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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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늘 잡설 좀 길어요. 뜌따이 주저리주저리 하는 거에 관심없고 글내놔! 하는 명부이들은 스크롤 쭉 내리면 됨.


1. 링 눈나가 한 장면도 안 나오는 링 눈나 애호 소설. 그래서 오늘은 짤도 그냥 쉐이 가족사진 갖다 넣었음. 이벤트 회서리 스포 및 오리지널 설정 있음. 


2. 가뜩이나 피곤한데 글도 안 써지니까 진짜 미칠 노릇이더라. 혈관에 카페인이 흐르고 호흡기는 니코틴으로 절여지고...몸은 노곤해서 앉아만 있어도 잠오는데 문장은 생각 안 나고...그래도 더 끌면 진짜 유기되겠다 싶어서 악으로 깡으로 써 옴. 하필 최악의 상태로 써야 하는 내용이 내가 제일 약한 머리싸움 묘사라는 게 아쉬울 따름. 독타부터 시작해서 쥬지파티 일색이지만...스토리 이해를 원하는 명붕이가 혹시 있다면 읽어 주기를 부탁할게. 


3. 기본적으로 이 에피소드는 이벤트 회서리가 좀 더 일찍 일어나고, 거기에 독타와 링이 개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된 거라...회서리의 전개를 차용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있음. 물론 내 글은 회서리에 비해 여러모로 조잡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써 온 글이니까 재밌게 읽어주면 고맙겠다. 


4. 음...뭐랄까. 이런 실제 있는 에피소드를 카피해서 쓰는 거, 되게 신선하고 재밌는 경험이긴 했는데 당분간 안 쓰려고. 그냥 내 글 템포도 망가지는 느낌이고, 등장인물 문제나(회서리에는 슈랑 좌락 말고도 녹무관, 완칭, 그레인버즈 같은 매력적인 조연들이 많은데...분량 조절 이슈로 다 못 넣었음) 내 오리지널 전개를 원작이랑 맛있게 섞기 어려운 점 등등 문제가 너무 많아서. 내 역량부족으로 담아야 하는 내용을 전부 못 담는 것도 뼈아프고. 생각보다 성장통이 아프네. 일단 이 에피소드 마무리짓고, 당분간은 링과 독타의 낭만가득 만취 식도락 여행으로 진행하다가 나중에 내가 좀 더 괜찮은 글쟁이가 되면 다시 도전해 볼게. 미안해. 


5. 소재추천, 피드백, 댓글, 아카콘 전부 환영해. 추천받은 소재는 시간은 걸려도 조금씩 쓰려고 계속 노력 중이고. 댓글이나 피드백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바빠도 최대한 빨리 읽고 성심성의껏 답하니까, 내 글 읽고 든 생각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줬으면 좋겠다. 명부이들의 짧은 감상이 고단한 작가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든답니다.  


6. 늘 읽어 주는 명붕이들,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 장편연재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내가 한 작품을 17화까지 쓸 수 있었던 건 전부 명붕이들 덕분이야. 항상 좋은 글로 보답할게.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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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3일 00:31. 


염국 대황성, 시내. 



“...큭.”



붓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려온다. 


이빨이 제멋대로 딱딱 부딪히며 턱에 아플 정도의 진동을 새기고, 간신히 숨을 들이마쉴 때마다 무겁고 서늘한 공기가 비강을 얼얼하게 스쳤다. 


한겨울, 눈밭에 드러누운 듯 아무리 옷을 여며도 추위가 사라지지 않아. 


눈을 들어 세상을 보아도, 망막에 잡히는 건 암흑뿐.  


시커먼 그림자에 완전히 삼켜진 도시는 침묵을 지킨 채, 그저 오래도록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 



라인 랩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반인이 데몬의 실체를 인식하고도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최대 3분이라고 한다. 


만약 데몬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일말의 두려움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이 기준이라면 그 시간은 더더욱 짧아진다. 


1분 이내. 


컵라면 하나가 익은 태를 내기도 전에, 그 사람은 데몬에 대한 공포로 정신줄을 놓아 버리며. 


데몬은 그의 공포를 먹고 덩치를 불릴 뿐이다. 


지금이 몇 시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힘이 다 빠진 손으로 멍하니 호주머니에서 전술 단말기를 꺼냈다. 


5월 13일 00시 31분. 


푸른 화면에서 명멸하는 숫자들을 보니, 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떠오른다. 


내가 이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가 00시 1분이었으니까….



“...30분.” 



충분히 오래 버텼다. 


그런 작은 안도감이 뇌리를 스친 순간, 마음이 더더욱 약해져 간다. 


감각은 점점 무뎌져 가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던 사고회로가 둔해진다. 


나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한껏 끌어올렸던 의지가 잿빛으로 바래 가며. 


그 틈바구니를, 원초적인 부(不)의 감정들이 메운다. 


무섭다. 


힘들어. 


추워. 


나는 왜 여기 혼자 있어야 하지. 


보고 싶어, 링.


생존본능에서 발로한 공포가 시시각각 뇌를 잠식하고, 그 감정들이 이치를 얻어 하나의 생각이 될 때마다 내 자신이 눈에 띄게 약해진다. 


그럼에도 내가 일어서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부르르 떠는 다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응, 그대여. 입에 담는 게 새삼스러워질 정도로 신뢰하고 있어.’ 



구태여 말로 표현할 필요조차 없는 네 믿음이, 꺾이려는 내 의지를 함께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네 신뢰에 부응하고자 하는 욕심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주된 동력이기 때문이야. 


링. 


네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더라면, 내 의사를 무시하는 한이 있었더라도 나를 곁에 두고 지켰을 거야. 


영민한 너라면 적이 나를 먼저 노릴 거라는 사실 정도는 진즉에 예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를 홀로 가게 내버려 두었다는 건. 


