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arknights/53329183 > 마침내 등장한 전편링크





***


 “내 실력을 못 믿는 건가? 이 실버애쉬가 그 정도로 약골이라 생각했냐는 말이다.”


 “계속 말하잖아, 실력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많은 인원을 투입할 수 없는 작전이었어.”


 “소수 정예 구성이었다 이건가. 그렇담 더더욱 내가 있었어야 한다고 본다만.”


 “협곡 내부의 오리지늄 오염도만 아니었더라도……. 하지만 전투 능력보단 방호 대책에 더 능숙한 사람들이 필요했어.”


 “오리지늄 방호 교육은 나도 이수했는데 말이지. 그래, 결국 내 미흡함이 불신을 가져다 준 셈이로군.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도 그러네!”


 몰아치는 눈보라의 소리가 무색하게, 천막 안에선 방향성은 다르지만 잔뜩 골이 난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레인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설마 싸우는 건가? 흠, 박사가 저렇게 성을 내는 건 처음 들어보는구먼.”


 “엔시오데스가 사람 머리에 김 오르게 하는 재능은 또 탁월하거든요.”


귀족으로서 엔시오데스의 가면은 놀랄 정도로 견고하다.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상대에게 빈정거릴 때도 ‘귀족적인’ 모양새로 하니 말 다한 셈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일방적으로 짜증을 내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양쪽 다 짜증 부리고 있는 거니까.”


 겉으로 보기엔 박사만 짜증 내고 있고 엔시오데스는 침착한 듯했지만, 난 안다. 저렇게 논리 정연하게 물고 늘어지는 건 엔시오데스 특유의 짜증 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지간하게 마음 턴 사이가 아닌 이상 좀처럼 저런 모습은 안 보여주는데 말이지. 그 점에서 새삼 놀랐다. 엔시오데스와 박사의 우정은,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꽤 단단하게 이어져 있거나…….


 아니면 엔시오데스가 그만큼 그를 탐낸다는 거겠지.


 없는 우정도 지어낼 정도로 말이야. 


 박사에게 이빨만 들이밀지 않는다면, 그 대한 엔시오데스의 우정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박사를 꼬드길 생각이라면 가만 있지 않을 거다. 설령 엔시오데스와 다시 한번 척을 지는 일이 있더라도.


 지휘부용 천막. 조금 큰.


 누군가에겐 그저 단순한 천막에 불과하겠지만, 지금의 내겐 저곳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전장이나 마찬가지다. 저 안에 박사가 있다. 엔시오데스가 있다. 그러니 절대로 약한 모습 따위 보일 수 없다.


 미소로 고통을 감추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피곤을 지운다.


 좋아. 몇 번 연습한 뒤 레인저에게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왜일까, 그는 아까부터 시종일관 언짢은 표정이었다. 날 걱정해주는 걸까? 그게 맞다면, 정말 박사의 주변엔 왜 이리 착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걸까. 역시 그 사람의 인품 덕분이려나.


 “고마워요.”


 내가 생긋 웃어줘도, 레인저는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이런, 아무래도 표정을 감추는 건 그리 전문 분야가 아닌 듯하다.


 “…무리하지 말게.”


 “그럴게요.”


 가식적인 미소. 사무적인 웃음.


 얼굴 근육이 마치 다른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뼛속에서부터 각인된 ‘브라운테일 가주’의 가면 아니던가. 귀족다운 표정을 만드는 것쯤이야 숨 쉬는 것만큼이나 본능의 영역에 가깝다. 비록 다친 오른팔은 삐걱거리고, 내리는 눈마저 녹일 정도로 머리가 달아올라 있다고 해도 말이다.


 “…….”


 레인저는 잠시 날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지 몇 번이고 목울대가 움찔거렸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섰고,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뒤를 돌아보는 일 따윈 하지도 않았다.


 “아, 외투…….”


 뒤늦게 어깨에 걸친 외투에 생각이 미쳤을 땐, 그는 이미 내 걸음으로 다다를 수 없을 정도로 성큼성큼 걸어간 뒤였다. 불러세울까,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내 그만뒀다. 이 추위에 돌려받는 걸 까먹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왜 가져가지 않은 걸까. 글쎄, 응원의 의미일 수도 있고 화가 난 걸 수도 있겠지. 어쨌든 지금 와서는 모를 일이다. 그 대답을 해줄 사람은 이미 저만큼이나 가버린 뒤니까.


 추위엔 약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레인저 씨?


 불현듯 마음속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닿지 않기에, 닿을 리 없기에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한 명의 사브라. 분명 제 입으로 추위에 약하다고 말해놓고선 외투를 남기고 가는 사람. 그러면서도 제 팔로 몸을 감싸긴커녕 추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강인함.


 할아버님의 등도 저렇게 굳건했을까. 쉐라그의 험난한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결코 약한 모습 따윈 내비치지도 않으셨던.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십 년 넘게 흘러서야, 겨우 조금씩 그 심정을 알아가고 있다니.


 “…고마워요.”


 차라리 입안에서 옹알거렸다고 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 스스로도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뭐 어쩔 수 있을까, 이게 난데. 그렇게 감사를 전하고 마음을 매듭짓는다.


