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arknights/53329183 > 전편이 궁금하거든 고개를 들어 링크를 보라





***


 -라타토스.


 설산 늑대가 그르렁거리는 소리.


 할아버님의 목소리는 늘 그런 느낌을 줬다. 온기라곤 조금도 없고,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만 같은.


 -네, 할아버님.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본능적으로 몸에 익은 거겠지. 이름이 불렸다는 건 할아버님의 입에서 질문이 떨어진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교육’의 시작을 의미했으니까.


 교육.


 차기 가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선택권 따윈 없다. 도망친다는 선택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 따위 있을 리 없다.


 하물며 하나뿐인 여동생과 이 고통을 나눌 수도 있단 선택지는, 애초에 거들떠볼 가치조차 없다. 그 애는 약하다. 기민하지 못하고, 남을 속일 줄도 모르며, 착해빠지기까지 했다.


 시우르스, 가엾은 시우르스.


 네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기껏 해봤자 유카탄뿐이겠지. 난 널 위로해줄 수 없어. 인간으로서의 정은 약한 모습이고,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할아버님의 진노를 사게 될 테니까. 너도 알잖니, 내가 딱 한 번 네게 엄살을 부렸을 때 그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그러니 이건 내가 견뎌내야 해.


 내가 견디지 못한다면 너 역시 이 ‘교육’의 대상이 돼 버리는걸. 그건 싫어. 네가 부서지는 꼴을 보는 것 죽는 것보다도 싫어.


 시우르스는 내겐 소중한 여동생이었지만 할아버님께는 달랐다. 할아버님께선 시우르스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건 사람을 보는 눈빛이라기보단 물건을 보는 눈빛에 가까웠다.


 부속품. 내가 망가졌을 때를 대비한.


 아니면 내가 딴마음조차 생각 못하도록 죄어두는.


 할아버님에게 있어 시우르스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날 특별 취급해주신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할아버님이 나나 시우르스를 보는 눈빛은, 애정이라기보단 차라리 증오에 가까웠다. 깎이고 깎여 나가, 이제 더 이상 깎일 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런 회색의 무언가.


 잘못되고 비틀린 관계. 그러나 누가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 감히 뭐라 할 수 있을까. 할아버님을 이해하기엔 나나 시우르스는 너무 미숙했고, 그분이 우릴 돌봐주기엔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애정 대신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쉐라그라는 이 혹한의 땅에서, 오로지 혀와 언변만으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어쩌면 그게 할아버님께서 선택한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선 전부 다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할아버님은 조용히 입을 여셨다.


 -우리가 왜 삼대 가문으로 설 수 있었는지 아느냐?


 -페일로쉬 같은 무력도, 실버애쉬 같은 재력도 없는데 말이다.


 -모르겠어요, 할아버님.


 -그건 우리 브라운테일만이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네, 할아버님.


 그런가요.


 남 등쳐 먹는 걸로 가문을 유지한다는 걸 참 좋게 포장하시네요, 할아버님. 


 속마음이 어떻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의문은 없다.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이분은 내 할아버님이기 이전에 가주다. 그 말은 이 브라운테일이란 가문 내에서 이분의 말씀은 곧 법이자 진리라는 뜻이다.


 -브라운테일이 전장에 나설 때가 언제더냐?


 -전리품을 나눌 때요, 할아버님.


 -곰과 늑대가 토끼 한 마리를 두고 싸우고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


 글쎄, 그런 얘기를 했던가? 분하지만 했을 것이다. 절대 당신이 말씀하시지 않은 건 묻지 않는 분이시니까. 빌어먹을 늙은이, 어디 노망이라도 안 드나.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어째 우리 할아버님께는 적용이 안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대답을 못 했고, 할아버님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사랑스러운 손녀를 걱정하는 것과는 아득하게 거리가 먼, 굳이 비유하자면 고장 잦은 구식 태엽 장치가 또 말썽을 부릴 때 내뱉는 한숨과 비슷했다.


 -또 대답을 못 하는구나. 멍청한 녀석. 이런 목석같은 녀석이 후계자랍시고 남은 거라니.


 경멸. 글쎄, 구태여 어린애한테 보여줄 만한 감정은 아니지. 정서 교육에 나쁘니까. 그러나 할아버님께선 굳이 실망의 기색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이 ‘교육’이라는 걸 할 때 할아버님께서 보이는 감정은 단 한 가지, 경멸뿐이었다. 내가 모든 질문에 대답은 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고 하나라도 대답을 못 한다면 어김없이 경멸이 비수처럼 날아들어 왔다.


