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에서는 오퍼레이터들간의 상호이해를 위해 때때로 이벤트가 열리곤 한다. 특히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는 그 규모가 커져 더욱 분주해진다. 

국가, 종족, 문화를 넘어서, 같은 깃발 아래에 모인 이들이 지난 1년의 고락을 되짚고, 위로하고, 다가올 새로운 1년을 축복하고, 내년도 넘길 수 있도록 기원하며, 성대하게 파티를 즐긴다. 

그만큼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촐하게 할 수 없다. 간부층은 물론, 각 부서의 책임자와 오퍼레이터 소대장까지 예산을 풀어주며 계획을 세워, 성대한 파티를 열 준비를 한다. 

아미야와 켈시까지 동원되는, 그야말로 총력전이다. 재무부가 과로로 쓰러질 때까지 교제비 명목으로 소비와 환원을 진행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기도 한다.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로도스의 간부로서 이벤트 기획을 짜야 한다. 조금이라도 모두가 기뻐하고, 인연을 돈독히 할 수 있기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나는 어떤 인물을 컨셉으로 한 기획을 생각했다. 


그 인물은, 휘몰아치는 폭설 속에서도 구호물자의 배달을 해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악덕 귀족의 저택 굴뚝으로 침입하여, 부정하게 축적한 재화를 영민들에게 뿌렸다고도 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어두운 밤을 틈타 아이들에게 원하는 물건을 나눠줬다고도 한다. 


테라 전역에서 전해지는 붉은 옷을 입은 전설의 인물― 산타클로스. 

비록 표면적인 행동은 다르지만, 희망을 운반한다는 행동은 같다. 그렇기에, 나는 그만큼 그 역할에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전에 오퍼레이터들로부터 원하는 물건을 조사해서,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에 산타클로스로 분장해 전달한다. 단, 선물을 받은 자는 다음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은 무언가를 보내야 한다는 규칙. 

원하는 걸 받는다면 당연히 기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음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언가를 추가로 전달하는 것을 통해 기쁨과 행복은 연쇄되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들 기뻐하겠지. 선물을 매개체로 그들 간의 커뮤니케이션도 활발해질 것이다. 


이름하여 「오퍼레이션・산타클로스」. 틀림없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설명한 안건도 이해가 어렵지 않을 거라 자부했다. 



"――이 작전지시서 내용, 우리 이외에 다른 인원이 없는데, 틀림없는 거 맞나." 



낮고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잘 울린다. 최대 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작전회의실에 지금 우리 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무실에서 설명하기엔 너무 폼이 나지 않아 이 곳을 썼지만 이제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넓은 공간 한복판에서 쪼그라드는 것이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 줄 몰랐다. 



"네...... 지금 로도스 사원들이 다들 바쁘기도 하고...... 급한 것부터 어떻게든 처리해나가면......"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손끝에서 손가락이 까딱거리고 있다. 초조함을 억누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까지 얼마나 남았지?" 


"40일 정도, 인데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지금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사죄하고 있다. 

루포 족은 흥분하면 감정이 꼬리를 통해 나타난다지만, 평소 그녀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언제나 냉정하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꼬리는 조금씩 미동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둘이서 약 400명분의 선물을 40일만에 준비해야 한다고......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거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텍사스에게, 들어본 적만 있는 시라쿠사 마피아 시절의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 쌓여있는 종이더미, 저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오퍼레이터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방법은 투표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일일이 물어보는 것은 시간도 걸릴 뿐더러 심리적 장벽도 있을 것이기에. 

빨강과 초록 색종이, 별 스티커 등으로 장식한 투표함과 용지를 집무실 앞에 설치, 필요사항만 기입해 투표함에 넣기만 하면 되도록 했다. 

이 방법이라면 표현하기도 쉽겠지. 이렇게 했는데도 다들 참여해주지 않는다면 어쩌나도 생각했지만, 몰래 상자의 상태를 살펴보니 상당히 양이 차 있는 모습이 보였다. 

10월 말에 설치했던 것도 제대로 시간적 유예를 마련했다고 생각했고, 방금 전까지 텍사스에게 자신있게 계획을 떠들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작전이었다. 

...라고 생각했다. 



"―자료 조사는 됐다. 문제는 양인데, 설마 확인하지 않았나?" 



텍사스의 지적과 조금씩 험악해지는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작전 지휘가 어긋나는 순간과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다. 

상자를 뒤집자마자 힘차게 터져나오는 용지들. 언제인가 사르곤의 아카후알라에서 봤던 것 같은 폭포처럼 테이블 위로 쏟아져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 


순진하게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그 결과 모인 것은 대충 세어도 400개가 넘는 요구들. 

그렇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같은 품종을 대량으로 준비하는 것과 개별 품종을 하나하나 따로 준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 말대로다. 하지만 얼핏 보이는 것에는 '휴가'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아, 좋다. 바로 구매 가능한 물리적인 것도 있다. 하지만 정밀조사를 해도 준비해야 할 물품이 최소 300개는 넘을 것이다. 


