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질감. 

성질이 서로 비슷해서 익숙하거나 잘 맞는 느낌.


인간은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에게 더욱 편안함을 느끼는 법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그 인간의 집단에 불과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같거나 흡사하다는 느낌을 가진 자들에게 끌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동질감이 반드시 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성질에 이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가지게 '될 것'에 이끌리게 될 수도 있다.

사람은 욕망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자기보다 우월한 인간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동질감은 크게 2가지 형태를 빚는다.


내가 저 사람과 같아지고 싶다.


혹은


저 사람이 나와 같아졌으면 좋겠다.


.

.

.


"라다. 부탁 하나만 할 수 있을까?"


"언니. 여기서는 굼이야!"


  쾌활하게 웃는 라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금 빛의 아름다운 벼의 색과 같은 밝은 금발이 화사한 단발로 포인트를 살렸고 그 위로 우르수스인 특유의 귀가 귀엽고 앙증맞게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옆을 장식하는 귀엽게 달린 사탕 모양의 머리핀과, 그 아래로 내려가 보이는 쾌활한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웃었다. 화사하게 웃는 라다의 눈웃음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좀 더 밑으로 시선을 내려 보이는 물이 묻은 앞치마와 장갑을 보니, 열심히 요리를 하던 중에 나와 준 모양이다. 


"나탈리야 언니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내가 할 수 있으면 뭐든지 해줄게!"


  허리에 손을 얹고,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에헴, 하며 자신을 뽐내는 듯한 라다의 모습에, 미소로 대답했다. 요즘은 이렇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라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라다는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귀여운 막내를 위해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혹여나 라다가 내 손목을 볼까 봐 조금 급하게 손을 뗐다. 박사와 상담을 했을 때보다 더 늘어난 상처를 라다가 본다면, 분명 슬퍼할 게 분명했으니까. 더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럼, 혹시 좋은 찻잎이 있을까?"


"응! 있어! 마침 마터호른 아저씨가 선물로 가져온 찻잎이 있어. 조금 줄까? 과자는?"


"라다... 굼이 추천하는 게 있다면 좋을 거 같아."


"응! 그럼 엑시아 언니한테 받은 애플파이가 있어. 조금 식었으니까, 내가 따뜻하게 데워서 줄게!"


"고마워."


  갑작스럽다고 해도 할 말 없는 내 부탁에도, 라다는 활짝 웃으며 기꺼이 무리를 해 내 부탁을 들어줬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인간인데... 하지만, 이를 겉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저번에 말한 티타임을 준비하려는 거야? 나 언니들이랑은 티타임 가져보는 건 처음이야!"


  라다가 활짝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제 중학생인, 게다가 평민인 라다가 티타임이라는 귀족들의 허례허식적인 시간을 가져봤을 리 만무했다. 무시가 아니라 이해다. 그럴 수 있다, 라는 생각 정도. 그러니 학생회장이었던 시절의 나였다면, 지금 라다의 말에 웃으며 '그럼, 굼이 좋아할만한 다과를 준비해야겠네.'라며 라다를 기꺼이 티타임에 초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더 이상 귀족이라 자칭할 자격이 없으며, 티타임을 즐기며 웃고 떠들 자격도 없다. 나는 죄인이다. 행복할 자격은 없다. 내가 행복하게 웃고 떠들고 있으면, 나 대신 죽은 우르수스의 다른 귀족과 학생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저주할 테니까. 


"...미안해. 이번엔 그게 아니라, 박사의 비서 오퍼레이터로 일하기로 해서 박사를 위해 준비해볼까 싶어서 물어본 거야. 티타임은.... 다음에 안나에게 하자고 해보는 건 어때? 안나는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 거야."


  그래서 라다에겐 미안하지만, 티타임을 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전했다. 이 자리에 없는 안나에게는 책임을 떠넘겼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없어도, 너희들은 원래부터 친했으니까.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티타임은 너희 셋이서 마음껏 즐기렴. 그 자리에 나를 위한 초대장은 없을 테니까.


"뭐~?? 나탈리야 언니가 박사의 비서 담당이야?? 좋겠다!"


