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은 모두 픽션입니다.

*스토리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심





'테레시아'의 의식이 천천히 살아났다.


마지막 프로세스 종료 기록으로부터 4시간 12분 39초 경과.

고작 4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미야와 켈시는 일정대로라면 오늘 밤에나 돌아올 터였다.

아미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문명의 존속'에 접근 가능한 인물이...


이런저런 생각을 짧게 하는 동안 그녀의 감각 프로세스의 동기화가 완료되었다.

눈앞이 서서히 밝아지며 눈부신 백색광이 눈꺼풀 아래로 스며들었다.


쾌쾌한 사무실 공기와 함께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ㅡ


"우땨아아아아!"


자신을 향해 괴성을 외치며 정신없이 달려오는 박사였다.


깜짝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자 박사는 자기 발에 걸려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박사는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바닥에 드러누운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빽빽 울어댔다.


"우땨아아!!! 뜌땨이 뜌땨 우땨아아!!!"


테레시아가 적잖이 당황한 사이 그녀의 눈에 한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그것은 박사의 머리에 얹혀진 '문명의 존속' 이었다.

어째서 왕관이 박사의 손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자신을 불러내는 프로세스에 접근했는지는 불명이었지만 딱 하나는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박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다만 그녀도 박사가 이성이 떨어졌을 때 벌이는 각종 기행에 대해서 익히 들어왔기에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 추태를 보는 건 처음인지라 그녀로서도 난감할 따름이었다.

보통은 어시스턴트가 한 명 붙어 박사의 상태를 관리하지만, 어시스턴트는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땨아아아앗!!!"


별안간 박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흐느적거리는 박사의 굼뜬 움직임 정도야 눈감고도 피할 정도였으나 작은 호기심이 든 그녀는 피하지 않고 박사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박사는 그대로 테레시아의 품속으로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테레시아가 살포시 박사를 안아 주자 박사는 그녀의 품속에서 옹알거렸다. 


"우땨이 우땨아아 뜌뜌 땨땨..."


자신은 그저 체온 없이 차가운 형체에 불과하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사는 딱히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행동만으로도 그는 위안을 얻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응, 그래. 착하지 착해, 나 여기 있어."


테레시아가 조심스럽게 박사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야기하자 박사는 울먹거리며 알 수 없는 옹알이를 계속했다.

유아 퇴행이라니, 바벨 시절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텐데. 

어쩐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테레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박사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의 손은 허우적대고,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테레시아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우우...마마...쭈쭈...쭈쭈...!"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박사를 품에서 재빨리 떼어냈다.

그녀의 생각보다 상황은 좀 더 심각해 보였다.

박사가 원하는 것은 모성애...아니 그 이상의 것이 분명했다.


박사는 끈질기게 테레시아의 허리춤을 잡고 늘어졌다.

그의 다리와 제복 끝단이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음에도 박사의 시선은 여전히 봉긋하게 솟아오른 테레시아의 가슴과 마름모꼴로 뚫린 가슴께의 구멍을 향하고 있었다.


박사를 떼어내려 아둥바둥하던 테레시아의 머릿속에 문득 지나가며 봤던 매뉴얼이 스쳤다.  

'박사가 이성을 잃었을 때 해결법'.

로도스 함내 컴퓨터에는 분명 이 파일이 존재할 것이라 판단한 테레시아는 박사를 질질 끌고 박사의 사무용 컴퓨터가 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PRTS에 접속하는 게 영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손쉽게 매뉴얼이 담긴 파일을 찾을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첫째, 이성 회복제를 투여할 것...이성 회복제 위치는 일일 어시스턴트만이 인수인계로 관리하고, 박사에게 절대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자신은 어시스턴트가 아니니 이성 회복제의 위치를 알 턱이 없었다. 테레시아는 진득하게 달라붙는 박사의 손을 떼어내며 다음 항목을 읽었다.


"둘째, 증상이 심하지 않을 경우 휴식과 짧은 수면을 취하게 할 것...으, 이건 패스..."


매뉴얼에는 몇 가지 항목이 더 작성되어 있었지만, 테레시아는 허겁지겁 마지막 항목으로 눈을 돌렸다.


