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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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아, 반갑소...오늘은 중편 같은 테레시아 단편을 들고왔음. 이...뭐냐, 오늘 몸상태가 진짜 안 좋아서 글 퀄리티가 평소보다 별로일거임. 뇌에서 필터링이 아예 안되네. 미리 미안해. 명일방주 메인스토리 및 이벤트 '바벨'스포 있으니 주의하고. 아니, 오히려 그거 모르면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겠다. 내 역량부족이야. 미안. 


2. 내 최애는 링이지만, 정실대전을 굳이 연다면...프리스티스, 아미야, 켈시, 테레시아 이 넷 중에서는 테레시아가 제일 좋아. 프리스티스는 너무 대놓고 흑막 느낌이고, 켈시는 그냥 싫어. 아미야는 너무 어리고. 아무튼 그래서 한 번 써 봤음. 원래 이 뒤에 야설까지 구상했었는데...어우, 도저히 안 되겠음. 머리가 너무 아파. 응애 테레시아 마망 안아조 


3. 링 소설은 내일 올라감. 미안해. 


4. 늘 재밌게 읽어주는 명붕이들, 고맙다. 누가 뭐래도 너희는 내 소중한 첫 독자분들이야. 더 좋은 글로 보답할게.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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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094년 12월 22일. 


16:17, 날씨 흐림. 


카즈델 외곽. 



전투가 끝났다. 


바벨의 본대는 테레시스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요격했고, 경미한 부상자 몇을 제외하면 아무런 피해 없이 전력을 온존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연명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에 못내 괴로워하며, 테레시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인간의 살이었던 단백질이 무참히 익어 가는 매캐한 악취. 


지상을 한바탕 집어삼키고도 부족하다는 듯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불꽃의 잔재와, 땅을 적시기도 전에 검붉게 굳어 버린 피의 잔향. 


오물, 무너진 건물의 잔해, 더러운 물웅덩이에 섞인 공포와 절망의 냄새. 


전란이 잠시 불식되었음에도 여전히 이 자리에 붙박혀, 생의 마지막 단말마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망자들이 눈에 밟혔다. 


그들의 삶, 가슴에 품은 소박한 바램, 삶이 끝나는 순간에 무심코 떠올렸던 덧없는 희망까지도. 



“...아.” 



그 순간. 


물컹.


연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발 끝에 채였다. 


그 무언가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 테레시아는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손이었다. 


무딘 날붙이로 억지로 잘라낸 듯한 누군가의 오른손. 


약지와 소지가 없어진 채, 재와 먼지로 범벅이 된 삶의 흔적이었다. 


저 손은 무엇을 움켜쥐고자 했을까.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밝은 미래일까. 


배를 곯을 필요가 없는 내일? 


아니면 지긋지긋한 광석병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모르겠다. 


손은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하다못해 그 침묵하는 손이라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고 싶었다. 


테레시아는 그 손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상냥하게 품 안에 끌어안는다. 



“...미안해.” 



자신의 행동이 위선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사람이고자 했지만, 이 세상은 그녀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늘 손을 피로 더럽히기를 거부한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주검이 될 뿐. 


그럴 필요가 없는 내일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의 시신을 디딤돌 삼아 위로 올라가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테레시아는 이미 수천 살카즈의 죽음 위에 서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아무리 희망을 이야기하고 미덕을 노래해도, 시뻘갛게 물든 그녀의 손이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가 망자에 대해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한때 선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선을 관철하고자 고뇌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가 그녀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건 관계 없었다. 


이후로도 그녀는 눈에 띄는 시신의 일부를 전부 끌어안았다. 


손궤된 시신의 조각을 모으고, 전부 들고 갈 수 없는 온전한 주검에서는 유품이 될 만한 것을 챙겼다. 


이윽고 정처 없이 방황하던 테레시아의 발걸음이 방향성을 되찾고. 


망연히 휘돌던 그녀의 시선이 전장의 한 구석을 향한다. 


온 몸을 시커먼 옷으로 칭칭 감은 한 남자가, 무덤을 파고 있는 곳을. 



“...큭, 흐으윽.” 



