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arknights/53329183 > 누군가 전편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링크를 보게 하라








***



 그렇게 파란 많았던 경기가 끝나고 며칠 뒤.


 “이건 말도 안 돼!”


 카시미어 중앙 병원, 한 VVIP 전용 병실에선 때아닌 미성의 비명이 고요함을 가르고 있었다. 그 근원지에 있는 사람은 며칠 전까지 여러 의미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신인 프리랜서 기사, 마리아 니어. 무슨 할로윈 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붕대에 깁스 투성이인 꼴이었지만, 그래도 그 눈빛만은 생기로 넘치고 있었다……. 분노도 생기로 칠 수 있다면 말이다.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제이 씨가 나랑 똑같이 공동 3등이야?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마리아가 가리킨 신문 한구석엔 며칠 전 파이어블레이드 아레나에서 있었던 경기 결과가 게시되어 있었다. 이러저러 수식어가 많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겠는가. 다 떼어내고 보면 결국 제이는 그녀와 공동 3위라는, 그야말로 노력에 비해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는 내용인 것을.


 “이거 알고 있었지, 조피아 언니! 왜 말 안 해줬던 거야?”


 마리아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조피아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지금 그녀가 조피아의 품에 달려들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그저 온몸에 깁스며 붕대를 둘둘 감고 있어서였다. 정말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야 당연한 결과니까. 난 오히려 지금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게 더 신기한걸?”


 그러나 돌아오는 조피아의 목소리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심드렁하기만 할 뿐이었다. 마리아와는 대조적으로 패션 잡지만 뒤적이는 조피아. 그 무심한 태도에 마리아의 두 뺨이 더더욱 부푼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게 왜 당연한데? 왜? 난 처음부터 하위권이었으니 그렇다 쳐! 근데 제이 씨는 처음부터 포인트가 2등하고 2배나 차이 났잖아? 심지어 혼자서 세 명하고 한꺼번에 싸우기도 했는데, 대체 왜…….”


 대체 왜, 만 반복하며 분통을 터뜨리던 마리아는 결국 축 늘어졌다. 며칠 전 결과 발표하는 현장에서 바로 항의했어도 될까 말까 했던 건데, 지금 와서 뭐라 하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막말로 당장 파이어블레이드 경기장으로 찾아가 항의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때 제이 씨가 가자고 했을 때 경기 결과는 보고 가자고 버텼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내 잘못…….”


 “너 자꾸 청승 떨래?”


 “아얏!”


 듣다 못한 모양인지 결국 조피아는 마리아의 이마에 딱밤 한 대 먹였다. 그리고선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찬찬히 설명해서 눈앞의 이 귀엽고 열정적인 기사 아가씨를 납득시키려고 한다기보단, 어딘가 안쓰럽다는 태도에 더 가까웠다.


 “경기 규칙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할 말 없어, 마리아. 이번만큼은 주최 측이 ‘공정하게’ 규칙에 따라 판정한 거니까.”


 “공정? 이게?”


 “너 아직도 기사 경기에 대해 모르는구나. 공정하다는 기준은 언제나 상업연합회가 정하는 거야. 경기 기사들을 납득시키려는 게 아니라 연합회의 이득을 위한 거라고.”


 “하, 하지만 관중들은? 거기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건 사기야!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가 증인이라고!”


 “모두가 너와 똑같은 생각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마, 마리아. 경기는 이미 끝난 지 며칠이 지났고, 배당금도 전부 지급됐어. 관중들 입장에선 그게 끝이야. 아쉽다거나 너무하단 목소리가 좀 있을지 몰라도, 그게 전부라고.”


 “…….”


 하지만 조피아가 그렇게 말해도 마리아는 여전히 승복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우와, 이 표정. 절대 물러설 기미가 없다는 뜻이야.


