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탈리야.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어요. ...그만 나와요." 


  박사의 그 말에, 옷장 밖으로 나왔다. 바이저를 집어던진 그의 맨얼굴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맨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내가 상상했던 베일 속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저것도 나름 괜찮았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빛을 찾아볼 수 없는 흐리고 탁한 눈동자. 바로 그거야 박사, 좌절한 당신의 눈동자. 이게 바로 내가 보고 싶었던 모습이야. 무너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자, 태엽이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일단은 겉으로 친절한 모습을 내보였다. 딱히 연기는 아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라면야 얼마든지 예의 상 괜찮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던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안 괜찮겠지? 박사.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당신은 이겨내지 못 할 거야, 아니 이겨내지 못해야만 해. 그래야 당신이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게 될 테니까. 그래야 당신은 나를 인정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아 이런, 그래도 너무 대놓고 웃으면 안 되는데. 입가에 걸린 미소를 가리기 위해 입을 가렸다. 이미 늦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박사가 나를 1차원적으로 증오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증오가 아니라 인정이니까. 어떻게든 그의 슬픔에 공감하는 척 하며 입을 가렸다.


"...그럼요. 괜찮아요."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이 돌아왔다. 박사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게 나오시겠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너무 뻔한 반응이라 웃음이 나왔다. 박사, 강한 척 할 필요 없어. 겨우 일으킨 불씨도 필요 없어. 다시 꺼트려도 괜찮아. 삐걱거리는 태엽이 버텨봤자, 얼마나 버티겠어. 어서 망가지자 박사. 망가져서, 나처럼 비참해지자. 나와 같아지자.


"...박사님. 제 앞에선 강한 척 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끌어 안았다. 그가 나의 웃는 얼굴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내 가슴에 끌어당긴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박사가 나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도망치지 못하게 일부러 거세게 끌어 안았다. 힘싸움에서 박사는 조금도 이기지 못했다. 박사... 생각보다 약하네. 힘으로 강하게 끌어 안아 누르니 조금 발버둥 치던 박사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래서, 상냥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스치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나쁘지 않다. 박사, 생각보다 머릿결이 좋구나.


"....놓으세요."


"싫어요."


  저항을 포기한 박사는 말로 날 타일렀다. 하지만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박사.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픈 지 알아. 얼마나 힘든 지 잘 알고 있어. 오직 나만이, 당신의 아픔에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내게 기대줘 박사. 우리, 무너져 내리는 기둥처럼 서로에게 기대자. 당신에겐, 지금 내가 필요하잖아? 


  박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품에 안았다. 성급하게 위로의 말부터 꺼낼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행동으로 그를 위로하는 것 만으로 알려주면 되는 일이다. 나는 당신의 아픔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당신도 아마 잘 알고 있듯, 당신은 지금 매우 힘들다고. .....그러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그만 날 인정해 줘. 하지만, 역시 행동 만으론 부족해. 조금 더 그가 나에게 실망했으면 좋겠어. 그걸 위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자기 실수로 모든 걸 망치고, 사랑하는 사람도 다쳤잖아요. ...강한 척 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박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몇 번이나 참았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런 단순한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이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상투적인 위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으니까. 이런 식의 위로는 따스한 위로가 아니라, 뜨겁게 달군 칼날이 되어 마음을 후벼 팔 것이다. 


  내가 내 잘못을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봤자 아무런 위로가 될 리 없다.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고작 이런 위로로 나아질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괴감에 빠져들 것이 분명했다.


  추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박사가 자신의 실패에 괴로워하고, 철저히 망가졌으면 했다. 당연히 그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인간으로서 박사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추락을 바랬다. 그가 나와 같이 망가져, 내 아픔을 공감해주고, 나의 추악함을 인정해줬으면 했다. ...그렇게, 그와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졌다. 


  그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쉬웠다. 내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것.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전부 그에게 쏟아내면 그만이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미소와 함께 자괴감이 물 밀듯 몰려왔다. 잘 봐, 박사.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추악하고 더러운 여자야. 나를 위해 진심을 다해 따스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당신을 위해 내가 준비한 이 끔찍한 위로들을 잘 봐. 그리고 빨리 깨달아 줘. 나는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이라고,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 악인이라고,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어서, 당신도 나랑 같아져. 내가 느꼈을 비참함을 느껴줘.


