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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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리지도 않고 또 돌아온 링 애호 소설임미다. 늘 올리던 링 짤 대신 슈 짤이 들어간 이유는 딱히 없음. 그냥 한 번쯤 넣어보고 싶었어서. 


2. 죄송함미다. 사실 처음 이 작품 구상할 때는 한 화에 하루씩 할애해서 링과 박사의 2주 동안의 여행을 쓰려고 했는데...그래서 14화로 시즌 1 완결치려고 했는데...아오 젠장. 슈가 너무 좋아서 슈 글을 쓰고 싶은데, 그렇다고 딴 작품 파기는 귀찮고. 마침 슈가 링 동생이겠다 한 번 끼워넣어 봤는데, 그게 실수였음. 엄청 늘어지네. 이러다 시즌 1 완결 내년에 나겠다. 


3. 이번 편이 마지막 빌드업이고, 다음 편부터는 슬슬 클라이맥스임. 좀 많이 재미없을 수도 있어. 박사의 능동성과 순간 판단력을 묘사하려고 했는데...아무리 읽어 봐도 잘 됐는지 아닌지 모르겠거든. 그래도 예쁘게 봐 주면 고맙겠다. 


4. 이벤트 회서리 스포일러 있고, 오리지널 설정 조금 들어감. 이런 요소 싫어하는 명붕이들은 주의 바랄게. 


5. 댓글, 피드백, 아카콘, 소재 추천 모두 환영. 다만 언제 쓸지는 잘 모르겠어. 지금 이거 말고도 쓸 게 밀려서 쉬는 시간에는 거의 글만 쓰고 있거든.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만들어서 가져와볼게. 


6. 늘 읽어주는 명붕이들, 너무너무 고맙다. 


7. 아, 그리고 소설 모음집 말인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그거 혹시 스크랩해놓고 쓰는 사람 잇음...? 잇으면 한 번 손보려고. 투표 올려놓을테니까 한 번씩 눌러주면 고맙겠네.  


잡설이 길었네,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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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2일 14:33. 


염국 대황성. 


점심을 먹은 뒤, 링은 대황성을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슈는 농사일을 마저 하러 갔고. 



“...박사님, 도대체 뭔 일입니까? 설명은 해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일단 거기 앉아 봐라, 좌락아.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마.” 


“저 검술 수련 시간인데요.” 


“시간 내 주면 오늘 저녁도 내가 만들게.” 



그리고 나는 툴툴대는 좌락을 앞에 두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슈와 대황성을 노리는 흑막의 계획을 알게 된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다만 그런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 


상대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으니까. 


따라서 쓸 수 있는 패라면 아낌없이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뭔데요.”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는 이 녀석도 그 패 중 하나다. 



“너, 슈 좋아하지?” 


“...갈랍니다. 수고하십쇼.” 



내 말에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몸을 일으키는 좌락. 


순수하게 부끄러워하는 모습 자체는 흐뭇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내가 이 녀석한테 장난치려고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니다. 



“아니, 놀리려고 부른 거 아니라고. 진지하게.” 


“...그렇다 치죠.” 


“그리고 염국도 사랑하지?” 


“네.” 


“그럼 만약 지금 슈랑 염국 둘 다 위험한 상황이라면 어떡할래?” 



사랑에 빠져 있고, 우직하며, 의외로 수줍음도 많이 타는 청년 좌락이 아니라. 


염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고위직 공무원, 사세대 지촉인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지. 


아니나다를까 염국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눈에 띄게 진지해지는 좌락.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런 상황이면 넌 뭘 할 거냐고.” 



내 말에, 좌락이 결연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진짜로?” 


“네.” 



아무리 되물어도 녀석의 얼굴에 서린 결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에 조금 안도하며, 나는 조심스레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거 대단하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건 훨씬 더 간단할 거야. 네 목숨을 바칠 필요도 없을걸, 아마.” 


“무슨 말씀이시죠? 박사님, 뭘 알고 계신 겁니까?” 



좌락의 의심 서린 시선에 실없이 웃으며, 품에서 전술 단말기를 꺼내 든다. 


거기에는 조금 전 그려 두었던 데몬의 스케치가 떠올라 있었다. 



“이거 뭔지 알아?” 


