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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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돌아온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이벤트 회서리 스포 및 오리지널 설정 있으니 주의. 


2. 22000자! 와! 개쩌는 고봉밥! 미치겠네 진짜. 왜 가면 갈수록 분량 조절이 안 되는 느낌이지? 말이 18화지 웹소설 편수대로 따지면 30편은 나오겠네. 평일 되면 또 못 쓸 것 같아서 열심히 쓴다는 게...미안하다. 내 역량부족임.  


3. 그래도 분량이 많은 만큼, 내가 이해한 링 눈나의 모든 매력을 싹 때려박았어. 불멸자 특유의 간지, 속 깊은 부분, 눈나스러운 모성, 의외의 귀여움, 장난기까지. 클라이맥스로는 실격일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쓴 모든 글 중 가장 애정을 담아 썼으니 예쁘게 봐 줬으면 좋겠다. 


4. 드디어 후일담 한 편만 더 쓰면 이 에피소드도 끝이야! 진짜 하차 안 하고 따라와준 명붕이들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네. 보답이라기도 뭐하지만, 후일담은 약간의 떡밥 제외하면 어깨에 힘 빼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내용으로 구상했어. 진짜 박사랑 쉐이들이랑 좌락이랑 술 먹으면서 노는 게 전부니까, 편하게 보고 싶은 명붕이들은 이번 편 슥슥 넘기고 그쪽을 기대해 줘. 


5. 소재추천, 피드백, 댓글, 아카콘 모두모두 환영해. 특히 피드백이랑 댓글은 이 고단한 작가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니까, 내 글 읽고 느낀 점이나 궁금한 점 있으면 기탄없이 이야기해줘. 최대한 빨리 읽고 성심성의껏 대답할게. 


6. 늘 읽어 주는 명붕이들,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잡설이 길었네,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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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3일 00:01. 


염국 대황성, 논밭. 



창연한 용의 포효가 고요하던 밤을 찢어발겼다. 


백일몽 속에서 잉태된 수십 마리의 용이 링의 등불을 따라 현세에 강림하고. 


무리를 이루어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악귀의 무리를 쫓는다. 


마치 한 마리 새 앞의 날벌레라도 된 양, 악귀들이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도망치며. 


자유로이 유영하는 용들은 그런 악귀들을 쫓아 한 입에 집어삼켰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흐.” 



무릇 악귀는 바다의 해사, 대지의 광석병과 비견되는 강대한 괴이이거늘. 


생명의 공포를 먹지 못하면 한심하리만치 나약해진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악귀를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링도.


그런 링의 꿈 속에서 태어난 용들도. 


하다못해 슈조차도. 


지금 이 기세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도 저 멀리, 대황성 시내에서 희미하게 묻어나오는 병충해를 향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왕의 표정을 읽은 링이 살풋 웃었다. 



“왜? 낭패야?” 


“아니. 어느 정도 예상한 바다. 처음부터 이 정도로 너를 뚫어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단다, 동생아.” 



애초에 이기려고 나온 게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링을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대황성을 오염시키는 것. 


지금 형세가 불리해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그 목적에 맞춘 수단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심상을 갈무리한 왕이 소매를 한 번 떨치고. 


그를 둘러싼 그림자에서 버든비스트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하지만, 너라면 알고 있겠지.” 



검게 물든 두 뿔. 


온통 핏발로 뒤덮여 붉게 보이는 흰자위와, 숨을 내쉴 때마다 눅진한 거품이 뚝뚝 떨어지는 입가. 


거칠기 그지없는 숨결까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녀석을 보며, 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농업에 동원될 정도로 온순한 짐승인 버든비스트가 저렇게 난폭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단 하나밖에 없겠지. 


광우병(狂牛病). 


아마도 악귀의 침식으로 인해 강제로 발현된 병증이리라. 



“네게 악귀를 없애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일 터다.” 



왕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흩뜨리며, 버든비스트가 그대로 링을 향해 돌진해 왔다. 


발굽이 가열차게 대지를 두들기고, 번뜩이는 두 뿔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들이받을 듯 곧추세워졌다. 


사람의 두 배에 육박하는 놈의 거체에는, 자동차 하나 정도는 능히 박살낼 듯한 힘이 담겨 있었다. 


링의 가녀린 몸 정도는 가볍게 분쇄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쓰게 웃을 뿐이었다. 


지팡이에 기대 서 있을 뿐인 그 유려한 자태에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는 뛰어난 무인이자 훌륭한 책사니까.” 



그리고. 


뒤이어 떨어진 왕의 한 마디를 방증하듯. 


버든비스트의 숨결이 링의 얼굴을 핥을 듯 가까워진 그 순간. 


놈의 뿔을 양 손으로 틀어쥔 링이 놈을 부드럽게 찍어눌렀다. 


돌진이 멈추고, 거침없이 땅을 두드리던 놈의 발굽이 공허하게 허공을 딛는다. 


순식간에 땅에 머리를 조아리게 된 버든비스트는 씩씩대며 몸을 일으키고자 발악했지만, 링의 두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수십 년을 묵은 거목의 가지에 뿔이 걸려버린 듯한 감각.  



“...미안하구나.” 



아무리 힘을 주어도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얼마나 용을 써도 이미 육신을 집어삼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원통함을 담아 길게 울부짖는 버든비스트를, 링은 슬픈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축생은 본디 원죄에서 자유로운 존재이거늘. 


인간의 이기심이 무엇이관대 이들의 등에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지운단 말인가. 


억울함을 읍소하는 너희의 우짖음이 내 가슴을 저미는구나. 



“참으로 고생하였다. 이제 그만 잠들거라.”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 링은 광채를 깃들인 손으로 녀석의 거칠거칠한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버든비스트의 머리를 스칠 때마다. 


피눈물을 철철 흘리던 녀석의 눈이 조금씩 감겨 오고. 


쉼 없이 발버둥치던 몸뚱이가 힘을 잃어 가며. 


이윽고 그 거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링은 그저 하염없이 버든비스트를 매만질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왕이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너도 잘 알지 않으냐. 악귀란 그 존재만으로 현실을 어그러뜨리는 존재라는 걸.” 