그것들을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내에 둘이서 준비하고, 그 후 크리스마스 이브 및 당일 총 이틀 동안 오퍼레이터들에게 일일히 배달해야 한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하드코어한 계획이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로, 할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제와서 그것을 철회할 수는 없다. 



"......다들 이 사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어. 분명 기대하고 있을 거야. 그걸 꺾을 수는 없어" 



아직 여유 기간은 있다. 업무에 바빠 아마 잊어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허투로 해도 될 이유는 아니다. 애초에 나 자신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 텍사스, 너에게도 정말 면목이 없다" 



깊은 한숨. 



"......어째서 날 선택한 거지" 


"이 기획을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네가 떠올라서......" 



내 머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텍사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른 로도스 멤버들도 신뢰하고 있지만, 호흡이 잘 맞는다는 점에서는 그녀가 독보적이었다. 



"네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어떻게든 된다. 그녀는 그런 낙관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한낱 어리광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리광이다. 

그 말을 들은 텍사스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어이가 없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였을 것이다. 



"나 참, 막히는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 나도 일단은 배달의 프로니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테니" 


"그렇다면..." 


"그래, 함께해 줄게. 이 수라장을 헤쳐나갈 각오가 있는지 물어본 거다." 


"텍사스......!" 



이렇게 또 나는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린다. 



"정말 고마워! 혼자였다면 솔직히 어쩔 방법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좀 반성해." 


"흐악!" 



올리려던 머리를 그녀의 딱딱한 부츠가 바닥으로 밀어넣는다. 꾸득꾸득 짓눌린다. 한겨울에 금속은 너무 차갑다. 



"아야야, 머리카락 다 빠지겠다, 역시 화났잖아" 


"화 안났다. 어쭙잖게 의지해와서는― 좀 입 다물고 있어!" 



바닥에 밟히면서도 보이는 텍사스의 꼬리는 붕붕 흔들리고 있었다. 화난 거 맞잖아. 뭐, 내 잘못이지만. 



*** 



수라장. 텍사스가 그렇게 표현했던 것처럼, 오퍼레이터 개개인의 리퀘스트를 바탕으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은 역시나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예산 내로 구입 가능한 물리적인 것. 오리지늄 각뿔 같은 걸 제외하면 예산에 대해 웬만한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실제로는 그런 문제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어디에서' 물건을 구해오느냐가 더 골칫거리였다. 

구매센터나 시내에서 살 수 있는 거라면 괜찮다. 그러나 그다지 유통이 되지 않는 물건이 목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할 수 있는 장소 찾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물건을 구해야 하는가도 또다른 문제였다. 특정 제조사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물건은 이쪽에서 센스를 발휘해 골라야 했다. 마침 주둔하고 있던 도시가 용문이었던 것은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염국 최대의 교역도시. 물건 탐색에 있어서 이 도시 이상의 장소는 없을 것이다. 


미로같은 용문시내의 최단경로를 계산하며, 세 시간 예정을 한 시간으로 압축하는 스케쥴 관리, 점원과의 과감한 교섭, 텍사스에게 원한을 품은 마피아나 깡패의 습격...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다. 



"......박사, 정말 내가 이걸 입을 필요성이 있나?" 


"물론이지. 평소같은 모습으로는 늘 하는 배달과 다를 게 없잖아. 크리스마스 같다는 느낌이 필요해." 



크리스마스 이브. 위기협약에 필적하는 고난도 물품 마련 미션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로도스 함내를 돌며 선물을 나눠주는 단계이다. 솔직히 4일 반쯤 전까지는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질문을 바꿔야겠군. 왜 내가 산타 옷을 입는 거지? 그리고 그 머리는......" 



준비기간은 오늘까지, 내일부터 계획이 실행된다. 

텍사스가 입고 있는 옷은 평소의 펭귄 로지스틱스 유니폼이 아니다. 하얀 레이스가 장식된 붉은 원피스. 목에는 녹색 리본에 벨이 달린 브로치. 그야말로 산타클로스다. 



"산타클로스 전승에는 산타 본인이 엘라피아였다거나, 산타와 엘라피아가 2인 1조로 활동했다는 게 있어." 



물론 텍사스에게만 코스프레를 시킬 수는 없다. 

나 또한 뿔이 달린 모자와 의상을 입고 준비를 마쳤다. 다만 뿔 때문에 머리가 약간 무거울 뿐이다. 엘라피아를 비롯한 뿔이 달린 종족의 고생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옷을..." 


"안돼. 텍사스는 루포잖아? 억지로 이런 걸 썼다간 귀나 꼬리가 다칠 수 있어. 네 의상도 루포 용으로 주문제작한 거니까. 잘 어울려. 귀엽고." 



지금 우리의 의상은 이 날을 위해 바이비크에게 의뢰했던 특제품이다. 그녀의 솜씨에는 언제나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렇지만 텍사스는 아직도 뭔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뭐가 문제일까. 꼬리도 문제없이 뚫려 있고,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우물쭈물...... 아, 혹시. 



