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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께서는 그래서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저희 측의 저격수 하나를 리유니온 측에서 포로로 잡고 있다가 지금 놔주겠다고 해서 말이죠.”

 

“음, 박사님의 불참은 유감스럽게 되었군요, 하지만 그만큼 그 리베리 오퍼레이터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것이겠죠. 자신의 사람을 챙기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일단 우리의 승리에 대해 축배를 들도록 하죠.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그리고 그를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을 위하여.”

 

로도스의 정예 오퍼레이터들, 그리고 용문근위국의 고위 간부들은 다함께 잔을 들었다. 마치 사교계 파티의 한 장면 같았다... 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격의 없는 모임이 되어 있었다.

 

“리유니온의 예상치 못한 기습이 들어왔을 때는 정말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 여러분의 대응력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대 이상이었다니, 저희가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웨이 장관은 능글맞은 정치가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닙니다, 하하하. 그저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을 뿐이죠. 용문은 다시금 안전해졌습니다. 모두 로도스 아일랜드 덕분이죠!”

 

“용문근위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향후에도 많은 인력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바로 그 건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습니다만... 잠시 이쪽에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렇게 용문의 장관과 로도스의 실무적 지도자, 그리고 용문근위국의 총경은 한 자리에 모였다... 다시 한 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의 지원은 어렵다.”

 

웨이 장관의 뜻밖의 최후통첩이었다.

 

“이렇게 으슥한 방으로 부를 때부터 예상은 했습니다만, 이유나 들어보죠, 어째서입니까?”

 

“이번 작전으로 인해 소모된 용문의 자원이 너무 많다. 사비를 털어 충당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부족해졌어. 최후방어선까지 뚫리며 시민들을 최후방으로 이동시켜야 했던 점이 치명적이었다. 지지율은 지금 용문의 복구에 힘쓰지 않으면 전투의 위기가 해소되고 났을 때 바닥을 기게 되겠지. 한마디로 우리 코가 석 자다.”

 

“그래서, 이렇게 버리겠다는 말입니까? 그저 쓰고 버리는 말로 로도스를 부른 건가요? 첸,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이게 옳다고 생각해?”

 

“버리다니, 표현이 상당히 과격하구나, 탈룰라. 용문은 로도스 정도의 중소기업에 투자하기에는 과분한 양의 자본을 지급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히 지불했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우리는 용문의 안전과 가치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어. 로도스의 산황은 안타깝지만, 용문이 지급한 자본을 토대로 로도스가 스스로 해 나가야 한다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야.”

 

“당신에게는 실망했습니다, 웨이 장관. 설마 정말로 용문의 위기를 방패로 우리를 내칠 줄이야. 로도스가 근시안적이었군요, 제가 근시안적이었습니다. 로도스는 박사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더 있다가는 숙박비도 내고 가라고 할 기세로군요.”

 

그리고 탈룰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문을 나서려던 순간,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아니지. 이 정도가 아닐 겁니다. 첸, 우리에게 을어온 연락과 교신에 대해 네가 웨이 장관에게 보고했니?”

 

“그런 적은 없어, 탈룰라.”

 

“웨이 장관, 생각해보면 당신은 리유니온이 방어선을 돌파하기도 전에 시민들을 대피시켜 두었습니다. 아무리 두려운 리유니온의 침공이라도 방어선이 4개나 있는데 대비책으로 구역 전체를 비우고 대피시켜 둔다는 고비용의 방법을 사용하는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당신의 대비 덕분에 민간인의 피해 없이 방어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당신이 침공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 어때서? 용문의 위기예측프로그램이 예상한 결과일 뿐이다. 그에 따라서 움직였을 뿐이지.”

 

“좋습니다, 하지만 그 위기예측 프로그램이 적에게 사로잡힌 로도스의 포로 이야기까지 해주던가요?”

 

“그게 무슨 소리지? 그 오퍼레이터에 대해서는 네가 말했잖니.”

 

“아니요. 저는 그 오퍼레이터의 신원은 밝힌 적이 없습니다. 적이 보내온 영상은 흐릿했고 광석병이 상당히 진행되어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리베리’ 오퍼레이터라고 말했죠. 설령 당신의 부하들이 적들이 보내온 교신을 가로챘다고 하더라도, 포로의 종족까지는 알기 힘들었을 겁니다.”