내가 이미 나름의 대비책을 세워 두었으며, 그 대비책이 효과적일 거라고 틀림없이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네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윽.” 



그렇다면 나 또한 스스로를 신뢰할 거야. 


황송하게도, 네가 나를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에 한 점 부족한 없는 귀인이라 불러 주었으니까. 


이 계획이 얼마나 먹힐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발악해 볼게. 


적어도 나를 향한 네 마음만큼은. 


그리고 너를 향한 내 감정만큼은. 



“......” 



그렇게 스스로를 동기부여한 지, 5분이 더 지났다. 


링과 내가 맺어지던 날, 그녀가 했던 말들을 다시금 꺼내 헤아리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 



10분이 추가로 지났다. 


상촉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농부 어르신들과의 즐거운 한때, 그리고 유려한 링의 춤사위를 떠올리며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 



15분이 지났다. 


상촉에서 링이 보여 주었던 일출.


그때 그녀가 달콤하게 속삭였던 꿈 같은 희망을 되새기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렇게 16분. 


17분. 


17분 30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전술 단말기를 꺼내 들 힘조차 떨어져 가던 그 순간.  


-사박. 



“...!”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데몬이 아닌 생명체의 기척이 들렸다. 


가죽신이 사뿐사뿐 바닥을 디딜 때 나는 정도의 작은 소리. 


그러나 극도의 공포로 인해 예민해진 내 청각은 그 미미한 소음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그리고 조금씩 커지며 들려오는 발소리는 확실하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두려움에 잡아먹히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아주 느긋하게. 



“여기 계셨군요, 박사님.” 



뒤이어 나직한 미성이 귓가를 두드림과 함께. 


치렁치렁한 비단옷을 걸친, 선이 고운 청년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해충의 형태를 한 수백의 데몬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다. 



“가라.” 



짧은 말 한 마디로 도시 전체에 데몬을 흩뿌린 놈이 나를 응시한다. 


어째서였을까. 


나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런 이상 사태 속에서도 기이하리만치 무덤덤한 것을 보니, 저 청년이 내 적이라는 건 확실한데. 



“...늦었잖아.”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 의외로군요.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흠칫하는 청년을 보니, 입꼬리가 마음대로 위로 치솟는다. 


아, 그런 거구나. 


이제 그 어둠 속에서 혼자 벌벌 떨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혹시 저희 구면이었나요? 당신 같은 사람과 약속을 잡은 적도 없거니와, 안면을 튼 적도 없는데요.” 



그리고 세련된 어투 속에서 뚝뚝 묻어나는 이 녀석의 허술함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버린 거구나. 


아주 좋지 않다. 


이제 행군을 마치고 막 전장을 밟았을 뿐이거늘, 벌써부터 상대를 얕잡아보려고 하다니. 


한 명의 기사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절대 가져서는 안 될 마음가짐이다. 


신중하게 가자. 


늘 하던 대로, 우선은 대화를 통한 상대의 성격 파악부터. 


다시금 마음을 고쳐 먹으며, 물끄러미 청년을 응시한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사실 내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서.” 


“...아하. 그러시다면 구면이든 아니든 별 의미는 없겠군요.” 



그런 심산으로 던진 첫 미끼를, 녀석은 보기 좋게 물었다. 


상대의 병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미를 따지는 걸 보니, 꽤나 알기 쉬운 성격이구나.  


계산적이며, 적잖이 비틀려 있다.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수고스럽겠지만 자기소개를 부탁해도 될까?” 



내 말에, 녀석이 웃었다. 



“안 될 것 없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박사님. 저는 ‘지’. 보잘것없는 장사치이자, 슈 누님의 바로 아래 항렬인 쉐이의 파편입니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지. 알겠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야.” 


“왕 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현명하고 사려 깊으신 분이라던데요. 당신이 정말 평판대로의 분이라면…오늘의 면담은 저희 둘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겠지요.” 



…이놈 봐라. 


그러니까 방금 녀석의 말은 대충 이런 의미다. 


‘니가 소문대로 똑똑한 놈이라면, 허튼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겠지’ 


역시 날 인질로 잡아 놓고 수틀리면 써먹을 생각이구나. 


전부 예상대로 된 건 그렇다 치고, 용문 웨이 선생님 이후로 이렇게 빙빙 돌려서 협박하는 놈은 또 오랜만이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간신히 참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즐거운 대화가 될 거야. 우리 둘 모두에게.” 



나도 섵불리 움직이진 못하지만, 너도 나 잘못 건드리면 큰일난다. 


그런 뜻을 담아 넌지시 경고하자, 지가 작게 웃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녀석이 손을 한 번 휘젓자, 녀석의 소매 아래에서 새하얀 한 줄기 실타래가 풀려 나왔다. 


꿈틀꿈틀 허공에서 춤추던 실은 이내 땅을 부드러이 스치고, 제멋대로 무언가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풀리고, 엮이고, 꽁꽁 싸매는 듯하더니 이내 근사한 무늬를 새기기기도 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던 실의 윤무가 끝났을 때. 


내 눈 앞에는 실타래로 이루어진 작은 앉은뱅이 탁자와 방석 두 개가 나타나 있었다. 



그 위에 앉은 지가 천연덕스럽게 반대편 방석을 가리켰다. 



“부디.” 



이게 지가 가진 쉐이로서의 권능일까. 


천과 실을 자유자재로 엮고 풀며 꿰메어,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 


신기하긴 한데, 하도 기상천외한 권능을 많이 봐서 별로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감상이고.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 위에 앉아?” 


쉐이의 권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치면, 링의 권능은 술 삼백 잔을 마셔도 안 취하는 능력이고. 


니엔의 권능은 어떤 영화의 메가폰을 잡든 귀신같이 조져놓는 능력이겠지. 