 자.


 이제 시작이다.


 심호흡을 하고, 연습했던 미소를 다시 한번 얼굴에 띄우며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안의 풍경은 내 예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박사와 엔시오데스는 기다란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키도 기세도 모든 면에서 엔시오데스가 압도적인데, 저 여리여리한 박사는 그걸 다 받아낼 뿐만 아니라 대등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대체 예전엔 뭐하던 사람이었길래 저 기세를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팽팽하게 대치까지 할 수 있는 걸까, 박사는. 보통 사람이라면 엔시오데스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세부터 지고 들어갈 텐데 말이지.


 하긴, 그런 불가사의한 사람이니 엔시오데스가 친히 인정한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팽팽하기만 해서야 제대로 이야기가 진행될 리가 없다. 아까 밖에서 살짝 들은 것도, 이야기가 흘러간다기보단 평행선을 그리는 느낌이었고.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부리니 이럴 땐 박사도 남자는 남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흐음.


 …이쯤에서 등장하면 되려나.


 “왜 이렇게 다들 꾸물거리나 했더니, 원인이 여기 있었네?”


 느긋하게, 마치 갈빗대 사이로 부드럽게 단검을 밀어 넣듯 사이에 끼어든다.


 팽팽하던 실이 뚝 끊어지듯 둘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으로 향했다. 기세를 늦추지 않고 탁자 앞까지 걸어가서 다시 한마디 더 던진다.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연스럽게 어깨의 눈을 털어내듯 외투 깃을 조금 더 여민다. 팔의 욱신거림이 좀 더 심해졌지만, 참았다.


 “밤새 이러고들 있을 거야? 나 피곤한데.”


 “…라타토스.”


 “라타토스.”


 “안녕, 박사. 엔시오데스.”


 …뭐랄까, 조금, 의외다.


 박사가 살짝 허둥거리고, 엔시오데스가 그 특유의 무뚝뚝함을 유지하면서 대립이 깨질 줄 알았는데.


 “…….”


 박사는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이쪽을 볼 뿐이었다. 내가 들어온 뒤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이름뿐. 그게 전부였다.


 날 외면하는 건 아니다. 마스크 너머로 시선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데, 무슨 시선인지 모르겠다. 시선에 담긴 감정을 알 수 없다. 상대의 표정 따위, 굳이 볼 필요도 없이 시선과 한마디 말로 읽을 수 있다고 지금껏 자부했는데…….


 이상하다.


 당황스럽다.


 지금 내겐……. 박사의 표정이 보이질 않는다.


 “레인저가 간호해주고 있지 않았어?”


 마스크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뜻 듣기엔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느낌이 달랐다. 평소의 경쾌함이 아니라……. 뭐랄까, 쓴웃음이 섞인 듯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 레인저 씨가 알려줬어. 엔시오데스가 왔다고. 실버애쉬의 가주께서 친히 와주셨는데 내가 안 나올 수는 없잖아.”


 “너 다쳤잖아.”


 “작은 상처야. 신경 쓸 거 없어.”


 “글쎄, 내 소견으론 작은 상처가 아니었는데.”


 착각이었을까.


 희미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도 찰나의 순간이라, 내가 그런 위화감이 들었을 때 이미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져 있었다. 


 “라타토스.”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 그야말로 한마디만으로 주목을 이끄는 마성의 목소리다. 남자라면 이 목소리에 주눅이 들 것이고, 여자라면 이 목소리로 제 이름이 불리는 걸 상상하며 몸을 꼬겠지.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눈빛이란 걸 조금도 모른 채로.


 “이야, 엔시오데스. 설마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만나는 건 며칠 뒤라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어떻게 집무실에만 있겠나. 저택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오호라, 존경해 마지않는 실버애쉬 가주님의 발을 움직이려면 그 정도 소리는 나 줘야 한다는 거네?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


 “농담할 기운 정도는 있어 보여 다행이로군.”


 허세가 먹힌 듯 엔시오데스는 엷게 웃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허리에 쇠막대를 쑤셔 넣는 이미지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깻죽지부터 전해져 오는 격통과 뇌를 녹일 듯한 두통에 몸을 앞으로 굽힐 것만 같았다. 애써 허세를 부렸는데 제풀에 나가떨어진다면 그거야말로 언어도단이었다.


 “상처는 좀 괜찮나? 쉬이 움직일 만한 부상은 아니라고 들었다만.”


 “내가 여기 서 있는 게 그 대답이겠지? 네 걱정을 살 정도는 아냐.”


 “허나…….”


 “혹시 시간 낭비가 취미야? 한 번 더 말해줘?”


 “…….”


 엔시오데스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마, 내 목소리에 유난히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겠지.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아서, 그 음울한 기색이 목소리로도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슬쩍 엔시오데스 너머의 박사를 바라봤지만, 그는 탁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보는 시선이 떨린다. 엔시오데스를 상대로도 허세를 부렸던 결심이 싸라기눈 흩어지는 것보다도 더 쉽게 부스러진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단지 박사의 시선이 날 향해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정말 서류를 보고 있는 거야?


 정말 아까 건넨 게, 하고 싶은 말 전부야?