 

“우연일 뿐이다. 종족들의 특징이 보이지 않으니 비교적 그런 특성이 옅은 리베리로 추측한 것일 뿐이야.”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리유니온은 저지선을 전부 뚫고도 다시 퇴각했고, 시종일관 이 전쟁에서 지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의심했습니다만, 이제는 알겠군요. 당신이 저들과 연락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잘 짜여진 판이었습니다. ‘리유니온은 헤어나올 수 없을 절망을 가져오는 듯 보였지만, 웨이 장관의 지휘 아래 용문은 감염자 집단인 로도스 아일랜드와 협력해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이겠습니까. 로도스 같은 중소기업은 돈 좀 던져 주면 용병 노릇도 해줄 테니. 당신을 믿은 제가 바보였습니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장관님, 사실입니까?”

 

“첸, 너까지 흔들리는 거니? 내가 용문의 이익 때문에 신의를 저버릴 사람으로 보이나?”

 

“신의란... 상대적이죠. 무언가에 대한 배신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신의 때문에 발생하니까요. 용문의 이익과 로도스 아일랜드의 이익 중 저울질할 때, 장관님은 거리낌 없이 용문의 이익을 택하실 겁니다.”

 

“그래.”

 

웨이 장관은 그렇게 말하며,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이익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아. 선량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건 그런 행동을 함으로서 자신에게 돌아올 만족감이나 명예, 또는 보상이 있기 때문이지. 가령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서 다 죽어가는 감염자 노숙인에게 자신의 코트를 벗어줄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될까? 너라면 벗어주겠니, 첸?”

 

“용문의 총경으로서, 감염자는 격리와 추방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감염자로서, 저는 코트를 벗어주지는 못할지라도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부디 너의 생각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 방금 발언은 못 들은 걸로 하지.”

 

“그래서, 리유니온과 접선한 것은 사실입니까?”

 

“끈질기구나, 감염자 폭도 집단과 용문이 타협할 것 같니?”

 

“지원 나갔던 근위국 대원들로부터 검은 삿갓을 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 대한 목격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목격된 곳에는 감염자들의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들에 대해 알고 계시는 바가 있습니까?”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들이 감염자들을 죽였다고 할지라도 그건 용문과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용문에 필요한 행동인지도 모르지. 생각해 보렴, 첸. 그 죽은 감염자들은 리유니온의 잔당들이거나, 감염자들의 보호자를 자칭하는 로도스 아일랜드가 왔음에도 그들에게 접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에 리유니온에 가세할 잠재적 위험 요소가 아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지.”

 

“그들은 감염자일지언정, 용문의 시민이었습니다!”

 

“용문의 시민은 비감염자에 한한다.”

 

“그러십니까? 그러면 저도 용문의 시민이 될 수 없겠군요.”

 

첸은 근위국 배지와 신분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첸, 순간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네 앞으로의 인생을 어렵게 만들지 마라.”

 

“네, 치기어린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저는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염자들을 핍박하는 도시의 조직에 감염자가 있어서 좋을 게 있을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감염자들을 격리시키고 두려워할지언정, 그들에게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목숨조차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그런 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조용히 지내는 감염자들을 핍박하고 무기를 들고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들에게는 재물로서 달래는 체제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첸은 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검은 삿갓을 입은 자들이 나타나 가로막았다.

 

“역시 이들은 당신의 사병들인가요? 정말 대단한 자들이군요. 용문 최고위 관계자의 집무실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니.”

 

“그 문을 네가 이렇게 나서는 순간, 너는 그저 하나의 감염자일 뿐이다. 아니, 그 이하일지도 모르지. 온갖 핍박과 멸시에 시달릴 거다. 너와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그 모든 것이 무너진단 말이다.”

 

첸은 적소를 뽑아 장관을 향해 겨누었고, 그에 맞춰 칼을 뽑아든 검은 사내들로 인해 방 안에는 적막함과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그만, 아직 아무 일 아니다.”

 

“불의한 관리직이 되느니, 자유로운 감염자가 되겠습니다.”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도는 가운데, 먼저 깬 것은 웨이 장관이었다.

 

“칼을 거두어라, 첸. 보내줄 테니. 이대로라면 저 창문이라도 깨고 나가겠구나.”