만약 지의 권능에 실에 접촉하는 대상을 조종한다던가, 혹은 최면을 건다거나 하는 부가효과가 있다면 상당히 곤란하다. 


그런 의미를 담은 말에, 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에게 선택지가 있습니까?” 


“왜 없어?” 


 

가볍게 반문하며, 나는 땅에 떨어진 시의 그림을 주워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 정체를 곧바로 눈치챈 것일까. 



“...당신이 어떻게 그걸.” 



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그런 놈에게, 나는 확실히 쐐기를 박았다. 



“착각하지 마, 지. 이건 대화야. 네가 조금이라도 말 이외의 수단을 사용하는 순간, 나는 이 그림을 써서 니엔과 시를 불러낼 거고. 쓰는 법은 이미 아니까 이상한 블러핑 걸 생각도 하지 마.” 


“...하.” 



저런, 이젠 가소롭다는 것처럼 웃고 있네. 


동생들 두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감당할 수 있다 이건가. 



“그 아이들을 불러왔을 때의 일은 둘째치고, 제가 당신이 그 그림을 쓰게 둘 것 같습니까.” 



흠, 그런 거구만. 


당연히 그렇겠지. 


방금 탁자를 만들 때 봤던 실의 정밀함이나 속도를 생각하면….


내가 이 그림에 무언가 표시를 남겨서, 로도스에 있는 쉐이들을 불러내기도 전에 내 목이 먼저 꿰뚫려도 이상하지는 않아. 



“어디 뺏을 수 있으면 해 봐. 내 몸에 자그마한 흉이라도 남겼다간 링이 널 반으로 접을 텐데?” 


“......” 



호기롭게 마주 협박하기는 했지만….


결국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지금 내가 이 녀석을 상대로 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딱 하나뿐이야. 


그리고 모든 수단은 그 하나의 방법을 위한 포석이다. 


나는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접었다. 



“아니, 됐다. 그냥 가져가.” 


“...?” 


“가져가라고.” 


“당신, 지금 무슨.” 


“이대로 기싸움만 하고 있으면 대화가 안 되잖아.” 


“......” 



지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당혹이 어리고. 


그 감정 표현과는 별개로, 놈의 새하얀 손이 주춤주춤 내뻗어진다. 


그 손 앞에서, 나는 보란 듯이 그림을 품 속에 넣었다. 



“단, 공짜는 안 되지.” 


“......”

“장사치라며? 한 번 흥정해 봐.” 



모든 쉐이의 파편에게는, 자신의 권능과는 별개로 한 개 이상의 생업이 존재한다. 


취미라도 봐도 무방하겠지만…그 일이 쉐이 파편 개개인의 자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기에 편의상 생업이라고 칭하겠다. 


예컨대, 링에게는 시와 술이. 


총웨 형님에게는 무예가. 


니엔에게는 대장간 일이, 그리고 시에게는 그림이 그런 의미이다. 


전혀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을 것 같은 왕에게도 바둑이라는 생업이 있고. 


그렇다면 스스로를 장사치라 소개한 이 녀석은, 장사라는 행위에 구애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바. 


내 제안에 응하지 않고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런 의미를 담아 던진 도전장에, 지가 난색을 표했다.  



“장난치자는 겁니까?” 

“장난 아닌데. 누가 자기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쳐?” 



장난이라니, 실례다. 


이왕이면 필사적인 차력쇼라고 불러 주면 고맙겠는데. 


어떻게든 네 입에서 나한테 필요한 정보를 뱉어내게 하고. 


네 시선을 내 쪽에 붙들어 두기 위한. 


그런 의미를 담아 웃자, 지가 나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좋은 여흥이 될 것 같으니, 일단 어울려드리죠.” 


“그래. 선제시해.” 


“저희 가족의 비상 통로라는 점을 제하고 봤을 때. 해당 그림의 예술적 가치와, 그림에 사용된 기법이 이제는 실전된 옛 화풍임을 고려하여…대략 150만 용문폐 정도 쳐드리겠습니다.” 



오.


석붕아, 우리 로도스 때려치우고 그림 장사나 할까? 


네가 그리면 내가 에이전트 해서 열심히 팔게. 


너는 히키코모리 생활 청산하고. 


나는 링이랑 결혼할 비용 벌고. 


아무리 봐도 윈-윈인 거 같은데. 


지난 30분 동안 공포에 뇌가 절여져서 아직도 제 기능을 못 하는 걸까. 


순간 쓸데없는 상상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뭘로 지불할 건데?” 


“어떤 대가를 원하시는지요.” 


“맞혀 봐.” 


“금전을 원하신다면, 당장은 가진 용문폐가 없으니 어음을 써 드리겠습니다. 지급책은 차후 제가 연락을 드리지요.” 


“돈은 됐어.” 


“그럼 귀중품으로 받기를 바라십니까? 가치 있는 물건은 많이 있습니다만. 당장 당신이 원할 만한 물건은…불로장생의 묘약 정도일까요.” 


“...? 그런 게 있어?” 



불로장생의 묘약이라. 


허무맹랑하긴 해도, 확실히 어음보다는 솔깃하네. 


그런 내 기색을 읽은 건지, 녀석의 표정에 의기양양함이 깃든다. 



“예. 염국 진룡 황제의 피와, 극동 출신 주술사의 주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습니다만, 평균적으로 5~60년 정도의 평균수명 상승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효과는 이쪽에서 보증하겠습니다.” 


“...호오.” 


“물론 그걸 넘겨드리면 이 쪽에서 손해 보는 장사이긴 합니다만. 남도 아니고 매제와 처남 사이이니, 출혈을 감수하고 그냥 드리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솔깃할 뿐이지, 혹할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링 기대 수명이 얼만데, 오륙십 년 가지고는 택도 없지. 


