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조절 잘못해서 이번 편 분량 어어어엄청 많다... 미안하다!!


시리즈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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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을 몇 번 하고,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나 방 주인의 들어와도 된다는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스펙터? 안에 있어?"

몇 번을 두드려도 돌아오지 않은 대답. 잠시 방을 나갔나 싶지만, 사람을 불러놓고 어딘가로 갔을 리가 없다. 2분 정도 기다려봐도 딱히 변하는 건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 발생한 건가 싶어 주머니에 있는 마스터키를 꺼내 들었다. 남의 방에, 그것도 이성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매너랑 전혀 동떨어진 행위지만, 무슨 일이 안에서 발생할지 모르는데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않은가.

문이 열리자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보이는 건 정지한 레코드판과 방치된 석공 부품.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산들바람에 춤추는 먼지들. 그리고, 그 옆의 침대에 앉아 있는 은발의 여성이었다.  

오프숄더 형태의 드레스를 입은 채, 여성은 독실한 신도와도 같이 깍지를 끼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허해 보이는 붉은색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어딘지 모를 심연. 저 익숙하면서도 두려운 모습에, 계속 잠들어 있던 불안감이 손끝에서 꿈틀거렸다.

"아아… 이 목소리는… 박사님이시군요…"

평소와는 다른 언변과 목소리 톤. 아니, '평소'라고 하기엔 지내온 시간을 생각하면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 저 탁한 눈동자와 광기 어린 미소, 마리오네트가 움직이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스펙터… 너…"
“오랜만에 당신을 보게 되다니… 그 분께서 제게 드리는 축복일까요…? 우후후…”

손끝에서 놀던 불안감은 전신으로 퍼져 다리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힘없이 풀썩 주저앉아버리니, 부정적인 감정들이 뭉쳐진 그림자가 내 정신을 좀먹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켈시가 그렇게 말했는데, 전혀 아니지 않은가. 기껏 원상태로 돌아온 스펙터의 인격이, 다시 수녀 시절로 회귀해버렸다.

"나 때문에…?"

어째서, 라고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곧바로 내 사고를 뒤덮었고,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그 답은 쉽게 도출되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그녀를 전장에 데려갔다는 이유밖에 없었다. 정제되지 않은 오리지늄으로 가득한 환경. 걸어 다니는 감염원인 폼페이. 그리고 그곳에서 날뛴 스펙터. 인과관계를 따져봐도 이건 내가 저지른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켈시 녀석이 한 말이 맞았다. 너무 편의를 봐줘서 이런 일이 일어나 버린 거다. 화내서라도 말렸어야 했다. 하다못해 데려가도 출전시키지 말아야 했다. 기껏 회복한 중환자에게 두말할 필요도 없는 잔인한 짓을 하다니. *용문 욕설*. *빅토리아 비속어*. *카즈델 패드립*. 알고 있는 온갖 욕설을 이런 짓거리를 한 놈에게 퍼부었다. 

숨이 가빠지며 시야가 촉촉해지고 있을 때, 사람의 손길이 양쪽 뺨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양손에 의해 시야가 90도 정도 위쪽으로 회전했다. 내 양쪽 눈에 보이는 건, 비단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에 가려진, 여성의 탁한 가넷 한 쌍. 어제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그 반짝임을 다시 못 보게 된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내 불찰이라는 것에, 기껏 참아왔던 감정의 둑이 터질 것만 같았다.

"미, 안…"
"...풉."

내가 드디어 미쳐서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가? 감정의 족쇄가 풀리기 직전, 이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은 웃음소리가 앞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 내 얼굴을 잡고 있던 양손은 주체 못 할 감정에 스며든 것처럼 움찔거렸다.

"스…펙터?"
"풉… 푸흡… 아하하하!!"

방안은 호탕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양손은 어느새 여성의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라도 나온 걸까. 한손을 들어, 눈가를 쓰윽 문지르더니, 내 눈앞의 여성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며 말을 던졌다. 

"아~ 이렇게까지 반응해줄 줄은 몰랐는데. 박사는 반응이 너무 재밌단 말이야."
"스펙터… 이건… 무슨?"
"뭐긴 뭐야." 

뇌의 프로세스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쏟아져 나올 거 같던 감정의 파도는 역류하여 다시 목구멍 너머로 급히 사라져갔다. 그런 나를 두고 여성은 일어나서, 어두웠던 방의 조명을 켰다. 갑자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떠보니, 오페라의 배우와도 같이 과장된 몸짓과 함께, 스펙터는 외쳤다.

