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오퍼들이 개소리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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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주말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들이치는 사무실에서, 실로 경쾌하게 울려퍼진 그 소리는 사람이 사람의 머리를 후려치는 소리였다.
"미친 새끼야, 내가 복숭아를 사오랬지 저딴 벽돌을 사오랬냐?"
"아, 사와도 지랄이야! 잠깐, 아, 아아악! 브라더, 거긴 다시 안 자란다고!"
"아니까 뽑는 거다 개자식아!"
익숙한 이들의 익숙한 목소리가 온 방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그 사이에 낀 남자는 한숨을 삼키며 가만히 서류만 넘겼다. 처음 몇 번에야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안다. 저 수렁에 발을 들이밀어 봐야 저도 함께 가라앉을 뿐이라는 것을.
"하여간 딱딱한 복숭아를 복숭아랍시고 먹는 놈들은 죄다 갑판 밑으로 떨궈버려야 해."
"웃기고 있네. 물복이야말로 갈아서 샌드비스트 사료로나 던져줘야지, 왜 애꿎은 내 딱복에 시비야?"
하지만 지들이 휴일이랍시고 주말에까지 일을 해야 하는 친구의 앞에서 저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로서도 한 마디 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싸우는 게 걱정되어서라기보다는, 쓸데없이 언성을 높이니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되어서.
"둘 다 시끄러워요..."
"저게 돌이지 과일이냐? 입맛도 별 그지같아서,"
"그럼 물복은 과일이냐? 그딴 토사물같은 식감이 과일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피곤에 절은 목소리는 건장한 남자 둘의 귓가에 닿지 못했고, 그래서 루멘은 답지 않게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둘 다 시끄럽다고요!"
삑사리가 난 탓에 '꽥'이 아니라 '빽'이었다는 점이 참으로 루멘다웠으나, 말의 내용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자기들은 오늘 쉰다고 제 앞에서 유세 떠는 거예요? 이따위로 떠들 거면 복도로 나가요!"
그리고 쏜즈와 엘리시움은, 답지 않게 저주를 퍼붓는 에기르를 잠시 멀거니 쳐다보다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요즘 재판소는 신입한테 욕도 안 가르치나 보네."
얄밉게 떠드는 입은 루멘이 던진 서류 뭉치에 얻어맞고서야 간신히 닫힌다. 굳이 한 마디를 더 얹어 매를 버는 친우의 꼴을, 쏜즈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너는 뭐 다르다고 잘난 체야.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눌러담는다. 루멘은 정말로, 그 말을 꺼내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얄밉게 빙글대는 성게에게 추가적인 폭언을 얹는 대신, 한숨이나 한 번 푹 쉬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 맞은편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쏜즈와, 바닥에 풀썩 쓰러져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킨 엘리시움. 루멘의 사무실에서는 매 주말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작전이 끊이질 않으니 의료부는 언제나 바빴고, 최고 등급의 오퍼레이터 중 누군가는 그 많은 잔업을 주말에도 감독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거의 언제나 루멘의 몫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두 명은 작전에 끌려다니느라 본함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한 명은 혼자 걷지도 못하는 환자였으며, 한 명은 그 환자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그럼 닥터 켈시는?"
"그분은 이미 매일 야근 중이셔."
"아, 저런."
인력 확충 좀 해라. 엘리시움이 드물게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대답 뿐이다. 두 분이 싸우지만 않으셨어도 이미 퇴근했어요. 그리고 그 대답에 눈치를 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과자를 까 먹기 바쁜 쏜즈까지,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래서 퇴근이 간절했던 조르디 역시, 언제나와 같이 최후의 수단을 꺼내고야 만다.
"한 번만 더 그러면 히터 끌 겁니다."