 내게 화가 난 거야, 박사? 아니면 실망했어? 내가 당신을 실망시킨 거야?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마음이 흔들린다. 시선이 떨린다.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얀 설원처럼 지워지는 것 같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저 아깐 정말 위험했지, 정도로만 웃어 넘겨줬으면 정말 기분 좋은 채로 얘기에 끼어들 수 있었을 텐데…….


 예상과 다른 전개에 마음이 꺾인다. 엔시오데스는 아무래도 좋다. 그가 나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든 상관없다. 하지만 박사는, 당신은, 당신만큼은…….


 “혹시 내가 온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일은 다 모였을 때 진행해야 빠른 법이야. 그렇지, 엔시오디스?”


 혼란스러운 내면과 달리, 엔시오데스의 말을 자르는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만큼 사무적이었다. 복잡한 내면의 반동인 듯했다.


 귀찮았다. 힘이 빠져서, 그냥 모든 게 짜증이 났다. 박사가 야속했고 날 걱정해주는 엔시오데스가 싫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은데, 십수 년간 몸에 배다 못해 이제 완전히 내 일부가 된 이 빌어먹을 귀족의 소양은 그럴수록 내 발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사무적인 목소리, 사무적인 미소.


 귀족의 소양. 가주라는 이름의 빌어먹을 책무. 그것들이 나를 이끈다. 마치 낡을 대로 낡아 퇴역한 군함을 끄는 쇠사슬처럼.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겠어? 서로 바쁜 몸인데. 그렇지?”


 “…알겠다.”


 더는 내 부상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무언의 암시. 그걸 모를 엔시오데스가 아니기에, 그는 옅은 한숨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박사, 엔시오데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만난 우리 셋 주위의 공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삼족 회의 때의 그 냉랭한 분위기와 비슷하려나. 아무래도 좋았다.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광대 꼴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박사는 말이 없었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 깊이 손을 찔러넣은 자세 그대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방호복 속에 꽁꽁 감춘 그의 모습은 모든 문을 닫아건 요새와도 같았다.


 “…….”


 어깻죽지부터 내달리는 듯한 격통.


 새빨갛게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작열하는 두통.


 그리고 박사를 향한 원망과 야속함.


 그 모든 걸 감추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더욱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박사의 태도가 어떻든 지금은 넘어가야 했다. 아니 넘어가고 싶었다.


 그냥, 빨리 여기 일을 끝맺고 침대에 처박혀 자고 싶었다.


 “우선 사과할게. 밖에 있다가 본의 아니게 엿들었거든. 혹시 둘이서 지휘권 문제로 다툰 거야?”


 대화의 일부만 들었던 거지만, 둘의 대화는 대강 아까 있었던 작전에 관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보통 이런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건 지휘권이었다. 결국 영민들에게 각인되는 건 최종적으로 전체를 이끈 사람이었으니까. 귀족들의 논공행상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엔시오데스 역시 별수 없는 귀족이란 뜻이다. 결국 영민들에게 제 이름을 각인시킬 명분이 더 필요하단 것뿐이니.


 그러면 확실하게 모든 게 맞아 떨어진다. 엔시오데스가 굳이 로도스 아일랜드를 다시 끌어들인 것도, 이들에게 과도할 정도로 투자하는 것도. 세력이 크지도 않은 제약회사 하나쯤은 제 맘대로 할 수 있단 뜻이겠지. 겸사겸사 자기 손아귀에 넣으면 더 좋고.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거짓된 우정을 보일 수 있는 게 귀족이란 생물 아니던가.


 아니.


 아니, 엔시오데스.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돼.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박사가 네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박사, 괜찮아.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비록 그가 내게 화가 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게 뭐든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일 터. 그렇다면 나중에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풀면 된다. 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는 것뿐이다. 박사가 날 언짢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내가 지켜줄게, 박사. 엔시오데스의 마수로부터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당신은 겨우 여기 쉐라그 따위에 얽매일 사람이 아냐. 당신은 더 높고 멀리 갈 수 있어. 엔시오데스가 당신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사명감, 아까 에이야퍄들라가 말했던.


 비록 그게 역겨울 정도로 뒤틀린 열등감으로 이뤄진 거라도, 그게 날 지탱해준다. 엔시오데스에 대한 적의가, 나를 나로 있게 한다.


 하지만 복병이란, 언제나 그 존재를 뒤늦게 눈치채기에 복병이라 하는 거고,


 기습이란 예상치 못한 일격이기에 기습이라 하는 법.


 “아냐, 라타토스.”


 “…응?”


 옆에서 들려오는 박사의 목소리. 그것은 마치 잘 벼린 창날처럼 내 가슴팍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엔시오데스만 노려보고 있었던 시선을 조금 돌려 박사를 바라봤다. 그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 없는 눈으로. 불가해하고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존재만으로 이 공간의 주도권을 손아귀에 넣은 채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아까 엔시오데스에게 짜증을 부리던 그 박사의 모습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실버애쉬는 카란 무역의 대표로 온 게 아냐. 로도스의 오퍼레이터로 온 거지. 견해 차이라는 것도 내가 그를 이번 작전에 편성해야 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어.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줘.”