 조피아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어릴 때부터 마리아는 이랬다. 가녀린 외모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억척스럽고 고집 센 부분이 있어서, 자기가 한번 하고자 했으면 어지간해선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조피아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선 보는 척만 하던 패션 잡지를 옆으로 밀어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리아, 이번 경기는 난투전이었어. 개인 기량을 뽐내는 개인전이 아니었다고. 많이 때리고 덜 맞아야 유리한 경기였어. 너야 제이 그 녀석과 최선을 다해 싸웠다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단 거랑 다를 바 없어.”


 “하지만 관중들 반응도 좋았고, 제이 씨는 나까지 포함해서 무려 기사를 넷씩이나 넉 다운시켰는데…….”


 “방금 전에도 비슷한 얘길 했지만, 규칙을 정하는 건 연합회야. 관중이 아니라.”


 조피아는 딱 잘라 말했다. 


 “난투전에선 관중들의 인기 투표 따윈 의미 없어. 기사가 열이 넘는데 암만 표가 몰린다 해도 분산될 게 뻔하잖아. 게다가 경기 직전에 추가된 규칙, 기억나?”


 “…그 감점제라는 거 말야?”


 마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겨우 짜내듯 말하자 조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투전이라는 게 많이 때리고 덜 맞아야 하는데, 그 리스크를 더욱 크게 만드는 규칙이지. 이제 그 녀석이 왜 3등까지 밀려났는지 이해가 좀 가니?”


 마리아의 낯빛이 대번에 새파래졌다.


 “그, 그럼……. 설마 나랑 싸운 거 때문에 점수를 다 잃었단 거야? 기껏 지금까지 따놓은 점수를?”


 “정확히는 그 녀석에게서 네가 뺏은 거지. 누군가 점수를 잃는다는 건 누군가는 점수를 얻었다는 뜻이니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물론 경기에선 항상 최종 집계 점수만 발표되니까 중간에서 연합회의 입김이 닿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만약 네가 거기에 항의해서 자료를 달라고 하면, 글쎄, 주긴 줄 거야. 그래봤자 결과가 변할 리는 없고, 그 과정이 최소 반년 정도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


 조피아는 누가 옳다 그르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마리아에게 네가 틀렸단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사실만을 얘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 눈빛은 ‘네 울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이나 마음속의 말을 쥐어 짜내려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무언가 말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안다, 노력에 항상 그에 걸맞는 보상이 주어지진 않는다는 것 정도는.


 각오 역시 안 한 건 아니다. 이런 불합리함 따윈 조피아도 미리 경고하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불합리함이라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건, 결과적으로 제이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마음만이 전부. 그리고 아마, 그마저도 받으려 하지 않을 거다.


 결국 마리아의 눈에선 한줄기 눈물이 샘솟아 올랐다. 조피아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낮게 쉬며 가만가만 마리아의 눈물을 닦아줬다. 팔이 다쳐서 제 스스로 눈물 닦기조차 힘든 상황인지라 그 모습은 더욱 애달프게만 보였다.


 “분하니?”


 “그럼 안 분해? 제이 씨가 이렇게 됐는데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데? 창피해. 난 정말 좋은 대결이었다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이게 뭐냐고! 결국 손해를 본 건 제이 씨뿐이야! 결과적으로 제이 씨만 희생당했다는 거잖아!”


 “그렇게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면 기사직이라도 반납하지 그러니? 지금까지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적어도 앞으로 더러운 물에 발을 담글 필욘 없으니까.”


 조피아는 차갑게 내뱉었다. 어찌나 그 목소리에 냉기가 깃들어 있던지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 정도였다.


 “계속 그렇게 화만 내면 돼. 편하게 관중석에 앉아 그 녀석이나 응원하면서, 불합리한 결과에 같이 화만 내주면 된다고.”


 “조피아 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가 어떤 생각으로 경기에 나왔는지 언닌 알고 있을 거면서……!”


 “아니까 이러는 거야. 네게 기사 경기란 고작 그 정도 가치밖에 없니?”


 조피아는 조용히 물었다. 마리아는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그냥 분하고, 네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화만 내면서 주저앉을 거니? 이대로 멈출 거야?”


 “그럴 리 없잖아!”


