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arknights/53329183 > ㅈㅍㄹㅋ





------


***


 “…부자시네요.”


 “딱히? 저택 한 채 가지고 부자는 무슨.”


 “…….”


 기사란 사람들은 죄다 금전 감각이 마비라도 된 건가. 아니면 이 사람이 특이한 건가.


 저택 한 채가 부자가 아니면 대체 뭘까. 제이는 그 의문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조피아의 저택을 눈에 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경도 안 쓴 듯한 정원. 마구잡이로 자라있는 풀이며 나무가, 좀 전에 봤던 니어 저택을 연상케 했다. 뭐 가문의 특색 비슷한 거겠지.


 난잡한 정원을 보며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여긴 좀 전의 니어 가문과는 달랐다. 표현하자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적게나마 관리하고 있는 흔적이 보였고, 한쪽에 마련된 널찍한 연무장은 낙엽 한 장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중 나오는 하인도 있고 말이지. 단정한 차림의 하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조피아 아가씨.”


 “마리아는?”


 “방에 계십니다. 시장하다고 하셔서 식사를 올려 보내드린 참입니다.”


 “잘됐네. 2인분 더 추가로 준비해서 갖다 줘. 너도 점심 아직이지? 먹고 가.”


 “…….”


 조피아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선 척척 계단을 올라갔다. 제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윽고 복도를 가로질러 어느 방문 앞에 선 조피아는, 여태껏 봤던 것 중 가장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마리아, 들어가도 되니?”


 [조피아 언니? 응, 괜찮아.]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온했는데도 조피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선 제이에게 눈을 돌려 낮게 속삭였다.


 “너, 안에서 뭘 보든 절대, 절대로 놀란 기색 보이지 마. 알겠지?”


 “예에…….”


 매가리 없는 대답이 못 미더웠던 걸까, 조피아는 입을 삐죽이며 문을 열었다. 제이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안은 넓었고, 사람 넷은 눕고도 남을 듯한 침대는 엷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조피아는 그에게 잠깐만 여기 있으라고 눈치를 준 뒤 먼저 가서 거기 누워 있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했다. 정황상 그 마리아라는 여동생이겠지, 아마. 다행히 오래 서있을 필요도 없이 조피아는 금방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제이. 마리아, 인사해.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온 제이 씨야.”


 아무리 허락을 받았다곤 해도 여자의 방. 그런 쪽으론 내성이 전혀 없는 제이는 인사 안 하면 누가 쫓아와서 골통이라도 깨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재빨리 먼저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심까, 마리아 아가씨. 제이라고 함…….”


 그러나 고개를 든 순간,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한눈에 봐도 확실히 그 마가렛 니어의 여동생이 맞았다. 조금 더 선이 곱고 눈매가 순박했지만, 옅은 금발이며 잔잔한 눈빛, 그리고 특유의 따사로운 빛 같은 분위기는 누가 뭐라 해도 같은 피를 잇고 있다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래, 보통이라면 손이라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을 터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상대방의 몰골이 조금만 더 정상적이었다면 말이지.


 “어, 음…….”


 “안녕하세요, 제이 씨. 마리아라고 해요. 마가렛 언니 동생이에요. 초면에 이런 모습으로 봬서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걸 염려해서 그런 걸까.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침대에 누워 있던 마리아는 애써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이래서 놀란 기색 보이지 말라고 했던 거구나. 뒤늦게 깨달은 제이였지만 이미 수습하기엔 늦은 뒤였다. 그 대가로 마리아를 부축해주는 조피아의 사나운 눈총을 온몸으로 견뎌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치기엔 마리아의 상태가 너무나도 심각했다.


 팔목까지 두꺼운 깁스가 채워진 오른손. 붕대가 안 감긴 곳이 없는 몸. 침대 발치에 안 보이게 놔뒀다곤 하지만 슬쩍 보이는 피 묻은 붕대 뭉치. 고운 얼굴 한쪽은 붕대와 거즈로 반이 넘게 가려져 있었고, 한쪽 눈두덩이는 아직도 피멍이 가시질 않아서 불그죽죽했다.