그건 그렇고 매제와 처남이라. 


그 말을 니 입에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야.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고. 



“...왜 웃으십니까.” 


“아냐. 아무튼, 묘약 말고 다른 거.” 


“흠. 서적류도 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가족의 과거를 기록한 책이나, 꽤나 설득력 있는 예언서. 혹은 염국 광석병 치료의 정수가 담긴 의학 서적도 괜찮겠군요.” 



이것도 필요 없어. 


쉐이 가족의 과거는 링한테 물어보면 스스럼없이 말해 줄 텐데 뭐하러 거래까지 해. 


예언은 믿을 게 못 되고.  


광석병 치료는 로도스보다 잘하는 데가 없는데 굳이? 


탐탁잖은 표정을 짓자, 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저런, 상인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감이 없어서야.


미간에 새겨진 녀석의 고뇌가 자못 우스워, 나도 모르게 정답을 발설하고 말았다. 



“정보야. 정보를 줘.” 



그 한 마디에 급격히 평온해지는 녀석의 표정.



“아하. 그런 거였습니까. 쉽지요.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베헤모스 사냥의 전말? 염국의 정치적 상황? 혹은, 이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으신 건지요?” 


“전말?” 


“예. 제가 왜 대황성을 습격했는지 말입니다.” 



왕의 이름을 끝까지 감추는 데에서 나름의 술수가 느껴졌지만, 여전히 허술해. 


내가 지에게서 얻고자 하는 정보는 총 세 가지. 


이 놈의 성격. 


혹시나 오늘 밤, 슈가 과로로 쓰러지더라도 다시 살려낼 방법. 


마지막 하나는 좀 터무니없는 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두 개는 반드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링이 곁에 있다 해도, 수백 년간 권능을 남용하며 스스로를 혹사해 온 슈가 오늘 데몬과 맞서다 쓰러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으며. 


이 놈이 대놓고 왕과 붙어먹은 이상, 차후에도 나와 링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충분하기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미 알아, 지.” 



블러핑이다. 


전부 다 알지는 못해. 


하지만 상관없다. 


곧 이 녀석이 자기 입으로 다 털어놓을 거니까. 



“...그러십니까.” 


“그리 알아내기 힘든 정보도 아니고, 150만 용문폐만큼의 가치도 없지. 그러니까 뭔가 다른 걸 내놔.” 


“하. 꽤나 까다로운 손님이시군요. 좋습니다. 어디 말씀해 보시죠.” 



나는 피식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지.


이 흥정이 그만큼 흥미로웠던 건지. 


아니면 나도 너만큼 이 역할극에 심취해 있다고 덜컥 믿어 버린 건지.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보였던 약간의 경계심도, 이제는 전혀 보이지 않아. 



“그래.” 



그렇다면 슬슬 판을 엎을 타이밍이다. 


잠시 잔잔해졌던 바다에 다시금 풍랑을 일으키는 것 만큼 뱃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은 없으니. 



“베헤모스 쉐이를 죽일 방법.” 



내 입에서 떨어진 한 마디에, 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 

“혹은 그와 상응하는, 쉐이의 열두 파편을 무사히 이 세상에 존속시킬 방책. 그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 지.” 


“...그건.” 



새하얀 녀석의 피부가 희미하게 창백해진다. 


나는 그런 녀석을 들들 볶았다. 



“왜? 없어?” 


“...천하의 어느 거상도 박사님이 원하는 답을 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냉정히 말해,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은 땡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유감이네.” 


“애초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저도 알고 싶습니다.” 


“살고 싶어서?” 


“물론 저도 살고 싶습니다만, 저보다는 제 가족들이 행복했으면 해서 그럽니다.” 



그 말에, 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가족. 


가족이라. 


허울 좋네. 



“그렇게 가족을 사랑하는 놈이 이런 짓을 해?” 


“...예?” 


“눈이 있으면 봐. 너희들이 대황성에 무슨 일을 벌여 놨는지. 슈가 사랑하는 이 땅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 


“가족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면서? 이 꼬라지 보고 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 착한 애가.” 



안심시킨 후 격장지계를 쓰는 건 내 특기다. 


올렸다 떨어트리기라고 불러도 좋고. 


상대를 심정적으로 동요시키면서, 내 페이스로 끌어들이기도 용이한 계책이거든. 


이 방법을 쓸 때 중요한 건, 책사 본인이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의 감정적인 흔들림이라도 내보였다간 오히려 역으로 약점을 잡힐 수도 있거든.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전말은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아니. 겉에 드러난 계획 말고. 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그러니까 나는 화나지 않았다.


설령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상대가. 


가족을 아낀다면서, 자기 누나네 텃밭에 악귀를 풀어놓는 표리부동의 극치이고.  


슈의 가족애에 이런 최악의 방식으로 보답하는 패륜아이며.   


내 처제가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모든 걸 짓밟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매제라고 부르는 역겨운 놈일지라도. 


분노해서는 안 된다. 


이건 그냥 계책일 뿐.


상대의 생각을 내가 원하는 대로 유도하는 방법론이며, 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도대체 생각하는 법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으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어?”  



느닷없이 착 가라앉은 내 말투에, 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정하시지요. 물론 인간인 당신이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전부 나름의 안배입니다.” 


“안배?” 


“예. 대황성이 조금 파괴될지언정, 이 계책은 모두에게 확실히 이득이 될 터입니다.” 


“......” 


“슈 누님은 오랜 착취에서 해방될 수 있고. 염국은 악귀의 위험성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으니 이득이지요. 대황성의 이동도시화 프로젝트도 가속화될 거고, 그럼 대황성이 재앙에 시달리는 일도 줄어들 겁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근차근 설명하는 놈의 눈동자를 노려볼 뿐. 