“아뇨. 처음 보는데요. 벌레입니까?” 



데몬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에게, 놈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출한다. 


원래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지. 


데몬은 사람의 인식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급격히 강해지는 존재니까. 


잘못 발설했다가 나라 하나 사미 꼴 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일 터. 



“응. 극동에서 발견된 신종 병충해야.” 


“...예?” 



하지만 내가 하려는 건 조금 다르다. 



“어제 로도스 비상연락망을 통해 우리 쪽 곤충학자들이 보내 줬거든. 변종 메뚜기인데, 잡식성이라 눈에 띄는 건 다 먹는대. 조만간 염국에서도 대량발생할 가능성이 있대서.” 



데몬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편집하고 조작해, 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저해한다. 


원래라면 실체가 없는 데몬에게 의미와 정의를 부여해 현실로 끌어내리고, 일반인도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존재로 격하시킨다. 


이것이 내가 고안한 첫 번째 방법. 


나름 자신만만하게 꾸며 낸 계획에, 좌락이 난색을 표했다. 



“...들은 바가 없는데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흠천감* 쪽에서 뭔가 소식이 있었을 텐데.”  

 

(*주: 흠천감은 염국의 재앙정보전달 기구.) 


“흠천감도 알고는 있을걸. 아마 사흘쯤 뒤면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고. 여기서 염국 경성까지는 거리가 좀 있잖아.” 



적을 속이려면 일단 아군부터 속이라고 했던가. 


혼이 담긴 거짓말을 연발하는 나를 보며, 좌락이 눈을 치떴다. 



“저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지.” 



이것조차도 구라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떻게든 데몬과 쉐이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고 이 녀석을 납득시켜야 했으니까. 


녀석이 데몬에 대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품는 순간, 데몬은 그 공포를 먹고 강해질 테고. 


왕과 다른 쉐이에 대해 아는 순간 일이 극단적으로 복잡해진다. 


이 일이 쉐이의 테러라는 걸 알면, 염국은 당연히 쉐이를 더욱 경계할 테고. 


그럼 나와 링의 여행은 물론이고, 다른 남매들의 거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하지만 후회도 네 몫일 거야, 좌락.” 


“......” 


“생각해 봐. 지금 네가 날 믿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을. 너는 살아남겠지. 뛰어난 무사니까.  하지만 대황성은 불타 무너질 거고, 너는 슈의 시신을 품에 안은 채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을걸.”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걸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 좌락이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본다. 


이런 반응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날 믿으면 일이 훨씬 쉬워져. 난 네게 그렇게 복잡한 걸 요구할 생각이 없거든.” 


“......” 


“나는 내 처제가 무사했으면 좋겠고, 너한테도 별 탈 없었으면 좋겠어. 염국 사람들도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고. 너도 그걸 바라는 거 아냐?” 


“...큭.” 


“그걸 위해 잠깐만 손을 빌려달라는 거야. 아주 쉬워. 반나절도 안 걸리는 일이야.” 



피식 웃으며, 나는 고개를 숙이고 파르르 떠는 좌락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그로부터 한참 뒤. 


좌락이 어렵게 입을 뗐다. 


역시, 아무리 똑똑하고 강해도 아직은 애구만. 



“너, 이 성 사람들한테 공문 같은 거 뿌릴 수 있어?” 


“쉐이가 관련된 일이라면 상부의 지침을 기다려야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대황성 성주님에게 보고한 후 독단적으로 해도 상관없습니다.” 


“응. 다행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원시원한 대답이었다. 


조금 안도하며, 나는 전술 단말기의 스크롤을 내렸다. 



“이 병충해, 되게 사납고 파괴적이긴 한데 퇴치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거든.” 


“뭔데요?” 


“물에 양파즙이랑 알코올을 섞어서 뿌리면 돼. 양파의 케르세틴 성분이 알코올이랑 결합하면 이 벌레의 껍질 성분을 녹이는 효과를 내거든.” 



사실 모른다. 


어차피 전부 구란데, 케르세틴이 알코올이랑 결합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 알 바인가. 


하지만 여기서는 전문성을 보여줄 타이밍이니만큼, 최대한 열정적으로 설명해야겠지. 



