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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틀은 퇴각. 레드는 12시 방향 적진에 한 번 갔다 와줘. 교란만 시키고 다시 돌아오면 돼."

종유석의 무리가 흘리는 눈물은 달궈져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수증기가 우화했다. 뭉칠 대로 뭉쳐진 습기는 옷을 적셨고, 동굴 속의 열기는 사람들의 폐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레드 복귀 후 사리아는 백파이프의 보조 개시. 백파이프. 예전에 개발한 특수 카트리지를 준비해줘. 적이 몰려올 거야."

동굴의 끔찍한 환경으로 인한 끈적거리는 얼굴을 젖은 손으로 쓰윽 넘기면서, 왼쪽 귀에 장착된 통신기로 아래로 보이는 전장에 멈추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1초마다 체내 수분이 증발해가는 불쾌감을 견디면서, 대원들은 몰려오는 적을 차근차근 물리치고 있었다.

"진짜 골라도 이런 곳을 골라주다니, 미치겠네."

위기협약이 제시한 조건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설마 임무 위치가 열원이 뿜어져 나오는 동굴, 그것도 사방팔방으로 숨겨진 순오리지늄으로 가득한 곳을 지정하다니. 고가치 목표와 오리지늄 환경 조건이 이걸 말하는 거였다. 그것과 더불어 과한 충격이 주어지면 순오리지늄이 활성화될 것을 우려해 부여된 다원 강습 협약까지. 이쯤이면 위기협약 수뇌부가 우리에게 악의적으로 이러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이대로 계속 지연되면 안 되는데…"

위기협약이 부여한 임무는 비밀무기를 제작 중인 국가 반동분자를 제압하는 것. 열악한 환경 때문인지 동굴 내부에 있는 적 자체는 그리 수준이 높지 않아 위험하진 않았지만, 그 문제는 로도스에게도 차별 없이 다가왔다. 더위와 습기, 오리지늄으로 인한 대원들의 행동력 저하. 낮은 화력으로 인해 길어지고 있는 전투. 전투에 난입하는 원석충들. 어느 쪽이든 바람직하진 않은 상황에 눈썹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박사~ 내 차례는 아직이야?"

이 다음을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옆쪽에서 은발의 에기르 여성, 스펙터가 내 후드를 살짝 잡아당겨 왔다. 이 공간이랑 괴리감이 느낄 정도로 어색하게,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느긋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넌 괜찮은 거야? 여기 완전 덥고 습하고 미치겠는데."
"박사. 일단 그 더워 보이는 후드부터 벗는 게 좋지 않을까?"
"...아."
"그냥 까먹은 거였어? 난 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거라 안 벗는 줄 알았네."

옆에서 비꼬듯이 말하는 스펙터를 무시하며, 급히 코트랑 백의를 벗어 던졌다. 머리속에서 멍청이라고 욕하면서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실수는 누구나 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가끔 사회인으로서 수치심을 이겨야 하는 법이다. 

옷을 벗어 던지며 느껴지는 쾌적함이 조금 전까지 과열시킨 머리를 살짝 식혀주었다. 다만 여전히 덥고 습한 건 마찬가지. 열기와 습기가 상당한 이 지형에 장기간 있는 건 무리다.

"박사. 슬슬 싸우게 해주면 안 돼? 나 심심한데."
"스펙터. 저 지형을 봐. 순오리지늄으로 가득 차 있어. 너한테 특히 위험한 거 알잖아."

비감염자가 순오리지늄에 접촉해 감염될 확률. 감염자가 오리지늄에 접촉해 종합성 쇼크로 증세가 악화될 확률. 어느 쪽이 높은지 우열을 가르는 건 힘들지만, 그 후의 여파의 우열을 가리자면 당연히 후자. 특히 중증 광석병 환자가 접촉하게 되면 사망과 동시에 2차 감염의 위험을 야기하게 되는 건 테라의 의료계 사람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상식이다. 

본인이 희망해서 마지못해 데려왔지만, 중증 광석병 환자인 스펙터를 사지에 몰아넣는 행위는 결코 하고 싶지 않다. 지도자로서. 의학 전공자로서. 혹여나 나도 모르는 다른 이유로서. 댈 수 있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광석들만 조심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말이 쉽지."
"그렇다고 날 투입 안 시키면, 저기 있는 와이번, 슬슬 한계일 거 같은데? 저대로 무리하게 싸웠다간 큰일 날 거야."

한 손에 들고 있는 단말기에, 드론으로 촬영되고 있는 뱅가드 오퍼레이터 백파이프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의 건강한 미소는 사라지고 땀으로 엉망이 된 주황빛 머릿결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부들거리는 양손으로 랜스를 쥐며 전방의 적을 쓸고 있었다. 뒤에서 디펜더 오퍼레이터 사리아의 백업이 있었음에도, 이 이상의 전투 수행이 힘들다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장정 30여 명을 거뜬히 해치우는 무력의 그녀라도, 이 환경에서의 인해전술은 상당히 버거웠을 테지.

"누구도 죽지 않고 돌아간다. 그게 네 신조잖아? 박사."

유혹하는 악마와도 같이, 스펙터는 속삭여왔다. 그것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판단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섣불리 답을 하지 못했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일까.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손을 몇 번 쥐락펴락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몇 번이고 생각을 고치고 또 고쳐봤지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었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 간신히 자신을 묶고 있던 망설임이라는 쇠사슬을 풀 수 있었다.

"백파이프. 늦어서 미안. 퇴각 준비해. 고생 정말 많았어. 스펙터랑 교대되는 대로 후방부로 이동해서 치료받아줘."

단말기 너머로 알겠다는 통신을 듣고 몸을 스펙터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보고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재빨리 처리해야 되는 이 상황에 길게 이야기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의미를 함축하여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다치지 마. 알겠지?"

은발의 에기르 여성은 아무 말 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최상위 포식자가 보이는 여유일까. 아니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대답일까. 그 모습이 명화와도 같이 아름다워서, 잠시 숨이 멎을 거 같았다.

지면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시야를 잠시 가렸다.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동굴의 지면뿐.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저 멀리 전장을 향해 날아가는 스펙터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들리는,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 소리. 그것에 로도스의 대원들도. 동굴 안에 있던 적군도. 난입한 원석충 무리도. 모두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단말기랑 연결된 드론으로 스펙터의 고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는 톱니바퀴의 울음소리와 공명하며, 그녀는 전방의 당황해하고 있는 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심연에서 돌아온 굶주린 맹수가, 사냥의 개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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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작중 묘사된 장소는 실제 협약 장소인 뜨거운 종유동이다.

수능이네. 내 글을 봐주는 명붕이 중에 혹시 오늘 수능 쳤다면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다. 벌써 수능을 본지 몇 년이 지났고 지금은 걍 평범한사회인이지만, 수능을 봤을 때의 긴장감과, 끝났을 때의 시원섭섭함은 아직도 생생함.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이번 편은 좀 짧은데, 원래 전투씬도 합해서 쓰려고 했다가 분량이 폭주해서 부득이하게 나눠버렸다. 다음 화는 전투씬이 대부분이라 내용이 좀 길 예정.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p.s.) 쓰펙터 헤드헌팅 끝났는데 안 돌린 독타 없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