 드르륵,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뻑뻑한 걸로 봐서 저건 두 번째 서랍. 거긴 할아버님께서 회초리를 넣어두는 곳이었다. 몸으로 때우는 건 할아버님의 체벌 중에서도 가장 가벼운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라타토스.


 알아요, 할아버님. 앞에 와서 서라는 거죠? 전 도망가지 않아요. 도망치지 않아요.


 “…토스…….”


 난 내 부모님처럼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라타토스 가주.”


 “……!”


 의식은 불현듯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마에 차가운 게 느껴졌다. 물에 젖은 수건 같았다.


 “깬 건가. 다행이로군. 끌끌, 젊은 처자가 어찌 이리 몸을 험하게 굴릴꼬.”


 낮고 걸걸한 목소리는 마치 할아버님의 목소리 같았지만, 그 목소리엔 연민이 묻어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내 정신을 점점 더 현실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할아버님이 날 걱정해주는 일 따위, 그야말로 쉐라그가 두 쪽이라고 나지 않는 한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 이미 돌아가셨지.


 위에 한가득 두꺼운 모피라도 올려놓은 듯 몸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도 좁은 굴을 억지로 디밀고 나오는 것처럼 힘들었다. 겨우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누군가가 방금 내 이마에 올린 물수건인 듯한 것을 대야에 넣고 물기를 짜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서 잘 보이질 않았다.


 “…여기는?”


 “병상이지. 아, 위치를 물어보는 거라면 아직 베이스 캠프일세. 아직 철수를 안 해서 말이야. 몸은 좀 어떤가? 머리는 안 아프고?”


 “…멍하네.”


 “마취가 깨려면 좀 더 있어야 할 걸세. 무리하지 말고 다시 자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도 되는 법이니.”


 아니.


 오히려 그 말에 흔들리는 정신을 더 붙잡았다. 내일로 미뤄도 되는 일 따윈 없다.


 “…나 좀 일으켜 줘. 그리고 물 한 잔만.”


 “괜찮겠나? 수술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돼.”


 “허어.”


 고집까지 센 아가씨로군, 뭐 그런 실례되는 소릴 하며 상대는 날 일으켜줬다. 하지만 침대 밖으로 일어서는 건 정말 무리여서 별수 없이 상반신만 일으켰다. 컵을 받으려 했는데…….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상대가 내밀어준 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것도 뻑뻑한 흙을 씹어 삼키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래도 꾹 참고 마실 수 있을 만큼 마셨다. 어떻게든 기력을 회복해야 했다.


 “계속 옆에 있어 준 거야?”


 “누구 하난 곁에서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손이 제일 남는 내가 지원했지.”


 그제야 나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안 떠지는 눈을 깜빡거리며 목소리가 난 쪽을 보니, 거기엔 한 명의 사브라인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고 각질진 피부.


 흉폭한 겉모습과는 달리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아.”


 “이런, 사브라인은 처음 보는 모양이군. 내 실례되는 짓을 했구먼.”


 “아, 아니…….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어르신인 줄 몰랐어요.”


 “마음 쓰지 말게. 딱히 상관없으니 말이야. 아까도 느꼈던 거지만 똑 부러지는 아가씨로구먼 그래. 단번에 사과하는 귀족을 본 게 얼마 만인지, 허허 참.”


 고백하자면 정말 외모 때문에 놀랐던 게 맞다. 세상에 눈 뜨자마자 사람보다 큰 허여멀건 도마뱀 한 마리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몸이 좀 더 정상적이었다면 뒤로 물러서기라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다른 핑계를 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솔직히 상대가 내 핑계를 알고도 모르는 채 넘어가 주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통신으로 목소리는 들었는데 직접 얘기하긴 처음이로군. 레인저일세, 라타토스 가주. 로도스 아일랜드 작전팀 A4 소속이지.”


 레인저. 아아, 아까 박사가 최후의 공격 권한을 줬던 그 사람 말인가. 통신 노이즈 때문에 목소리가 걸걸한가 싶었는데 원래 목소리가 이런 모양이었다. 나는 약간이나마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레인저 씨. 편하게 라타토스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네. 그럼 라타토스 양이라 부르지.”


 상대가 쉐라그 사람이 아닌 이상 하대하는 건 무례한 짓이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나이 차도 심하지 않은가. 레인저는 내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걸 확인하자 탁자 위에 있던 뭔가를 툭 쪼개더니 그중 큰 조각 하날 내게 내밀었다. 초콜릿이었다.