 맞은 상처였다.


 그것도 있는 힘껏.


 “…사고라도 당하신 검까.”


 제이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그러나 이 상처가 사고 따위로 입을 만한 게 아니란 것쯤은 물어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헤헤, 사고는 아니고요. 어제 기사 경기에서 져서 그래요.”


 “아니 무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사람을……. 기사 경기는 원래 다 이런 식임까?”


 “다 이렇진 않은데……. 헤헤, 괜찮아요. 금방 나아요. 저 회복 아츠가 특기거든요.”


 “허어…….”


 다른 의미로 말문이 턱 막힌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전혀 ‘금방’ 나을 상처론 안 보이는데 저런 소릴 잘도 할 수 있다니.


 기가 차는 건 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낫긴 뭘 나아? 너 지금 제정신이니?!”


 “조, 조피아 언니…….”


 옆에 있던 제이가 흠칫할 정도로 날 선 목소리. 그조차도 몸이 떨릴 정돈데, 하물며 지목된 당사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리아는 아픈 것도 잊은 모양인지 조피아를 바라보며 말까지 더듬거렸다.


 “지, 진짜 괜찮아. 이거 봐. 오른팔도 많이 나았고, 눈에 붓기도 많이 빠졌고, 또…….”


 “헛소리 집어 쳐! 무슨 상처가 하룻밤 만에 낫니? 네가 무슨 와이번이라도 돼? 지금 밤새 의사가 몇 명이나 다녀갔는지 알기나 하냐고!”


 “어, 언니……. 손님도 계시는데 좀…….”


 마리아는 조피아의 화를 누그러뜨릴 모양새로 제이를 핑계 삼았지만, 애초에 그건 먹힐 리도 없는 불발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마리아의 태도는 더더욱 조피아의 언성을 높일 뿐이었다.


 “왼팔은 복합 골절에 허벅지에는 화살이 세 대나 박혔어! 세 대나! 갈비뼈는 두 대나 부러졌고 심지어 뇌진탕에 눈까지! 자칫 잘못했다간 실명당할 수도 있었단 말이야!


 대체 왜 기권 안 한 거야? 가뜩이나 실력 차는 뻔한 상대인데, 왜 악착같이 버텨서 일을 더 키우냐고!”


 “…….”


 조피아는 혼을 낸다기보다도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끔찍하게 아끼는 가족이 이렇게 박살 난 꼴로 돌아왔는데 어느 누가 안 그러겠는가. 마리아는 차마 그런 조피아를 바라볼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수그렸고, 조피아는 그런 마리아의 성한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꼭 승패만이 점수에 영향을 주는 건 아냐. 아츠의 화려함이나, 검술이나, 전술 같은 걸로도 얼마든지 점수를 딸 수 있어. 네가 만약 그러려고 했다면 셰브치크도 적당히 맞춰주면서 널 몰아붙이지도 않았을 거야. 그 자식이 좀 재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녹슨 구리 녀석처럼 막 나가진 않는다고!”


 “언니…….”


 “내가 널, 널……. 대체 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네가 피투성이로 실려 내려올 때,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래서…….”


 “언니, 미안해…….”


 “미안할 짓을 하지 말란 말이야! 차라리 빨리 기권하고 다음 승부 준비했으면 포인트라도 만회했지! 아직 햇병아리 주제에 무슨……!”


 조피아는 재빨리 입을 닫았지만 그렇다고 새어 나간 말이 돌아올 린 없었다. 다시 마리아가 고개를 들었을 땐 서글픈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아니…….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헤헤, 미안해 조피아 언니. 내가 마가렛 언니 흉낼 괜히 냈나 봐. 마가렛 언니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어.”