그 한 마디에 거짓말처럼 내려앉는 침묵. 순식간에 고요해진 방이 더없이 만족스럽다. 그린 캠페인이니 뭐니를 들먹이며 온 로도스가 전기비 절감에 들어간 요즘, 저 두 망나니를 제 사무실에 들러붙게 한 원인이 바로 30도까지 제한 없이 올라가는 의료부의 히터였다. 그러니 그들을 닥치게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협박도 이것일 수밖에. 루멘이 서슬 퍼렇게 고함을 지를 때는 귓등으로 흘리더니, 고작 이 한 마디에 저렇게나 조용해지는 꼴을 보라...
...이제라도 일을 할 만한 환경이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패배한 기분이다. 루멘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랍 아래에서 귀마개를 찾아내었다. 어차피 잠깐 조용할 뿐이지 오래 갈 리가 없으니 미리 귀를 틀어막아 두려는 것이다. 푹신한 스펀지가 그와 두 망나니 사이를 그럭저럭 차단해 주었다. 루멘은 졸린 눈을 비비며 근무를 이어갔고, 방 안에는 한동안 아름다운 침묵이 지속되었다.
"아, 근데, 딱복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래서 루멘은, 어쩌면 잠시 잊고 말았다.
"딱젖이 무슨 뜻이야, 브라더?"
로도스 최고의 미남이 가진 저 수려한 머리통이, 심심할 때면 어디까지 돌아버릴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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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새끼들..."
황망한 속삭임이 텅 빈 복도에 메아리치며 뻗어갔다. 하지만 제가 뱉은 욕설이 의료부의 끝에서 끝까지 퍼져나가든 말든, 여자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야 제가 방금 살짝 열어젖힌 문 안에서, 그녀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괴상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젖, 딱젖...? 그게 뭐지? 딱딱한 젖인가? 딱복 물복 하듯이."
"몰라, 나도 박사한테 들은 말이라... 그럼 물렁한 젖은 물젖이 되는 거야?"
"물렁... 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좀 이상한데. 보통 젖은 말랑하다고 하지 않나?"
"젖 젖 거리는 건 너무 천박하니 가슴이라고 하자, 브라더."
"동의한다."
지랄한다 진짜... 아이린은 순수한 감탄을 중얼거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저놈들은 히비스커스의 요리라도 예쁘게 플레이팅하면 마터호른의 정찬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대화의 주제가 이미 천박한데 표현을 바꾼다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음, 하지만 우리는 딱젖과 말젖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젖이라는 단어를 피할 길이 없기도 해."
"말젖은 또 뭐야?"
"말랑한 젖, 아니 가슴. 네가 방금 물렁이 아니라 말랑이라며? 그럼 물젖이 아니라 말젖이겠지."
"그것도 박사가 한 말인가?"
"아니, 물젖이나 말젖은 나도 못 들어봤기는 한데, 있을 법하지 않아?"
"...'말' 뒤에 젖이 아니라 다른 말이 붙는 건 들어본 적 있어. 마침 어감도, 크다는 의미도 비슷하군."
"무슨 단어 말하는지 알 것 같긴 한데, 그 단어의 '말'은 말랑의 '말'이 아니잖아."
오 씨발 신이시여. 이베리아의 전달자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연신 귀를 닦아냈다. 그녀는 순간 저 행태를 불쌍한 위디에게도 낱낱이 까발려 주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무심코 휙 돌아본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오퍼레이터들은 등급에 따라 사용하는 층부터가 달랐고, 오늘 출근한 의료부 6성급은 루멘과 켈시뿐이니까. 그중 켈시는 박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온 참이다. 그러니 그녀가 지금 서 있는 복도는 눈앞의 이 방을 제외하면 완벽히 비어 있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저 두 망나니의 개짓거리를 다른 이들마저 듣게 될 일은 없다는 것이고, 동시에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난데없이 오물을 귀에 뒤집어 쓰게 된 리베리를 구해줄 이도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너도 말젖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이거지?"