“이 벌레의 스케치랑 병충해에 대한 설명, 그리고 퇴치법을 적고, 집집마다 퇴치제를 한 통씩 구비해 두라는 내용의 공문을 꾸며 줬으면 해. 퇴치제 제작 비용은 나중에 로도스에서 부담할게.” 


“...어려운 일은 아니로군요. 바로 하면 됩니까?”  



선선한 녀석의 대답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원래 이런 허무맹랑한 계획에 상대를 동참시킬 때는 어떤 확신을 주는 게 중요하다. 


믿으면 최대한 이득을 볼 수 있고, 배신당해도 최소 손해볼 일은 없다는 확신. 


녀석이 이렇게 순순히 납득한다는 건, 적어도 내 의도대로 됐다는 거겠지.  



“응. 부탁할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아무 일 없으면 저 정말 화낼 겁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일단 바로 뿌리겠습니다. 이 성에 양파나 술이 없는 집은 거의 없으니까, 비용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좌락은 내 전술 단말기에서 그림을 베끼더니, 부지런히 자리를 떴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플랜 A, 성공적. 


솔직히 좌락도 성깔이 있으니만큼 이것보다는 훨씬 반발이 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나를 믿어 주기 시작한 걸까. 



“...하.” 



아무튼, 다음은 플랜 B다. 


플랜 A가 데몬에 대한 대책이었다면, 플랜 B는 그 데몬을 이끄는 쉐이를 상대하기 위한 방책이다. 


내가 아는 링이라면, 내가 곁에 없어도 쉐이의 파편 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거기에 데몬이 얹히면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왕이 무언가 술수를 벌인다면 일이 돌이킬 수 없이 꼬인다. 


이를테면 놈들 중 하나가 링의 발을 묶는 사이, 나머지 하나가 성으로 들어와 개판을 친다거나. 


조금 악랄하게 생각하면, 놈들이 나를 인질로 잡으려 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어쨌거나 왕은 내 존재를 알고. 


내가 링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미 뼈저리게 느꼈을 테니까. 


패배할 걸 알면서 링한테 모든 데몬을 쏟아부을 정도로 멍청한 놈도 아니고. 



“...하.” 



하지만 그 술수를 역으로 이용한다면 어떨까. 


놈들이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나를 노린다면, 나는 품에 비수를 숨기고 매복해 있다가 역공을 가하면 그만. 


내 생각대로 된다면, 이 플랜 B는 상당히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줄 터다. 


나는 천천히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시가 그리고, 링이 글귀를 적어 넣었다는 그림. 


분명히 쉐이 남매들 간의 비상통로 비슷한 무언가라고 했었지. 


아직 링한테 사용법을 못 듣긴 했지만, 괜찮다. 


지금부터 한번 알아보고, 안 되면 나중에 링이나 슈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조심스레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 바닥에 깔고, 고민을 시작한다. 


이걸 어떻게 쓰면 될까. 



“시? 들려?” 



말도 걸어 보고.



“들어갈 수 있나?” 



혹시 이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서 두드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하….” 



대신 굉장한 자괴감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이거 되긴 하는 건가. 


나 언제까지 그림이랑 얘기해야 돼. 


현자타임이 온 내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을 때. 



“어머, 형부. 언니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 



품에 바구니를 안은 슈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타이밍 좋네.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나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슈야, 갑자기 미안한데 이거 쓰는 법 좀 알려주라.” 


“그 그림? 왜?” 


“갑자기 니엔한테 할 말이 생각나서. 좀 급한 일이야.” 


“아, 그런 거야? 그럼 알려줄 수 있지. 어디 보자….” 



바구니를 내려놓고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오는 슈. 


싱그러운 풀 냄새가 코끝에 스치고, 명랑하게 반짝이는 감청색 눈이 내 옆에서 그림을 내려다본다. 



“이 그림의 비밀은 링 언니가 쓴 이 시야.” 


“시?” 


“응.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옛 염국어로 적은 건데, 언니가 이 중에서 딱 한 글자만 틀리게 썼거든. 바로 이거.” 


“...오.” 


“이 글자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면 쓸 수 있어. 나머지는…붓이랑 먹물로 그림 위에 하고 싶은 말을 적으면 돼.” 



…그런 거면 나 혼자서는 절대 알 수가 없었네. 


난 고대 염국어는커녕 그냥 염국어도 서투른데. 