그런 왕의 말에 호응하듯, 잠든 버든비스트가 별안간 검은 피를 왈칵 토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악취를 한데 때려박아 사흘쯤 숙성시킨 듯한 고약한 냄새에, 링이 잠시 인상을 찌푸린 사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둑방 길 위에서 기묘하게 부글거리던 끈적한 피는 이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꾸물텅꾸물텅, 소금을 맞은 민달팽이마냥 격렬하게 몸을 뒤틀며. 


대황성 사람들이 정성껏 가꿔 온 작물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 



“악귀란 재앙이고, 공포 그 자체이며, 또한 역병이다. 네 존재가 확산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이미 더럽혀진 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

 


이윽고 그 액체가 논에 몸을 담그자, 맑기만 하던 물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고. 


그 물을 빨아들인 벼의 모종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뒤틀려 간다. 


검게. 


붉게. 


그리고 희게. 



“...오빠.” 


“공포를 흩뜨릴 수야 있겠으나, 역병을 물리치는 건 네 몫이 아니니라.” 



악귀를 죽이는 일은 쉬우나, 놈들이 흩뿌리고 간 뒤틀림을 치울 수는 없다. 


네가 떠안지 못한 책임은 그대로 다른 이의 어깨에 지워진단다. 


그리 말하는 듯한 왕의 단언에, 링은 슈를 돌아보았다. 



“...착각하지 마.” 



결연한 표정으로 링의 곁을 지키는, 대황성의 오랜 수호신을. 



“왕 오빠, 이건 원래부터 내 책임이었어.” 

“......” 

 

“이곳에 생명을 틔우기로 결정한 것이 다름 아닌 나이니. 내 고집으로 인해 피어난 삶을 지키는 것 또한.” 



이미 오랜 권능의 사용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마모되었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손에 든 공명쇄*를 치켜드는 슈. 


(주: 공명쇄는 슈가 들고 있는 그거. 중국 전통 퍼즐임.) 


이리저리 짜맞추어진 공명쇄의 틈바구니에서 푸르름이 새어나왔다. 



“그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내 몫이야.” 



왕의 검정도. 


링의 군청도 아닌. 


그저 맑고 파릇파릇한 고색창연함이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드리우며. 


물기 어린 안개가 피어나 용의 형상을 이루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풍요로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오염된 세상을 향해 따사로이 내리쬐인다. 


그 빛이 닿을 때마다, 작물을 괴이하게 물들인 색이 깨끗이 씻겨 나가고. 


시커멓게 죽었던 물이 제 빛깔을 되찾으며. 


왕의 주변을 두르고 있던 악귀의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다. 


지켜보고만 있어도 술이 생각나고,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법한 장엄하기까지 한 풍경. 


하지만 지금 링의 머릿속에는 술도, 시도 없었다. 



“...슈, 너. 무리는 말라고 했더니.” 



이 풍경이 누구의 피와 살을 깎아 빚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누군가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살짝 고개를 들려 하는 초조함을 간신히 달래며, 조심스레 입을 열 뿐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언니. 아무렇지도-” 

 


윽.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가지도 못하고 목구멍까지 치민 신음을 삼키는 슈.  


그녀의 안색은 숫제 새파래진 상태였다. 


이전에 권능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안 좋아진 동생의 상태에, 링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잖니, 슈. 


우리의 권능은 바다가 아니라 일개 저수지에 불과해. 


아낌없이 또 퍼내고 퍼내다 보면 언젠가는 바닥을 보인단 말이야. 


그 바닥이 드러났을 때, 네가 어떻게 될지는 이미 잘 알잖니. 


언니로서의 걱정이 머릿속에서 마구 아우성을 쳤지만, 링은 그런 염려의 말들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왕을 마주볼 뿐. 



“...왕 오빠. 하나만 물어봐도 돼?” 


“하거라.” 


“지금 슈의 상태, 오빠도 알지?” 


“그래.” 


“그럼, 오빠는 이것까지 각오한 거야?” 


“각오했다마다.” 



너무나도 무덤덤한 그의 대답에, 링은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슈의 상태를 알고, 이 아이의 성격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일을 벌였다는 건. 


슈의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의미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후의 일도?” 


“물론이다, 동생아.”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데. 



“...그래.” 


“물론 대책은 제대로 세워 뒀으니 안심하거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오빠. 


우리는 부모 없이 오롯이 우리 열둘로서 이 세상에 났어. 


우리의 삶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외로운 여정이었고, 돌을 베개 삼아 눈을 감는 매일 저녁은 다음날 아침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의 연속이었지. 


그런 덧없는 인생 속에서, 우리 열둘만은 서로에게 있어 버팀목이었어. 


당당하게 이해를 요구할 수 있는 소중한 벗이었고. 


항상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었지. 


그런 가족의 피를 손에 묻히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오빠는 너무나도 잘 알잖아. 



“뭐래. 방구석에서 바둑돌이나 만지작거리는 오빠보단 내가 훨씬 튼튼할걸. 걱정 마, 언니. 나 그렇게 쉽게 안 죽어.”    



그녀를 격려하려는 듯, 핏기가 다 빠진 얼굴로 짐짓 씩씩하게 웃는 슈. 


하지만 링은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분노, 슬픔, 애통함, 원망. 


이미 오래 전에 다스리는 법을 배웠을 수십의 번뇌가 한데 얽혀, 사나운 폭풍처럼 그녀의 안을 휘돌고. 


스스로도 모르게 앙다물어진 어금니에서 바드득 소리가 났다. 



“...말했었지, 링. 네 손은 생각보다 작다고.” 


“......”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건 슈뿐만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 링의 고뇌에. 



“궁금하지 않으냐? 왜 ‘지’가 나와 함께 나오지 않았는지.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박사는 지금 어디 있는지.”  


“......”



왕은 그대로 끓는 기름을 부었다. 



“뭘,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성동격서의 술이다. 너라면 쉬이 예상했으리라 생각했건만. 인간의 사랑에 눈이 멀기라도 한 게냐?” 


“...뭐? 지가 여기 있어? 아니, 잠깐…그렇다는 건, 형부랑 좌락은-”
 

쿨럭, 사태를 파악하고 다급하게 링을 돌아보던 슈가 거칠게 기침을 토하고. 


가만히 닫힌 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두 사람을 보며, 왕이 힘없이 웃었다. 



“자, 링. 넌 어떻게 할 거지? 계속 나와 어울릴 테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뒤로 달려갈 테냐?” 