"어떤 방식도 효과가 없거나 아주 긴급한 상황일 경우, 후두부를 '살짝' 가격할 시 미미한 이성 회복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음..."


'가비알 참조'라는 단어와 함께 깨알같이 적힌 마지막 항목을 읽은 테레시아는 자신의 몸으로 꾸물꾸물 엉겨붙으려 하는 박사 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살짝 고민하듯 눈을 몇 번 데굴데굴 굴리더니 손가락을 뻗어 사무실 문 쪽을 가리켰다. 


"앗, 아미야가 벌써 왔네!"

"우, 우땨아아??"


테레시아의 말에 박사가 까무러치며 사무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뜌땨?"


그 순간 뒤통수에 손뼉이 날아드는 찰진 철썩 소리와 함께 박사는 픽 하고 쓰러졌다.


박사가 워낙 약골인 걸 감안해 살살 치긴 했으나, 너무 맥없이 쓰러지는 바람에 테레시아는 뻘쭘해진 채 입가로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도 힘조절은 잘 된 모양인지 박사는 이내 신음소리를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으...테레시아..?"

"어머, 정신이 들어?"


테레시아는 박사를 내려다보는 동시에 박사의 컴퓨터 화면을 확인했다.

컴퓨터 화면에는 PRTS와 연동된 박사의 생체 정보가 드러나 있었다. 운동 부족, 피로, 무기력증, 욕구 불만, 그리고...

그리고 대문짝만하게 써져 있는, 이성 수치 단 1.

뒤통수를 후려갈긴 건 딱 이성 1만큼의 임시 방편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일단 언어 능력만큼은 어느 정도 복구된 것에 만족해야 될 것 같았다.

 

"테레...테레시아아아아아앙...!"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박사의 얼굴 주름이 움찔움찔 모여들고, 눈망울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맺히더니...곧바로 주저앉아 서럽게 울어대는 것이 아닌가.

대체 뭐 하고 다니다가 왕관을 손에 넣었는지는 물어볼 틈새조차 없었다.

테레시아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그냥 뭔가 힘들고 복잡한 일이 있었겠구나, 하고 어련히 넘겨짚기로 했다.

어쩌면 박사는 그녀에게서라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왕관을 가져온 것일지도.


'그녀'는 박사가 느낄 고독함과 사명에 대한 고뇌를 알고 있었다.

테레시아가 박사에게 내렸던 선택도 거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테레시아가 바랬던 것처럼 로도스도 박사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나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테레시아'는 그저 좌시할 수 없었다.

자신은 테레시아가 아니나, 그녀의 소망을 이어받은 만큼...


비록 자신에게 남은 것은 실체와 데이터 사이의 껍데기뿐이지만ㅡ '테레시아'는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박사가 '테레시아', '그녀'에게 의지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 대상이 되어주리라 마음먹었다.  


"울음 뚝!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고 있는 거야?"


테레시아는 박사 앞에 쪼그려 앉아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박사는 훌쩍거리며 이런저런 말을 뱉기 시작했다.

메딕 오퍼레이터가 자신의 간식과 컵라면을 모조리 압수해간 일, 퇴근 1시간 전에 주어진 긴급 업무, 켈시의 꾸지람, 잔업 때문에 밤 샐때 자기만 빼놓고 회식한 일, 그리고 오늘 어시스턴트가 자기에게 내뱉은 험한 말에 상처받은 일...


"음..? 아니, 어시스턴트가 무슨 말을 했길래?"

"나를 깔보는 눈으로 '그렇게 한심하게 구니 연애상대가 없지' 라는 거 있지!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그럼 그 전에 뭘 했는데...?"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말에 박사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허공에 외쳤다.


"섹스하고 싶다!"

"엇, 어? 어?"


그녀가 당황한 사이 박사는 그 단어를 몇 번이나 강조하며 아주 열정적으로 복창했다.


"섹스! 섹스하고 싶어! 누구라도 좋으니, 섹스하고 싶다아아! 섹스!"


한창 흥분으로 가득 차 상스러운 말을 지껄이던 박사는 돌연히 고개를 홱 돌려 테레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후드 속 텅 빈 동태 눈깔의 초점이 마치 '시에스타의 빨간 마법사 모자를 쓴 양'처럼 양쪽 눈 끝을 향해 죽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수르트가 그냥 가버렸어."


