이에 가려진 소담한 노천탕이 눈 앞에 나타난 것. 



“...와아. 예쁘다.” 



슈가 따로 관리하고 있었던 걸까.


탕 주변에는 둥글둥글한 자갈이 깔려 있었고, 옷이나 목욕 용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탁자도 있었다. 


따스한 김이 얼굴에 훅 끼치고, 살짝 뿌연 물에서는 청량한 향기가 났다. 

노천탕에서 흘러나가는 작은 개울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바로 옷을 벗는 나를 보며, 링이 피식 웃었다. 



“그러네. 그래도 악귀 출몰지역이라 하니, 최소한의 대비는 해 둬야겠지. 먼저 들어가 있어도 돼, 그대여.” 



목욕 용품을 내려놓고, 다른 손에 든 지팡이를 그대로 땅에 꽂는 링.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반장*을 한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지팡이 끝에 달린 등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주: 반장은 한 손으로 하는 합장)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링의 능력은 언제 봐도 몽환적이고 예쁘단 말이지. 


아방가르드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든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기다려줬구나. 고마워.” 


“뭘 새삼스럽게. 이제 내 생각 정도는 대충 읽을 수 있잖아.” 



그 날 이어진 이후, 하루를 천 년 같이 보내온 우리니까. 


그녀라면 내가 링을 두고 먼저 들어가지 않으리란 것 정도는 예상했을 텐데. 


내 말에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렇지. 그래도 생각대로 맞아떨어져서 더 기쁜 일도 있는 법이잖아. 내가 그대를 이렇게까지 잘 이해하게 되었구나 싶어서 괜히 뿌듯한걸.” 


“그도 그래. 그럼, 들어갈까.”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나신이 된 그녀와 함께, 조심스레 탕에 발을 담갔다. 


그 순간, 찌르르한 온기가 온 몸에 퍼지고. 


따뜻하다 못해 살짝 뜨거운 물이 발을 감싸며, 기분 좋은 따끔거림이 들었다. 


어우, 벌써부터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인데. 



“얍.” 


“?!” 



그때, 발만 담그고 여운을 즐기는 내 모습이 답답했던 걸까. 


링이 뒤에서 손가락으로 나를 부드럽게 떠밀었다. 


불의의 일격에, 나는 그대로 탕 안에 처박히고 말았다. 


뜨끈한 온천 물이 내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가 각막을 간질이는 탓에, 눈이 까끌거린다. 


그나마 반사적으로 숨을 참아서 다행이지. 


마음 같아서는 죽은 척이라도 하면서 링을 놀려 주고 싶었지만….


운동부족이라 폐활량이 딸려. 


결국 나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푸하, 깜짝 놀랐네.” 


“미안, 미안. 그래서 물 밑 경치는 어때?”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니엔처럼 뻔뻔하게 혀를 내미는 그녀. 


가끔 보여주는 이런 짗궂은 모습도 사랑스러워. 


그래도 당하고만 살 수는 없지.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피식 웃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와서 봐.” 


“아하하, 분부대로.”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망설임 없이 탕 안으로 뛰어드는 링. 


풍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잔하던 온천의 물이 요란하게 파도치고. 


기포 섞인 물보라가 나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이런, 좀 놀려 주려다 두 배로 당했는걸.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함빡 젖은 그녀가 물 속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그대여, 수면 아래에 용궁이 생겼어.” 


“...푸핫,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맞혀 봐.” 



이번에는 수수께끼 놀이일까. 


엉뚱하지만 이런 것도 링다워서 좋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탕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용궁이라. 염국이나 단국 전래동화에 나오는 그거 맞지?” 

“응응.”



솔직히 말해, 그녀가 낸 수수께끼의 답은 너무 쉬웠다. 


다음 문제를 위한 몸풀기에 불과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용(龍)이 거하는 궁(宮)전. 


링은 용이고. 


그녀가 지금 몸담은 곳은 이 탕. 


그렇다면 링이 이 곳에 뛰어든 순간, 이곳은 곧 용궁이 되었다는 그런 의미겠지. 


하지만 그냥 답을 말하는 것도 영 풍류가 없어. 