"뭐 그렇지. 내가 그냥 생각해본 단어고, 사실 딱젖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꼭 그 반의어가 있을 필요는 없지."
"딱복과 물복의 사례를 보면 짝을 지어 존재해야 하는 단어가 아닌가?"
"하지만 가슴은 말랑한 게 기본이잖아. 돈가스를 그냥 돈가스와 치즈 돈가스로 구분하는 이유가 뭐겠어? 라면을 그냥 라면과 치즈라면 떡라면 등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디폴트에는 수식어가 붙지 않아."
"네가 말한 것치고는 놀랍게도 일리 있는 주장이군."
"그렇지?"
그나마 그녀의 남자친구, 이베리아 재판소의 번듯한 서기관인 조르디 폰타나로사가 저 오물밭에 함께 뒹굴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었으나,
"하지만 남자 가슴은 딱딱한 게 기본이지 않나? 그럼 말젖도 있어야지."
"그게 무슨... 브라더, 일단 남자 가슴은 젖이라고 부르지 않아. 그리고 남자 가슴도 디폴트는 말랑일 걸?"
"뭐?"
"생각을 해봐, 매일 단련하는 우리 가슴이 디폴트겠냐, 매일 앉아서 서류나 보는 쟤 가슴이 디폴트겠냐? 어느 가슴이 더 자연 상태에 가깝겠어?"
"그야 당연히 조르디지."
"그렇지. 그리고 쟤 가슴은 말랑해. 그러니 가슴의 기본형은 말랑이 맞아."
그 위안이 산산조각 나는 것 역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브라더? 그야 당연히ㅡ"
"하지만 일리 있군. 남자의 경우까지 포함해서 생각해도 가슴은 기본적으로 말랑한 게 맞아."
아이린은 슬며시 문고리를 쥐었다. 저 천박한 입에서 한 번만 더 제 연인의 이름이 나온다면 곧장 뛰어들어가리라고 생각하면서.
문 밖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도스의 두 얼간이는 그야말로 얼간이 같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여자의 경우에도 평소에는 말랑하지만 힘을 주면 단단해지면, 그것도 딱젖이라는 거지?"
"뭐 그렇지? 근데 여자 가슴도 힘 좀 준다고 단단해질 수가 있나?"
"일단 와이번이면 가능해... 그리고 아마 그 재판관도 가능할 걸. 훈련실에서 봤는데 나보다 더,"
"브라더, 걔는 이제 재판관이 아니라 전달자라니까, 몇 번을 말해?"
"재판관...?"
아이린 씨요? 수준 낮은 대화 사이로 이런 데에 쓰이기에는 아까운 심약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퍼억. 날 것 그대로의 소리가 다시 한 번 방 안에 울려퍼졌다.
"어, 아냐,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일해, 조르디."
하지만 이번에 주먹을 휘두른 건 쏜즈가 아니라 엘리시움이다. 훤칠한 리베리의 짜증 섞인 시선이 에기르의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따갑게 내리꽂혔다. 저 메딕이 어느 전달자의 이름 석 자에만큼은 귀신같이 반응하는 걸 빤히 알면서 아이린을 들먹이다니. 그는 난방기의 주인 앞에서 경망되게 입을 놀린 눈치 없는 동료를 거칠게 후려친 뒤, 조르디에게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제 친구의 사무실에서 이따위 대화를 나누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몰래몰래 할 정도의 양심은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귀마개와 몰아치는 업무 덕에 그 앞의 대화 따위 듣지 못했던 루멘은, 그 미소에서 익숙한 꺼림칙함을 짚어내지 못했다. 머리를 얻어맞아 끙끙 앓고 있는 에기르와, 식은땀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리베리. 그 꼴을 보고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은, 반은 수면 부족 탓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탓, 나머지 반은 그냥 천성적으로 사람이 순진한 탓이다. 그래서 그는 제게 호쾌한 미소를 보이는 뱅가드 오퍼레이터를 향해 잠자코 마주 웃어주었다.