무덤덤한 그 잿빛 눈동자에, 스스로의 말에 대한 의심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추악한 자기확신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지금까지 봐 온 그 어떤 악인보다도. 


왕보다도. 


하지만 역정을 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감정을 조절하는 데 실패해 버리면, 모든 게 허사다. 



“...나랑 링이 없었으면, 진짜 그렇게 됐겠네?” 


“두 분이 없었다면 훨씬 쉬웠을 겁니다.” 


“그럼. 그러다 슈가 죽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내 질문에 녀석의 말이 잠시 멎고. 


몇 초간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평정을 되찾더니. 


한숨과 함께 가느다란 변명이 새어나왔다.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방책이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내 페이스에 맞추어 주는 듯 하면서도 자기 할 말 다 하던 녀석이, 처음으로 보인 동요였다.  


아주 잠깐의. 


실이 바늘구멍에 꿰어지기 전, 방황하는 듯한 찰나의 방심. 


그 방심이야말로, 내가 줄곧 기다려 왔던 틈이었다. 



“그래? 결국 네 누나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는 거네?” 


“...아닙니다. 그건….” 


“대단하다, 너. 진짜 대단해. 입으로는 가족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뒤에서는 자기 누나를 고통스럽게 보낼 궁리를 해?” 


“...큭.”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사정 봐 줄 필요 없다. 


스스로의 미친 계획에 한 점 의심도 가지지 않는 이 미친놈의 유일한 역린. 


그 역린이 보인 이상. 


놈이 눈동자에 핏발을 세우고 몸을 일으킬 때까지 후벼팔 뿐이야. 



“솔직히 말해 봐, 지. 너, 무서워서 나한테 온 거지? 링과 슈를 직접 상대하자니, 너 때문에 슈가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될까 두려워서.”


“아닙니다.” 


“그 애가 이 땅을 지키려고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는 걸. 자기 살을 발라내고 뼈를 깎아 가며 대황성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 것 같아서. 마침내 그 애가 땅에 쓰러졌을 때, 채 감기지도 못했을 슈의 원통한 눈빛을 마주하는 게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게 슈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 애의 희생을 착취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네 독선을 밀어붙이고 싶어서.” 


 

말은 계책의 일부였어도,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순수한 내 진심이었다. 



“큰 그림? 뭐, 모두가 이득을 보는 계책? 좆이나 까.” 


“......” 


“넌 그냥 이기적인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선구자인 척 하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책사인 양 행세하고 있지만. 


이 놈의 본질은 그냥 터무니없는 이기주의자다. 


스스로의 욕심을 어떻게든 예쁘게 포장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구실을 전부 갖다붙이고. 


마지막에는 본인조차 그 찬란한 포장지만 보고 내용물의 추악함을 잊어버리는. 


간악하며, 어리석고, 더러운 놈이다. 


이런 놈이 어떻게 다른 쉐이 파편들의 형제라는 걸까. 


링이나 총웨 형님, 슈는 말할 것도 없고. 


니엔이랑 시, 하다못해 최소한 솔직했던 왕이랑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인데. 



“어떻게 그런 심보로 장사꾼을 자처하는지 모르겠네. 차라리 사기꾼이라고 하지그래. 그럼 적어도 남부끄럽지는 않겠다.” 



그런 의미를 담아 조소하자, 무릎 위에 얹혀 있던 지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전,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뭐?” 


“저라고 마음 편했던 줄 아십니까. 슈 누님이…제게 어떤 분인데. 저를 키워 주시고, 제 길을 찾아 주신…누님이자 어머니 같은 분인데.” 



뭐라뭐라 변명을 주워섬기는 놈이었지만, 사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하다, 슈. 


너는 애정을 담아 네 가족을 대했겠지만, 그 애정이 항상 보답받는 건 아닌가 봐. 


네 동생 진짜 구제불능이야. 



“그래서.”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럼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지.” 


“......” 


“최악을 면하려고 차악을 선택한다고? 심지어 그 차악이 가족을 한 번 죽이는 거였다고? 그게 말이야?” 



내 말에, 놈이 입술을 깨물었다. 


 

“심지어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 



지는 150만 용문폐를 흔쾌히 어음으로 지불할 정도로 부자다. 


그걸로 대황성의 이동도시화를 지원한다거나 하는 옵션도 있었을 터.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혹은 해 놓고 결과를 기다릴 인내심조차 없었거나. 


어느 쪽이든 똑같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습니다.” 


“그럼 기다렸어야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성적표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조급해하면서 빨리 결과 내놓으라고 선생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 



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힌 입술에서 붉은 핏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겉으로 드러나는 놈의 감정표현이 점점 격해지고. 


조금의 생채기에 불과했던 상처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금씩 벌어진다. 


그 사실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나는 계속해 놈을 비꼬았다. 



“슈한테 네가 무슨 생각인지 말은 했어? 안 했겠지. 그랬다가 슈가 화라도 내면 네 이기심을 포장할 명분이 없어지니까.” 


“......” 


“어리다, 어려. 생각하는 게 어떻게 이렇게 얄팍할까. 너 진짜 나보다 수십 배 넘게 산 초월자 맞아?” 


“......” 


“슈가 불쌍하다, 진짜.”   


“...시오.” 


“뭐? 어깨 펴고 크게 말해, 안 들려.” 


“닥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놈을 긁으려는 내 노력은, 머지않아 결실을 보았다. 


놈이 노호성과 함께 거칠게 몸을 일으키자, 상이 바닥을 나뒹굴고. 


뼈마디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꽉 쥐어진 녀석의 주먹이 내 멱살을 움켜잡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안다는 듯 입 놀리지 말란 말입니다!” 



녀석의 손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뭘 모르는데?” 