초겨울이라고는 하나, 날씨는 이미 사늘하기 그지없다. 


대지가 단단히 얼어붙은 지도 벌써 오래된 바. 


이런 날에 장비 없이 땅을 파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삽을 쥐고 끊임없이 땅을 두드리는 남자의 손은 갈라지고 불어터져 진물이 배어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강박에 가까운 의지로 삽을 휘둘러 땅을 후려친다. 


깡. 처음에는 부질없기만 하던, 굳은 땅을 두드리는 금속음이. 


팍. 점차 얕게나마 흙이 떨어지는 부드러운 소리로 바뀌고. 


퍽. 완연히 땅을 파는 소리로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굴착기를 가져온다면 금방 끝낼 수 있었을 그 행동을 반복해 하나의 구덩이를 파낸 남자는, 검은 비닐에 감싸인 시체를 안아 올려 구덩이 안에 뉘였다. 


흙을 덮어올리고. 


조잡하게 깎은 나무 묘비를 세워 망자를 기린다. 


그리고 또 다시 삽을 들고 땅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광기와 닮은 집념이 배인 그의 행위를, 테레시아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왔으면 말을 해, 테레시아.” 



남자가 등을 돌린 채 갈라진 목소리를 토했다. 



“혼낼 거면 혼내. 지휘관이라는 놈이 전후처리는커녕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 


“치하해도 돼. 바벨 역사에 남을 전무후무한 대승을 이끌어낸 공신이라고.” 


“......” 


“무슨 말을 하든 신경쓰지 않을게. 그러니까…뭐라도 말해 주라. 제발.” 



무슨 말을 하듯 신경쓰지 않는다. 


테레시아의 귀에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더 이상 의미는 없다고. 


그냥 이 숨이 막히는 침묵에서 벗어나게만 해 달라고.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고생했어, 박사.” 



그 말이 전장에서 고인의 유품을 주워 모으던 조금 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한 탓일까. 


테레시아는 그런 그를 질책할 수 없었다. 


아니, 질책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다. 


오늘의 승리는.


그녀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남자. 


박사의 계책 덕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솔직하게 박사를 치하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정말, 정말 고생 많았어.” 



지금의 박사에게, 그 자신은 또 다른 위선자에 불과한 것을. 


자신이 왕정의 고급스러운 미사여구를 곁들여 그의 공로를 칭송한들. 


상처 입은 짐승이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동족의 상처를 핥아 주는 공허한 행위에 불과한 것을. 



“바벨의 감염자들은, 켈시는, 아미야는…그리고 나도. 네 덕분에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됐어.”  



그럼에도 입을 연 것은, 그의 마음의 짐이 조금이나마 덜어졌으면 하는 얄팍한 마음의 발로였다. 


그 말에, 박사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의 고개가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바이저 아래에서 무기질적인 회색 시선이 테레시아를 돌아본다. 



“...있지, 테레시아.” 


“응.” 


“이 모든 게 의미가 있을까?” 



전혀 뜻밖의 한 마디에, 테레시아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우리는 오늘을 써서 내일을 벌고 있어. 그 다음 날은 더 좋아질 거라고 믿으면서.” 


“......” 


“그런데, 정말 그랬어? 그렇게 힘들게 얻은 내일을, 누군가의 죽음을 쌓아올리는 데 낭비하고 있는 거 아니야?” 


“...박사.”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이어가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 


조금 전 테레시아 본인이 했던 고뇌를 그대로 녹여낸 박사의 말이 가슴에 사무쳐, 테레시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박사, 우리는 단 일 분 일 초도 낭비하고 있지 않아.” 

“......” 


“지금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고 괴롭게만 느껴지는 건, 우리가 매 순간 희생하고 있기 때문이야. 불타는 중인 장작은 몰라. 자기 몸을 불살라 피워낸 불꽃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그 온기가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안이 되는지.”  


“......” 


“설령 이 순간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의 발걸음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어. 언젠가는…전쟁이 멈추고, 광석병이나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내일이 올 거야. 거기가 우리의 종착지일 거고. 우리는 그곳을 향해 확실히 나아가고 있어. 믿어 줘, 박사.”  