잠시 쉴 틈이 난 것인지, 귀마개를 빼낸 루멘은 의자에 앉은 채로 기지개를 한 번 펴고서, 다시 책상에 풀썩 쓰러지며 엘리시움에게 물었다.
"아이린 씨 얘기하신 거 아니셨어요? 얼핏 들린 것 같아서요."
"아, 어, 별 거 아니고, 뭐 그냥..."
굳이 설명하자면 쏜즈가 '재판관의 대흉근이 굉장하다' 정도의 발언을 하려던 것을 엘리시움이 막았을 뿐인 상황. 그러니 따지고 보면 아이린에게 잘못한 것은 없지만,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느냐고 물으면 그 앞의 것도 말해야 할 테고, 그걸 말하게 되면...
엘리시움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 쏜즈가 끼어들어 대신 답을 해주었다.
"훈련 이야기 하고 있었다. 네 재판관이랑 훈련 시간이 자주 겹쳐서."
"아, 그렇죠. 훈련실에서 자주 만나시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게 있는데, 조르디. 여자도 힘을 주면 가슴이 단단해질 수 있나?"
"네?"
웬일로 자연스레 말을 돌린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본론을 꺼내버리는 쏜즈를, 엘리시움이 황급히 밀쳐내었다. 메딕의 호박색 눈에 경멸이 서리려 하는 순간 그가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근육 말이야, 근육! 얘 그런 데에 관심 많은 거 알잖아?"
사실은 관심 따위 쥐뿔도 없지만, 때로는 진실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다. 엘리시움의 말에 맞추어 쏜즈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단을 맞추어 쌍으로 시치미를 떼는 꼴이 제법 뻔뻔스럽다. 어차피 눈앞의 위인이 '저 히키코모리 연구자 놈이 언제부터 근육 따위를 중시했단 말이냐'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일단 잡아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변명이 통한 것인지, 루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라면 궁금하실 수 있죠, 하고. 탐색과 연구에 미쳐 있는 종족, 에기르의 머리는 지적 호기심의 범주를 꽤나 관대하게 잡아주고는 한다.
"음... 사실 의료부이긴 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여자가 되어본 것도 아니고, 종족마다 편차가 있을 수도 있어서요. 사리아 씨나 백파이프 씨는 당연히 가능하실 테고."
그리고 동시에, 이딴 주제에 관해서라도 과학도의 시선으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와이번이야 그렇겠지? 그건 우리도 생각해 봤어."
"그럼 리베리나 에기르는? 너 담당 종족이 그거라며. 그쪽은 좀 알지 않아?"
"에기르 여자...는 제가 로도스에 와서야 처음 만나봐서요. 그래도 헌터분들은 신체 강도 상 와이번의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니다, 그분들은 적어도 주사는 들어가니까 좀 다르신가..."
"잠깐, 뭐? 그럼 와이번은 주사기가 안 들어간단 말이야?"
"아, 네. 긴장이라도 하시면 저나 리즈 씨 힘으로는 안 들어가요. 그래서 닥터 켈시가 직접 치료하시죠."
리베리와 에기르의 기질 차이는 이야기를 듣는 두 청년의 반응에서도 드러났다. 엘리시움은 라인랩의 전 주임을 떠올리며 역시 까불지 말아야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고, 쏜즈는 이 흥미로운 사실을 의료부만 알고 있었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리베리는? 그란 파로에 너 말고 전부 리베리였잖아. 뭐 보거나 들은 거 없어?"
"어... 그 정도 근육이 있는 여자분이시면 적어도 징벌군 이상인데, 그 시절에 그런 분이랑 만날 일이 있으면 안 되죠 아무래도..."
"뭐하러 그란 파로 시절을 떠올려? 네가 잘 아는 징벌군 이상의 리베리 여자면 로도스에 있잖아."
