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쓴 것들은 안 올리려 했는데 올려달라는 댓 있어서 올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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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간 1월 1일 00시. 창밖으로 불꽃놀이의 빛이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여러 사람들의 환호성이 내 귀를 혹사시키기 시작한 건 덤이다. 신나고 밝은 바깥쪽이랑 달리 책상 위 스탠드만 켜져 있는 우중충한 내 방을 보니 더욱더 박탈감이 느껴졌다.


“왜 나만 일이야...”


휴일은 본디 이번 달 초까지 가야하거늘. 딱 새해 전날에 긴급한 임무가 들어와서 서류 결재라니. 운이 지지리도 없지. 물론 다른 상층부도 일했다마는, 결과적으로 그 업무의 최종 확인을 하는 건 나니까 결과적으로 업무량이 제일 많은 건 나인 셈이다. 

실제로 현재 다들 퇴근하고 잔업하고 있는 건 나 한 명. 방금 전에 본인 일 끝났다고 날 내버려두고 도망쳐버린 비서 오퍼레이터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고 보자. 반드시 나중에 기회를 봐서 감봉으로 혼내주마. 


각종 불평을 속으로 삭이면서 일을 하자니 집중이 1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밤을 새는 건 확정이니 잠시라도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들고 있는 서류를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피면서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판 위에서 새해 기념 파티를 하며 하하호호 웃고 있는 대원들이 보였다. 당장 내려가서 참가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켈시에게 철권제재를 받게 되겠지? 


“냉장고에 맥주가 남았던가...”


이 빌어먹게 행복한 상황 때문인지 오늘따라 더욱 술이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옮겼다. 기대감을 품고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인가? 안에는 마치 직장인의 월말 지갑상태를 묘사라도 하려는 것처럼 완전한 공백을 과시했다. 새해부터 되먹는 게 없어서인지 더욱더 기분이 안 좋아진다. 잃어버린 기억이고 나발이고 그냥 확 이 망할 제약 회사 퇴사해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설마 추가 결재 서류가 들어온 건가 싶은 공포감이 2초 정도 내 몸을 지배했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걸 뒤늦게 깨닫고 나서야 될대로 되라고 속으로 체념하며 자동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바쁜가 보네 박사~”


이윽고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복도의 비상등을 뒤로 하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군데군데 검은색 브릿지가 들어간 은발의 트윈테일. 그 위에 앙증맞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둥근 동물 귀. 호박을 연상시키는 붉은 빛이 도는 금색 눈동자. 두꺼운 점퍼 안의 얇은 검은색 치파오. 전직 유명 배우이자, 현재 로도스의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염국 출신 우르수스인, 에프이터였다.


“에프이터...? 이 시간에 뭔 일이야?”  

“놀러 왔지.”


에프이터는 한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나에게 툭하고 던진 뒤 곧바로 소파에 뛰어들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면서 편하게 누운 채로 주변을 뒤적이더니 용케도 리모컨을 찾아 TV의 전원을 틀었다. 마치 자기 방에 들어온 것 같이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여기가 내 사무실인 걸 깜빡하고 잊을 뻔했다. 


“너무 편하게 있는 거 아냐?”

“여기 소파가 정말 편하단 말이야~”


확실히 숙면을 보장할 정도로 푹신하고 기분 좋은 고급 소파이다마는... 큼. 하마타면 논점을 흐릴 뻔했군. 이 우르수스 여성의 마이페이스엔 은근히 잘 휘말려든단 말이지. 


“저기, 에프이터... 그래서 내 방엔 대체 왜...?”

“말했잖아~ 놀러 왔다고.”

“나 지금 바쁜데...”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더미를 보고, 에프이터는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다만 그렇다고 나갈 생각은 없는 것인지,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나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그렇지 말고~ 모처럼 박사 거도 같이 사왔단 말이야.”


내 거라는 말에 무엇인가 해서 에프이터가 준 비닐봉지의 안을 들여 보았다. 염국의 유명 브랜드산 캔맥주 열 캔 정도. 거기에 추가로 안주로 곁들여 먹으려는 건지 포장된 견과류나 육포 등이 같이 있는 것이 보였다. 


“바깥이 낫지 않아?”


확실히 에프이터가 술자리를 좋아하는 건 요 1년 간 계속 함께하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은, 그녀라면 혼자보단 여럿이서 호탕하게 마시는 게 더 취향에 맞을 것이다. 굳이 칙칙한 이 방에서, 그것도 폐인같이 일하고 있는 아저씨랑 같이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박사랑 같이 있는 게 더 재밌는걸.”


혹시 내가 불쌍하다고 느껴서 굳이 파티를 마다하고 온 건가 싶어,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뭔가 말하려 하던 찰나, 에프이터의 짧은 한 마디가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녀가 던진 말에 동요해서 약간 멋대로 움직이려 하는 내 입술이 얄미워졌다. 