 “오퍼레이터? 편성이라니?”


 그러면 마치 엔시오데스가 박사의 수하인 것처럼 들리잖아.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당황하는 건 내 쪽이었다. 반사적으로 엔시오데스를 보니 그는 그다지 숨길 생각도 없는 듯 어깨를 조금 으쓱할 뿐이었다.


 “실버애쉬. 그게 내 코드네임이다. 가드 오퍼레이터로서 협력하고 있지.”


 그렇다 한들 협력 관계의 임시직이지만 말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내 귀엔 그다지 와닿지 않았지만 말이다.


 “…….”


 [엔시오데스? 늘 코드네임으로만 부르니 잘 모르겠네만.]


 아, 그건가.


 그러고 보니 레인저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엔시오데스가 왔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그 점을 좀 더 신경 쓰질 못했다. 얼굴에 다른 의미로 열이 오른다. 바보 같다. 브라운테일의 이름값이니 뭐니 콧대 높았던 주제에 그런 거 하나 눈치 못 챈 내가 부끄러웠다.


 어깻죽지가 쑤셔서 그런다고? 머리가 터질 듯이 지글거려서? 전부 내 나약함에 대한 변명이다. 그걸 감안하고 이 자리에 온 거 아닌가.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입술을 짓씹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몇 달 전부터. 정확히는 그때 있었던 빅토리아 출장을 마치고 나서부터겠군. 애초에 그 출장이 박사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 계획했던 거지만, 공교롭게도 외려 도움을 받고 말았다.”


 “어머나, 그래서 몸으로 때우기로 한 거야?”


 사무적인 미소로 가장한, 비웃음과 경멸이 가득 들어찬 질문.


 악의로 똘똘 뭉친 한마디.


 거기엔 어떻게든 엔시오데스를 깎아내리고 싶다는 내 뒤틀린 욕망이 담뿍 담겨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엔시오데스를 바라봤다. 그가 조금이라도 불쾌하단 기색을 내비친다면, 그 자리에서 이 잘난 눈표범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식의 거죽을 벗길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하지만 엔시오데스는 허망할 정도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함을 숨긴다…….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로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투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사뭇 유쾌하기까지 했다. 박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신경이 누그러지는 듯, 이쪽의 경멸감은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흠, 몸으로 때운다라. 표현이 좀 거칠긴 하지만, 확실히 네 말대로다. 카란의 총수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족히 수십 개는 어긴 듯한 불공정 계약을 맺었지. 비싼 대가였다.”


 “체스터가 별로 안 좋아했을 거 같은데.”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지.”


 엔시오데스는 슬쩍 딴청을 피웠다.


 “하.”


 그러니까 속였다는 거구나. 아니 거짓말은 안 했다는 건가? 엔시오데스가 제 가신을 속일 위인은 아니니까. 그의 농담에 맞춰 웃어준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상 비웃음에 가까웠다. 


 의식은 불꽃 속에서 새빨갛게 달궈진 철사만큼이나 가냘프게 이어지고 있었고, 남은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짓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뭔가 몸이 붕 뜬 것 같아, 살짝 무의식의 경계에 한 발을 걸쳐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네가 얻은 이익이 있어?”


 “친분을 얻었지. 그렇지 않나, 맹우여?”


 맹우. 솔직히 그 호칭에 놀랐다. 엔시오데스가 누군가를 그렇게 부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엔시오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아는 건 아니지만, 이 남자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리 부르는 사람은 정말 다섯 손가락도 못 채울 게 분명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돈만 주면 없던 우정도 만드는 인성 파탄자처럼 들리잖아.”


 “그런 것치곤 이번 의뢰에서도 꽤 두둑하게 챙겨 간 걸로 아는데.”


 “벌 수 있을 때 벌어두는 게 뭐가 나쁘단 거야. 그러는 너도 클로저한테 뒷돈 찔러줬으면서.”


 “뒷돈이라니 그 무슨 말을. 로도스 엔지니어부에 대한 정당한 투자다. 어디까지나 한 명의 기업인으로서, 순수하게 공학자들의 열정에 조그마한 성의를 보인 것에 지나지 않지. 로도스가 개인적인 투자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곳은 아니잖나.”


 “하여간에 말은 아주 그냥……. 무슨 혓바닥에 파울비스트 기름을 발랐나…….”


 “그렇게 말하면 칭찬처럼 안 들린다만.”


 “당연히 칭찬이 아니니까 그렇지.”


 박사는 엔시오데스와 가벼운 콩트라도 찍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듭 놀라운 건 엔시오데스가 박사를 놀리고 있단 점이었다. 장난은커녕 농담 한마디 못할 줄로만 알았던 엔시오데스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어쩐지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 혼자서만, 이렇게.


 내가 뭔가 되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가장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발을 들였는데 나만 온도 차가 나는 듯했다. 여기 모인 게 셋이 아니라 나와 저 둘인 것만 같았다.


 이 공간에 투명한 벽이 있고, 그 너머에서 박사와 엔시오데스를 보고 있는 나.