 

웨이 옌우가 손짓하자, 삿갓을 쓴 이들은 검을 집어넣었고, 첸 또한 그렇게 했다.

 

“현 시간부로 너를 용문근위국 총경의 자리에서 해임한다. 가서 네 언니와 함께하건, 용문에 남아 있을 감염자들을 구하건, 네 뜻대로 해라.”

 

“안녕히 계십시오, 웨이 옌우 장관님. 아니, 삼촌.”

 

첸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나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 결심이 확고했으니까. 어디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첸이 익힌 검술을 보고도 기대에 못 미친다고 평했을 때? 회의 때문에 병문안을 가주지 못했을 때? 첫 업무에서의 과잉 진압을 문책했을 때? 그래, 그날부터일 것이다. 카셰이가 탈룰라를 데리고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때.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외의 선택은 있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선택에 말려들게 한 탈룰라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었다.

 

“다른 요원들에게도 알려라, 첸을 막지 말라고. 용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어라. 용문에 더 이상 첸이라는 인물은 없다.”

 

두통이 찾아온다. 연기를 너무 깊이 들이마신 탓일까.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동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하군.”

 

“그럼 오랜 친구도 내칠 셈인가, 웨이 장관?”

 

“거뤠이. 자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자라크 노인, 등은 굽고 지팡이에 의지해 걷지만 그럼에도 기품 있고 당당한 사나이. 한때 나의 공식적인 동료였던 슬럼가의 래트킹이었다.

 

“첸 경관이 나가는 건 이미 보았네. 그래, 자네 생각대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나보지?”

 

“인생이 어찌 생각대로만 진행되겠는가. 하지만 지난 13년간 기울인 노력이 전부 헛수고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조금 쓰군.”

 

“그녀를 놔 주게, 웨이.”

 

“이미 놓아주었어. 자유롭게 용문을 나가 살라고 말이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 마음속에서도 놓아주라는 얘기야. 언제까지 숨길 셈이었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나나 자네나 젊은이들보다는 빨리 갈 텐데. 자네가 죽으면 그 비밀을 누구에게 맡길 생각이었나?”

 

“이 도시의 시민들이 바뀔 때까지!”

 

나는 분에 못 이겨 탁자를 내리쳤다.

 

“그게 그렇게나 잘못인가, 린? 이 도시의 사람들이 감염자를 보는 시선이 공포와 혐오에서 연민과 이해로 바뀔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내 믿음이 그렇게나 잘못되었나?”

 

거뤠이는 나를 쏘아보았다.

 

“자네의 믿음에는 행동이 없어. 자네가 나서서 감염자들을 탄압하고 핍박하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넘어 조장하는 정도인데 저들이 바뀌기를 바란다고? 아무도 바뀌지 않아. 자네도, 나도, 젊은이들도, 감염자도, 비감염자도 마찬가지지.”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래, 거뤠이. 내가 첫 선택을 잘못한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용문의 정책을 바꾼다면, 그게 용문에 도움이 될까? 리유니온의 등장으로 감염자와 비감염자 간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어. 우리의 문을 감염자들에게 연다면, 그건 희대의 결단일까, 아니면 무책임한 이상일까?”

 

“무책임한 이상이겠지.”

 

“용문의 입장은 바뀌지 않을 거야. 그리고 자네도 그에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웨이 장관님.”

 

린은 집무실을 나가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탈룰라가 돌아왔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그래. 그리고 용문에 실망해서는 떠나갔지.”

 

거뤠이는 무엇이 그리고 재미있었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실망할 만도 하겠군! 아쉬워, 정말 아쉽군.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그 어린 아이가 장성한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거뤠이도 떠나고, 집무실에는 침묵이 깔렸다. 탈룰라, 용문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돌아와 용문을 지켜 주었다. 카셰이에게 끌려가 어떤 수난을 당해왔을까, 그리고 그녀가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단체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어떤 역경이 있었을까. 내가 놓친 것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첸도 그렇다. 생각해 보면, 13년간 나는 첸에게 해 준 일이 거의 없었다. 미운털이 박힐 만도 했던 것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동생에게로 닿았다. 그녀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해졌고, 그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동생이 아니라, 내가.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법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지켜주려는 대상의 의지를 무시하고 행동해 왔던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무실의 적막함이, 그런 사색을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