“......” 


“지에게 그 남자를 죽이지 말라고 말은 해 두었다만, 글쎄. 나도 장담은 못 하겠구나. 지 그 아이는 은근히 충동적인 구석이 있으니 말이야.” 



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폐부를 들어내고, 뼈와 맞닿은 신경을 닥닥 긁어내는 듯 했다. 


왕이 툭툭 던지는 말이 귓가를 스칠 때마다 가슴 속에 애끓는 초조함이 부어지고. 


안 그래도 착잡한 심경에서 어지러이 보글거리는 기포가 되어, 그저 한없이 애타게 끓어오른다. 



“...언니, 가.” 


“......”


“가라고. 가서 형부를 지켜줘. 여긴 내가….” 



박사를 구하러 가면 슈가 죽고. 


슈를 지키면 박사를 잃을지도 모른다. 


피가 마르는 듯한 진퇴양난 속에서, 위로가 되어야 했을 슈의 말은 오히려 번뇌를 더할 뿐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슈.”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다. 



“...하, 의외로다. 링, 아무래도 넌 네 생각만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건 아닌가 보구나.”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렵게 떨어진 링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탄식을 담아 조소하는 왕. 


그리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링의 팔을 꼭 붙드는 슈. 



“왜 후회할 짓을 하려는 거야. 말했잖아, 나 안 죽는다고. 근데 형부는 아니잖아. 한 번 죽으면 못 살리는 인간이잖아.”


“...알아.” 


“그럼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나는 됐으니까 빨리 가라고! 나 때문에 형부가 죽기라도 하면, 난-” 


“그러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잖니, 슈. 마음은 고맙지만 좀 진정하렴.” 



평소의 그녀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는. 


허나 반박을 불허하는 단호함이 담긴 짧은 말로 그녀를 무마한 링은, 이내 가만히 왕을 바라보았다. 



“오빠, 내가 그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럼, 아니냐? 너 자신을 보거라. 녀석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여기서 뭉개고 있지 않으냐.” 



아주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위기에 발벗고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니까. 


실제로 링은 지금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 박사가 몸을 숨기고 있을 대황성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감히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댄 건방진 동생을 제재한 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음으로서 그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틀려. 아니, 본질에서 아득히 벗어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이 이 자리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은. 


두 사람이 지난 일 년간 쌓아 온 신뢰가. 


싸움터에 나서기 전, 짧은 말로나마 나누었던 결의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에서 벗어났다?” 


“그래. 그이는…내게 괜찮을 거라고 말했어. 박사는 아무 생각 없이 호언장담을 하는 사람이 아냐.” 



마지막으로 술잔을 나누었을 때, 박사는 지극히 평온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도, 너도 괜찮을 거라고. 


그 말은 곧 그 또한 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수를 나름대로 생각해 두었으며. 


그 수에 대해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더없이 든든한 위로이자 격려였다. 



“하. 넌 그 남자를 이상하리만치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오빠가 그이를 과소평가하는 거야.”  

 

  

그때 그가 보여 주었던 무덤덤한 태도를 떠올리며, 링은 웃었다. 


있지, 그대여. 


모든 것에 초탈하여 구름 위를 거닐고자 하는 나이지만, 그대에 관한 일이라면 도무지 평온할 수가 없어. 


봐. 


당장 타인의 입으로 그대의 위기를 전해 듣는 것 만으로도 마음에는 풍랑이 일어나고, 입가에 요동치는 지진을 억누르기조차 힘겹잖아.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이토록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걸. 



“이미 한 번 상대해 본 오빠라면 알 거 아냐. 그이의 진가를.” 



이제야 하는 쓸데없는 잡생각에 불과하지만. 


만에 하나. 


수천만, 아니 억겁에 하나. 


그토록 사랑스러운 그대가 또 다시 내 곁을 떠난다면. 


그리고 그대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 손에도 묻어 있다면. 


나는 결단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만고의 죄인이 되어, 스스로의 가슴팍에 낙인을 새기고. 


그대를 스러지게 한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끝없이 방랑할지도 모르겠네. 



“결단력. 통찰력. 스스로를 통제하는 인내심까지. 모두 인간의 범주에서 월등히 벗어나 있다는 거. 저번에 못 느꼈어?” 


“글쎄. 그래 봐야 인간이다, 링. 지의 상대는-” 


“어디 기사를 장사치로 상대하려 해? 판 위에서 싸움을 벌일 거면 오빠가 직접 나섰어야지. 기사 대 기사로.” 



하지만. 


입 밖에 내지조차 않았던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챌 만큼 상냥한 그대이니까, 그토록 내게 확신을 주려고 노력했던 거겠지. 


나는 너를 남겨두고 가지 않을 것이며. 


함께 짊어질지언정, 그대의 죽음을 내가 홀로 책임지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을. 



“지는 그이의 상대가 못 돼. 그러니까 어설픈 격장지계는 그만둬.” 


“...하.”  



스스로를 평범한 여인으로 격하시킬 생각은 없으나, 부군의 마음을 이해하고 충실히 따르는 것 또한 아내 된 자의 덕목인 바. 


그토록 아름다운 그대가 내게 믿음을 요구한다면. 


어떤 난관이 우리를 덮치더라도.


아무리 내 마음이 걱정을 부르짖고, 그대를 향한 염려에 속이 타들어가더라도. 


나는 기꺼이 금고를 열어 내 가장 값진 신뢰를 그대에게 내어줄 수 있어. 


그게 그대가 내게 주었던 사랑이고. 


링이 지금의 그대를 사랑하고자 하는 방식이야. 



“오히려 오빠가 지를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은 곧 생각의 흐름을 다스리는 치수꾼일지니. 


그대를 향한 마음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입 밖으로 내뱉을수록, 강변을 삼킬 듯 일렁이던 물결이 점차 고요해져 가는구나.  


혹 마음에 항하사의 미혹이 있어(心中有恒河沙迷惑). 


천 리를 뻗은 강이 되어 나그네의 조각배를 흔들어도(千理糖川, 貴客舟搖). 


나이 든 사공은 너털웃음 웃으며 노를 저어 갈 뿐이니(沙工一笑不止渡江). 


헛된 번뇌를 이같이 흩뜨리노라(天下無用, 煩惱退散).



“...쓸데없는 소리를. 너는-”  



링의 말을 짜증스럽게 되받으려던 왕. 