“모르잖습니까! 이 땅을 정화하면서 슈 누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지,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 땅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슈 누님을 고작 일주일도 안 지켜본 인간이, 뭘 안다고 잘난 것처럼 설교질입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다면 어리석은 건 당신이잖습니까. 코끼리 다리만 만져 보고 기둥이라 착각하는 맹인과 다를 게 뭡니까!” 


궤변이다. 



“아니, 그렇잖아. 난 슈가 태어나고 한참 뒤에 세상 빛을 봤고. 잘 해 봐야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인데. 어떻게 슈의 희생을 전부 지켜봐.” 


“......”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모든 인간은 장님이겠지. 


우리는 수명의 한계가 명확한 종족이니까. 


이 테라의 만물을 직접 보고 경험하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혜로운 종족이라 불리는 이유는. 


세상의 대부분이 우리의 우려보다는 훨씬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야. 


발만 만져 보고 코끼리임을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봄바람을 느낀 직후, 다음에 올 계절이 여름임을 직감하고. 


들판에서 영근 곡식을 쓰다듬다 보면 다음 가을은 풍요롭겠구나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일부만 봐도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아이가 대황성을 위해 권능을 행사하는 걸 직접 봤어. 그 뒤에 힘들어하는 모습도 봤지. 그 애가 자신의 희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었고.”   


“고작 그것만으로-” 


“고작이 아니야. 그때 슈의 눈빛. 표정. 말투. 그것만으로 그 애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어.” 


“......” 


“내기해도 좋아. 지금의 너는 나보다 그 애를 몰라.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닥쳐!” 


비명과도 같은 포효와 함께, 놈의 소매에서 수십 갈래의 명주실이 튀어나와 나를 겨냥했다. 


핏발 선 놈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송곳처럼 날 선 실의 끝이, 금방이라도 내 온 몸을 난도질할 듯 위협적으로 반짝인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알고 있잖아, 지. 넌 날 못 죽여.” 


“...글쎄.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울 것 같은데.” 



그래. 죽이는 건 쉽겠지. 


하지만 네게는 그 뒤에 찾아올 링의 분노를 감당할 용기가 없어. 


단지 순간의 분노에 휩쓸려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네가 회피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야. 



“너, 이제 네 감정에 매몰되어서 장사의 본질도 잊어버렸잖아.” 


“......”


“거래의 기본은 신뢰와 소통이라고들 하지. 너도 잘 알겠지만.” 


“......” 


“한 번 돌아봐. 네 행위 어디에 신뢰와 소통이 있어? 슈에게 한 번이라도 네 심정을 이야기한 적 있어? 그도 아니면, 슈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노력해 줄 거라고 믿고 기다린 적은? 하다못해 나랑 한 상거래에서도 넌 나를 협박했다 뿐이지, 먼저 장사치로서 다가오지는 않았잖아. ” 


“말은 잘하는군. 곧 죽을 송장 주제에.” 



이제 대화의 장에서조차 도망치려고 하는 건가. 


녀석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깃들고. 


내 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명주실이, 슬슬 각막을 긁어댔다. 


각막은 인체에서 가장 치명적인 급소 중 하나라고들 하지. 


로도스가 건재한 이상, 지휘관인 내가 다칠 일은 거의 없는 부위이기도 했고. 


하지만 실제로 당해 보니 왜 급소인지 절실히 이해가 갔다. 



“...큭!” 



꺼끌꺼끌한 사포를 눈에 대고 거칠게 비비는 듯한 감각. 


티끌이 눈에 들어갔을 때의 100배쯤 되는 고통이 연신 안구를 쑤셔대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눈물이 철철 흘러내린다. 


아파. 


너무 아파.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고 싶을 정도로 아프지만.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제 정말 거의 다 왔으니까. 



“결국 너는 그 정도인 거야, 지. 인정해.” 


“아무리 네가 입을 놀려 봤자, 여기서 네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바. 얌전히 내 분풀이 상대나 돼라. 기분이 풀리면 목숨은 붙여 주마.” 


“...윽. 재밌네. 슈도 그렇게 네 기분대로 갖고 놀다가 죽이려고 했으면서. 되살릴 방법이 있기는 해?” 


“그 더러운 입으로 슈 누님을 능욕하지 마라. 그 분이 한 번 죽더라도, 다시 살려낼 방법은 확실히 있으니까.” 


“진짜?” 


“그래. 인간인 네놈에게 통용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놈의 목소리에서 유열이 배어나오고, 명주실이 눈꺼풀 안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나 또한 더 이상 이 고통을 견딜 이유는 없었다. 


처음 얻고자 했던 정보는 이미 손에 쥐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부활의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못 들었지만, 상관없다. 


이 놈을 묶어 놓고 불게 하면 되니까. 


슈를 한 번 살려낼 방법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그거 아냐, 지?” 

“뭐지?” 


“나 너 한 대 치고 싶어. 진짜 세게” 


“...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런 확신에서 털어놓은 솔직한 심경고백에, 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툭, 놈이 거칠게 내 멱살을 놓고. 


내 엉덩이가 거칠게 땅과 부딪히며, 아릿한 고통이 치골에서부터 슬슬 올라온다. 


이런, 이렇게 아파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꼬리뼈를 슬슬 문지르며 일어나는 내게, 놈이 비웃듯 양 팔을 활짝 벌렸다. 



“때려 봐라. 할 수 있으면.”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나는 무예를 단련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 


쉐이의 파편이라는 초월자에게 한 방을 먹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어차피 지금 저 놈의 태도도 조롱에 불과하고. 



“말이 그렇다는 거고. 나는 당연히 못 해.”


“...?” 



뭐, 내가 안배해 둔 마지막 보험은 따로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총웨 형님이라면 모를까.”  



전혀 뜬금없는 이름에, 놈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 


내가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을 트리거로. 



“...하아. 고생 많았네, 박사.” 