“수면 아래 용궁이 있다고 했지?” 


“맞아.” 


“그럼 내가 말 한 마디로 그 용궁을 꾀어내, 물에서 건져 볼게.” 


“어머, 어떻게?” 


“이리 와.”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향해 팔을 벌린다. 


내 의도를 파악한 듯 천천히 헤엄쳐 오는 링. 


절대 물 밖으로 몸을 내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지만, 어림도 없지.


그녀가 최대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온천의 열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따스한 피부가 온 몸에 와 닿고. 


링 특유의 국화꽃 향기와 탕의 뜨뜻한 내음이 섞인, 이루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인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미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내 목을 감싸안으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링.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용이 궁을 떠났네. 대궐은 외로이 남겨졌고. 들보는 변함없이 바다를 떠받치며 대청마루는 떨어진 비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거늘, 그 주인의 간 데를 아는 이 없음은 어쩐 일인가. 감히 묻관대, 이곳을 여전히 용궁이라 부를 수 있겠나이까.” 



어째 링이랑 다니면서 시 솜씨만 늘어나는 것 같은데. 


아니, 얼굴 가죽도 좀 두꺼워진 것 같아. 


예전의 나였으면 부끄러워서 내놓지도 못했을 시를 이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다니. 


그래도 아직은 조금 쑥스러운걸. 


그런 나를 격려하듯, 링이 살며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답이 정해진 문제를 주었는데, 그대는 답안지에 한 폭의 시회를 그려내었구나.” 


“그래서, 어때?” 


“후후, 장원이야. 훌륭한 시사부인걸.” 


“헤, 고마워.” 


“이제 어엿한 문인이 다 되어 가는구나, 그대는. 괜히 궁금해지네. 이 여행이 끝나갈 때, 그대는 어떤 심상을 얼마나 유려한 방식으로 풀어내게 될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우열은 없다지만, 완성된 그대의 시는 틀림없이 내가 읽은 그 어떤 문장보다 아름다울 거야.”  


“더 열심히 할게.” 


“구태여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대의 마음은 그대 자신으로 있을 때 가장 순수하게 피는 법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온천 밖에 놓아 둔 술병으로 손을 뻗는 링. 



“그대의 반려로서, 부군의 열의를 치하하는 것 또한 마땅히 내 권리이겠지.” 



술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그녀는 환하게 웃더니.


이내 내게 입을 맞추었다. 


호응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나를 내리누르기 시작한 입술이 너무 부드러워서. 


입술이 저항력을 잃고 천천히 벌어지며, 그 사이로 까슬까슬하면서 따스한 혀가 상냥하게 파고든다. 


멍하니 벌어진 내 입을 희롱하듯 치열을 흝고, 뻣뻣하게 굳은 내 혀를 계속 구경만 할 거냐며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린다. 


오가는 호흡 사이, 몇 방울씩 떨어져 입 속을 적시는 액체에서 달콤하면서 알싸한 맛이 났다. 


이건 술일까, 혹은 타액일까. 


그도 아니면 링의 ‘치하’일까. 


뭐든 상관없어. 


어느 쪽이든 전부 기뻐. 



“푸하.” 



입 안의 술이 전부 동난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응석을 부리듯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녀의 혀가 겨우 떨어지고. 


대신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그녀의 눈동자가 행복을 가득 담아 나를 응시한다.  


어쩐지 아쉽다. 


그대로 질식해서 죽었어도 행복했을 텐데.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좋아. 


반쯤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링이 장난스레 웃었다. 


네 생각이라면 이미 다 읽고 있다는 듯. 



“또 할래?” 


“당연하지.” 


“나도 그래. 마음 같아서는 이 탕의 물이 전부 흘러 없어질 때까지 그대와 꼭 붙어 있고 싶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맞혀 보라는 듯, 익살스럽게 말끝을 흐리는 링. 


무수한 별빛을 깃들인 그녀의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 별의 이름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일단 행복. 


기쁨도 있고, 약간의 아쉬움이랑 욕심. 


더할 나위 없는 애정도 있구나. 


하지만 개중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건…. 


기대. 