"흔히들 말하는 서프라이즈지!"

때마침 뇌내 프로세스가 리부트되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흐려져 있던 이성이 점차 제 기능을 되찾았다. 흩어진 퍼즐이 하나둘씩 끼워맞춰질 때마다, 혼탁했던 머릿속이 말끔해져갔다.

"박사도 참 순수하네~ 그 정도로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어."

눈가에 맺힌 이슬을 소매로 쓱 닦고, 턱 막혔던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어, 지금 상황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생각해보았다. 

"설마 그런 표정까지 지을 줄은 몰랐다니까. 내가 미안해질 정도로."

그리고 곧바로 상황에 대한 판단이 끝나자, 목구멍 속으로 역류할 것 같았던 감정이, 새로운 형태의 옷을 입고 다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응? 박사? 괜찮아? 왜 답이 없어?"

아슬아슬하게 날뛰려 하는 체내의 야수를 제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박사. 어디 가?"
"..."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온 김에 감상이라도 들려주고 가!"
"너라면 하고 싶겠냐!"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려 하니, 오른팔에 갑자기 무게추가 달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이 빌어먹을 에기르 여성이 뾰루통한 표정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있는 거 아닌가.

"놔! 팔 뜯어져!"
"감상 들려줄 때까지 안 놔!"
"아파! 아프다고! 놔!"

둘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계속 벌어졌다. 찢어질 거 같은 고통이 어깨에서 날뛰었지만, 이건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므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내 팔을 이용한 줄다리기는 그렇게 한동안 지속됐다. 복도 너머까지 들릴 거 같은 내 비명은 덤이다.



“박사~ 슬슬 화 풀어. 응?”

찢어질 뻔한 팔을 두 손으로 흔들며, 스펙터는 나에게 부탁해왔다. 덕분에 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아무리 봐도 최소한 실금은 간 거 같은데 내일 진단 한 번 받아야지.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달래는 거라고 보기엔 어린아이를 놀리는 것 같은 스펙터의 저 태도. 아무리 봐도 반성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여기 올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나 삐진 거야?”

어찌어찌 스펙터의 손길을 뿌리치고 돌아온 사무실. 따라와서 옆에서 계속 말을 걸고 있는 스펙터를 무시하며, 조금 전까지 손에 안 잡히던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여전히 집중을 못하고 있으니 처리하는 ‘척’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 같군.

난 온갖 생각에 다 빠져버려서 눈앞이 깜깜해졌는데, 정작 본인은 날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은 내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에 합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 기분을 부정해버렸을 때의 불쾌함을 옆에서 내 볼을 쿡쿡 찔러대는 여성이 알기나 할까? 다음에 두고 보자.

“윽?!”

귀속으로 들어온 미온의 산들바람이 몸을 껑충 뛰어오르게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보이는 건 그 산들바람을 만든 장본인인, 스펙터의 장난기를 머금은 입술이 있었다. 몸을 숙인 덕에 오프숄더 드레스 너머로 보이는 살갗의 계곡에 먼저 시선이 간 건 덤이다.

“이제야 이쪽을 봐주네. 계속 삐진 줄 알았잖아.”
“...딱히 삐지진 않았거든.”
“그렇게 말하는 것부터 전혀 아닌데?”

대원들에게 얼굴에 감정이 곧 드러난다고 자주 듣긴 하지만, 이럴 때 유독 그리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헬멧과 후드를 애용하는 거지만, 하필 이 쪽팔림을 감추고 싶은 이 순간에 세탁기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 흠이다.

“자.”

어느새 스펙터의 양손에는 커피가 들어간 머그컵이 한 잔씩 쥐어져 있었다. 이 익숙한 향기는, 얼마 전에 아이린한테 받았다는 그 원두로 만든 건가? 아니, 그 이전에 언제 이걸 만든 거지?

“이거 마시고 화 푸는 거다?”
“...제멋대로야 진짜. 누구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는데.”
“심장이 멈춰? 왜?”
“본인이 모르는 거냐. 나 참…”

머그컵을 입에 대며 불평을 토했다. 며칠 전에 마셔봤던 향에 복잡한 머릿속 고민이 첨가되니, 오늘따라 유독 커피가 썼다. 그런 내 생각을 알기나 하는지, 스펙터는 잠시 허공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음…? 설마, 날 그렇게 걱정한 거야?”