 마리아는 화가 나서 조피아를 바라봤지만, 조피아의 잔잔한 눈을 보고서 나쁜 의도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조피아는 지금 자신에게서 대답을 이끌어 내려 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알고 있는 대답을. 그건 자기 스스로 말해야지만 의미가 있는 대답이었다.


 “멈추지 않을 거야. 후회하지도 않을 거고. 그 싸움에서 맹세했어. 누가 이기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신념을 지키겠다고.”


 “좋은 대결이었니?”


 “…응, 정말 좋은 대결이었어.”


 마리아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엔 후회 따윈 한 점도 없었다.


 “비록 내가 지긴 했지만, 누군가와 칼을 맞댄다는 게 그렇게 기쁜 건 처음이었어. 그땐 경기고 규칙이고 다 잊고 싸웠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오직 눈앞의 상대에게 이기겠다는 생각만 했어.”


 그녀의 마음엔 아직도 며칠 전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던 그때의 쇳소리, 잔디 냄새에 섞여 느껴지던 피의 잔향, 입에서 느껴지던 단내, 그리고 자신을 한순간도 흔들림 없이 바라봤던 제이의 눈까지.


 “서로 신념을 걸고 싸웠어.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걸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증명하기 위해 싸웠어.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싸웠어.”


 제이의 신념이 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분명 신념을 다해 싸우는 ‘기사’의 눈동자였다. 그의 신념이 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뒤질 리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분한 건 맞지?”


 “응.”


 조피아는 몸을 일으켜 마리아를 꼭 안아줬다. 그 가녀린 팔은 부드럽고도 따스했고, 또 듬직했다. 마리아는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에 얼굴을 파묻는 것처럼 조피아의 품에 안겼다.


 “그 기분을 잘 간직해, 마리아. 그게 네가 걸어갈 길의 모습이니까. 네가 바라는 기사의 명예는 여기엔 없어. 하지만 그 차이를 알고서도 계속해서 걸어 나간다면, 언젠가는…….”


 조피아는 마리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네가 바라는 기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몰라.”


 “…….”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피아는 마리아가 울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은 마음을 좀 내려놔도 된다. 여기엔 그녀와 자신 말곤 아무도 없다. 이런 데서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속삭임.


 기사.


 니어의 이름을 짊어진 자에게 내려지는 숙명.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 말라, 그것이 니어의 가훈이다.


 하지만 조피아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니어는 올곧고 용감하다. 전전대 가주셨던 키릴 니어도, 그 전 가주였던 스니츠 니어도, 무에나도, 마가렛도, 그리고 마리아 역시 그렇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난과 역경을 피해 가는 방법을 모른다.


 그 고난과 역경이 아무리 제 살을 찢어도, 제 심장을 후벼 파도.


 이 가엾고도 용감한, 그리고 올곧은 니어의 사람들은, 결코 그 시련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 말라. 고난과, 그리고 역경을…….


 글쎄.


 가끔은, 두려워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얕게나마 했다가 다시 마음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조피아는 마리아를 껴안은 채로 쓰게 웃었다. 역시 자신은 마가렛만큼 강인하진 않다. 만약 니어 가문과 마리아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는 마리아를 선택하리라. 무에나의 말마따나 연합회가 기사 자격을 빼앗아 간다 해도, 그게 니어 가문이 기사가 아니란 뜻은 아니니까.


 사실 조피아는 마리아가 기사를 하는 것 따위 원치 않았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돈이라면 자기한테 충분히 있고, 마리아가 원하기만 한다면 최신식의 공방 하나 마련해주는 것쯤 일도 아니다. 런더니움 같은 곳으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해도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다.


 하지만 마리아는 기사가 되기를 택했다. 최신식의 공방도, 런더니움도 아닌 카시미어의 경기 기사가 되기를. 쇠락해가는 가문의 명예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조피아는 안다. 그건 그리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단지 이 아니는 제 언니가 돌아올 장소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다.


 마가렛.


 하아, 마가렛. 네가 어디 있든 네 앞가림 정도는 하는 애란 걸 알지만, 그래도 마리아가 이렇게 힘들어하면 이제 좀 나타날 법도 되지 않았니?