"나탈리야."


  박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의 따스한 목소리와는 다른, 차갑고 무감정한 목소리.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거야? 당신도 드디어 깨달았구나. 드디어, 나에게 실망했구나. 활짝 웃으며 그를 놓아줬다. 자 박사, 난 항상 기다리고 있었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봤다. 그가 드디어 날 인정해줬다 생각했으니까. 귓가에, 완벽히 무너져내리는 잔해의 소리가 들렸다. 환희에 찬 아름다운 몰락의 소리가.


  하지만.


"고마워요."

  

  박사는 또 웃었다. 아까보다 더욱 강해진 희망의 빛은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반짝였다. 시계 태엽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부셨다. 아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게 아니야 박사.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위로해준 게 아니란 말이야. 나는 연인을 사경에 헤매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당신이 나처럼 고통스러워하기를 바랄 뿐이란 말이야.


  빨리, 나한테 해야 할 말이 뭔지 알고 있잖아? 나한테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잖아 박사. 고마워요,라는 감사 인사가 아니라, 나에게 실망했으니, 나는 절대 구원 받을 길 없는 죄인이라는 저주의 말이잖아. 알잖아, 알고 있잖아. 박사. 


  ....당신은 어째서, 끝까지 나를 이렇게 실망 시키는 거야?


"하지만, 제 잘못에서 눈을 돌릴 생각은 없답니다. ...분명, 책임을 져야겠죠."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분명 내가 끌어안기 전만 해도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밝은 빛을 되찾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의 웃음이 활기가 돌았다. 고쳐진 태엽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난 것만 같았다.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다. 


  ....아니야 박사. 그게 아니잖아. 당신은 이겨낼 수 없어야 해. 이겨내서는 안 돼. ....그런데도 당신은 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고마워요 나탈리야. 덕분에 힘이 났어요."


  그의 밝은 웃음에 질투가 났다. 순간, 가슴 속에서 끓어오른 진흙이 열기를 품고 온 몸으로 퍼졌다. 안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 들었다. 진짜로 피가 끓어 몸 속에 증기가 찬 것과 같은 답답함이었다. 순간 시야에, 하얀 곰인형의 잔상이 비쳤다. 그 추악한 하얀 곰인형은 박사의 등 뒤에 떠올라 나를 조롱했다.


'바보 같은 나탈리야. 그는 너와 달라.'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에요. 전부 당신 잘못이잖아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그의 환한 웃음을 보는 순간, 내 몸을 감싸던 기분 좋은 해방감은 모조리 사라졌고 다시 내 몸을 감싸는 것은 항상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의 잔해들과 죽은 친구들의 잿더미였다. 잔상처럼 피어오른 하얀 곰인형이 입을 찢으며 웃었다. 나를 비웃고 있었다. 결국 박사에게 책임을 전가 하려 하던 한심한 나를. 이것마저 실패한 멍청한 나를.


  나와 다른 인간인 박사에게 나와 같은 것을 기대한 나의 끔찍한 자괴감을.


"당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지금 병실에서 의식도 못 차리고 있는 사람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 아닌가요?!"


  그리고 결국 폭발하여 아무렇게나 폭언을 쏟고 있는 추악한 나를.


  하얀 곰인형의 비웃음을 견딜 수 없어 소리쳤다. 그가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그의 죄를 일일이 내뱉으며 온 몸을 뒤덮는 추악함을 견딜 수 없어 손톱을 세워 얼굴을 긁었다. 일말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박사의 죄, 그의 실수로 많은 이들을 죽게 내버려뒀다는 소문. 설령 그의 죄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내가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작전에 참가하지 않았고, 박사의 지휘 실패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오퍼레이터와도 친분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살인자라 매도하다니. 양심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다. 


"....살인자. 당신이 죽였어. 당신이 죽였단 말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입은 쉴 세 없이 그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빨리 그가 망가지기를 바라며 그의 죄를 외쳤다. 박사 제발. 어서. 당신도 알잖아. 당신은 지금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잖아. 그러니까 망가지란 말이야. 어서. 무너지란 말이야. 제발. 나와 같아져달란 말이야. 나를 필요로 해달란 말이야. 제발. 제발.....