 “마리아, 넌 마가렛이 아냐! 마가렛의 옛날 장비를 입는다고 해서 네가 그 애가 되는 건 아니라고!”


 “응……. 맞아. 난 언니가 아니지.”


 “마리아…….”


 조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순간 마음을 다잡은 듯 독하게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마리아가 이 이상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마리아, 이 정도면 충분해.”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단호한 표정으로, 마리아의 두 어깨를 굳게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면서.


 “여기 제이가 소식을 전해줬어. 곧 마가렛이 돌아올 거라고. 그렇지? 너 그렇게 말했잖아. 편지까지 가져와서. 그렇지?!”


 “예에, 예! 그럼요.”


 사실 편지 내용도 모르거니와 곧 돌아온다는 게 언제쯤인지도 몰랐지만, 제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피아의 눈빛이 어찌나 사납던지 마치 푸른 불똥이 탁탁 튀는 것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허튼소리 한번 지껄였다간 초상이라도 치를 기세였다.


 “…하지만 그건 마가렛 언니에게 기대기만 하는 거잖아.”


 마리아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열기 띤 음성.


 조피아의 망연자실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마리아는 단호한 눈빛으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니어를 연상케 했다. 때때로 전장에서 그녀가 보여줬던, 그 강인하고 올곧은 눈빛을.


 “나도 내가 언니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 정돈 알아. 내 신념이 언니에게 빌린 거라는 것도 알고.”


 “마리아!”


 조피아는 깜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리아의 목소리엔 자조의 기색 따윈 없었다. 거기 있는 거라곤 몇 번이고 두드려 정련된 강철과도 같은 의지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고 싶어. 비록 언니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밖에 못 하지만,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잖아. 언니가 온다고 해서 전부 언니에게 떠넘기기 싫어. 난 언니를……. 언니를 지탱해주기로 맹세했단 말이야.”


 “하지만 마리아…….”


 “그리고 그걸 떠나서 기사 경기에 계속 안 나갔다간 기사 작위 뺏겨 버리잖아. 음, 이제 슬슬 팔 가구도 없기도 하고…….”


 “마가렛이 그런 작위 따위에 연연해할 것 같니? 상업연합회가 니어 가문의 작위를 거둔다고 해서 우리가 기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냐! 우리 가문을 일궈내신 건 선조들이야! 상업연합회 따위가 아니라고! 내가 무에나 그 자식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나도 동의해!”


 “그 저택은 언니가 돌아올 곳이야. 난 그곳을 지키고 싶어. 단지 그것뿐이야.”


 “…….”


 마리의 대답에 조피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막무가내도 아니었고, 하물며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언니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깨끗한 의지. 그 마음을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저 화가 난다면 그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만약 내가 경기 기사를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조금만 자존심을 꺾고 누군가의 지원을 받았더라면.


 그럼 지금 좀 더 힘이 되어줄 수 있을 텐데. 뭐라도 더 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선택하지 않은 미래를 가정하는 것 따위, 술꾼의 주정보다도 더 가치가 없는 법.


 “…….”


 그저 할 수 있는 게 손을 잡아주는 것뿐. 마리아의 손을 잡은 채 조피아는 결국 고개를 떨궜고, 마리아는 그런 조피아를 위로하려는 듯 가만히 기댔다.


 그 모습을 보며, 제이는 마리아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빌린 이상이라 해도 그것에 긍지를 가지는 것. 그 점이 마치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역시 여기에 뭔가 별다른 긍지나 이상을 가지고 온 게 아니었다. 박사가 보내지 않았더라면 와볼 생각조차 안 했으리라. 지금 그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건 전적으로 박사가 그를 여기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사의 이상을 빌렸을 뿐이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아니 부정하고 말고를 떠나서 사실이 그랬다.


 그럼 그가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건 믿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박사.


 그가 자신을 믿어주고 있었다.


 자신조차도 못 믿는 자신을 믿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왔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다. 그래서 목숨을 걸 수 있다.