 “이 늙으면 자꾸 깜빡깜빡한다니까. 여기 초콜릿 좀 들게. 기운이 좀 더 날 거야.”


 “…고맙습니다.”


 겨우 손을 움직여 초콜릿 한 입 먹으니 문자 그대로 전신에 당분이 스며드는 듯 온기가 좌악 퍼져 나갔다. 한 조각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자 레인저는 하날 더 내밀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꽤 커다란 초콜릿 판 하나를 다 뱃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먹은 게 샌드위치 하나였지. 허기가 질 만도 했다.


 뇌에 당분이 들어가니 이제야 좀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자, 우선 뭐부터 확인해야 할까.


 “저 누워있은 지 얼마나 됐나요?”


 “글쎄, 한 두어 시간쯤 된 것 같군.”


 “두 시간……. 눈보라가 치고 있진 않나요?”


 “맞긴 하네만 돌아갈 수단은 마련해 놨다고 하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문명의 이기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거 아니겠나.”


 두꺼운 천막 천 너머에선 희미하게 눈발 날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레인저가 이렇게 느긋하게 말하는 걸 보니 그다지 걱정하진 않아도 될 듯했다. 사실 뭐, 엔시오디스가 생각이 있다면 우릴 이런 눈보라 치는 계곡 위에 내버려 둘 리도 없고 말이다.


 “작전에 나갔던 오퍼레이터들은요? 다들 무사하나요?”


 “큰 상처 없이 다들 무사하긴 하네만, 그 전에 보통은 자기 몸에 대해서부터 먼저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닌가?”


 “두 시간 만에 깬 거 보면 당장 죽을 부상은 아니란 거잖아요.”


 “낙관적인 건지 제 몸에 신경을 안 쓰는 처자인지 모르겠구먼.”


 젊은이들이란. 그는 그렇게 말하듯 들고 있던 작은 수첩을 탁 접어 재킷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이번 작전의 악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다들 놀라울 정도로 경미한 부상밖에 없었네. 약간의 화상과 생채기 정도가 부상의 전부니 말이지. 아, 이 늙은이는 유일하게 동상 환자라네. 사막의 밤 추위에도 익숙하다 생각했건만. 허허, 이곳 추위는 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더군. 실은 자네 간호를 지원한 것도 여기가 제일 따뜻해서야.”


 레인저는 그렇게 말하며 난로 위에 놔뒀던 주전자를 발치에 조금 부었다. 촤르륵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마 발치에 대야를 두고 발을 담그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에 조금이지만 피식 웃었다. 백전노장도 추위엔 별수 없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나중에 다른 대원들도 말하겠지만, 기회가 기회니 먼저 말해두겠네. 고맙네, 라타토스 양. 자네 덕에 큰 위기를 넘겼어. 돌아와서 들은 건데 즉석에서 지도를 그리고 계곡 내에 있는 모두의 위치를 파악했다면서? 정말 대단하네. 자네가 없었으면 계곡 내부를 헤매다가 큰 피해를 입었을 게야.”


 “그냥 어릴 때부터 알던 곳이라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별 거 아닙니다.”


 “허어, 말 몇 마디만 가지고 어디 있는지 정확히 집어내는데 그게 별 게 아니라고? 그게 별 거 아니면……. 아니, 굳이 내가 얘기할 거 있겠나. 나중에 에이야퍄들라 그 아가씨에게 직접 듣게. 자네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베테랑 재앙정보전달자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나을 테니 말이야.”


 에이야퍄들라.


 그녀의 비명. 그리고 거대한 원석충. 계곡을 뒤흔들었던 굉음.


 아무렇게나 섞어 놓은 건포도 아이스크림처럼 마구잡이로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한꺼번에 기억이 밀려들면 뇌에 과부하라도 걸리는 걸까,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하지만 꾹 참았다.


 “…그 괴물은 어떻게 됐나요?”


 “‘폼페이’ 말인가? 도망쳤다네. 이쪽의 화력이 부족했던 모양이야. 솔직히 부족하긴 했지. 기껏해야 원석충 조무래기들이나 사냥할 줄 알았지, 세상에 누가 그런 커다란 녀석을 만날 거라 예상이나 했겠나.”


 “폼페이?”


 “그 커다란 원석충말일세. 임시로 그런 코드네임을 붙였다네. 언제까지 그 괴물이니 거대한 원석충이니 부를 순 없으니 말이야.”


 레인저의 말엔 가까운 시일 내에 그것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심 말게. 거기서 몸 성히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어딘데 그러나.”


 “하지만…….”