  그렇게 웃지 마. 견뎌내지 마. 이겨내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그렇게 이겨내면... 그럼 당신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랬던. 당신이 나처럼 떨어지고 고통 받기를 원했던 나는 뭐가 되는 건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죠?! 어째서.... 어째서...."


  나는 웃지 못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나는 아직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은 할 수 있는 거야? 역시, 당신은 나와 달라서. 나 같은 거의 고통은 이해도 할 수 없단 이야기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손톱으로 긁어낸 얼굴에서 고통이 화끈거리며 피어 올랐다. 눈물이 났다. 아파서 그렇다고, 거짓말로라도 얼버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한심했다. 방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짓을 했는지 자괴감이 몰려왔고, 또 이마저도 실패한 내가 너무 비참해 눈물이 나왔다. 


  더 이상 그에게 동질감을 갈구할 수 없었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강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 있어서, 나는 이 가벼운 시련조차 이겨내지 못한 약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그 사실이 비참해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끔찍한 죄책감을 나 혼자 견뎌내야 할 거라는 사실이 너무 끔찍해, 눈물이 나왔다.


"...나탈리야."


  박사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됐어 박사. 당신은 그 고통을 이겨냈잖아. 그런 당신의 눈엔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어? 나는 이제 당신에게 죽으라는 말을 들어도 죽을 수 없게 됐어. 당신은 나 따위와는 격이 다른 강한 사람이니까. 당신은 절대 나에게 죽으라는 말을 하지 않겠지. 당신도 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 거잖아, 당신처럼.

  

"맞아요. 저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 제 소중한 사람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죠. ....나 때문에."


  박사가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고개를 들어 박사를 응시했다. 눈물에 뒤섞인 시야가 얼룩져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끌어 안았다. 떨리는 그의 몸이 처음으로, 가련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를 끌어 안았다. ...따뜻했다. 설령 타 죽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따스한 모닥불처럼. 나도 모르게 이 온기가 욕심이 나 이대로 꽉 쥐어 으스러뜨리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웃고 있다고 해서, 제가 모든 걸 이겨냈다는 건 아니에요. ....봐요. 지금도 전 계속 손을 떨고 있어요. 겁이 나서. ...내가 너무나 한심하고 바보 같아 견딜 수 없어서."


"....."


  박사가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나는 아직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살인자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나처럼.


"사실, 지금 당장 울면서 병실로 달려가고 싶어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전부 내 탓이라고 울면서 외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아요. ...그 사람이 저를 용서해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박사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내가 원하는 그의 망가진 모습. 하지만, 아까와 같은 고양감은 들지 않았다. ...어째서? 박사가 드디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비참하리만큼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에 슬퍼하고 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나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직면하고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을. 


  박사는 강한 사람이다. 나 따위와는 다른 현명하고 성숙한 어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고, 스스로를 용서했으리라 생각했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무너지지 않았을 뿐이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견뎌낼 뿐이에요. 당신처럼요."


  박사가 엷게 웃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나와 같다고. 아니야 박사. 나는 당신과는 달라. 나는 당신처럼 강하지 못해. 나는 결국 이 끔찍한 스스로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이 죄를 이겨낼 수 없어. 나는 약하니까. 당신과 다르니까.


"저는 버티지 못했어요. 지금도 제 죄가 너무 끔찍해서 죽고 싶은 걸요. ....그래서 박사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죽고 싶었어요. 박사님이 절 저주하면... 그럼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에게 내 죄를 고했다. 최후의 수단이다. 그에게 동정심이라도 갈구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렇구나, 나탈리야. 힘들었구나. 그럼 차라리 죽어 버리렴. 넌 약하니까. 그에게 내 약함을 인정받으면, 난 죽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이렇게라도 나는 그에게 내 죽음을 갈구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로서, 그가 내 죽음을 용인해주지는 않겠지. 누구라도, 남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을 테니까. 


