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그림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잠들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꿈처럼 덧없는 것이며, 네가 생각하는 현실이 실은 그림 속이 아닌지 말할 수 있냐면서 장자의 호접몽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그림 속의 내가 나인가 현실의 내가 나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꿈 꾸는 내가 나라는 꿈을 꾸고 있는건가.

구운몽에서도 꿈에서 깨어난 성진에게 육관대사가 소유(성진이 꿈 속에서 살았던 인생)가 꿈이냐 성진이 꿈이냐 묻던 장면이랑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함.

다른 점이 있다면 성진은 뒤에 육관대사가 인위적인 일체의 법은 꿈과 환상, 거품과 그림자, 이슬과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 지어다 라고 설법해준 걸 듣고 만물을 공(빌 공 자) 으로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지만 사가는 이미 거기에 도달해서 스스로 깨치고 나와 오히려 시에게 설법을 일러줬다는거.

사가가 말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주지스님의 말은 모든 인위적인 인식을 다 지워내고 나면 도달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인 공 사상에 완전히 도달한 경치를 말하는 거임.

다른 글에도 누가 적었지만 백운화상이 이르기를 내가 삼십년 전에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얻어 깨닫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닌 걸로 보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금 편안한 휴식처를 얻고 나니 마찬가지로 산은 산으로 물은 다만 물으로 보인다 라고 했는데, 이걸 풀어서 설명하자면

처음에 참선하기 전에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산은 산으로 보이니 산이고 물은 물로 보이니 그렇게 보았는데, 참선하며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보아야 한다고 깨닫고 나니 눈 같은 감각으로 보는 현상을 부정하면서 보이는 이 모습이 저게 아냐 라고 보게 됐다, 그러다 모든 인위적인 선입견, 인식을 다 지워내고 형태 없는 본질을 보아야 한다고 깨달으니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공허하게 본질대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임.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임.

길어졌는데 시는 천지신명이 깨어나면 니엔도 자신도 다른 형제자매도 다 사라질 거라고, 그림 속에서 잠들었다 깨어나면 파산 마을을 구했건 초토화됐건 원상복구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그림 속 사람, 화중인이나 다름 없다며 무엇을 하던 의미없다는 태도를 보임.
현실에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시에겐 그림 속 자신이나 현실의 자신이나 무엇을 하건 똑같이 끝날 덧없는 존재고 구분할 수 없는 거임.

사가는 반대로 그림 속인걸 알지만 고집스럽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면서 12번 정성껏 종을 치고, 라바 일행이 그림 속 일이라면서 며칠 사이에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과 대비되게 느끼기에는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성심성의껏 묵량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차를 음미함.

그런 모습이 시에겐 이해할 수 없었을 거임. 어차피 모두 덧없는 일인데 왜 진실을 알면서도 그럴까. 모두 취한 세상에서 홀로 깨어 있으면서도 취한 척 한다면서 이상해하고, 본 모습을 보여주면서 너나 나나 화중인이고 너나 네 스승이 본 그 그림에 그리다 만 획에 무슨 의미나 깨달음이 있을 거라 생각하던 거, 실은 그냥 흥이 깨져서 그만뒀을 뿐인 별 의미 없는 일이다 하던 것도 허무주의의 발로지.

근데 사가는 그 흥이 깨졋을 뿐이라는 말에서조차 다 의미가 있을 거라는 내 인위적인 인식을 깨줬다면서 깨달음을 얻고 즐거워함. 그러면서 꺼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얘기는,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이 허구 같은데 너나 나나 무엇을 하든 의미가 있냐는 시의 견해에 현실이건 허구건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본질 그대로일 뿐, 그런 인식에 얽매여서 번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거임.

구운몽 막바지에 성진과 팔선녀들이 육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것도 같은 깨달음임. 육관대사가 처음에 꿈을 꾸게 하고 깨었을 때 꿈 속의 너가 진짜인가 여기 현실의 너가 진짜인가 묻고는, 인위적 인식이 모두 덧없는 환상 같은 거라고 일러준 거는 꿈 속의 너와 여기 있는 너를 구분지으려 할 필요 없이 너가 너라는 본질을 그대로 보면 된다고 일러준 거임.

사가가 그림 속에서 그림 속이라는걸 알고, 눈 감았다 뜨면 원래대로 돌아간다는걸 알면서도 구운몽에서 성진이 하룻밤 사이의 꿈에서 인생 몇십년을 살았듯 사가가 느끼기엔 십년에 가까운 세월 내내 현실을 살듯 매사에 진심이었던건 이미 그렇게 깨달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자기 할 일을 다 할 수 있었던 거지.

결국 시가 생각하던 결말이 정해졌다는 허무주의, 어차피 천지신명의 파편 같은 꼭두각시 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에 대해 사가는 시는 시고 사가는 사가일 뿐이라면서 그런 것에 번민하지 않고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이 자기 길을 나아가면 된다고 말해준 거임. 의도했건 안했건.

갠적으론 구운몽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갔었는데 화중인 보면서 오히려 둘 다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음. 그림 속에서 우요우나 라바가 열심히 해봤자...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마음 흐트러지던 거, 나도 일상 쳇바퀴 돌면서 그러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더라. 동양 고전 풍으로 불교 도교적인 담론을 잘 다룬 좋은 스토리였다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