내가 어떤 말을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너무 쉬우면 흥이 떨어진다, 이거지?” 


“후후, 바로 그거야!” 


“그럼 더 잴 필요 없겠네. 다음 수수께끼 부탁할게.”  



툭, 먹먹한 하늘이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하고. 


시커먼 하늘 너머에서 아스라이 뇌명이 울려 퍼졌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한 여우비는 소나기가 되고, 소나기는 곧 장대비가 되어 산야를 촉촉히 적셔 갔다. 


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빗소리 속에서, 수수께끼를 내고. 


서로의 존재 속에 매몰되어 생각할 틈조차 없음에도,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정답을 맞히며. 


맞히면 포상이라는 명목으로. 


틀리면 벌주라는 핑계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오, 데몬이다.” 


“신경 안 써도 돼.” 



이따금씩 데몬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땅에 꽂아 놓은 링의 지팡이가 빛을 발했다. 


그 빛을 보자마자 얼어붙은 데몬은 곧 장작불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 줌 재로 화했다. 


무섭기는커녕 이제는 애처롭기까지 하네. 


…잠깐만. 


근데 세네 시간쯤 전에 링이 대황성 한 바퀴 돌면서 데몬 청소하고 오지 않았었나. 


하물며 여기는 슈네 집 바로 뒷산인데. 


아직 여기에 데몬이 남아 있다고? 


느닷없는 위화감에, 머리가 급격히 식는다. 



“...링, 혹시 아침에 데몬 몇 마리 남겨 뒀어?” 


“아니? 이 근처에 있는 놈들은 전부 없앴는데.” 


“그럼 이 놈들은 그새 증식한 거야?” 


“신경쓰여?” 


“응.” 


“그럼 그걸 다음 수수께끼로 내도록 할까. 기대해, 그대여. 이번 문제는 이전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울 테니까.” 



씩 웃은 링이 손가락을 튕기고. 


그녀의 지팡이에서 더욱 강한 광채가 폭발한다. 



“그대는 데몬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지. 이곳 대황성의 데몬이 불어나는 추세가 명백히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챘을 거고.” 


“맞아.” 


“데몬은 엄밀히 말해 퇴치가 가능한 존재잖아. 슈가 몇백 년간 이곳 대황성을 지켰고, 어제 오늘 내가 남은 대부분을 치워 없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수가 줄지 않는 데는 무언가 연고가 있을 터인데….” 



현학적인 어조로 말하던 링이 느닷없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원흉은 무엇이며, 그 목적은 어떻게 될까. 이게 수수께끼야.” 



나는 난색을 표했다. 


정말 궁금하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손 안에 있는 패가 너무 적다. 



“...단서가 부족한데.” 


“아하, 그렇다면 스무고개처럼 해도 괜찮아.”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그런 종류의 놀이는 내 특기다.



“스무 개까지도 필요없어. 열 개 안에 맞혀 볼게.” 

 


보통 스무고개를 하면, 두루뭉술하기 그지없는 정답의 형태를 유추하는 것부터 시작한단 말이지. 


이를테면 ‘그건 사람입니까’같은 질문을 한다거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에 관한 단서는 이미 링이 줬으니까. 


그녀는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의 정체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물었다. 


지금의 데몬 이상증식 사태를 누군가의 계획이라 가정하고, 그 계획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원흉은 뚜렷한 목적 의식을 품을 수 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판짜기를 할 정도의 지성체라는 결론이 나오지. 



“첫 번째 질문. 링, 흑막은 너와 관련이 있어?” 


“일단 예.” 


“좋아, 두 번째. 놈의 목적은 슈와 관련이 있지?” 


“벌써 감을 잡은 거야? 대단한데. 맞아.” 



얼굴 가득히 감탄의 빛을 띄우며 술을 들이키는 링. 


오케이, 순조롭다. 


월등한 지성과 힘을 갖추었으며, 슈와 링 모두와 엮여 있는 이. 


당장 머릿속에 왕의 실루엣이 떠올랐지만, 그럼 너무 쉽잖아. 


이 정도 문제를 가지고 어려울 거라 호언장담할 만큼, 링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냐. 


