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https://arca.live/b/arknights/5676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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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맞네 진짜.


내가 쓴 글이지만 꼴도 보기 싫어 일기장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힘 없이 하늘을 날았던 일기장이 처량하게 바닥을 굴렀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평생 팔자에도 없을 일기 숙제나 하고 있는 내 처지가 우스워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하."


침대에 누워 바닥을 구르는 일기장을 가만히 쳐다봤다.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바닥에 버려진 일기장이 아이러니하게 평화로워서 견딜 수 없이 꼴 보기 싫었다.

일어나서 발로 차 버릴까도 싶었지만, 관뒀다. 이런 것 하나에 짜증 내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이 어이가 없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가는 대로 신나게 적들을 썰어재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래, 이건 전부 박사. 그 이상한 남자 때문이다.

첫 만남부터 입만 번지르르하게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던 남자.

내가 밀어내도 끈질기게 달라붙던 오지랖 넓은 남자.

그리고 나를.... 쯧.


고개를 저어 쓸 때 없는 상념들을 지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 미친 놈을 생각해봤자 나만 손해겠지.

잠에서 깬 지는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드물게 몸을 점등하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오래간만에 침대에 누워, 습관이 들 것 같은 나태를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결국 침대에만 누워 있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아 침대 맡에 놔두었던 내 애검을 잡아 들었다.

이제는 어디서 얻었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한 검이지만, 그럼에도 이것보다 내 손에 잘 맞는 검은 없었다.

언제부터 함께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도, 이 검을 손에서 놓는 날은 둘 중 하나 될 테지.

검이 부러지거나, 내가 죽거나.


늘 그랬듯. 칼집에서 검날을 뽑아냈다.

수 백만 번도 더 해온 듯한 일을 하듯, 칼자루를 쥐었다. 손잡이에 감긴 손가락의 감각이 여전히 익숙하다.

조금 힘을 주어 칼날을 뽑았다. 서슬 퍼런 칼날이 내 얼굴을 비춘다. 하루도 빠짐 없이 칼날을 손질하고 있는 보람이 있다.


한 자루의 검을 잡고, 허공을 가볍게 베었다. 언제나 느껴지는 검의 손맛이 그립지만,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베는 것으로 그 손맛을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눈 앞에 그려지는 익숙한 독투의 궤적에 따라 허공을 조금 베었다.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일전의 전투. 쌍검을 들고 내 목을 물어 뜯으러 달려드는, 검은 늑대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눈 앞에 쌍검의 궤적이 날라들어온다. 노리는 것은 내 목과, 허리.

막지 않으면 죽음이오, 막으면 방어 째로 꿰뚫리리라.

눈 앞에 떠오른 쌍검의 궤적을 따라, 최선의 방어를 취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마 실전이었다면, 이대로 목과 허리가 베여 세 동강이 나 죽었으리라. 체르노보그에서의 그 때처럼.


가볍게 손 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일까, 변명에 가까운 핑계를 대며 검을 고쳐쥐었다. 역시, 그립감이 별로다.


결국 내 죽음으로 결말 난 독투를 관두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역시, 완전히 해진 검 손잡이로는 불안정하다.

마지막으로 검집 째로 검을 크게 한번 휘둘렀다. 역시, 손잡이가 망가져 전체적인 무게중심마저 망가졌다.


내가 배정 받은 이 방 안에는, 침대를 제외한 거추장스러운 가구는 진작에 치워버린 지 오래다. 

검을 휘두르는데 방해되는 것은, 전부 치웠다. 전부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


...아, 이건 남아 있나. 

그나마 치우지 않은 것이 있다면, 책 하나 없는 책상과 그 위에 얹어 놓은 의약품 더미 정도.

이것도, 박사가 남겨둔 유류품들이다. 조금 있다가 돌려줘야 할까. 아니, 그럴 의리는 없지.


의약품 더미에서 새 붕대를 찾아, 검 손잡이에 감았다.

근신 처분을 바로 받기 직전의 전투에서 무리하게 검을 사용하다보니, 원래 검 손잡이를 감싸던 가죽 역시 잔뜩 헤져 풀어져버렸다. 어제 하루 종일 매달려 수리해보려 했지만, 이 한 자루 쪽은 회생 불가다. 결국 가죽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붕대를 감기로 결정했다. 이 붕대도 고작 임시 대비에 불과한 미봉책이지만, 없는 것 보다 낫다.

원래라면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내 애검을 수리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검을 옆에 놔두고, 로도스에 들어올 때 받았던 휴대용 단말기의 화면을 켰다. 

늘 그렇듯, 메세지가 와 있다. 박사에게서다.


[가드 오퍼레이터 라플란드에게....]


화면을 보자마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늘 뻔한 시동어로 시작하는 그의 메일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할 지경이다.

