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나아간다.

등불은 일찌감치 꺼졌지만, 중요치 않다.


해사들이 길을 열어주는 듯하다.

그녀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를 방해하는 건 없다.


모든 길이 단 한 곳으로 이어진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더없이 익숙한 노랫소리지만, 더없이 불길하다.

이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존재는, 스카디가 맞을까?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면,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이 치솟는다.


이건 그녀가 아니다.

네가 아는 그녀는 이제 없다.

그녀를 죽여라.

이 세상을 구해라.


속삭임이 들려온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어디로 향하건, 그녀에게로 가까워진다.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동굴이 보인다.

밝은 동굴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노래부르는 그녀가 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다.

저 존재는, 내가 아는 스카디가 아니다.

저 존재를 막지 못하면, 우리는 멸망을 피하지 못할 거다.


저것을 죽여라.

저주받을 존재를 이 땅에서 몰아내라.


이 대지를 위해, 싸워야 할 때다.




뭐가 잘못된 걸까.

준비가? 내 전략이? 이 대지가?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그녀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내게 다가온다.


다가오지 마.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채찍질한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가 다가온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달려나간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랑곳않고 달려간다.


동굴 안을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사라진다.


잠시 뒤,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달려간다.


도망칠 수 없어.


어디를 향하건, 그녀의 목소리는 앞에서 들려온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모든 곳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앞에 빛이 보인다.

안에서는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등뒤에서 빛이 밝아온다.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걸어간다.


그녀가 보인다.


스카디가 눈물을 흘린다.

스카디의 모습을 한 그것이, 웃음짓는다.


"박사, 나와 혈족이 되자."

그녀가 속삭인다.


도망쳐라. 그녀를 죽여라.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도망가라. 숨어라. 죽여라. 싸워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없이 고개를 젓는 것 뿐이다.


상처받은 얼굴로, 그녀가 내게서 멀어진다.


내 말을 듣는 건가?

안도감이 찾아온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잠시 느껴졌던 안도감이 산산조각난다.

사방에 벽만이 가득하다.


나갈 수 없다. 이곳에 완전히 갇혔다.

저 저주받을 존재와 함께.


그녀에게서 최대한 멀어져, 벽에 붙어 주저앉는다.


그녀는 방의 반대편 끝에 주저앉아, 노래를 부른다.

무슨 의민지 알아들을 수 없다.

너무나 슬픈 노래다.





정신을 잃은 건가?

그녀는 어디에 있지?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다.

그녀에게 다가가자, 가슴이 들썩이는 게 보인다.

잠든 걸까? 아니면 그저 나를 흉내내는 걸까.


그녀를 죽여라.


지금이라면 그녀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가녀린 목이 보인다.

내 힘으로 저 목을 짓눌러, 그녀를 죽일 수 있을까?


저 존재를 죽여서, 이 대지를 구원해라.


서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목에 가져다댄다.


따스하다. 부드럽다.


뻗은 손에 힘을 줘 짓누른다.

체중을 담아 짓눌러본다.


그녀가 눈을 뜬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그녀의 숨소리는, 한참 전부터 들려온 적이 없었음을.


놀랍도록 평온한 얼굴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가 내게 손을 뻗어온다.

눈을 질끈 감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손이 내 후드를 조심스레 젖힌다.

내 마스크가 벗겨진다.

내 맨얼굴이 그녀에게 보인다.


손에서 힘이 풀린다.

그녀가 일어나 앉는다.


쓸리고, 찢어지고, 헤져 넝마가 된 내 겉옷이 조심스레 벗겨진다.

스카디가 나와 마주앉는다.


바지의 벨트가 풀어진다.

내 와이셔츠의 단추가 하나하나 풀린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옷가지를 조심스레 벗겨낸다.

그녀의 손길이 너무나 달콤하다.


"박사, 나를 거부하지 마."

어느새 알몸이 된 내게, 그녀가 속삭인다.

"혈족이 되자. 하나가 되자."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그녀를 거부한다 한들, 바뀌는 게 있을까?


나는...왜 그녀를 거부하는 걸까?


스카디의 손길이, 내 몸에 닿는다.


내 손등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내 어깨에, 목덜미에, 귀에, 등에, 옆구리에, 허벅지에, 다리에, 발등에, 그녀의 손길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인 그 손길.

너무나 황홀하다.

내 입에선 신음성이 새어나온다.


이 황홀함이 너무나 두렵다.

몸을 움츠려보고, 팔다리를 휘두르고, 몸부림치고, 비명지르며 그녀의 손길에서 도망치려 해본다.