 투명한 벽은 얇고도 단단해서, 그들 쪽의 따스한 온기가 내 쪽으로는 전혀 넘어오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발밑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보내는 것조차도 두려울 정도로 깊디깊은 구멍이. 그것은 어둡고 어두워서, 어서 내가 자길 봐주길 기다리는 괴물과도 같다.


 레인저의 외투가 커서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다리가 떨리는 걸 들켰을 거야.


 떨리는 다리, 떨리는 팔.


 그것들을 한 겹짜리 외투로 감춘 채 멍하니 그들을 본다. 이토록 가까운데도, 이상하게 박사와 엔시오데스가 너무나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쪽은 따뜻한데 이쪽은 춥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눈알이 타버릴 것처럼 두통이 밀려오는데도 다리며 팔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박사, 한마디면 돼.


 제발 한마디만. 한 번만 웃어줘. 한 번만 나를 돌아봐 줘.


 박사, 혹시 내게 화가 난 거야?


 내가 뭘 잘못한 거야?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어.


 당신을 불편하게 했어?


 내가 방해라도 된 거야?


 엔시오데스가 나에 대해 뭐라고 욕이라도 한 거야? 아냐, 내가 해명할게. 기회를 줘. 당신이 뭘 들었든 그건 사실이 아냐. 맹세할게, 내게 남은 게 무엇이든 전부 당신을 위한 거야.


 당신에게서 한 번만 더 그때의 온기를 받을 수 있다면, 난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 내게 그때의 온기를 줘. 그때의 따스함을.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감촉을.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가 사라지길 수십 번도 넘게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고, 마음속엔 혼란만이 가득했다.


 얄궂게도, 소용돌이치는 나의 내면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대화는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철저히 귀족으로 자라온 나의 정신은 내면이 갈가리 찢기는 이 순간에도 여유로운 미소와 적절한 추임새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어쨌든 이번 작전에 내가 편성되지 못한 건 심히 유감이다만……. 네 의견을 존중하지, 맹우여. 손님은 주인이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하는 법이니. 허나 구태여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더라면 그 원석충이 도망치는 일 따윈 없었을 터다.”


 “하아…….”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박사의 태도만으로도 이쪽은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폼페인지 뭔지 하는 그놈의 원석충도 말썽인 모양이었다. 자연히 내 목소리엔 신경질적인 짜증이 스며들었다.


 “협곡 전체가 울릴 정도의 폭발음이 들렸는데 그게 안 죽었다는 게 말이 돼? 그놈 몸뚱이는 무슨 D32강으로라도 되어 있대?”


 “그건 아닌데 이쪽의 화력이 약했어. 결정타를 먹일 만한 캐스터가 에이야퍄들라밖에 없었는데, 아까 너도 들어서 알다시피 그걸 유인하느라 공격 기회를 놓쳤거든.”


 “그 말은…….”


 “2차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지.”


 엔시오데스가 음울하게 내 말을 받았다. 과연, 이래서 엔시오데스가 불평을 한 거였나. 한마디로 자기라면 2차전까지 질질 끌진 않았을 거란 뜻이다.


 “놈은 야수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녀석이지. 한번 호되게 혼났으니 다시 꾀어내기는 더욱 어려울 터.”


 “잠깐, 엔시오데스. 그럼 박사가 오퍼레이터들에게 광석병에 걸리든 말든 공격을 퍼부으라고 명령이라도 내렸어야 했다는 거야?”


 “나도 박사가 최선은 다 한 건 안다. 다만…….”


 엔시오데스는 답지 않게 깊게 한숨을 쉬고선 깊이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맹우여.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거늘. 내가 오늘 네게 떼를 쓰는 꼴이군.”


 “됐어, 그래도 협곡에 오리지늄 안개가 퍼진 원인까진 알아낸 거잖아. 다음번에 확실히 매듭지을게.”


 “그렇지, 그래. 넌 적에게 두 번씩이나 기회를 줄 정도로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니까. 믿겠다, 맹우여. 언제나처럼. 물론 네 두 번째 작전엔 내 자리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다.”


 “알겠다고…….”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박사, 그리고 그걸 엷은 미소 지은 채 바라보는 엔시오데스. 문제는 그 미소라는 게 엷어도 너무 엷어서 언뜻 보기엔 노려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람이 뭐 저리 무뚝뚝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엔시오데스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미소조차도 어마어마한 일이란 걸 안다. 그야 저건 귀족의 기품이 가득 든 껍질뿐인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니까.


 엔시오데스는 이번엔 내 쪽으로 고갤 돌렸다.


 “감사가 늦었군. 박사를 지원해줘서 고맙다, 라타토스. 낮의 작전 때도 그렇고, 생각 이상으로 무리하게 하는 것 같군. 미안하다.”


 “무리는 박사랑 현장 인원들이 다 했지. 난 몇 마디 조언밖에 한 거 없어.”


 “그를 지켜주지 않았나.”


 엔시오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난 그의 공치사 따윌 받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옆에 있다가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 거야.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고.”


 “남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건 숭고한 행위다.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칭송받아 마땅할 일이지.”


 “칭송? 어머나, 나중에 내가 청구한 영수증 볼 때도 과연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려나 모르겠네, 엔시오데스?”