  라다는 그 말을 듣더니, 어깨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듯, 내게 맡겨! 라는 말을 끝으로 먹음직스러운 애플 파이와 고급 찻잎을 가져왔다. 아까보다 더욱 기합이 들어간 것을 보면 박사가 라다에게 얼마나 좋은 어른으로 남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나만 박사가 훌륭한 어른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라서. 


  라다가 가져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애플파이의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한 것도 잠시, 나는 라다에게 감사인사를 남기곤 애플파이가 담긴 상자를 받아들었다.


  오늘은 박사의 비서 오퍼레이터에 자원하여 그의 비서 담당이 된 날이다. 원래 항상 박사의 비서 오퍼레이터를 맡는 인원은 지금 '모종의 사정'으로 그 일을 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공석이 된 비서 오퍼레이터 자리를 내가 자원했다. 쉬운 일은 아닐테라고 인사부의 직원분은 경고했지만 괜찮았다. 그가 격무에 시달리는 만큼, 그는 하루 종일 집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릴 그의 업무를 보조하는 비서 오퍼레이터가 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늘은 그와 단 둘이서 하루 종일 있을 수 있는 날이라는 것. 


  그러니 이번에야 말로 그에게 죄를 인정받고 죽을 수 있을 날이 될 거라는 것. 웃음이 나왔다.


.

.

.


  오늘 아침, 또 다시 같은 꿈을 꾸었다. 내 목을 조르는 하얀 테디 베어의 꿈을 꿨다. 새하얀 재가 되어버린 무도회장, 저주처럼 나의 몸에 들러붙은 테디베어들의 잔해. 그리고 나를 향해 저주를 내뱉는 '하얀 곰인형'.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다. 죽어 마땅할 그 하얀 곰인형의 말마따나, 전부 내 잘못이다. 깔끔하게 인정했다.


  나는 죄인이다. 내가 모두를 죽였고, 파렴치하게 나 혼자만 살아 남았다. 모두의 시체 위를 딛고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할 만큼, 나는 떳떳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구차하고 이기적인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겁쟁이였다. 이렇게나 스스로의 죄를 잘 알고 있고, 그런 죄를 지은 내가 이토록 혐오스러운데 그럼에도 죽고자 하는 용기가 없어 단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그런 추악한 겁쟁이.


  그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정.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악인이며, 그러니 모두의 앞에서 회개하며 목을 매달며 죽어야 할 존재라는 인정. 나는 그게 필요 했다. 


  바보 같은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상담에서 했던 박사의 말처럼, 책임을 전가 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라도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것 만은 확실했다. 누군가 한번만 더 나를 증오한다면, 나는 기꺼이 죄인으로서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거라는 것. 하지만 아무에게나 들어서는 소용 없었다. 그랬다간, 또 나는 구차한 이유를 붙이며 손목에 생체기만 낼 것이 분명했다. 


  ....박사. 내가 아는 한, 가장 현명하고 성숙한 어른. 그리고 우리를 제외하면, '사건'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사람. 그의 인정이라면, 나는 분명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박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실망스러웠다. 그는 나와 다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뿐이야. 그도 나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절망할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던 차에 소식을 들었다. 박사가 저지른 치명적인 지휘 실수로 인해 로도스의 작전이 크게 실패했다는 소식. 그로 인해, 로도스에 막대한 손해가 발생했고 심지어 몇몇 오퍼레이터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 그리고, 그 중 '라플란드'라는 이름의 한 오퍼레이터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큰 수술을 받고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소식.


  그리고 사실이 아닐 지 몰라도, 박사는 '하얀색'을 좋아한다는 소식까지. 그것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거다. 이번에야 말로 그는 분명 좌절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그는 나와 같아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사는 분명 훌륭하고 성숙한 어른이다. 분명 그라면, 나에 대해 처절할 정도로 잘 파악하고 있을 테고. 그에게 죄를 인정받는다면 나는 그 때야말로 활짝 웃으며 목을 매달고 죽을 수 있겠지. 


"~♪. ~♩♬"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복도를 지나다 몇 명 정도, 아는 얼굴을 마주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은 나를 기억하고 인사에 화답했고, 아주 가끔은 내 모습에 놀란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부에서 가벼운 일을 거들어주며 나름 겉으론 정중하고 친밀하게 대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던 적이 없었나? 기억을 더듬었지만 딱히 걸리는 점은 없었다.