지금껏 조용히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태산이, 묵직하게 기지개를 켰다. 


뚜벅, 뚜벅. 


조금 전 지의 그것과는 무게감부터가 다른 발소리가 데몬의 암흑을 흩트리며 길을 밝히고. 


그 길을 따라, 단순 보험으로 쓰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한 무인이 천천히 걸어나온다. 


한 걸음에 세월을.


또 다음 걸음에는 무예의 정수를. 


마지막 내딛는 한 발짝에 실망과 분노를 담아,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는 남성. 


그를 알아본 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며. 



“...총, 웨…형님…!”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그런 지의 황망함을 되받았다. 


그 눈동자에서 배어나오는 거대한 노기에, 지가 힘겹게 숨을 삼키고. 



“지, 오랜만이구나.” 



장중하며 근엄한, 또 한없이 절제되어 있는. 


묵직함 이외의 단어로 수식하는 것이 실례일 듯한 그의 목소리에, 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어, 째서…형님이 여기에….” 


“표정 한 번 볼 만 한데.” 



나는 그런 놈을 보며 작게 웃을 뿐. 



“네놈, 도대체 무슨 술수를…!”

“술수랄 것 까지도 없어. 그냥 사소한 매복계지.” 


“매복, 이라고…? 언제부터-” 


“네가 나를 찾기 한참 전부터.” 



나는 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대황성을 데몬으로 뒤덮는다는 계책을 내놓을 만큼 정신나간 놈이겠거니 유추했을 뿐. 


그런 놈과 일대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호신책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로도스 오퍼레이터들을 불러다 세워 놓기에는 너무 미안하고. 


니엔이나 시를 숨겨 놓자니, 지를 이길 수 있을지도 애매한데다-


쉐이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탓에 들킬 공산이 컸다. 



“왜-” 


“왜 네가 지금까지 눈치 못 채고 있었냐고? 그야, 총웨 형님은 지금 인간의 몸이잖아. 아주 근접하지 않는 이상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총웨 형님을 그림에서 먼저 불러낸 거다. 


쉐이로서의 본신을 봉인하고, 오롯이 인간의 육체로 활동하는 사람이기에 쉬이 들킬 염려도 없으며. 


권능을 쓰지 못함에도, 무예에 통달해 웬만한 형제자매 이상의 강함을 지닌 이. 


뭐, 최소한의 호신책이 아니라 로도스 최강의 일기토 머신이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이상적인 인선이 아닐 수 없다.  



“...큭! 나를 우롱한 거냐!” 


“그건 또 뭔 소리래.” 


“지금껏 총웨 형님을 쥐새끼마냥 숨겨 둔 이유가 뭐냔 말이다!” 



쥐새끼라니, 자기 형한테. 


얘 이젠 막나가네. 


설명 못 해 줄 것도 없긴 하지만. 



“너 눈치채고 도망갈까 봐.” 



혹시나 총웨 형님 있는 거 눈치채고 기겁해서 숨어 버리면 안 되잖아. 


정보 뽑아내야 하는데. 


그래서 형님은 숨겨 두고 내가 필사적으로 네 주목을 끈 거란다, 지. 



“실망이 크구나, 지. 내가 너에게 인간을 폭력으로 대하라고 가르쳤더냐.” 


“...큭!” 



궁금증은 다 해소된 걸까. 


도망치려는 걸까.


아니면 총웨 형님의 말에 일말의 부끄러움이라도 느낀 걸까. 


 놈이 급하게 어딘가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장사치라는 말이 무색하게 꽤나 빠른 달리기였다. 


하지만. 



“...후우.” 


아무리 빨리 달리는 사람도, 이 거리에서 바람을 앞지를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진각을 밟은 총웨 형님이 땅을 내리찍음과 함께. 


순간 사람이 비틀거릴 정도의 풍압이 나를 덮친다. 


그 탓에 긁힌 각막에 먼지가 잔뜩 들어가,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저 쾅, 하고. 


무언가를 바닥에 거칠게 메다꽂는 듯한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려퍼질 뿐. 


그렇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크고 듬직한 손길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씁쓸하게 미소짓는 총웨 형님의 얼굴이 보였다. 


지는 정신줄을 놓은 채 형님의 나머지 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야말로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어.” 


“...그저 가장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네. 자네를 가족으로서 제대로 환영해 주지도 못했는데, 못난 동생이 자네를 해치게 두기까지 하다니.” 



총웨 형님의 보기 드문 고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역시 올곧은 사람이구나. 


든든한 사람이고. 


참, 뭐랄까. 


한 명의 남자로서 저절로 동경하게 되는, 그런 멋있는 사람이다. 


나를 가족으로서 인정하든 말든, 이 사람이 내 처형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괜찮다니까.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형님 덕분에 살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박사. 하지만 자네 눈이.”  



눈? 


그냥 조금 따끔거릴 뿐이야. 


초점이 좀 안 맺히긴 하지만, 금방 일 다 끝내고 치료받으러 가면 괜찮겠지. 



“그보다, 지금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잖아.” 


“그랬군. 알겠네. 회포를 푸는 건 잠시 미루기로 하지.” 



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한 총웨 형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품에서 그림을 꺼내 황급히 붓을 휘갈겼다. 



[니엔, 시. 나와줘.] 



똑, 먹물이 그림을 적시기가 무섭게. 


그림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가을의 향기가 코에 훅 끼쳐 온다. 


수묵화 속에 담겨 있었을 뿐인 논밭의 풍경이 점차 색채를 얻고, 구체화되며, 지경을 넓히고. 


마침내 도화지의 경계조차 벗어나 현실에 투영되어, 하나의 세상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연결된 두 세상 사이의 통로를 비집고. 



“...으, 악귀 냄새.” 



검을 늘어뜨린 시. 