 이 애는 네가 돌아올 장소를 지키려고 이토록 애를 쓰고 있단 말이야. 게다가 네 동료랍시고 하는 사람까지 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잖아. 그 사람은 무슨 죄니? 두고 봐. 돌아오기만 하면 적어도 하루는 날 잡고 설교를 퍼부어줄 테니까.


 원망스러운 마음이 저절로 입가가 삐죽인다. 하지만 조피아가 마리아를 제 품에서 떨어뜨렸을 때 그녀 얼굴엔 약한 표정 따윈 없었다. 그녀는 강해야 했다. 마가렛이 없고 무에나가 방관하는 이상, 마리아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려는 마리아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볼을 주욱 잡아당기며 조금은 엄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건 그거고.”


 “아허, 조히아 언히…….”


 그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힘 북돋아 주는 건 딱 여기까지. 이제 혼나야 할 시간이다.


 “겨우 그 정도 변수로 고려 못 하면 어쩌자는 거니? 이제 기사 경기에 온갖 치사한 수가 다 얽혀 있단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그거 하나 생각 못하고 경기 다 끝나고서 이렇게 끙끙대면 뭐 어쩌잔 건데? 좋은 경기랑 이기는 경기는 다르다고 했어, 안 했어? 응?”


 “해, 햇셔! 햇셔, 조히아 언히! 미아내!”


 주욱 하고 찹쌀떡처럼 늘어나는 마리아의 볼. 사실 이것도 많이 봐준 거다. 마리아는 모른다, 경기 끝난 날 그녀를 입원시키고서 조피아가 코발에게 얼마나 소리소리 질러댔는지를…….


 그래서 조피아는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쉬라고 해도 안 쉬고, 경기에 나가지 말라고 해도 나간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빨리 나으렴, 마리아. 그래야 훈련을 다시 하든 말든 하지.”


 “조, 조피아 언니? 진짜? 나 다시 가르쳐 줄 거야? 정말?”


 “그래야지 뭐 어쩌겠니? 멋대로 깨지고 돌아오는 거 마음 졸이며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거 아냐. 적어도 내 손으로 갑옷이라도 입혀주면 덜 심란하지 않겠어?”


 그 말은 곧 곁에 두고 직접 조지겠다는 뜻. 조피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해맑았던 마리아의 얼굴에 조금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뭐긴, 앞으로 네 일정 관리는 전부 내가 해주겠단 거지. 영광으로 알아. 본선 경기까지 진출했던 경기 기사 출신 코치 영입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어, 언니 너무 진심으로 그럴 필욘…….”


 “아냐, 내가 너무 안일했어. 네가 끝까지 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내가 진심이 안 될 수가 있겠니? 그러다가 네가 또 형편없이 지기라도 해 봐. 나중에 마가렛 돌아왔을 때 무슨 낯으로 보겠어?”


 “히익…….”


 다시 조피아의 지지를 받아낸 건 좋은데, 그 앞날이 훈련의 가시밭길이라니. 마리아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조피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선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제이 씨가 늦네! 무, 무슨 일 있으려나? 어, 언니 또 제이 씨랑 싸운 거 아니지?”


 “너 진짜……. 누가 들으면 내가 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사람인 줄 알겠다.”


 “그런 거 치곤 제이 씨 병원에 데려온 날부터 신경 곤두서 있었으면서…….”


 “그, 그건 걔가 괜히 사람 오해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그 녀석 괜히 눈매만 더러워서 꼭 사람 탓하는 것처럼 봐 놓고선…….”


 “오해? 눈매?”


 마리아는 진짜 몰라서 물어본 것뿐이었지만, 왠지 그때 제이를 데려오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것도 부끄러운 조피아는 말해주지 않겠다는 듯 마리아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선 문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야! 너 언제까지 문 앞에서 밍기적거리고 있을 거야? 왔으면 빨리 들어오기나 해!”


 “언니 대체 어디다 대고…….”