그런 답답함을 담아 풀어낸 이야기에, 박사가 삽을 내던졌다. 


탱그렁, 묵직한 금속음이 고요함을 깨트리고. 



“테레시아. 스스로한테 한 번 물어봐.” 


“...뭘?” 


“방금 네 말, 너는 납득할 수 있어?” 


“...그건.” 


“너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도저히 못 하겠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안은 박사의 목소리가 조용히 떨려 나온다. 



“나는 있잖아, 테레시아. 전쟁 기계가 아니야. 그냥 한 명의 사람이야. 책이랑 체스,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알아, 박사. 난 그저-” 


“그런 나를, 네가 전쟁터로 끌어들였지. 손에 희망을 쥐어 주고, 내 머릿속에 이상을 심었어. 그 이상을 위해서 감내해야 한다며 나를 전장으로 내몰았고.”  



박사는 테레시아를 탓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와 함께 싸우기로 한 건 오롯이 박사 본인의 결정이었으니까. 


그저 박사의 음성에 배어 있는 감정은, 원망이나 분노가 아닌. 


바벨의 전술지휘관이자 테레시아의 동반자라는 입장 탓에,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삭히고만 있었던 나약함이었다. 



“너는 선한 사람이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강한 사람이지. 적어도 내가 본 너는 그래, 테레시아.” 


“.......” 


“그런 네가 진심으로 바라는 이상. 광석병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내일이라는 그 꿈. 그 미래를, 나도 믿고 싶었어.” 


“...박, 사.” 


“...미안해. 나는 더 이상 네 이상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 너도 힘들 텐데…그냥, 너무…너무 괴로워.” 



몇 명이나 더 죽여야 해? 


얼마나 많은 아군의 희생을 봐야 하고, 몇 개의 유언을 가슴 속에 매달아야 해? 


사랑받고 싶고, 마음껏 웃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고 누군가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걸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 건데. 


있지, 테레시아. 


말해 줘. 



“...왜, 나를 깨웠어?” 



그런 박사의 애타는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숙인 입술을 떨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석관에 잠들어 있던 그를 깨운 건 자신. 


결국 그를 전장으로 끌어들인 가장 큰 원인도 테레시아 자신. 


이토록 괴로워하는 그를 잔인하게 독려해, 다시 전쟁터로 나아가게 해야 하는 것도 테레시아 자신이었다.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그에게 더 이상 꿈을 이야기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처럼, 마음이 오싹하리만치 꾹 조여 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테레시아?” 



그래서 테레시아는 몸을 움직였다. 


품에 안은 유품들을 땅에 내려놓고, 박사가 내던진 삽을 주워 들어 땅을 파기 시작한다. 


팍, 딱딱한 땅이 파내어지기 싫다며 완강하게 저항하고, 삽을 잡은 손이 금세 아려 온다. 


박사의 땀과 피, 진물로 번들거리는 손잡이가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미안해, 테레시아. 내가 괜한 소리를….” 


“아냐, 박사. 나야말로 미안해.” 



뒤늦은 박사의 사과에,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다. 


그야, 지금 박사의 표정을 봐 버리면. 


자신의 가장 추한 일면을 가장 친한 사람에게 무심코 뱉어 버렸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점철되어 있을 그의 눈빛을 직시해 버리면. 


테레시아 자신 또한 무너져 버릴 테니까. 


점점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눈시울을 슥 닦아내며, 테레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네 아픔. 고민.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던 상처들. 지금껏 눈치채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아냐, 그건….” 


“아니, 눈치채지 못한 게 아냐. 사실 알고 있었어. 그냥 모른 척 했을 뿐이야. 내가 너를 납득시키지 못할 게 두려워서. 나를 위해 싸우다 피범벅이 된 네 상처를 닦아 주지 못할까 무서워서. 그냥 네가 혼자 잘 극복하기를 기도하면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낼 뿐이었지. 미련하게.” 


“......” 


“오히려 네 입으로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 적어도 너는 나를 아직 친구로 생각해 주는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 조금은 기뻐.” 