 비록 남들에게 겨우 그런 것 따위로 목숨까지 거냐고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그로 인해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자신이 노력했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빌린 이상이라 해도, 그것을 위해 한 노력은 오롯이 자신의 것.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라.


 마리아의 그 한마디가, 제이의 가슴을 절절히 울리고 있었다.


 “마리아 아가씨는 강한 분이시네요.”


 제이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불쑥 말했다.


 “…너 뭐 잘못 먹었니?”


 조피아에게 금방 한소리 듣긴 했지만. 기왕 입 연 거 제이는 눈 딱 감고 할 말은 하기로 했다. 까짓것 밉보여봤자 몇 대 맞기밖에 더 하겠는가. 설마 죽이진 않겠지.


 “빌린 신념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단 게 더 대단하지 않슴까. 그게 강한 거 아니면 뭐겠어요.”


 “제이 씨……!”


 “이봐, 너! 자꾸 애한테 헛바람 불어넣을 거야? 마리아, 나도 정말 안타깝고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어제 경기에서 너무 처참하게 진 탓에 남은 포인트가 거의 없단 말이야! 지금부터 모든 경기를 연속으로 이겨야 겨우 본선 진출 기회라도 얻어볼까 말까야. 그걸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 금방 낫는다니까? 내일부터라도 분명…….”


 “너 전치 3주야! 네 아츠가 아니라 마가렛의 아츠까지 합친다 해도 내일까지 나을 확률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어! 아니, 설령 진짜 낫는다 해도 내가 안 내보낼 거야! 어디 그 3주 안에 침대 밖으로 나가기만 해 봐, 아주 그땐 침대에 꽁꽁 묶어버릴 거니까!”


 “우으…….”


 조피아가 사납게 가슴팍을 찌르며 말하자 마리아는 기세에 눌러 아무 말도 못 한 채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조피아는 한다면 진짜 하는 성격이었으니까. 마리아는 자길 억지로 눕히려는 조피아의 어깨 너머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조피아 좀 설득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물론 그 눈빛을 받기 전부터 제이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소나에게 들었던 기사 경기 규칙을 열심히 떠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


 이거 괜찮으려나.


 “저, 조피아 아가씨.”


 “왜?!”


 그야말로 한 대 칠 기세라, 제이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기사끼린 포인트 양도라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는데요.”


 “뭐, 포인트 양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진 모르겠는데, 그거 같은 소속의 기사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거야! 니어 가문에 얘 말고 경기 기사가 또 있다니? 누가 포인트를 줘?”


 “그……. 말씀하신 대로 마리아 아가씨는 니어 가문 소속이기도 합니다만, 아직 프리랜서 기사이기도 하지 않슴까. 프리랜서 기사들 사이에서도 점수 양도는 가능한 걸로 압니다.”


 제이의 말은 확실히 기사 경기 규칙 그대로였다. 프리랜서 기사는 굳이 말하자면 상업연합회 소속이니까, 좀 억지스러운 느낌이 나도 ‘프리랜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같은 진영이라 할 수 있긴 했다. 어쨌든 규칙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간다면 분명 규칙의 헛점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상업연합회가 굳이 이 규칙에 손대지 않은 이유는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얘한테 헛바람 넣지 말랬지! 너 진짜 한 대 맞고 싶어?! 본선 문턱까지만 가도 몸값이 얼만데 누가 미쳤다고 피땀 흘려 벌은 포인트를 양도해! 자기 커리어까지 망쳐 가면서!”


 그래,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포인트 양도는 한마디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


 기사끼리의 포인트 양도는 이른바 ‘명예롭지 못한’ 행위로 취급되어 꽤 규모 있는 기사단 내에서도 쉬쉬하는 제도였다. 뭐 상업연합회에서 떠들 명예가 과연 남아 있긴 한 건지는 차치해두고, 어쨌든 그게 기사 커리어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는다는 건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프리랜서 기사에겐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걸 누가 미쳤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조피아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일단 양도 자첸 문제없단 말씀이잖슴까. 그럼 제가 시합 나가서 포인트 따고 드리면 되겠네요.”