이제 알아차린 거냐. 속으로 딴죽을 걸며, 별다른 답을 하지 않은 채 서류를 뒤적였다. 그랬더니 그걸 긍정한 걸로 받아들였는지, 스펙터의 흥미롭다는 것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흐음~ 뭐야. 박사. 날 그렇게 걱정해준 거야? 응? 좀 감동했어.”
“얼굴 찌르지 마.”

그런 내 말이 들리지도 않다는 듯, 스펙터는 내 볼을 이리저리 잡아 당기고 주물렀다. 내가 종종 뺨을 주무를 때 불쾌한 기분을 표출하는 어린 오퍼레이터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어쩐지 샤마르가 그렇게 싫어하더니. 앞으로는 자중해야겠다.

“애초에 말했잖아. 헌터는 이 정도로 안 죽는다고.”
“앞에서 피를 토하는데 그럼 걱정을 안 해?”
“그래도 지금은 멀쩡하잖아? 그럼 된 거지.”
“너 중환자인 거 잊었어? 그랬다간 죽을 수도 있…”
“죽을 때가 되면 그땐 의연히 죽는 거지. 안 그래?”
“뭐…?”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 저렇게 간단하게 ‘죽음’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한 걸 말하듯이 태연한 태도에, 말하려고 했던 모든 걸 잊을 거 같았다. 

“박사. 어떤 생물이든 언젠간 죽게 되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생물에 아름다움이 있는 거야.”
“...”
“내가 이 병으로 다시 미쳐버리게 되던, 있을 리 없지만, 저 바다의 저급한 생물이랑 춤을 추다 고꾸라지던. 아니면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죽게 되건. 그 모든 건 전부 내게 ‘바다 저편으로 가라앉을 때’가 되었을 뿐이야.”

기억 저편에 처박혀 나올 기미가 없던 실루엣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온기. 정적. 불쾌감. 오감이 내 전신을 가열해 오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힐 거 같은 고통과 함께 느껴지는 헛구역질에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 박사. 내 몸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당신의 탓이 아니라, 그저…”
“언제든 죽게 되어 있다고…”

뭐라고 이것저것 말하는 거 같지만, 그걸 얌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내 머릿속은 평온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둑을 부수고 흐르는 감정의 격류는, 어느새 내 입 끝까지 도달했다.

“그 죽음이 안 슬픈 게 아니잖아.”
“...박사?”
“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눈가가 축축하고, 코끝이 지끈거린다. 심장은 경주마처럼 맹렬히 뛰어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고, 그 때문인지 손발의 끝이 감전된 듯이 저려왔다. 그러나 그걸 무시하고 말을 뱉을 정도로, 쌓고 숨겨 왔던 감정은 강렬했다.

“박사… 우는 거야?”
“알고 있어. 내가 말하는 건 논리 따윈 없는 단순히 어리광이고, 너에 대한 괜한 참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감정의 근원지에 있는, 지금까지 잊어온 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체르노보그에서 희생된 로도스의 동료들. 용문에서 죽어가던 감염자들. 빅토리아에서 쓰러져 있는 시민들. 죽어가는데도,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눈빛과 비명. 

하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하게. 그리워질 정도로, 아련하게. 

기억의 중심엔, 내 눈앞에서 잠드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난……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가고 싶어.]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에 와서야 우리의 동료가 되고 싶다고 말한 채 가버린, 회색 머리의 그 사람을. 지금도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여성을 보고 착각할 정도로 내 가슴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제발 좀… 사람 말을 하면 좀 들어! 난 사람 죽는 꼴 보는 취향 따위 없어! 누구든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박사…”
“...로도스의 지도자로서, 대원인 너에게 딱 하나만 명령을 내릴 거야. 이거 하나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해.”

아아. 빌어먹을. 

지금 난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내 눈앞에 있는 여성은, 날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분명 형용할 수 없는 꼴불견 같은 모습이겠지. 과거에 얽매이고 그 과거를 현재에 겹쳐 보면서 이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남자가 잘나 보일 리가 없잖은가.

“함부로 죽지 마…! 언젠가는 죽네 뭐네 하기 전에, 넌 아직 안 죽었다고! 살 수 있을 만큼은 있는 힘껏 살아! 병이고 적이고 뭐고 간에! 사람답게 충분히 살아가란 말이야! 조각하고 싶으면 마음껏 조각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으면 실컷 해! 너의 취미 어울려줄 사람이 없다면 뭐든 내가 어울려줄게! 아니, 나까지 안 가도 우리 로도스가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까…! 모두가 나랑 같은 마음일테니까! 그러니까…!”

[여긴 용문이나 빅토리아가 아니야, 박사. 모두가 살아있는, 로도스다.]