퍽, 조금 전 박사와는 달리 너무도 쉽게 땅을 퍼내는 테레시아.


그녀는 살카즈.  


순수한 인간인 박사와는 신체 능력의 기본 바탕 자체가 달랐다. 


아마 천부적인 지적 능력이 없었다면, 박사는 지금 테레시아의 곁에 서기는커녕 한참 전에 싸늘한 주검이 되었겠지. 


하지만 테레시아는 그런 박사가 좋았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같이 고민하게 해 줘. 친구로서. 네가 내 꿈을 이해하고 동참해 준 것처럼. 나도 네 아픔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방법을 함께 생각하게 해 줬으면 해.” 


“...응.” 



그가 능력이 있든 없든 그건 처음부터 상관없었다.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아는 이였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스스로를 믿으려고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아가는 길이 옳은지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사람. 



“일어나. 내가 구덩이를 팔게. 너는 망자를 묻어 줘. 그리고 바벨로 돌아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밥을 먹자.” 


“알겠어.” 


“그 다음에 내 방으로 와 줄래? 오랜만에 너와 단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 


“그럴게, 테레시아.”  



자신과 완전히 다른 듯 하면서도 닮은 박사이기에, 테레시아도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대하고 싶었다. 


우정, 친애, 선망, 동경, 연민.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줄곧 숨겨 놓으려 했던 또 하나의 감정까지 더해서. 


테레시아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자신이 판 구덩이로 시신을 가져가는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절로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항상 진심이고 싶었다. 


설령 그가 내일 자신을 배신할 운명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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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094년 12월 22일. 


19:17, 날씨 흐림. 


바벨 본산. 



전투가 끝났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누군가는 차가운 주검이 되어 땅 아래 누웠고, 다른 누군가는 따뜻한 물로 피를 지워낸 뒤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이 테라의 대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삶은 고통일 뿐이며.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명은.


지금 이 테라를 지배하는 신인류의 시대를 끝내고 구인류를 부활시켜야만 하는 자신의 숙명은. 


그들에게 있어 자비일까, 박사는 문득 생각했다. 


구인류의 시대는 적어도 평화로웠다. 


모두가 상대에게 증오를 들이밀기에 앞서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노력에 가치를 부여할 만큼의 포용력이 있었고. 


배 곯는 이 하나 없이 모든 이에게 풍족한 생활을 보장할 만큼의 기술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구인류는 신인류보다 월등한 존재인가. 


우수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을 멸종시키고 행성을 다스리는 게 자연의 섭리라면. 


한 순간에 신인류를 멸절시키고 평화로운 새 시대를 여는 게, 응당 그리되어야 할 이치일 뿐이라면.


자신은 스스로의 책임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야 할 텐데. 


가슴이 착잡하다.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을 뿐인 신인류에게도 마음이 있었다.


친애의 정을 느끼고, 가슴 깊은 곳에 내재된 선함을 꺼내 베풀 줄도 안다. 


무엇보다, 그들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자신에게 가르친 것도. 


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것도. 


전부, 테레시아였다. 


상냥하게 눈웃음치는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를 볼 때마다, 박사의 가슴 속에서 그 사실이 아프게 되살아나고. 


신성한 과업이었을 구인류 부활의 책무가, 자신의 목을 죄이는 멍에처럼 느껴졌다.  


박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제는 그저 삶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 그는 테레시아의 방 문 앞에 섰다. 



“...테레시아, 있어? 나야.”  


 

조심스레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자, 문틈이 빠끔 열리고. 


똘망똘망한 푸른 눈동자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사님?” 


“어, 아미야. 있었구나.” 



꾀죄죄한 옷을 입은 어린 카우투스 소녀. 


테레시아가 딸처럼 아끼는 그 아이의 초롱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박사는 겸연쩍게 웃었다. 



“테레시아는 안에 있니?”


“네. 같이 동화책 읽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방해해서 미안한데, 잠시 실례할게.” 


“들어오세요.” 



조막만한 손으로 문을 열어 주는 아미야. 


어두컴컴한 복도 너머에 벽난로의 불빛이 온화하게 드리워지고. 