"혹시 허리 사이즈가, 으악!" 



파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텍사스가 로우킥를 내 다리에 때려박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온다. 



"딱 맞아. 착용감도 좋아. 이제 됐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처음은 프로스트리프부터군" 


"네...... 네 그렇습니다... 으윽... 가장 처음으로 써넣어줬으니까" 



'박사, 이건 뭐지? 크리스마스 선물? 아, 그런 것도 있군. 갖고 싶은 걸 적어넣으면 되나? 그렇다면야...' 


투표용지 박스를 설치하자마자 마주친 것이 프로스트리프였다.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쫑긋거리며 움직이던 불포의 귀와 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컬럼비아의 전 소년병 출신. 이런 건 낮설었을 것이다. 음악과 옷에 신경쓰게 된 건 로도스에 온 이후부터라고 했고, 마침 이 기획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아, 저기 있군" 



프로스트리프는 제1격납고와 연결통로를 잇는 계단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곳에서 보이는 경치가 좋다고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역시 오늘도 빨갛고 검은 헤드폰을 쓴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포착했고, 그녀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박사와 텍사스잖아? 둘 다 그 옷차림은 뭐야?" 


"크리스마스니까" 


"아, 크리스마스니까... 그래서인가?" 



그렇게 말하며 텍사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텍사스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고 만다. 야, 이벤트의 주역이 그러면 어떡해. 

어쨌든, 프로스트리프는 크리스마스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기에, 가장 먼저 찾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흠. 프로스트리프, 메리 크리스마스" 



내 신호를 받고 텍사스가 포장된 상자를 건네준다. 

프로스트리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 갖고 싶은 걸 적어 넣는 상자가 있었잖아. 그거야." 


"어어, 기, 기억은 나지만...... 진짜 줄 거라고는 생각 못해서. 열어봐도 될까" 


"그럼" 



열었을 때의 반응을 알고 싶어서 직접 전달해주는 거기도 하니까. 

프로스트리프는 아직도 놀란 기색이 있는 손놀림으로 정성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그녀의 손톱에는 누군가가 칠해준 듯한, 크리스마스 양식 네일 아트가 칠해져있었다. 



"오, 오오...... 이건......" 



쫑긋쫑긋 움직이는 프로스트리프의 귀. 

그녀가 적었던 것은 새로운 헤드폰이었다. 



"마크 5였지? 그것도 무려 용문 한정 모델이야" 



깔끔한 검은색 바탕 위에 새겨진 푸른 라인. 이 모델 전용으로 개발된 드라이버 유닛이 초저음까지 깔끔하게 전달한다... 는 것 같다. 

찬찬히 물건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보던 프로스트리프가 잠깐 멈추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에 새겨진 사인을 가리켰다. 



"박사, 이 사인은......" 


"어, 그건...... 엠퍼러... Big E가 유명한 래퍼라지? 운 좋게 사인을 받아서" 



'―박사, 마크5를 원한다니 뭘 좀 아는구만. 그런데 일반 모델은 색깔이 좀 촌스러워. 이걸로 가져가' 


통상 마크5도 얻었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펭귄 로지스틱스의 사장이 끼어들어 용문 한정 모델까지 얻을 수 있었다. 


프로스트리프는 그대로 굳어있다. 한정 모델에 사인까지 받은 특별판이지만, 역시 일반판을 주는 게 나았으려나. 혹시 엠퍼러를 모른다면 사인은 그냥 낙서에 불과하니까... 



"괘, 괜찮겠어? 그 황제의 사인이 있다니... 보통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이런 희귀품을......" 



통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텍사스와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텍사스도 음악에는 그리 밝지 않고, 엠퍼러의 그 손으로 능숙하게 사인을 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래? 프로스트리프가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보물이 늘었다" 



프로스트리프는 눈을 반짝이며 상자와 헤드폰을 꼭 끌어안았다. 

우리들은 그녀의 기분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지만, 마음에 들어했다니 좋은 일이다. 



"미안, 그만 흥분해버려 잊어버리고 있었군...... 고마워, 둘 다." 


"아니, 괜찮아. 그러고보니 헤드폰이라면 이미 그 빨간 게 있는데, 어떤 걸 쓸 거야?" 



그녀가 쓴 원하는 물건 쪽지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헤드폰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을 봤기에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계속 쓰고 있었고, 딱히 고장나지도 않은 것 같다. 



"둘 다 쓸 거다. 제품에 따라 소리가 상당히 다르다고 비그나가 그랬거든.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해." 



자신의 취미를 말할 때, 프로스트리프는 조금 부끄러운 듯 꼬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새하얀 피부에도 약간 주홍빛이 떠올라 있다. 



"그래? 나중에 어떤 느낌인지 가르쳐줘"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귀엽기도 하다. 