 그러나 마리아는 그 한심하단 말을 채 끝맺을 수 없었다. 진짜 조피아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인지 즉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불쑥 들어왔으니까. 심지어 빈손도 아니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밀고 들어온 건 음식 카트였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제이였다.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붕대투성이 깁스까지. 객관적으로 보자면 마리아보단 덜 심각했지만, 곱상한 마리아와는 달리 워낙에 원본부터 후줄근한 상판이다 보니 네 배는 중환자처럼 보였다.


 아니 그 전에 왜 저 사람이 저걸 끌고 온 걸까. 마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이 씨?”


 “아하하, 이틀 만인데 되게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네요. 안녕하심까, 마리아 아가씨.”


 “아, 음. 안녕하세요. 근데 그건 뭐예요?”


 “뭐긴요. 오늘 점심 식사죠.”


 “…….”


 그야 식사인 걸 누가 모를까, 카트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는데. 문제는 대체 왜 제이가, 그것도 자기만큼은 아니어도 꽤 중환자가 그걸 끌고 오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그 의문은 옆에서 조피아가 투덜거리며 일어서는 것으로 더욱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왔으면 왔다고 하지 뭘 문밖에서 눈치나 보고 있는 거야? 지나가는 사람 다 쳐다봤겠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던데 보긴 누가 봄까. 여기 환자동을 아예 통째로 빌리셨다던데.”


 어라.


 “누, 누가 그래?”


 “뭘 누가 그러긴 누가 그래요. 간호사 분들부터 해서 주방 분들까지 모르시는 분들이 없드만. 어이구, 돈도 많으셔.”


 “기, 기자들 몰려올까 봐 그런 거야! 그리고 조용한 게 좋잖아?”


 “어이구, 어련하시겠슴까.”


 “야! 너 요즘 막 기어오른다?”


 어라라?


 옆에서 입으로는 툭툭 쪼아도 손은 부지런히 제이를 도와 상을 차리는 조피아. 그리고 그런 조피아의 보조를 받으며 전골냄비며 각종 꼬치에 튀김에 빵에……. 아무튼 무슨 카트 속에서 끝도 없이 음식을 꺼내는 제이.


 저 둘이 원래 저랬나? 마리아는 뭔가 달라진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태도가 달라진 건 아닌데, 뭔가가, 으음…….


 “언니, 제이 씨랑 화해한 거야?”


 “뭘?”


 “저번에 막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고 그러고……. 안 좋게 헤어졌잖아.”


 마리아는 혹시라도 괜히 꺼진 불 들쑤시는 꼴 아닌가 눈치를 보며 말한 거였지만, 조피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이도 그랬고 말이다.


 “아, 그거? 어제 다 풀었어.”


 “사과는 별개지만요. 다음 번 대결엔 꼭 이겨서 그때 말 취소받을 검다.”


 “어머, 그런 소린 본선 진출할 실력이나 기르고 다시 하지 그러니?”


 “두고 보십쇼. 아주 사과를 그냥 대문짝만하게 받아버릴라니까.”


 “…….”


 둘의 대화를 들으며 마리아는 괜히 자기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이쪽은 계속 신경 쓰고 있던 건데 정작 당사자들은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화해했다고 땡, 이라니. 마리아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음식은 왜 제이 씨가 가지고 오신 거예요? 설마 주방에서 일하시는 거예요? 언니가 병원비 안 내준 거 아니죠?”


 “마, 마리아! 너 진짜 날 뭘로 보고……. 야, 너 때문에 나 또 오해받잖아!”


 “그야 평소 행실이…….”


 “뭐?!”


 “…아니, 제가 평소 행실이 나빠서 그렇죠. 예에, 제 잘못임다.”


 제이는 조피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꼬리를 내렸다. 어째 맞먹는다 싶더니 조금 조피아가 인상을 쓰자 금방 쪼그라드는 꼴이 퍽이나 우스워 보였다.


 세상에 이 정도로 겉모습과 내면이 다른 사람이 또 있을까. 참 생긴 건 다 씹어 먹을 곰처럼 생겨서 무슨 숙맥도 이런 숙맥이 다 있담……. 마리아는 굳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도 않았다. 어째 제이와 함께 하면서 감정이 더 풍부해지는 마리아였다.