 “그래, 네가……. 뭐, 뭐?!”


 “어, 음……. 그러니까 제가 경기 기사로 등록해서 포인트 따고, 마리아 아가씨께 드리면 되는 거 아닌가 해서…….”


 “…….”


 “…….”


 제이는 순수하게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한 거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조피아의 귀는 아주 멀쩡했다. 그저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라 사고가 잠시 정지한 것뿐. 심지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던 마리아마저도 제이의 대답에 얼빠진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어어, 저기 제가 규칙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죠? 프리랜서 기사는 신청만 하면 누구든 등록할 수 있다고…….”


 말끝에 가선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제이였다. 나름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해서 말한 건데, 어째 영 반응이 나빴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조피아는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고, 마리아도 복잡 미묘한 눈빛이었다.


 조피아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1분 정도 지나서였다.


 “기사 등록을 하겠다고?”


 “예에.”


 “아니, 아……. 정말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럼 지금 기사도 아니란 거잖아.”


 “어음, 그러니까 등록해야겠죠.”


 아가씨 말마따나 기사가 아니니까요, 라는 식으로 대꾸하는 제이.


 진짜 그의 의도는 그게 전부였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상황에서 그의 발언은 가솔린으로 가득 찬 창고에서 담뱃재 터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행위였다.


 마리아는 알고 있었다. 조피아가 진짜 화가 나면 오히려 말수가 적어진다는 것을. 그걸 알기에 열심히 눈짓으로 그에게 경고를 보냈지만, 유감스럽게도 눈썰미는 좋은 주제에 그런 쪽으론 둔해 빠진 제이가 그 경고를 알아먹을 리가 없었다.


 조피아는 천천히 제이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이 흡사 지옥의 여왕 저리가라였다.


 “기사 스포츠는 본 적 있어?”


 “아뇨, 아직.”


 “무기는 좀 다룰 줄 알고?”


 “어, 음. 어디 가서 맞아 죽진 않을 정도는 됨다. 아, 아니 잘 다룹니다, 예에.”


 마지막에 급히 말을 덧붙인 이유는 스스로 싸움 잘한다고 인정하긴 싫어도 객관적인 평가까지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역시 정식으로 입사한 로도스의 오퍼레이터. 당연히 입사 테스트도 거쳤고, 틈틈이 전투 훈련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전투 기술력 하나만큼은 ‘우수’로 뜨지 않던가. 그거 하나만큼은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도베르만 교관도, 심지어 검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헬라그 장군마저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조피아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사실, 안다 해도 제이의 전투 경험이 없는 건 사실인지라 코웃음이라도 칠지 의문이었고.


 제이의 말을 다 들은 조피아는 그야말로 신에게 참을성을 달라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이.”


 “예에.”


 “기사 스포츠는 뒷골목 투기장 같은 게 아냐. 용문 뒷골목 떨거지 조직들 항쟁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작게는 기사와 기사의 실력대결이고, 넓게는 스폰서끼리의 기술 경쟁이야. 네가 뭘 생각하든 기사 경기는 그보다 더 복잡하고 더럽기까지 할 거야. 그러니 네 그 헌신적인 마음은 그냥 마음만 받을게. 그러니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하지만 이 방법이 지금 상황에서 제일 낫지 않슴까? 마리아 아가씨가 계속 경기를 이어 가시려면 포인트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저야 뭐 딱히 경기 기사 같은 거에 뜻을 두고 있지도 않으니까…….”


 제 딴에야 상대방의 부담을 덜려고 한 말이었겠지.


“경기 기사, 같은 거라……. 후훗.”


 하지만 제이는 몰랐다. 그 말이야말로 조피아가 한계까지 누르고 있던 참을성의 빗장을 비틀어 부쉈다는 것을.