"아, 그렇지.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줄 것도 있어야지...... 뭘 준비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걸 받았으니" 


"마음만 담겼으면 뭐든 괜찮아"


"그래? 조금 생각해봐야겠어...... 비그나나 평소 도와주는 이들에게 뭔가를..." 


"음,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줘야 할 게 있으니까.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작게 손과 꼬리를 흔드는 프로스트리프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음을 향해 떠난다. 

작전완료. 역시 처음에 주길 잘한 것 같다. 



*** 



"박사, 다음은 머드락이군" 


"그렇, 지...... 윽...... 가능한 한, 서두르는 게 좋겠지......!" 



항상 지나다니는 복도가 끔찍할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분명 계속 걸어가고 있을 텐데, 전혀 진전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박사, 평소에 좀 더 단련을 해 두는 게 좋겠어" 



앞서가고 있는 텍사스가 내 쪽을 뒤돌아보며 기가 막힌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그렇지만, 이 선물 끌차, 무게가...... 텍사스... 조금만 도와줘......" 


"썰매를 끄는 건 엘라피아 쪽이었지? 난 루포인걸" 



묘하게 뒤끝있는 여자였구나, 텍사스. 산타 2인조 이야기도 알고 있었잖아. 

이번 선물은 무거운 만큼 끌차를 쓰고 있지만 끄는 사람이 나약한 건지, 아니면 그 자체로 너무 무거워서인지, 여하튼 옮기는 것도 고생이다. 

게다가 파손되지 않도록 신경써야 하기에 흔들림도 최소화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된 일이다. 땀이 멈추질 않는다. 등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목적지다... 



"――박사?" 


"오, 머드락......" 



운 좋게도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흰 머리가 찰랑였다. 

평소 그녀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호복이 아닌 멜빵바지 작업복 차림,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일이 없는 날엔 채소를 가꾸거나 밭일을 한다고 하니, 그 흔적일 것이다. 



"오늘은 밭일을 했나보네?" 


"음. 감자를 돌봤다. 너희들은...... 뭐지, 그 모습은......" 


"아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크리스마스인 고로, 이렇게 차려입었지" 


"......텍사스였나, 당신은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만" 


"나도 평소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겉치레에 신경쓰는 누구 씨 덕분이지."



그런가 납득하며 미소짓는 머드락. 아니, 누구 씨라뇨. 좋잖아. 멋지잖아.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텍사스가 가로막으며 신호를 주었다. 뭐 됐다. 시간도 빠듯하니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실어온 선물을 그녀 앞으로 옮겼다. 



"그런고로, 메리 크리스마스. 머드락" 


"이건, 맥주......?" 



내용물은 20병들이 맥주 케이스였다. 



"그냥 맥주가 아니지. 뚜껑을 보도록" 


"음...... 앗......!" 



머드락의 붉은 눈동자가 뚜껑에 써진 문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진다. 반응 좋다. 

뚜껑에는 컬럼비아어로 '빅 밥'이라 쓰여 있다. 그라니와 스카디가 어떤 작전 중 만난 인물이자, 머드락의 친구이기도 하다. 



"컬럼비아 농장에서 재배한 보리와 홉으로 만든 신상품 맥주라는군" 



'아직 시제품이지만, 이걸 그 녀석에게 보내다오―' 


연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와 함께 이 맥주가 도착했다. 

지금 로도스는 컬럼비아와 꽤 떨어져있는데도 일부러 특급배송으로 보내주다니. 꽤 사람이 좋은 것 같다. 



"고맙다. 그는 이런 얘긴 하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걸 내게?" 


"내 방 앞에 걸어놨던 상자 기억나? 원하는 걸 적어달라고 했던 그거" 


"아, 그러고보니...... 하지만, 난 아무것도..." 


"네 소대가 대장한테 뭔가 선물을 해달라고 적어줬어" 



쪽지 중, 클립으로 고정된 용문폐가 동봉된 것이 들어있었다. 요구사항은 적혀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전해달라고는 적혀있지 않았다. 

구체적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자니, 언젠가 머드락이 말했던 친구의 이름과 일이 떠올랐다. 



"그랬, 군...... 그들이, 내게...... 말해줘도 괜찮았는데"



그녀는 병을 하나 손에 쥐고 눈을 가늘게 뜨며 소중한 듯 그것을 쓰다듬었다. 



"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훌륭하게 성공한 것 같다.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분명 일종의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머드락 소대는 머드락이 로도스에 들어오기 이전, 리유니온 시절부터 있어왔다. 멤버들도 거의 같은 인원을 유지 중이니, 꽤 길게 함께해온 사이인 것이다. 

또한 멤버들도 대장처럼 과묵하고 그다지 눈에 띄고 싶지 않아하는, 수줍음 많은 면이 있다. 가능하면 몰래 전해주고 싶었겠지. 

아쉽게도, 그렇게는 안 됐지만. 



"그럼, 머드락. 일단 이번에 선물을 받은 이는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뭔가를 선물해주는 것이 규칙이다" 


"그런가, 하지만, 소대 모두에게...... 이렇게 갑자기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맥주 케이스를 바라본다. 