하지만 그의 음울한 중얼거림은 링의 눈을 마주한 순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왕을 오시하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한 점 근심조차 없었다. 



“사실, 그냥 알고 싶었어. 진짜 오빠가 슈를 죽이려고 결심했는지 어떤지. 그래서 대화하려고 한 거야.” 


“......” 


“거기서 오빠가 박사를 가지고 협박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네. 바로 몇 분 전에 결혼 축하한다 해놓고서, 수틀리니까 바로 신랑을 채가려는 거야?” 


“...화났느냐” 



마치 전날 밤, 처마 아래에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 


맑고 깨끗하기만 한 그녀의 목소리에, 되려 소름이 끼치는 왕이었다. 



“응. 화났는데?”


“......” 

“이미 신혼여행 방해 전적 있는 오빠가, 이번에는 내 눈 앞에서 귀여운 여동생을 죽이려고 발악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 부군을 가지고 협잡질이라니. 요 몇백 년 새 이렇게 화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윽.” 


“저번에는 경고 정도로 끝났지만…이번에는 그냥은 못 넘어가겠는걸.” 



평소의 그녀답게 조곤조곤한 음성 속에서, 확실하게 꾹꾹 눌러 담겨져 있는 살의가 은근히 배어났다. 


그녀 말마따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여동생의 조용한 격노에. 


왕은 저도 모르게 물러서려는 발을 멈춰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래 봤자 네가 뭘 바꿀 수 있느냐, 링.”  



그래. 


달라질 건 없다. 


지금 왕과 링이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도. 


악귀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역병은 착실하게 이 땅을 물들여 가고 있었으며. 


그 오염을 정화하는 슈는. 



“...윽.” 



계속해서 마모되어 가는 중이었다. 


악귀도 넉넉하게 남았고, 지도 박사를 잘 붙들고 있을 터. 


상황은 여전히 계획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무엇을 바꿀 수 있냐고?” 



그런 왕의 자기암시를 깨부수듯, 링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뭘 모르는구나, 오빠. 꿈은 원래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해. 그저 때때로 마음을 허망하게 할 뿐.” 


“...!” 



살랑. 


그녀의 꼬리가 허공을 떨치자, 바람이 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살짝 무리해야겠네. 미안해, 슈. 조금만 더 견뎌주렴.”  



링의 말에 담긴 의미가, 풀어지고 또 풀어져 아주 미세한 빛의 입자로 쪼개졌다. 


그 반딧불 같은 작은 광원들은 흑암에 휩싸인 허공을 채우고 반짝이며. 


주인의 의지에 따라 부드럽게 섭리를 호도했다. 


바라옵건대, 잠시 현세의 오욕칠정과 고난을 벗어나. 


꿈 속의 한 마리 나비로 화하기를 간청하나이다. 


그 간절한 바램에, 악귀의 난동에 지친 세상이  응하고. 


한 손으로 합장한 채 선 링을 구심점으로 하여, 천지가 온통 그녀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가을이로다.” 



스스로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무아몽중일지라도 좋사오니. 


그저 풍요롭기를. 


그저 아름답게, 또 애절하게. 


만물이 영원토록 있는 그대로 익어 가는 계절이기를. 


덧없는 소망을 담은 꿈이 펼쳐지며,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일변한다. 


어둠으로 절여져 빛을 잃었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름이 칠해지고. 


악귀의 사나운 우짖음만이 가득했던 세상에 고요함이 내려앉으며. 


창궐하는 역병으로 죽어 가던 대지에는 태고 그대로의 자연이 피어났다. 


처참하던 전장은 온데간데없고, 세 사람은 어느새 평화로운 들판 위에 서 있었다. 



“....언니, 이건.” 


 

창백해진 슈가 황망한 목소리를 내고. 


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전력이 아니었던 게냐.” 



그런 두 사람에게 살풋 웃어 보인 링은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그녀의 꿈에 함께 끌려들어온, 무수한 악귀들이 방황하고 있는 곳으로. 


악귀는 결국 일종의 정신체다. 


사람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바. 


그렇다면 악귀 또한 꿈을 꾸어도 이상할 건 없지.  



“음, 뭐. 대충.” 



자, 일단은 생각대로 됐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지. 


시엔징을 풀어 사냥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 사이 슈의 몸이 못 버티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모처럼 꿈에 들어왔으니, 좀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링은 손가락을 튕겼다. 



“흘러가거라.” 



지극히 가벼운 손동작. 


허나 그 동작이 가져온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평화롭던 들판의 시간이 느닷없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느긋하기만 하던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가냘프고 높게 변하고. 


텅 비어 있던 하늘에는 구름이 달리기 시작했으며. 


인적 없던 들판에는 조금씩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돌을 파내며, 밭을 일구고, 가족들을 위해 집을 짓는다.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확실하게 인식한 악귀들이 이내 입맛을 다셨다. 


금방이라도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그 달콤한 두려움을 음미하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 


하지만 링은 웃었다. 



“어디 먹을 수 있으면 먹어 보거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밭이었던 곳은 도시가 되어, 드높은 마천루가 들어섰으며. 


전쟁으로 쇠락하고, 황무지로 변했다가. 


다시금 무성한 수풀에 뒤덮인 풍요로운 들판으로 변했다. 


악귀의 턱이 몇 번이고 위협적으로 딱딱거렸지만, 놈들은 그 무엇도 삼키지 못했다. 


그제야 그녀의 심계를 눈치챈 왕이 대경실색했다. 



“...링. 너. 악귀를 굶겨 죽일 셈이냐?” 


“바로 맞혔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왜 말이 안 돼? 꿈인걸.” 



이 세상의 모든 건 링의 꿈이 자아낸 산물이다. 


그녀가 겪어 온 것. 


취했을 때 으레 하던 시시콜콜한 망상. 


흉중에 묻어 두었던 은밀한 감정들을 교묘하게 뒤섞어 만든, 그녀의 무의식이다. 


설령 이곳에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정말 살아 있다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 생생한 감정들을 내보이더라도. 


결국 그 감정은 링에게서 발로한 바. 


그녀가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을, 꿈 속의 존재들이 표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링은 악귀들을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즉, 이곳에는 놈들이 먹을 게 아예 없었다. 



“뭐, 그게 전부는 아니야.” 