 “제, 제이 씨……. 그, 저기, 포인트 문제는 제가 다른 방법 알아볼 테니까, 저기…….”


 “너 미쳤니?”


 조용히 튀어나온 조피아의 말은, 그야말로 잘 벼린 칼만큼이나 서슬 퍼렇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언제 웃음기가 서려 있었냐는 듯 차가운 분노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경기 기사 같은 거라고? 기사 스포츠가 우스워? 기사 스포츠의 문턱도 안 가본 주제에 뭘 그리 쉽게 말해? 네가 대체 뭐가 그리 잘났는데?”


 “어, 아니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시끄러워!”


 제이는 자기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켰단 걸 뒤늦게 알고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언제나 늦는 법이었다.


 “언니, 제이 씨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잖아. 너무 화낼 필요까진…….”


 “검증도 안 된 자식이 이딴 망언이나 지껄이고 있는데 화가 안 나?!”


 재빨리 마리아가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그건 오히려 조피아의 화를 돋우는 꼴.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조피아의 기세는 그야말로 제이의 몸에 구멍 너댓 개는 더 뚫을 법했다.


 “오만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아니면 둘 다야? 그래, 네가 다 이겨서 포인트 받고 양도한다 치자. 그럼 마리아는 네 점수나 넙죽 받아먹고 무임승차나 하란 말이니? 제 실력으로 올라가지도 않은 기사를 대체 누가 인정하는데!”


 “그땐 그때고 해놓을 수 있는 건 해놔야지 않슴까. 나쁜 뜻으로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야! 너 지금 마리아 꼴을 보고도 그딴 소리가 입에서 나와?! 이게 무슨 동네 애들 패싸움인 줄 아냐고!”


 “기사 스포츠가 엄청 힘들단 거 저도 알고 있슴다. 아무것도 모르고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믿어주십쇼!”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나는 그에게 기사 스포츠의 규칙을 포함해 카시미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려 줬고, 제이는 그걸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감염자 기사가 어떻게 차별을 받는지도 알았고 프리랜서 기사들이 어떻게 소모품처럼 쓰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지도 알고 있었다.


 조금만 조리 있게 설명했더라면 조피아가 이렇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울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이의 언변은 그의 칼솜씨만큼 화려하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어쨌든 제이는 열심히 머리를 박았다. 여자가 화났으면 무조건 머리부터 박고 보라고 동씨 아저씨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가 막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대체 너 뭐야? 아니, 마가렛은 뭐 이런 사람이나 있는 데서 지내고 있는 거람? 거기 너 같은 사람들 많니? 무슨 정신병자 소굴이야?”


 설마 자신의 미숙함이 로도스의 모두를 깎아내렸다니.


 “어, 언니! 말이 좀…….”


 “내 말이 어때서? 도와준다느니 뭐니 와놓고선 제가 뭘 어떻게 도울지도 모르면서 헛소리나 주절거리고 있잖아! 이런 사람을 보내놓고선 뭘 돕느니 마느니 하는 거야? 제가 뭘 도울지도 모르는데!”


 사실이다. 도울 방법을 모른다는 건.


 어떻게 도울지 모르는 건 자신의 미숙함 때문이다. 결코 로도스에 있는 다른 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하물며 박사의 잘못은 더더욱 아닐 터.


 “…죄송합니다.”


 그렇기에 제이는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제 잘못으로 모두를 욕보였다면 그게 더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사과뿐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머릴 숙일 뿐이었다.


 “됐어! 생긴 거랑 달리 예의는 있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내가 눈이 삐었지! 너나 널 보낸 사람이나 똑같은 놈이야!”


 “그건 아님다.”


 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드물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러나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절 보내신 분은 저 따윈 가늠도 못할 정도로 훌륭한 분이심다. 미숙한 건 제 탓이지 그분 탓이 아님다. 그러니 그 말씀만은 취소해주십쇼.”


 자신의 미숙함으로 욕을 먹는 거야 당연하다.


