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친구는 어느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니다.‘

 

간만의 쉬는 시간. 서포터 오퍼레이터 이스티나한테 빌린 교양서적에서 나온 한 문구다. 그 뒤로도 아직 수 십 페이지의 내용이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내 시선은 이 문장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왜 그러는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헛수고였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천사의 화살이 날 찌른 것처럼. 이 문구가 퍽이나 맘에 들어버린 것이다.

 

상대방에게 친절한 건 지극히 정상적이고 올바른 행동이다. 이를 지적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친절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모두에게 그렇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타인을 적으로 돌리지 않지만 친구나 애인으로 둘 사람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절대적 중립인 사람. 물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겠다마는, 만약 있다면 정말 외로운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설마 이런 부류가 아닌가 하는 소소한 자아성찰은 덤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

 

한창 이 책의 유용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휴게실 쪽에서 무언가가 엎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면서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것도 잠시, 난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보폭을 넓혔다. 10m쯤 더 걸어가서 휴게실 근처에 다다르자 자동문이 열리더니, 곧바로 한 남성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어깨로 날 밀친 채 복도 저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를 따라 같이 걸어가는 다른 몇몇 사람들까지 합해서, 욕설이 섞인 언변과 감정적인 발소리는 한동안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얼얼한 어깨를 몇 번 쓰다듬었다. 마음속에서 살짝 일렁이고 있는 불쾌감을 털어내고, 방금 부딪혀서 땅에 떨어진 책을 주웠다. 추가로 떨어진 게 없는지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방금 지나간 남성이 좀 전에 전투에서 돌아온 대원들인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화내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면서 내 시선과 몸은 자연스레 휴게실로 향했다. 

 

“모스티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자동문이 열림과 동시에 먼저 보인 건, 엎질러져 있는 서류와 뒤집혀 있는 의자들. 그리고 그것들은 정리하고 있던 푸른 머리의 산크타 여성이었다. 

 

“오. 박사. 여긴 웬일이야?”

“오, 가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 일 아니야. 잠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

진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모스티마의 어조는 한 치의 변동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이 이런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어질러진 휴게실하며, 단번에 같이 나가는 대원들, 그리고 홀로 남아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스티마.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이건...

 

“혹시 괴롭힘이라도 당한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어떻게든...”

“그런 게 아니야. 박사.”

 

말투는 변함이 없지만, 모스티마의 짧은 답변은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뭐라 더 말해도 어차피 나올 대답이 같을 거라는 예상이 들어 옅은 한숨이 나왔다. 다시 나갈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이렇게 혼자 어질러진 휴게실을 청소하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책을 선반 위에 올려두고, 곧바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에 손을 뻗었다.

 

“도와줄게. 빨리 끝내는 게 낫잖아?”

“나야 좋지.”

 

다행히 모스티마가 대부분 정리를 끝낸 상태여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뒤집힌 의자랑 책상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책들 몇 권 주운 걸로 청소가 끝나버렸다. 일주일 전에 이뤄진 내 사무실 청소에 비하면 너무나도 간결했던지라, 무심코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그러네. 도와줘서 고마워, 박사.”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뭘.”

 

잠시 동안 휴게실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몇 초 간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코트에 문질러도 뭐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영감이 영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 모스티마. 혹시...”

“그럼 난 이만 방으로 돌아가볼게. 좀 쉬고 싶네.”

“어... 응. 고생했어.”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나 싶더니 모스티마는 딱 자르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 채 휴게실을 나갔다. 어느새 방 안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좀 더 결단 있게 말하는 게 나았나 하는 뒤늦은 후회는 덤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집단 괴롭힘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분명 무언가 갈등을 빚어서 크게 싸웠으니 방금 전 같은 꼴이 났을 것이다. 내색을 안 해도 당사자는 속으로는 상처 입었을 테고. 그래서 한 마디 위로해 주려고 한 것뿐인데 거 참....

 

“음? 이건...”