"네? 아아, 아이린 씨 말씀하시는 거죠? 으음..."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그 이름.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할 것 같지만 엘리시움이나 쏜즈가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던 예시. 그의 조그마한 전달자가 언급되자 루멘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시움은, 역시 제 여자친구가 이런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별로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음... 그분은 딱히 힘을 안 주셔도 단단하셔서 적당한 예시로 보기가..."
그의 예상과 달리 루멘은 눈을 찌푸리며 덤덤한 사실만을 전해 주었다. 엘리시움이야 몰랐겠으나 에기르의 사고방식이란 다른 종족의 것과는 심히 달라서, 자신을 포함한 주위의 그 누구든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는 한다. 과학의 상상이 뻗어나가는 데에 여자친구니 뭐니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루멘답지 않은 그 놀라운 비인간성에 엘리시움은 입을 쩍 벌렸고, 이어서,
타앙ㅡ!!!
하고, 귀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세 남자는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고리가 흉하게 뜯겨나간 육중한 철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형태로 일그러진 무게가 끼기긱, 오싹한 소리를 내며 점차 기울어졌다. 그리고 한 차례 더 콰직, 하고, 쇠로 된 물건에서는 나기 어려운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문 뒤에 서 있던 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앞의 장애물을 걷어찬 것이다.
이미 넝마가 되어 있던 문짝은 경칩마저 잃고 무너져 내렸다. 평소에 열리던 방향과 수직을 이루며 떨어지는 철판을 세 쌍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잊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이 말하는 '루멘이 익히 아는 징벌군 이상의 리베리'는 한참 전부터 이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기르가 아니기에 이따위 대화를 참아 줄 그릇이 못 되었다.
그 이후의 장면이야 말해 무엇하리. 아직 연기가 꺼지지 않은 재판관의 총구는 세 멍청이 중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이를 향했고, 두 번째 총성이 울리기 전 쏜즈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탈출했으며, 엘리시움은 루멘을 방패삼아 제 앞으로 떠밀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에기르는 선물처럼 나타난 연인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섰고, 그 당당한 꼴에 어이를 잃은 아이린은 저를 끌어안으려는 조르디의 멱살을 잡아 붙들어 세웠다.
하지만 워낙에 자주 잡혀봤던 멱살인지라 조르디는 도통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베리아의 전달자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메딕을 문자 그대로 질질 끌며 문 밖으로 사라졌다.
한 차례의 폭풍이 들이닥치고 엉망이 된 사무실 안. 홀로 남은 엘리시움은 쏜즈가 급히 여느라 반쯤 부서진 창문과, 쓰러진 문짝이 날려보내어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서류들과,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답장을 재촉하는 업무용 노트북과, 아직도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28도의 히터를 차례로 눈에 담았다.
아무래도 이 난장판의 뒷정리는 그의 몫이 될 예정인가보다. 엘리시움은 3분 가량을 가만히 굳어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 가장 급해 보이는 것부터 해결하기 시작했다.
[루멘] 엘리시움이에요! 오퍼레이터 루멘은 건강 상의 이유로 오후 근무가 어려울 것 같아욤.
[위스퍼레인] ?
[실론] ?
"메신저 답변은 됐고... 오전 근무는 했으니까 조퇴라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저 창문은... 오, 찾았다! 의료부에도 청테이프는 있구나!"
뭐, 언제나처럼, 루멘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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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이린에게 끌려간 한 메딕은, 아기자기한 이불이 굴러다니는 침대 위에서, 눈앞에 들이밀어진 번들거리는 총구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아, 아이린 씨, 저 에기르라 이 총에 트라우마 있,"
"알아."
"아이린 씨, 제발..."
서늘한 금속이 미간 사이에 부딪혔다. 물론 정말 쏘지야 않겠지만, 그녀가 이만큼이나 화가 난 상황 자체가 총보다 더 위험했다. 슬슬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에기르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파악이 된 참이다. 납작 엎드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 처지라, 남자는 연신 리베리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이것만 놓고 얘기해요, 네?"