 “그래서 일단 제이 씨가 직접 음식 만들어 오신 거죠?”


 “예에. 실은 여기 병원식이 진짜 맛있더라구요. 참 병원 밥이라는 게 맛있기가 쉽지 않은데, 고급 병원이라 그런가……. 여튼 조피아 아가씨께 부탁드려서 주방에서 견학 좀 시켜달라고 했슴다.”


 “견학요? 제이 씨 다쳤잖아요.”


 “아이, 이 정도 나았음 나머진 침 바르면 나아요.”


 “…제이 씨 침엔 무슨 부러진 뼈 맞추는 효능이라도 있어요?”


 “하하! 우리 마리아 아가씨도 한 농담 하시네요.”


 “…….”


 농담이 아니라 비꼰 건데.


 마리아가 힐끗 조피아를 보자 조피아도 자기한테 묻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리아는 기가 막혔고, 조피아는 뭐랄까 반쯤 달관한 듯했다. 신이 난 건 제이뿐인 모양인지 그는 유난히 수다스러웠다.


 “용문에는 이런 말이 있슴다. 축제는 길면 길수록 좋고 뒤풀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아무튼 경기도 무사히 끝났잖슴까. 무사히 끝났으면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자축해야죠. 축하도 때를 놓치면 다 헛일이라니깐요.”


 “하지만 제이 씨, 경기 결과가……. 제가 제이 씨를…….”


 “마리아 아가씨.”


 제이가 음식을 차리다 말고 씩 웃으며 말했다.


 “전 진짜 그날 경기 엄청 만족했슴다. 마리아 아가씬 어떠셨슴까?”


 그건 정말 때 묻지 않은 웃음.


 그 미소에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도 정말 좋았어요. 누군가와 싸우는 게 그렇게 신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자꾸 말 끊어서 죄송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검다. 읏차.”


 제이가 이번엔 커다란 전골냄비에 육수를 한가득 부으며 대꾸했다. 어째 느낌이 그다지 경기 결과보다도 당장 먹을 음식에 집중하는 것만 같아서, 마리아는 뭔가 자기만 외따로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와아…….”


 휴대용 버너에 불을 올리자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닭고기로 낸 육수인 걸까? 약간 이국적인 향까지 더해져 식욕이 절로 감도는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제이는 이제 꼬치며 어묵을 냄비에 담고 있었다.


 “서로 후회 없는 경기를 치렀잖슴까. 안 그렇슴까?”


 “그건 그렇지만…….”


 “오늘 연회에 내일의 걱정을 가져오지 말라. 어때요, 멋진 말 아님까?”


 제이의 넉살에 마리아는 결국 어이가 없다는 듯 픽하고 웃었다.


 “그것도 용문 쪽 격언이에요?”


 “아뇨, 이건 제 은인이신……. 아, 이 자리 안 계시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제 아버지와도 같은 분께서 알려주신 인생 철학임다.”


 “풉.”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는 제이를 보고 마리아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자랑스럽게 말해서 뭐라 대꾸하기도 애매했으니 말이다. 뭐랄까, 이럴 때 보면 제이는 정말 사람을 웃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쩌면 그건 그가 만들어 내는 따뜻한 음식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이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제이 씨. 저, 제이 씨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별말씀을요.”


 “마틴 아저씨 가게에서 일하신다고 하셨죠?”


 “예에, 어르신 가게에서 신세 좀 지고 있습죠.”


 “헤헤, 퇴원하면 놀러가도 돼요?”


 “아니, 안 돼.”


 조피아가 좋은 분위기를 칼로 가르듯 딱 잘라 말했다. 마리아는 너무하다는 눈빛으로 조피아를 바라봤지만, 이번엔 그녀의 말보다 조피아의 말이 더 빨랐다.