깔끔하게 정리된 문헌과 책으로 가득 찬 작은 방이 박사의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그 방의 한복판. 



“어서 와, 박사. 기다리고 있었어.” 



책상에 앉은 테레시아가 안경을 벗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다시금 가슴이 죄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박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응.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아냐. 와 달라고 부탁한 건 나인걸. 어디 보자…응, 그렇지.” 



그런 박사를 두고, 테레시아는 아미야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아미야, 동화책은 더 못 읽어 줄 것 같구나. 미안해.”


“네? 왜요?” 


“박사님과 할 얘기가 있거든. 아주 중요한 일이야.” 



테레시아의 말에, 귀를 축 늘어뜨리는 아미야였지만….


이내 무언가 묘책이라도 생각난 듯, 기운차게 입을 열었다. 



“그럼 박사님이랑 셋이서 읽으면 안 돼요?” 


“응?” 


“저, 기다릴 수 있어요. 글도 이제 잘 읽어요. 언니랑 박사님이랑 이야기하시는 동안 기다렸다가 다 끝나면 두 분한테 동화책 읽어 드릴게요.” 



이건 또 상상도 못한 제안인데.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한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한껏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펴는 아미야. 


테레시아와 박사는 서로를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안해, 아미야. 다음에 부탁할게.” 


“...히잉, 알았어요. 그럼 언니, 박사님. 안녕히 주무세요.” 



명확한 거절에, 아미야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그녀의 빈 자리를 멀거니 응시하던 박사는 씁쓸하게 운을 뗐다. 



“참 착한 아이야.” 


“응. 인내심도 강하고, 다른 사람을 항상 잘 챙겨 줘. 커서 훌륭한 리더가 되지 않을까 싶네.” 


“네가 잘 가르쳐서 그런 거 아냐?”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일단 앉아. 차 마실래?” 



해맑게 키득거리며 의자를 권하는 테레시아. 



“아냐, 됐어.” 



하지만 박사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왜? 다리 안 아파?” 


“괜찮아.” 



자신은 그녀의 손님이 될 자격이 없었다. 


그런 박사의 생각을 읽은 듯, 테레시아가 슬프게 웃었다. 



“...피차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힘들면 언제든 말해.” 


“응.” 


“그럼…나부터 말할까, 아니면 너부터 말할래?” 


“너부터 해도 돼.” 


“그래.” 



박사의 말에 작은 한숨을 내쉰 테레시아는 이내 안경을 내려놓고 박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먼저 네 고민에 대한 답을 주는 게 순서겠지?” 


“부탁해.” 


“...응.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박사, 내 이상을 믿지 않아도 돼.” 



그녀의 명료한 한 마디에, 박사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한다더니 폭탄을 떨구면 어떡해, 테레시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입을 쩍 벌리는 박사를 보며, 테레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가 잘 안 가는 표정이네. 음…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 


“사실 나는 엄청 이기적인 사람이었거든. 혹시 눈치챘어?” 


“응.” 


“역시 그랬구나. 어떻게든 광석병을 없애고 싶었고, 살카즈를 자유롭게 하고 싶었어. 나아가서는 이 대지에 평화를 가져오고 싶었지.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었어. 그게 나였어.”


“......” 


“너도, 처음에는 그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고.” 


“...응.” 


“환멸했어?” 



조금의 불안함이 깃든 그녀의 말에, 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었다. 


석관에 잠들어 있던 자신을 테레시아가 깨운 건, 광석병의 치료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는 것 정도는.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너는 날 그렇게 대하지 않았잖아.” 


하지만 테레시아는 단 한 번도 박사를 도구처럼 다루지 않았다. 


낯선 세상에 떨어진 박사를 성심성의껏 위로하고. 


사비를 털어 박사가 지금의 테라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주관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왔다. 



“...헤헤, 맞아. 실은, 너를 깨운 직후 깨달아버렸거든. 너는 내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는 거. 네 머리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서로 엮어 하나의 신념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 


“그래서 네가 나한테 함께 싸우게 해 달라고 말했을 때 정말 기뻤어. 이방인이었던 네가 테라를 위해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게 너무 뿌듯했거든.” 