은근슬쩍 올라간 손이 슬며시 아이린의 손목에 닿았다. 조심히 잡은 채 천천히 떼어내자 의외로 순순히 물러간다. 아래로 내려가는 총기 너머로 잔뜩 찌푸린 회색빛 눈이 보인다. 루멘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동시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목에 칼날처럼 다가온다.
"공적인 장소에서 그런 천박한 대화를 나누어 재판소의 품위를 떨어뜨린 것이 첫 번째."
"네..."
"그따위 대화 속에서 감히 나를 입에 올린 게 두 번째."
"...각하 문제가 첫 번째로 와야 하지 않아요?"
"닥쳐. 내 첫 번째는 언제나 재판소야."
그 말에 조르디는 그녀를 향해 눈동자만 슬쩍 굴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이린 씨가 첫 번째인 걸로 해요, 잘못했어요..."
이 와중에도 재판소가 아니라 여자친구가 우선이랜다. 풀이 죽어 주저앉는 어깨 위로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동그란 머리통 위로 한 차례의 주먹질이 내려왔다. 아까도 말을 그렇게 예쁘게 해보지 그랬냐는 타박과 함께.
그래도 그 바보같은 말에 어느 정도 화가 풀린 것은 사실이라서, 아이린은 총을 협탁 위로 치워 두고서,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놈이 내 가슴이 어떻다고 입을 놀렸단 말이지..."
화를 참듯이 이를 가는, 빠득, 하는 소리가 한 차례.
"내 신체 어딘가에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물론 들어주지야 않았겠지만."
"네? 불만이요?"
"네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내가 내 입으로 반복해 줘야겠어?"
"아, 아뇨, 그게..."
분명 잿빛이어야 할 눈동자가 새하얀 살기로 타오르는 것을 보고, 순간 아찔해진 루멘은 저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내뱉고 말았다.
"그, 그런 거 상관 없잖아요! 작아서 싫다고 생각했겠냐구요, 제가!"
"......"
"오, 오히려, 좋은 점도, 이, 있으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바들바들 떨면서 살길을 찾으려 드는 꼴을, 아이린은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빙빙 돌아가는 금빛 홍채는 이미 초점을 잃었다. 전달자는 가련하게 떨고 있는 남자친구의 턱을 짚고서, 손끝으로 들어올려 저를 바라보게 한다. 시선이 마주치자 화악 뺨을 붉히는 구피를 향해, 리베리는 차갑게 물었다.
"좋은 점?"
"아이린..."
"좋은 점이 뭐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 눈빛으로 전해지는 말에 조르디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입술을 꾹 깨물고서 소녀의 눈치를 살피는 남자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이 그를 노려보는 여자.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싸늘하게 가라앉기만 한다.
짧은 침묵 후,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붉어진 에기르다.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팔을 뻗어 등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그에게로 끌어당긴다. 무얼 하려나 싶어 아이린도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다가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 안겨든 몸이 루멘의 것과 꾹 닿아 맞물렸다. 완전히 포개어진 몸을 그가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옷 너머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고, 가슴께에서는 서로의 심장소리가 쿵 쿵 울린다. 아이린의 어깨 위로 조르디의 머리가 내려앉자 목부터 가슴, 배까지 모든 곳이 그와 맞닿고 만다. 당황한 여자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의 아래에 깔린 커다란 체온이 속삭였다.
"그, 이렇게, 꽉 끌어안을 수 있잖아요..."
그 말만 남기고서 여자의 어깨 위로 얼굴을 푹 파묻어버린다. 귓가며 목덜미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아이린 역시,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오르고 만다.