친구가 직접 만든 것. 그뿐만이 아니다. 친구가 만든 맥주로 전우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분명 즐거울 것이다. 

후하게도 도착한 맥주 양은 빅 밥 씨에게 지불했던 값을 넘는 것이었다. 그도 아마 친구가 다른 이들과 함께 기뻐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아아, 물론 혼자 마신다면 신경쓰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양은...... 좀 그렇지?" 


"그렇겠군...... 배가 부글부글해지겠어" 



그렇게 말하며 배를 쓰다듬는 머드락. 조금 헐렁한 작업복이 구깃구깃해진다. 

엉뚱한 표현에 그만 쿡쿡 웃고 마는 텍사스. 참지 못하고 나도 함께 웃었다. 



"왜 그러지, 갑자기......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다들 머드락을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어쨌든, 이걸 소대원들에게 나눠줄 거지?" 


"음. 바로 알아주다니 고맙다. 너희들은 이제 다른 오퍼레이터들에게 가는 건가?" 


"그래. 아직 선물 양이 많아. 창고로 돌아가서 이렇게 전달해주는 걸 반복하는 거야." 


"일이 끝나고 괜찮다면 다시 들러줬으면 좋겠다. 너희가 마실 맥주를 남겨둘테니" 


"고마워. 그럼 최대한 열심히 빠르게 해야겠군" 


"그럼...... 미안하지만, 그 수레를 빌릴 수 있겠나" 


"물론이지. 그런데 조심해. 맥주 양 때문에 꽤나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머드락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레에 맥주를 실어 부드럽게 끌고나갔다. 

바퀴에서도 삐걱이는 등 이상한 소리가 나지 않고, 혹시 깨질까봐 걱정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그녀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말했지, 평소에 운동 좀 하라고...... 어느 정도는 나도 단련법을 알고 있으니 같이 도와줄게" 


"사, 살살 해주세요......" 


"과연 어떨까" 



텍사스의 지적에 아무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 



"아까 곰인형으로...... 이제 반 이상은 된 것 같다." 



체크리스트에 선을 그으며 텍사스가 말했다. 



"그렇군, 이제 후반부란 말이지. 이 정도 페이스면 순조롭겠어" 



역시 드론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전해주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창고에 쌓아놓은 준비된 선물들을 처음 봤을 때는 그 광경에 압도당했지만, 지금은 눈에 띄게 줄어있었고, 그만큼 우리들도 일이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인기 좋던데? 텍사스 산타." 


"......그래?"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본인도 싫지만은 않은 것 같던걸. 

아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당황했지만, 선물을 건네주다 보니 착한 아이에게는 다시 올 거라고 말하기도 했잖아. 



"뭘 히죽거리고 있어" 



팍팍, 그녀의 꼬리가 내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이 이상 놀렸다간 꼬리가 아니라 주먹이 날아오겠다. 



"아무 것도 아냐. 다음 선물은 꽃과 도감이군" 


"이번에도 자신이 받고 싶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의뢰야. 그것도 설마 블레이즈가 그런 걸 의뢰하다니" 


"남몰래 누군가에게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해주고 싶은 사람도 많을 거야. 블레이즈도 그런 마음이 있었겠지" 



'―저, 박사. 이거 다른 사람이 받을 선물 적어도 괜찮을까? 물론 비용도 내가 낼게' 


블레이즈가 머뭇거리며 한 요청은, 어떤 인물에게 꽃과 도감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평소 막무가내에 의료부와 손발이 안맞거나 켈시에게도, 심지어 소대원들에게도 꾸중들을 때가 많은 블레이즈이지만, 그녀만큼 로도스와 동료들을 아끼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내 캐릭터랑 안 어울린달까, 이런 건 좀 서툴러서...' 


그녀는 평소 나와 상담할 때도 많다. 부하와의 관계나, 지난 작전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냐는 등... 

침울해 할 때도 있고, 애써 밝은 척을 할 때도 있는, 순진한 일면도 있다. 



"하지만 이번 건 나도 놀랐는걸. 선물도 선물이지만...... 그 블레이즈에게 꽃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니" 


"그녀가 염국 출신이란 건 들은 적 있다. 이 꽃은 염국인들에게 유명하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구할 수 있을 만큼 흔하진 않아. 나도 용문에 와서 알았다." 


"문화란 참 심오하군. 좀 더 여러가지 알아야겠어...... 맞다, 텍사스. 장비는 잘 챙겨왔어?" 


"가져왔다. 그런데 왜 무장할 필요가 있지?" 



그녀가 검 자루를 꺼내 작동시키자 주황색 칼날이 나타났다. 이거라면 괜찮겠지. 



"음, 그리고...... 텍사스, 키가 얼마였지?" 


"161cm이다만......" 



이제 만날 그녀는 144cm이었을 터, 하지만 텍사스와는 만난 적이 없다...... 역시 안되려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대로 설명해." 