아랑곳않고, 그녀의 손길이 내 온몸에 닿는다.


아찔할 정도의 쾌감이 내게 닥친다.


그녀가, 다시금 말한다.

"박사, 나와 혈족이 되어줘."


눈을 감아라. 귀를 닫아라. 그녀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 도망쳐라. 싸워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온몸에 느껴지는 그녀의 손길.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얼굴.

황홀함, 두려움, 쾌감, 기대감...

이 모든 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힘없이, 하지만 분명히,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얼굴에 비애가 떠오른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나를, 이 세계를 망가뜨리려 하는 그녀가 너무나 안쓰럽다.


"박사...더는..."


그녀의 몸이 일순간 꿈틀댄다.

불길하다. 내 이성은 이 모습을 더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서서히,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촉수가 내게 짓쳐온다.

하나하나가 스카디의 손가락을 연상시킨다.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저것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체 왜?


하나의 촉수가 내 몸을 매만진다.

두 개, 네 개, 여덟 개, 이윽고 수많은 촉수가 내 몸을 쓰다듬는다.


"읏...스카...디.."

아까까지 느껴지던 그녀의 손길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 온몸에서 느껴진다.

그녀의 애정이, 사랑이, 폭력적인 쾌감이 되어 나를 휩쓴다.


"박사...이대로 함께 있자..."

그녀의 의지가 내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박사, 혈족이 되자."

그녀가 내게 말한다.


대답할 겨를이 없다.

고개를 젓고 싶지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입에서는 의미없는 교성만이 흘러나오고, 온몸이 쾌감에 경련한다.

무수히 많은 촉수가 가져다주는 음란한 쾌감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따스한 애정이, 조심스러운 걱정이, 안타까움이, 미안함이, 나를 간신히 유지해준다.


신음과 비명을 지르느라 쉬어버린 목소리로, 스카디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스카디의 손길에 감각을 기울인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느끼는 게 그녀라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가져다준다.


나를 위해, 그녀를 위해, 이 쾌락의 향연을 만끽한다.

팔다리를 단단히 붙잡힌 채, 온몸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만끽한다.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는 그녀의 의지를 느낀다.

귓가에서 들리는 음란한 철벅거림 속에서, 그녀의 속삭임을 듣는다.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마주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를 그저 조심스레 어루만지기만 하는 손길에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만다.

넘쳐나는 쾌락이 내게 음욕을 불러일으킨다.

"스카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그녀가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스카디가 저런 표정을 짓던가? 위화감이 든다.


촉수 하나가, 다리 사이를 향한다.

음욕이 이성을 짓밟는다.

다가올 환희를 예감하며, 그녀를 다시금 부른다.


촉수가 멈춰선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쾌락조차 압도하는, 달콤한 선물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한 그것이, 내게 닿을 듯 안 닿을 듯한 거리애서 맴돈다.

장난스럽게 움직이며, 나를 애태운다.


비통함을 느끼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말한다.

"하나가 되는 거야. 영원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얼굴이 환희로 물든다.

이건, 그녀가 아니야.

나는 뭘 한 거지?

눈앞에 있는 존재는 스카디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금 전까지, 그 안에서 그녀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는 저것은...

두렵다. 증오스럽다.


그 저주받을 것이 말한다.

"■■■■■■■■■■"

속삭임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마음이 타락해간다.

나는, 우리는, 뭘 하고 있었지?


의식이 확장된다.

모든 것을 깨닫는다.

이해의 너머 아득한 안식 속으로...

정신차려

그들의 울부짖음. 공명하는 의식. 발광하는 지성...

정신차려

별과 달의 화음. 물결치는 하늘. 흔들리는 노랫소리...

정신차려


무언가 따스한 게 느껴진다?느껴진다?느껴진다?



메아리치는 별의 바다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

스카디.

그립고, 사랑스럽고, 따스한 그녀가 나를 본다.



숨을 몰아쉰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정신을 차린다.

눈앞에 있는 그것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이 보인다.


"박사...미안해..."

그녀가 말한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나는 잠시 우리가 되었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면, 그녀는 그녀로 존재할 수 있다.

그녀와, 하나가 되자.


잠시 뒤,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느껴진다.

지고의 쾌락이 나를 집어삼킨다.

두려움과 행복감으로 가득 찬 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정신을 잃는다.




눈을 뜨면, 눈앞에 그녀가 있다.

나와 그녀는 하나가 된 지 오래지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실히 느낀다.

영원한 쾌락 속에서, 그녀를 느낀다.


내 세계에서, 존재하는 건 나와 그녀 둘뿐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