"너, 너...!"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기나 하자. 분명 그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조르디의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만다. 부끄러워할 때만 쓸데없이 강해지는 힘 탓에, 그의 손이 얹힌 허리는 루멘의 위로 지그시 눌리고 있었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의 굴곡이 니트 너머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제 몸뚱아리를 그에게 문지르는 꼴이 될 것 같아 아이린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남자친구는 제 연인과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신사적인, 혹은 소박한 사내였고, 긴장한 손으로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고만 있었을 뿐, 아이린이 걱정했던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다.
잠시 얼어있던 리베리는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제 위로 실리는 무게에 루멘의 긴장도 약간은 덜어진다. 아까보다는 화가 풀린 모습인지라, 그는 용기를 내어 아이린의 머리카락을 약하게 빗어주었다. 거부하지 않고 제 머리를 내어준 리베리가 약하게 깃털을 떨었다.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말은 잘해..."
마찬가지로 루멘의 어깨 너머로 빼꼼 숙여진 고개라, 그로서는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부끄러워하는 목소리, 편안하게 늘어뜨린 다리같은 것들로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셨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한숨 돌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가슴이 단단하다는 말이 이 정도로 화가 날 말이었나 싶지만,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그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만큼이나 화가 났던 것치고는 잘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평화롭게 여자친구의 등이나 토닥여 주려는데,
"그거 말고 다른 점은 없어?"
"네?"
"좋은 점이 그것밖에 없으면 나랑 왜 만나..."
이어진 청천벽력같은 말에, 그의 손은 허공에서 뚝 멈추고 만다.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건데요,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만약 그 말이 세상에 나오고 말았다면 그 대가로 그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라고, 루멘은 생각했다.
사실 아이린은 그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가 급격히 제정신을 되찾은 사람 특유의 짧은 우울감을 겪고 있을 뿐이었다. 적당히 달래주기만 하면 금방 풀려버릴 별 거 없는 상태. 하지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던 조르디가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아이린이 정확히 몇 분 전에 그러했듯이, 이번에는 루멘의 머릿속이 하얗게 새어버린다. 안 그래도 과부하가 걸려 있던 머리는 조그마한 리베리가 가볍게 남긴 말을, 마지막 유언을 남겨보라는 사형선고 정도로 해석해내었다.
답이 늦어지자 아이린은 불쑥 몸을 일으켜 그를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의 서기관이 걱정되어서였다. 그리고 루멘은 그것을 독촉으로 받아들였다. 선고와 독촉. 루멘에게 있어 그 두 가지가 결합해 만들어내는 의미는 상상 이상이었다.
흐리멍텅하게 변한 채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 호박색 눈을 알아차리고, 아이린이 괜찮냐고 물으려는 찰나,
"읏, 그, 그러니까, 방심해서 안에 아무것도 안 입으실 때도 많으니까 살짝씩 보인다든가, 작다고 놀릴 때마다 수치스러워하는 표정이 보기 좋다든가, 무릎 위에 앉혀서 흔들 때 걸리적거리는 게 없다는 점이...?"
초점 잃은 눈이 조곤조곤 뱉어내는 말들이 둘뿐인 방안에 또렷이 울렸고,
"그런 점이 조, 좋아, 좋습니다, 각하..."
제가 한 말인데도 그 내용이 주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는 것을 보며, 재판관의 머리는 순간 멈춰버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시선은 그들이 누워 있는 침대의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을 향했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그녀가 방금 막 내려놓았던 핸드캐넌과, 이 방의 불을 끌 수 있는 스위치. 잊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 남자는 그녀를 제 위에 앉혀놓고, 제 몸에 바짝 붙도록 끌어안은 채로 저 모든 말들을 했다. 저 변태같은 발상을 박살내야 한다는 이성과, 순진한 얼굴이 뱉은 노골적인 말이 충동질한 욕망이 함께 손끝을 내달린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재판관은 하나의 결론을 내린 채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선택으로 방 안에 울린 것이 총소리인지 다른 소리인지는, 여백이 부족하여 적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