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전에 쓴 스펙터 단편 한 번 읽어봐주고 오믄 감사하겠음. 그래야 이 편의 후반부 내용의 이해가 좀 쉬워질 거임. 단편 링크(클릭)


시리즈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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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녀석들."

연락이 끝난 단말기를 책상에 툭하고 집어던졌다. 위기협약에 던진 클레임이 무시당해서다. 이런 터무니없는 임무에 더해 폼페이의 존재에 대해 말을 안 해준 것. 해당 건에 대해 불평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비밀병기인 건 알았지만 폼페이인 건 몰랐다. 우린 위험도에 대해 충분히 공지했다.'뿐이었다. 

충분히 불쾌한 대응이지만, 로도스의 주요 수입원이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적어도 그 녹색 필라인이 허가해주기 전까지는. 사회인의 고뇌를 이럴 때 겪다니 통탄할 따름이다.

"박사. 들어가겠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저 감정 없는 톤의 목소리. 아무리 사람이 많은 로도스라도 저걸 잘못 들을 수가 없다. 그나저나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게 아니라 들어가겠다니. 나의 프라이버시는 상관없다는 건가.

문이 열리자 하이힐 소리가 사무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조명 아래로 반짝이는, 애플 마티니를 입힌 녹색 빛의 은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투명한 보석과도 같은 눈빛.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과 위압감. 이곳 로도스의 실질적 주인이자, 내게 얼마 없는 천적인 크레이지 워커홀릭. 켈시였다.

"켈시. 진료 끝난 거야?"

지금 이 타이밍에 켈시가 사무실에 온 거라면, 이유는 정황상 하나뿐이다. 전투가 끝나고 마지막에 갑자기 피를 토한 스펙터의 진료. 중증 감염자가 오리지늄 환경에 노출된 상태였으니, 딱히 긍정적인 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어떤 답이 나올지 두려워, 침을 꿀꺽 삼켰다. 

"스펙터는… 괜찮은 거야?"
"혈중 오리지늄 결정 밀도가 미약하게 상승했어. 척수 내의 오리지늄 융합률은 변함없다."
"그 뜻은…"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집중적으로 치료에 전념해야겠지. 보통 이럴 때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고 말하는 게 맞겠군."
"아…"

뻣뻣하게 힘을 줬던 등이 느슨해지면서 의자 등받이에 모든 걸 맡겼다. 조금 전까지 여러 가지 교차했던 기분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까지 다다르지 않았다. 그것만이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켈시는 눈썹을 찡그리며 나에게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무언가 불만인 듯한 저 표정. 아무래도 이번 위기 협약 관련 보고서에 대해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다. 

"박사. 질문 하나 하겠다. 오퍼레이터 스펙터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케흑?!"

마음을 먹고 심호흡하려던 찰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 날아와서 사레가 들렸다. 목이 턱 막히면서 이물감이 사라지지 않은 불쾌함. 급하게 옆에 있던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역시 뭔가 있군."
"있긴 뭐가 있어… 이상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

켈시는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위생점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소파며 서재며 가리지 않고 검지를 쓱 문지르면서 먼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며, 그녀는 할 말을 계속했다.

"다시 한번 물을게. 오퍼레이터 스펙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냐니… 당연히 로도스의 동료…"
"동료, 라. 그런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켈시가 싹둑 잘랐다. 저 필라인에게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있기는 한 걸까. 

"네가 보기엔 네가 하는 행동이, 동료에게 대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가슴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안 그래도 위기협약 떄문에 스트레스가 한가득인데, 켈시 녀석 잔소리까지 끼얹으니 불편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들러붙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동료에 대한 의미가 변한 건가?" 
"들러붙다니, 그건 너무 과장됐잖아."
"매번 훈련 때 참관하고, 본인 권한으로 의료부의 기밀 정보를 꺼내서 읽고, 비서 업무를 무단 조퇴해도 넘어가는 것도 동료를 생각해서인가?"
"스펙터의 병세는 너도 알잖아. 언제든지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라는 걸."

역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녀석답게, 내가 한 것들을 일일이 꿰뚫고 있다. 조만간 내 등 뒤에 있는 CCTV부터 버리든지 해야겠군. 

"거기에 남자인 네가 여성 대원의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다가 한밤중에 나오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아니, 그건 진짜 오해거든…"

순전히 스펙터가 조각에 집중해서 전달 사항을 전하는 게 늦어졌을 뿐이다. 야릇한 해프닝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열심히 조각하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봤을 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으니 더욱 억울할 따름이다.

"이 정도로 말해도 못 알아먹나?"

땅이 꺼지도록 크게 한숨을 쉬는 켈시의 모습을 보니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평소에도 짜증 났지만, 오늘따라 더욱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저 언변. 계속 참아왔지만, 이번엔 뭐라도 한 마디 해야겠다. 