 그러나 자신의 미숙함으로 박사를 욕보인다는 건 안 될 말이다. 다른 건 전부 사과하고, 바닥에 엎드리라면 엎드릴 수도 있지만 그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


 “취소하라고?”


 “예, 부탁드립니다.”


 차갑게 타오르는 조피아의 시선과 담담한 제이의 시선. 둘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는 듯했다.


 문제는 제이가 물러설 생각이 없듯, 조피아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싫다면?”


 “…왜 싫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슴까.”


 “널 보낸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너보다 높은 사람이겠지? 네가 미숙하다 뭐다 해도 결국은 그 미숙한 널 보낸 그 사람이 문제인 거 아냐?”


 “아님다. 절 여기로 보내신 분은 절대 사람을 허투루 쓰실 분이 아님다.”


 “어머, 그럼 네 말마따나 ‘미숙한’ 네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모름다. 하지만 전 그분의 판단을 믿습니다. 제가 미숙한 건 사실이지만, 그분은 저보다도 저를 더 잘 아시니까요.”


 그래, 박사는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안다.


 박사는 그런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 제이 그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와서 제이도 그간 로도스 아일랜드가 걸어온 길을 봤다. 훈련을 하고, 작전 기록을 보고 배우며 로도스 아일랜드가 용문을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해줬는지 알 수 있었다.


 리유니온의 습격.


 체르노보그의 코어를 용문에 들이박으려 하는 정신 나간 짓거리.


 그 습격을 로도스 아일랜드는 막아냈다. 단신으로, 적의 수장에 맞서서.


 그건 용문이 로도스 아일랜드에게 빚을 진 거다. 용문의 다른 높으신 분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이는 그 기록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건 쉽다.


 그러나 남을 위해 제 목숨을 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로도스 아일랜드는 그걸 해냈다.


 왜? 그들이 삶에 의욕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 더 소중한 이타심 가득한 사람들이라?


 아니.


 결코 그럴 리 없다. 제이가 와서 본 로도스의 오퍼레이터들은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냥 편안한 거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자기 목숨이 소중한 줄 아는 그런 사람들. 그들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비하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듯.


 그 평범한 사람들이 한 명에게 감화되어 움직인다. 하나로, 하나의 목표를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박사.


 그는 그것을 해낸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다르다. 


 세상에서 굳이 성인군자라 할 만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그를 선택할 터.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이 성인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들에 대한 평가는 날카로우면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유독 박하다. 박사는 그런 인물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부당하게 박사가 모욕당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그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켜 준 사람에게 그 정도도 못해서야 어디 가서 용문 사람이라고 말할 수나 있겠는가.


 “너, 기세는 당당한 주제에 논리는 한없이 빈약하구나?”


 “맞슴다. 솔직히 저도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 때 얼굴에 철판 깔고 말씀드리는 거거든요. 그래도 절 여기로 보내신 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제가 여기로 오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정말 그런 겁니다. 그분의 말씀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아가씨, 부탁드립니다. 제가 모자란 거지 그분은 결코 욕을 들으실 만한 분이 아님다. 그러니 그 말씀만은 거둬 주세요. 다른 건 전부 제 잘못임다.”


 “너는 너 자신을 못 믿어도 그 사람은 믿겠다고? 네 것도 아닌 신념을 그렇게나 믿고 싶니?”


 “예.”


 “하!”


 제이의 대답은 단호했고, 조피아는 질 나쁜 코미디라도 본 듯 코웃음을 쳤다. 둘의 대립은 여전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난 제이 씨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아.”


 “뭐?”


 이번엔 조피아의 고개가 마리아 쪽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얘는 또 왜 이래, 라는 듯 골치가 딱딱 아픈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도 정말 엄청 기사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경기 기사가 된 건 아닌걸. 그냥, 그냥……. 내가 기사가 되겠단 마음은 마가렛 언니에게서 빌린 거야. 언니가 없으니까 나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그저 언니가 돌아왔을 때 쉴 수 있는 장소를 지키고 싶어서…….