빌어먹을 이 순간에 망할 켈시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가증스러운 녹색 필라인은 이미 내가 얄팍하게 숨긴 감정 따윈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거였다. 다 알고 있었기에, 그녀 나름대로의 조언을 한 거였다. 말을 할 거면 똑바로 말할 것이지. 덕분에 감사할 생각이 1도 들지 않는다.

“제발,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부탁할게.”

이미 눅눅해진 뺨을 소매로 쓱쓱 문질렀다. 계속 숨겨왔던 감정을 전부 뱉은 덕인지, 청량한 탄산수를 마신 거 같이 속이 후련해졌다. 그러면서 서서히 제자릴 찾아오는, 감성에 잡아먹혔던 이성.

“...”

그러고 나서야 보이는,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스펙터의 모습. 이윽고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조금 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뭔가 이것저것 부끄러운 소리를 실컷 했구나, 라고 체감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해서,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바보. 멍청이. 머저리. 아무리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고 해도, 사춘기 중학생이나 할 법한 대사를 읊다니. 이곳에 엘리시움이나 우타게 같이 소문내기 좋아하는 오퍼레이터가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그들이 있었다면 한동안 오퍼레이터들의 술 안주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 미안… 소리지르고 말해서… 잊어도 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에서 무언가가 달려와 콩, 하고 약하게 부딪혔다. 무엇인가 싶어, 시선을 내리니, 아까까지 멍하니 보고만 있던 스펙터가, 날 있는 힘껏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내가 너무 운 나머지 기절하고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날 잡아서 저먼 스플렉스라도 날리려는 걸까. 어느쪽이든 두려워진다.

“저… 스펙터 양? 이건 대체…”
“...들려.”
“네?”
“박사의 가슴 속에서,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와.”

순간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곧 그녀가 내 심장박동을 듣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매우 격렬하고, 아름다운 선율… 박사가 하는 말, 진심이었구나.”
“...거짓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잖아.”
“후후. 그냥 해본 말이야.”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는 것처럼, 스펙터는 한동안 내 가슴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의 부끄러운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은 꽤 잦아들었지만, 그녀의 머리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화장품의 향기와, 몸이 맞닿아서 얇은 드레스 너머로 느껴지는 여성의 곡선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게 했다.

“고마워. 박사.”

체감상 5분 정도 지났을까. 스펙터는 손을 떼고 몇 걸음 뒤로 움직였다. 옅은 조명과 저녁임을 선고하는 창밖의 주황빛 하늘에 비친 그녀의 붉은 색 눈동자는, 어째선지 평소보다 더욱 반짝이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녹슨 부분을 깎아낸 쇠와도 같이.

“내가 배려가 부족했네. 사과할게. 나한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구나.”
“아니, 사과할 필요까지는…”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 말을 꺼내기가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나만 그러고 내 앞에 있는 에기르 여성은 이 상황조차 즐기고 있는 것일까? 어느쪽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참아왔던 갈증도 한계여서 테이블에 있던 머그컵을 원샷한 건 덤이다.

스펙터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의자 손받이에 한쪽 발을 얹었다. 그 상태로 날 한동안 응시하더니, 그녀가 먼저 이 어색한 침묵을 깨부쉈다.

“그나저나, 박사. 아까 말하다가 말았지? ‘네가 뭘 하던 간에, 내가 전부 어울려주겠다’고.”
“...부끄러우니까 성대모사까지 하면서 말하지 말아줘.”
“어머, 그럼 부끄러울 정도로 거짓말이었다는 거야?”
“그건, 아냐.”
"후후. 농담이 짖궂은 점, 사과할게."

또 이 흐름인가. 날 놀리는 맛이 있는지 스펙터는 다시 한번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손을 내 머리에 푹 올리더니, 이리저리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와도 같이. 혹은,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을 보는 주인과도 같이.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축축해져 있는 내 마음속에 햇빛이 되어주었다.

“박사.”
“왜.”
“그래서, 내 뮤지컬은 어땠을까?”

이것저것 말하고 있어서 잊었던, 문자의 내용을, 정확히는 스펙터가 날 부른 이유가 떠올랐다. 며칠간 미룰 수밖에 없었던 대답을, 그녀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참 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녀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선 온갖 미사여구를 꾸며야겠지만, 불행히도 이과인 내게 그만한 재능은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최대한 표현을 해줄 수밖에.

“최고로 아름다웠어. 진짜로.”