"박사, 넌 집착하고 있다."

말하려는 게 혀까지 나오려 하는 순간, 그 말은 다시 황급히 뱃속으로 도망쳤다. 생각지도 못한 한 마디가, 잠시 내 모든 생각을 내려놓게 했다. 뭐라고? 집착? 어떤 것에 마음이 쓸려 떨치지 못하고 매달리는, 그 집착?

"내가 말한 일련의 행위를 듣고 느껴지는 게 없나? 훈련 같은 경우엔 도베르만 같은 담당 교관이 진행해도 될 일을 구태여 네가 하고 있다." 

한 대 맞은 거 같이 정신이 얼얼한 날 무시하고, 켈시는 쥐고 있던 오른손에서 검지를 들었다. 그녀가 말한 주장에 대해 첫 번째 증거에 대한 신호였다.

"메딕 오퍼레이터가 아무리 담당 환자가 무섭다고 해도, 네가 그걸 대신할 의무는 없지." 

그녀는 이번엔 중지를 들어, 두 번째 증거를 제출했다. 

"그리고 수뇌부의 비서 업무 중에 무단 조퇴는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1달 감봉과 일주일 근신 처벌이 주어지지만, 넌 그걸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어."

이윽고 마지막으로 약지를 들어 제시된, 세 번째 증거. 하나라도 반박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 머리는 지금 현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켈시가 방금 말한 그 한마디 중 '집착'이란 단어가, 내 머릿속을 가득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한 바퀴 돈 켈시는 정면으로 걸어와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할 말이 한가득인 저 불만스러운 도끼눈에,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드는 것만 같았다. 

"이건 엄연히 '집착'과 '편애'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다. 넌 도를 넘을 정도로, 오퍼레이터 스펙터의 편의를 봐주고 있고, 그 사람을 너무 신경쓰고 있어."
"말했잖아. 스펙터는 환자라고. 그러니…"
"지금 네가 한 행위를, 다른 오퍼레이터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나? 같은 중환자인, 캐스터 오퍼레이터 나이트메어나 캐스터 오퍼레이터 이프리트 같은 경우에게도?"

당연하지, 라고 말해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밀랍이 목 내부를 가득 채우듯이, 형용할 수 없는 이물감이 말을 꺼내는 것을 방해했다. 대체 이 이물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의 호의가 부정당했다는 불쾌함? 이상한 오해를 받은 것에 대한 억울함? 아니면 설마…

"반박도 못 하는 건가."

다시 한 번 들리는 깊은 한숨 소리. 두통이 있는지 켈시는 한동안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으로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문지르더니, 할 말은 끝냈는지,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도스에 해가 되지 않은 이상, 난 너희 둘의 의견을 존중할 거다. 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 마."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분명 그렇게 소리지르려 했지만, 자물쇠가 걸린 입은 도통 열릴 일이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니 어느새 켈시는 자동문 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문이 완전히 열렸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걸까?

"여긴 용문이나 빅토리아가 아니야, 박사. 모두가 살아있는, 로도스다."

문이 닫히기 전에 들린, 켈시의 나지막한 목소리. 평소라면 작은 목소리라서 안 들렸겠지만, 저 두 마디는 마치 웅덩이에 던져진 거대한 바위처럼, 마음속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계속 저편에 숨겨두고 없는 척, 모르는 척 해왔던, 어떤 감각의 족쇄가, 순간 풀리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살짝 흐릿해진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온다. 귀에 노이즈가 난입했다. 숨이 서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봤던 냉혹한 모습. 그때 느꼈던 차가운 감촉. 그때 들린 서늘한 고요함. 이 모든 것이 합쳐진 회색빛의 기억은 내 머릿속을 있는 힘껏 뒤흔들었다.

"...문자?"

사무실의 적막을 부수고 들려온 건 조금 전에 책상에 던져놓은 단말기의 진동소리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손을 뻗어 단말기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뤄왔던 무용수의 감평을 해주러 갈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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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타이즈 이벤트가 시작됐다. 근데 이미 전에 훈장작을 다 해놔서 할 게 업씀... 그래서 요즘 핫한 푸키먼겜을 하고 있다. 바이올렛 개꿀잼.

시작 전에 단편 한 번 읽고 와달라고 부탁해서 미안하다. 아무래도 이제 1부를 끝내고 2부로 넘어가야되는데, 넘어가기 전에 스펙터 글의 주제를 좀 환기시키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이런 부탁을 했음. 암튼 다음화로 스펙터편 1부 끝나고 다다음화로 2부 갈 예정임. 이것저것 빌드업 쌓는데 분량 썼지만 2부는 찐득하게 함 써보겠음.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글쓴놈이 댓글 달아주면 좋아죽으므로 감상 하나 달아주면 감사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