그런 테레시아였기에, 박사가 지금까지 보필해 온 거다. 


금방이라도 마음을 삼킬 듯 일렁거리는 자괴감과 죄책감의 파도를 아슬아슬하게 견디면서도. 



“바벨의 전술지휘관으로 취임하기로 한 건 네 선택이야. 나는 네 곁에서 네 의지를 존중하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박사.” 


“테레시아….” 


“네가 괴롭다면.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다면, 내려놔도 돼. 잠시 쉬었다 오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바벨의 연구원으로 남는 것도 괜찮겠네.” 



그래서 테레시아는 박사를 탓하지 않았다. 


다그치지도,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며 역정을 내지도 않았다. 


이게 그녀가 박사를 한 명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방식이었고. 



“칼자루는 네게 넘길게. 마음껏 고민해도 좋아. 언제까지고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한 다음, 와서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 나는 너를 기다릴 테니까.” 



지금의 박사에게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우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순수한 마음에, 박사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마음을 읽는 아츠를 쓰는 테레시아라면, 이미 자신이 어떤 족속인지 파악했을 텐데. 



“...테레시아.” 



구인류 부활을 위해 신인류를 멸종시키려는 것도. 


그 끝에 테레시아를 배신하고,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왜. 


도대체 왜 너는 그렇게 상냥하게 미소짓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네가 힘써 이룬 모든 것을,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 세상을 박살내 버릴지도 모르는 괴물을 부드럽게 응원할 수 있는 거냐고.  



“응, 박사. 듣고 있어.” 

  


현재에 눈을 고정한 채 애써 무시해 왔던 죄책감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그녀에 대한 감사와 애정, 그리고 자기혐오가 복잡하게 뒤섞인 끝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그 음성에 담긴 건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으려 했던 고뇌였다. 


부연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자신의 목에 올가미처럼 드리워진 사명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해 또한 바라지 않았기에. 

 

그저, 전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까 싶어서. 


테레시아가 화를 내거나 지금 당장 자신을 처형한다 해도, 괴로운 삶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이니 나쁘지 않고. 


혹시나 털어놓은 다음에도 테레시아가 변함없이 상냥하게 웃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지치고 상처 입은 가슴이 약간이라도 편해질까 싶어서. 



“방금 네 자유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곧바로 내게 결정권을 넘기는 거야?” 



테레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 


“말했잖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그 끝에 네가 죽더라도?”  


“응.” 


“...왜?” 


“믿으니까.” 


“뭘?” 


“결국 네가 옳은 선택을 할 거라고.” 

  


그 말에, 박사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자신은 옳은 선택을 내리기는 커녕, 이제 뭐가 옳은 것인지조차 모르겠다고. 



“테레시아, 난.” 



하지만 테레시아는 더 이상 그가 스스로를 상처입히게 두지 않았다. 


천천히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박사를 향해 다가오고. 


꽃내음이 박사의 코끝에 끼치며, 차갑고 연약한 손가락이 조심스레 박사의 뺨을 쓰다듬는다. 



“넌 위선자가 아니야, 박사. 오히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냥한 사람이지.” 


“...그렇지 않아.” 


“말했지? 모든 건 네 선택이라고. 난 네게 이 세상을 여행하게 했고, 사람과 만나게 했으며, 살카즈의 참혹한 역사를 가르쳤어. 그 모든 걸 전부 받아들인 후, 너는 어떤 결정을 했어?” 


“......” 


“대신 말해 줄게. 너는 이 세상을 사랑하기로 했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로 했고, 살카즈가 겪어 온 고난에 진심으로 공감하기로 했지. 그 마음들은 내가 네게 주입하거나 한 게 아니야.” 



사정없이 흔들리는 박사의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테레시아는 손가락으로 박사의 머리를 살짝 두드리고. 



“네 여기가 생각하고.” 



뒤이어 박사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 이곳이, 진심으로 바란 결과지.” 


“테레, 시아….” 


“뭐가 옳은 일인지 몰라도 상관없어. 적어도 당장은. 너는 근본부터 착한 사람이니까. 네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네 발이 저절로 옳은 길을 향해 갈 거야.” 