분명히 뭔가가 더 있을 터. 



“세 번째. 흑막이 원래 노리던 건 대황성이야?” 


“...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처음 대황성에 도착했을 때, 데몬의 수는 끔찍할 정도로 많았다. 


당장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놈들이 출몰할 정도로. 


아마 나와 링이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이 도시는 머지않아 데몬에 삼켜졌겠지. 


즉, 다른 변수가 없는 한 우리는 놈의 계획에 갑작스레 끼어든 변인이라는 말이 된다. 



“네 번째. 흑막의 목적 중에 슈를 해치려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 


“응…아니. 이건 좀 애매하네.” 



음? 


대황성을 노리면서, 슈를 해치려는 건지 아닌지는 애매하다고? 


내가 아는 슈의 성격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대황성을 지키겠다고 나설 텐데. 


서로 상반되는 거 아냐, 그럼. 


…아니, 잠깐.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다섯 번째. 흑막의 수는 왕을 포함해 둘 이상이야?” 


“맞아.” 


“여섯 번째. 흑막은 세 명 미만의 쉐이 파편이야?” 


“...응.” 



슈와 링 모두와 관련이 있고. 


테라 최강국 우르수스도 간신히 통제하는 게 고작일 정도로 강대한 데몬을, 자신의 계획을 위해 뜻대로 부리는 존재. 


서로의 지향점은 약간 다르지만, 특정한 목적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존재.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인물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리고 방금 링의 대답으로, 이 사건의 원흉의 정체는 확실해졌다. 


왕,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모르는 또 한 명의 쉐이. 


그렇다면 다음은 동기겠지. 


적어도 내가 아는 쉐이 중, 동족에게 직접적으로 칼을 겨눈 놈은 없었다. 


미쳐 있는 왕조차도 내게 넌지시 경고했을 뿐, 링에게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어. 


하지만 만에 하나, 놈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가족을 거리낌없이 희생시키는 사이코패스일 가능성도 있다. 


먼저 그것부더 확인하는 게 순서겠지. 



“일곱 번째. 흑막은 슈를 가족으로서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 


“예.” 



생각보다 훨씬 추리가 순조롭게 흘러간 탓일까, 링의 표정이 조금 굳고. 


궤도에 오른 사고가 더더욱 가속한다. 


흑막이 그런 사이코패스가 아니고, 슈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데는, 그녀에게 다소의 희생을 강요할 정도로 강한 동기가 있음에 틀림없다. 



“여덟 번째. 흑막은 인간들을 위한 슈의 희생에 불만을 품고 있어?” 



이를테면, 그녀가 이 땅에 정착해 있는 내내 그녀를 옭아매던 굴레에서 풀어주고 싶다는 욕망이라던가. 



“...예.” 


“아홉 번째. 흑막의 목적은 이 대황성을 초토화시켜서라도 슈를 자유롭게 해 주는 거야?” 


“...이야. 정말 굉장한걸. 맞아.”  


“열 번째, 마지막 질문이야. 흑막 중 왕이 아닌 쉐이는 슈의 동생 중 하나야?” 



이건 질문 수 채우려고 던진 버림패였다. 


링이 어떤 대답을 하든 결론은 이미 나왔으니까.  


로도스에 소속되지 않은 쉐이 파편들 중 내가 아는 이는 슈와 왕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몇십 개의 질문을 하더라도, 왕과 함께 이 사태를 야기한 쉐이의 정체를 맞히는 건 불가능해. 


정보가 아예 없으니까. 


링도 내가 그것까지 알아맞히리라고는 기대 안 할 거고. 



“...예.” 


“좋아. 대답할게. 흑막은 왕과 슈의 동생 중 하나. 흑막의 목적은 슈의 해방…그리고 조금 극단적으로 보면 염국에 대한 테러. 유하게 보면, 이 땅의 위험성을 염국에게 경고하는 것 정도일까.” 



그렇게 나름 확신에 차 선언한 결론이었는데. 


링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링?” 



불러도 대답도 없고, 얼어붙은 채로 멍하니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 


어디 아픈가.


야단났네, 술도 다 떨어졌는데. 