“뭐?”
 
“우리는 시간에 익숙하지. 너무 오래 살았으니까. 이제 와서 좀 빨리 흘러가든, 천천히 흘러가든 별 상관도 없어. 그렇잖아.” 


“...!” 

“하지만 악귀도 그럴까?” 



이미 천 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살며, 뇌에 무수한 기억들을 새겨 온 쉐이들은 가속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버틸 수 있다. 


찰나의 순간 속에 뇌에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쑤셔박더라도, 어느 정도는 너끈히 견뎌내리라. 


하지만 악귀들은 아니다. 


키이익, 키잇.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놈들이, 갈수록 발작하듯 거칠게 움직이며. 


입에서 검은 체액을 뚝뚝 흘리고. 


땅에 내려앉아 고통스럽게 몸을 뒤튼다. 


가속되는 시간이 그들의 굶주림을 더욱 가열차게 채찍질하고.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이, 그들의 사고 회로가 처리 가능한 용량을 아득히 넘어서는 정보를 거칠게 쑤셔박는다. 


기아와 뇌 과부하로 완전히 정신줄을 놓아 버린 놈들이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박사와 함께 보았던 만화의 내용을 떠올린 링은, 손가락을 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영역 전개, 무량공처. 아니, 내가 썼으니까 무링공처인가?” 


“...큭.”  


“즉흥적으로 짜낸 기술치고는 꽤 훌륭하지 않아?” 


“...이걸로, 이겼다고 주장할 생각이냐.” 



단신으로 수백을 족히 헤아릴 악귀들을 물리치고서도 태연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계획이건만. 


이리도 허무하게 끝나 버릴 줄이야. 


하지만 완전한 패배는 아니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할까. 



“혹시나 그렇다면 유감이구나. 지도 악귀와 함께 대황성으로 갔으니까.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건 이미 다 이루었단다.” 



하지만 링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황성? 거기는 박사랑 그 사세대 꼬맹이가 있어. 아까 둘이서 사부작사부작거리면서 뭐 준비하는 것 같던데. 그럼 틀림없이 큰 피해 없이 막아냈을 거고.” 



이제는 완연히 굳건해진, 박사를 향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담아. 



“......” 


“그러니까 무승부지. 우리도 슈를 지키고 악귀를 소멸시켰지만, 오빠랑 지도 이미 얻을 거 다 얻었잖아.”


“...하.” 


“마침 잘 됐어. 시간도 넉넉하게 남았겠다. 그저께 밤에 재미있는 꿈을 꿨거든. 같이 보자. 응. 슈도 이리 오렴.”   



서로 할 일은 다 마쳤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 정도는. 


두 번 다시 함께 길을 가지 못할 형제에게 아름다운 꿈을 보여 줘도 괜찮겠지. 


딱, 링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고. 


아직도 정신없이 흘러가던 주변의 풍광이 다시금 뒤집힌다. 


흥망성쇠를 반복하던 들판의 모습이, 허공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지고. 


대신 야트막한 산과, 그 중턱에 지어진 초가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언니, 이건.”   


“보면 알 거야. 자, 가자.” 



링은 살풋 웃었다. 


한 손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슈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못내 씁쓸한 기색인 왕의 팔목을 꼭 쥐고. 


천천히 초가집의 마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건, 나인가.” 


“어머. 내가 왜 여기 있어?”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니엔, 시. 총웨 오빠랑…우리 막내도 있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링이 박사에게 열띤 어조로 설명했던 덧없는 꿈. 


무사히 살아남은 쉐이 가족이 한데 옹기종기 모여 앉은 광경을 본 슈와 왕의 눈빛이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링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잠자코 지켜봐.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부터니까.” 



이윽고 초가집 안방의 문이 열리고,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링이 걸어나왔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각자 할 일을 하던 쉐이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야단법석을 떨어 대고. 


그런 그들을 헤치며, 세 아이를 데리고 있는 박사가 천천히 링에게 다가온다. 

 


“...언니. 저거, 형부 맞지?” 


“바로 맞혔단다, 슈.” 


“와아…넷째까지 낳다니. 형부 되게 절륜하네. 근데 왜 저렇게 말랐대. 안 되겠다. 지금부터라도 든든하게 먹여서 살을 찌워 둬야겠어.” 


“......” 


“그건 그렇고, 애들 정말 예쁘다. 어쩜 저렇게 언니랑 형부를 쏙 빼닮았을까. 순둥순둥하고 포동포동해서 너무 귀여워.” 



지친 기색이 완연한데도, 눈 앞의 광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눈을 반짝거리는 슈. 


그리고 여전히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왕. 


그런 왕을, 링은 툭 쳤다. 



“왜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이야, 오빠. 꿈이 마음에 안 들어?” 


“...미안하다, 링. 진심으로 네게 저런 미래가 찾아왔으면 좋겠구나.”

 

“그게 내 남편 인질로 잡고 협박하던 사람이 할 말이유?” 



장난스레 묻자, 왕이 쓰게 웃었다. 



“...그것도, 미안하구나. 하지만….”


“하지만, 뭐.”


“이거 하나만은 약속하마, 동생아. 저 풍경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와 그 남자에게는 반드시 저런 미래를 선사해 주마.”   



에휴, 이런 말 할 줄 알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왕 오빠?”   


“...” 


“뭔 짓을 하든 우리는 가족이야. 오빠가 없는데 저 단란한 풍경이 완성될 것 같아?” 


“......” 



묵직하기 그지없는 왕의 침묵에, 링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왕이 한참 전에 선택한 길이니, 이제 와서 설득할 여지는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이 달콤한 꿈을 보여준 이유는. 


하다못해 알아주었으면 해서.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자기 자신조차 불태우려는 이 멍청한 오빠를. 


링은 아직도 형제로서 사랑하고 있음을. 



“...미안하다.” 


말하는 거 보면 알고는 있었던 거 같지만. 


한때의 아쉬움은 결국 미련이고. 


미련은 술을 더럽히는 지게미에 불과하니. 


뭐, 이제는 털어버려야겠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링은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짐과 함께. 



“.......” 


꿈이 끝나고, 다시금 현실이 드리워진다. 


악귀는 온데간데없고. 


약간의 역병만이 남은 채 고요해진 세상에는, 다시금 평화가 깃든 채였다. 