  박사의 집무실 앞에 섰다. 1주일 정도 전에... 아마 8일 정도 전에 상담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상태일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기대가 됐다. 조금 긴장이 되어, 근처의 창문을 거울 삼아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옷가짐을 정돈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똑똑


  그리곤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두 번.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입가를 비틀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세어 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만큼, 지금 당장 박사가 보고 싶었다. 딱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덮었다. 


'박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방 안이 잔뜩 어질러져 있을까? 아니면 내가 문을 열자마자 당장 나가라며 찻잔을 집어던지진 않을까?'


  기대가 됐다.


  박사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으로 모든 것을 망쳤고, 아마도 가장 소중할 사람이 상처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는, 나와 비슷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지금 로도스에서는 박사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목소리도 간간히 들렸다고 들었다. 그도 나처럼 벼랑 끝에 몰렸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좌절한다면 어떨까? 그도 나처럼 무너져 일어서지 못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 만으로 가슴이 짜릿했다. 박사, 당신도 나처럼 된다면 그제서야 날 '인정' 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당신은 나보다 더 처절하게 망가졌을까? 그렇다면 내가 위로해줄게. 당신은 나에 대해 몰랐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알게 될 수도 있잖아?


  이성적으론 이게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행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진심 어린 걱정을 해준 성숙한 어른인 그가 이렇게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 했는데, 기껏 하는 생각이 그가 더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나와 같아졌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붓는 중이라니. 정말 잘 하는 짓이다. 


  만일 아버님이 날 보셨다면, 분명 머리를 감싸며 혼절하셨겠지. 하지만 죄송합니다, 아버님. 당신의 하나 뿐인 딸 나탈리야는, 어쩌면 이미 불타는 식량창고 속에서 죽었을 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여기 남은 이건...


  이미 한 번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더러운 진흙이 부글부글 끓었다. 추악한 욕망으로 점철된 끈적한 진흙이 한번 끓어 올랐다. 터진 기포가 양심에 덕지덕지 붙어, 이를 마비 시키고 뒤덮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절망했다면 나는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잠시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박사는 '하얀색'을 좋아한다. 그의 비서 오퍼레이터였던 라플란드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실버애쉬도 하얀색이다. ...그리고, 나도 하얀색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 외모는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학교에 있을 적엔 나에 대해 저속한 욕망을 품었던 동급생도 많았다. 그러니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볼품 없는 얼굴과 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사라면, 이 하얀 색도 좋아할까...?


  내가 무슨 소리를. 추악하다 못해 저속한 욕망이 끓어 올랐다. 너무 뜨겁고 더러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추악한 욕망이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싶었다. 아니, 그가 나에게 동질감을 느꼈으면 했다.


  설령 그가 나락까지 추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와요."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힘이 없는 목소리다. 역시, 당신도 지친 거야? 최대한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고 문을 열었다. 박사, 당신은 지금 어떤 몰골이야?


  박사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기대를 담아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박사의 방은 깔끔했다. 아니, 변함 없었다. 8일전의 상담의 때와, 단 한 줌의 변화도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조금은 망가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최대한 태연하게, 품에 들고 왔던 애플파이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 때는 항상 버릇처럼 사용했던, 우아하고 정중한 말투와 목소리로.


"라다....아니, 굼에게 받은 애플파이에요. 아직 식사 때는 아니지만... 가볍게 간식으로 즐기기에 좋을 거 같아서 챙겨왔답니다."


"굼이요? 나중에 잘 먹었다고 나 대신 전해줘요."


"직접 이야기 해주세요. 굼은 박사님을 잘 따르니까요, 분명 기뻐할 거에요."


"그럴까요?"


  이야기를 하며 그의 표정과 기분을 살폈다. 하지만 박사는 웃었다. 그는 전혀 망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실망했다. 하지만, 단정하기엔 너무 일렀다. 


  나 역시, 라다와 다른 이들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고 있다. 매일 밤 손목을 그으며, 같은 꿈을 꾸며, 누군가에게 죄인으로 인정 받아 죽기를 꿈꾸지만 아직 내 주변의 이들 중 내 진심을 아는 사람은 오직 박사 밖에 없다. 만일, 소냐나 라다가 내 진심을 알았다면... 아마 나는 양 손이 묶인 채 소냐의 앞에 갇혀 있었겠지.