그런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굳어 있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더니.  



“훌륭해!” 


“응?”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환호성에 가까운 찬사가 터져 나왔다. 


빗소리를 뚫고 울려퍼진 청량한 목소리에, 내가 잠시 멍해진 사이. 


링이 내 뺨을 양 손으로 감쌌다. 



“정말 대단해, 그대여! 내 가족들에 대해 잘 아는 나조차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진상을, 단 열 개의 질문만으로 거의 완벽하게 유추해 내다니!” 


“...어, 링. 칭찬은 고마운데….” 


“그대의 지모는 정말 볼 때마다 놀라운걸. 사막에 세워진 이정표처럼 흔들림 없는 직관력과, 보름달과도 같이 그 이정표를 밝혀 비추는 통찰력! 그토록 뛰어남에도,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사고의 흐름을 다져 나가는 침착함까지! 말 몇 마디만으로 치하하기 아까울 정도야!” 



기묘한 열기가 깃든 그녀의 시선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살짝 눈을 피해 버렸다. 


음, 뭐랄까. 


되게 기쁘긴 한데, 어딘가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게, 링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지만 칭찬에는 상당히 인색하거든. 


작전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에도 교만해지지 말라는 충고를 한 뒤에야 짧게 격려의 말을 남길 정도로. 


그러니까 링이 지금 이러는 건….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껴서 내가 교만해지든 말든 상관이 없거나. 


그도 아니면….



“...설마 너 왕이냐?”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대여?” 



또 그 이상한 놈한테 빙의당해서 환각을 보고 있는 걸까. 


문득 그런 끔찍한 가설이 뇌리를 스치고, 온 몸에 소름이 돋으려던 찰나. 


링이 능글맞게 웃으며 내 뺨을 쭉 잡아당겼다. 



“그대, 혹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무슨 착각?” 


“지금까지 내가 그대를 과하게 칭찬하지 않았던 건, 그대가 쭉 전장에 선 장수의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어. 그대의 말 한 마디가 곧 칼날이 되고, 그대의 방심이 아군의 등을 겨누는 창이 될 게 뻔한.” 


“......” 


“그런 상황에서 내가 마음 놓고 그대에게 헌사를 바칠 수는 없지. 그게 그대에게, 그리고 로도스에게 독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 



마음 같아서는 그대의 숨결 한 조각에도 아낌없는 칭찬을 건네고 싶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볼을 매만지는 링. 



“하지만 지금은 어때, 박사? 그대는 여전히 군마를 이끄는 지휘관이야?” 


“...아니. 그 이름은 잠깐 내려놨어.” 


“맞아. 내 곁에 있는 그대는 천하를 오시하는 여행객이자, 자신의 심상을 이해하려 하는 시인이고, 만물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다듬는 요리사지.” 


“응.” 


“그리고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만의 부군이기도 해. 그렇다면 그대여,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의 뛰어남을 칭송함에 있어 거리낌을 느껴야 할까?” 


 

…이건 링이네요. 


왕은 무슨, 그 또라이는 골백 번쯤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렇게까지 이해 못 할 거야. 


설령 이해한다 쳐도, 이렇게 섬세하고 예쁜 문장으로 내 귀를 녹이지는 못 할 거고.


지고지순한 마음이 담긴 그녀의 말에, 한 순간 의심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미안, 링.” 



머쓱하게 건넨 사과에,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아냐. 오히려 이런 때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그대의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되는걸. 앞으로 그대를 마음껏 칭찬해도 문제가 될 일은 없겠어.” 


“고마워.” 



감히 왕 같은 놈팽이와 링을 구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와, 그럼에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그녀에 대한 감사를 담아 이마에 살짝 키스하자. 


링이 은방울을 울리듯 맑게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에 일순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졌지만…. 


아직 마음을 완전히 놓을 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링. 데몬 문제는 어떻게 할 거야?” 



문제의 실체를 알아 버린 이상, 슈와 대황성이 안전해질 때까지는 긴장을 풀 수 없다. 


그런 생각에서 던진 질문에, 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뭐 이미 적당히 손은 써 뒀어.” 


“손?” 