그 풍경을 한 바퀴 휘돌아본 링은, 이내 시선을 왕에게 고정했다. 



“종막이네.” 


“...그래.” 


“앞으로는 이런 일로 술잔 기울이고 싶지 않은데. 그건 좀 무리겠지?” 


“애석하게도.” 


“음. 뭐. 그래.” 


“...그럼, 또 보자꾸나. 건강하거라, 링. 박사에게 내 안부 전해 주고.”  



그렇게 씁쓸하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왕. 



“가긴 어딜 가?” 



그런 그를 향해, 링은 눈을 흘겼다. 


어딜 어물쩍 훈훈하게 마무리지으려고. 



“...?” 


“셈은 확실히 하고 가야지. 말했잖아, 나 화났다고.”


“......” 


“첫 번째. 일단 슈한테 사과해.” 



아직도 조금 전의 꿈에 취해 헤롱거리는 슈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내밀자, 왕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사과는 할 수 없구나. 나는 내 신념에 따라 슈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니.” 


“...그으래?” 


“...그래.” 


“어, 언니. 표정이 무서워. 나 사과 안 받아도 되니까, 일단 진정하자. 응?” 


“조용히 하렴, 슈.” 



뜯어말리는 슈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왕에게 다가간 링은 그의 깡마른 쇄골을 꽈악 움켜쥐었다.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왕이 표정을 구기고. 



“...큭.” 


“두 번째. 나랑 박사한테도 사과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과하면 참작해 줄게.” 


“...오라비로서 미안하다. 하지만 전부 필요한 절차였기에, 사람으로서 사과하기는 어렵겠구나.” 


“진짜 사과 못 하겠어? 내 여동생을 눈 앞에서 죽이려고 하고,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을 괴롭히고, 내 부군을 가지고 날 겁박했으면서?”   


“네가 뭐라 해도 그것만큼은-” 


“그래. 정 입으로 천냥 빚을 못 갚겠다면…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겠지.” 



온화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그렇지 못한 말과 함께 왕의 어깨를 놓은 링은, 그대로 몇 걸음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경애해 마지않는 맏이를 똑 닮은 그 동작에, 왕이 쓰게 웃었다. 



“...나를 소멸시키려는 게냐.” 


“아니. 그냥 좀 아프게 때리려고. 반성을 안 하면 고육계라도 써야지 어떡해.” 

 

“...허어. 그리하여 네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치거라.”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야.” 



내뻗어진 그녀의 주먹에 바람이 깃들었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 전.


큰오빠와 실없는 농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그는 뜬금없이 링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천 개의 초와 백 개의 식을 한 호흡 안에 쏟아내는 법을. 


무예(武藝)가 아닌 무예(武禮)로서 상대를 제압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책을. 


허나 너무 옛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일지. 


반쯤은 잊어버렸고, 남은 반은 오래 쓰지 않아 사용법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만큼으로도 지금 이 정신 나간 오빠를 호되게 혼내기에는 더없이 적절하겠지. 


그녀의 주먹에 얹혀 살랑거리던 바람이, 이내 광풍이 되어 포효하고. 



“...잠깐, 링-” 



왕의 표정에 때늦은 당황이 깃들었지만, 이미 때는 한참이나 늦어 있었다. 



“세 호흡쯤으로 나눈 천초백식, 어디 한 번 받아봐.” 



태산처럼 무겁지는 않되, 돌밭의 바위만큼 묵직하고.


빛살처럼 빠르지는 않되, 사람을 따돌리기에는 충분히 신속한 수백 개의 권격이 왕을 사정없이 난타한다. 


복부가 움푹 파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앞니가 날아가고. 


우직, 어깨뼈가 박살나 내려앉음과 동시에 이마가 새빨갛게 부어오른다. 


사방으로 피가 튀며, 왕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들숨과 날숨을 한 번 반복하기도 빠듯한 찰나의 순간 안에 왕을 눕혀버린 링은, 씁쓸하게 주먹을 거두었다. 


이런, 아무리 수련을 안 했다지만 기도가 너무 흐트러졌는데. 


앞으로는 이쪽도 조금씩 연습해야 하려나. 



“...죽은 거 아냐?” 



미동도 없이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는 왕을 보며, 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지만….



“괜찮단다, 슈. 저 오빠는 이 정도로 안 죽어.” 



운동 싫어하는 주제에 몸은 이상하게 튼튼하고. 


혹시 죽었다 해도 어차피 108개, 아니 이젠 107개의 조각 중 하나일 뿐인 데다.


어차피 사세대에 넘길 생각이었으니까. 


링 자신이나 슈에게 저지른 죄는 이미 충분히 물었으니, 인간에게 범한 잘못은 응당 그들에게 사죄해야 할 터다. 



“그보다 정말 잘했어, 슈.” 



무엇보다 지금은 저 괘씸한 오빠를 염려할 때가 아니라. 


바로 곁에서 열심히 노력한 자매를 치하해야 할 상황인 것을. 


그런 마음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자, 힘없이 미소짓는 슈. 



“이미 지친 몸인데도, 열심히 했구나.” 


“...내가 뭘. 언니가 다 했지. 나야말로 언니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걸.” 


“나는 됐어. 말했잖니. 가족으로서 함께 책임지겠다고.” 



그런 링의 말에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다급하게 고개를 쳐드는 슈. 



“...아, 맞다. 언니. 형부랑 나머지는….” 


“진정하렴, 슈. 괜찮을 거야.” 


“그게 아니잖아. 우리, 지금이라도 대황성으로 가야-” 


“진정하라니까, 얘도 참. 무슨 냄새 안 나니?” 


“냄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허공을 향해 코를 킁킁대자, 악귀가 남기고 간 역겨운 악취 속에 어딘가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철과 불의 냄새. 


먹물과 도화지의 뻣뻣한 향취와. 


단단하고 묵직한 무인의 냄새.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심상 속에 깊이 새겨진 형제자매들의 흔적에, 슈가 아연한 표정을 짓고. 



“니엔이랑…시…? 총웨 오빠까지…?” 


“그래. 웬일로 우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구나.” 


“...왜…?” 

“모르겠는데. 그이가 뭔가 수를 쓴 거 아닐까?” 



그런 슈를 슥슥 쓰다듬으며, 링은 살풋 웃었다. 