"뭐라고 해야 하나, 문화적인 문제가 있어서 말야. 훈련실에 들어가면 난 신경쓰지 말고 마음껏 대응하면 돼." 



텍사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늘어간다. 이건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 

ID카드를 인식시키자 열린 문 너머로, 오늘도 샌드백을 치며 훈련을 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묵직한 타격음이 울린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소리는 묵직함이 아닌 날렵함에서 퍼지는 것이다. 



"여어, 플린트" 



좀 떨어진 곳에서 큰 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그 리베리 소녀는 땀에 젖은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오, 박사인가. 그 옷차림은 강해보여서 좋군...... 그리고......" 



그녀가 텍사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눈빛으로 알 수 있다. 사냥감을 포착한 듯한 눈이다. 텍사스 또한 눈치를 챈 듯, 왼발을 반 걸음 뒤로 당겼다. 



"너는...... 로도스 사람인가?" 


"아니, 난 용문의 텍사스――" 



텍사스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플린트는 순식간에 그녀의 앞까지 다가와 주먹을 날렸다. 

엄청난 수준의 순발력. 내 눈에는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뜻이었나......!" 



하지만 텍사스도 그것을 따라잡고 있었다. 플린트의 주먹을 순식간에 전개시킨 오리지늄 검의 검신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대로 떨쳐내어 플린트의 몸을 튕겨내 후퇴시킨다. 

탓, 탓, 탓, 리드미컬한 플린트의 스텝. 주먹 대 검이라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녀의 아웃레인지 복싱 스타일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다시 플린트가 먼저 움직였다. 불규칙한 스텝으로 순식간에 텍사스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 지체없이 주먹을 꽂아넣는다. 크로스보우의 화살, 아니 라테라노의 수호총 급이라고 생각될 만한 수준의 속도. 주먹에 잔상까지 보였다. 

텍사스도 지지 않았다. 검신으로 그녀의 주먹을 받아내며 싸우고 있다. 허나 한 자루만으로는 힘들 거라고 판단했는지 어느새 다른 손에도 검을 꺼내 쥐고 있었다. 그녀도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파고들며, 막아내기만 했던 것도 점점 공격적인 움직임으로 바뀌어 갔다. 


서로의 기세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갈수록 충돌이 과격해지고 있다. 

이쯤이면 됐겠지. 계속 뒀다간 훈련실은 물론 나까지 말려들겠다. 



"플린트! 블레이즈한테서 선물이 왔어!" 


"――뭣, 두목이?" 



플린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춘 순간, 난 말을 걸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고 확신했다. 그녀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따라잡지 못한 탓이었다. 

이미 동작에 들어간 텍사스. 직후― 제때 가드하지 못한 플린트의 가슴팍에 날카로운 텍사스의 날아차기가 꽂혔다. 작은 리베리의 신체는 그대로 멀리 떨어진 샌드백 옆까지 날아가 떨어지고 말았다. 



"미, 미안하게 됐군...... 어느새 힘 조절하는 것도 잊어서......" 


"아니, 나도 말을 걸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아......" 



플린트는 괜찮을까.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의료부에 연락을 해야... 

그 순간 벌떡, 그녀의 상반신이 일어나더니, 이내 무릎을 딛고 완전히 일어섰다. 휙, 플린트의 비취색 눈동자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 미안 플린트. 부상은..." 


"그런 건 됐다. 블레이즈 두목이 보낸 건 뭐냐! 빨리 줘, 빨리!" 



까치발 서면서까지 내 옷깃을 잡고 펄럭펄럭 흔들지 마... 

텍사스가 사이에 끼어들며 나를 도와주었다. 



"......너, 괜찮은가?" 


"미안하군, 그만 흥분해버렸다...... 텍사스라고 했나. 훌륭한 전사군. 대련에 감사한다. 문제없다." 


"그렇다면...... 박사, 설명을 해주실까" 


"아~ 그게...... 주먹으로 대화하는 타입이야" 



그걸로 납득이 되겠냐고 말하는 듯한 텍사스의 눈빛을 애매한 웃음으로 흘려넘긴다. 아니, 좀 더 설명해달라 해도 진짜 그게 다인데... 


강한 전사― 엄밀히 말하면 플린트보다 키가 훨씬 큰, 마음껏 덤벼도 좋을 것 같은 상대였을 것이다... 그녀는 고향 아카후알라에서의 문화를 아직도 체득하고 있다. 

그녀가 공용어를 전혀 몰라 말조차 통하지 않았을 때는 훨씬 더 힘들었었다. 로도스에 온지 꽤 된 지금은 굉장히 익숙해진 편이다. 



"박사, 어서, 빨리 갖고 싶어" 


"아, 미안미안...... 플린트, 메리 크리스마스!" 


"이건...... 철쭉인가?" 



거칠게 포장지를 찢으면서도 부드럽게 개봉한 상자에서 나온 것은 분홍빛에 가까운 보랏빛이 깃든, 싱그러운 붉은 색 꽃잎을 5개 가진 꽃이 화분에 가득 피어있었다. 