“......” 


“그리고 그 옳은 길의 끝에, 내가 바라는 이상이 있을 거라고 믿어.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고민할 줄 아는 너이기에, 안심하고 내 꿈을 맡길 수 있지. 만약 그런 네 여정에 희생이 필요하다면, 난….” 



기쁘게 죽을 수 있어.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어 뒷 말을 삼키고, 박사를 향해 살풋 웃는 테레시아. 



“조금 후련해졌어? 솔직하게.” 



박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짊어진 책임과 눈 앞의 세상,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끝없이 번뇌할 뿐인 나약한 자신에게 화가 났고.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자신을 긍정해 주는 테레시아가 사랑스러우리만치 답답했다.  


차라리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전쟁기계였다면 좋았으련만. 


이미 무너지기 직전인 이 마음은 더 이상 밀려드는 감정의 격류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천천히 입을 여는 박사. 



“...아니.” 


“그래. 아쉽네.” 



건조하게 시작된 첫 말에, 점점 물기가 묻어나고. 



“힘들어, 테레시아. 너무 버거워.” 


“계속 힘들어해도 돼. 내려놔도 되고. 이제 그만 자유로워져, 박사.” 



한 군데에 구멍이 뚫린 제방처럼, 물결치는 마음이 조금씩 입 밖으로 삐져나오며. 



“내 동족들이 보고 싶어.” 


“미안해.” 



해서는 안 됐던 말.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박사. 할머니 할아버지 될 때까지 네 곁에 딱 붙어 있고 싶어.” 

 


서로에게 상처로 남을 뿐이라 여겨 숨겨 두었던 오래된 애정까지도 전부 털어놓는 박사. 


테레시아는 살며시 팔을 뻗어 그런 박사를 끌어안았다. 


박사의 고개가 천천히 떨구어지고, 그의 성마른 두 팔이 테레시아의 허리를 감싼다. 


어느새 박사의 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이 테레시아의 어깨를 적시고. 


품 안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가 견뎌 왔던 고통이,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반복되는 일상에 이미 꺾여버린 의지가. 


그리고 무엇보다, 테레시아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아츠를 쓰지 않아도 너무도 절절하게 테레시아의 가슴을 저며 놓아서. 


조금 전 간신히 억눌렀던 오열이 조금씩 치밀어 오르고. 



“...박, 사. 좋아해. 정말 좋아해.” 



그저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들키지 않으려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가 자신에게 그랬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몇 번이고 속삭인다. 


때가 아니라 생각해 가슴 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네 곁에 있고 싶었어.” 



바벨 의장과.



“테레,시아. 테레시아….” 



전술지휘관. 



“함께 평화를 일궈내고, 둘이서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어. 우리가 만든 세상을 돌아보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어. 더는 네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네 옆을 지켜주고 싶었어.” 



신인류를 지키는 자와. 



“...나도, 네 옆에 있고 싶었어. 둘이서 아미야가 어엿하게 성장하는 걸 지켜보고, 카즈델이 다시 번영하는 걸 지켜보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 



구인류의 부흥을 원하는 자. 


결코 섞일 수 없는 입장 차이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힘껏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달콤하게, 또 애절하게. 


틀림없이 서로 닮아 있는 상애의 감정을 고백할 뿐.



“...박사.”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응.” 



전란에 휩싸인 지금의 테라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으며. 



“나를, 죽일 수 있겠어?” 


“......” 


“네가 내 희생을 딛고 나아갈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받아들일 수 있어?” 


“미안, 미안해. 나는….” 



아무리 서로를 생각하고 아낀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미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눈물로 범벅이 된 박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테레시아는 아프게 웃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하지 않을래?” 


“...내기?” 


“응. 쉬워. 내일 나를 죽이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네 승리. 그러지 못하면 네 패배야.” 


“...윽.”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박사. 


하지만 테레시아는 그의 뺨을 양 손으로 잡고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눈물로 방울진 그의 회색 눈동자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 봐, 박사.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싫어, 테레시아. 우리 그냥 도망치자. 나는 어떻게 해도-” 



함께 도망치자니. 