 “아니, 나중까지 갈 것도 없다. 이제 충분하니까. 넌 충분히 네 할 일을 다 했다. 더 이상 무리할 필요는 없어.”


 사고가 멈춘다.


 다음 빈정거릴 말을 준비하던 입이 마치 얼음 아츠로 얼어붙기라도 한 양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건 몇 수를 예상하고 던진 포석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증에서 나온 것이었다.


 “…뭐가?”


 충분하다니, 대체 뭐가?


 “뭐가 충분하단 건데?”


 “이 정도면 충분히 도와줬다는 거다. 다쳤잖나. 나도 여기서 더 도와달라 할 정도로 뻔뻔하진 않다.”


 엔시오데스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제 딴에야 배려지, 내게는 간신히 하나 붙잡고 있던 구명줄이 뚝 끊기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뱃속에 묵직한 얼음덩어리 하나가 들어찬 듯 숨이 턱 막혔다. 기묘한 일이다. 머리는 익을 듯 뜨거운데 배는 차갑다니.


 “…말했지, 좀 긁힌 것뿐이라고. 여기서 빠져야 할 정도로 대단한 상처도 아냐.”


 “제대로 거동조차 못 하면서 무슨 소리를. 지금도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일 텐데.”


 “좀 긁힌 거라고, 엔시오데스. 내 말 못 들었어?”


 불안이 현실이 된다. 제기랄, 역시 외투 하나로 엔시오데스의 눈을 속이려 한 건 지나친 희망 사항이었나.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이게 아니면 난 박사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싫어.


 싫어, 박사. 다시 그 폐허에 가는 건 싫어. 그 폐허에서 당신와의 만남을 곱씹기만 하는 건 싫어.


 거긴 너무 추워. 너무 어두워.


 박사.


 당신이 있는 동안만 과거의 꿈에 빠져 있고 싶다는 게, 너무 지나친 소망이야?


 나는 그 정도도 바라면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내가 그 정도로 죽을죄를 지었어? 모든 걸 다 바쳤잖아. 모든 걸 다 잃었잖아. 그런데 왜, 대체 왜…….


 다시 사고가 멈춘다. 느릿하게 흐르던 의식이, 질척한 기름 굳듯 굳어만 간다.


 시야에 엔시오데스가 들어온다. 이제 그를 증오할 힘마저 빠져나간 듯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아아, 그래. 엔시오데스. 어쩐지 네가 친히 왜 여기까지 왔나 했어.


 이 말을 하러 온 거였구나. 내가 더 이상 박사에게 쓸모없는 존재라는 걸 굳이 말하려고.


 이제 속이 시원해?


 만족해, 엔시오데스? 네 자비로움과 배려심에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까? 네 발 앞에 엎드려서 신발에 입이라도 맞춰야 할까?


 시선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엔시오데스를 노려보는 게 고작이었다. 박사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여기서 시선을 떨어뜨리면.


 내 밑에 뚫린 커다랗고 어두운 구멍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말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겨우 흘러나왔다.


 “…내가 빠지면 협곡 안내는 누가 하고? 원석충은?”


 “대원들의 보고서와 네 지도가 있으니 괜찮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원석충 문제도 이 정도 정보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


 차라리 엔시오데스가 그렇게 말했더라면.


 소리라도 질렀겠지. 네가 뭘 알고 그렇게 떠벌리느냐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말을 한 건 박사였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차분하게, 단검을 내 목덜미 깊이 쑤셔 박는 듯했다.


 그래, 박사.


 당신도 내가 쓸모없다는 거구나. 이젠 이용 가치조차 없다는 거구나.


 그래서 나와 눈도 안 마주치는 거야?


 그래서 아까부터, 내게 아무런 감정도 내비쳐 주질 않는 거야?


 절망감이,


 독액처럼 혈관을 타고 흐른다. 온몸을 감싼 냉기가 끈적한 독액이 되어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 머리가 마비된다. 사고가 정지한다. 내 쓸모를 어떻게든 여기서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박사의 업무는?”


 “전담 수행원 팀을 꾸리도록 지시했다. 앞으로 네가 가주 업무와 겸해서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거다. 이쪽의 실수다. 박사의 수행원 문제는 내가 직접 신경 써야 할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데도, 오늘 아침 네 요청을 받기 전까지 까맣고 잊고 있었다.”


 “…….”


 “ 다시 한번 사과하마, 라타토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


 멍하니 엔시오데스를 바라본다.


 늘 당당하게 쫑긋 솟은 그의 두 귀가 축 처져 있다. 세상에나, 이 당당한 남자가 이렇게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구나. 자세히 보니 눈 밑에 기미도 잔뜩 껴 있다. 아무래도 허세를 부리는 건 딱히 나한테만 한정된 얘기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남자는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 날 배려하고 있다. 진심으로,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정도도 모를 만큼 얼이 빠지진 않았다.


 이성이 말한다, 여기서는 엔시오데스의 사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때가 기회라고. 지금 한발 물러서는 척 그에게 빚을 지운다면, 언제고 그를 상대로 꺼내 들 손패 하나쯤은 주머니에 넣어두는 셈이라고.