"잘 알고 있는데? 철쭉이야. 여기, 상자가 하나 더 있으니까 이것도 열어봐" 


"또 있나!? 이건 꽃이 아니군...... 와, 꽃 사진이 잔뜩 있잖아" 


"도감이야. 세계 각지의 유명한 꽃이 실려있지" 



이번에도 반응이 좋다. 포장을 벗겨내고 나온 것은 양장본 도감. 그녀에게는 조금 큰 것 같기도 하다. 

도감을 펼치면 한 종류씩, 한 페이지마다 꽃 사진과 원산지, 특징 같은 정보가 비교적 쉬운 빅토리아어로 쓰여있다. 



"블레이즈가 이거라면 공부도 잘 될 거라고 하더군" 



'―그 녀석, 꽃을 좋아하잖아. 염국에서는 철쭉을 보낼 때가 많아서 말야. 그 뭐랄까, 앞으로의 여정을 축복하는? 그리고...... 아, 아냐, 아하하. 대충 그런 거야. 

그리고, 꽃에 대한 책도 골라줄 수 있을까? 이제 공용어를 말하는 건 할 수 있지만 글에는 서투르다고 들어서 말야. 걔가 좋아하는 거라면 익히기 쉽지 않을까' 


본인이 따라온 것이라지만, 블레이즈는 사르곤에서 데려온 플린트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고생하는 것에 대해 줄곧 고민해왔다. 

오퍼레이터로 추천해 일자리를 만들어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를 더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져왔다. 


철쭉은 텍사스가, 도감은 내가 구해왔다. 읽고 쓰는 것에 서투르다면, 가장 범용성이 있는 빅토리아어를 추천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두목...... 그래도 직접 주지 않다니 섭섭한걸......" 


"그렇지?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받았지만, 역시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어" 


"전해줘서 고맙다 박사, 그리고 텍사스" 


"응, 블레이즈는 지금쯤 홀에서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직접 가봐" 


"그래, 반드시.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지...... 맞아, 방에 보물을 모아놨는데......" 



중얼거리며 화분과 도감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플린트가 훈련실을 떠났다. 

모습으로 보아 알기 쉬웠다. 틀림없이 블레이즈를 찾아갈 것이다. 



"박사, 너도 흐뭇하게 웃고 있으면 어떡하나." 


"훈훈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러고보니 텍사스, 철쭉의 꽃말 알고 있어?" 


"아니" 


"나도 도감에서 봤는데...... 나라마다 다르지만, 빅토리아에서는― '부디 건강하길', 이래" 


"과연." 



그 도감에는 꽃의 꽃말도 적혀있다. 

언젠가 플린트의 공부가 진척되었을 때, 은근 표현이 서툰 한 필라인의 다정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벨소리와 함께 크리스마스 음악이 로도스 함내 여기저기에서 흐르고 있다. 

어제부터 이틀간 계속 듣고 있자니 내일도 모레도 계속 머리에 남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몇 시간 뒤면 내일이 되어버린다. 



"그새 갈아입었나, 꽤 어울렸는데." 



유리에 비치는 것을 통해 날 알아챈 듯한 텍사스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건네준 캔커피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받았다. 



"전달 일이 끝났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또 입을지도 모르지. 텍사스 너도 이미 갈아입었잖아" 


"......치마는 익숙하지 않아" 



산타 원피스 모습도 귀여웠지만, 이렇게 평소의 펭귄 로지스틱스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니 편안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녀 옆에 서서 밖을 바라본다. 용문과 맞닿은 곳은 로도스의 우현 쪽. 지금 우리가 있는 좌현 쪽 전망대에서는 드넓은 황야와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다. 



"텍사스, 네 덕에 계획을 완벽히 수행해낼 수 있었어"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오퍼레이션 산타클로스가 무사히 끝났다. 창고도 깨끗이 비워졌다. 

달성감은 아직 없다. 오히려 피로감이 밀려오고 있다. 꼬박 이틀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다닌 몸에 캔커피의 달콤함과 쓴맛, 따뜻함이 퍼진다. 



"좀 더 미리미리 준비할 걸 그랬네" 


"말했지, 수라장일 거라고. 그리고 다음에도 할 거라면 이번보다 좀 더 양이 많아질 거다. 그 상자도 좀 더 크게 만드는 게 좋을 거야" 



이번 선물 요청의 유효 수는 총 347건. 

배달하는 도중 이런 이벤트가 있는 줄 몰랐다거나, 다음에도 해달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다음에는 요구량이 두 배 가까이 될 지도 모른다. 



"내년에도 할 건가?" 


"물론이지. 막막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 선물을 준비하고, 운반하고, 전해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이거 꽤 좋구나 싶었어" 



특히 직접 건네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선물을 받았을 때의 반응을 알 수 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이쪽도 기뻐진다. 조금만 더 힘내자는 마음에 활력도 생긴다. 



"텍사스는 어땠어?" 