“음침해 보이는 아저씨랑 있는 게 뭐가 재밌길래?”


약간 심술궂은 내 질문에 에프이터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더니, 평소와도 같은... 아니,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


얼떨결에 마주친 눈앞의 여성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도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걸 보자하니 입술이 바짝 말라감과 동시에 무심코 등에 힘이 들어갔다. 벌써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건만, 그녀의 눈을 보아하니 그 일이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박사, 얼굴이 빨간 걸?”

“말 안 해줘도 알아.”


머리를 긁적이면서 마지못해 소파에 앉자, 에프이터는 기다렸다는 듯 봉지로 손을 뻗어 캔맥주를 꺼냈다. 탄산이 공기랑 만나는 경쾌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매우 빠른 속도로 맥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방 안에서 TV 보면서 마시는 맥주만큼 맛있는 게 없다니까~”

“뭔가 감상이 아저씨 같다?”

“뭐 어때. 좋으면 된거지.”


다른 여성 오퍼레이터한테 말했다간 한 소리 들을 거 같은 발언에도 에프이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쿨하게 넘어갔다.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은 이런 점이 그녀가 가진 매력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지.

캔맥주를 하나 꺼내서 그녀를 따라 한 모금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냉장고에 넣어둔건지, 차갑고 경쾌한 풍미가 내 혀 위에서 맴돌다가 깔끔하게 목 너머로 사라져갔다. 


“오. 새해 특선 영화를 하나 보네?”


별말 없이 맥주만 마시면서 수시로 화면이 바뀌는 TV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몇 분쯤 지났을까. 채널을 돌리다가 그녀의 이목을 끌만한 게 나왔는지, 에프이터는 리모컨을 조작하는 것을 그만두고 시청을 시작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염국에서 유명했던 영화들을 새해 내내 방송하는 특별 프로그램. 

다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 옆에 있는 여성이랑 똑같이 생긴 우르수스인이 화면 안에서 화려하게 무술을 펼치고 있는 장면이 타이밍 좋게 스크린에 비춰져 있었다.


“이야~ 저 때의 난 아직 움직임이 미숙했단 말이지. 좀 더 각도를 틀었으면 좋았을 텐데.”


전직 유명 배우 에프이터에겐, 광석병에 걸리면서 영화계를 은퇴하고 로도스에 입사하게 된 꽤나 씁쓸한 사연이 존재한다. 본인은 이젠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진 않은 것 같지만, 예전에 그녀가 허심탄회하게 말해준 걸 전부 들은 내 입장에선, 무심코 이마가 찌푸려지면서 잡고 있던 맥주캔에 힘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걸 놓치지 않고 캐치한 듯이, 에프이터는 옅은 한숨을 쉬면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거참, 박사. 왜 그리 얼굴이 굳어 있어?”

“아냐, 아무것도...”

“내가 울적해질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건...”


머뭇거리는 날 잠시 바라보더니, 에프이터는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얼굴에서 무언가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 찌릿하고 느껴졌다.


“박사는 사람이 너무 걱정이 많단 말이야. 그러다가 피부 안 좋아진다고?”

“아프니까 놔줘...”


내 뺨을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면서, 장난기가 섞인 미소가 에프이터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다 마신 캔을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봉지에서 두 번째 캔맥주를 꺼냈다. 마시는 도중에 열이 오르기라도 한 건지, 어느새 점퍼는 소파 위에 걸쳐져 있었고, 얇은 치파오만이 그녀의 풍만한 신체를 감싸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몸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곡선만은 너무 선명하게 잘 보여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말고 실컷 마시자고, 박사. 새해는 이제 막 시작한 참이잖아?”


몸매를 강조하는 치파오의 파괴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내 번뇌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처럼 에프이터는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방금 집어간 캔맥주를 내 눈 앞에 들이밀었다. 건배를 권하려는 제스처인 걸 곧바로 알아차린 나는, 머릿속에서 살짝 맴돌던 잡념을 잠시 접어두고 마시고 있던 캔을 살짝 맞대어 그녀의 요청에 응했다. 유리잔의 경쾌한 소리는 아니지만, 나름 듣기 좋은 작은 소리가 둘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올해도 잘 부탁해. 박사.”

“잘 부탁해. 에프이터.”


계속될 것 같던 불꽃놀이는 끝나가고, 안 끝날 것 같았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사그라 들었다. 정적이 찾아온 심야에 들리는 것은 TV에서 나오는 영화로부터의 음성,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소파 위의 남녀간의 대화 뿐. 


둘만이 가지는 새해를 축복하는 술자리는, 아무래도 한동안 계속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