“응. 비뚤어진 오빠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남동생-정말 못난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먼저 석고대죄할 기회 정도는 주는 게 도리 아니겠어?” 



흑막 중 하나는 남동생이었구나. 


그건 그렇고 석고대죄할 기회라니. 


말이 좀 살벌하다, 링아. 



“내가 대황성에 있다는 건 진작에 눈치챘을 거고. 데몬들을 쓸어버리면서 대황성 곳곳에 전언을 남겨 뒀으니까, 내 의사도 전해졌을 거야. 당연히 대화로 푸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만약 그 둘이 대화를 거부하거나 도망치면?” 


“음. 잡아서 나란히 엎어놓고 볼기짝을 후려쳐야지.” 


“......” 


“아무튼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번 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응.” 


“내일 새벽 안으로 모든 걸 매조지을게. 그리고 내일부터는…다시 여행을 계속하자. 괜찮지?”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는 링.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처럼 한없이 믿음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등에만 모든 짐을 지우기 싫다는 마음도 들었다. 


너와 내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슈가 나를 가족으로 받아 주었으니 이 일은 내게도 중요한 일이야. 


이런 신적인 존재들 간의 싸움에서, 인간인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기는 싫어. 


아무리 새우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포지션이라지만, 사력을 다하면 등을 가렵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좋아, 돌아가면 바로 링을 도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알겠어. 부탁할게, 링.” 



그런 굳은 결심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링은 용맹한 미소로 화답했다. 



“응. 그대는 누각에 올라 전장을 내려다보소서. 소장이 그대의 눈 앞에서 적을 쳐부수고, 그 영광만을 그대에게 돌릴 터이니.” 


“말만으로도 든든한데. 벌써 이긴 것 같은 기분이야.” 


“틀림없이 그리 될 테니, 그대는 안심하고 넉넉한 포상을 준비해 줘.” 


“당연하지. 아, 그 포상 말인데. 맛보기로 좀 가불해 줄까?”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사양 않고.” 



내 말에 해맑게 웃으며 안겨 오는 링. 


그런 그녀의 체온을, 온천의 열기가 한껏 배어든 살내음을, 내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부드러운 피부를 한껏 음미하며. 


나는 그대로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 



그렇게 박사와 링이 둘만의 시간을 한껏 만끽하고 있을 시각.


앉을 의자와 팔 괴일 탁상도.


목을 축일 차 한 잔도.


하다못해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아 줄 지붕도 없는 대황성의 산 속 어딘가. 


쉐이의 파편 두 명이 깊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단아한 비단옷을 갖추어 입은 회색 머리카락의 미청년. 


그리고 세상 불행을 다 짊어진 듯 음침한 인상의 덩치 큰 청년이었다.  


이 산속은 밀회를 가지기에는 여러모로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한 채 무거운 침묵을 함께 지탱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왕 형님.”  



이 적막함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듯, 회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일곱째야.” 



음침한 청년, 왕이 떫은 목소리로 그의 의문을 되받았다.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동생의 음성에 서린 초조함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형제자매 중 가장 섬세한 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다, ‘지’.” 


“그렇다면 가장 강인한 건 누구입니까?” 


“총웨 형님이겠지. 형님이 몸에 아로새긴 무수한 단련의 세월들은 결코 헛것이 아니니.” 


“가장 현명한 건 누구일까요.” 


“...옛날에는 시에였지. 지금은 니엔일까. 아니, 그 아이는 분명 교활하지만 너무 성급해. 시는 지나치게 겁이 많고. 딱히 생각나는 이가 없으니, 감히 나라고 대답하마.” 



왕의 대답에, 지가 작게 웃었다. 


그 미소에 서린 미세한 불안감이 왕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오늘따라 혀가 길구나, 지. 아무리 네가 장사치라지만,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아서는 객이 다 도망가겠어.” 



그가 왜 이렇게 의미 없어 보이는 질문을 연달아 던지는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해 보거라.” 


“저희 중 가장 뛰어난 이는 누구입니까.” 