전화에 휩싸인 세상과 두 사람의 아픈 과거를 전부 도외시하고, 둘만의 세상으로 뛰어들어가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자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 말일까. 


테레시아는 인정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잠시 흔들렸다. 



“...도망치면 안 돼, 박사. 그럼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랬기에 일부러 더 씩씩하게 웃었다. 



“네가 이기면, 남은 바벨 잔당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따르라고 말해둘게.” 


“...내가, 지면?” 


“네 기억을 지울 거야. 구인류, 바벨, 카즈델, 테레시스, 나까지 전부.”   



테레시아는 마왕이다. 


그녀의 아츠를 사용하면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지우는 것 정도는 간단하게 가능했다. 


그런 그녀의 말 뜻을 이해한 박사의 눈빛에 아연함이 깃들고. 



“안, 돼. 싫어, 테레시아. 널 잊어버린다니, 그런-”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쌓는 거야, 박사. 백지에서부터 시작해, 너라는 사람의 마음을 다시 그려 봐. 너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 


“그러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법을 배워. 동료를 만나고, 적을 쓰러트리면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상냥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박사의 안에 저주처럼 새겨진다. 


박사 자신보다 더 그를 아끼는 테레시아의 마음이, 감정을 전부 쏟아내고 너덜너덜해진 박사의 마음을 기우고 때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구인류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테라를 살아가는 신인류로서 그들의 곁에 남을지. 그때 네가 내릴 선택은 틀림없이 올바를 거야.” 


“......” 


“나는 그 길의 끝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언제까지고.” 



끝을 고하듯, 기약 없는 약속이라는 낙인을 부드러이 받쳐 든 그녀가 그대로 박사의 마음을 봉한다. 


이미 몰릴 대로 몰린 박사에게. 


그 약속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 내기 받아들일게. 테레시아.” 


“좋은 선택이야. 보나마나 네가 패배하겠지만. 이렇게 울보여서야 원.” 



박사의 뺨을 꼬집는 테레시아. 

 

박사는 그런 테레시아의 손을 살며시 붙잡고 볼에 지그시 가져다 댔다.


만약 그가 패배하고. 


두 사람이 쌓아올려 왔던 추억의 탑이 무너지더라도. 


이 온기만큼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끝까지 간직하겠다는 듯. 



“...또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리고, 만에 하나 그녀와의 재회가 허락된다면. 


머리가 그녀의 이름을 망각하고, 이 가슴이 그녀의 마음을 잊어도. 


몸이 기억할 그녀의 따스함을 증표로서 들고 가, 다시 네 앞에 서겠다는 듯. 


그런 박사의 작은 동작에, 테레시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박사.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그런 희망을 담아, 테레시아는 살풋 미소지었다. 



“네가 없으면 많이 외로울 거야.” 


“나도 그래, 테레시아.”
 

“피차 외로움 많이 타는 사이끼리, 오늘은 실컷 이야기하지 않을래? 밤 새워서.” 


“좋아.”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박사. 


그런 그를 보며, 테레시아는 짐짓 장난스럽게 웃었다. 



“...근데, 이야기만 할 거야?” 


“...?” 


“뭐냐, 라면 먹고 싶다던가. 고양이 보고 싶다던가. 그런 거 없어?” 


“...!” 



박사. 


혹시 알아? 모든 문명은 마음 위에 피어난다는 거.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풍요를 선사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아름다움을 공유하기 위해 예술을 번창시키며, 더 나은 내일을 가져다주기 위해 노력해. 


마음 없는 문명은 생길 수 없고, 설사 문명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이 남는 이상 그 문명은 멸망한 게 아니야. 


우리도 똑같아, 박사. 


네가 나를 망각하더라도. 


내가 너를 향한 이 감정을 잊지 않고 품는 한. 


문명은 존속할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너를 다시 보는 그 날을, 온 마음을 다해 기대하고 있을게. 



바벨 멸망까지, 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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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박사님은 테레시아를 유기하고 웬 용가리랑 눈 맞아서 결혼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