 그럼 이 자리에서 일어난 문제를 ‘귀족적으로’, 그리고 ‘우아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마치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인다.


 사실 충분한 성의는 보였다. 박사가 엔시오데스에게 그토록 소중한 친구라면, 그 친구를 몸 바쳐 지켜낸 것보다 더한 성의가 어디 있겠는가. 박사에게 수행원이 없어도 지금껏 일정에 차질 없도록 잘만 보좌해왔고, 그렇다고 가주로서의 업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엔시오데스 입장에서 보기엔 내가 피해자로만 보일 수도 있다. 입으로는 투덜대고 틱틱거렸지만, 맡긴 역할 이상을 충분히 해냈으니까. 재밌는 일이다. 이해하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전혀 웃기지도 않는데 웃음이 나올 것 같다니 내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청혼 이야기나 꺼내 볼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극적인 얘기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에 적합한 주제도 아닐뿐더러 그럴 분위기도 아니다. 하지만 박사의 주목은 끌 수 있을 거다. 아무리 엔시오데스가 박사에게 살갑게 대한다 해도, 성격상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얘기를 덜 익은 고기 베어 물듯 성급히 할 위인은 못 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래도 박사의 관심을 못 끌면 어쩌지?


 만약 그냥 축하한다고 하면? 그렇게 공증인을 자처하면서 즉석 약혼이라도 해버리면, 어쩌지?


 애초에 난 이 얘기를 꺼내서 어쩌려는 걸까?


 대체 난 뭘 원하는 걸까?


 박사, 나는 대체 당신에게 뭘 원하는 걸까?


 끊임없이 되물어봤을 그 한마디. 그러나 결코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는.


 지리멸렬하게 내가 답하고, 내가 좌절하고, 내가 멋대로 기뻐했을 뿐, 그 한마디가 박사에게 전해진 적은 결코 없다.


 …인정하자.


 이제 그만 편해지자.


 나는 저 사람과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 그 따스함에 매달려 철없는 꼬마 아가씨처럼 혼자서 좋아했던 거다.


 “…….”


 아아, 어둠이 커진다.


 발밑의 어둠이 커져서, 나를 빨아들인다. 달콤하고 역겹게 부패해 가는 늪과도 같이.


 “…이제 난 어떻게 하면 돼?”


 “쉬어야지.”


 박사는 짤막하게 말했다.


 “당분간 우리쪽 오퍼레이터들과 같이 있어. 저택에 혼자 있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테니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박사가 뭐라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다. 뭔가 내 자신을, 이 풍경을 멀리서 보는 느낌이었다.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가야지. 더 얘기할 건 없으니까.


 근데 어디로?


 어디로든, 여기가 아닌 곳으로.


 그런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을 떼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한 발자국만 떼면,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다. 아래로, 내 아래에 늪처럼 고인 깊은 어둠 아래로.


 “부축해주겠다, 라타토스. 의료 인원이 있는 곳은 내가 안다.”


 다시 엔시오데스는 다가왔다. 그를 멍하니 올려다본다. 그가 날 연민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나를 원하고 있다.


 날 사랑해?


 입술까지 나왔던 그 말을 도로 집어넣는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부질없는 짓이라서.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한들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


 다 가져가라지. 목숨값으로 영지며 존엄까지 바친 마당에 뭔들 더 못 주겠어.


 “안아줘, 엔시오데스.”


 “…그러지.”


 그가 날 안아 들었다. 행여 놓칠세라 두 팔로 꽉 안아서. 두꺼운 옷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의 팔근육이 느껴진다. 키 차이가 꽤 난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키만 놓고 보면 사촌오빠와 조카 사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브라운테일 가문 사람들이 대대로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으음. 아무래도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기대니 고동 소리가 느껴졌다. 조금 빠르다. 긴장한 걸까? 모르지. 어쩌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 솔직히 상황 판단이 제대로 안 된다. 엔시오데스의 팔은 강인하고, 또 품은 단단하고 듬직해서……. 이대로 모든 걸 잊고 잠들어버리고 싶다.


 박사, 사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런데 전하지 못했어. 왜냐면 너무 제멋대로에, 민폐 같은 말이니까. 당신도 당황스럽지 않겠어? 인연이라 쳐도 스쳐 지나간 사이밖에 안 될 여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그래도 역시 전하는 게 좋았으려나? 아냐, 안 돼. 그건 너무 이기적이야. 당신이 그것 때문에 곤란해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냐, 솔직히 말할게. 전하지 못한 건 그냥 내가 무서워서야. 당신과의 이 기적 같은 만남이,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댔다간 깨질까 봐 두려워서 물러선 거야.


 당신이 웃으면 좋아. 당신이 얼빠진 미소를 지을 때 핀잔을 주는 건 더 좋고. 그건 잘 짜인 바이올린 이중주 같아서, 마치 봄날의 평야를 떠올리게 해. 황금빛 금잔화가 가득 핀 그런 평야를 말이야.


 실은 그런 평야에 한번 가보고 싶었어. 나 금잔화 좋아하거든. 시우르스가 알면 또 자기랑 똑같은 거 좋아한다고 놀릴 게 뻔하니까 숨겨왔던 거지만.