 “네 훈련도 맡는 겸해서 이 녀석 훈련도 내가 봐줄 거야. 그러니까 제이 너, 퇴원하면 내 저택으로 짐 옮겨. 아니다, 그냥 몸만 와. 짐이야 뭐 마틴에게 옮겨달라고 하면 되겠지 뭐.”


 “엑, 조피아 아가씨. 훈련 봐주시는 거야 감사하지만 저 가게 일도 해야 하는데요.”


 그 말에 어이가 탁 풀렸는지 조피아는 한껏 제이를 째려봤다.


 “이래서 재능만 있는 녀석이 싫다니깐. 너 지금 기본기가 엉망이야, 알아? 그걸 단순히 실전 감각이랑 임기응변으로 어찌어찌 해낸 거 같은데, 경기 종류는 네 생각보다 훨씬 많고 이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야.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한다고 해서 이기는 건 아니라고! 일주일 내내 훈련만 해도 모자를 텐데 어디서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앉아 있니, 응?”


 “아이고, 안 됨다. 저 정기적으로 주방에 안 들어가 주면 죽는 병에 걸렸단 말임다.”


 “그런 병이 어딨어?! 너 진짜 맞을래?”


 상대가 환자란 것도 잊은 채 멱살을 잡는 조피아와 딴청을 피우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제이. 그 푸근한 모습에 마리아의 입가엔 몇 번째인지 모를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의 말대로다.


 내일 일을 굳이 오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일단 승리를 즐기자. 비록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더라도,


 그들의 대결은, 그 반짝임은……. 분명 서로가 후회 없이 싸웠음을 증명하는 것일 테니.


 “마리아! 욘석, 얼굴빛이 많이 좋아졌구나!”


 “하하, 이거 제이가 또 솜씨 좀 부렸나 보군. 내가 이겼지, 포? 제이 이 녀석이 이런 데 와서 주방 안 들어가 보곤 못 배긴다니까. 약속대로 자네 술은 내 거야.”


 “아이고, 자식아! 아니 환자인 놈이면 좀 침대에 얌전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너란 놈은 진짜……!”


 상이 차려지자 얼마 안 있어 마틴과 코발, 포겔바이데가 들이닥쳤다. 사람이 셋이나 더 늘자 드넓은 병실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하기야 코발 한 명이서 사람 서넛쯤 되는 덩치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들은 돌아가며 마리아의 등을 두드려줬고, 제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줬다. 가뜩이나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더 엉망이 되자 마리아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곤 배길 수가 없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병실은 소란스러웠다.


 웃음은 끊이질 않았고, 코발이 몰래 가져온 술로 결국 술판도 벌어졌다. 조피아가 매우 못마땅한 눈으로 코발을 째려보긴 했지만, 결국 딱 한 병만 다들 돌려 마시는 걸로 합의를 봐주기도 했고.


 하나가 끝났다. 끝은 결국 새로운 시작. 앞으로 그들 앞에 펼쳐진 시련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승리를 즐기자. 내일의 걱정은 내일 하면 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그날 카시미어의 한 고급 병실에선 조촐하고도 화려한 자축 파티가 열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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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 포인트 도달!!!!!


아 진짜 너무 힘들었다..........


마지막은 역시 놀고 먹는 거로 마무리하는 원피스식 엔딩이 진리지


어쨌든 다 잘 풀린 거니까.....다들 개성 잘 드러나게끔 노력했는데 재미도 잘 드러났음 좋겠고.....


벌써 200페이지 넘겨서 이미 단편각은 예전에 지나왔긴 한데....지나온 거 이상으로 더 써야 하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먼 길까지 같이 해주시면 감사하고 감상 많이 써주심 감사합니다.


그리고 원래 제가 정한 원칙이 체크 포인트 도달하면 라타토스랑 제이 기사 번갈아가며 쓰는 건데 


둘 다 장편각이라 가뜩이나 느린 속도로 어느 천년에 끝날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제가 유기할 가능성도 있기도 하고


그래서 좀 원칙을 느슨하게 해서 투표로 다음에 쓸 거를 받아볼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음.....


일단 이건 플롯 짜보고 결정해보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합니다...질문도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