박사는 태연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방금 전까지 감정에 북받쳐 울고불고 생 지랄을 떨었다는 걸 기억도 못하는 것처럼.


테레시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PRTS에 연결된 박사의 이성 상태를 다시금 슬쩍 확인했다.

임시방편으로 늘려놓은 이성이 간당간당하다는 걸 알리듯 숫자 '1'이 불 꺼진 형광등마냥 껌뻑껌뻑이고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업무고 나발이고 진행할 수 없었다.

마침내 체념한 그녀는 일단 박사의 집무실 뒷쪽에 있는 응접실 쪽으로 데려가 잠시 잠이라도 재우기로 결정했다.


"자, 이리 와. 넌 우선 좀 휴식을 취해야겠어..."


테레시아는 멍하니 침 한 줄기를 질질 흘리고 있는 박사의 어깻죽지를 감싸 부축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박사를 향해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그 편이 박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도 좋았고, 또한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가 박사에게 건네고 싶은 위로의 의미이기도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 로도스 아일랜드에는 너한테 호감이 있는 오퍼레이터들도 많아 보이던데, 언젠가 마음이 맞는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박사는 테레시아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하염없이 땅바닥만 쳐다봤다.


"...그게 문제가 아닌걸."

"...어?"


박사는 여전히 계속 땅바닥만 쳐다본 채 중얼거렸다.


"애초에 로도스는 사내 연애 금지야."

"아..."

"켈시가 그랬거든. 오퍼레이터들한테 괜한 사심 가지지 말라고..."


박사가 다소 씁쓸한 말투로 말끝을 축 늘였다. 그의 고개가 위로 까딱 올라갔다.

  

"사실 맞는 말이지...위계적으로 따지면 난 결국 상사일 뿐이고, 그게 공정함에 어긋난다는 것도..."


테레시아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응접실까지 가는 길은 몇 미터 안 되었지만, 어쩐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근데 로도스는 내 전부야. 잠도 밥도 전부 이 함선에서 해결하고, 내 인간관계의 구십 구 퍼센트는 로도스를 통해 이뤄지지. 로도스의 일원들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어졌어...켈시도 아미야도, 엘리트 오퍼레이터들도. 로즈몬티스가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야."


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말이지, 가끔은 그게 나를 구속시킨다는 느낌이야...구속이라,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지? 난 이 테라에서 평범한 존재가 아니고, 내 손에 대의가 주어져 있음에도...난  가아아끔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존나게 사랑하고, 존나게 섹스하고, 존나게 단순하게."


테레시아는 박사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론 기쁜 구석도 없지 않았다. 이 테라의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건, 그만큼 이제는 박사가 자신을 진정으로 이 세계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응접실로 박사를 데려온 테레시아는 소파에 박사를 눕혔다. 그녀는 박사의 후드 속에 손을 집어넣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박사는 많이 피곤했는지 벌써부터 눈꺼풀이 감길락 말락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테레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박사의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테레시아..."

"미안, 박사. 진짜 테레시아였다면 좀 더 좋은 위로를 건네줄 수 있었을 텐데. 잘 자." 


이걸로 자신이 박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끝났다...

테레시아는 그 말을 끝으로 박사가 가진 검은 왕관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박사의 손이 거칠게 테레시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박사?"


후드 속 박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욕정에 가득 찬 그 눈빛이.


"당신은 진짜 테레시아가 아니야..."

 

박사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반대쪽 손으로도 테레시아의 나머지 손목을 붙잡았다.


"그래, 난 그저 테레시아의 기억과 감정을 가진 왕관 속 프로그램일 뿐이야, 박사."

"바로 그거야, '문명의 존속' 씨. 바로 그거라고."


박사는 '테레시아'의 손목을 붙잡은 상태로 우악스럽게 밀고 나가더니 이내 그녀를 확 덮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테레시아는 응접실 바닥에 뒤로 넘어졌다.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칼과 드레스가 바닥에 넓게 흐드러졌다.

그리고 그 위에ㅡ 박사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꼬옥 붙잡은 채, 무릎을 꿇고 그녀의 몸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한낱 프로그램이라 한들 허약한 박사의 저항 따윈 가볍게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박사를 내버려두었다.