  박사도 마찬가지다. 고작 나도 내 감정을 숨기고 정상인 '척'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성숙한 어른인 그는 훨씬 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저렇게 태연한 척, 멀쩡한 척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어쩌지?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두꺼운 가면이라도, 영원히 쓰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끈질기게 기다릴 뿐이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뭔가요?"


"...아, 옆 책상에 따로 정리해 뒀답니다. 메뉴얼도 같이 있으니 보면서 하시면 돼요."


  박사는 손짓으로 책상으로 안내했다. 박사의 책상 옆에 놓여 있는 보조용 책상이다. 그 위엔 서류작업을 위해 필요한 여려 도구와, 이미 자리잡은 서류들이 쌓여 있다. 하지만 이 난잡함 속에서도 원래 자리의 주인이 어떤 성향인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언뜻 보기엔 난잡하게 어질러진 책상 위엔, 반드시 필요한 도구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손을 가져가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오히려, 정리를 하고나면 처음부터 다시 꺼내야 해서 일이 늘어날 정도로. 그리고 이렇게나 주인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래 이 자리를 차지한 이의 빈자리가, 얼마나 박사에게 큰 지도.


  일단은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지금 당장 박사의 가면을 벗겨내려해도 소용 없다. 나는 그와 동질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지, 그를 자극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그래서 묵묵히 일에 집중했다. 의외로, 서류 작업 자체는 회장이던 시절 했던 것과 난이도적으론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렀다. 중간중간, 라다가 전해준 애플파이를 잘라 박사에게 건네주고 오랜만에 직접 홍차를 우렸다. 이를 박사에게 따라주며, 은근슬쩍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읽었다. 대부분은 박사의 몸에 가려 읽을 수 없었지만, 딱 하나는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징계], 라는 두 글자를. 당연히, 박사에 대한 징계였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징계를 가지고 그를 살짝 떠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옮기지 않았다. 이런 1차원적인 자극은 오히려 역효과다. 그저, 이 사실을 아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초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임시로 공석이 된 박사의 비서 오퍼레이터를 자원한 이는 생각보다 많았다. 운이 좋아 내가 첫 날에 배정되었을 뿐, 내일 또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오늘 그의 감정을 알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순간, 그에게 미움을 사 그의 증오 어린 외침을 듣는 것도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뒀다. 내가 원하는 건 그의 1차원적인 증오가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나에게 완벽하게 실망한 그가 나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 그래서 내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 인정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기회를 기다렸다. 점심 시간을 지나,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책상에 놓인 서류도 거의 다 해결하고 박사의 일까지 거들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박사는 그 어떤 티 하나 내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내가 간접적으로 그에게 넌지시 실패에 관련된 말을 꺼냈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넘겼을 뿐.


  또 초조함에 불이 붙었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박사. 당신은 견뎌 낸 거야? 왜....? 어째서 당신은 망가지지 않은 거야? 어떻게? 그렇게나 힘든 상황에 놓였는데...? 나는. ....나는 망가졌는데?


  순간 끓어오른 질투심에 열이 올랐다.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던 미련을 겨우 삼켰다.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 즈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사."


  익숙한 목소리. 나도 들어본 목소리다. 바이저 밖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박사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와."


  박사의 승낙과 함께 지체 없이 문이 열렸다. 녹색보다는 하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아름답지만 차가운 분위기. 그리고 빛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무색한 날카로운 눈매. 켈시 선생님이다.


"박사."


"잠깐."


  켈시 선생님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박사는 순식간에 그녀의 말을 막았다. ...박사가 처음으로,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건가?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로사 양,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이거다.


.

.

.


  박사와 켈시 선생님은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그 두사람을 따라 밖을 나서는 척 하며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조금 걸은 뒤, 곧바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들켰다간 모든 것이 끝이니 최대한 멀리서 엿듣느라 모든 것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소식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상당히 안 좋다. ...노력은 해보겠다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엿듣지 않고 박사의 집무실로 돌아와 숨었다. 그의 집무실 속 옷장은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매우 넓은 공간을 자랑했다. 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옷장에 숨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모두 호기심 때문에 옷장 안에 들어왔다는 것. 차이가 있다면,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과 달리 나의 추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 안에 숨어 박사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가 들어왔다. 자리에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바이저를 벗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이저를 거세게 집어던졌다. 던져진 바이저가 바닥에 부딪혀 다시 솟구쳤다. 이를 몇 번 반복하던 그것은 이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처량하게 바닥을 굴렀다. 드디어 봤다. 드디어 찾아냈다. 그는 지금 자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 잘못이라고,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스스로의 잘못을 곱씹으며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 분명했다. 