  박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역시. ....역시 이번에야 말로 나에게 환멸 했을까? 그래도 할 말은 없었다. 성의로 상담을 해줬던 대상이 자신에게 제 죽음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싶어했다니. 나 같아도 추악해서 상종하기 싫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동정해줘 박사. 너의 측은함이라도, 부디 이 비참한 나에게 적선 해줘.


"알고 있었어요. 저도 한 때 그랬으니까요. 저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 사람을 잘못된 구원 삼아 죽으려 했던 적 있어요. 그래서 알고 있었어요. 그건 분명 달콤하고 편안한 방법이겠죠. 하지만 당신은 결국, 그걸 포기하고 저에게 솔직하게 말했죠. ....그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강한 사람이랍니다."


  하지만 박사는 그런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박사는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자기도 한 때 그랬다고, 충분히 그런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고. 그렇게 나에게 처음으로 공감해줬다. 그럴 수 있다고, 긍정해줬다. 하지만, 아니야 박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박사. 난 전혀.... 나는 전혀 강하지 않아. 


"아니에요... 저는..."


"나탈리야. 우리는 똑같아요. ...당신과 나 모두, 이겨낼 수 없는 죄를 짊어지고 살고 있어요. 이겨낼 수 없는 죄를 버텨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죠. ...저도, 언젠가 이겨낼 수 없는 죄책감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언젠가 저에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똑같으니까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해요. 당신은 어쩌고 싶나요? 정말. 정말로 죽고 싶나요?"


"....."


  박사가 처음으로 물었다. 진짜 죽고 싶냐고, 나의 진심을 물었다.


  당연하잖아. 나는 끔찍한 죄인이야. 나는 살인자이며, 가해자이며 방관자다. 나는 내 자신이 착한 인간이라 생각했고, 비극을 보면 탄신 할 줄 알았으며, 난민들에게 구호물품을 보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그런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는 어떻게 살았지? 선민의식에 빠져 귀족들의 약탈을 용인하고,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라며 스스로의 눈을 가렸다. 결국 나는 위선자였다. 그리고 결국 그 위선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추악한 위선자이자, 끔찍한 살인마가 살아 있을 가치는 없잖아?


  그러니까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다고. 죽어야만 한다고. 모두에게 죄를 심판 받아 죽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요."


  박사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더더욱 눈물로 차오른 시야가 가라앉아 먹먹했다. 눈물이 하염 없이 터져 흘러나온다.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낼 수 없다. 나도 이해할 수 없게, 이미 본능에 가깝게 울부짖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아아, 바보 같은 나탈리야. 얼마나 나락으로 추락해야 만족 할 테니.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그 끔찍한 기억을 심어놓고. 너는 죽기가 무서워서 이렇게 울면서 남에게 호소하고 있는 거니.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네가 그렇게 뻔뻔하게 숨을 쉬며 살아가는 그 날은, 네가 죽인 이들이 그렇게 갈구하는 내일이었을 텐데. 역시, 너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이야. 


  하얀 테디베어가 입을 찢으며 나를 조롱했다. 눈을 감아도 비치는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귀를 막아도 들리는 그 끔찍한 목소리에 당장 머리를 박고 기절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박사는 분명 나에게 말했다.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고. 


  바보 같은 이야기인건 안다. 방금까지 그에게 내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싶어 했고, 그가 망가지기를 진심으로 바랬던 내가 할 짓은 아니다. 그의 충고 한 마디에 이렇게 변하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나를 긍정해줬다. 나는 강하다고, 그렇게 말해줬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사. ...정말 내가 당신과 같을까? ...아니.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 당신에게 동질감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곳으로 가 진정으로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될까?


  아니, 이미 결론은 내렸다. 그가 나와 같아져서는 안된다. ....내가 그와 같아져야 한다.


  하얀 테디베어의 몸에 불이 붙었다.


"내가 잘못해서 모두가 죽고 나만 살았는데. ....모두 나 때문에 죽었는데... 그래도 죽기 싫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죄인이었다면,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짓눌려 살았더라면. 이미 나는 진작 차가운 시체가 되어 땅에 묻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쨌지? 결국 손목에 늘어 가던 흉터처럼, 나는 구차한 이유를 대며 끝까지 추악한 목숨을 이어왔다. 