 “괜찮네. 그까짓 놈이 제아무리 날뛴다 해도 이쪽엔 박사가 있으니 말이야. 자네도 알 거 아닌가. 한 번 당했음 됐지, 두 번은 안 당할 사람이네. 아까 스톰아이와 에이야퍄들라가 보고서를 내러 갔으니 뭔 수를 내든 낼 걸세.”


 보고서?


 그 사람, 제정신인가? 그건 일을 한단 뜻이잖아. 다쳤으면 어쩌려고? 몸도 약한 주제에.


 사람이 도를 넘으면 화가 난다기보다도 허탈하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긴 한가 보다. 몸만 이러지 않았더라도 당장 뛰쳐나갔을 거 같은데, 후우.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신랄한 소리가 튀어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놈의 일 중독은 죽어야 나으려나 보네요. 다쳤을 텐데 대체 뭐 하는 거람.”


 “자네가 막아준 덕에 박사는 별로 다치지도 않았네. 기껏해야 팔꿈치가 까진 정도지. 오해하는 것 같아 말해두겠네만, 라타토스 양. 현장과 후방을 통틀어서 가장 심각하게 다친 게 자넬세.”


 드물게 레인저는 굳은 목소리로 내 팔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내 오른팔은 어깻죽지까지 깁스로 꽁꽁 싸매져 있었다.


 “부러졌나 봐요?”


 “계속 그리 남 얘기하듯 할 텐가? 자네 몸일세. 자기 몸 하나 건사 못해서 어찌하려 그러는 겐가?”


 “하지만 안 막아섰으면 박사가 다쳤을 거예요.”


 “그게 자네가 다쳐도 된단 뜻은 아니라네, 라타토스 양. 박사가 중요한 인물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네만, 그게 희생을 정당화할 순 없어. 박사 자신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 걸세.”


 아.


 나는 그제야 레인저를 다시 봤다. 읽기 힘든 그의 표정이 아니라 그의 눈을. 강인한 빛을 쏘아내고 있는 그의 눈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나를 위해, 나에게 화를 내주고 있었다.


 “자네가 계속 그런 태도면 박사도 슬퍼할 걸세.”


 “…죄송해요.”


 “됐네. 좀 전의 말은 못 들은 셈 치지.”


 레인저는 한숨을 푹 쉰 뒤 뒤이어 말했다.


 “최소 전치 5주에서 길면 8주는 될 거라더군. 자네가 맞은 게 튀어 오른 흙덩이라 다행이었지, 돌 같은 거였으면 골절 정도로는 안 끝났을 걸세. 맞은 부위가 머리나 목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수도 있어. 앞에 나설 거면 보호 장비라도 제대로 착용하란 말일세. 의욕은 앞서는 주제에 조심성은 없으니, 쯧쯧.”


 “…….”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패턴이다 했는데 할아버님이 내게 푸념하실 때랑 똑같은 거구나. 이대로라면 분명 오늘 헤어지기 직전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게 뻔했기 때문에, 난 말머리를 다른 데로 돌렸다.


 “철수는 언제 한다고 하나요? 돌아갈 수단이 뭔진 모르겠지만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어쨌든 눈보라 치는 밤에 밖에 있는 건 이유가 뭐든 좋은 선택지가 아니니까요.”


 “카란 무역 측에서 제설용 트럭을 세 대쯤 보내줬다더군. 그것도 실버애쉬가 직접 인솔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게 큰 소리가 났으니 직접 오지 않을 순 없었겠지. 박사도 만날 겸해서 말이야.”


 끼익, 하고.


 “잠깐만요.”


 천막 안의 온기가 모조리 뽑혀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인저의 입에서 실버애쉬라는 가문명이 튀어나왔을 때부터 고개를 쳐들던 불길한 느낌은, 박사를 만나러 왔단 소리에 거의 확신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실버애쉬라면 엔시오디스 말인가요?”


 “엔시오디스? 늘 코드네임으로만 부르니 잘 모르겠네만, 혹시 자네가 말하는 그 친구가 은발의 필라인 청년인가? 카란 무역의 총수…어어, 이봐! 라타토스 양!”


 대체 무슨 힘이 솟아난 것일까. 엔시오디스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박사를 만나러 온 것 때문일까?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니 마침 마취가 풀리는지 온몸에 전류가 내달리는 듯했다. 속이 울렁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건 마취 때문이 아니었다.


 “라타토스 양! 다시 눕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박사를 만나러 가야 해요.”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듯했다. 열이 올라서 눈이 뻑뻑하니 아팠다. 눈에 있는 습기가 다 메말라버린 느낌이었다.