하지만 내가 길게 답장을 보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렇게 내가 대놓고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음에도, 이 이상한 고용주께서는 지나칠 정도로 나에 대한 관심을 보내주고 있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싫게 된 것은 아니니, 딱히 상관 없었다. 

처음 경계했던 대로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은 아니었으니.


오늘은 박사의 개인 경호원이라고 하는 레드라는 꼬맹이와 대련을 하기로 했다.

어제 얌전히 샤이닝이라는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박사가 내건, 일종의 포상이다.


하지만 딱히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박사의 개인 경호원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가 레드라는 꼬맹이를 대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애를 대하는 태도다. 아마, 또 보나마나 '인연맺기'라니 뭐니 하며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남자는 내 고용주이며, 일단 나는 불행하게도 그에게 빚을 진 상태다.

차라리 그 남자를 죽이고 빚을 청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딱히 그 남자를 죽이고 싶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청산할 수있는 마음의 빚이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거다.


결국, 그의 요건대로 한 달의 시간을 보내주고 마음의 빚을 더는 김에,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기로 했다.

이 곳으로 강제로 끌려올 때부터 느꼈지만, 이 로도스는 엄청난 녀석들 투성이다.


날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켈시라는 늙다리도 엄청났고, 귀티가 철철 흐르던 실버애쉬에게는 검까지 놓쳐가며 져버렸다.

...거기다 텍사스와도 재회할 수 있었으니, 딱히 여기를 떠나고 싶지는 않다. 

여기에 남아 박사가 제안한 대로 꾸준히 대련을 해나가다보면, 분명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보호만 받고 도망치는 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토끼 하나 못 잡을 것 같은 저 약골에게 보호만 받고 끝낼 수는 없다. 

이 마음의 빚은, 어떤 식으로도 반드시 갚고 말리라.


가슴 쪽에 묶여 있던 붕대를 풀었다. 

텍사스에게 베인 상처가 꽤 깊어, 한 동안은 환자 신세였지만, 이제 몸상태는 대충 완치된 거 같다. 

늘 그랬듯, 내 동반자나 다름 없는 검을 챙겨 허리춤에 맸다.

보모 노릇은 사절이니, 금방 끝내고 돌아올 생각이다. 


박사의 메세지에 대충 답장하고 나는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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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금방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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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Red.638]

박사님, 말씀하셨던 대로 훈련장에 도착했답니다.

준비도 전부 끝 마쳤고 컨디션도 최상이랍니다.

약속하셨던 대로, 오늘 제가 이기면 다음에 같이 놀러 가는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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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ed.710]

그럼요, 레드가 가고 싶어했던 용문의 놀이공원에 같이 가도록 해요.

그래도, 오늘 다치지 않기로 약속하는 거에요. 알겠죠?


추신)그리고 오늘 대필은 누가 해줬나요? 역시 프로방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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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Red.639]

아니다. 레드가 직접 썼다.

절대 아미야가 옆에서 말해준대로 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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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아 반갑소. 

이번 부터 Chapter 2 시작. 일단 절반으로 나눠서 초반부만.


결국 고심해본 끝에, 이런 형식으로 가볼 생각이다.


라플란드의 일기장/소설/메일의 형식으로. 단, 메인은 소설과 메일이라 일기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략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소설이 추가됐으니 작업속도가 조금 더 늦어질 거야.

아마 이런 식으로 조금 짧게 쓴다면 1일 1작도 가능하겠지만, 글쎄. 이건 노력 해봄.


일기장은 무조건 저런 식의 손글씨 컨셉. 

라플란드 글씨체가 이쁜 건 일단은 의도한 사항. 그리고 이미지를 붙여놔야, 명챈 대문이 안 붙어서 이 방식이 편하기도 하고.


메일 형식이 나쁘지 않다는 투표 결과가 많았지만, 점점 줄어드는 추천과 조회수를 보면 대강 느껴짐.

아 이거 질리는 구나, 하고.


그리고 아주 날카롭게 지적해준 대로, 메일의 형식으로만 글을 표현하다보니 역시 두 사람의 감정교류가 엄청 적어진 거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서 결국 이런 식의 혼합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고.


저번 편에서는 아무런 표시도 없이 왔다갔다하면 적응 안될거 같다고 고민했는데, 그럼 앞으로 모든 편을 혼용해서 쓴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아마 0.5편은 이제 메일만 나오거나 보고서만 나오거나 하는 식의, 소설이 없는 진행방식으로 나가는 화에 0.5를 붙일 생각.


아 참고로, 샤이닝이 상담사로 나오는 건... 로도스에 딱히 정신과 의사라고 나오는 인간이 없고, 샤이닝 이미지가 상담사랑 너무 잘 어울려서...? 아무튼 그럼


그리고 소설이 길어질거 같아서 끊기 힘들면 전/후로 나눌 거고.

뭐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잘 부탁함.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