  나처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 한 켠을 타고 짜릿한 쾌감이 솟구쳤다. 그는 나와 같아졌다. 나 처럼 망가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퍼진 동질감이 시원하고 달달한 쾌감이 되어 내 가슴 속에 퍼졌다. 


  그거야 박사. 내가 느꼈던 절망감이 그것과 비슷할 거야. 더욱 더 곱씹어봐. 그럼 당신도 알게 될 거야. 내가 얼마나 죽고 싶어하는지. 내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당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내가, 죽어 마땅한 인간임이 틀림 없다는 것을.


  좌절한 박사를 지켜보는 것은, 태어나 본 그 어떤 명화나 영화보다 짜릿하고 아름다웠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현명하고 성숙한 어른이 이렇게 좌절해 망가지는 것을, 나와 같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추악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바로 그거야 박사.


  하지만 바이저를 한 번 집어던진 후, 박사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아 가볍게 심호흡을 한번 내쉰 뒤. 


"나탈리야.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어요. ...그만 나와요."


  내가 숨어 있는 옷장을 보며 낮게 읊조릴 뿐.


  아아, 박사. 드디어 날 '인정'해줄 생각이 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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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아 반갑소.


이야 1만자... 이건 진짜 더럽게 길게 썼네.


이제 다음화가 절정. 그리고 그 다음화가 엔딩. 예전에 쓰던 글 처럼 3~4편 내에 마무리가 된다.


이번화의 키워드는 '동질감'. 나와 같은 상태의 상대에게 느끼는 일종의 친밀감. 로사가 박사에게 이 동질감을 갈구하는 것이 이번 편의 핵심.


혹여나 로사의 정신상태가 이해가 안 된다면 그걸 위한 해설


기본적으로 로사는 현재 스스로를 용서한다, 라는 개념 자체를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음. 

원랜 이를 치료하려면 최소한의 자존감은 회복해야하는데, 로사는 이게 불가능한 상태. 지금 스스로에 대한 자기판단은 마쳤고 이는 사실 '나는 살아야 한다'로 귀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씻기지 않는 끔찍한 죄책감은 계속해서 죽어야 해, 라고 외치는 상태. 그래서 일단 저울은 죽어야 한다로 기울어 있지만 끝까지 죽지 않는 것. 


일단 로사는 지금 '죽을 수 있다'라는 해방감에 조금 기분이 풀린 상태. 그래서 초반엔 기분이 좋았던 것.

비단 해방감이 아니더라도, 박사는 망가졌을 거야. 라는 자기 경험에 의거한 판단으로 인해 어느 정도 쾌감을 얻었기 때문도 있음. 


박사와 라플란드는 일단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상태. 혹은 이성적인 호감이 아예 없더라도 박사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 중 한명 정도로. 굳이 라플란드인 이유는 내 최애가 라플인 것과 동시에, 박사가 극복해야할 엄청난 시련에 소중한 사람의 생명의 위기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 근대 막 쓰다보니 그냥 연인으로 가도 될 듯


로사가 진정 박사에게 원하는 것은 둘. 그것도 둘 중 하나. 완벽하게 절망해버린 박사가 자신과 같이 망가져서 서로 망가진 인간들끼리 무너져 서로 기댈 수 있게 되거나, 혹은 자신과 같은 상황을 겪은 박사가 자신에게 실망해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해주어 드디어 죽을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아예 박사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도 로사는 따라 죽을 수 있음.


그 상태에서 박사가 멘탈이 완전히 깨져서 아무거나 때려부수는걸 보고 환희에 찼고, 박사도 처음엔 몰랐지만 로사가 숨어 있던 것을 알게 되어 로사를 부른 상태에서 컷. 다음 편이 이제 절정이자 로사의 트라우마 치료일듯?


근대 지금 논리나 이런 게 준비는 됐지만 미흡...한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일단 단편 신청은 받지만 확정은 아님.

그래도 이 글쟁이는 시간이 걸려도 무료로 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