  이게 내 진심이었다. 나는 잘못했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속죄할 방법을 몰랐던 것 뿐이다. 그래서, 그저 죽음만이 속죄라 생각했던 내 죄책감은 나와 같은 하얀 곰인형의 모습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젠 그 곰인형의 말을 따라 순순히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거에요. 스스로를 반드시 용서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그건, 저도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야 해요. 설령 누군가 당신의 죄를 씻어주어 당신을 용서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탈리야 당신 한 명 뿐이에요."


  박사가 더 따스하게 날 껴안았다. 계속 흐르는 내 눈물로 그의 옷이 더러워졌다. 축축하게 젖어든 그의 옷깃이 내 뺨을 스쳤다. 뜨겁다. 축축하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곳보다, 편안했다. 더욱 더 그의 품을 파고 들어갔다. 그에게 기댔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때가 있어요. 불합리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결국,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 뿐이니까요."


  박사의 따스한 말은 불쌍한 나를 위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아픔을 위로해주지도, 나의 죄를 부정해주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충고해줬다.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길을 걸은 어른으로서.


  나와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 상대로서.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날이 올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해도 괜찮아요. ...도와줄게요. 같은 죄를 지었던 사람으로서.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내가 진정으로 내 죄를 이겨내고 나를 용서할 날이 올까? 그건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결국 죄책감에 패배한 나는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음으로써 모두에게 사죄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죽기 싫다면, 다른 속죄를 찾으면 된다. 이미 구하지 못한 목숨을 대신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거나.


  최소한 아직 살아 있는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박사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불이 붙은 하얀 테디베어의 몸이 붉게 물들어, 검게 사라졌다. 고작 이걸로, 끔찍하게 날 괴롭히던 하얀 테디베어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그것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겠지. 언젠가 내가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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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arknights/57706592

전편 링크


예아 반갑소.


와 ㅅㅂ 마지막 논리 정한다고 작업시간 7시간 순삭. 미치겠네. 

이거 다른 편은 보통 3~4시간 선에서 써졌던 걸 생각하면... ㄹㅇ 거의 2배 걸렸네. 1만자 정도 나왔으니 분량은 전편이랑 비슷한데.


결국 기본적으로 받은 플롯+로사가 죄책감을 이겨낼 논리를 정하는게 가장 힘들었다.

이것도 나름 최대한 논리적으로 정한건데.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일단 로사의 트라우마 치료의 가장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로사가 스스로를 용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로 잡았음.

아무리 멘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 이런 식의 PTSD나 우울증 치료는 남의 도움이 없으면 힘듬. 그래서 박사가 위로해주는 형태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로사가 박사가 무너지기를 바랬던 근본적인 원인은 박사가 나와 같이 고통을 느끼고 나에게 공감해줬으면, 혹은 나보다 못해져서 그걸 구경하는 쾌감이라도 얻고 싶다 였는데, 결국 박사도 로사처럼 트라우마를 100% 이겨내진 못했다. 라는 식의 동질감 확보로 그 욕구가 충족됐다는 느낌.


로사의 트라우마가 완벽하게 나은 건 아님. 현실에서도 완치가 힘든 우울증인데, 거기에 PTSD까지 겹친 로사의 증상이 고작 이 상담 한 번에 낫지는 않겠지. 하지만, 로사는 앞으로 분명 트라우마 치료도 열심히 받고 하는 등의 노력은 할 거임. 설령 마지막에 실패하고 목을 매단다 할지라도, 할만큼 해봤어. 하는 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로사의 트라우마 치료기 '또 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는 다음 편을 끝으로 완결.

이제 아마도 실론흑금 뷰빔 1편 쓰고, 하얀 늑대 11편 쓴 뒤에 다시 단편 신청 받은게 있으면 쓰도록 합시다.


이때까지 받은 것들 중 대부분은 쓰기 힘들고, 몇 개는 비슷한 게 이미 창작탭에 올라와서 관둡시다.

그런 의미에서 신청 받음. 기왕이면 소설로 쓸 수 있는 형태로.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일단 단편 신청은 받지만 확정은 아님.

그래도 이 글쟁이는 시간이 걸려도 무료로 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