 

이를 어찌해야 하는 고민하던 중, 테이블 위에 올려진 A4 사이즈의 종이뭉치가 내 눈에 띄웠다. 아까 모스티마가 정리해둔 전단지였다. 분명 얼마 후 용문에서 일어날 대규모 축제에 관한 내용이었을 텐데... 어디 내용 좀 볼까?

 

“오호라...”

 

이거 어쩌면, 모스티마를 위로해줄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남색의 하늘 아래에 형형색색의 빛이 거리를 비춘다. 왁자지껄한 상점가. 건물에 화려하게 치장된 장신구와 조명. 괴물의 형상을 한 변장을 한 채 걸어 다니는 시민들. 이 모든 게 하나 되어 반짝이고 있는 도시. 나를 비롯한 로도스의 대원들은 지금, 축제 중인 용문 시내를 걷고 있다.

 

서우인. 본디 고대 살카즈 제사장들이 행했던 여름의 끝을 기념하는 제사...라고 책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먼 옛날이야기. 라테라노의 종교관이 뒤섞이고 컬럼비아에서 정형화가 되면서 현재에 와선 괴물 코스프레를 하고 괴물 모양을 한 과자들을 주고받는 축제가 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한동안 별다른 업무나 미팅도 주어지지 않았겠다, 이때다 싶어 근무나 출장 중인 대원들을 제외하고 전원에게 서우인을 기념한 이틀간의 휴가를 주었다. 그것 때문에 켈시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결국 그렇게 말하면서 허락해 준 걸 보면, 그 녀석도 속으론 휴일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거겠지. 

 

기분이 울적할 때는 가끔씩 이렇게 나와서 실컷 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 눈앞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어제의 그 대원들의 모습이. 정확히는 그들만이 아닌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로도스의 사람들이 웃는 모습이,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녀석은 또 어디로 간 거야...”

 

물론, 이 와중에서도 우리의 전달자 모스티마 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예상외로 축제 같은 게 싫은 건지, 아니면 다퉜던 대원들이랑 마주치는 것을 꺼렸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까 같이 나왔었는데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로 인해 1시간째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 중간중간 만나는 대원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딱히 단서를 찾을 기미는 보이지가 않았다.

 

“어? 박사님, 안녕하세요.”

 

그러던 중 한 소년이 뛰던 발걸음을 멈추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캐러멜을 녹인 것 같은 연한 갈색 머리와 중성적인 외모. 그리고 작은 신장과는 달리 머리 위로 우뚝 솟아오른 매끈하고 우람한 동물의 뿔. 거대 기업 마운틴대쉬 로지스틱스의 도련님이자 전달자. 그 동시에 로도스의 디펜더 오퍼레이터로도 일하고 있는 포르테 소년, 바이슨이었다.

 

“안녕, 바이슨. 축제는 즐기고 있어?”

“음... 그러고 싶은데요. 방금 전에 펭귄 로지스틱스 분들이 사고를 쳐서 지금 그걸 뒷수습을 하러 가고 있던 참이었어요.”

 

대체 이번엔 무슨 사고를 저지른 거야... 어린 나이에 벌써 체념하는 표정을 짓게 할 정도면 평소에 이 소년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하군.

 

“그나저나, 박사님은 뭐하시고 계세요? 다른 분들이랑은 안 계시고.”

“아, 그게 사실...”

 

머리를 긁적이며 이를 말해야 되나 싶었지만, 마침 바이슨은 용문 토박이이기도 하면서 예전에 모스티마랑 일한 적이 있는 사람. 또한 같은 전달자로서 어느 정도 그녀의 행동 패턴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싶어, 어제 있었던 일을 포함해서 내가 지금 그녀를 찾고 있는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바이슨도 갈 길이 바쁘므로 최대한 간결하게 요약해서 말이다.

 

“모스티마 누나가 갈만한 곳... 음...”

 

바이슨은 잠시 눈을 감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잘 없는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미간에 주름이 선명해지는 것이 보였다.

 

“사실 저도 어딜 갈지는 모르겠어요. 워낙에 신출귀몰한 사람이었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었고.”

“그래? 이를 어쩌나...”