정말 투박한 표현임에도 그것에 만족한 듯, 스펙터는 한 번 호탕하게 웃더니 머리를 쓰다듬는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상쾌하듯 가뿐한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사무실 자동문으로 향했다.

“어디 가?”
“영감이 갑자기 떠올라버렸어. 그러니 잊기 전에 만들어 봐야지.”
“예술가의 영감은 대체 뭘까…”

뭐가 어찌 되었든, 서로 할 말은 끝났다. 감정은 좀 접어두고 이제 슬슬 현실로 돌아와야 할 타이밍이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이 서류 더미들을 해치워야 야근을 피할 수 있다. 오늘은 유독 피곤한 날인 만큼, 빨리 끝내고 침대로 뛰어들고 싶은 기분이다.

“박사.”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스펙터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것에 고개를 들어보니, 장난기 없이 그저 순수하게 웃는 거 같은 스펙터의 모습이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석양빛을 화장품삼아 살짝 붉어진 뺨과 함께, 그녀는 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것도 매우 치명적인 한 마디를.

“당신이 전한 정열적인 프로포즈, 절대 잊지 않을게.”

뭐라도 말하기 전에, 문은 닫히고, 걸음 소리는 멀어졌다. 간신히 잡은 줄 알았던 이성의 끈은 다시 느슨해졌고, 어이없는 헛웃음만이 사무실 내부를 감쌌다.

아무래도 오늘은 야근 확정이다.



"어머. 글래디아 대장. 간만에 뵙네요."
"상어. 건강해 보이는군요. 켈시 선생님께 임무를 보고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한동안 로도스에 있을 건가요?"
"아쉽게도, 곧 다시 떠나야겠네요. 새로운 정보를 얻은 참이거든요."
"아쉬워라. 무도회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스카디도 같이 갈 예정인데, 상어는 어떠신지? 요양은 충분히 하지 않았나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여기에 조금 더 있을래요. 즐길 게 아직 많거든요."
"집을 가는 걸 마다하다니… 표정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요."
"네. 아주 좋은 영감을 얻어버렸어요. 대장도 잘 아는 그 사람한테서요."
"...흥. 그 사람이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후후. 그러면 편히 쉬시길. 다음 파도에 대비해야 할테니까요."
"네.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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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폭주해버렸어... a4 12페이지라 분할할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흐름이 끊길 거 같아서 그냥 합쳐서 올린다. 덤으로 일요일날 jlpt 있는데 글 끄적이고 있는 난 레전드...


우여곡절 끝에 스펙터편 1부가 끝났다. 감정의 폭발을 제대로 일으켰는지,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네. 그래도 어찌저찌 쓰고 싶은 걸 다 써내서 만족스러운 화라고 생각함. 


전 화에서 단편을 보고 오라고 했었지? 이 화에 대한 밑밥이었음 ㅋㅋㅋ... 


인게임에선 묘사가 흐릿하지만, 박사 역시 사람일 수밖에 없잔슴. 체르노보그, 용문, 빅토리아 등에서 전쟁을 직접 목격하고, 동료를 잃어버린 만큼, 그 트라우마가 상당히 강할 거라고 뇌피셜 오지게 굴렸음. 

눈토끼 프로스트노바 눈나

스펙터 로렌티나 눈나


그래서 생각난 두 캐릭터가 이 두 눈나들임. 


먼저 가버린 과거의 동료(프로스트노바)비슷한 처지(은발의 중증 감염자, 세계관 내 엄청난 강자)현재의 동료(스펙터, 로렌티나)를 과거에 겹쳐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과거에 구하지 못한 동료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을 전부 현재 살아있는 동료에게 헌신함으로서, 이러한 보상심리로 심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방향으로 박사를 묘사했음. 그리고 이제 그 감정을 로렌티나가 알아차렸고, 그 헌신에 감명받고, 박사에 대해 더욱 호감을 느끼는 상태가 된 셈이지. 이게 나중에 질척질척 집착야스가 될지 러브러브 순애야스가 될지는 향후 전개에 달린 셈.


1부 전반을 이렇게 박사의 감정선을 폭발 시키는 밑밥으로 사용해 이렇게 터뜨렸으니 일단 큰 사건은 다 끝났음. 2부부터는 평범하게 꽁냥대는 순애러브러브 일직선일듯. 바로 이어서 쓰고 싶은데, 재취업 해버려서 다시 글쓸 시간이 줄어버림... 가능한 빨리 써올게.


암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부 봐줘서 고마움.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고, 댓글로 감상 한 번 달아주면 더욱 감사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