 거기에 당신과 소풍 가는 상상을 해. 가서 자리를 펴고, 바구니를 열어 호밀 빵 한 덩이를 꺼내. 내 것은 조금 작게 자르고, 당신 것은 조금 크게.


 그리고 저번 주에 만든 버터를 양껏 바른 뒤에 신선한 생햄을 올리면, 자아, 쉐라그 풍 간편 샌드위치 완성. 느끼한 거 좋아하는 당신은 입을 주먹 두 개는 들어갈 만큼 벌리면서 좋아하겠지. 물론 내가 뒤이어 꺼낸 순무 샐러드를 보고 조금 웃음기가 가시겠지만 말이야.


 화관 같은 거 안 만들어봤지? 나도 어릴 때 시우르스에게 몇 번 만들어준 게 전부야. 솔직히 화관 같은 거 만들고 놀기엔 해야 할 게 너무 많았거든. 그래도 몇 번 해보면 잘 만들 수 있을 거야. 나 그런 쪽으론 은근히 손재주가 좋거든. 요리는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당신에게 손수 만든 요리를 먹여주고 싶어. 맛있다고 듣고 싶어.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


 당신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싶어. 평소처럼 웃음기 섞어서. 아까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만 아니면 돼. 차라리 화를 내. 차분한 당신 목소리는 뭔가 낯설어서, 무섭단 말이야.


 닿을 리 없는 속삭임. 끊임없이 가라앉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내 안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는 소망. 이뤄질 리 없기에 소중하고, 이룰 수 없기에 더더욱 바라보게 된다. 닿을 리 없는 별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것처럼.


 차가운 눈송이 하나가 뺨에 닿았다.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잠깐 졸기라도 한 건지 눈을 떴다. 올려다보니 엔시오데스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늠름한 턱선과 매의 그것처럼 번득이는 눈빛. 그야말로 지도자로서 나무랄 곳 없는 외모다. 성격이야 뭐,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추운가.”


 “…아니, 괜찮아.”


 “따뜻한 물을 준비해달라 부탁하겠다. 조금만 참아라.”


 뭔가 대답을 들어보니 아양을 떨거나 칭얼거렸으면 더 좋은 그림이 나왔을 법한 상황이었다. 콧소리를 내며 품속에 파고들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달래며 걸음을 재촉했겠지. 일단 지금도 보폭이 좀 빨라졌지만 말이야.


 성실하고, 무뚝뚝한, 하지만 마음은 상냥한.


 엔시오데스, 넌 분명 좋은 가주가 될 거야. 좋은 아버지가 될 거고, 좋은 남편이 되겠지. 분명 행복할 거야. 네가 고른 여자가 나쁜 사람일 리가 없을 테니까.


 네 청혼을 받아들이면 나도 그 광경에 낄 수 있겠지. 네 옆에서,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행복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말이야. 너는 나와 아이를 바라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겠지. 내 어깨에 한쪽 손이라도 올린 채, 아이에게 네 손가락을 잡아보게 하며 아버지로서 자부심을 느낄 거야.


 그래도 역시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무리 해도 안 된다. 포기하려 해도 안 된다.


 금잔화의 꽃밭, 봄날의 기운이 가득한 그곳. 내 마음의 정원, 나의 소망의 안식처.


 엔시오데스. 그런데 왜일까.


 너와의 미래를 아무리 그리고 또 그려도, 네가 그곳에 있는 걸 상상할 순 없어. 그곳에 있는 네가 상상이 안 돼. 남편으로서의 너와 가주로서의 너,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너도 모두 그릴 수 있는데, 그곳에 있는 너의 모습만은 그릴 수 없어.


 아아, 엔시오데스. 네가 이렇게 아껴주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난 정말 못된 여자야.


 언젠가 이 말을 하고 싶어. 네게 상처가 될까? 날 때릴까?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날 매도할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생각해도 그곳의 풍경은 지워지지 않는다.


 금잔화의 꽃밭, 그리고 그 속에서 내 화관을 받아줄 사람. 당신은 내가 만든 화관을 써보며, 분명 사람 좋게 씩 웃겠지.


 눈을 감고 속삭인다. 그의 품이 아닌 다른 이의 품에서. 그저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엔시오데스.


 아무래도 난 박사를 사랑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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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 포인트 도달. 드디어.


엄청 고심하고 썼는데 과연 잘 썼나는 모르겠네요. 고민은 많이 했는데.


실은 여기서 원래 새로운 히로인이 등장할 예정이었어요. 이미 폐기한 시나리오지만.


근데 그러면 가벼운 분위기로 가야 하고, 또 라타토스 이야기에서 초점이 벗어나서 중심 잡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폐기.


아무래도 라타토스 원툴 체제로 가야겠습니다.


얼음깨기 이후로 벌써 이벤트가 몇 번이나 나왔지만 꿋꿋하게 뇌절하겠습니다. 언제쯤 끝날까요.


감상 써주심 감사합니다.


길게 쓴 것도 있는데, 이번 편은 나름대로 감정선 공을 들였는데 뭔가 생각대로 안 나온? 아니 잘 나왔나? 여튼 그래서.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