 

3초 정도의 공백. 곧바로 바이슨은 뒤늦게 떠올린 것이 있는지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뭔가 만화에서 흔히 사람 머리 위에 전구가 반짝하고 빛나는 효과가 보일 것 같은 착시는 덤이다.

 

“아, 그래도 짚이는 곳이 하나 있어요. 작년 서우인 소동 때 돌아다녔던 곳 중 하나인데, 모스티마 누나가 의미심장한 말을 해서 꽤 인상 깊었거든요.”

 

 

시내에서 꽤 떨어지면서 축제의 불빛은 촛불만도 못할 정도로 작아졌다. 사람들의 환호성도, 신나는 음악도 일절 없는 어색한 정적.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의 숲을 뒤로 한 채, 그저 옅은 흰 등불이 만든 길을 따라 묵묵히 언덕을 올라갔다. 그런 나를 반기는 건지, 아니면 경계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나무 위의 여러 까마귀 가족들이 기괴한 합창이 주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곳에 왜...”

 

바이슨이 가는 길에 날 데려다준 곳은 용문 시내부터 떨어진 공동묘지. 유공자부터 시작해 평범한 시민까지 평등하게 저 땅 아래에 같이 잠들고 있는 고요한 안식처였다. 원래도 사람들이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장소이지만, 서우인이라서 사람들이 전부 시내에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인기척은 1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뿌옇게 낀 안개와 차디찬 기온. 바스락바스락 발에 밟히는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 드문드문 옅게 비치고 있는 등불까지. 마치 귀신이 바로 옆에서 나타날 것 같은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는 풍경이 내 몸을 기름칠 안 한 양철 나무꾼처럼 뻣뻣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는 욕구가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신변 문제는 경호역의 대원들이 이미 어딘가에서 날 주시하고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 그렇게 처절한 자기암시를 계속하면서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5분쯤 걸었을까? 언덕 끝에 다다라서 보이기 시작한 건 중앙의 홀을 향해 일제히 서 있는 묘비의 밀림이었다. 천천히 좌에서 우로 시야를 틀면서 보니, 군데군데 제사를 보내러 온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몇 명 보인다. 축제인데도 여기에 와서 죽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지인을 보러 오는 인정(人情)에 살짝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니 저 사람들을 빼면 나머지 묘지에 잠들어 있을 사람들은 쓸쓸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갱년기 올 나이도 아닌데 왜 이리 갑자기 센티멘탈해진 건지... 잡스러운 생각은 집어치우자. 일단 지금 해야 될 건 모스티마를 찾는 거다. 자정이 지나면 버스나 택시도 끊긴다. 즉 내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2시간. 시간적 여유는 있다마는, 이 넓은 곳을 언제 다 찾아보는지가 관건이다. 우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위주로 찾아보면...

 

“박사...? 여기서 뭐해?”

 

이거 참,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나겠군. 반쯤은 실망, 다른 반쯤은 안심이 섞인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윽고 내 시야엔 살짝 놀란 듯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날 바라보고 있는 모스티마의 모습이 보였다.

 

“여, 모스티마. 여기서 뭐해?”

“난 그냥 산책하러 온 건데. 박사는?”

“나도 산책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어. 용문은 참 넓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능글거리는 대답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모스티마도 내 감상이랑 별다를 바 없었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던 청색 머리카락을 잠시 다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보아하니 바이슨이 알려줬나 보네?”

 

척추에 바늘이 꽂힌 듯이 등이 뻣뻣해지면서 땀에 젖어갔다. 입술 양 끝이 올라가는 걸 참다 보니 하관이 저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도 애써봤지만 자연스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닌 척 어깨를 으쓱여 봤지만, 이미 내 표정이 ‘정답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꼴이었다. 

바이슨이 알려줬다는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차리는 걸까? 이것이 베테랑 전달자만이 가지고 있는 ‘감’인 걸까? 속을 알 수 없으면서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저 은은한 미소에서,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가 미물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일단 자리를 옮기며 이야기를 해볼까? 잘 자고 있는 이곳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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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맨 처음 나온 격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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