속으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지만, 꾹 억눌러 참았다. 


그때, 슈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근데 답장이 안 올 수도 있어. 시 그 아이, 나를 껄끄러워하거든.” 


“너를?” 


“응. 맨날 잔소리만 한다고.” 



언니의 숙명이지, 키득거리는 슈. 


그 해맑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무리 봐도 예쁘고 마냥 착하기만 한 처제인데.  


이런 애가 시를 질리게 할 정도로 잔소리를 했다고? 


하지만 고민도 잠시, 나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혹시 시가 답장하면 연락 좀 자주 하라고 일러둘게.” 


“응. 부탁해.” 


“고마워, 슈.” 


“고마우면 아시죠?”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해진 내 앞에서, 슈가 맞혀 보라는 듯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인다. 


아니, 그렇게 맑은 얼굴로 쳐다봐도 모르겠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슈가 활짝 웃었다. 



“나 낮잠 자게 무릎 좀 빌려 줘.” 


“???” 

“나도 가끔은 치유받고 싶단 말야.” 



그러니까 무릎베개를 해 달라는 거구나. 


  

“...슈, 그건 안-”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렇지. 


천하의 법도가 지엄한데, 한 여인의 지아비가 어찌 외간 여자에게 몸을 가벼이 허락하겠는가. 


링이 알면 날 죽이…지는 않을 거고. 


복상사할 때까지 쥐어짜겠지. 


응? 오히려 좋은 건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사이. 



“얍.”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내 다리 위에, 슈가 냅다 머리를 들이밀었다. 


한없이 폭신하고 부드러운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녀의 꼬리가 기분 좋다는 듯 살랑살랑 흔들린다. 



“하아…치유된다.” 



아니, 이게 뭐람. 



“아니, 슈야….” 

“뭐 어때, 가족인데 무릎 정도는 괜찮잖아. 언니도 이해할 거야.” 


“그게 아니라.” 


“그럼 뭐?” 



슈가 무릎 위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한없이 깨끗하기만 한 그 눈동자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잠깐 붓이랑 먹물만 좀 가져올게.” 



그 말에 살랑거리던 슈의 꼬리가 빳빳이 서더니, 거실 한구석의 서랍장을 열고 먹물 통과 붓을 꺼내 내 눈앞에 내려놓았다. 


…진짜 꼬리를 잘 쓰는구나. 


링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일어나는 게 싫은 건가. 



“언니처럼 내 꼬리를 붓으로 쓰게는 못 해 줘.” 


“...아냐, 고맙다.” 


“좀 실망한 표정인데? 기대했어?” 


“아니라고요, 좀.”


“힝. 형부가 매정해.” 


“...아니, 하….” 



짐짓 우는 시늉을 하는 슈. 


…그래, 이제 와서 뭔 말을 하겠어. 



“...더 필요한 거 있어?” 


“쓰다듬어줘.” 


“그리고?” 


“옛날이야기 들려줘. 노래도 불러 주면 더 좋고. 형부 노래 잘하잖아.” 



난생 처음 부는 슈의 천진난만한 어리광이 영 낯설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대황성의 수호신이고, 쉐이의 파편이라고는 해도 한 명의 인격체니까. 


가끔은 누군가한테 응석 부리고 싶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렇다면 조금 어울려 주는 게 도리겠지. 


지금 당장 왕이 이 아이를 조지러 달려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야기 먼저 들려줄게.” 


“좋아!” 



햇살의 온기가 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분명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슈는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나와 링의 관계를 빗댄, 바람과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다면 나는 지금 슈에게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을까. 


어떤 감정을 전하고 싶은 기분일까. 



“옛날에, 어느 황폐한 땅에 새싹 한 포기가 움텄어.” 



답은 간단했다. 


그녀의 노고에 대한 감사. 


그리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늘은 비를 주지 않았고, 대지는 바싹 마른 상태였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도 했고, 지진이 일어나 세상이 한바탕 뒤집어지고는 했어.” 


“...푸훗.” 


“하지만 그래도 새싹은 무럭무럭 자랐지. 강하고, 현명하고, 또 아름답게. 몇 년이나 지났을까, 작은 풀 포기는 어느덧 어엿한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있었어.” 