"나 말인가? 그러고보면......"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녀가 다시 말한다. 



"나쁘지 않았다. 배달은 늘 하는 일이지만, 준비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신선했다." 


"그랬어?" 


"그리고" 


"?" 


"지금쯤 나 이외의 멤버들은 아직도 죽을 상으로 용문을 뛰어다니고 있겠지. 나 먼저 퇴근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시기가 시기인 만큼 운송업계는 다들 바쁘다. 펭귄 로지스틱스의 다른 멤버들은 아직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도 모두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는 올 거라고 했다. 왠지 저 멀리에서 폭발음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됐건 다들 도착했을 때는 너덜너덜해져있겠군. 

쉽게 상상이 갔기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텍사스도 본인이 말해놓고 따라 웃는다. 

한바탕 웃고 나니 대화가 멈췄다. 어색한 침묵같은 게 아니다. 등 뒤로 희미하게 울리는 소란. 여기저기에서 떠들썩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퍼지고 있다. 


......이제 슬슬 건네줄 때가 된 것 같군. 



"있잖아, 텍사스" 


"뭐지" 


"메리 크리스마스." 



코트에 넣어둔 것을 꺼내 그녀에게 건넨다. 



"캔커피만 줄 거라고 생각했어?" 



녹색으로 포장된 자그마한 상자를 보며, 텍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재미있는 표정이다. 정말로 놀란 것 같다. 



"어, 아니...... 아까 말했던 것처럼... 보통 이맘때는 용문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확실히 나도 이번 일로 배달업이 힘들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지만, 현직자는 선물을 받는 걸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걸까. 

어찌됐건 서프라이즈는 제대로 된 것 같다. 



"열어봐도 괜찮겠나" 


"그럼. 열어봐." 


"그래, 그렇다면......" 



포장을 뜯으니 나온 것은 가죽 장갑이었다. 얇으면서도 튼튼하고, 잘 미끄러지지 않는 레이시언 공업의 최신 제품. 엔지니어부의 추천작. 

그냥 붉은 색은 너무 화려한 것 같았기에 약간 어두운 와인 레드 색으로 골랐다. 



"장갑은 이미 있겠지만 여분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야. 이번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특히 손을 다치기 쉬운 일이구나 싶어서." 



이번 일로 많은 물건과 상자들을 만지며 어느샌가 손이 거칠어져있음을 깨달았다. 

건조하고 딱딱하고, 예리한 것이라면 심한 경우 손가락이 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서리를 들고 옮기다 보면 관절도 아파온다. 


텍사스가 착용하는 장갑은 오픈 핑거였지만, 보통 장갑도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물치고는 너무 실용적인 게 아닐까 싶지만...... 마음에 드려나?" 



텍사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장갑에 끼워진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 해본다. 그 때마다 신품인 가죽이 뽀득뽀득 소리를 냈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다. 고마워." 


"때로는 받는 입장이 되는 것도 괜찮지?" 


"아아. 정말로 나쁘지 않아...... 기뻐." 



진심으로 기쁜 듯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온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생각 못했는데. 조금 쑥스럽기도 하다. 



"그래, 이쪽도 뭔가 보답해야겠지. 당장 준비할 수 있는 건..." 


"아냐, 그건 투표상자로 선물을 요청한 사람만 해도 되는 거야" 



이런 곳에서도 그녀의 성실함과 의리심이 나오는군. 장갑을 낀 손을 입가에 댄 채로 진지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깊게 생각 안해도 되는데...... 텍사스?" 


"......박사, 잠깐 얼굴 좀 빌리지" 


"어――" 



부드러운 향기와 함께 텍사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머리에 팔이 둘러지고, 입술에 느껴지는 생기있는 감촉. 

다른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고 허리를 훑게 했다. 보기보다도 훨씬 가녀리고 연약한 몸이었다. 

밀착한 둘의 몸은 곧 떨어지고 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촉촉한 립밤의 질감이 느껴진다. 



"테, 텍사스......?" 


"답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받아주면, 기쁘겠어"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이럴 때 해야 할 건, 말이 아닌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이번에는 내 쪽에서 맞이하러 간다. 아까보다도 조금 더 길게, 제대로 키스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내년에도 함께 해 줄래?" 



텍사스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는, 처음부터 불러주면 좋겠군. 그래... 그 볼품없는 상자를 다시 만들 때부터..." 



그녀 또한 내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힌다. 떨어지지 않도록. 

가죽 너머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따뜻함이, 어깨에 기대오는 그녀의 무게가,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이미지 출처 Lappland's Christmas gift. : arknights (reddit.com)


※ 이 소설은 원작자 「ぱう課長」님의 허가를 받고 번역하였습니다.  

※ 원문출처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6660290


주제, 캐릭터, 내용까지 모두 퍼펙트하게 내 취향이라 매우 즐겁게 번역한 작품. 난 역시 이런 게 제일 좋더라. 

오타 오역 의역 어색한 문장 지적 환영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