그가 계속해서 내비치는 초조함의 원인이, 이 연속된 물음의 종점에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지금껏 침묵을 지켜 왔던 원인이라는 것까지도, 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왕은 아무 말 없이 눈 앞의 바위를 바라보았다. 


사람 여섯 명이 넉넉하게 둘러앉을 법한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 


평온하게 대지를 디디고 있던 어제의 위용과 대비되는, 두 쪽으로 무참하게 쪼개진 모습과. 


바위 곳곳에 묻어 있는, 데몬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고 끈적한 부산물.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짧은 문장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한 시선을 담아 응시했다.  



[그리운 오라비와 동생에게. 달이 차오를 때, 친애의 정을 담아 대작을 청하노라. 링.]



링. 


오래도록 세상 일에 달관해 있던.


그러나 한 번 몸을 일으키면 세상을 한바탕 떨쳐 울릴 힘을 품은 와룡(臥龍). 


열두 형제자매 중 단연코 가장 뛰어난 여동생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왕은 지를 돌아보았다. 



“눈 앞에 답이 있거늘, 어찌 우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물을 구하느냐.” 


“...그렇군요. 어리석었습니다.” 


“링이 두려우냐?” 


“아니오.” 



반사적으로 부정한 지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말을 번복했다. 



“...예. 솔직히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 잘 생각해 보거라. 그녀의 바다 같은 성품이 두려운 것이라면, 나도 동의한다고 말해 두마.” 



평소에는 그저 일광욕을 즐기고, 지나가는 바람에 호응해 일렁일렁 춤출 뿐이지만. 


한 번 성을 내면 폭풍을 일으켜 모든 것을 뒤섞고 엎으며 집어삼키는 그녀의 성격은, 왕도 적잖이 까다로워하는 부분이었다. 


딱 한 번이지만, 그녀의 분노를 눈앞에서 직관한 적이 있는 그이기에 더더욱. 



“하지만 그녀의 힘이 두려운 거라면, 네게 실망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형님. 그게 무슨.” 


“내가 그녀의 성품을 껄끄러워하는 건 어디까지나 오라비로서의 입장이다. 바둑판을 앞에 두고 마주앉았을 때는 전혀 달라.”  



하지만 그녀의 힘은 아니다. 


링은 확실히 강대한 존재지만, 싸움의 승패가 항상 힘의 크기만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닌 바. 


그 변수를 만드는 요소야말로 계략이었고. 


그 계략을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학문이 병법이었다. 


그리고 왕은 형제자매 중 가장 현명한 자를 자칭할 정도로 병법에 정통했다. 



“생각해 보거라, 지. 우리가 짠 판에 그녀가 끼어들었지. 그렇다면, 우리의 계획이 꼬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틀렸다. 우리가 애시당초 노렸던 목표가 무엇이냐.” 


“대황성 그 자체. 그리고 슈 누님입니다.” 



그렇기에, 급작스러운 변인이 잘 짜인 판을 엎어 버릴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도 왕은 침착할 수 있었다. 



“그래. 이 땅에 봉인되어 있던 악귀를 풀어 이 토지가 위험함을 알리고, 슈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함으로서 그녀를 수백 년의 노역에서 해방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었지. 그렇다면 링의 존재가 우리의 계획에 어떤 위협이 되느냐.” 



지는 그런 왕의 냉정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링 누님은 저희가 몇 달 간 준비했던 악귀들의 삼분지 일을 박살냈습니다.” 



링은 그냥 변수가 아니었다. 


산책하듯 돌아다니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배양한 악귀들을 간단하게 갈아버리는 국가권력급 변수였다. 


그녀가 진심을 내고, 슈가 그녀를 보좌한다면 나머지 악귀들조차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한데. 


이 형님은 뭘 믿고 이렇게 차분한 걸까. 



“링 누님의 무력이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까. 그러다가 그녀가 정말 악귀를 전부 소멸시키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그런 답답함을 담은 지의 물음에, 왕이 희미하게 웃었다. 

 


“필시 위험하겠지. 우리가 악귀를 전부 링을 상대하는 데 쏟아붓는다면.”  


“...아.” 