“대단하네. 그 품종, 한번 연구해 보고 싶은걸.” 



그런 마음을 벌써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슈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었다. 



“일단 들어봐.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의 그늘 아래로 도망쳐 왔어. 나무는 그들에게 물었지. 여기서 뭘 하냐고.” 


“응.” 


“사람들은 대답했어. 삶이 너무 고단합니다. 아무리 밭을 갈아도 작물이 나지 않고, 몇 번을 기도해도 하늘이 비를 내려 주지 않습니다.” 



나무는 슈였다. 


그 누구도 그녀를 키워 주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홀로 이 대지 위에 피었다. 


강인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또 자애롭게. 



“나무는 그들이 안타까웠어. 그녀가 살아 온 법을 알려주고자 해도, 그들은 따라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만의 방법을 찾기에 사람은 너무 나약했거든. 그래서 나무는 정했지.” 


“뭘?”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로. 나무가 몸을 한 번 흔들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어. 나무가 정성껏 가꿔 온 과일도 후두둑 떨어졌지.” 



그런 그녀였기에, 인간들을 연민했다. 


보답받지 못한 그들의 노력에 가슴을 졸였고. 


삶에 찌들어 죽어 가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나무는 말했어. 내 열매로 배를 채우고, 내 잎을 가져가 거름을 만들거라. 내 가지를 잘라 농기구를 만들고, 내 수액을 뽑아내 밭을 윤택하게 하거라. 그리하여 너희의 삶을 일구거라.” 



그리고 그 고뇌의 끝에,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했어. 나무의 일부를 가져가, 자신들의 삶 위에 심었지. 이윽고 황폐하던 땅에 생명이 피었어. 황무지는 밭이 되었고, 지쳐 있던 사람들은 다시 살아갈 의미를 얻었어.” 



머쓱해진 걸까. 


고개를 돌린 슈가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마을이 생기고, 밭은 점점 늘어났지. 하늘의 노여움도 풀린 것인지, 이따금 비가 쏟아지기도 했어.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나무는 점점 말라 갔어. 인간들이 누리는 풍요의 대가는, 결국 그녀가 모든 것을 바쳐 대신 지불한 셈이었으니까.”  


“...응.” 


“하지만 인간들은 나무의 희생을 잊었어. 이제 이 땅은 더 이상 그녀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든. 그래도 그녀는 만족했어. 자신의 희생이 누군가를 살게 했다는 사실이 기뻤거든. 그렇게 그저 울창한 산 속의 한 그루 고목이 되어, 조용히 죽어 갈 뿐이었지.” 


“...아직 안 죽었는데.” 



소심한 반격을 하는 그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나무가 있던 산에 화재가 났지. 너무도 사납고 거친 불이어서, 감히 누구도 끌 생각을 하지 못했어. 이대로 가다가는 산은 물론이고, 산 뒤에 있는 마을까지 불이 번질 위기였지.” 


“어머.” 


“나무 안에는 아직 넉넉한 수액이 있었어. 그 수액을 전부 쏟아붙는다면, 불이 마을까지 번지기 전에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나무는 마지막 희생을 각오했어.” 



슈, 여기부터는 네가 모르는 이야기일 거야. 


넌 왕이 꾸미고 있는 흉계를 알지 못하니까. 


놈의 계획에 의해 이 대황성은 곧 데몬으로 뒤덮일 거고. 


상냥한 너라면 누구보다 앞서서 이 땅을 지키고자 노력하겠지. 


자신의 몸이 부서질 때까지. 



“하지만 그때, 나무 뒤쪽에서 소리가 났어. 돌아보니까 뭐가 있었게?” 


“...뭐였는데?” 



하지만 그렇게 두지는 않아. 



“세상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는 거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남자는 등에 물지게를 지고, 노인과 여자들은 물 양동이 하나씩을 들고 있었지.”


“...아.” 


“나무는 그들을 말렸어. 너무도 무모한 짓이라고. 물 몇 동이로 끌 수 있는 불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빨리 도망치라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거절했어. 우리는 당신의 은혜를 기억한다면서. 우리를 위해 당신이 희생하신 만큼, 우리도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 



네 곁에는 링이 있을 거고. 


내가 있을 거며. 