 하지만 이 마음에 후회는 없어. 내가 경기 기사에 나간 것도 후회하지 않고, 다친 것도 후회하지 않아. 비록 남을 보고 흉내 낸 거라 해도, 이 마음만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


 “무, 물론 나도 제이 씨의 방법이 옳다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어서 나아서 다시 경기에 나갈 거야. 나도 니어 가문 사람인걸. 포기하지 않을 거야. 마가렛 언니가 그랬듯이.”


 “마리아, 너 정말…….”


 조피아는 그야말로 몸속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기라도 할 듯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이를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너, 나랑 한판 붙자.”


 “언니!”


 놀라 소리치는 마리아를 손을 뻗어 제지한 뒤, 조피아는 다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제이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실상은 아까부터 단 한 차례도 서로 시선을 피한 적 없는 둘이었다.


 “미안한데 난 내 말 취소 안 해. 아니, 취소 못 해. 그 사람이 네게 있어 어떤 은인이나 뭐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는 선의는 없느니만 못한 거야. 네가 아무리 의지가 굳고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해도 의미 없어. 고작 그런 믿음만으로 일이 잘 풀릴 만큼 기사 스포츠는 호락호락한 건 아니니까.”


 “…증명해보라는 검까, 아가씨를 상대로.”


 “왜, 내가 여자라서 싸우기 싫어?”


 “설마요. 상당한 실력자이신 거 같은데. 거기다 드물게 왼손잡이시기도 하고요. 저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둔하진 않슴다.”


 순간 조피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보이진 않았지만 마리아의 눈에도. 적어도 눈썰미는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왼손잡인 거.”


 “그야 뭐 보면 알죠.”


 “…….”


 그러니까 그 보면 아는 걸 어떻게 했냐는 건데.


 조피아는 더 묻길 그만뒀다. 정말 회화력은 1도 없는 남자라고 속으로 욕하면서.


 “좋아.”


 “조피아 언니…….”


 마리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그 목소리엔 체념만이 가득했다. 조피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 제이 역시 물러설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미 멈출 수 있는 선은 진작 넘어버린 지 오래였던 것이었다.


 “어디 증명해봐. 참고로 봐줄 생각 따윈 없으니 칼침 맞고 후회나 하지 말고.”


 “예에.”


 “밖으로 나와. 그리고 마리아! 너도 나오고. 심판 좀 봐줘.”


 바람처럼 나가는 여기사와 그녀의 뒤를 따르는 후줄근한 차림의 잿빛 남자.


 “이씨……. 언제는 침대 밖으로 나오면 묶어버린다고 했으면서…….”


 그런 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리아는, 잔뜩 볼을 부풀린 채 목발을 찾느라 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



조피아와 마가렛의 등장.


제이의 등장으로 사건이 달라져서 마리아는 셰브치크에게 완패한 상태.


다음화는 제이와 조피아의 대결.


서로 싸울 명분도 있고, 물러날 이유도 없으니 전투씬 멋지게 그려내보고 싶네요.


이번화의 포인트는 3가지.


1. 제이의 신념

2. 마리아의 신념

3. 제이와 맞서는 조피아


조피아가 좀 표독스럽게 나온 감도 없잖아 있는데...


솔직히 끔찍하게 아끼는 여동생이 눈앞에서 피투성이로 박살난 게 바로 어젠데


웬 말뼈다귀 같은 애가 와서 도와준다느니 뭐니 얼빠진 소리 해대면 조피아 고모 누나 성격에 빡치지 않을까요? 그냥 그렇다고 칩시다.


제이가 합류한 건 대충 용문에서 리유니온 사건 다 마무리 된 후라고 생각하고 전개 중입니다.


이번 화는 전투씬 바로 전이라 나름 공들였습니다.


재밌게 봐주시고 감상 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