이거야 원, 나도 나지만 그대도 역시 훌륭한 그림을 그려 냈구나.  


손에 쥔 정보도 적고 여러모로 난관이 따랐을 텐데. 


이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이 전장의 일등공신은 내가 아닌 그대라는 걸. 


오히려 그쪽이 훨씬 기쁜데. 


안 되겠다, 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함께 이 승리를 축하하고, 서로의 무용담을 나누며 밤을 지새우고 싶은걸. 



“그럼, 맞이하러 가자.” 


“...잠깐, 언니.” 



그런 마음에 조급하게 왕을 질질 끌고 대황성으로 향하려는 링을, 슈가 붙잡았다. 



“응? 왜 그러니, 슈?” 



의아하게 돌아보자, 슈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그 시선을 조용히 따라간 링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곳에는 여전히 악귀의 기운에 오염되어 스산한 빛을 토해 내는 작물이 있었다. 



“...슈.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오늘 할 만큼 했어. 나머지는 인간들에게 맡기자꾸나.” 


“...아냐, 언니. 이것만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가게 해 줘. 혹시나 유예를 뒀다가 역병이 더 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흠. 


말이야 맞는 말이다.



“안 돼. 넌 쉬어. 차라리 내가 할게. 한데 모아서 불태우면 어떻게든 되겠지.” 



당장 슈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문제지. 


그런 걱정이 담긴 말에, 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난 괜찮아. 언니야말로 이미 할 만큼 했어. 이것만은 양보 못 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배어 있는 결의에, 링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입은 좀 험해도 알맹이는 순한 그녀가 이렇게까지 딱 잘라 말하는 건. 


대황성 수호신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한 농부로서의 사명감일까. 



“...정말, 괜찮겠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지금 그녀의 의지를 무시하는 순간. 


링은 왕이나 다름없는 놈이 되어 버릴 터다. 


때때로 가족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걱정이 아니라 존중과 격려라는 거, 잘 알고는 있지만….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던진 말에, 슈가 씩씩하게 웃었다. 



“괜찮다니까. 금방 끝낼 수 있어.” 


“...진짜로 괜찮은 거지? 너 무리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언니 진짜 미쳐.”  


“응응. 아무렇지도 않아. 언니는 잠시 앉아 있어. 후다닥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한바탕 축하하자. 술상 봐올게.” 



결국 링은 슈가 논으로 뛰어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그녀가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바로 끌고 나올 채비를 하며. 


그렇게 기다린 지 5분 남짓. 



“링!” 



다급한. 


그러나 환희와 애정이 가득 배어나오는 낭랑한 외침에. 


불안하게 살랑거리던 그녀의 꼬리가 빳빳하게 섰다. 


아직까지 남아 가슴 한 구석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초조함이, 그의 목소리에 씻은 듯 사라지고. 


뇌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기립했다. 


뒤이어 어둠 속에서 허둥지둥 뛰어오는 박사의 실루엣을 보며, 링은 환하게 웃었다. 



“그대여, 기다리고 있었어.”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많이 힘들었지?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모든 건 박사가 링의 몸을 힘껏 끌어안은 순간 전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대신, 맞닿은 품 속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 어떤 고전시가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온기가. 



“...그대여.” 


“...링.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고장난 녹음기처럼 다행이라는 말만을 반복해서 되뇌이는 그. 


링은 살며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응. 난 무사해. 여기, 그대의 곁에 있어.” 


“...고마워. 이겨 줘서, 다치지 않아 줘서.” 


“그대야말로…어머.” 



그녀의 손길을 음미하고 싶다는 듯 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뒤이어 드러난 박사의 얼굴에, 링은 저도 모르게 경악하고 말았다. 



“그대여, 얼굴이….” 


“아, 응. 좀 다쳤어.” 



한쪽 눈은 아예 감겨 있었고, 말라붙은 핏자국이 눈두덩에 가득했으며. 


날붙이에 베인 듯한 상처가 얼굴 곳곳에 만연했다. 


무엇보다. 


흡혈귀에게 혈액을 전부 빨리기라도 한 듯, 얼굴이 너무나도 창백하다. 


어딜 봐도 조금 다친 수준의 상처가 아니었다. 



“...미안해.” 



더욱 마음이 쓰이는 건 그의 사과.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죄인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그의 사죄였다. 


마음이 꾹 눌리는 듯한 기분에, 링은 이를 앙다물었다.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니야, 그대여.” 


“아니, 너한테 사과할 일이야.”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로, 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는 박사. 



“나, 정말 열심히 했어.” 


“...응.” 


“근데도 힘이 부족한 건 어쩔 수가 없더라. 내가 다치는 것보다 너한테 걱정 끼치는 게 더 싫었는데.” 


“...내 사랑이, 그대에게 부담이 된 걸까.” 


“부담이 아니야. 원동력이지. 내 자신감의 가장 큰 부분이고. 내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게끔 하는 버팀목이야. 그만큼 소중한 너라서…더 말끔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어. 내가 상처 입은 걸 보여주면 넌 나보다 더 아파할 테니까.” 


“...그대여.” 


“그걸 알면서 다쳐가지고 온 얼간이라 좀 염치는 없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얼마든지. 마음껏 해.” 


“지금은 그냥 위로해줄래?” 



그런 그의 말에, 스스로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린 링은 따뜻하게 박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아, 그대여. 


내가 어떻게 그대를 거부할 수 있겠어. 


어찌 그대의 요청에 퇴짜를 놓고, 아픈 곳을 돌봐달라는 그대의 간구를 매몰차게 뿌리칠 수 있겠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그 과정에서 입은, 틀림없이 명예로울 터인 상처조차 나 보기에 흉할까 숨기려는 그대의 배려를. 


그럼에도 나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조심스레 나아와 위로를 부탁하는 그대의 마음을. 


어떻게 사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응. 고생했어, 그대여.” 


“...링, 나…진짜, 진짜 무서웠어.” 


“알아. 힘냈구나.” 


“너무 춥고 아팠어. 힘들었고.”  


“그걸 견뎌낸 그대가 자랑스러워.” 



물론 감히 그대의 몸에 손을 댄 무뢰한을 찾아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그런 사소한 욕망조차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그대가 자랑스럽고. 


또 눈부신걸. 


그런 분노에 몸을 맡기고 날뛰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그대와의 매 순간이 소중한걸 어떡해.