좌락과 대황성 사람들이 있을 거야.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네가, 마지막까지 보답받지 못할 헌신을 반복하다 스러지게 두지는 않을래.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너를 지키게 해 줘. 


그런 마음을 절절히 눌러담은 이야기가 끝나고. 


슈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직 몰라. 열린 결말.” 


“풋, 그게 뭐야. 이상해.” 



작게 키득거린 슈는, 이내 팔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굳은살이 박힌 따스한 손이 볼을 쓰다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여름 바람처럼 귓가를 휘돈다. 



“...고마워, 형부. 정말 좋은 이야기였어.” 


“그랬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있잖아. 만약 그때 마을 사람들이 오지 않았더라도…나무는 행복하게 희생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했을 테니까.” 


“원작 왜곡하지 마.” 



어림없는 소리.  


표정을 굳히며 플래그를 칼같이 차단하자, 슈가 집이 떠나가라 폭소했다. 



“아, 진짜. 나 형부 너무 좋아.” 


“나도 너 좋아해. 가족으로서.” 


“...쳇.” 


“아무튼, 이제 슬슬 자. 노래 불러줄게.” 


“응.”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는 슈. 


그런 그녀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허밍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가 없는 흥얼거림에 가까운 노래. 


음악으로서 즐기기는 조금 애매하지만, 경험상 잘 때 듣는 노래로는 이쪽이 훨씬 좋았다. 



“...응, 형부….” 



그리고 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노래를 시작한 지 오 분 만에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슈. 



“잘 자, 슈.” 



링이 네 곁에서 악몽을 물리치고, 잠깐이나마 가을 같은 꿈을 꾸게 해 주기를. 


그런 마음을 담아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나는, 이내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디.” 



아까 슈가 짚어 줬던 틀린 글자를 손가락으로 덧그리고.


붓을 먹물통에 푹 담근 뒤, 조심스레 그림의 여백에 몇 글자를 써 보았다. 



[시, 있어?] 



다음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써 낸 글자가 그대로 이리저리 뒤섞이기 시작하고. 


끝내는 문자의 형태를 잃고, 하나의 거대한 먹물 방울 비슷한 무언가로 변하더니. 


자연스레 어떤 형상을 이루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오, 박사!] 



혀를 쭉 빼물며 장난스럽게 손을 흔드는 그 사람. 


그녀가 무어라 입을 옴짝거리자,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이내 그 연기가 문자를 이루어 그림 위에 떠오른다. 



[오랜만이야! 나 안 보고 싶었어?] 



색채도 없었고, 그림체도 수묵화풍이었지만…내가 저 여자를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치가 떨려오는 것을 겨우 참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그림 위에 썼다. 



[...니엔.] 


[그래그래. 신혼여행은 좀 어때? 순조로운가?] 



분명히 나는 시를 불렀는데 얘가 튀어나온 건 둘째치고.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구나. 


내가 어디 있는지, 왜 슈의 그림을 통해 너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런 세세한 것을 따져 묻지 않을 정도로 태평한 성격이 아닐 텐데. 


혹시 전부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 문제가 좀 생겼어.] 


[...흐음, 그래. 슬슬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왜 진작에 귀띔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런 사소한 건 제쳐두자. 



[총웨 형님이랑 시, 옆에 있어?]


[아니. 청소중인데. 로도스에 바다 곰팡이가 좀 피어서.]



…?


바다 곰팡이라면, 설마 명흔? 


로도스에 그게 왜 있어?


도대체 나 없는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야. 


호기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그런 질문이 아냐. 



[...도와줘. 너희들의 힘이 필요해.]   


[뭐야, 설마 쉐이를 사냥하기 위해 쉐이를 쓰겠다는 거야?] 


[사냥이 아니야. 지키는 싸움이지.] 


[...헤에. 뭔가 근사한 계획이 있는 표정인데. 흥미가 돋는걸.] 


[그쪽에서 이쪽으로 올 수 있어?] 


[응. 몇 초면 가. 나라도 일단 먼저 갈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니, 일단 들어줘. 그리고 총웨 형님이랑 시한테 전해 주고.] 


[좋아. 귀 씻고 듣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니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생각한 계획을 전부 털어놓았다.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이 싸움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짠 판에서 너희들이 어떤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지까지. 