“기억하거라, 지. 우리의 목표는 링을 쓰러트리는 게 아니다. 이 대황성을 악귀의 기운으로 물들이기만 하면 돼. 그리고 악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증식하며, 현실을 침식하지.” 


“형님, 설마.” 



왕의 표정에 서늘함이 깃들고. 



“계획을 수정한다. 내가 악귀의 삼분지 이를 이끌어 링과 슈를 상대하마. 지, 넌 그 사이에 남은 악귀를 네 그림자에 숨기고 대황성의 심장부로 가거라.” 



뒤이어 떨어진 추상 같은 호령에, 지가 숨을 삼켰다. 



“...그러다 진짜 돌아가십니다, 형님.” 


“상관없다. 어차피 이 몸도 백여덟…아니, 이제는 백일곱의 조각 중 하나일 뿐이니. 한둘 없어진다 하여도 거리낄 것은 없느니라.” 


“말씀대로만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한 부대가 유인책으로서 시선을 끄는 사이, 본대가 뒤를 돌아 적을 급습하는 성동격서의 계책. 


즉석에서 짜낸 방법치고는 상당히 훌륭하지만, 그리 고도의 술책은 아니었다. 


군문에 오래 몸담은 링이 이 정도도 읽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런 지의 의심을 꿰뚫어본 듯, 왕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대비가 있겠지.” 


“...예. 두 군데에서 소요를 일으켜도, 링 누님은 능히 대처하실 겁니다.” 


“그걸 위한 책략이 하나 더 있다. 링이 데리고 다니는 인간 남자, 본 적 있느냐.” 



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 있다. 


치렁치렁한 회색 머리를 한 갈래로 질끈 묶은, 부드러운 인상의 훤칠한 사내였더랬지. 


이름이…박사라고 했던가. 



“그 남자가 곧 링의 역린이다. 자신의 보물을 아끼는 링이라면, 그 남자를 안전한 곳에 숨기려고 하겠지. ” 


“...아.” 


“너는 악귀를 푸는 동시에 그 남자를 인질로 잡아라. 그리하면, 링은 감히 너를 방해할 수 없을 게야.” 



확실히, 아무 생각 없이 양동작전을 펴는 것보다는 이렇게 구체적인 지침이 있는 편이 더 마음이 놓인다. 



“...알겠습니다.” 


“단, 그 남자의 목숨을 진짜로 해치지는 말거라. 진정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니. 시간을 충분히 끌었다 싶으면 내가 신호를 주마.”  



그런 안도도 잠시. 


왕의 말에, 또 다시 의문이 떠오르는 지였다. 


악귀는 풀어 놓기만 하면 알아서 할 일을 할 테고.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건 대황성의 염국군을 무력화시키는 것과, 박사를 인질로 잡는 것. 


지극히 간단한 일뿐이었다. 



“땅을 오염시키는 건 악귀의 몫이니, 전 뭘 하며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그런 의문에, 왕이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글쎄. 박사와 환담이라도 나누어 보는 건 어떠냐.” 


“예?” 


“머리는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녀석이니, 말동무로는 괜찮을 거다. 바둑 솜씨도 나쁘지 않으니, 대국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 형님이 인간을 인정하다니, 별일이네. 


잠시 고개를 갸웃한 지였지만….


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설마 그 남자와 바둑 뒀다가 지셨습니까, 형님.” 



참, 이 형님은 이런 부분에서 변함없이 허술하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쓴웃음이 입가에 떠오르고,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경을 치기 전에 그 입을 다물거라.” 



그런 지에게 왕이 짐짓 짜증을 냈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뭐합니다만, 정말 지지리도 재능이 없으십니다.” 


“닥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 적 없느니라. 무승부였단 말이다.”   



그렇게 유치한 투닥거림을 이어 가며, 두 형제는 자리를 떴다. 


느닷없이 날아온 링의 도전장. 


그 탓에 기존 계획을 폐기해야 했고, 즉석에서 새로운 방침이 짜냈다.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터. 


이제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새벽의 결전을 준비할 뿐이었다. 



‘...슈 누님, 조금만 더 참으십쇼. 금방 풀어드리겠습니다.’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지는 먹구름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쉐이 합체까지, D-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