테레시아였다면 좀 더 현명하고 재치 있는 방법을 사용했겠지만, 방금 전 박사의 말로 떠오른 약간의 호기심과 반발심 때문에 그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 보았다.

자신은 진짜 테레시아가 아니니까, 테레시아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해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아미야도 없으니 말이다.


"어머..."


테레시아는 수줍은 척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박사는 맛탱이가 가버린 눈깔과 함께 불규칙적인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네 말대로 넌 그저 프로그램일 뿐이니까...인권이 있을 리 없잖아..."

"꽤나 적극적이네, 박사. 네가 이런 행동을 할 줄 테레시아도 몰랐을 거야."

"사람이 아니라면...마음껏 다뤄도 상관없겠지..? 응?"


야릇한 분위기에 '테레시아'는 어쩐지 정말로 부끄러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인간에 좀 더 가까웠다면 분명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을 실감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눈에 박사의 후드 속 붉게 상기된 얼굴과 흔들리는 동공이 비춰졌다.

시선은, 그녀의 옷 가운데에 뚫린 가슴 구멍을 향하고 있었다.

몸을 가리는 우아한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뽀얀 살갗은 그의 추잡한 욕망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렇게 야한 구멍을 뚫어놓으면... 만지고 싶을 수밖에 없잖아..!"


박사가 바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테레시아는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띠며 가볍게 눈을 감았다.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태도였지만 박사의 손은 이미 멈출 수 없었다.


덥석.

아! 마왕님의 가슴...

상냥한 품성만큼이나 따뜻하고, 그 안에 숨겨진 말랑하고, 부드러운...

손끝에 전해지는 촉촉한 감각과 앙증맞게 튀어나온 꼭지의 형태...


"어..?"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잠시 얼어붙었다.


분명,

전해지는 것은 그런 느낌이어야 했는데.


박사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양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쥐고, 몇 차례 조물댔다.

그러나 느껴지는 것은, 아주 약간의 탄성이 있는 딱딱한 덩어리.

흡사 실리콘 같은 그런... 


"...어? 어?"

"왜 그래? 박사."


박사의 눈밑에서 테레시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뭣...패드? 아니면 보형물..? 그런 거야?"


그러자 그녀가 입가로 손을 가져가며 쿡쿡 웃었다.


"그럴 리가... 난 테레시아의 형태를 모방해서 태어난 존재지만, 백 퍼센트 완벽한 모방은 아니거든."

"아니, 잠깐..."


'테레시아'는 털썩 주저앉고 만 박사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그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리고는 박사의 뒷목을 꼬옥 움켜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박사는 그토록 원하던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어때?"

"아, 차가워...딱딱해...공허해..."


웃음을 참기가 힘든지 테레시아의 입가에서 자꾸만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그녀는 해탈한 듯 멍해져버린 박사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박사는 믿을 수 없다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양 손과 테레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곤 광기 어린 채 다시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아아아...!"


또 다시 바닥에 자빠진 테레시아와 박사는 한 차례 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박사는 곧바로 그녀의 드레스를 찢어발길 기세로 마구 헤집고 들추었다.

마치 보물이라도 있는 것 마냥 흥분에 겨워 날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행동을 우뚝 멈췄다.

그의 눈 앞에 들어온 것은ㅡ

핑크색, 레이스가 달린, 테레시아의...팬티였다.


"우오오오옷! 섹스!! 섹스!!!!"


환희의 비명인지 아니면 그냥 성욕에 사로잡혀 처량하게 울부짖는 것인지, 응접실 안에는 박사의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슴이 가슴같지 않다 해도 괜찮다!

구멍만 뚫려 있으면 그냥 뭐, 속된 말로 리얼돌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이미 팬티 한 장으로 머리에 섹스를 가득 채운 박사의 이런 내면은 이미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질 않을 것이었다.


드레스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기어들어간 박사는 그 핑크빛 속옷 안에 숨겨진 핑크빛 속살을 보고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박사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두 번째로 당황한 박사가 계속해서 팬티를 붙잡으려 그녀의 사타구니를 긁어 댔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분명히 성기를 빳빳하게 고무시키는 매혹적인 팬티였지만, 그것은 도저히 손에 닿지 않았다.