“아~아, 재밌는 부분 다 끝났잖아. 오랜만에 의욕 만땅으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양 손 가득 무기를 챙겨 든 니엔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와 줘서 고마워. 너희-” 



시간도 늦었는데, 내 말 때문에 지금껏 기다려 준 그녀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던 찰나. 



“아니지, 아니지. ‘고마워’가 아니야, 박사.” 



니엔이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내 입을 막았다. 



“영화 보러 온 관객 앞에 직접 출두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감독은 없잖아, 응? 시사회도 아니고.” 


“......” 


“그러니까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이끌어달라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래, 이게 니엔이지. 


늘 변함없는 그녀의 시원시원함에 약간의 안도감까지 느끼며, 나는 형편없이 쓰러진 지를 가리켰다. 



“일단 얘 좀 어디 가둬둘 수 없어? 다른 사람들 보기 전에.” 



혹시나 이번 일의 배후에 두 명 이상의 쉐이가 개입되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사세대는 더 바짝 긴장할 거고. 


그럼 슈도, 쉐이의 파편을 다수 데리고 있는 로도스도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그림 속에 넣어놓지 뭐. 대충 정리되면 나중에 한 번 털어볼게. 개똥도 약에 쓴다는데, 이 덜돼먹은 오빠도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겠지.” 



니엔의 그 말에, 곧바로 자기 오빠를 들어 그림 속에 우악스럽게 쑤셔박는 시. 


…어우. 


지도 지인데, 가끔 얘네도 좀 이상한 것 같아. 


가끔이 아닌가? 



“...그래서, 우린 뭘 하면 되는가? 기탄없이 이야기해주게, 박사.” 


“응. 일단은 대황성 곳곳에 퍼진 데몬부터-” 



처리를 하고, 링과 슈를 도우러 가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뭐지? 


저기 멀리서부터 어둠이 조금씩 걷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니, 데몬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그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이 괴성은 도대체-


 

“워메, 육실헐 버러지종자들이 오밤중에 염병이여 염병이! 싹 다 조동아리에 주리를 틀어가꼬 공구리를 쳐부러!”


“아따 이 사람아, 버러지들이 그런다고 사람 되겄는가. 뒷간에 처박아서 모조리 거름으로 만들어 버려야 혀!” 


“...?”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검은 파도가 내 눈 앞을 가득히 메우고. 


조금 전만 해도 공포의 대상이었던 메뚜기 데몬들이 한데 뭉쳐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오히려 잘 됐제. 야밤에 출출헜는디, 배에 기름칠 좀 해야 쓰겄다! 지촉인 양반, 이거 양파즙이라고 했지라? 그라믄 묵어도 하등 상관없는 기지요?” 


"??"



그 뒤를 쫓는 건, 등에 큼지막한 통 하나씩을 짊어진 대황성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이 통과 연결된 분무기로 어떤 액체를 뿌려 댈 때마다, 데몬들이 발작하듯 몸을 떨며 힘없이 죽어 간다. 


성전을 치르는 성기사들과도 같은 기세로 마구 데몬을 학살하는 그들. 



“사세대의 이름으로 찢고 죽여라!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그들의 선두에는 누구보다 큰 통을 짊어진 채.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분무기를 들고. 


미친 듯이 데몬을 찢어발기는 좌락이 있었다. 



“뒤져라 반동분자! 슈 씨의 잠재적 살해범!” 


"???"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니엔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쉐이 삼 남매가 모조리 혼이 빠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사, 아니 형부. 저거 뭐야?” 


“...악귀를 물리치는 또 다른 방법이라. 신선하군. 신선하긴 하나…어쩐지….” 


“...저걸, 먹어? 우웩….” 



나도 몰라. 


아니, 내가 짠 계획이긴 한데요. 


양파즙이 데몬한테 쥐약이라고 정보를 날조해서, 농민들의 무지를 이용해 데몬을 격퇴할 계획을 세운 건 분명히 내가 맞는데. 


저거 왜 잘 돼? 


내가 농부 분들의 병충해에 대한 증오심을 좀 얕봤나. 


그보다 공구리는 뭐고, 기름칠은 무슨 소리야. 


반동분자는 또 뭐며, 잠재적 살해범은 도대체 뭔 말이니, 좌락. 


디테일은 나도 아예 모르니까 그렇게 해명하라는 듯 쳐다보지 말라고, 니엔아. 


잠시 이 혼란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 나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기로. 


아무튼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하러 가면 되겠지.



“...하아, 시.” 


“말해.” 


“넌 묵량들을 풀어서 도시에 남은 데몬들 소탕하는 거 도와줘. 그리고 다 정리되면, 저 사람들 데리고 우리한테 합류해 주고. 위치는…여기.” 



품에서 수첩을 꺼내 대충 위치를 표시해 주자, 짜증스럽게 채가는 시. 



“아 몰라. 알아서 할 거야.”


“그래. 믿을게. 그리고 총웨 형님, 니엔. 우리는 링이랑 슈 도와주러 가자.” 



내 말에, 남은 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업히게, 박사. 내 자네의 다리가 될 테니. 자네는 내 길잡이가 되어 주게.” 



스스럼없이 등을 내미는 총웨 형님. 



“시야. 언니 보고 싶다고 울면 안 돼.” 


“꼴 보기 싫어. 빨리 꺼져.” 


“에헤. 매정해라.” 



그리고 여느 때처럼 사이좋은 두 사람. 


그런 셋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링, 슈. 이쪽은 정리됐어. 


왕을 상대하고 있을 너희도 당연히 이기고 있겠지만.


아니, 왕이 아니라 어떤 상대가 와도 너희는 너희 자신으로서 승리하겠지만. 


우리의 싸움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소중한 걸 지켜내야 하는, 불합리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디펜스게임이니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지금 바로 도와주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 



쉐이 합체까지, D-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