몇 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전부 들은 니엔의 얼굴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데?]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이런 재미있는 극을 놓칠 수는 없지. 나중에 대본으로 쓰면 오백만 관객쯤은 가볍게 동원하겠는데. 좋아, 기꺼이 협력할게.] 


[응. 일단 내가 부를 때까지 대기해 줘.] 


[오케이. 그럼 나중에 봐, 형부. 혹시나 슈 언니랑 바람피다가 링한테 걸리지 말고. 그땐 나도 못 도와줘.]


 

낄낄거리는 천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니엔의 모습이 사라지고. 


논밭의 풍경을 그린 그림 한 장만 남았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 진짜. 


얘랑 이야기하면 한 번을 좀 순조롭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그림을 돌돌 말아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먹물과 붓을 챙겼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남은 것은….


준비한 수단을 전부 동원해 적의 흉계를 깨부수고.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것 뿐이려나. 


그렇게 심기일전하며, 나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곤히 잠든 슈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게, 처제야.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으…형부? 지금 몇 시야?” 



슈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잘 잤어, 슈? 지금…저녁 다섯 시쯤?” 


“...엑. 큰일났네. 형부 무릎이 너무 편해서 평소보다 오래 자버렸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저녁 준비할게.” 


“더 자도 돼.” 


“아냐. 형부 다리 저릴 것 같기도 하고. 이미 형부한텐 받을 만큼 받았어.” 



서글서글하게 눈웃음치는 슈. 


나는 쓰게 미소지으며 그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받을 만큼 받았다면서 그대로 누워 있는 건 뭐니.” 


“에헤. 5분만 더.” 



내 허벅지에 볼을 비비는 슈. 


차마 떼어내지도 못하고 진땀만 흘리고 있던 그때. 


현관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박사님, 말씀하신 공문 뿌리고 왔습니다. 아마 오늘 안으로 집집마다 병충해 퇴치제가 갖춰질 거예요. 아, 성주님께 보고드릴 때 정보 출처가 로도스 아일랜드라고 말씀드렸더니 박사님을 한 번 뵙고 싶어 하…시….?” 



좌락. 



“그대여, 다녀왔어. 대황성이 생각보다 커서 좀 오래 걸렸네. 혼자 둬서 미안해. 말 나온 김에 의지를 다지며 둘이서 술이라도 한…잔….?”



그리고 하느님보다 더 높다는 마눌님. 


가벼운 표정으로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오던 두 사람이, 딱 붙어 있는 나와 슈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철컹, 좌락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을 구르고. 


링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한다. 



“...그, 대여?” 


“......” 


“아니, 얘들아. 내 말 좀 들어봐. 이건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필사적으로 슈를 밀어내며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대가 불륜을….백년가약을 맺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그것도 내 동생이랑…천지신명이시여….” 


“이…이 찢어죽일 놈이! 감히 슈 씨를 범해?” 



이미 눈이 돌아간 두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반쯤 장난치고 있는 듯한 링은 그렇다 치고. 


좌락은 진짜로 화난 것 같은데, 이거 어떡하지. 


설상가상, 슈가 히죽히죽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말 좋았어. 고마워, 형부.” 


“아니, 슈야! 넌 또 무슨 소리를….” 


“그래도 (이야기의)마무리가 아쉬웠어. 이왕이면 끝까지 했으면 했는데. 뭐 어때, 시간은 많으니까. 그건 다음 기회에 하자. 알겠지, 형부?”  



그리고 슈의 그 장난은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 부어진 기름….


아니다, 멜트다운 난 원자로 위에 때려박힌 플루토늄에 가까웠다. 



“이 비겁한 놈! 죽여버리겠다!” 



광분하여 검을 주워 들고 나를 향해 쇄도하는 좌락. 



“...잠깐만, 그대여. 혹시 진짜야? 아니지? 그대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아는걸. 그러니까 빨리 아니라고 말해 줄래? 왜 입을 닫고 있는 거야? 응? 응?” 



그리고 장난기가 싹 사라진 진지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링.



"히히, 형부." 



화룡점정으로, 떨어질 생각도 않고 계속 앵기는 슈. 


난데없이 벌어진 파국에, 나는 힘없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하, 모르겠다. 


죽자. 



쉐이 합체까지, D-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