이미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놓아버린 박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테레시아'의 드레스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무작정 돌진하려 했다.

아무래도 가랭이 사이에 직접 코를 박아봐야 진실을 판별할 수 있다고 믿은 모양이었다.


"자, 잠깐! 그렇게 해 봐야 소용없어!"


순간 화들짝 놀란 테레시아는 박사를 피하기 위해 뒤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날렵하게 일어났다.

추잡하게 땅바닥을 기던 박사는 그녀를 따라 무릎을 짚고 힘겹게 두 다리를 세웠다.


"무슨 소리, 내 코로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으..."


'테레시아'는 쭈뼛쭈뼛 망설이더니 이내 드레스를 위로 확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릿빛만큼이나 연한 분홍빛 팬티가 응접실 백색광에 환하게 비춰졌다.

희미한 노이즈가 속옷 라인을 따라 지직거리는 것도 보였다.  


"이건 진짜 팬티가 아니야..."

"말도 안 돼...그것마저...?"

"애, 애초에 그녀는 알몸 모델링을 구현시켜 놓지 않았으니 섹스 같은 건 할 수 없어."


박사는 그녀의 말에 충격받아 입을 쩍 벌렸다.

정말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박사는 뒤로 몇 발자국 비틀거리더니 삽시간에 기운이 다 빠진 채 옆의 소파에 풀썩 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 섹스...내 섹스가...흑흑..."


그리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아닌가.

적당히 박사의 페이스에 장단만 맞춰줄 생각이었던 테레시아는 그 눈물에 살짝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그는 섹스에 진심이었으니 말이다.


테레시아는 잠시 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박사의 훌쩍임만이 방안에 남은 가운데 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뭔가를 고민했다.


곧 그녀는 평소대로의 상냥한 미소를 지은 모습으로 회귀했다. 

그것은 마음을 다잡은 자의 평온한 태도였다.


'테레시아'는 박사에게 천천히 걸어가 그 옆에 슬며시 앉았다.


"박사."


그녀는 박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박사는 그 말을 못 들은 체 그냥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해."


테레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박사는 계속 침묵을 유지하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으나, 사과를 표했음에도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마침내 박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박사와 눈이 마주친 '테레시아'는 싱긋 웃으며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순간 박사를 향해 갑작스럽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입술이 박사의 입술과 교차하며 뜨거운 욕망의 카타르시스가 피어올랐다.

가볍지도 진하지도 않은 입술과 혀의 미끈한 마찰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박사와 테레시아는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거의 동시에 눈을 감았다.


'테레시아'는 박사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칠 듯이 빠르게 진동하고 있는 그 심장은 그가 그녀와는 달리 살아있다는 걸 증명했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아도 감정은 몸에서 몸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심장 소리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에... 그녀는 약간의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땠어?"


짧고도 길었던 키스를 마치고 눈을 뜬 테레시아가 박사에게 물었다.


"...우뭇가사리 맛이 나..."


약간은 실없는 대답에 테레시아는 피식 웃었다.

박사도 같이 웃었다.


"이성이 좀 돌아온 모양이네?"

"...그런 것 같네."


박사는 자기 머리 위에 끈덕하게 얹혀진 검은 왕관을 만지작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하아...아주 잘."


박사는 깊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박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이 상황이 불편한 건지 테레시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저기, 테레시아 씨, 오늘 있었던 일은 어떻게...잊어줬으면 하는데...으, 아미야와 켈시가 오기 전에 어서 왕관을 제자리에 가져다놔야겠어...분명 큰일 날 거야..."


박사는 횡설수설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그때였다.


"...박사."


테레시아가 박사의 손을 붙잡았다.


"나, 아직 네 소원을 못 들어줬는데."

"어? 소원?"


그녀는 박사를 조금씩 소파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여전히 상냥한 그 얼굴 그대로.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오갔다.


"섹스하고 싶다며, 응..?"

"그, 그치만...네 몸으로는..."

"그래, 그렇지...그래도..."


테레시아는 배시시 웃음을 짓더니 수줍게 입을 앙 벌리고 손가락을 아랫입술에 살포시 가져다 댔다.



"펠라 정도는 가능할지도?"



박사의 이성이 바닥을 찍는 순간이었다.





테레시아는 정실입니다

명일방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