“아, 진짜. 뭐야, 다 끝났네. 이럴 거면 왜 불렀어, 박사.” 


“...이럴 때는 별고 없이 끝나서 다행이라고 하려무나, 니엔.”  


“엑. 뭐야. 그새를 못 참고 또 애정행각이야? 진짜 너무들 한다.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박사를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 니엔과 총웨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피식 웃으며. 



“...왔구나. 니엔, 총웨 오빠. 그리고…형부.”  



뒤이어 품 안에 곡식 다발을 가득 안아 든 슈가 논에서 올라왔다. 



“슈,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난 됐어. 와 줘서 고마워, 총웨 오빠랑 니엔. 시는 어디 있어?”


“그 아이는 도시에서 악귀 소탕을 돕고 있단다.” 


“...대황성은, 괜찮은 거지?” 


“그래. 박사가 기괴, 아니 기발한 계책을 하나 짜내서 말이야. 좀 소란스럽긴 했지만, 잘 정리될 거야.”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친 니엔은 이내 진중한 눈빛으로 슈를 바라보았다. 



“슈 언니, 진짜로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지? 두 번 안 물어볼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 


“...응, 난 괜찮아.” 


“흐-응. ‘괜찮다’...뭐, 됐어.” 



석연찮다는 듯 콧방귀를 뀐 니엔이 아직까지 링의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박사를 툭 쳤다. 



“야, 형부. 힘든 건 이해하는데, 꽁냥꽁냥은 집에 가서 해도 되잖아. 지금은 일단 사후처리부터 확실하게 하자고.” 


“...그렇지. 고맙다, 니엔.” 



그런 그녀의 한 마디에, 박사가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길이 널브러진 왕, 슈의 품에 안겨 있는 오염된 곡식, 그리고 주변을 한 번 쭉 흝고. 



“일단 다 같이 이동해서 성 내부의 데몬을 처리하자. 데몬에 오염된 곡식은…솔직히 지금 우리 힘으로 전부 정리하기는 무리니까, 일단 대황성 관청에 보고하는 게 맞을 것 같아. 다들 피곤하겠지만…조금만 더 힘내자.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응, 그대여.” 


“오케이.” 


“알겠네.” 

  


대충 업무 지시를 끝낸 박사는 천천히 슈에게 다가갔다. 


어째서일까. 


니엔과는 제법 활발한 표정으로 대화하더니, 이제 와서 박사의 시선을 죄스럽게 피하는 그녀.  


박사는 조심스레 그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처제야.” 


“...형부. 미안해. 내가 형부를 끌어들여서….” 


“응?” 



그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말하지 않았던 슈의 죄책감에, 박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이내 나머지 두 사람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링을 곁눈질했다. 



“링, 아무 말도 안 했어?” 


“얘기는 했는데, 알잖아. 이런 종류의 죄책감은 당사자가 직접 말 안 해주면 해소 안 되는 거.”  

 

“아하.” 


 

그 짧은 대화로 무언가를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피식 웃은 박사는 이내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됐어. 나도 좋아서 한 거야, 좋아서.” 


“...으.” 


“그러니까 자책 안 해도 돼. 너도 그랬잖아. 나나 링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달라고. 나도 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길래 했을 뿐인데, 시무룩해할 필요가 어디 있어.” 


“...형부….” 


“난 네가 무사하면 그걸로 충분해.” 



한없이 밝게 미소짓는 박사. 


원망이나 생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그 따뜻한 미소에, 슈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생면부지임에도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그를 가족이라 칭했던 자신의 고집이 부담스러울 만도 했을 텐데.


오히려 자신을 진심으로 가족이라 여겨 주는 그의 마음씨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사과가 쏙 들어가고, 대신 감사의 말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사랑해, 형부.” 


“...?” 


“결혼하자. 난 첩이라도 좋아. 아니, 오히려 그 쪽이 더 좋아.” 


“??”  


“아냐, 그냥 난 가정부 할게. 형부 아들도 대신 키워주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텃밭도 가꾸고. 그러다가 언니랑 형부가 권태기 올 때쯤 되면 은근슬쩍-” 


“???”



어라, 분명히 감사하려고 했는데. 


뭐지, 혀 씹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슈에게, 폭발적인 반응이 날아들었다.  



“...어머, 호호. 저 아이가 어제부터 왜 저럴까.” 



순식간에 표정이 싸늘하게 식은 링이 입으로만 웃는 시늉을 하고. 



“링, 아니야! 이건 진짜 오해야! 나 아무것도 안 했어! 슈, 농담이지?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줘.”  



공포에 질린 박사가 링과 슈를 번갈아 돌아보며 횡설수설하며. 



“푸하하하하하! 이야, 진짜 박사 너 무슨 걸어다니는 플러팅 머신이냐? 의식적으로 꼬시려고 해도 힘든 사람들을 줄줄이 자빠트리네. 이쯤되면 무슨 페로몬 분비하는 거 아닌지 검사해봐야 하는 거 아냐?” 



니엔이 배를 잡고 폭소했고. 



“슈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처가 있는 남자를 건드리는 건 안 된다고 이 오라비가 옛날부터 누누이 말했거늘!” 



대경실색한 총웨가 슈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려 하며. 



“왜, 딱 좋잖아! 결혼은 언니랑, 불륜은 나랑!” 



그리고 아예 막나가기로 한 건지 박사를 꽉 끌어안고 떼를 쓰는 슈까지. 


어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에,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화롭게 끝났구나.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적어도 슈와 대황성은 또 내일을 맞을 수 있겠지. 


그 사실만 해도 다행이다. 


그 마음을 링과 공유하려 조심스레 입을 여는 박사였지만....



"...저기, 링."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안 된다면 안 돼." 



이번에는 링이 잔뜩 뾰로통해져서 말이 안 통했다. 


심술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그녀를 보며, 박사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얘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저러는 걸까. 



"그게 아니라." 


"끈질겨, 그대여. 불륜도 안 되고, 첩도 안 돼. 나만 봐." 


"...?" 



아니, 평화로워진 건 진짜 좋긴 한데요. 


링이랑 다시 만날 수 있고, 슈도 무사해서 너무너무 행복하긴 한데 말이야. 


왜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자꾸 불륜 계획범이 되는 건데? 



쉐이 합체까지, D-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