 “엔시오디스가 왔다면서요. 그럼 저도 가야 해요.”


 “할 말이 있다면 내가 불러오겠네! 그러니 다시 눕게, 어서!”


 누우라고?


 지금 엔시오디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라고? 그것도 박사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


 죽어도 그러진 않을 거다. 죽었으면 죽었지, 꼴사납게 누운 채로 엔시오디스를 맞이하진 않을 거다. 그에게 약한 모습 따위 보이지 않을 거다.


 그를 올려다보는 것. 그건 에델바이스 저택에서의 그 일을 떠올리게 한다. 내 품에 매달려 울먹이던 시우르스, 차가운 눈, 그리고 그보다도 더 싸늘했던 영민들의 시선.


 그리고 그의 자비. 그가 내게 걸쳐줬던 외투.


 나의 목숨, 그리고 시우르스의 목숨. 그게 모두 그의 입에서 떨어질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 그의 손짓 하나면 나는 물론이고 시우르스까지 성난 민중들의 손에 짓이겨질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봤고,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교차한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그와 나의 격차라는 걸. 내가 발악을 해도, 모든 힘을 끌어모아도, 설령 그의 품에 안긴다 해도 이 격차는 줄어들 리 없다는 것을.


 절망감, 그리고 좌절감.


 그러나 그보다도 더 화가 났던 건, 정말 완전히 졌다고 인정해버린 내 자신이었다.


 “안내해줘요.”


 “라타토스 양!”


 “싫다면 앉아 계세요. 저 혼자 갈 테니까요.”


 머리가 과열된 보일러실만큼이나 지글거려도, 


 온몸이 비명을 질러도, 다친 어깻죽지부터 오른팔 전체가 찢어지는 것 같아도,


 그래도 가야 한다.


 가서, 두 발로 당당히 서서, 엔시오디스를 마주해야 한다.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나를, 박사에게 보이는 게 싫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슬리퍼 한쪽이 벗겨져 달랑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천막 입구에서부터 싸늘한 한기가 밀려왔지만 차라리 나았다. 어차피 지글지글 끓는 머리였으니 시원할 터였다.


 “기다리게! 젠장, 요즘 젊은이들이 무모한 겐가, 아니면 쉐라그 사람들은 다 이런 겐가?”


 레인저는 서둘러 제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외투를 꺼내더니 날 단단히 감싸줬다. 그리고선 번쩍 들어 밖으로 나섰다.


 “어……. 동상 걸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럼 다 죽어가는 처자가 눈보라 속으로 기어들어 가려 하는데 손이라도 흔들고 있으란 겐가!”


 세상에 목청도 좋으셔라. 눈보라가 무서워서 피해 가겠네.


 “…고마워요, 레인저 씨.”


 “아무 말 말게. 자네가 우리 대원이었다면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았을 거 같으니까.”


 “그것도 재밌겠네요…….”


 “자네는 입으로 매를 버는 재주가 있구먼.”


 말은 그렇게 해도, 레인저는 날 들쳐 매고 눈보라 속을 걸었다. 차디찬 눈보라는 그 하나하나가 칼날이 내리꽂히는 것만 같았다. 외투에 파묻힌 내가 이럴진대 레인저는 얼마나 추울까. 그런 그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다.


 고마워요, 레인저. 제 어리광을 들어줘서. 그렇게 마음속으로나마 감사를 드린 뒤 나는 눈을 감았다. 휴식이 아니다. 박사가 있는 곳까지 길어야 1분에서 2분. 그 사이 가면을 써야 한다. 가주라는 자신만만한 가면을. 그 둘이 있는 자리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건 그전 한 번으로 충분하다.


 제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엔시오디스. 내가 갈 때까지, 제발.


 닿을 리 없는 내 간절함은 내리꽂히는 눈발만큼이나 부질없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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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타토스 특) 할아버지 생각하면 혓바닥 길어짐


라타토스에게 할아버지는 고맙긴 한데 고맙진 않은 딱 그런 관계


그러면서도 인생 멘토라는 건 부정하지 않음


레인저 출현


사실 여기서 좀 로맨틱하게 하려면 박사가 간호하거나 그랬어야 했지만, 아니면 최소 에이야라도.


근데 박사가 할일 다 제쳐놓고 누구 간호한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서 패스. 물론 신경이야 확실히 쓰겠지만.


불쌍한 여우 아가씨. 근데 제 필력이 계속 질질 끌려서 이번엔 어째 라타토스 매력이 별로 안 사는 거 같아 아쉽네요.


감상 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